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바람

 

 

번개장터를 열심히 뒤져 운동복과 축구화, 운동가방을 샀다. 남편은 그런 나를 보며 '또 시작됐군'하는 표정이다. 나는 덕질이 취미다. 아마 중학교 때 밴드 NELL을 쫓아다니면서부터 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만화 잡지를 샀던 때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런 것들을 기점으로 꾸준히 얕고 넓은 덕력과 맥시멀 리스트 수집왕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 덕질은 그 행위 자체의 즐거움도 있지만 물건, 혹은 그 대상과 쌓이는 추억 때문에 버리지도 끊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세상엔 이쁘고 귀여운 것들이 너무 많고, 그것들이 하나 둘 쌓여 있으면 기분이 좋다.(어디선가 남편의 절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엄마가 되고 덕질하는 것이 더 좋아지고 자랑스러워진 부분도 있다. 아이들에게 무언가 열렬히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왠지 모르게 뿌듯하다. 아이들을 핑계로 덕질의 범위를 쉽고 편하게 넓혀 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두 번째 남편의 절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느 날 남편과 앞으로 아이들이 '어떤 사람으로 크면 좋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남편이 "나는 우리 아이들이 덕후로 컸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했다. '우리가 하고 싶은걸 아이들에게 바라지 말자'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라는 말을 가슴에 깊이 새겨놓은 우리 부부가 아이들에게 바라는 단 한 가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열렬히 마음을 쏟고, 그것으로 보람과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는 것. 그것이 '아이들이 덕후로 컸으면 좋겠다'는 말에 눌러 담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이 대화의 마무리가 여기서 끝났으면 참 아름다웠을 텐데. 언제나 이상한 방향으로 잘 흘러가는 내 마음의 또 다른 소리가 나를 일깨웠다. '그래.(?) 이제 나의 덕질을 아이들에게 물려줄 때가 왔다!' 나의 덕질을 아이들에게 전파하기로 마음먹게 된 것이다.

 

첫 시작은 만화를 좋아하는 울림이에게 무조건 먹힐 것이라 확신한 슬.램.덩.크! 초등학교 때 몇 개월간 막내 고모네서 살았던 적이 있다. 그때 중학생, 고등학생이었던 친척언니 오빠가 SBS에서 방영하던 슬램덩크를 녹화까지 해가며 보는 것을 옆에서 곁눈질로 따라 보곤 했다. 그것이 나와 슬램덩크의 첫 만남이었다. 매일 온 가족을 공포에 떨게 할 정도로 무섭게 싸우던 언니오빠가 유일하게 좋은 사이를 유지했던 시간이 슬램덩크를 보는 시간이었다. 심지어 야자 시간이 겹쳐 본방사수를 하기 어려운 날에는 서로를 위해 녹화까지 해주는 모습은 적잖은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런 언니 오빠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이 만화를 제대로 보기도 전에 대단한 뭔가가 있다고 느꼈다. 그들이 녹화해 두었던 비디오는 나에게 남아 나 또한 그들처럼 이 농구만화의 세상에 흠뻑 빠지게 만들었다. 그 비디오를 보고 또 보고 만화책도 빌려 보고 대사도 외우고 그림을 오려서 필통에도 붙이고 다이어리에도 붙여가며 열렬히 좋아했다.(참고로 나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정대만을 좋아했다) 울림이를 향한 나의 계략은 정확히 먹혔다. 덕후의 DNA는 대물림이 되는 건지 울림이에게 슬램덩크를 내 준 순간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울림이도 이 만화책을 보고 또 보고 10번 가까이 완독 했다. 뒷 이야기를 더 만들어 달라고 작가에게 편지를 쓸 뻔하고 팬아트를 그리기까지 했다.(울림이는 산왕의 정우성을 좋아한다) 이러다 올해는 슬램덩크만 보겠다 싶어 지금은 '슬램덩크 금지령'을 선언한 상태다.

 

슬램덩크의 세상에서 잠시 빠져나온 울림이는 요즘 밴드 음악에 빠져 있다. 이번 여름 엄마의 소원성취를 위해 온 가족이 펜타포트 락페스티벌을 다녀왔던 것. 그리고 갑자기 밴드 oasis에 빠진 엄마와 마흔 살 기념으로 일렉기타를 산 아빠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울림이는 펜타포트에서 보았던 크랙샷의 베이스를 보고 마음이 빼앗겨 베이시스트가 되고 싶다고 했다. 무엇보다 나는 이번 펜타포트에서 울림이와 함께 NELL 공연을 봤던 것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비록 중딩 때쫓아다녔던오빠들(NELL)의 모습과는 사뭇달라졌으나여전한 그들의 음악에 첫 번째감동. 내가 열렬히 사랑했던 그들을 이제는 그들보다 더 열렬히 사랑하는 나의 아이와 함께 보고 있다는 것에 두 번째감동. 꽤 오랜 시간 키가 작아 잘 보이지도 않는 그 자리에서 투정 없이 자리를 함께 지켜준 울림이에게 세번째 감동. 반짝이던 그 밤, 일렁이는 그 마음들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덕후와 덕후 아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덕질의 대물림은 이렇게나 아름다운 것이다. 나의 추억과 아이의 추억이 교차 되는 그 순간들이 사랑스럽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나의 덕질을 자랑스러워 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열렬히 좋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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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이의 슬램덩크 팬아트(뒤로 갈 수록 집중력이 흐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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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바람

