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바람

 

 

한 이틀을 앓아누웠다. 일 년에 한두 번 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때가 오는데 그때가 바로 어제였다. 그래도 축구를 시작하고 꽤 오래 괜찮았는데. 이상하게 어제는 여러모로 힘든 일의 연속이었고, 그 정점이 앓아 누움으로 끝났다. 시작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과감히 선택한 새벽 축구경기 시청부터였다. 꾸역꾸역 일어나 본 축구 경기는 없던 병도 생길 만큼 엉망인 경기력으로 끝났다. 남편이 출장으로 가져간 내 차에 울림이 가방이 딸려가 아침 댓바람부터 대성통곡. 울림이랑 싸우다 등교시간은 물론 아침에 잡혀 있던 나의 약속 시간도 늦어 버렸다. 해야 할 건 많은데 오전에 하기로 했던 작업은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렸다. 그래도 맛나게 얻어먹은 점심으로 기분전환 하나 했건만. 그마저도 된통 체해서 소화가 되기도 전에 밖으로 다 나와버렸다. 그 바람에 오후에 잡혀 있던 울림이 치과, 이음이 피아노는 다 취소하고 아이들만 겨우 하교해 계속 누워 있었다. 무엇보다 너무 아팠다. 이번 주까지 마감해야 하는 일이 두 개나 있는데.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파왔다. '왜 하필 지금...' 억울했다. 가족들에게도 미안했다. 그래도 하루 종일 출장 갔다 온 남편이 최선을 다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주고(넷이서 이상한 수학 문제를 계속 풀었다), 왔다 갔다 나를 살피는 아이들을 보며 눈물이 찔끔 났다. 티 내지 않고 자기 역할을 해주는 가족들이 고마웠다.

 

오늘같이 되는 게 하나도 없는 날에 항상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지금 나에게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지금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가.' 그리고 그 우선순위에 있는 것들을 헷갈려하지 않고 잘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오랜 육아, 그리고 그 시간과 함께든 나이(...)로 인해 나에게 생긴 좋은 변화는 진짜 중요한 것을 지키고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원래 나는 우선순위를 정하고 무언가 포기하는 것을 가장 힘들어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별명이 '문어발'이었다. 그때는 학교와 세상과 나 자신을 향한 열의로 가득 차 있었다. 관심 있는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다 잘하고 싶은 욕심도 많았다. 이곳저곳에 발 걸치고 있는 곳이 많아 생긴 별명이 '문어발'이다. 몸은 하나인데 다리를 여러 개로 뻗다 보니 모두 조금씩 부족해 욕을 먹거나, 몇 개만 제대로 하고 다른 것은 제대로 못해 욕을 먹거나. 어느 쪽이든 욕을 먹었다. 욕심을 버리고 한 가지는 아니더라도 몇 가지에 집중하는 게 어떻겠냐는 선생님들의 충고는 뒤로한 채 나는 더욱더 열심히 다리를 뻗어 나갔다. 그러나 가지가 많은 나무일수록 양분이 부족하듯 제 역할을 잘하지 못해 이런저런 피해를 주기 일쑤였다. 이것저것 발을 걸치다 보니 늘어나는 오지랖에 잘하고 싶은 욕심이 이기심으로 변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이 생긴 순간, 세상에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겨난 순간. 나의 문어발은 자연스레 하나 둘 떨어져 나갔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관계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로 한껏 예민해져 가족들에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더 힘들었다. 이제는 '편하니까 막 할 수 있는 거다'라는 말이 싫다. 아끼고 좋아하고 익숙해져서 생긴 편안함을 나의 화풀이 대상으로 삼고 싶지 않다.(내가 아이들에게 자주 그랬고, 많이 후회했으므로) '얼마 있지도 않은 나의 에너지를 내가 잘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은 누군가들에게 빼앗기지 말자. 잘 아껴 두었다가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그래서 곁에 오래오래 있어주고 싶은 이들에게 아낌없이 주자.'하고 자주 생각한다.

