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이음

 

 

태어난 인간의 첫 얼굴을 보았다. 뱃속에 있었다고 생각하면 크고 태어난 존재라 생각하면 너무나 작은. 아직은 ‘덩어리’에 가까웠던 그 작은 인간의 첫 얼굴을 기억한다. 귀여우면서도 웃기고 이상하면서도 사랑스럽고 부처의 얼굴만큼이나 평화롭고 신비로웠던 그 얼굴과 마주한 순간. 내가 처음 엄마가 되었던 그 순간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첫아이 울림이의 탄생 순간이 특히 선명하다. 환한 대낮에 태어나서 그런가. 작은 방 한 칸에서 오로지 나와 남편 둘이서 진통하던 순간들. 극한의 고통과 극한의 환희, 그리고 아름다운 고요가 공존하던 순간. 

 

아이가 아직 얼굴을 드러내기 전, 나의 음부에서 아이의 머리가 이마까지만 볼록 나와 있는 순간에 산파 선생님이 나에게 말했다. “이제 아기 나왔다. 머리 한번 볼래요?” 그때 나는 정신이 없기도 하고 그걸 묻는 선생님도 너무 생소해서 “아니요!”라고 대번에 거절했지만, 지금은 그때 보지 못한 그 순간이 아쉽기만 하다. 뭐든 처음은 소중하기 마련인데. 그 처음을 놓쳐 버린 것만 같아서.

 

그러니까 사실은, 아이의 얼굴을 가장 처음 본 것은 내가 아니라 남편이다. 남편은 울림이를 처음 본 순간을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아기는 힘차게 몸을 뒤틀면서 쑤욱 튀어나왔다. 손은 엑스자로 가슴에 모으고 있었다. 뒤통수에서 얼굴 옆면을 거쳐 나와 얼굴이 딱 마주쳤다. 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서둘러 아가를 엄마 가슴에 올려 주었다핏덩이가 이리 예뻐 보이긴 처음이다(...) 얼떨결에 내 팔에 아이가 누워 울고 있다. 태어난 시간은 오후 1시 43분. 햇살이 밝았다. 산모 휴게실에서 창을 등지고 서서 아이를 둥실둥실 가볍게 흔들었다. 처음에는 별 소용이 없더니 이내 잠잠해진다. 가끔씩 웃는다. 아니태어난지   안된 아기가  손안에서 웃다니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처럼 연신 입을 옹아린다. 나도 모르게 내 입도 같은 모양으로 움직였다. 눈을 뜨려고 노력한다. 한쪽만 힐끔 떠서 보고는 다시 금방 감는다. ‘당신이 나한테 기타를 쳐 주었던 아빠가 맞나?’하고 확인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든 눈 좀 맞춰보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꼬박이도 내 마음을 알았는지 힘겹게 양쪽 눈을 뜨고 나를 똑바로 한번 쳐다 봐 주더니 다시 울기 시작했다.  번째로 눈물이  돌았다.

 

아이가 처음 본 우리 얼굴은 어땠을까. 글을 쓰다 문득 궁금해져서 울림이에게 물었다. “울림아, 엄마 처음 봤을 때 기억나?” 울림이는 아주 잠깐의 고민도 없이 대답한다. “그럴 리가.” 올해 열세 살이 된 울림이는 이제 논리가 없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나는 이 녀석이 T일거라고 확신한다) 둘째 이음이와 셋째 우리 에게도 물어봤지만 역시 ‘엄마 왜 저래?’ 하는 눈치다.(이 녀석들도 T에 근접한 녀석들이다) 당연한 줄 알면서도 왠지 서운하다. ‘나는 아직 다 기억하는데...’ 괜히 혼자 꽁해진다. 아이들은 계속 커가고 얼굴도 계속 변해 가는데 나는 여전히 아이들을 보며 처음의 얼굴을 떠올린다. 처음의 기억이 강렬해서일까, 변하고 흘러가는 이 시간들이 아쉬워서일까.(2024.3.23)

 

:

© 해원

 

 

나는 내 일기장의 글을 좋아한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생각으로 쓴 글, 아무도 볼 수 없는 글을 나 혼자 보는 게 좋다. 나는 내가 쓴 일기를 읽기 위해 쓰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꽤 오랜 시간 일기는 나에게 숙제였다. 진짜 숙제였던 어린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항상 시작만 하고 10장을 채 넘기지 못한 일기장이 수두룩하다. 그 일기장들은 가득한 뒷장의 공백을 남겨 놓고 묵혀지거나 버려졌다. 그때는 쓰여진 일기장 보다 매일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고 그래서 내 일기장은 항상 남아 있는 숙제처럼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

 

지금은 쓰여진 일기장이 갖고 싶어 일기를 쓴다. 내가 처음으로 한 권의 일기장을 다 쓴 것은 작년 말이다. 제 작년 새해부터 쓰던 일기장이니 2년 가까이 쓰고야 다 채웠다. 나는 세상에 많은 일들이 얼떨결에 일어난다고 생각하는데 이 일기를 처음 쓰게 된 것도 그랬다. 원래는 아이들 일기장만 세 개 사려고 했다. 그런데 아이들만 쓰게 하면 어린 시절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숙제가 되어 버릴 것 같아 함께 쓰려고 내 것도 같이 산 것이다. 나는 어른이니까 두 배로 큰 것을 샀다.(나는 이럴 때만 어른 행세를 한다) 그러다 얼떨결에 내가 먼저 한 권을 다 썼다. 다음 일기장은 자축의 의미로 비싸고 좋은 노트를 샀다. 작년 말부터 지금까지 1년 정도 썼고 반쯤 썼다.

