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원

 

 

나는 내 일기장의 글을 좋아한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생각으로 쓴 글, 아무도 볼 수 없는 글을 나 혼자 보는 게 좋다. 나는 내가 쓴 일기를 읽기 위해 쓰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꽤 오랜 시간 일기는 나에게 숙제였다. 진짜 숙제였던 어린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항상 시작만 하고 10장을 채 넘기지 못한 일기장이 수두룩하다. 그 일기장들은 가득한 뒷장의 공백을 남겨 놓고 묵혀지거나 버려졌다. 그때는 쓰여진 일기장 보다 매일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고 그래서 내 일기장은 항상 남아 있는 숙제처럼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

 

지금은 쓰여진 일기장이 갖고 싶어 일기를 쓴다. 내가 처음으로 한 권의 일기장을 다 쓴 것은 작년 말이다. 제 작년 새해부터 쓰던 일기장이니 2년 가까이 쓰고야 다 채웠다. 나는 세상에 많은 일들이 얼떨결에 일어난다고 생각하는데 이 일기를 처음 쓰게 된 것도 그랬다. 원래는 아이들 일기장만 세 개 사려고 했다. 그런데 아이들만 쓰게 하면 어린 시절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숙제가 되어 버릴 것 같아 함께 쓰려고 내 것도 같이 산 것이다. 나는 어른이니까 두 배로 큰 것을 샀다.(나는 이럴 때만 어른 행세를 한다) 그러다 얼떨결에 내가 먼저 한 권을 다 썼다. 다음 일기장은 자축의 의미로 비싸고 좋은 노트를 샀다. 작년 말부터 지금까지 1년 정도 썼고 반쯤 썼다.

 

아이들의 일기장은 아직 절반을 채우지 못했다. 그래도 숙제가 되지 않게 하겠다던 나의 다짐도 반쯤은 성공한 셈이다. 아이들은 가끔 재미로 일기를 쓴다. 아이들도 나처럼 자기가 써둔 옛날 일기를 보면서 좋아한다. 나는 오타로 가득한 아이들의 일기를 좋아한다. 바르지 못한 아이들의 선을 사랑한다. 아직 글자를 쓰지 못하는 막내 ‘우리’의 일기는 '우리'의 말을 내가 받아 적어 준다. 나는 일부러 문법이나 앞 뒤 말이 맞지 않더라도 아이가 한 말을 그대로 적는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어제 저녁에 반딧불이 잡으러 우리 가족 다랑 아랫집이랑 잡으러 갔는데 내일 보니까 반딧불이가 집에 또 있었다. 그리고 반딧불이는 나뭇가지 옆에 나뭇가지가 생기기 전에 풀 거기를 좋아한다. 거기에다가 우리 집을 좋아한다. ‘우리’도 반딧불이 좋다. 아주아주아주.” (23.9.10)

 

아이들도 나처럼 자기 일기장을 보고 또 본다. 언젠가 아이들의 일기장이 다 차면 작은 책을 만들어 주고 싶다. 

 

우리 집에는 일기로 된 에세이집이 여러 권 있는데 지금 떠오르는 것은 최승자 시인과 김환기, 김향안, 윤형근 화백들의 책이다. 이 책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음이 잔잔해지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조마조마하다. 평범한 듯 보이는 매일이 치열한 삶의 순간들이고 나약한 인간의 모순에 힘없이 부딪히면서도 나아가려는 우직함을 볼 수 있다. 이들의 책을 읽다 주변을 돌아보면 사실 모든 책들이 개인의 일기장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일기장도 언젠가 책이 되어 세상에 나올 수 있을까.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이라는 뜻을 지닌 ‘일기’가 이토록 은밀하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한 개인의 삶이 그만큼 특별하고 일기를 쓰며 더욱 특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일기를 쓴다. 쓰면서 빛나는 내 삶을 보기 위해서.(23.12.9)

 

 

© 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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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인

 

 

  족구팀 아저씨들과 미니 경기를 하면서였다. 발제간이 좋은 아저씨들 이었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여성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몸이 닿는 것을 조심스러워 했다. 나는 아저씨들의 그런 심리를 이용해 더 열심히 달려들었다. 당황한 아저씨들은 나에게 공을 빼앗기거나 자신의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뭔가 게임으로 치자면 나에게 새로운 아이템 하나가 생긴 것 같았다. 조금 치사한 방법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왠지 으쓱한 기분으로 경기를 마치고 나오는데 코치님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해원, 이제 보니 아주 쌈닭이었네요.”

 

숨겨왔던 나의 본능이 자극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자주 싸우고 제멋대로였던 어린이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면서는 좀처럼 싸울 일이 없었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잘 싸워주는 남편이 항상 옆에 있었기 때문에 밖에서 내 본성을 들어 낼만한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간혹(아니, 자주) 아이들에게만 숨어있던 거친 본성이 들어났는데, 그럴 때는 매번 부끄러웠고 언제나 후회했다. 그러나 축구를 하며 들어난 나의 쌈닭 본능은 부끄럽기보다는 기뻤다. ‘그래, 축구를 하려면 쌈닭 정도는 돼야지!’ 하는 비장한 마음도 생겼다.

 

  하지만 몸빵으로만 대적하기엔 내 몸은 빈약하기 그지없기 때문에, 요즘은 팔 쓰는 법에 대해 생각한다. 야수는 못 되더라도 쌈닭의 본능으로 재빠르게 상대를 낚아채고 먼저 어깨를 집어넣으며 치사하지 않은 방법으로, 하나의 축구 기술로서 팔을 쓰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언젠가 또 코치님이 한 말이 떠오른다.

 

“축구에서 팔을 잘 쓰는 사람이 되면 진정한 고수의 반열에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발로 하는 축구에 왠 팔?’이란 생각에 의아했는데, 이제야 그 말 뜻을 알겠다. 하면 할수록 축구가 발로만 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의 모든 부분을 잘 쓸 줄 알아야 진정한 쌈닭 축구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 간다. 

 

  요즘은 날이 많이 더워져 운동장을 한 바퀴만 뛰어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잠시 쉬며 먹는 미지근한 물이 그렇게 달 수가 없다. 마지막 훈련으로 미니 경기를 할 때 팀 구분을 위해 망사 조끼를 입는데, 그 조끼를 받아 들 때면 입기는커녕 그 망사 조끼만 입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아, 웃통 벗고 싶다.’ 어젠가 인터넷에서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이 완전히 뒤바뀐 세상을 표현한 프랑스 단막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오래 전에 본거라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선명하게 남아있는 한 장면이 있다. 조깅을 하는 장면이었는데, 환한 대낮에 한 여성이 윗통을 다 벗고 뛰어가는 모습. 출렁이는 가슴을 그대로 노출한 채 누구보다 가볍게 뛰어가는 그 여성의 모습은 시각적으로 느끼는 이질감과는 달리 보는 내 마음에는 굉장한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요즘 같은 날씨에 훈련을 하다보면 그때 그 여성이 자주 떠오른다. 남자들은 더우면 웃통 잘만 벗던데. 왜 나는 벗으면 안 되는지 심술이 나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 ‘웃통 벗고 싶다.’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면 코치님은 잠시 당황한다. 그런 코치님을 뒤로 한 채 나는 옆에 있는 친구들에게 나중에 우리끼리 한밤중에 모여 웃통 벗고 축구 한번 하자며 낄낄댔다.