 

이제는 외발 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 발 정도로는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슨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 삶에 1순위는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과 균형을 잘 이루며 할 수 있는지, 그럴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는지를 먼저 떠올린다. 그렇게 필요 없는 관계나 활동반경을 줄이고 나니 이제 뭐가 진짜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가 모나고 부족한 모습을 보여도 옆자리를 지켜주는 사람들. 같이 가보자 손 내밀어 주는 사람들. 내가 나를 믿지 못할 때도 나를 믿어 주는 사람들. 그 사람들로 하여금 나도 잘 못 믿던 나를 믿게 된다. 내가 나를 믿게 해주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내 삶의 1순위인 것이다. 걸러내고 나면 가벼워진다. 가벼워지면 여유가 생기고 여유가 생기면 크게 별 일일 것이 없다. 그래서 응원하던 축구팀이 엉망인 경기를 해도, 며칠 앓아누워 억울 한 날에도, 그렇게 되는 날이 하나도 없는 날에도 나는 금방 일어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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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메일 정리를 하다 결혼식을 준비하며 남편이 보냈던 메일을 발견했다. 주례 선생님이 결혼을 앞두고 고민거리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말씀하셨던 것에 답하는 메일이었다. 날짜를 보니 결혼식 5일 전.

이 메일을 보니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우리 남편은 이때도 걱정이 많았네. 난 순탄하게 진행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우리의 기억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올해로 결혼한 지 벌써 10년 차다. 뱃속에 있던 울림이는 이제 11살이 되었다. 되돌아보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그 시간들이 속절없이 흘러가 버린 것만 같아 조금 슬프다. 

 

우리는 전통혼례로 결혼했다. 겉으로 보는 모습만 전통혼례고 진행은 모두 우리 마음대로 했으니 퓨전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갑작스럽게 준비하게 된 결혼식이었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고민해 왔던 사람들처럼 우리가 하고 싶은 결혼식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 고무신 신고 도시를 누비던 여자와 머리를 허리까지 기르며 전 세계를 누비던 남자가 만났으니 정해진 방식대로 진행하는 것이 성에 찰리가 없었다. 종이를 실로 꿰매어 청첩장을 만들고, 청첩장에 하나하나 편지를 쓰고, 웨딩사진, 옷과 화장, 행사 진행과 계획을 모두 우리가 도맡아 했다. 틀에 박힌 뻔한 결혼식은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하나. 지나치게 소비 중심적인 결혼 문화를 따라가고 싶지 않은 마음 둘. 주변에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많아 그들과 함께 하면 재밌는 것들을 할 수 있겠다는, 그들이 주는 자신감이 셋. 이 세 가지 마음이 우리를 움직이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이런 반골기질의 토대를 만들어 주신 부모님 영향도 컸다. 오랜 세월 노동운동과 교육운동을 하며 살아오신 부모님은 우리의 이런 결정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사실 결혼의 핵심 포인트는 서로 다르게 살아온 두 가정의 만남이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의 가정에 대해 이해나 설득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부모님들이 나와 남편이 만나기 전부터 각별히 알고 지내온 사이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소 갑자기 준비하게 된 이 결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각자 부모님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황바람

 

우리가 연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부모님들이 오랫동안 이어온 '글과 그림'이라는 모임 덕분이었다. 남편과 사귀기 훨씬 전에, 내가 중학생 때 이 모임에서 남편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남편이 아마 20대 초반쯤 됐을 거다. 거기서 나는 나처럼 부모님 따라 놀러 온 어린이 무리에 놀고 있었고, 남편은 어른들 무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까맣고 깡마른 몸에 노랗고 긴 머리. 호주에서 막 돌아와 잼배를 치는 히피 같은 그의 모습은 어린 마음에도 정말이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이상한 모습과 이상한 기억으로 남아 있던 그 사람이 내가 스무 살이 되고 처음 이 모임을 가게 되었을 때. 하필(?) 그때 너무나 멀끔한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마른 몸은 그대로였지만 짧은 머리에(이 부분이 가장 중요했던 것 같다) 잼배가 아닌 DSLR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하필이면 또 그 여러 사람들 중에 20대가 우리 둘 뿐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술에 취해 같이 등을 맞대어 별을 보았고,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대화를 나눈 뒤 번호를 주고받았다.(이 상황에서 남편과 나의 의견이 갈리는데. '먼저 별을 보러 가자고 한 사람(나)'과  '먼저 번호를 따간 사람(남편)' 중에 누가 더 관심이 있었는지에 대해 아직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주고받은 번호로 우연을 가장한 몇 차례의 만남 후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결혼식은 부모님 만큼이나 부모님의 그 모임에서 더 큰 잔치였다. 덕분에 가족들 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적극적인 지지와 응원을 몸소 느꼈다. 사람도 많고 진행도 직접 하느라 정신없는 결혼식이었지만 양가 부모님 모두가 함께 손을 잡고 입장을 하고, 식구들 모두가 나와 함께 율동을 했던 순간들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남편이 살던 아주 작은 자취집에 온 식구들이 모여 율동 연습을 하고, 결혼식 준비를 가장한 술자리, 그리고 모두가 뒤엉켜 잠들었던 그 순간들은 더 기억에 남고. 식중에 내가 편지를 읽다 부모님이 산딸기 따주셨던 이야기를 하며 오열하는 바람에 여전히 친구들에게 '산딸기 뿌엥'으로 놀림받지만 꽤나 즐겁고 만족스러운 결혼식이었다.

