1.
이곳에 이사와 가장 행복 한 일 중 하나는 좋은 이웃을 만난 일이다.
작년에 우리집 바로 아래 새로 집 짓고 살고 계신 분들인데,
알고 보니 우인이 언니(남편의 풀무학교 후배)의 부모님 이라고 하여서 만나 뵌 적은 없지만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었다.
우리가 이사 오기 전 부터 집 청소, 마당에 엄청난 찹조 제거(전에 살던 분들도 보기 어려 웠던 곳에 흙이 보일 정도로) 등등
물심양면 도와 주셨는데, 요즘은 아이들과 소울메이트가 되어 주셔서 아이들도 나도 기분좋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
요즘 울림이 이음이는 우리집 마당보다 할머니 할아버지네 마당에 가서 노는걸 더 좋아하고
창문 옆 계단에 앉아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오시기를 기다렸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발견하면 곧바로 뛰어 나간다.
최근에는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서먹해 하던 삼촌과 베프가 되어 웃음 소리가 우리 집 까지 들릴 만큼 신나게 놀고
할아버지랑 해가 다 넘어가 어둑어둑 해 질때 까지 산책하다 내가 "울림아 이음아 밥먹어~!!!" 부르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야 집으로 들어오곤 한다.
울림이 이마 찢어 진 날, 할머니 할아버지는 울림이 이음이를 저렇게 안고 업고 다니셨다ㅠㅠ
그러다 최근 아랫집 할아버지와 sns 친구가 됐는데 그곳에 할아버지의 글들,
특히 울림이 이음이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는 글들을 발견 하고는 마음이 너무너무 찡- 해져서
그 후로 나와 남편은 아랫집 할아버지의 글을 매일 기다린다.
어느날 할아버지 한테 "글이 너무 좋아서 매일매일 기다린다"고 했더니 감사하게도 다음 날 부터 더 자주 올려 주시는데,
이것을 나 혼자 보기에 아깝기도 하고(자랑하고 싶기도 하고ㅋ)
이 글들을 잘 모아 뒀다가 나중에 울림이 이음이가 볼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앞으로 블로그에도 차곡차곡 옮겨 보려 한다: )
2.
<아랫집 할아버지 일기>
9.24
비가 오지 않는데도 아이들은 늘 장화를 신고 우리 집으로 건너옵니다 판판한 오솔길을 두고 마치 모험하듯이 바위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와 도랑을 건넙니다 도랑이라고 하지만 비가 와야 바위 틈으로 물이 새어나와 며칠 동안 고여 있는, 가끔 소금쟁이가 뜨고 물맴이가 맴을 돌곤 하는 곳이지요
큰아이 ‘울림’이와 둘째 ‘이음’이와 늘 엄마 등에 업혀 있는 막내 ‘우리’, 아이들이 불편해 보여 제법 두꺼운 널빤지를 잘라 나무다리를 만들었어요 마침 바위 위를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아이들이 ‘아, 다리가 생겼구나!’ 좋아할 줄 알았는데 시큰둥한 표정으로 늘 그렇듯 질퍽거리는 흙을 밟고 도랑을 건넙니다
아이들은 내가 걱정하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놀라움으로 가득한 하늘나라에 살고 있어요 오늘은 짐을 싣는 외발 수레(밀차)에 울림이와 이음이를 태우고 숲길을 세 바퀴나 돌았어요
9.29
맏이 ‘울림’이와 말을 튼 때는 아마 그 일이 있은 뒤일 거예요 사근사근 말을 잘하는 둘째 ‘이음’이와는 달리 ‘울림’이는 뭘 물어봐도 금방 대답을 하지 않거나 짧게 한 마디 하지요 ‘아침엔 뭘 먹었니?’ ‘누룽지’ 어느 날은 ‘시리얼’ 그리곤 곧 말이 끊어지지요
‘울림아, 이제 우리 집에 올 땐 혼자 와도 돼 맛있는 것 먹고 싶거나 만화영화 보고 싶을 땐 이음이한테 시켜 말하지 않아도 돼’ ‘할아버지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오늘은 길게 얘기했어요
그 일은 어제 아침에 일어났지요 울림이가 뛰어오다가 마당에 넘어졌어요 무척 아픈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어요
‘울어도 괜찮아, 울림아’ 내가 말하자 순간 깜짝 놀란 듯 보였어요 물론 울지는 않았지만요
만약 내가 ‘아이구 형이니까 잘 참는구나’ 라고 말했으면 오랫동안 말을 트지 못했을지도 모르지요
이제는 울림이도 이음이처럼 다리가 아프다며 내 등에 업혀 산길을 올라요