 

  올해는 몇 년 째 실패중인 ‘비키니입고 수영하기’ 대신 ‘브라탑을 입고 축구하기’를 목표로 삼았다. 며칠 전 감격하며 봤던 ‘사이렌’이라는 프로그램에 브라탑을 입고 땀 흘리던 언니들의 모습에 반해버렸기 때문이다. 많은 면에서 감동과 전율을 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특히 그녀들의 근육질 몸과 그 몸을 이용하는 능력에 감탄했다. 팔씨름 결승을 앞두고 “옛날에 팔씨름 대회에서 일등을 했는데 상대 애 팔뼈가 부러졌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소방언니를 볼 때는 울컥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여자가 팔씨름을 잘하고, 삽질을 잘하고, 덩치가 커서 각광 받는 이 순간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곡절들이 있었을까. ‘사내놈 같이’라는 수식어 뒤에 얼마나 많은 놀림과 수모를 겪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시간들을 끌어안고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 하는 사이렌 언니들의 모습에, 그리고 그렇게 다져진 근육질 몸매에 크게 감동했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에서 김혼비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사실 그저 축구가 좋아서 할 뿐인데 얼결에 운동이 된 거지만, 또 생각해 보면 모든 운동이 그런 식이다. 사르트르의 ‘앙가주망’개념을 살짝 빌려 표현한다면, 어쩌다 보니 생긴 ‘자연적인 연루’가 참여적인 연루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축구가 좋아서 할 뿐인데, 개인적인 불쾌함을 견디지 못해 맞섰을 뿐인데, 체육 대회에 나가지 못해 속상해서 상의했을 뿐인데, 그냥 보이는 대로 엄마를 그려 갔을 뿐인데.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을 뿐인데. 사회가 욕망을 억눌러서 생겨나는 이런 작은 ‘뿐’들이 모여 운동이 되고 파도처럼 밀려가며 선을 조금씩 지워 갈 것이다.”

 

  내가 축구 글쓰기를 하며 나도 모르게 ‘투쟁심리’가 생긴다는 말을 종종 써왔는데, 나도 모르게 생긴 이 마음의 이유도 비슷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나는 그저 축구가 좋아서 할 뿐이었는데. 축구를 하며 한 계단 성장 하는 것이 나의 한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한계를 함께 뛰어 넘는다고 느껴 왔던 것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당연한 것이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그 당연함을 누리지 못하는 쪽의 대부분이 여성들의 몫이라는 사실이 자주 서럽지만 또 한편 그것을 넘어설 때 마다 경계와 선을 지워가는 모습이 너무너무 멋지다. ‘누구 같이’가 아니라 그저 ‘나 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이 행위들이 그 자체만으로 운동이 된다는 사실이 서러웠던 내 마음을 조금은 다독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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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UCGUY7pdh38

[온스테이지] 김일두-문제없어요

 

 

나이가드니 처음에 대한 기억이 자주 희미해 진다.

 

내가 김일두 아저씨를 처음 좋아했던 때는 언제 였을까. 이 기억 역시 희미해 졌지만 어렴풋 떠올려 보면 '문제없어요'를 부를 때쯤 이었던 것 같다. 단칸방에 덩그러니 기타 하나 들고 앉아 잔잔한 멜로디와는 대조적으로 강렬한 가사를 읊으며 노래 하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찾아보니 그게 벌써 10년 전이다. 오랜만에 그 영상을 보는데 그때 덩그러니 마루에 앉아 모유수유를 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기타를 들고 어딘지 쓸쓸하게 노래하는 일두 아저씨의 모습과 울림이를 안고 어딘지 쓸쓸하게 모유수유를 하던 내 모습이 닮아 보인다. '엄마들 보다 아름다운 당신'아 아니라 '엄마들 다음으로 아름다운 당신'이라고 말하던 그의 가사에 나는 이미 위로 받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후에 나온 일두 아저씨의 음악을 들으면서도 나는 울고 웃으며 자주 위로 받았다.

 

그랬던 김일두 아저씨가 지난해 옆 마을에서 공연 했다. 저녁시간, 특히 아이들의 취침시간에 겹치는 일정은 최대한 참여하지 않는 것이 우리집의 암묵적 규칙인데 그것을 과감히 깨고 다섯 식구 모두가 (우리기준)한밤중에 공연을 보러 갔다. 공연을 보러 가기 전 신나게 글라스테코를 하던 아이들을 이용해 작은 선물도 하나 만들어 갔다. 이른바 '용맹정진 열쇠고리'. 처음 본 일두 아저씨의 공연은 눈물을 찔끔 흘릴 만큼 좋았고 특히 노래가 시작한지도 모르고 듣고 있다 가슴에 사무쳐버린 '머무르는 별빛'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지난주에 일두 아저씨 인스타그램 피드에 그때 주었던 용맹정진 열쇠고리 사진이 올라왔다. '충남에서 만난 꼬마친구에게 받은 선물' 이라는 소개와 함께. 내가 nell 베이스 정훈오빠를 쫓아 다니던 시절, 그 오빠가 내가 선물한 모자를 쓰고 보이는 라디오에 나왔을 때 만큼이나 가슴이 뛰었다. 아이들에게 보여주니 아이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이음이가 자기도 답글을 쓰고 싶다고 해서 내 계정을 빌려 댓글을 썼다.

 

"김일두 아저씨 저가 준 그 고리 야광 되는거 알아요? 언젠가 또 만나요🎸-예산에서 만난 꼬마친구가"

그런데 그 댓글에 일두 아저씨의 답글이 다시 달렸다.

"야광 이었어? 몰랐어. / 알려주어 고마와 우리 다시 만나면 짜장면 먹자 건강하게 잘 지내."

 

이음이는 우리 형이 짜장면을 좋아하는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 하다가 하지만 자신은 볶음밥을 먹을 것이라고 야무지게 다짐도 하면서 한참을 떠들다 잠들었다.

 

 

 

 

오늘은 며칠 전에 구입한 김일두X하언진 <34:03> LP 를 꺼냈다. 나는 이 앨범에 '해당화'와 '가난한 사람들'을 가장 좋아 한다.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가도 정확히하게 와닿아버리는 이 요상한 음악을 나는 그마음 그대로 오래오래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일두 아저씨의 음악을 들을 때 마다 언젠가 다시 만나 아이들과 나란히 짜장면 먹는 모습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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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반FC

 

내가 축구를 시작하기 전까지 나에게 ‘운동장에 나와 같이 공 차자’고 물어본 사람은 없었다. 나 스스로도 밖으로 나가 공은커녕 달리기조차 해 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새벽에 일어나 축구를 보면서도 은연중에 ‘축구는 보는 거지 뛰는 건 아니야’라며 선을 그었던 것 같다. 아이를 낳고부터 내 이름 앞에 붙는 ‘애 엄마’이라는 수식어는 실로 고귀하면서도 무거워서 물리적으로나 인식적으로 수많은 경계를 만든다. 그 경계는 잔가지를 쳐주고 나아갈 길을 명확하게 보여 주는 대신 ‘영역 밖의 일’에 쉽게 겁을 먹게 한다. 그래서 내가 직접 피치 위를 달리는 모습은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나를 TV 밖으로 이끌어 준건 매일 같이 뛰자 말하던 우리 집 어린이들도 아니고, 매 경기 골을 넣고 있던 손흥민 선수도 아니고, 골때녀 같은 TV프로그램이 생겼다는 소식도 아닌 내가 알고 있던 동네 언니들이 여자 축구팀에 나가 뛰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 언니들은 나보다 나이도 많고 심지어 애도 많은 언니들이었다. 속으로 그어놓은 경계선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요동쳤다. 내가 뛰진 않더라도 그 언니들이 뛰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축구를 하러 운동장에 나갔다.