 

아이들의 일기장은 아직 절반을 채우지 못했다. 그래도 숙제가 되지 않게 하겠다던 나의 다짐도 반쯤은 성공한 셈이다. 아이들은 가끔 재미로 일기를 쓴다. 아이들도 나처럼 자기가 써둔 옛날 일기를 보면서 좋아한다. 나는 오타로 가득한 아이들의 일기를 좋아한다. 바르지 못한 아이들의 선을 사랑한다. 아직 글자를 쓰지 못하는 막내 ‘우리’의 일기는 '우리'의 말을 내가 받아 적어 준다. 나는 일부러 문법이나 앞 뒤 말이 맞지 않더라도 아이가 한 말을 그대로 적는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어제 저녁에 반딧불이 잡으러 우리 가족 다랑 아랫집이랑 잡으러 갔는데 내일 보니까 반딧불이가 집에 또 있었다. 그리고 반딧불이는 나뭇가지 옆에 나뭇가지가 생기기 전에 풀 거기를 좋아한다. 거기에다가 우리 집을 좋아한다. ‘우리’도 반딧불이 좋다. 아주아주아주.” (23.9.10)

 

아이들도 나처럼 자기 일기장을 보고 또 본다. 언젠가 아이들의 일기장이 다 차면 작은 책을 만들어 주고 싶다. 

 

우리 집에는 일기로 된 에세이집이 여러 권 있는데 지금 떠오르는 것은 최승자 시인과 김환기, 김향안, 윤형근 화백들의 책이다. 이 책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음이 잔잔해지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조마조마하다. 평범한 듯 보이는 매일이 치열한 삶의 순간들이고 나약한 인간의 모순에 힘없이 부딪히면서도 나아가려는 우직함을 볼 수 있다. 이들의 책을 읽다 주변을 돌아보면 사실 모든 책들이 개인의 일기장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일기장도 언젠가 책이 되어 세상에 나올 수 있을까.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이라는 뜻을 지닌 ‘일기’가 이토록 은밀하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한 개인의 삶이 그만큼 특별하고 일기를 쓰며 더욱 특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일기를 쓴다. 쓰면서 빛나는 내 삶을 보기 위해서.(23.12.9)

 

 

© 해원

:

1. 

비온는 날 우리랑 산책을 하다가 사슴벌레 한마리를 만났다.

우리가 며칠만이라도 데리고 있고 싶다고 해서 잠시 키웠다.

내가 이름을 지어 키우는 동안 불러주자고 하니까 

우리는 혼자 아주 작은 소리로 '비 오는날.. 브이자(아이들이 붙여준 길 이름)에서 주웠다...'라고 중얼 거리다니

'이 사슴벌레 이름은 비브야!'라고 말한다.

'비'오는날 '브'이자 에서 주은 사슴벌레라고 해서 '비브'

 

우리가 그린 비브

 

 

2. 

생에 첫 은니 씌웠다.

할때는 무서워 하더니 하고 나서는 자기 입 속에 무려 '은'(우리에겐 금 다음으로 좋은 거)이

있다는 것에 굉장한 뿌듯함을 느낀다.

아랫집 할아버지에게도 깜짝 놀래켜 주며 자랑하고 싶다며 입을 열면 다 보이니까 편지를 써서갔다.

 

까만색으로 색칠 되어 있는게 은늬다

 

 

3.

우리는 어려서부터 인형을 좋아한다.

제작년인가, 산타할아버지가 선물해준 재규어 인형을 한창 데리고 다니다가 

요즘은 내가 몇년 전에 뜨개질 해준 땅콩이를 들고 다닌다.

원래는 곰인형인데 내가 몸만 만들어 두고 얼굴을 완성 시키지 못한 채 몇년이 흘렀고,

그 사이 이녀석의 정체성은 땅콩이 되었다.

요즘은 우리가 하도 휘두르고 다녀서 인형이 아닌 쌍절곤으로 다시 정체성이 바뀌는 중... (몸이 길어짐)

 

우리가 찍은 땅콩이 사진(다리 사이에 튀어 나온거 거시기 아님... 의도한거 아님...)

 

 

 

4.

막둥이는 정말 못말리게 귀엽다.

:

© 수인

 

 

  족구팀 아저씨들과 미니 경기를 하면서였다. 발제간이 좋은 아저씨들 이었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여성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몸이 닿는 것을 조심스러워 했다. 나는 아저씨들의 그런 심리를 이용해 더 열심히 달려들었다. 당황한 아저씨들은 나에게 공을 빼앗기거나 자신의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뭔가 게임으로 치자면 나에게 새로운 아이템 하나가 생긴 것 같았다. 조금 치사한 방법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왠지 으쓱한 기분으로 경기를 마치고 나오는데 코치님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해원, 이제 보니 아주 쌈닭이었네요.”

 

숨겨왔던 나의 본능이 자극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자주 싸우고 제멋대로였던 어린이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면서는 좀처럼 싸울 일이 없었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잘 싸워주는 남편이 항상 옆에 있었기 때문에 밖에서 내 본성을 들어 낼만한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간혹(아니, 자주) 아이들에게만 숨어있던 거친 본성이 들어났는데, 그럴 때는 매번 부끄러웠고 언제나 후회했다. 그러나 축구를 하며 들어난 나의 쌈닭 본능은 부끄럽기보다는 기뻤다. ‘그래, 축구를 하려면 쌈닭 정도는 돼야지!’ 하는 비장한 마음도 생겼다.

 

  하지만 몸빵으로만 대적하기엔 내 몸은 빈약하기 그지없기 때문에, 요즘은 팔 쓰는 법에 대해 생각한다. 야수는 못 되더라도 쌈닭의 본능으로 재빠르게 상대를 낚아채고 먼저 어깨를 집어넣으며 치사하지 않은 방법으로, 하나의 축구 기술로서 팔을 쓰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언젠가 또 코치님이 한 말이 떠오른다.

 

“축구에서 팔을 잘 쓰는 사람이 되면 진정한 고수의 반열에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발로 하는 축구에 왠 팔?’이란 생각에 의아했는데, 이제야 그 말 뜻을 알겠다. 하면 할수록 축구가 발로만 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의 모든 부분을 잘 쓸 줄 알아야 진정한 쌈닭 축구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 간다. 