 

결혼식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이벤트 기획에 재미와 자신감을 얻은 우리는 그다음 이벤트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적절한 시기에 찾아온 큰 이벤트가 있었으니, 바로 큰 아이 울림이의 돌잔치였다. 우리가 귀촌해 완주에 살게 된 지 1년 차쯤 됐을 때다. 마침 옆동네 전주 청년몰에 작은 식당을 하던 친구를 필두로 음식과 장소가 해결되고, '이렇게 해봐' '저렇게 해봐'하는 옆 사람들의 말에 혹해 생각보다 일을 크게 벌였다. 결혼식 때와 마찬가지로 재주 많은 친구들을 동원하고, 재주 많은 가족들까지 적극적으로 동원했다. 부모님들이 각자 하나씩 노래하고 춤추고 장구치고 시를 읽으니 벌써 행사의 반이 채워졌다. 이곳저곳에서 달려와 준 친구들이 마치 원래 역할이 주어 진 듯 알아서 척척 진행해 주어 어느새 모두가 함께 만든 돌잔치가 되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며 진정한 축하와 응원, 그리고 커다란 지지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 어떤 비싼 선물 보다도 값진 선물이었다. 생각해 보면 선물 같은 이 인연들을 자꾸 보고 싶고 자랑하고 싶어 우리는 이렇게 자꾸 일을 벌이는 걸 지도 모르겠다. 

 

© 노해원

 
가족 이벤트 들을 하나 둘 성공적으로 마치고, 우리의 이벤트 병은 범위를 더 넓혀 지역으로 뻗어 나갔다. 결혼식도 돌잔치도 본래는 사적인 목적을 갖고 있는 행사이기 때문에 함께 하는 친구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 마을, 우리 지역 사람들과 친구들이 함께 즐거울 수 있는 이벤트를 열어 보고 싶었다. 그때 남편과 나, 그리고 내 영혼의 단짝 친구 다솜이가 매일같이 모여 쿵짝대던 청년모임 '다해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이름 앞글자를 따 만든 모임 이름 '다해바'는 '자유롭게 무엇이든 다 해보자'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활동이라 하기엔 너무 사소 했지만 그게 우리의 목적 이기도 했다. 더 사소하고, 더 내밀한 곳으로 향하는. 우리 셋은 여러모로 죽이 잘 맞았는데 특히 잘 맞는 것은 음주가무를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지역에서 락페스티벌을 열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 당시 완주는 이제 막 청년들이 웅성웅성하던 때였다. 완주 CB센터 사무국장님의 도움을 받아 고산시장에서 200만원의 예산을 얻었다. 그 돈으로 낮에는 프리마켓을 열고 저녁에는 락페스티벌을 했다. 우리의 이상을 채우기엔 적은 예산이었지만 지역에 실력 깨나 있는 뮤지션들, 그리고 옷깃만 스쳤던 서울에 유명(우리 입장에서) 인디 뮤지션들까지 염치 불문 열심히 섭외했다. 사실 우리 좋자고 시작했던 일인데 마을 사람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나와 밤늦게까지 행복해하는 모습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이벤트 중독자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여전히 조금의 틈만 보이면 달려들어 마을 예술가 친구들과 공연, 전시, 잡지 만들기 등을 기획한다. 나는 왜 이런 걸 좋아하게 되었을까. 왜 계속 이런 일에 눈이 가고 마음이 가서 자꾸만 움직이게 되는 걸까.
 