 

내가 지금 뛰고 있는 팀 ‘반반FC’는 면단위 작은 마을에 생겨난 여성축구팀이다. 2021년 여름부터 시작했으니 올해로 2년쯤 되어간다. 우리 팀의 가장 큰 특징은 팀 훈련도 팀원들의 생활 반경도 모두 30분 안팎에서 해결된다는 거다. 주 경쟁 상대들도 대부분 비슷한 생활반경 안에 있는 동네사람들이다. 같은 동네 고등학교 여자축구부와 초등학교 축구부, 그리고 족구팀 아저씨들이다. 이들과의 매치가 우리 팀의 가장 큰 행사 이자 재미다. 이렇게 동네사람들과 하는 축구는 경기 후 공공장소에서 마주쳤을 때 주고받는 인사가 특징적인데. 뜨거운 경기를 했을 때와 차갑게 식어 있는 일상 사이의 커다란 갭 속에서 주고받는 인사란. 정말 뻘쭘하고 어색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나는 내 자식의 친구와도 치고받으며 경기하고 있는 실정이니 그들과 마주쳤을 때 그 복잡한 미묘한 심경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 팀 이름 ‘반반FC’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사실 공식적인 의미를 두고 있진 않다. 한창 팀 이름을 정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몇 주 동안 뚜렷한 이름이 정해지지 않아 고민하고 있던 차에 팀원 중 한 사람(조조)이 강아지를 데려 왔고 그 강아지 이름이 ‘반반’이었다. 그 이름을 듣고 코치님이 “우리 팀 이름도 ‘반반’으로 하는 거 어때요?”라는 제안을 했고 다들 별 의견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팀 이름이 정해졌다. 만약 그때 온 강아지 이름이 ‘바둑이’라던가 ‘방울이’였다면 바둑이FC 나 방울이FC가 됐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름을 정한 과정도 너무 우리다워서 웃음이 난다. 그래도 코치님은 남의 집 강아지 이름을 가져온 것이 마음에 좀 걸렸는지 그날 밤 이런 문자를 남겼다.

 

 

읽고 나니 왜 반반이 되었는지는 더욱 모르겠다. 하지만 코치님 특유의 화법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또 웃음이 났다. 우리 코치님에게는 두 가지 화법이 있다. 하나는 ‘무슨 말인지 대략은 알겠지만 정확히는 모르겠는’ 화법이고, 또 하나는 ‘장황하게 이야기하지만 무슨 말 인지 모르겠는’ 화법이다. 어찌 됐든 말이 끝나면 머리 위에 물음표 하나가 생기는 화법인데, 요즘 팀원들 사이에서는 이런 대화법을 코치님의 이름을 따와 ‘민웅화법’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마지막에 남는 그 물음표 때문에 재차 물어서 확인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얼추 익숙해진 팀원들이 대신 요약정리를 해주거나 대충 알아듣고 알아서 움직인다.

 

별다른 의미 없이 만들어진 이름이지만 나는 속으로 혼자만의 의미를 만들어 두었다. ‘일상 반 축구 반’ 일상만 유지하다 축구를 잊어버리거나 축구에만 빠져 일상을 해치지 않고 반반씩 균형을 잘 이루는 것. 그것이 내가 축구인(?)이자 생활인으로서 축구와 나를 오래오래 사랑하며 지낼 수 있는 힘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농 반X라는 말이 있듯이 나에게는 이제 반축 반X의 삶이 시작된 샘이다.

 

그러나 내가 그 균형을 잘 이루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올해는 축구와 글쓰기만 하겠어!"라고 다짐 하고는 일주일에 세 번 축구를 가고 한 달에 한 번 축구 글쓰기 모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당찬 포부와는 달리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는 이 상황이 좀 우습다. 준비하던 대회가 끝나 이제 다시 일주일에 한 번 축구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축구하는 날은 나에게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다. 무엇보다 같이 훈련하고 같이 기뻐하고 같이 분해하던 그 순간들이 쌓여 우정이 싹트고 추억이 만들어졌다. ‘이제 공동체는 질렸어’ ‘더 이상 관계 속에서 나를 들어내기 싫어’ ‘혼자가 최고야’하며 숨으려고만 했던 내가 ‘우리는 함께여야 해’ ‘우리 팀이 최고야’를 외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정확하고 섬세한 관계는 아니지만 둥글고 뭉툭한 관계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 우정에 기대어 부끄러운 플레이를 하고 부끄러운 인성을 들켜 머리를 쥐어뜯어도 발걸음은 다시 운동장을 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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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바람

 

 

  운동장에 공이 놓여 있으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나에게 이 공을 뺏어보라며 발제간을 부리셨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달려들었지만 그 공을 한 번도 뺏어 본 적이 없다. 몇 번 더 달려들다 약이 올라 다른 데로 가버리곤 했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축구를 잘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저 어른과 아이의 체급 차이에서 나오는 차이라고 생각했을 뿐. 아버지가 실제로 운동경기를 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아버지 삶에서 운동이란 몸을 쓰며 즐기는 운동보다 부도덕한 사회와 싸우는 운동이 더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축구 실력을 알게 된 건 고등학생이 되고서다. 나는 고등학교를 전교생이 6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시골 학교에 다녔다. 아버지는 그 학교에 농사 선생님 이셨다. 우리 반은 유독 남자 애들의 비율이 높았는데 그 친구들은 대부분 축구에 미쳐 있었다. 수업시간 외 모든 시간에 축구를 했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어느 날 학교에서 풋살 리그를 만들었다. 3, 4팀 정도가 만들어졌고 워낙 작은 학교라 선생님들도 함께 했다. 그 경기들을 보며 아버지의 훌륭한 축구 실력을 알게 됐다. 친구들은 아버지를 그 당시 유명했던 해외 축구 선수 '이니에스타'의 이름을 따와 '이니광훈'이라고 불렀다. 리그의 열기는 계속해서 달아올라 팀끼리 유니폼을 주문하고 해설진이 생겨나고 경기도 많아졌다. 나는 그 열기와 분위기가 좋아 자진 매니저 신청을 했다. 우리 팀 경기가 있을 때 주변에 앉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응원하고 선수들에게 물을 떠줬다. 물까지 떠 준 건 자진 수발러가 된 것 같아 이제와 좀 수치스럽기도 한데, 어쨌든 매일 빠짐없이 나가 최우수 매니저 상도 받았다. 지금 와 생각하면 ‘그때 왜 직접 경기를 뛸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후에 여자 축구 리그도 생겨났지만 그때는 고3 이기도 했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건 내 영역이 아니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생각하는 나, 나아가 여성에 대한 영역을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있었다면 이제와 이렇게 축구와 사랑에 빠지며 느끼는 억울함은 덜 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학에 가서는 나도 아버지처럼 몸으로 즐기는 운동보다 사회와 싸우는 운동에 더 관심이 많았다. 스포츠도 전략을 잘 세워야 경기를 잘 치룰 수 있듯 사회와 어떻게 잘 싸울 수 있을지 배우기 위해 사회학과에 갔다. 그러나 어딘가 잘못된 전략을 짰는지 운동이 아닌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일찍 결혼을 하고 말았다. 결혼 후엔 집안일과 육아로 나름 잔 근육을 키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만져 본 내 팔다리에는 흐물대는 물살뿐이었다.