 

  요즘은 날이 많이 더워져 운동장을 한 바퀴만 뛰어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잠시 쉬며 먹는 미지근한 물이 그렇게 달 수가 없다. 마지막 훈련으로 미니 경기를 할 때 팀 구분을 위해 망사 조끼를 입는데, 그 조끼를 받아 들 때면 입기는커녕 그 망사 조끼만 입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아, 웃통 벗고 싶다.’ 어젠가 인터넷에서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이 완전히 뒤바뀐 세상을 표현한 프랑스 단막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오래 전에 본거라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선명하게 남아있는 한 장면이 있다. 조깅을 하는 장면이었는데, 환한 대낮에 한 여성이 윗통을 다 벗고 뛰어가는 모습. 출렁이는 가슴을 그대로 노출한 채 누구보다 가볍게 뛰어가는 그 여성의 모습은 시각적으로 느끼는 이질감과는 달리 보는 내 마음에는 굉장한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요즘 같은 날씨에 훈련을 하다보면 그때 그 여성이 자주 떠오른다. 남자들은 더우면 웃통 잘만 벗던데. 왜 나는 벗으면 안 되는지 심술이 나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 ‘웃통 벗고 싶다.’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면 코치님은 잠시 당황한다. 그런 코치님을 뒤로 한 채 나는 옆에 있는 친구들에게 나중에 우리끼리 한밤중에 모여 웃통 벗고 축구 한번 하자며 낄낄댔다.

 

  올해는 몇 년 째 실패중인 ‘비키니입고 수영하기’ 대신 ‘브라탑을 입고 축구하기’를 목표로 삼았다. 며칠 전 감격하며 봤던 ‘사이렌’이라는 프로그램에 브라탑을 입고 땀 흘리던 언니들의 모습에 반해버렸기 때문이다. 많은 면에서 감동과 전율을 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특히 그녀들의 근육질 몸과 그 몸을 이용하는 능력에 감탄했다. 팔씨름 결승을 앞두고 “옛날에 팔씨름 대회에서 일등을 했는데 상대 애 팔뼈가 부러졌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소방언니를 볼 때는 울컥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여자가 팔씨름을 잘하고, 삽질을 잘하고, 덩치가 커서 각광 받는 이 순간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곡절들이 있었을까. ‘사내놈 같이’라는 수식어 뒤에 얼마나 많은 놀림과 수모를 겪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시간들을 끌어안고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 하는 사이렌 언니들의 모습에, 그리고 그렇게 다져진 근육질 몸매에 크게 감동했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에서 김혼비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사실 그저 축구가 좋아서 할 뿐인데 얼결에 운동이 된 거지만, 또 생각해 보면 모든 운동이 그런 식이다. 사르트르의 ‘앙가주망’개념을 살짝 빌려 표현한다면, 어쩌다 보니 생긴 ‘자연적인 연루’가 참여적인 연루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축구가 좋아서 할 뿐인데, 개인적인 불쾌함을 견디지 못해 맞섰을 뿐인데, 체육 대회에 나가지 못해 속상해서 상의했을 뿐인데, 그냥 보이는 대로 엄마를 그려 갔을 뿐인데.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을 뿐인데. 사회가 욕망을 억눌러서 생겨나는 이런 작은 ‘뿐’들이 모여 운동이 되고 파도처럼 밀려가며 선을 조금씩 지워 갈 것이다.”

 

  내가 축구 글쓰기를 하며 나도 모르게 ‘투쟁심리’가 생긴다는 말을 종종 써왔는데, 나도 모르게 생긴 이 마음의 이유도 비슷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나는 그저 축구가 좋아서 할 뿐이었는데. 축구를 하며 한 계단 성장 하는 것이 나의 한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한계를 함께 뛰어 넘는다고 느껴 왔던 것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당연한 것이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그 당연함을 누리지 못하는 쪽의 대부분이 여성들의 몫이라는 사실이 자주 서럽지만 또 한편 그것을 넘어설 때 마다 경계와 선을 지워가는 모습이 너무너무 멋지다. ‘누구 같이’가 아니라 그저 ‘나 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이 행위들이 그 자체만으로 운동이 된다는 사실이 서러웠던 내 마음을 조금은 다독여 준다.

 

 

 

 

 

:

https://youtu.be/UCGUY7pdh38

[온스테이지] 김일두-문제없어요

 

 

나이가드니 처음에 대한 기억이 자주 희미해 진다.

 

내가 김일두 아저씨를 처음 좋아했던 때는 언제 였을까. 이 기억 역시 희미해 졌지만 어렴풋 떠올려 보면 '문제없어요'를 부를 때쯤 이었던 것 같다. 단칸방에 덩그러니 기타 하나 들고 앉아 잔잔한 멜로디와는 대조적으로 강렬한 가사를 읊으며 노래 하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찾아보니 그게 벌써 10년 전이다. 오랜만에 그 영상을 보는데 그때 덩그러니 마루에 앉아 모유수유를 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기타를 들고 어딘지 쓸쓸하게 노래하는 일두 아저씨의 모습과 울림이를 안고 어딘지 쓸쓸하게 모유수유를 하던 내 모습이 닮아 보인다. '엄마들 보다 아름다운 당신'아 아니라 '엄마들 다음으로 아름다운 당신'이라고 말하던 그의 가사에 나는 이미 위로 받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후에 나온 일두 아저씨의 음악을 들으면서도 나는 울고 웃으며 자주 위로 받았다.

 

그랬던 김일두 아저씨가 지난해 옆 마을에서 공연 했다. 저녁시간, 특히 아이들의 취침시간에 겹치는 일정은 최대한 참여하지 않는 것이 우리집의 암묵적 규칙인데 그것을 과감히 깨고 다섯 식구 모두가 (우리기준)한밤중에 공연을 보러 갔다. 공연을 보러 가기 전 신나게 글라스테코를 하던 아이들을 이용해 작은 선물도 하나 만들어 갔다. 이른바 '용맹정진 열쇠고리'. 처음 본 일두 아저씨의 공연은 눈물을 찔끔 흘릴 만큼 좋았고 특히 노래가 시작한지도 모르고 듣고 있다 가슴에 사무쳐버린 '머무르는 별빛'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지난주에 일두 아저씨 인스타그램 피드에 그때 주었던 용맹정진 열쇠고리 사진이 올라왔다. '충남에서 만난 꼬마친구에게 받은 선물' 이라는 소개와 함께. 내가 nell 베이스 정훈오빠를 쫓아 다니던 시절, 그 오빠가 내가 선물한 모자를 쓰고 보이는 라디오에 나왔을 때 만큼이나 가슴이 뛰었다. 아이들에게 보여주니 아이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이음이가 자기도 답글을 쓰고 싶다고 해서 내 계정을 빌려 댓글을 썼다.