10.8
큰바람이 지나가고 아까시나무 이파리들이 비에 젖어 여기저기 떨어져 있습니다 대나무비로 길을 쓸고 있는데 아이들이 달려와 저희들도 하고 싶다고 조릅니다 아이들에겐 대나무비가 힘에 겨워 팽이 돌듯 동그라미를 그리며 비척거립니다
‘울림아, 우리 말타기 놀이 할까’ 가랑이 사이에 대나무비를 끼우고 울림이를 뒤에 태웁니다 금방 울림이가 앞에 타고 싶어해 자리를 바꾸어 달리다가 문득 장난이 치고 싶어 ‘이랴이랴’ 울림이 엉덩이께를 때립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말이잖아’ ‘아, 그렇구나’ 또 달리다가 잊어버린 척 엉덩이를 채찍질 합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다그닥 다그닥’ 죽마를 타고 오늘도 아이들과 숲길 한 바퀴를 돕니다
-
아이들이 이부자리에서 햄버거놀이를 합니다 나도 끼워달라고 조릅니다 맨 밑에 베개를 깔고 내가 엎드리면 그 위에 베개를 얹고 울림이가, 다시 울림이 위에 베개를 얹고 이음이가 엎드리면, 베개는 빵이 되고 나와 아이들은 고기가 됩니다
‘아이고, 할아버지 죽겠다’ 짐짓 힘든 척 몸을 뒤집으면 마구 웃으며 아이들은 바닥에 나뒹굽니다 나를 잡고 겨우 일어나 앉은 아이들은 아그작아그작 베개를 뜯어 먹는 시늉을 합니다
햄버거 빵 사이에 들어있던 고기가 빵을 뜯어먹는 셈이지요 눈물이 날 만큼 웃으며 순간 아이들과 함께 나는 동화 속으로 들어갑니다
10.14
응급실 침대에 덩그러니 남은 울림이는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칩니다 엄마는 두 손 꼭 움켜쥔 채 내내 창문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울림이는 혼자 그 무서운 시간을 잘 참아냈습니다
그제 아침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음이와 나는 아궁이 앞에 있었는데, 고양이 밥을 준다고 뛰어갔다오다가 나무 난간 모서리에 부딪쳐 넘어진 채 울고 있었습니다 왼쪽 이마에서 솟구치듯 흐르는 피가 부드러운 무명베를 다 적실 만큼 크게 다쳤습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내는 저녁까지도 가슴이 뛴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이 나보고 웃었어요 내가 보일 때까지 서있다가 내가 보이지 않자 뒤돌아갔어요’
깊게 팬 상처를 꿰매고 돌아오는 길 울림이가 내 품에 안겨 한 말입니다
10.15
‘어디 배꼽이 붙어 있나 보자’ 울림이와 이음이는 얼른 윗옷을 걷어붙이고 배꼽을 보여줍니다 아침에 만나자마자 나는 아이들 배꼽 검사를 합니다
‘옛날에는 산이 날아다녔어 몰래 날아다니다가 사람에게 들키면 그 자리에 멈춰 서지’ 엊저녁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할아버지가 재미있는 이야기 해줄까’ 하니까 아이들은 아주 신이 났습니다 빤히 얼굴을 쳐다보며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래도 안 되겠어 할아버지가 가르치던 아이들이 마구 졸라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줬는데 숨이 넘어갈 만큼 웃다가 배꼽이 빠져 큰일 날 뻔했어 그러곤 다신 재미있는 얘기를 해 달라고 하지 않았어’ ‘지금도 병원에 가면 배를 움켜쥐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너무 웃다가 배꼽이 빠진 사람들이야’
그러건 말건 아이들은 이야기를 해 달라고 보채지만 나는 끝내 해 주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걱정되어서요
오늘은 다락방에서 ‘캄펑의 개구쟁이’를 읽어 주다가 우리 아이들 키울 때 생각이 나서 아이들을 이불에 눕히고 ‘담요그네’를 태워줍니다 손자가 없는 우리에게 이웃아이들이 찾아와 우린 할머니 할아버지로 살아갑니다
10.16
뒤뜰에서 꽃밭을 만들고 있는데 울림이가 책을 들고 뛰어왔습니다 사람을 쉽게 사귀지 못하고 책을 동무 삼아 살아온 터라 책을 들고 있은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갑니다 교사로 살아가는 내내 학교에서 내게 맡긴 일도 도서관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울림이가 들고 온 책 두 권 가운데 ‘사마귀’라는 자연 이야기 책을 빌렸습니다 사마귀는 일곱 차례 허물을 벗어야 어른이 되고 첫 허물을 벗은 어린 사마귀들은 서로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뿔뿔이 흩어진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날개로 자라날 곳을 가리키는 ‘날개싹’이란 말도 처음 들었습니다