 

  밖으로 나가 동네 사람들과 축구를 하게 된 건 재작년 여름. 방구석 축덕으로 산지 1년이 좀 지났을 무렵이었다. 티비로 보는 축구와 내가 직접 뛰는 축구는 차원이 달랐다. 첫 훈련을 받자마자 그동안 못 한다고 욕했던 모든 축구선수들에게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티비에 나오는 축구 선수들은 잘 하건 못 하건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존경심이 생겨났다. 첫 훈련 후 미니 경기를 하는데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폐가 터질 것 같이 아팠다. 그런데도 집에 돌아오는 길은 개운했다.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혼자 배우고 혼자 하는 것이 더 재밌었는데 지금은 나만 잘하는 것보다 함께 잘하는 게 더 재밌다. 자기가 뛰는 자리를 잘 지키고 주변 친구들과 텔레파시를 주고받으며 패스를 잘 찔러 주었을 때의 짜릿함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매주 축구를 하러 운동장으로 나간 지 벌써 1년 반이 넘었다. 시간에 비해 실력은 너무 미미하게 늘었으나 그래도 성실히 나갔다는 것에 뿌듯하다. 근면함으로 어쩌다 보니 주장 완장도 얻었다. 괜히 부끄러워 스스로 바지 주장이라 칭하지만 꽤나 큰 자부심이다. 다른 동네 사는 친구들에게 은근슬쩍 자랑하기도 좋다. "나 우리 동네 축구부 주장이야"라고 말하는 내 자신이 좀 멋지다. 여전히 시합을 하고 난 뒤나 훈련을 하면서 스스로 부족한 모습(실력 적으로나 인성 적으로)을 마주 할 때면 '이런 내가 계속 주장을 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지만 그만큼 우리 팀에 대한 애정도 날로 늘어간다.

 

  이제 할머니가 되어서도 축구를 하는 게 꿈이다. 할아버지가 된 아버지도 아직 발제간이 훌륭하신걸 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이제는 아버지의 발제간에 속지 않고 한 번쯤 공을 뺏을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언젠가 이니광훈을 제치는 그날을 위해 이번 주 훈련도 열심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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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설에 아버지 환갑 잔치를 했다.
코로나 때문에 가족들 끼리만 옹기종기 모여 했다.

 

 

 

 

이것저것 계획 했던 것에 비해 못 한 것도 많았지만 그저 우리 식대로 즐겁게 마무리 한 것 같다.
없으면 없는대로,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돌아보니 이 마음가짐이 그동안 아버지가 우리에게 보여준 삶의 태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축하영상_열악한 편집 환경으로 재생 후 검은 화면이 10초가 지난 후 시작 됩니다ㅠ)

 

가장 기억에 남는 뭉클한 순간은, 사위 바람과 아내 정남이 힘을 합쳐 아버지께 노래를 선물 해 주었던 순간이었다.

바람의 연주와 정남의 목소리로 선물한 노래는 김민기의 강변에서.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 낯익은 얼굴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온다.’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늘어진 어깨로, 퀭한 두 눈으로' 공장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순이를 기다리는 애달픈 노래다. 엄마는 공장일 마치고 아버지가 공장에서 돌아오길 기다리며 이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이미 연습 할 때부터 엄마는 물론 옆에서 준비하던 딸들까지 다 눈물 바다였는데, 본 공연에서는 아버지까지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온 가족이 눈물 바다가 되었다. 그래도 끝까지 불러 주고 싶다는 엄마는 몇 번의 울컥임을 뒤로 삼키고 씩씩하고 멋지게 불러 주었다. 여러 곡절을 건너 무심히 흘러 온 세월,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 한 서로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담긴 눈물들 이었다. 

 

 

(감동적인 정남씨와 바람씨의 공연)

 

으리으리 하진 않아도 무척이나 따뜻했던 노광훈의 멋진 인생 60! 
엄마도 아부지도 칠순 팔순 구순 백순, 혹은 그 이상까지 오래오래 함께 따뜻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들의 뒷 모습이 궁금하다면 아래 글자를 눌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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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

기록하기

2021. 8. 19. 23:07 일기/해원 일기

1.

 

지난주 부터 2주간 '콜링북스의줌콜링'이라는 기록 모임을 하고 있다.

매일매일을 기록 하는 연습 이랄까. 함께 신청한 몇 명의 사람들과 매일매일을 기록하고 함께 공유한다.

이 모임 덕에 며칠 전 부터 5년 다이어리 라는 것도 쓰기 시작 했다. 

 

그렇게 쓰고 있는 글을 sns에 종종 올리곤 했는데, 남편이 어제 반쯤 취한 소리로 하나에 플렛폼에 쌓아 두는 것이 중요하고, 나는 이 블로그를 통해 아이덴티티를 쌓아 가야 한다며 sns에 올리듯 블로그에 올리라고 잔소리 한다.(부부 사이에 조언은 잔소리로 들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숙명)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 척 했지만 마음에 남아 어떻게든 다시 여기에 쌓아 보려 한다.

 

이번 기록모임을 하며 얻은 가장 큰 교훈은 생각하고 따지기 전에 뭐라도 쓰고 있다 보면 무언가 쓰여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곳에도 언제부터 어떤 것을 어떻게 올릴 것인가 생각 하다보면 귀찮아지고 때를 노치고 만다.

처음 쓴 것 부터 옮기려면 생각이 많아 지기 때문에... 일단 어제 썼던 글 부터 공유.

 

 

2.

8.18 황울림

 

울림 : 이음아,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이음 : 음~ 몰라. 생각 안 해 봤는데

울림 : 나는 옛날부터 되고 싶은 거 있는데

이음 : 뭔데?

울림 : 평민. 누워서 만화 보고 배고플 때 짜장면 먹고 싶어

 

오늘 기억에 남은 울림이와 이음이의 대화다. '평민'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알았으며, '누워서 만화 보고 배고플 때 짜장면 먹는 것'이 평민이라 생각하는 울림이의 말이 너무 황울림스러워서 웃음이 났다. 언젠가 울림이 교실에 자신의 꿈을 적어 두는 코너가 있었는데 거기에 울림이는 '그냥 사람'이라고 써 놓았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울림이의 그런 말들에 내심 안도 했다. 울림이는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구나. 요즘 말도 안 듣고 얄밉게 따져대는 울림이를 조금 더 이해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자주 아이들이 '착하기만 한 아이로 크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 한다. 그러면서도 결국 내가 어른이라는 이유로, 엄마라는 이유로 아이들의 착함을 강요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나, 생각하며 오늘도 반성했다. 

집중하면 인상쓰는 울림이 (Feat.바람)

막내동생 장난감 변신 시켜주는 멋진 형아. 어쩌다 한 번 나오는 울림이의 의젓한 모습.

 

3.

오늘의 기록은 아직 미완성.

오늘도 뭐라도 쓰다보면 무언가 적혀 있겠지.

 

(나 글 쓰는 사진 찍은 거 있으면 보내 달라고 하니까 요구사항도 계절도 맞지 않는 이런 사진 보내주는 내 남편...^^ 최고최고!^^)

:

1.

Art Of Debut. 공연이 끝나고 어떻게 정리 해야 하나, 하다가 일주일이 지났다.

그 사이 새로운 Art Of Debut의 구상을 시작 하게 되었고, 그렇게 이번 공연이 끝이 아닌 시작이 되었다.

 

첫 시작이 그랬듯 앞으로 벌어질 일들도 어떻게 흘러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번 공연이 나에게 준 한가지 확신은, 마음과 마음이 닿은 곳의 순수는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 하루하루 마음을 다 하며 살아 갈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들이 닿는 순간 다시 또 함께 할 것이다. 

 

 

2.