 

"김일두 아저씨 저가 준 그 고리 야광 되는거 알아요? 언젠가 또 만나요🎸-예산에서 만난 꼬마친구가"

그런데 그 댓글에 일두 아저씨의 답글이 다시 달렸다.

"야광 이었어? 몰랐어. / 알려주어 고마와 우리 다시 만나면 짜장면 먹자 건강하게 잘 지내."

 

이음이는 우리 형이 짜장면을 좋아하는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 하다가 하지만 자신은 볶음밥을 먹을 것이라고 야무지게 다짐도 하면서 한참을 떠들다 잠들었다.

 

 

 

 

오늘은 며칠 전에 구입한 김일두X하언진 <34:03> LP 를 꺼냈다. 나는 이 앨범에 '해당화'와 '가난한 사람들'을 가장 좋아 한다.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가도 정확히하게 와닿아버리는 이 요상한 음악을 나는 그마음 그대로 오래오래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일두 아저씨의 음악을 들을 때 마다 언젠가 다시 만나 아이들과 나란히 짜장면 먹는 모습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

 

© 반반FC

 

내가 축구를 시작하기 전까지 나에게 ‘운동장에 나와 같이 공 차자’고 물어본 사람은 없었다. 나 스스로도 밖으로 나가 공은커녕 달리기조차 해 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새벽에 일어나 축구를 보면서도 은연중에 ‘축구는 보는 거지 뛰는 건 아니야’라며 선을 그었던 것 같다. 아이를 낳고부터 내 이름 앞에 붙는 ‘애 엄마’이라는 수식어는 실로 고귀하면서도 무거워서 물리적으로나 인식적으로 수많은 경계를 만든다. 그 경계는 잔가지를 쳐주고 나아갈 길을 명확하게 보여 주는 대신 ‘영역 밖의 일’에 쉽게 겁을 먹게 한다. 그래서 내가 직접 피치 위를 달리는 모습은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나를 TV 밖으로 이끌어 준건 매일 같이 뛰자 말하던 우리 집 어린이들도 아니고, 매 경기 골을 넣고 있던 손흥민 선수도 아니고, 골때녀 같은 TV프로그램이 생겼다는 소식도 아닌 내가 알고 있던 동네 언니들이 여자 축구팀에 나가 뛰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 언니들은 나보다 나이도 많고 심지어 애도 많은 언니들이었다. 속으로 그어놓은 경계선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요동쳤다. 내가 뛰진 않더라도 그 언니들이 뛰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축구를 하러 운동장에 나갔다.

 

내가 지금 뛰고 있는 팀 ‘반반FC’는 면단위 작은 마을에 생겨난 여성축구팀이다. 2021년 여름부터 시작했으니 올해로 2년쯤 되어간다. 우리 팀의 가장 큰 특징은 팀 훈련도 팀원들의 생활 반경도 모두 30분 안팎에서 해결된다는 거다. 주 경쟁 상대들도 대부분 비슷한 생활반경 안에 있는 동네사람들이다. 같은 동네 고등학교 여자축구부와 초등학교 축구부, 그리고 족구팀 아저씨들이다. 이들과의 매치가 우리 팀의 가장 큰 행사 이자 재미다. 이렇게 동네사람들과 하는 축구는 경기 후 공공장소에서 마주쳤을 때 주고받는 인사가 특징적인데. 뜨거운 경기를 했을 때와 차갑게 식어 있는 일상 사이의 커다란 갭 속에서 주고받는 인사란. 정말 뻘쭘하고 어색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나는 내 자식의 친구와도 치고받으며 경기하고 있는 실정이니 그들과 마주쳤을 때 그 복잡한 미묘한 심경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 팀 이름 ‘반반FC’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사실 공식적인 의미를 두고 있진 않다. 한창 팀 이름을 정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몇 주 동안 뚜렷한 이름이 정해지지 않아 고민하고 있던 차에 팀원 중 한 사람(조조)이 강아지를 데려 왔고 그 강아지 이름이 ‘반반’이었다. 그 이름을 듣고 코치님이 “우리 팀 이름도 ‘반반’으로 하는 거 어때요?”라는 제안을 했고 다들 별 의견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팀 이름이 정해졌다. 만약 그때 온 강아지 이름이 ‘바둑이’라던가 ‘방울이’였다면 바둑이FC 나 방울이FC가 됐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름을 정한 과정도 너무 우리다워서 웃음이 난다. 그래도 코치님은 남의 집 강아지 이름을 가져온 것이 마음에 좀 걸렸는지 그날 밤 이런 문자를 남겼다.

 

 

읽고 나니 왜 반반이 되었는지는 더욱 모르겠다. 하지만 코치님 특유의 화법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또 웃음이 났다. 우리 코치님에게는 두 가지 화법이 있다. 하나는 ‘무슨 말인지 대략은 알겠지만 정확히는 모르겠는’ 화법이고, 또 하나는 ‘장황하게 이야기하지만 무슨 말 인지 모르겠는’ 화법이다. 어찌 됐든 말이 끝나면 머리 위에 물음표 하나가 생기는 화법인데, 요즘 팀원들 사이에서는 이런 대화법을 코치님의 이름을 따와 ‘민웅화법’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마지막에 남는 그 물음표 때문에 재차 물어서 확인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얼추 익숙해진 팀원들이 대신 요약정리를 해주거나 대충 알아듣고 알아서 움직인다.

 

별다른 의미 없이 만들어진 이름이지만 나는 속으로 혼자만의 의미를 만들어 두었다. ‘일상 반 축구 반’ 일상만 유지하다 축구를 잊어버리거나 축구에만 빠져 일상을 해치지 않고 반반씩 균형을 잘 이루는 것. 그것이 내가 축구인(?)이자 생활인으로서 축구와 나를 오래오래 사랑하며 지낼 수 있는 힘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농 반X라는 말이 있듯이 나에게는 이제 반축 반X의 삶이 시작된 샘이다.