아이들과 사귀려면 아이들이 쓰는 말을 알아야 하겠지요 ‘무슨 사우루스’ 라고 부르는 공룡 이름도 익히고 만화영화에 나오는 로봇자동차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어린이집에 가야 한다고 울림이가 불려간 뒤 아침을 먹고 있는데 부엌 문이 살짝 열리고 이음이가 혼자 나타났습니다 웬 일일까 이음이는 오늘 어린이집에 가지 않나 했는데 형이 왔다갔으니까 저도 할아버지 집에 들렀다 가야 한다며 아주 잠깐 문 밖에 머물렀다 돌아갔습니다)
10. 17
환청이었을까요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간다고 갔는데 ‘할아버지’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밭 가장자리까지 달려갔어요
아무도 없고 돌아와 혼자 땅콩을 캐며 이 행복한 순간도 스쳐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루종일 아이들이 없는 윗집은 텅빈 듯, 키 큰 야윈 거인처럼 쓸쓸히 서 있어요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가 떠올라요 제목도 줄거리도 잊었지만 어슴푸레 마지막 장면이 가슴에 남아 있어요
어느 날 손자와 동무처럼 지내던 할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돌아가셔요 엄숙한 장례식이 끝나고 아이 어머니는 조용히 아이를 불러 할아버지가 남긴 선물이 있다고 이야기해요 아이는 할아버지가 쓰던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상자를 찾아 조심스레 끈을 풀고 열어봐요
상자 속은 텅비어 있고 종이 쪽지엔 ‘너 이 놈, 또 나에게 속았지롱!’ 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
‘할아버지, 어린이집 갔다 와서 놀아요’ 크게 소리치고 아이들이 차를 타고 떠난 뒤 집 안에 들어서자 ‘당신, 친구가 없어 쓸쓸하겠네’ 라며 아내가 놀립니다
요즘은 아이들 말을 배워, 갑자기 아이들이 나타날 때 ‘앗, 순간 이동’이라고 하면 아이들은 너무 좋아합니다
가끔은 아이들을 놀리려고 ‘너희들 누구니’라며 짐짓 처음 본 듯 물으면 이내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라고 되받아칩니다 그러다가 우리끼리 ‘사라져랏’이란 놀이를 만들어 놉니다 ‘사라져랏’이라고 말하면 그 동안 기억이 다 사라지는 것이지요
어제 저녁에도 산길을 한 바퀴 돌다가 울림이에게 ‘너 어디서 왔니?’ 라며 ‘사라져랏’ 놀이를 했습니다 ‘부영아파트’ 잇달아 ‘사라져랏’이라고 말하자 울림이는 ‘완주’ ‘엄마 뱃속’ ‘아기씨’라고 이어서 말합니다
다시 ‘사라져랏’이라고 말하자 울림이는 잠깐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하늘나라’라고 말하고는 곧 ‘할아버지,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와서 하늘나라로 가는 거잖아요’ 라며 자신있는 듯 크게 말합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 아이들을 키울 적에 큰아이 우인이에게 ‘우인아, 우린 이 세상에 잠깐 소풍 온 거’라고 했더니 ‘아빠, 소풍이 왜 이렇게 지루해’ 하던 우인이 말이 떠올라 혼자 배시시 웃습니다
10.18
‘당신이 뭐예요’ 아내와 이야기하다가 아내를 ‘당신’이라고 부르자 곁에 있던 이음이가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는 듯이 나무라는 말투입니다
‘그럼 뭐라고 부르지?’ 생각이 나지 않는지 이음이는 선뜻 대답을 않다가 한참 만에 ‘할머니라고 해야지’라고 말하는데 자신이 없어 보입니다
놀이에 빠져 있으면 아이들은 가끔 나를 ‘아빠’라고 부르거나, 올해 네 살인 이음이는 친구에게 하듯 거의 ‘너’라고 부릅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그랬습니다 둘러서서 얘기하다 보면 학생들은 나를 ‘삼촌’이라거나 ‘아저씨’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교사로서 위엄이라든지 근엄함이든지 하는 것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길 없어 그랬겠지만, 나는 ‘아저씨’라고 불리는 것이 참 편안했습니다