첫번째 'art of debut_조동연 Piano 조대연 Classial Guitar 클래식 리사이틀'(아트 오브 데뷔: 조동연 피아니스트 데뷔 with 클래식기타리스트 조대연)의 기록

https://canyon-nymphea-30b.notion.site/Art-of-Debut-d9fcab2d58e24311bec85f20027d9db8

 

Art of Debut

조동연 piano 조대연 classical guitar 클래식 리사이틀

canyon-nymphea-30b.notion.site

 

어쩌면 시작이었을 지 모르는 어느날. 

 

5. 26/ 두 번째 회의. 동연, 대연이네 집 첫 집 방문

 

5.31/ 홍주문화 회관 답사, 세번째 회의.

동연이의 피아노

 

6.9/ 네 번째 회의

 

6.14/ 준표와 포스터 촬영

 

6.25/ 다섯번째 회의

 

6.28/ 여섯번째 회의, 지원이랑 포스터 작업, 중간 회식(준한)

(나에게 있는 사진이 애들이랑 논 사진 밖에 없는 것 일뿐, 회의하고 포스터 만들고 중요한 자리였음(강조))

 

7.1/ 책자와 포스터 도착

art of debut 책자.pdf
1.38MB

 

7.9/ 홍주문화 회관 방문, 피아노 조율, 창현쌤과 음향 정검

 

7.10/ art of debut, 공연날

(준표의 사진)

 

준표(사진), 창현(음향), 지원(미술), 바람(사진,촬영,노해원 멘탈케어 등), 해원(기획), 동연(피아노), 대연(클래식 기타)

 

아름다운 사람들!

 

 

 

 

 

그리고...

(애들 없는)뒷풀이 최고다!

:

1.

해야 할 일들을 잠시 멈춰 두고 잠깐이라도 해보려 한다. 사실, 그렇다고 거창한 것들을 할 여력이나 시간이 나는 것은 아니고, 아주 잠깐이라도 몸과 마음을 멈추어 책을 읽거나 글을 써 보거나 아이들과 산책을 나가본다. 다급했던 몸과 마음을 잠시 멈춰 서면 매일 똑같아 보이는 하루도 조금씩 달라 보인다.

 

 

2.

지난달 마을에서 익명의 몇몇 이웃들과 3주간 '매일 열 문장 쓰기'라는 것을 했다. 매일 밤 머리를 싸매며 총 열다섯 편의 짧은 글들을 썼다. 매일 약속 시간을 잘 지켜서 상으로 책도 한 권 받았다(이 부분이 가장 뿌듯하다). 이 글들을 모아 조그만 책도 만들기로 했다. 이웃들과 함께 글을 쓴다는 것과 글을 매일 꾸준히 쓰고 마무리 짓어 내는 경험이 너무 좋아서 언젠가는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해 보면 재밌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모임이 마무리 된 뒤에도 꾸준히 글을 써보리라 마음먹고는 쓰다 말다 한 글들만 쌓여 간다. 좀 더 책임을 줘야 꾸준히 마무리 지으며 글을 써갈 수 있으려나. 꾸준히 글을 쓰기 위한 여러 고민이 드는 요즘이다. 어제 읽던 책 '쓰기의 말들'에서 '어설픈 첫 줄을 쓰는 용기,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용기, 진실을 직면하는 용기, 남에게 보여 주는 용기,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용기, 다시 시작하는 용기--. 도돌이표처럼 용기 구간을 왕복하는 일이 글쓰기 같다.'라는 글이 마음에 남았다. 저자 은유님은 그럼에도 글을 써내고, 부끄러워지고, 부끄러워진 다음 깨닫는 과정이 좋다고 했는데. 나는 오늘 이 글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을까, 스스로 부끄러워질 용기를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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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 점심시간 (주제:점심시간)

  “얘들아~ 밥먹자~!!” 창문을 열고 소리친다. 아이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일을 계속한다. 이럴 줄 알고 10분 전에 불렀지. 오늘 점심은 메뉴는 등갈비를 이용한 폭립. 날짜가 오늘까지라 그런지 고기에서 조금 꿉꿉한 냄새가 나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먹을 수 있는 요리가 되었다. 

  나는 장을 볼 때 새로운 음식을 해먹어 보고 싶은 마음과 그것을 내가 해낼 수 있다는 믿음에, 이것저것 사두고는 못 먹게 되기 직전에 급히 해 먹거나 상해서 버리게 될 때가 많다. 매번 같은 상황을 맞이 하면서도 나는 왜 자꾸 책임지지 못할 재료들로 냉장고를 채우게 되는가. 나에 대한 지나친 신뢰인지, 새로운 것에 대한 지나친 희망인지, 뭐가 됐든 지나친 선택. 냉장고도 내 마음도 채우기보다는 비우는 것을 더 많이 연습을 해야 하는데. 아이들은 신나게 놀다 와서 그런지 열심히 잘 먹고, 나는 점심을 먹으며 저녁은 또 뭘 해 먹어야 하나 고민한다.

 

3월 9일 / 산책 할 수 있을까? (주제:산책 후 글쓰기)

  산책을 갈 수 있을까? 가지 못할까? 이미 시작부터 마음이 50대 50이다. 결국 산책을 가지 못했다. 원래 걷는 걸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기도 하지만 언젠가부터 산책은 좀 귀찮게 느껴지거나 임무처럼 느껴져서 부담스러워진 것 같다. 이유가 뭘까 생각하다 혼자 산책을 한 해 본지가 언제였지, 떠올려 보는데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정도다. 근 몇 년 동안  산책을 할 때 항상 아이들과 함께했고, 아이들을 위한 산책을 해왔던 것 같다. 오늘도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아직 집에 있는 우리랑 둘이 슬쩍 나가 볼까, 하다가 해야 할 일도 많은데 꼬맹이 쫓아다니다 힘 빠질 것 같고 결국 귀찮아져서 나가지 못했다.

  … 에잇, 근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러니 저러니 해도 오늘은 귀찮아서 못 나간 게 크다. 오늘은 혼자만 있었어도 산책은 나가지 않았을 것 같다. 요즘 날씨도 따뜻하고 좋은데 한번 나갔다 올 걸 그랬나. 오늘은 왠지 글도 내 마음도 왔다 갔다 한다. 

 

3월 10일 / 느긋한 계획 (주제:오후 4시)

  평소 오후 4시면 학교에 간 아이들을 데리고 왔거나 데리고 오고 있는 시간이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아이들을 데려와서 4시에는 조금 느긋하게 집에서 글쓰기를 위한 관찰을 좀 해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우리랑 둘이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3시가 훌쩍 넘었고, 부랴부랴 나가서 아이들 데리고 집에 가려고 보니 벌써 4시다. 오늘은 논밭상점에서 고구마 사서 오느라 평소랑 다른 길로 갔더니 남편이 일 하는 곳으로 가는 길이랑 겹쳐 우리가 아빠 보러 가자고 조른다. 얼굴만 잠깐 보고 올까, 하고 들렀다 집에 오니 5시가 넘었다.

  인생에 내가 계획한 데로 흘러가는 게 얼마나 있을까. 나는 계획 세우는 것을 좋아하는데, 포기도 잘한다. 자주 지각을 하고, 마무리 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나는 내가 게을러서 그런 거라고 자책할 때가 많았는데, 어느 날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해원씨는 참 느긋 거 같아”라고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안심한 적이 있다. 무엇이든 생각하기 나름이다.