© 황바람 / 복태와 한군(선과 영)

 

허례허식이 없는 삶을 살고 싶다. 요즘 글을 쓰면서도 자주 생각한다. 잔뜩 꾸미는 글은 쓰지 말자고. 내가 계속 무언가 기획하는 것도 비슷한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우리답게 만들어 가고 싶다. 허례허식 없이 진심을 담는 일들을 계속 만들어 가고 싶다. 나는 지금까지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산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풍요롭게 살아 본 적도 없다. 그래도 경제적 관념으로 봤을 때는 가난하게 살았던 시절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함 없이 살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가난 속에서도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배워왔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도 그 진심이 닿는 곳. 그곳에서의 풍요를 배우고 느끼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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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바람

 

 

번개장터를 열심히 뒤져 운동복과 축구화, 운동가방을 샀다. 남편은 그런 나를 보며 '또 시작됐군'하는 표정이다. 나는 덕질이 취미다. 아마 중학교 때 밴드 NELL을 쫓아다니면서부터 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만화 잡지를 샀던 때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런 것들을 기점으로 꾸준히 얕고 넓은 덕력과 맥시멀 리스트 수집왕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 덕질은 그 행위 자체의 즐거움도 있지만 물건, 혹은 그 대상과 쌓이는 추억 때문에 버리지도 끊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세상엔 이쁘고 귀여운 것들이 너무 많고, 그것들이 하나 둘 쌓여 있으면 기분이 좋다.(어디선가 남편의 절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엄마가 되고 덕질하는 것이 더 좋아지고 자랑스러워진 부분도 있다. 아이들에게 무언가 열렬히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왠지 모르게 뿌듯하다. 아이들을 핑계로 덕질의 범위를 쉽고 편하게 넓혀 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두 번째 남편의 절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느 날 남편과 앞으로 아이들이 '어떤 사람으로 크면 좋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남편이 "나는 우리 아이들이 덕후로 컸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했다. '우리가 하고 싶은걸 아이들에게 바라지 말자'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라는 말을 가슴에 깊이 새겨놓은 우리 부부가 아이들에게 바라는 단 한 가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열렬히 마음을 쏟고, 그것으로 보람과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는 것. 그것이 '아이들이 덕후로 컸으면 좋겠다'는 말에 눌러 담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이 대화의 마무리가 여기서 끝났으면 참 아름다웠을 텐데. 언제나 이상한 방향으로 잘 흘러가는 내 마음의 또 다른 소리가 나를 일깨웠다. '그래.(?) 이제 나의 덕질을 아이들에게 물려줄 때가 왔다!' 나의 덕질을 아이들에게 전파하기로 마음먹게 된 것이다.

 

첫 시작은 만화를 좋아하는 울림이에게 무조건 먹힐 것이라 확신한 슬.램.덩.크! 초등학교 때 몇 개월간 막내 고모네서 살았던 적이 있다. 그때 중학생, 고등학생이었던 친척언니 오빠가 SBS에서 방영하던 슬램덩크를 녹화까지 해가며 보는 것을 옆에서 곁눈질로 따라 보곤 했다. 그것이 나와 슬램덩크의 첫 만남이었다. 매일 온 가족을 공포에 떨게 할 정도로 무섭게 싸우던 언니오빠가 유일하게 좋은 사이를 유지했던 시간이 슬램덩크를 보는 시간이었다. 심지어 야자 시간이 겹쳐 본방사수를 하기 어려운 날에는 서로를 위해 녹화까지 해주는 모습은 적잖은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런 언니 오빠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이 만화를 제대로 보기도 전에 대단한 뭔가가 있다고 느꼈다. 그들이 녹화해 두었던 비디오는 나에게 남아 나 또한 그들처럼 이 농구만화의 세상에 흠뻑 빠지게 만들었다. 그 비디오를 보고 또 보고 만화책도 빌려 보고 대사도 외우고 그림을 오려서 필통에도 붙이고 다이어리에도 붙여가며 열렬히 좋아했다.(참고로 나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정대만을 좋아했다) 울림이를 향한 나의 계략은 정확히 먹혔다. 덕후의 DNA는 대물림이 되는 건지 울림이에게 슬램덩크를 내 준 순간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울림이도 이 만화책을 보고 또 보고 10번 가까이 완독 했다. 뒷 이야기를 더 만들어 달라고 작가에게 편지를 쓸 뻔하고 팬아트를 그리기까지 했다.(울림이는 산왕의 정우성을 좋아한다) 이러다 올해는 슬램덩크만 보겠다 싶어 지금은 '슬램덩크 금지령'을 선언한 상태다.