나는 ‘학교아저씨’로 사는 꿈을 꾼 적이 많습니다 아이들 책걸상을 고쳐주고 유리창이 깨지면 갈아끼워주고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이 다니는 길을 깨끗이 쓸고
차를 몰 줄 안다면 학교버스 운전기사 일을 했어도 좋았겠지요 이 가을날 아이들을 태우고 쑥부쟁이 끄덕이는 ‘모래재’ 고개 넘어 반짝이는 억새꽃 물결을 가르고 노을바다로 풍덩 뛰어드는 꿈을 그려보아요
10.19
아이들과 만든 뒤뜰 꽃밭입니다
‘할아버지 뭘 심을 거예요’
‘음, 물망초랑 꽃양귀비, 초롱꽃 그리고 수선화도 옮겨심으려고’
‘지금 같이 심어요’
‘할머니가 씨를 부어 놓았으니까 나중에 싹이 나면 우리 같이 심자’
꽃길도 내고 벽돌도 나르고 아이들과 일하다 보면 어느 새 일은 놀이가 됩니다
울림이는 윗주머니에 있던 유리구슬을 흙에 파묻습니다
‘야, 구슬이 열리겠구나’
‘할아버지, 구슬나무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네가 한 번 그려보렴’
‘아이구, 이음이는 호미나무를 심었구나’
이음이는 호미를 거꾸로 묻고 흙을 다지고 있습니다
꽃밭놀이도 싫증이 나면 우리는 언덕에 누워 있는 우산바랭이 풀줄기로 우산도 만들고 풀싸움도 하고 그러다 보면 날이 어둑어둑해집니다
울림이가 다짐하듯 묻습니다
‘할아버지, 우리 나중에 꼭 같이 심어요’
‘그럼’
‘우리가 어린이집 가면은요’
‘할아버지가 기다릴게’
고개를 숙이고 흙장난을 하던 이음이가 장난스레 또 묻습니다
‘우리가 자면은요’
‘그래도 기다려야지’
기다리다 보면 보드라운 아이들 ‘흙가슴’에도 눈부시게 빛나는 봄이 피어나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10. 20
가뭄 끝에 시원한 비바람 한 줄기가 몰고 오는 풍경이 그러할까요 아이들이 마당에 들어서면 꽃과 나무와 풀들이 수런수런 깨어나 일어서고 벌과 나비의 날개짓이 더욱 바빠져 공기의 흐름마저 바뀝니다
오늘 아침에도 울림이와 이음이가 한바탕 놀다 갔습니다 스스로 팽이가 되어 넘어질 때까지 빙그르르 돌고, 같은 그림을 맞추는 ‘메모리카드’ 놀이도 하고, ‘응애응애’ 기어다니며 ‘아기놀이’도 합니다
‘아기가 되면 뭐가 좋지’ 라고 묻자 맨먼저 나온 대답이 ‘이를 닦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어요 ‘엄마가 안아준다’ ‘엄마 젖을 먹을 수 있다’ ‘몸집이 작아 안 들키게 숨을 수 있다’ ... 이런 놀이를 하며, 오늘도 나는 살며시 샛문을 열고 아이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갑니다
10. 21
무척 신이 났는지 아이들이 지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옵니다 오늘은 지우가 아이들과 함께 ‘베이블레이드’라고 부르는 태엽팽이를 가지고 놀고, 나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들깨를 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울림이가 윗밭으로 뛰어올라 와 소리칩니다
‘할아버지, 삼촌 수술해야 하겠어요 베이블레이드와 우리 옷을 다 먹어버렸어요’
이어서 이음이와 지우가 비닐하우스 속으로 뛰어들고, 알고보니 지우가 태엽팽이와 옷을 먹는 척하며 윗옷 속으로 집어넣어 배가 불룩하게 나온 겁니다
장난은 그치지 않고 ‘이음이도 잡아먹어야지’하고 지우가 달려드니 이음이는 내 뒤로 몸을 숨기며 ‘싫어’ ‘나는 맛이 없어’ 라고 자지러질 만큼 놀랍니다
사람에게 마음을 다쳤는지 오랫동안 안으로 꼭꼭 걸어잠가 좀처럼 저를 열어 보이지 않던 지우, 울림이와 이음이가 손을 내밀어 ‘저만 알던 거인’에 나오는 동네아이들처럼, 겹겹이 둘러쌓아 둔 지우의 담장을 허물었나 봅니다
그건 그렇고 어느 틈에 슬그머니 사라진 이음이가 걱정입니다 지우 말을 그대로 믿었나 봅니다
울림이가 집으로 돌아가며, 코뚜레 놀이에 쓰던 병뚜껑과 비닐 끈 그리고 손톱만한 조약돌을 내게 맡깁니다 아이들은 내일이 되면 또 잊어버리겠지만 나는 ‘오늘’을 소중히 간직합니다
10.22
아궁이에 불을 지핍니다 마당을 씁니다 여기저기 아이들이 그어놓은 금이 남아있습니다