 

3월 11일 / 덕후의 추억 (주제:애정하는 물건)

  나는 덕질 하는 게 취미다. 아마 중학교 때 nell이라는 밴드를 쫓아다니면서 였던 것 같다. 아니, 초등학교 5-6학년 때쯤 처음으로 만화 잡지를 샀던 때부터 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나는 덕질하는 게 너무 좋다. 덕질 그 자체로의 즐거움이 제일 크지만 물건, 혹은 그 대상과 쌓이는 추억을 좋아한다.

  나는 내가 엄마가 되기 전부터 장난감과 동화책을 좋아했다. 엄마가 된 후 이 두 가지를 수집하는게 훨씬 유리 해 져서 너무 좋다. 일반 어른들보다 쉽게 접할 수 있고 많이 볼 수 있으며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 세상엔 이쁘고 귀여운 것들이 너무 많고, 그것들이 하나 둘 쌓여 있으면 기분이 좋다. 사실 제일 좋아하는 건 자식 덕질인데 오늘은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미뤄 둔다.

 

3월 12일 / 사진 속 마음 (주제:핸드폰 속 사진)

  내 핸드폰 사진의 지분은 90%가 아이들이다. 그래서 그런가, 언제부터인지 나는 나를 찍는 게 어색하다. 나를 잘 찍지 않다보니 막상 찍으려 할 때는 어떻게 찍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연애 시절엔 남편이 나를 많이 찍어 줬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가 찍은 사진의 지분도 대부분 아이들 차지다.

  얼마 전 동생이 셀카를 찍어 보내 길래 나도 찍어 보려 했으나 역시 잘되지 않았다. 액정이 깨졌다는 핑계를 대려다 아이들에게 한 장씩 찍어 달라고 해 봤다. 아이들이 찍은 나의 모습이 내가 찍은 나의 모습보다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사진에도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렇게나 자연스러운데 되려 나는 왜 나를 어색해 하나. 조금 더 자주 들여다 봐야겠다, 생각했다. 

 

3월 15일 / 추억의 무게 (주제:영화소개)

  영화를 본 지가 너무 오래됐다.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기생충이었던가, 어쨌든 나의 인생 영화를 뽑으라 하면 나는 가장 먼저 ‘이터널 선샤인’을 뽑는다. 짐 캐리와 미쉘 공드리의 좋합 이라니, 이 두 사람이 만들어 오던 각각의 영화를 사랑해 오던 나에게 이 소식은 엄청난 기대와 행복을 안겨 주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서로의 기억을 지워 서로를 잊으려고 했던 클레멘타인과 조엘이 잊혀진 기억 속에서 다시 서로를 찾고, 끌리고, 도망가다 결국 붙잡게 되지만 다시 망설이는 과정의 이야기이다. 당연하고 평범한 연인의 만남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가 미쉘 공드리 식 표현과, 짐 캐리 식 정극연기가 만나 신기하고도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냈다. 영화에서 사라지는 기억을 피해 도망가던 클레멘타인과 조엘이 결국 막다른 곳에 도착하고 기억이 곧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는 클레멘타인에게 조엘은 말한다. “그냥 음미하자”라고. 

  우리의 기억, 혹은 추억은 결국 사라지거나 희미해진다. 추억을 어떻게 해야 음미할 수 있을까, 나는 언제부터인가 추억들을 떠올릴 때면(좋은 추억이든 나쁜 추억이든) 무언가 서운해져서 인지 심장이 저릿저릿하다. 언젠가 아랫집 할머니와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할머니는 ‘추억에도 무게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던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3월 16일 /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날 (주제:자유주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날. 빨래는 평소에 세배 이상 쌓여 있고. 설거지는 평소와 같이 산더미. 뭐라도 해야 하는데 몸은 잘 움직여지지 않고. 아직 끝내지 못한 일들이 많은데 해야 할 일은 계속 생긴다. 집안일은 왜 해도 해도 티가 안 나는 거야 투덜투덜. 심지어 오늘 난생처음 인터넷 사기도 당했다. 애들 재우고 일어나 남은 집안일도 하고 글도 쓰려했건만, 막내가 늦게 자는 바람에 같이 잠이 들어 버렸는데 일어나니 10시가 넘었네. 아, 망했다.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니다, 주문을 왜 우며 오늘은 글도 마음도 생각도 가볍게… 가볍게…. 약속을 지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아무렇게나 끄적여 본다. 

 

3월 17일 / 당연하지 않은 꾸준함 (주제:꾸준히 한 것)

  ‘꾸준하다’를 사전에 찾아보니 ‘한결같이 부지런하고 끈기가 있다’라는 뜻이다. 아무리 봐도 나와는 거리가 먼 단어다. 오히려 ‘가끔 부지런하고 끈기가 없다’라는 뜻이라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이것저것 벌려놓고는 어떻게든 마무리는 짓는다, 하면서 쌓아둔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이런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꾸준히 해야 하는 일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재밌는 날도 가끔 있지만 지치는 날이 더 많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꾸준히 이뤄 오는 일들이, 당연한 일이 되는 것 같을 때 화가 난다. 내가 이렇게 꾸준하게 해 오는 일들은 그저 당연하게 이루어 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치열하게 이루어 오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종종 말한다 ‘나는 너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이 생길 때까지 너희를 돕는 사람이지, 당연하게 해 주는 사람이 아니야’라고. 그러면 아이들은 그게 무슨 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멀뚱멀뚱하고 나는 속으로 말한다 ‘그러니까 엄마한테 잘해’

 

3월 18일 / 이음이와의 다짐 (주제:자유주제)

  이음이는 날 닮아 그런지 우유부단하다. 며칠 전에도 바쁜 와중에 이랬다 저랬다 하는 바람에 이음이에게 소리치고 말았고, 서로 화해하며(주로 내가 사과하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이야기 나눠 보았다. 

나 : 이음이랑 엄마는 왜 이렇게 선택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까?

이음 : 음… 생각이 많아서 그런 거 같아

나 : 오, 맞아. 그만큼 생각할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거겠네. 그럼 우리 미리 생각해 두는 연습을 해볼까? 예를 들어 이음이가 평소에 많이 고민하는 어린이집을 갈지 안 갈지, 옷은 뭘 입을지 같은걸 하루 전 날, 자기 전까지 생각해서 미리 결정 해 두는 거야.

이음 : 오~ 좋아! 

나 : 그리고 미리 결정 해 둔 것은 바꾸지 않기. 만약 선택한 것이 후회가 된다면 그다음 번엔 그것과 다른 결정을 하면 되니까. 무슨 선택을 하든 완전히 마음에 드는 선택을 하긴 쉽지 않거든. 엄마도 그래~ 

이음 : 아~ 엄마도?

나 : 그럼~ 엄마는 지금 이음이보다 훨씬 많이 살았는데 아직도 어려워. 그래서 엄마도 매일 연습해. 그러니까 이음이도 엄마랑 같이 연습해 보자!

  이음이 덕분에 나도 다시 마음에 새겨 보는 다짐.

 

3월 19일 / 존중의 태도 (주제:책 소개)

  ‘어린이라는 세계’, 다 읽는 것이 아쉬워 조금씩 조금씩 아껴서 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작가 김소영이 가지고 있는 그 시선과 존중의 태도에 계속해서 감탄하고, 감동받는다. 작고 힘없고 어린것들이 가진 순수는 아름답다. 그리고 그것이 아름답다고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특별하다.

  언젠가 내가 아랫집 삼촌에게 아이들과 함께할 때 어려운 점은 없는지(아이들이 힘들게 하는 점이 없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삼촌은 나에게 “그건 아이들과 제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서요.”라고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아이들과의 문제를 어른의 말을 거치지 않고, 당사자인 아이들과 아이들의 언어로 해결하려는 모습에 크게 감동받았던 기억이다.