 

슬램덩크의 세상에서 잠시 빠져나온 울림이는 요즘 밴드 음악에 빠져 있다. 이번 여름 엄마의 소원성취를 위해 온 가족이 펜타포트 락페스티벌을 다녀왔던 것. 그리고 갑자기 밴드 oasis에 빠진 엄마와 마흔 살 기념으로 일렉기타를 산 아빠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울림이는 펜타포트에서 보았던 크랙샷의 베이스를 보고 마음이 빼앗겨 베이시스트가 되고 싶다고 했다. 무엇보다 나는 이번 펜타포트에서 울림이와 함께 NELL 공연을 봤던 것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비록 중딩 때쫓아다녔던오빠들(NELL)의 모습과는 사뭇달라졌으나여전한 그들의 음악에 첫 번째감동. 내가 열렬히 사랑했던 그들을 이제는 그들보다 더 열렬히 사랑하는 나의 아이와 함께 보고 있다는 것에 두 번째감동. 꽤 오랜 시간 키가 작아 잘 보이지도 않는 그 자리에서 투정 없이 자리를 함께 지켜준 울림이에게 세번째 감동. 반짝이던 그 밤, 일렁이는 그 마음들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덕후와 덕후 아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덕질의 대물림은 이렇게나 아름다운 것이다. 나의 추억과 아이의 추억이 교차 되는 그 순간들이 사랑스럽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나의 덕질을 자랑스러워 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열렬히 좋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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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이의 슬램덩크 팬아트(뒤로 갈 수록 집중력이 흐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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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바람

 

첫아이 울림이를 낳고 느꼈다. 날 때부터 갖게 되는 모성은 없다고. 처음 본 아이는 귀엽기는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그때 이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뭔가 엄마 흉내를 내보려 했나 보다. 나는 뭐에 씐 사람 마냥 아직 이름도 없던 아기에게 '우리 아들'이라는 말을 썼다. "오구 우리 아들 쉬 쌌어요?" "오구오구 우리 아들 오늘도 너무 귀엽네요~" 같은. 한 일주일쯤 지나고 나니 현타가 왔다. 어느 날 퍼뜩 닭살이 돋았다. 나는 원래 보수적인 부끄럼쟁이라 남편과 사귀면서도 '자기'라던지 '여보'라던지 어떤 사랑이 담긴 애칭은 쓰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그저 나이가 많은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 그대로의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원래의 나로 돌아와 그 단어를 쓰고 있던 나를 생각하니 창피했다. 피식피식 웃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 몹시 부끄러웠다.

 

엄마라는 가면을 벗고 나니 다시금 문득문득 아이가 어색했다. '뭐지, 난 모성이 없는 사람인가'. 처음에는 내가 생각보다 좀 냉정한 인간인가 싶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사실 아주 당연한 과정이다. 아무리 뱃속에 열 달을 함께 지냈다 한들 뱃속에서 나와 내 옆에 있는 아이는 갑자기 나타난 존재다. 그 존재가 핏줄, 혹은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그 연결 선들이 나와 낯선 존재를 곧바로 가까워지게 할 수는 없다. 물론 '아기'라는 갓 태어난 생명이 갖고 있는 귀엽고 사랑스럽고 순수한 본체 그대로의 매력은 상당하다. 그럼에도 가끔은 어색하고 낯설 수도 있는 당연한 과정이 어째서 '모성이 없는 이기적인 인간'의 생각까지 가게 된 걸까. 내가 좀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는 편 이기도 하지만 사회가 여성들에게 주는 '모성'의 압박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내 옆에 아이가 자연스러운 내 가족이 되기까지는 당연하게도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모성'이라는 사회적 시선에는 그 시간이 생략되어 있다. 사회에 떠도는 그 단어를 들으면 마치 여성이 엄마가 되기 위해 태어 난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모성'이라는 단어가 '우리 아들'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주었던 것과 비슷하게 닭살스럽다. 아이를 어색해하던 내가 자식덕질을 하게 된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거치며 생각했다. 어떠한 인간관계들과 마찬가지로 부모 자식과의 관계도 함께 한, 혹은 서로를 위해 보냈던 그 시간 속에서 쌓여가는 기억과 추억이 있어야 사랑에 빠지거나 정이 드는 것이라고.