오늘은 지리산에서 질그릇을 빚으며 홀로 살아가는 ‘화개요 선생님’이 옵니다 천리포수목원에서 열리는 서정이 어머니 도예전을 함께 보러 가자며 이른 새벽 구례구역에서 기차를 타고 오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놀다 간 자리에는 늘, 장난감 그림책 새깃털 도토리 솔방울 조약돌 같은 것들이 남아있습니다 마당을 쓸며 문득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어떤 자국이 남아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갑니다
이 가을날엔 이슬 한 줌에 도토리 세 알 먹고 마시며 몸을 가볍게 하여 혼잣말처럼 ‘노을 지는 것이 예뻐요’ 라고 하던, 울림이와 함께 바라보던 서녘 하늘에 엷게 노을이 번질 때, 아이들이 마당에 그어놓은 금을 따라, 아이들이 뛰어오던 조붓한 도랑길을 걸어서 조용히 하늘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10.23
이음이가 울고 가는 바람에 미처 말하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내일은 먼 데서 손님이 와서 집에 없단다’고
우리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아이들이 다녀가지는 않았을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당에 남았을 아이들 발자국을 찾아봅니다
텅빈 길 위에는 가랑잎이 나뒹굴고 찬비가 흩뿌려 촉촉히 젖습니다 부옇게 흐린 하늘에 이음이가 신었던 노오란 고무신이 동동 떠있습니다
-
더 놀았으면 하는 아이들을 달래어 집에 바래다 줍니다 ‘울림아, 내일 꼭 우리 집에 놀러 와’ ‘안 오면요’ ‘그럼 할아버지가 엉엉 울거야’ 손을 잡은 채 장난스레 이야기하고 가는데, 아내 손을 잡고 뒤따라 오던 이음이가 달려와 내 손을 쥐더니 ‘할아버지 여기서 같이 살아요’ 라고 말합니다 나는 갑자기 마음이 슬퍼집니다
오늘은 마늘과 양파를 심을 밭에 거름을 내고 산길을 내려오면서, 이음이는 레몬 냄새가 난다고 했는데, 비목나무 잎을 손으로 비비어 냄새도 맡고, ‘땡꿀’이라 부르는 까마중 까맣게 익은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나는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지만 울림이와 이음이는 늘 나를 어린시절로 데려갑니다
맞선을 보고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혼인을 한 나와 아내는, 내 어릴 적 고향으로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내가 살던 집과 다니던 초등학교, 어머니와 개발(?조개)을 캐러 갔던 바닷가를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어린시절 생각이 나, 비탈길을 올라 학교 울타리에 난 개구멍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는데 아내도 괜찮다며 부드럽게 말리고 이제 그러기에는 너무 커 버려 그만두었던 기억이 납니다
10.24
‘쌔게(‘빨리’의 경상도 말) 와 봐요’ 아내가 불러서 마당을 쓸다가 성큼성큼 뛰어가니
혼잣말로 ‘왜 이래 나를 깜짝깜짝 놀래키노(놀라게 하냐)’ 하며 바라보는 밭둑에는 용담 꽃이 피어있습니다 아내가 늘 보고싶어 하는 꽃입니다 갈퀴에 할퀴어지고 낫에 아무렇게나 베어진 풀더미 속에 보랏빛 고운 등을 밝혔습니다
‘당신이 부르니까 왔지 용담도 으아리도 저기 노오란 산국도’
지리산이 불러 나도 ‘매화 꽃내 그윽한 골짜기’(악양면 매계리)에 흘러들어가서 살았고, 누구인가 애타게 손짓하여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울림이와 이음이도 여기까지 왔겠지요
10.25
사람 사이가 서먹서먹한 나는, 늘 아이들 속에 있거나 풀과 나무를 동무 삼아 지내왔어요
수업이 비는 시간엔 학교 뜰을 거닐거나 울타리 너머 논길에 쭈그려앉아 봄흙 냄새를 맡거나 풀꽃들을 찬찬히 살펴보았어요
순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던, 내 발길을 붙잡은 타래란도 처음 만났고, 메꽃과 큰메꽃은 꽃의 크기뿐만 아니라 잎의 생김새도 다르고, 흰제비꽃이 보랏빛 제비꽃보다 꽃내가 짙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밭농사를 지으면서부터 풀꽃들과는 사이가 멀어졌어요 언덕에 흐드러진 쇠별꽃 무리는 뜯기고, 밭에 날아와앉은 꽃마리 괭이밥 주름잎 지칭개 봄까치꽃 광대풀 들은 뽑히고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어 오지 않았어요