  사랑과 존중은, 그것을 주는 사람뿐만 아니라 받는 사람이 알아챌 수 있어야 한다. ‘다 너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라는 말은 그것을 잘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핑계일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어린이를, 나아가 인간을 대하는 존중의 태도를 배운다.

 

3월 22일 / 처진 가슴 (주제:나의 몸-여성의 몸)

  모유 수유를 하면서, 인간을 신이 만들었다면 신은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열 달이나 품고 고생해서 낳았는데 모유 수유까지 왜 여자 몫인 걸까, 남자는 필요도 없는 찌찌를 왜 달고 있는 거지? 하고 생각했다. 세 아이의 모유 수유를 다 끝내고 나니 아이들이 다 가져가기라도 한 듯 가슴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이 홀랑 사라져 축 처지고 납작해졌다. 젖꼭지도 두꺼워지고 갈색이 되었다. 더 이상 출렁거릴 것도 없고 가벼워서 편하기는 한데, 처진 가슴을 보면 가끔 좀 슬프다. 

  나도 핑크 빗 젖꼭지가 있던 시절이 있었던가. 처진 가슴을 보면 슬프고 핑크 빗 젖꼭지가 부러운 이유는 젊은 여성의 상징을 탱탱한 가슴과 발그스름한 젖꼭지로 만들어 버린 미디어 때문일 것이다. 올해는 처진 가슴도 당당히 들어내며 비키니를 입어 보리라. 세 명의 생명을 먹여 살리고 여전히 나의 오르가즘을 책임져 주는 나의 이 처진 가슴을 더욱 사랑해 주리라, 마음먹어본다. 

  그래도 신이 다시 인간을 만든다면 모유 수유는 꼭 남자가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으면…

 

3월 23일 / 수많은 별일들 (주제:자유주제)

  별일 없어? 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오늘은 ‘별일은 많은 것 같은데 늘상 있는 별일 들이라 무던해진 느낌’이라고 대답했다. ‘멋지게 살고 싶은데, 점점 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무서워’라고도 덧붙였다. 가슴 저린 그리움은 덜 하고 현실을 좀 더 음미하며 살고 싶은데, 방법을 잘 모르겠다. 즐겁기만 했던 글쓰기도 요즘은 좀 무겁다.

  오늘은 울림이를 잃어버려 울다가 결국 찾아 웃으며 집에 들어왔는데 ‘도마’라는 나보다도 어린 인디 가수가 엊그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참 좋아하던 가수였는데. 사는 건 뭐고 죽는다는 건 뭘까.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3월 24일 / 우리의 죽음 (주제:자유주제)

  어제 ‘도마’의 부고를 접한 이후 ‘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리 위에 둥둥 떠다닌다.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의 첫 죽음은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장례식은 나에게 슬픔보다 오히려 따뜻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가족들이 각자의 다른 기억 속에 사소했던 할머니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순간들이 참 따뜻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도 언젠가 죽는다면, 나의 장례식장에서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나에 대한 따뜻한 이야기들을 주고받고 그 속에서 나를 좋은 기억으로 남겨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친정 식구들에게 우리가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죽음에 대한 워크숍’을 하고 싶다고 제안하고 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나 우리 중 누가 사고나 병에 의해 진짜 죽을 준비를 해야 할 때 이런 걸 한다면 너무 슬플 것 같고, 우리 네 식구 이렇게 젊고 건강할 때 즐겁게 이야기 나누면 좋겠다고 했다. 이미 죽음 앞에 많이 외로워 봤던 엄마는 젊은 애가 뭐 벌써 그런 생각을 하냐며 처음에는 노발대발했었지만, 최근에는 ‘나는 수목장이 좋다’고 했던 것 같다.

  우리는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어떤 장례를 치르게 될까, 어떻게 하면 더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잘 죽기 위해 사는 걸지도 모른다.

 

3월 25일 / 시끄러운 마음 (주제:자유주제)

  요즘 나의 최대 난제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이다. 마음은 시끄럽고 기운도 없어서 뭘 하고 싶지가 않다. 그저 주어진 일들만 겨우 할 뿐이다. 근데 또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자꾸 비교 대상을 찾게 되고,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든다. 오늘도 밍기적 밍기적 대다가 아이들 하교하고 집에 왔더니 벌써 5시가 다 되어 버렸다. 이렇게 또 하루를 보내 버려야 하나, 하다가 그래도 오늘은 흙을 좀 만져 볼까 싶어서 코딱지만 한 텃밭이자 정원에 가서 저절로 뿌려져 나온 새싹도 구경하고, 풀을 좀 뽑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극적인 기분 전환은 아니었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한 날에 바보 같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 보려는 시도 정도에 그친 것 같다.

  동생이랑 이런저런 힘들게 사는 이야기들을 주고받다가 내가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동생은 자기도 그런데 ‘그렇게 산다는 게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느끼는 요즘’이라 대답했다. 우리 인생 어디로 흘러갈라나, 어디로든 가긴 갈 텐데… 잘 가려는 욕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좀 편해지려나, 도인이 아니고서야 그게 가능한가, 나이가 들고 가진 게 많아질수록 생각만 많아진다.

 

3월 26일 / 나의 글 (주제:내가 글을 쓰는 이유)

  내가 쓰는 글의 대부분은 아이들과의 이야기다. 왜 내 글에는 항상 이렇게 아이들 이야기뿐일까. 이렇게 맨날 아이들 얘기만 하다가 나는 나를 잃게 되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주제를 받고 쓰는 글쓰기를 해 가면서 아이들이 빠진 글은 나에게 오히려 어렵고 힘들 뿐 아니라 이상하고 어색했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니, 나는 아이들이 있는 나의 글 속에서 나를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찾고 있었고, 아이들 덕분에 나와 더 마주 할 수 있는 거였다. 그걸 깨닫고 나니 아이들이 있는 내 글이 좋아지고, 불안함보다는 잘하고 있다는 응원을 보내게 된다.

  책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나는, 왜인지 ‘어린이는 착하다. 착한 마음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라는 말에 그만 울컥했다. 그런 어린이들의 마음이 아름다워서였는지, 그런 어린이들에게 어른들이 쥐여준 수많은 잘못들이 쓰라려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아이들의 그 ‘아무런 잘못이 없는 착함’이 가지고 있는 순수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오래도록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그 순수한 시선을 사랑하며 글을 쓸 계획이다. 

 

3.

작년에 길고 길었던 코로나 탓인지, 아이들이 개학을 하고는 오히려 힘이 쭉 빠져서 몹시 무기력했다. 이런 나를 보며 '올해 텃밭정원은 물 건너갔네'라고 혼자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다시 호미를 들고 밖으로 나가 풀을 뽑으며 코딱지 만한 이 텃밭에 무엇을 어떻게 심어볼까 고민하고 있다. 아마 작년에 늦게 심어 죽을 줄 알았던 튤립이 꽃을 피우고, 제대로 거두지 않아 그 자리에 떨어진 씨앗들이 스스로 싹을 틔우며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부터 였던 것 같다.

 

 

주말에는 창문 앞에 무너진 작은 밭을 보수하고 잘 먹지도 않는 완두콩도 심었다. 잘 먹지도 않는 완두콩을 심은 이유는, 언젠가 자기는 먹지 못하는 작물(아마 토마토였던 것 같다)을 그 작물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위해 심는다고 했던 글이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주기 위해 심는 작물이라니. 신선한 충격이었고, 멋진 행동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올해는 나도 흉내 내 보기로 했다. 나는 완두콩을 먹지 않지만, 나 대신 맛있게 먹어 줄 친구들에게 선물할 생각을 하면 조금 설렌다. 