 

나는 원래 정이 많은 사람이다. 사실 내가 겉보기엔 사교적이나 내적으로 낯을 많이 가려서 쉽게 마음을 주지는 못 한다. 근데 과몰입이 심하고 이상한 포인트에서 정이 들기 시작 해서 한번 마음을 내어 주기 시작하면 정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주고 집착도 주는... 아무튼 그런 사람이다. 고등학교 때 사감 선생님 말 더럽게 안 듣다가 전근 가실 때 혼자 반나절을 운 적도 있다. 꼬박이들과도 그렇게 정이 들었다. '정'이라고 하기에는 좀 심하게 빠지긴 했는데. 어쨌든 나는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과 정비례하며 사랑을 키웠다. 그러니까 모성 때문에 아이들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과 정이 들면서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이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장황한 이야기를 했나 보다) 아이러니하게도, 슬프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보다 더 한 사랑의 크기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랑에 흠뻑 빠져 있을 때쯤부터. 아이들은 독립된 존재가 되어가고 나도 아이들과 독립과 분리할 준비를 해야 하는 때가 온다. 지금 나는 그걸 알면서도 잘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상태인데. 예를 들어 아이들과 떨어져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싶으면서도 내가 모르는 아이들의 순간들이 아쉽고 서운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아이들을 기숙사 학교에 보내면서 교문 앞에서 우는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되뇌인다. '너는 너고 나는 나.' 이런 나를 보며 남편은 씨익 웃으며 말한다. "결국에 니 옆에 남는 건 나밖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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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바람

 

 

'꼬박'은 첫 아이 울림이로 부터 시작해 둘째 이음, 셋째 우리까지의 태명이다. 울림이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여러 상황이 정리되고 안정을 찾아갈 때쯤 '이녀석을 앞으로 뭐라고 부를까'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우리 부부는 별것도 아닌 이 이름에도 한참을 고민했다. (나중에 진짜 이름 '울림'을 정할 때도 마지막까지 결정을 못 해 2만원의 벌금을 냈다) 그러다 문득 남편을 놀리던 '꼬마박사'의 줄임말로 '꼬박'이라는 단어가 떠올라 사전을 찾아보게 되었고, '어떤 상태를 고스란히 그대로'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가 마음에 들어 얼렁뚱땅 정해버렸다. (지나친 고민의 결과는 항상 얼렁뚱땅이 되고 만다)

 

첫째 꼬박이 울림이의 탄생과 함께 생겨난 나의 블로그 <꼬박일기>도 이 태명을 이어받아 시작했다. 이왕 쓰기로 한 거 '꼬박꼬박 잘 쓰자'라는 의미도 함께 담아. 쓰다 보니 매일 쓰는 그 행위의 뿌듯함만큼이나 지극히 개인적인 이 글을 보고 안부와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들의 관심과 인사가 좋았다. 우리를 응원해주고, 선물을 보내주고, 우리 집에 찾아와 주는 친구들이 고마웠다. 그래서 나도 점점 그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게 됐다. 어느 날은 자주 보지 못하는 가족들에게, 또 어떤 날은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던 친구들이나 보고 싶은 친구들에게 전하는 마음을 담았다. 처음 매일 쓰던 열의는 많이 옅어지고 지금은 가끔 명맥만 이어오는 블로그가 되었지만 그래도 꼬박일기는 나에게 꽤나 뿌듯한 존재다.

 

그동안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도 많았지만 나는 지금껏 이른 나이에 결혼과 출산을 한 것에 후회 한 적은 없다. 아이들로 인해 내 삶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이 너무 한쪽으로만 기울었는지 어느새 내 삶에는 나보다 아이들로 채우는 날이 더 많아졌다. 기울어진 마음은 어떤 면면에서 나를 점점 두렵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생길 공허와 공백을 채우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다섯 살 '우리'가 아직 집에 있는 이유는 떠나갈 '우리'보다 남겨질 내가 더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런 두려움과 공허를 넘어보려 꼬박일기를 썼다. 쓰고 나면 매일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날들도 아이들을 빼면 별 볼 일 없어 보일 것 같았던 나도. 그저 각각의 존재 만으로 마음이 채워지곤 했다.