 

그러나 내가 그 균형을 잘 이루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올해는 축구와 글쓰기만 하겠어!"라고 다짐 하고는 일주일에 세 번 축구를 가고 한 달에 한 번 축구 글쓰기 모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당찬 포부와는 달리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는 이 상황이 좀 우습다. 준비하던 대회가 끝나 이제 다시 일주일에 한 번 축구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축구하는 날은 나에게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다. 무엇보다 같이 훈련하고 같이 기뻐하고 같이 분해하던 그 순간들이 쌓여 우정이 싹트고 추억이 만들어졌다. ‘이제 공동체는 질렸어’ ‘더 이상 관계 속에서 나를 들어내기 싫어’ ‘혼자가 최고야’하며 숨으려고만 했던 내가 ‘우리는 함께여야 해’ ‘우리 팀이 최고야’를 외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정확하고 섬세한 관계는 아니지만 둥글고 뭉툭한 관계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 우정에 기대어 부끄러운 플레이를 하고 부끄러운 인성을 들켜 머리를 쥐어뜯어도 발걸음은 다시 운동장을 향해 간다.

 

 

 

 

 

:

1.


다시 서른세 살이 됐다.(만 나이로) 작년 서른세 살은 새로운 시작이었고, 올해는 도약하고 싶은데 여전히 비틀거리고 갈팡질팡 한다. 그러다 훌쩍 3월이 왔고 내 생일도 3월인데 나는 3형제의 엄마고 인격도 3개쯤 돼서 그런지 갑자기 3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3이 두 개나 들어가는 나이를 두 해나 맞이하고 있는 나를 좀 더 특별하게 대해줘야겠다 마음먹어 본다. 방황이 일상이 되어가는 것 같은 삶 속에 매일 좌절하다 보면 이 방황에 끝이 있을까, 이 방황이 끝나면 또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이 참 고달프게 느껴지다가도 오히려 한발 물러서게 될 때가 있다. 한 발짝 물러서면 문제 아닌 것을 너무 오래 문제라 생각하며 붙잡고 있는 것도 보이고 비틀거리면서도 방향은 잘 맞춰 가고 있네 하며 안도한다. '느리고 휘청거려도 목적지만 잘 찾으면 되지.' 하고 생각했다.
 

머리 잘랐음

 
 
2.


얼마 전 9시까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8시 반에 일어났다. 깜짝 놀라 부리나케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는데 덩달아 늦게 일어난 남편이 "아침 안 먹고 가야 되는거 아니야?"라고 말했다. 내가 "늦어도 아침은 먹어야지."라고 답하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울림이가 "아빠 나는 태어나서 아침 안 먹은 적이 한 번도 없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새삼 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 10년 넘게 매일 빼먹지 않고 한 일이 있네.' 이 정도 꾸준함이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메여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잘 지키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에 자부심이 생겼다.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세계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나와 남편인데(주로 남편은 음악감상, 나는 스포츠 시청) 간혹 말동무가 필요 할 때면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최근엔 남편이 술에 취하면 나에게 자꾸 자신이 소크라테스식 화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내면의 이야기를 캐묻는다. 나는 남편의 그 진지한 태도가 재밌기도 하고 나 역시 내 내면의 이야기가 궁금하여 성실하게 답한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 화법이 진짜 효과가 있는 건지 아니면 나를 향한 그의 진심 덕분인지(내 느낌은 둘 다 아닌 거 같긴 한데) 어쨌든 나름 도움이 된다.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데 대체로 결론은 '진심을 다해 살아갈 것.' 
 

아랫집 갈 때는 이렇게 인사 하고 뒤도 안 돌아 보고 가는데, 어린이 집은 왜 안 가니...

 

 

이번 주말에는 홍성군 여자 축구팀의 일원으로 도 대회에 나간다. 아직 선발로 뛸 수 있을지 후보 선수로 응원만 하다 오게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덕분에 아주 알차게 훈련하고 있다. 그 사이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은 조만간 다시 풀어내기로 하고. 남편에게 "올해는 글쓰기와 축구만 하겠어!"라고 선언하고는 일주일에 세 번 축구를 하고 한 달에 한 번 축구 글쓰기를 한다. 과몰입러답게 어느 한쪽으로만 자꾸 쏠리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요즘은 아이들과 열심히 NBA를 본다.
 

당진 원정, 태안-당진-홍성 팀

 

 
4.


이 글을 쓰기 시작 했을 때는 3월이었는데, 어느새 4월이 됐다.
 

 
 
어제는 울림이랑 한바탕 싸웠다. 우여곡절(남편 혼자 고군분투) 끝에 잘 화해 해놓고 금세 다시 똑같은 상황으로 싸울 뻔 했다. 그 모습을 지켜 본 남편은 '울림이가 아직 아이 같은 면이 있네'하고 안심했다가 '해원이도 아직 아이 같은 면이 있네'하고 걱정했다고 한다ㅋㅋㅋ 나는 울림이와 싸우고 나서 한참 괴로워 하다 울림이 보다 10배는 더 극성이었던 나의 어린시절을 생각하며 '이정도는 양호하지' 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이와 크게 싸우고 나면 마음이 무척이나 힘든데, 그래도 거기에 매몰 되어 있지 않으려 노력한다. 격해진 감정에 상처뿐인 말들은 걷어내고 아이와 나의 진심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 해 본다. 아이가 받고 싶었던 사랑과 내가 주려던 사랑의 모양이 달랐음을 찾아내고 다시 천천히 맞춰 간다. 싸울땐 다신 안 볼 것 처럼 으르렁 거려도 금방 다시 마주 보며 웃을 수 있는 관계라는 것에 안도한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잘 쌓아왔기 때문이라 생각하면서.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짐한다. 사랑하고, 더 사랑하자고. 아무런 이유없이 그냥 사랑하자고.
 