 

4.

며칠 전에는 스페인과 독일에서 오랫동안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고 공부해 온 청년 조대연씨가 우리집에 놀러왔다. 기타 청년 대연씨는 코로나로 갑자기 한국에 돌아와 최근 군대를 갓 해결하고 가족들과 함께 옆 마을에서 지내고 있다. 몇년 전 한국에 잠깐 머무르고 있을 때 마을에서 독주회를 열기도 했었는데, 당시 우리는 아이들이 어려 눈물을 머금고 못 갔더랬다. 뿌리깊이 클래식을 사랑하고 있는 남편은 이 청년의 존재를 알고 난 후 종종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며 팬심을 키우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최근 이 청년이 우연히 남편이 일하는 곳에서 연습을 하기 시작했고, 어느날 둘이 이야기를 하다 잘 통했는지 베프가 되어서는 갑자기 집까지 오게 된 것이다.

 

심지어 단독 콘서트가 코앞에서 열렸다…! 우리집 책장 앞에 대연씨가 기타와 함께 앉으니 갑자기 눈앞에 tiny desk concert가 열리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공연장이 된 우리집도, 갑자기 나타난 대연씨도, 그렇게 탄생한 지금 이 순간이 조금 황당하고 어이없을 정도로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관람이라 분위기가 좀 어수선하였는데도 연주를 하는 순간 집중하는 모습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처음 기타 연주에 앞서 조율하고 있는데 유심히 듣던 이음이가 갑자기 엄청 반가운 목소리로 "어?! 저거 아빠가 맨날 치는 거다!" 해서 한참 웃었다ㅎㅎㅎ 

 

기타 연주는 말할 것도 없고, 예술과 삶의 다양한 경험과 깊이에 함께 나눌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하여 그날 밤 함께한 시간들이 참 즐거웠다. 아직 나누지 못한 이야기, 앞으로의 이야기가 궁금해 자주 만나고 싶은 인연! 무엇보다 낯을 꽤 가리는 꼬박이들, 특히 덩치 큰 남자들을 보면 자주 만났던 사람이라도 무서워하는 ‘우리’(미안해요 제이콥)가 단 몇 십분 만에 마음을 열어서 놀랐다. 아무튼 요즘 우리 가족 모두 대연 홀릭…!

 

 

5.

어쨌든 저쨌든 살아간다. 코로나 때문에 멀어지는 인연이 생기는가 하면 코로나 덕분에 이렇게 가까워지는 인연이 생긴다. 힘들고 우울하다가도 작고 사소한 일들로 행복해진다. 인간은 복잡한 생각을 많이 해서 그렇지 사실은 아주 단순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단순하게, 더 가볍게 살아야 하는데 하며 내가 가장 못 하는 것들을 괜히 속으로 되뇌어 본다. 그리고 내가 가장 못하는 그것을 힘 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해 나가는 꼬박이들을 떠올려 본다. 매일 복잡한 생각들로 마음이 시끄러운 내 옆에 하루 종일 작은 것 하나에 깔깔 대는 이 순수한 존재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순수한 이 존재들을 보고 있자면 복잡하다 생각했던 일들이 사실은 별일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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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른이 되었다.

아주 아주 오랜만에 쓰는 첫 일기는 서른이 된 나의 이야기부터 시작 해 보려고 한다.




서른에 맞이한 나의 첫 겨울은 동굴 속의 나날이었다.


울림이가 학교에 가고, 이제 어딘가에 정착해서 살 생각을 하니 그동안 크게 신경 쓰지 않던 지역의 일들과 관계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자신있게 장착 해 두었던 뻔뻔함들이 한꺼풀씩 벗겨지고 나를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더 두려워 졌다.

이런 나의 우울함과는 무관하게 삼형제를 수반한 집안에 다양한 일들은 무심하고 야속하게 밀려왔다.

하지만 그 우울한 날들을 나도 그저 무심하게 지내다 보니, 다시 별거 아닌 일들이 되어간다.


그렇게 봄이 오고, 움츠렸던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한번 켠다.

다시 나의 자리를 찾아 관계를 맺을 용기가 생겨난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 하는 것, 내가 해야 하는 것들을 그저 무던히 해 나가야 겠다 생각 한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누군가의 삶에 내 삶을 빗대어 휘둘리지 말고 나는 그저 내 일을 해나가자 마음 먹는다.




우리를 낳고 이사를 와서 여러모로 많이 지쳐 있어 한참 정체 되어 있던 나의 관심사와 정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또 실천해 보려는 요즘이다. 


요즘 마음이 가는 -자급자족, 수작업, 어린이와 자연- 을 주제로 할 수 있는 만큼의 것들을 해보려 한다.

마당에 목화 심기, 작은 텃밭이지만 작물 키우기, 아이들과 아지트 만들기, 어린이 장터 등등-

올해는 좋은 인연으로 일주일에 한번 여러가지 수작업을 주제로 풀무학교에 수업도 나가게 되었다.

재밌는 일들과 좋은 인연이 생길거 같아 매주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간다.



날씨가 좋아지니 꼬물꼬물 동굴 밖으로 나올 힘이 생긴다.




2


오늘은 울림이가 장염에 걸려 처음 학교를 빠졌다.

주말 부터 우리가 내동 설사를 하더니 옮았는지 어쨌는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파해서 쉬기로 했다.

울림이가 학교에 안가니 이음이도 당연하다는 듯 어린이집에 가지 않고 

혼자 세 녀석들 데리고 의료 생협 갔다 치과 갔다(하필 오늘 예약ㅠ) 장까지 보고 들어 왔더니 오후 2시.

울림이는 고단했는지 방에 누워 있다 잠들고 우리랑 이음이랑 나는 날이 너무 따뜻해 밖으로 나갔다.

닭 풀어주고(지네좀 많이 잡아달라고 재촉하고) 마당 풀도 뽑고 아랫집에도 내려갔다 데크에 돗자리 펴고 놀다보니 하루가 다갔다. 

해질 무렵 울림이도 일어나 어기적 어기적 아픈 몸을 이끌고 데크로 나와 눕는다.

넷이서 뒹굴 뒹굴 놀다가 들어가 씻고 밥먹고 나니 하나 둘 쓰러져 잠들고 오늘은 비교적 일찍 육퇴.




생각보다 많아진 이 시간을 어떻게 쓸까 드라마를 볼까, 바느질을 할까, 집안일을 할까 하다 

시간이 많을 때만 하게 되는(혹은 할 수 있는) 블로그가 눈에 들어온다.

오랜만에 글을 쓰려니 맘처럼 술술 써지지가 않는다.

아직 글을 쓰다보면 몸이 베베 꼬이고 수십번 썼다 지웠다를 한다.

새해 첫 다짐이 짧게라도 1일 1글 이었는데. 3월이 다지나가고서야 올해 첫 글을 쓴다.

언제쯤이면 나는 글을 좀 편하게 쓸 수 있을까?


블로그에 글을 써서 올릴 때 마다 마지막엔 꼭 '가볍게라도 자주 쓰자'하고 다짐하고는 잘 지켜 지지 않는다.

난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사람인가 보다.

그럼에도 이번이 또 마지막 이라 가정하며 다짐한다.

앞으론 가볍게라도 자주 남기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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