어느 새 도랑에 여울지는 여뀌나 고마리와도 사이가 뜸해졌는데, 호기심으로 가득 찬 울림이 이음이와 놀면서 풀꽃들이 속삭이는 소리도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강아지풀로 콧수염을 만들어 붙이고 질경이풀로 제기도 차고 옷에 붙는 도꼬마리 도깨비풀 쇠무릎지기 풀씨 이름도 가르쳐 주고 봄이 오면 찔레 새 순도 꺾어먹고 냉이꽃 마른 줄기로 꽃종도 만들어 차락차락 흔들며 놀겠지요
10.26
‘오늘 아침엔 뭘 먹었어’
‘시리얼, 빵 그리고 으음 없어를 먹었어’ 울림이가 제법 장난말도 칩니다
‘어떤 빵인데’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지 조금 기다렸다가
‘어, 할아버지도 알잖아 구름빵, 구름빵처럼 푹신한’
‘그랬구나’ 나도 알고 있습니다 지난 번 울림이이음이 엄마가 빌려준 그림책 ‘구름빵’을 읽었거든요
‘구름빵’은 푸근히 안겨오는 빛그림(사진)을 곁들인, 아이의 마음과 엄마의 마음을 이어주는 하늘의 무지개 같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길 가운데 하나는 같은 책을 읽는 것입니다
울림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준다며 ‘도깨비를 빨아 버린 우리 엄마’ 라는 동화를 들려주는데 , 아무리 귀를 기울여 들어도 이야기 흐름이 자연스레 이어지지 않아 그저 고개만 끄덕인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울림이가 책을 빌려줘 읽고 나서는 동화 속 이야기 몇 마디만 던지더라도 서로 알아듣고는 신나게 떠들며 웃어댔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지만, 잠자리에서는 늘 팔베개를 하고는 동화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이 쓰신 ‘황소아저씨’는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여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들려 줬는데, 어느 날 슬그머니 이야기 속으로 우리 아이들을 등장시키자 두근거리는 가슴을 꼭 누르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던 지우 모습이 떠오릅니다
-
가운데 금을 그어 놓고, 저 쪽은 ‘만화영화 속 세상’ 이 쪽은 ‘만화영화 밖 세상’으로 나눠 우리는 ‘만화영화 놀이’를 합니다
나는 흙바닥에 퍼질러 앉아 만화영화 속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구경합니다
한참 놀다가는 저희들도 모르게 이 쪽으로 건너와 공룡자동차를 가져갑니다
‘야, 울림이 너 투명인간이냐’
소리치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이 쪽 세상과 저 쪽 세상을 넘나들며 놉니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금을 넘어가, 싸우다 넘어진 이음이를 구출해 이 쪽 세상으로 건너옵니다
금은 굳어지고 높은 담이 되어 더는 두 세상을 넘나들지 못할 때 우리는 어른이 됩니다
어젯밤에는 울림이이음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서 오랫동안 놀다갔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할아버지 황금성 선생님 노랫소리는 대청마루에 가득 울려 퍼집니다 선생님은 이야기보다 더 많이 노래를 풀어 놓고 갔습니다
할머니 계순옥 선생님과 할아버지가 함께 부른 ‘옹달샘’ 맑은 물에서 마음껏 뛰놀며 울림이와 이음이 막내 ‘우리’는 곱디곱게 커가고 있습니다
3.
요즘 아이들을 보면서 작고 어리고 순수한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반짝반짝 빛나는지를 느낀다.
히루 하루가 전쟁 같고, 아이들에게 소리치고 뒤돌아 후회 하는 순간도 많이 있지만
아이들이 이렇게 빛나는 순간들을 함께 할 수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봐주는 분들과 이웃하며 지내는 요즘에 감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