 

안부를 묻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불안함과 공허를 채우기 위해 썼던 편지 같은 글들이 이제는 되려 나에게 돌아온다. 그동안 잘 해왔다고, 지금도 그럭저럭 괜찮다고. 그래서인지 지난 꼬박일기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자주 울컥이고 만다. 처음에는 그 울컥임이 되돌아갈 수 없는 순간들에 대한 그리움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아름다웠던 그 시절들이 나에게 주는 위로라고 느낀다. 자주 감정이 요동치고 시도때도 없이 울컥이는 나와는 달리 침착하고 이성적인 남편도 오래된 꼬박일기를 보며 훌쩍이는건(만취 상태에 봐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런 이유가 아닐까 생각 해 본다. 어느새 나도 남편도 지나온 시절에 울컥이는 나이가 되었다. 그 울컥이는 시간을 함께해준 존재들이 고맙다. 그 고마운 존재들의 이야기를 꼬박일기에 오래오래 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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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 노해원

 

 

그 당시 나는 휴학을 하고 일 년 정도 고창에서 농악 전수생으로 지내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워낙 개방적인 환경에서 자라온 탓에(혹은 워낙 내 멋대로 살아온 탓에) 주변에서도 딱히 말릴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의외의 사람이 나를 붙잡았는데 바로 당시 남자 친구이자 현 남편 H였다. 우리는 오래된 부모님 모임에서 만나 부모님 몰래(부모님 빼고 다 알게) 사귀고 있던 3년 차 연인이었다. 다정한 듯 무심한 충청도 사람 특유의 우유부단함을 가진 그는 나에게 지금까지 그렇게 단호하게 'NO'를 얘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예상 밖의 그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기뻤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휴학에 안 좋은 점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이상하게 '장거리 연애도 힘들고...'라고 속삭인 말이 '너와 절대 떨어져 지낼 수 없어' 같은 영화 대사처럼 들리는 바람에 더 고민할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 휴학을 하지 않은 그 한 해 사이 누군가 이미 정해 두기라도 한 것처럼 결혼, 출산, 졸업과 귀촌까지의 일들이 이뤄졌다.

 

그렇게 나는 스물셋에 엄마가 됐다. 그 당시엔 내가 그렇게나 어리다고 실감하지 못했는데 지금 그때 사진을 들춰 보면 왜 주변에서 '애가 애를 낳았네'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처음 엄마가 되었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나는 내가 엄마라는 사실이 종종 낯설다. 올해로 10년 차. 그 사이 두 명의 꼬박이가 더 태어나 삼 형제의 엄마가 된 지금의 내가 놀랍다. '내가 애 셋 엄마라고? 허, 참...' 헛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변함없이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며 그래도 다섯 식구 삼시세끼 굶기지 않고 무사히 생명 유지하고 살아온 사실만으로 뿌듯하다. 그동안 내 삶의 많은 선택지 속에서 나름 주도권을 갖고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그 역시도 어쩌면 이미 누군가의 큰 그림 속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떤 선택을 했느냐보다 어떤 선택을 했든지 간에 그 속에서 나름의 해답을 찾으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육아도 마찬가지다. 특히 요즘의 육아는 과도한 선택의 연속이다. 출산 방식이나, 유아용품, 음식, 훈육 방법부터 수면 습관까지. 오만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과도한 정보들을 전해 듣고 나면 오히려 선택이 어려워지고 불안한 마음만 커진다. 처음 큰 꼬박이를 낳고 모유 수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규칙적인 수유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듣고 시도해 본 적이 있다. 아무리 신생아여도 시도 때도 없이 주지 말고 2시간에 한 번씩 먹이면서 규칙을 만들어 가야 나중에 편하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당시 모유 양이 많지 않았음에도 어떻게든 2시간에 규칙을 만들어 보려고 반나절을 고생했던 적이 있다. 젖을 물리면 금방 달래질 것을 안고 업고 둥개둥개 하며 달래느라 팔이 떨어질 것 같아 반나절 만에 포기했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원래 하던 대로 아이가 울거나 힘들어할 때 젖을 물렸다. 한 시간에 한 번이 됐다가 두 시간에 한 번이 됐다가 어느 날은 서너 시간에 한 번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때 생각했다. '육아도 그냥 각자 취향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육아도 엄마와 아이의 취향이 생겨나는 과정이고 제각각 그 취향에 맞춰 살아가도 그럭저럭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개인적으로 부모는 자고로 옆에서 따뜻한 온기만 전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딱히 훌륭한 육아 정보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러니 앞으로 적어 갈 나의 글들은 그저 육아와 함께 (조금이라도) 성장한 나의 고군분투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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