 
 
 
 
 

:

© 황바람

 

 

  운동장에 공이 놓여 있으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나에게 이 공을 뺏어보라며 발제간을 부리셨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달려들었지만 그 공을 한 번도 뺏어 본 적이 없다. 몇 번 더 달려들다 약이 올라 다른 데로 가버리곤 했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축구를 잘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저 어른과 아이의 체급 차이에서 나오는 차이라고 생각했을 뿐. 아버지가 실제로 운동경기를 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아버지 삶에서 운동이란 몸을 쓰며 즐기는 운동보다 부도덕한 사회와 싸우는 운동이 더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축구 실력을 알게 된 건 고등학생이 되고서다. 나는 고등학교를 전교생이 6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시골 학교에 다녔다. 아버지는 그 학교에 농사 선생님 이셨다. 우리 반은 유독 남자 애들의 비율이 높았는데 그 친구들은 대부분 축구에 미쳐 있었다. 수업시간 외 모든 시간에 축구를 했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어느 날 학교에서 풋살 리그를 만들었다. 3, 4팀 정도가 만들어졌고 워낙 작은 학교라 선생님들도 함께 했다. 그 경기들을 보며 아버지의 훌륭한 축구 실력을 알게 됐다. 친구들은 아버지를 그 당시 유명했던 해외 축구 선수 '이니에스타'의 이름을 따와 '이니광훈'이라고 불렀다. 리그의 열기는 계속해서 달아올라 팀끼리 유니폼을 주문하고 해설진이 생겨나고 경기도 많아졌다. 나는 그 열기와 분위기가 좋아 자진 매니저 신청을 했다. 우리 팀 경기가 있을 때 주변에 앉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응원하고 선수들에게 물을 떠줬다. 물까지 떠 준 건 자진 수발러가 된 것 같아 이제와 좀 수치스럽기도 한데, 어쨌든 매일 빠짐없이 나가 최우수 매니저 상도 받았다. 지금 와 생각하면 ‘그때 왜 직접 경기를 뛸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후에 여자 축구 리그도 생겨났지만 그때는 고3 이기도 했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건 내 영역이 아니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생각하는 나, 나아가 여성에 대한 영역을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있었다면 이제와 이렇게 축구와 사랑에 빠지며 느끼는 억울함은 덜 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학에 가서는 나도 아버지처럼 몸으로 즐기는 운동보다 사회와 싸우는 운동에 더 관심이 많았다. 스포츠도 전략을 잘 세워야 경기를 잘 치룰 수 있듯 사회와 어떻게 잘 싸울 수 있을지 배우기 위해 사회학과에 갔다. 그러나 어딘가 잘못된 전략을 짰는지 운동이 아닌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일찍 결혼을 하고 말았다. 결혼 후엔 집안일과 육아로 나름 잔 근육을 키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만져 본 내 팔다리에는 흐물대는 물살뿐이었다.

 

  밖으로 나가 동네 사람들과 축구를 하게 된 건 재작년 여름. 방구석 축덕으로 산지 1년이 좀 지났을 무렵이었다. 티비로 보는 축구와 내가 직접 뛰는 축구는 차원이 달랐다. 첫 훈련을 받자마자 그동안 못 한다고 욕했던 모든 축구선수들에게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티비에 나오는 축구 선수들은 잘 하건 못 하건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존경심이 생겨났다. 첫 훈련 후 미니 경기를 하는데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폐가 터질 것 같이 아팠다. 그런데도 집에 돌아오는 길은 개운했다.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혼자 배우고 혼자 하는 것이 더 재밌었는데 지금은 나만 잘하는 것보다 함께 잘하는 게 더 재밌다. 자기가 뛰는 자리를 잘 지키고 주변 친구들과 텔레파시를 주고받으며 패스를 잘 찔러 주었을 때의 짜릿함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매주 축구를 하러 운동장으로 나간 지 벌써 1년 반이 넘었다. 시간에 비해 실력은 너무 미미하게 늘었으나 그래도 성실히 나갔다는 것에 뿌듯하다. 근면함으로 어쩌다 보니 주장 완장도 얻었다. 괜히 부끄러워 스스로 바지 주장이라 칭하지만 꽤나 큰 자부심이다. 다른 동네 사는 친구들에게 은근슬쩍 자랑하기도 좋다. "나 우리 동네 축구부 주장이야"라고 말하는 내 자신이 좀 멋지다. 여전히 시합을 하고 난 뒤나 훈련을 하면서 스스로 부족한 모습(실력 적으로나 인성 적으로)을 마주 할 때면 '이런 내가 계속 주장을 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지만 그만큼 우리 팀에 대한 애정도 날로 늘어간다.

 

  이제 할머니가 되어서도 축구를 하는 게 꿈이다. 할아버지가 된 아버지도 아직 발제간이 훌륭하신걸 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이제는 아버지의 발제간에 속지 않고 한 번쯤 공을 뺏을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언젠가 이니광훈을 제치는 그날을 위해 이번 주 훈련도 열심히 해야겠다.

 

 

 

 

 

:

© 황바람

 

 

한 이틀을 앓아누웠다. 일 년에 한두 번 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때가 오는데 그때가 바로 어제였다. 그래도 축구를 시작하고 꽤 오래 괜찮았는데. 이상하게 어제는 여러모로 힘든 일의 연속이었고, 그 정점이 앓아 누움으로 끝났다. 시작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과감히 선택한 새벽 축구경기 시청부터였다. 꾸역꾸역 일어나 본 축구 경기는 없던 병도 생길 만큼 엉망인 경기력으로 끝났다. 남편이 출장으로 가져간 내 차에 울림이 가방이 딸려가 아침 댓바람부터 대성통곡. 울림이랑 싸우다 등교시간은 물론 아침에 잡혀 있던 나의 약속 시간도 늦어 버렸다. 해야 할 건 많은데 오전에 하기로 했던 작업은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렸다. 그래도 맛나게 얻어먹은 점심으로 기분전환 하나 했건만. 그마저도 된통 체해서 소화가 되기도 전에 밖으로 다 나와버렸다. 그 바람에 오후에 잡혀 있던 울림이 치과, 이음이 피아노는 다 취소하고 아이들만 겨우 하교해 계속 누워 있었다. 무엇보다 너무 아팠다. 이번 주까지 마감해야 하는 일이 두 개나 있는데.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파왔다. '왜 하필 지금...' 억울했다. 가족들에게도 미안했다. 그래도 하루 종일 출장 갔다 온 남편이 최선을 다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주고(넷이서 이상한 수학 문제를 계속 풀었다), 왔다 갔다 나를 살피는 아이들을 보며 눈물이 찔끔 났다. 티 내지 않고 자기 역할을 해주는 가족들이 고마웠다.

 

오늘같이 되는 게 하나도 없는 날에 항상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지금 나에게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지금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가.' 그리고 그 우선순위에 있는 것들을 헷갈려하지 않고 잘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오랜 육아, 그리고 그 시간과 함께든 나이(...)로 인해 나에게 생긴 좋은 변화는 진짜 중요한 것을 지키고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원래 나는 우선순위를 정하고 무언가 포기하는 것을 가장 힘들어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별명이 '문어발'이었다. 그때는 학교와 세상과 나 자신을 향한 열의로 가득 차 있었다. 관심 있는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다 잘하고 싶은 욕심도 많았다. 이곳저곳에 발 걸치고 있는 곳이 많아 생긴 별명이 '문어발'이다. 몸은 하나인데 다리를 여러 개로 뻗다 보니 모두 조금씩 부족해 욕을 먹거나, 몇 개만 제대로 하고 다른 것은 제대로 못해 욕을 먹거나. 어느 쪽이든 욕을 먹었다. 욕심을 버리고 한 가지는 아니더라도 몇 가지에 집중하는 게 어떻겠냐는 선생님들의 충고는 뒤로한 채 나는 더욱더 열심히 다리를 뻗어 나갔다. 그러나 가지가 많은 나무일수록 양분이 부족하듯 제 역할을 잘하지 못해 이런저런 피해를 주기 일쑤였다. 이것저것 발을 걸치다 보니 늘어나는 오지랖에 잘하고 싶은 욕심이 이기심으로 변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이 생긴 순간, 세상에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겨난 순간. 나의 문어발은 자연스레 하나 둘 떨어져 나갔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관계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로 한껏 예민해져 가족들에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더 힘들었다. 이제는 '편하니까 막 할 수 있는 거다'라는 말이 싫다. 아끼고 좋아하고 익숙해져서 생긴 편안함을 나의 화풀이 대상으로 삼고 싶지 않다.(내가 아이들에게 자주 그랬고, 많이 후회했으므로) '얼마 있지도 않은 나의 에너지를 내가 잘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은 누군가들에게 빼앗기지 말자. 잘 아껴 두었다가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그래서 곁에 오래오래 있어주고 싶은 이들에게 아낌없이 주자.'하고 자주 생각한다.

 

이제는 외발 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 발 정도로는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슨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 삶에 1순위는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과 균형을 잘 이루며 할 수 있는지, 그럴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는지를 먼저 떠올린다. 그렇게 필요 없는 관계나 활동반경을 줄이고 나니 이제 뭐가 진짜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가 모나고 부족한 모습을 보여도 옆자리를 지켜주는 사람들. 같이 가보자 손 내밀어 주는 사람들. 내가 나를 믿지 못할 때도 나를 믿어 주는 사람들. 그 사람들로 하여금 나도 잘 못 믿던 나를 믿게 된다. 내가 나를 믿게 해주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내 삶의 1순위인 것이다. 걸러내고 나면 가벼워진다. 가벼워지면 여유가 생기고 여유가 생기면 크게 별 일일 것이 없다. 그래서 응원하던 축구팀이 엉망인 경기를 해도, 며칠 앓아누워 억울 한 날에도, 그렇게 되는 날이 하나도 없는 날에도 나는 금방 일어설 수 있다. 

 

 

 

 

 

:

 

 

얼마 전 메일 정리를 하다 결혼식을 준비하며 남편이 보냈던 메일을 발견했다. 주례 선생님이 결혼을 앞두고 고민거리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말씀하셨던 것에 답하는 메일이었다. 날짜를 보니 결혼식 5일 전.

이 메일을 보니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우리 남편은 이때도 걱정이 많았네. 난 순탄하게 진행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우리의 기억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올해로 결혼한 지 벌써 10년 차다. 뱃속에 있던 울림이는 이제 11살이 되었다. 되돌아보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그 시간들이 속절없이 흘러가 버린 것만 같아 조금 슬프다. 

 

우리는 전통혼례로 결혼했다. 겉으로 보는 모습만 전통혼례고 진행은 모두 우리 마음대로 했으니 퓨전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갑작스럽게 준비하게 된 결혼식이었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고민해 왔던 사람들처럼 우리가 하고 싶은 결혼식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 고무신 신고 도시를 누비던 여자와 머리를 허리까지 기르며 전 세계를 누비던 남자가 만났으니 정해진 방식대로 진행하는 것이 성에 찰리가 없었다. 종이를 실로 꿰매어 청첩장을 만들고, 청첩장에 하나하나 편지를 쓰고, 웨딩사진, 옷과 화장, 행사 진행과 계획을 모두 우리가 도맡아 했다. 틀에 박힌 뻔한 결혼식은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하나. 지나치게 소비 중심적인 결혼 문화를 따라가고 싶지 않은 마음 둘. 주변에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많아 그들과 함께 하면 재밌는 것들을 할 수 있겠다는, 그들이 주는 자신감이 셋. 이 세 가지 마음이 우리를 움직이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이런 반골기질의 토대를 만들어 주신 부모님 영향도 컸다. 오랜 세월 노동운동과 교육운동을 하며 살아오신 부모님은 우리의 이런 결정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사실 결혼의 핵심 포인트는 서로 다르게 살아온 두 가정의 만남이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의 가정에 대해 이해나 설득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부모님들이 나와 남편이 만나기 전부터 각별히 알고 지내온 사이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소 갑자기 준비하게 된 이 결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각자 부모님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황바람

 

우리가 연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부모님들이 오랫동안 이어온 '글과 그림'이라는 모임 덕분이었다. 남편과 사귀기 훨씬 전에, 내가 중학생 때 이 모임에서 남편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남편이 아마 20대 초반쯤 됐을 거다. 거기서 나는 나처럼 부모님 따라 놀러 온 어린이 무리에 놀고 있었고, 남편은 어른들 무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까맣고 깡마른 몸에 노랗고 긴 머리. 호주에서 막 돌아와 잼배를 치는 히피 같은 그의 모습은 어린 마음에도 정말이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이상한 모습과 이상한 기억으로 남아 있던 그 사람이 내가 스무 살이 되고 처음 이 모임을 가게 되었을 때. 하필(?) 그때 너무나 멀끔한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마른 몸은 그대로였지만 짧은 머리에(이 부분이 가장 중요했던 것 같다) 잼배가 아닌 DSLR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하필이면 또 그 여러 사람들 중에 20대가 우리 둘 뿐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술에 취해 같이 등을 맞대어 별을 보았고,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대화를 나눈 뒤 번호를 주고받았다.(이 상황에서 남편과 나의 의견이 갈리는데. '먼저 별을 보러 가자고 한 사람(나)'과  '먼저 번호를 따간 사람(남편)' 중에 누가 더 관심이 있었는지에 대해 아직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주고받은 번호로 우연을 가장한 몇 차례의 만남 후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결혼식은 부모님 만큼이나 부모님의 그 모임에서 더 큰 잔치였다. 덕분에 가족들 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적극적인 지지와 응원을 몸소 느꼈다. 사람도 많고 진행도 직접 하느라 정신없는 결혼식이었지만 양가 부모님 모두가 함께 손을 잡고 입장을 하고, 식구들 모두가 나와 함께 율동을 했던 순간들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남편이 살던 아주 작은 자취집에 온 식구들이 모여 율동 연습을 하고, 결혼식 준비를 가장한 술자리, 그리고 모두가 뒤엉켜 잠들었던 그 순간들은 더 기억에 남고. 식중에 내가 편지를 읽다 부모님이 산딸기 따주셨던 이야기를 하며 오열하는 바람에 여전히 친구들에게 '산딸기 뿌엥'으로 놀림받지만 꽤나 즐겁고 만족스러운 결혼식이었다.

 

결혼식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이벤트 기획에 재미와 자신감을 얻은 우리는 그다음 이벤트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적절한 시기에 찾아온 큰 이벤트가 있었으니, 바로 큰 아이 울림이의 돌잔치였다. 우리가 귀촌해 완주에 살게 된 지 1년 차쯤 됐을 때다. 마침 옆동네 전주 청년몰에 작은 식당을 하던 친구를 필두로 음식과 장소가 해결되고, '이렇게 해봐' '저렇게 해봐'하는 옆 사람들의 말에 혹해 생각보다 일을 크게 벌였다. 결혼식 때와 마찬가지로 재주 많은 친구들을 동원하고, 재주 많은 가족들까지 적극적으로 동원했다. 부모님들이 각자 하나씩 노래하고 춤추고 장구치고 시를 읽으니 벌써 행사의 반이 채워졌다. 이곳저곳에서 달려와 준 친구들이 마치 원래 역할이 주어 진 듯 알아서 척척 진행해 주어 어느새 모두가 함께 만든 돌잔치가 되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며 진정한 축하와 응원, 그리고 커다란 지지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 어떤 비싼 선물 보다도 값진 선물이었다. 생각해 보면 선물 같은 이 인연들을 자꾸 보고 싶고 자랑하고 싶어 우리는 이렇게 자꾸 일을 벌이는 걸 지도 모르겠다. 

 

© 노해원

 
가족 이벤트 들을 하나 둘 성공적으로 마치고, 우리의 이벤트 병은 범위를 더 넓혀 지역으로 뻗어 나갔다. 결혼식도 돌잔치도 본래는 사적인 목적을 갖고 있는 행사이기 때문에 함께 하는 친구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 마을, 우리 지역 사람들과 친구들이 함께 즐거울 수 있는 이벤트를 열어 보고 싶었다. 그때 남편과 나, 그리고 내 영혼의 단짝 친구 다솜이가 매일같이 모여 쿵짝대던 청년모임 '다해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이름 앞글자를 따 만든 모임 이름 '다해바'는 '자유롭게 무엇이든 다 해보자'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활동이라 하기엔 너무 사소 했지만 그게 우리의 목적 이기도 했다. 더 사소하고, 더 내밀한 곳으로 향하는. 우리 셋은 여러모로 죽이 잘 맞았는데 특히 잘 맞는 것은 음주가무를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지역에서 락페스티벌을 열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 당시 완주는 이제 막 청년들이 웅성웅성하던 때였다. 완주 CB센터 사무국장님의 도움을 받아 고산시장에서 200만원의 예산을 얻었다. 그 돈으로 낮에는 프리마켓을 열고 저녁에는 락페스티벌을 했다. 우리의 이상을 채우기엔 적은 예산이었지만 지역에 실력 깨나 있는 뮤지션들, 그리고 옷깃만 스쳤던 서울에 유명(우리 입장에서) 인디 뮤지션들까지 염치 불문 열심히 섭외했다. 사실 우리 좋자고 시작했던 일인데 마을 사람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나와 밤늦게까지 행복해하는 모습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이벤트 중독자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여전히 조금의 틈만 보이면 달려들어 마을 예술가 친구들과 공연, 전시, 잡지 만들기 등을 기획한다. 나는 왜 이런 걸 좋아하게 되었을까. 왜 계속 이런 일에 눈이 가고 마음이 가서 자꾸만 움직이게 되는 걸까.
 

© 황바람 / 복태와 한군(선과 영)

 

허례허식이 없는 삶을 살고 싶다. 요즘 글을 쓰면서도 자주 생각한다. 잔뜩 꾸미는 글은 쓰지 말자고. 내가 계속 무언가 기획하는 것도 비슷한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우리답게 만들어 가고 싶다. 허례허식 없이 진심을 담는 일들을 계속 만들어 가고 싶다. 나는 지금까지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산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풍요롭게 살아 본 적도 없다. 그래도 경제적 관념으로 봤을 때는 가난하게 살았던 시절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함 없이 살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가난 속에서도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배워왔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도 그 진심이 닿는 곳. 그곳에서의 풍요를 배우고 느끼며 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