 

첫아이 울림이를 낳고 느꼈다. 날 때부터 갖게 되는 모성은 없다고. 처음 본 아이는 귀엽기는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그때 이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뭔가 엄마 흉내를 내보려 했나 보다. 나는 뭐에 씐 사람 마냥 아직 이름도 없던 아기에게 '우리 아들'이라는 말을 썼다. "오구 우리 아들 쉬 쌌어요?" "오구오구 우리 아들 오늘도 너무 귀엽네요~" 같은. 한 일주일쯤 지나고 나니 현타가 왔다. 어느 날 퍼뜩 닭살이 돋았다. 나는 원래 보수적인 부끄럼쟁이라 남편과 사귀면서도 '자기'라던지 '여보'라던지 어떤 사랑이 담긴 애칭은 쓰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그저 나이가 많은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 그대로의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원래의 나로 돌아와 그 단어를 쓰고 있던 나를 생각하니 창피했다. 피식피식 웃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 몹시 부끄러웠다.

 

엄마라는 가면을 벗고 나니 다시금 문득문득 아이가 어색했다. '뭐지, 난 모성이 없는 사람인가'. 처음에는 내가 생각보다 좀 냉정한 인간인가 싶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사실 아주 당연한 과정이다. 아무리 뱃속에 열 달을 함께 지냈다 한들 뱃속에서 나와 내 옆에 있는 아이는 갑자기 나타난 존재다. 그 존재가 핏줄, 혹은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그 연결 선들이 나와 낯선 존재를 곧바로 가까워지게 할 수는 없다. 물론 '아기'라는 갓 태어난 생명이 갖고 있는 귀엽고 사랑스럽고 순수한 본체 그대로의 매력은 상당하다. 그럼에도 가끔은 어색하고 낯설 수도 있는 당연한 과정이 어째서 '모성이 없는 이기적인 인간'의 생각까지 가게 된 걸까. 내가 좀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는 편 이기도 하지만 사회가 여성들에게 주는 '모성'의 압박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내 옆에 아이가 자연스러운 내 가족이 되기까지는 당연하게도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모성'이라는 사회적 시선에는 그 시간이 생략되어 있다. 사회에 떠도는 그 단어를 들으면 마치 여성이 엄마가 되기 위해 태어 난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모성'이라는 단어가 '우리 아들'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주었던 것과 비슷하게 닭살스럽다. 아이를 어색해하던 내가 자식덕질을 하게 된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거치며 생각했다. 어떠한 인간관계들과 마찬가지로 부모 자식과의 관계도 함께 한, 혹은 서로를 위해 보냈던 그 시간 속에서 쌓여가는 기억과 추억이 있어야 사랑에 빠지거나 정이 드는 것이라고.

 

나는 원래 정이 많은 사람이다. 사실 내가 겉보기엔 사교적이나 내적으로 낯을 많이 가려서 쉽게 마음을 주지는 못 한다. 근데 과몰입이 심하고 이상한 포인트에서 정이 들기 시작 해서 한번 마음을 내어 주기 시작하면 정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주고 집착도 주는... 아무튼 그런 사람이다. 고등학교 때 사감 선생님 말 더럽게 안 듣다가 전근 가실 때 혼자 반나절을 운 적도 있다. 꼬박이들과도 그렇게 정이 들었다. '정'이라고 하기에는 좀 심하게 빠지긴 했는데. 어쨌든 나는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과 정비례하며 사랑을 키웠다. 그러니까 모성 때문에 아이들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과 정이 들면서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이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장황한 이야기를 했나 보다) 아이러니하게도, 슬프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보다 더 한 사랑의 크기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랑에 흠뻑 빠져 있을 때쯤부터. 아이들은 독립된 존재가 되어가고 나도 아이들과 독립과 분리할 준비를 해야 하는 때가 온다. 지금 나는 그걸 알면서도 잘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상태인데. 예를 들어 아이들과 떨어져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싶으면서도 내가 모르는 아이들의 순간들이 아쉽고 서운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아이들을 기숙사 학교에 보내면서 교문 앞에서 우는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되뇌인다. '너는 너고 나는 나.' 이런 나를 보며 남편은 씨익 웃으며 말한다. "결국에 니 옆에 남는 건 나밖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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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바람

 

 

'꼬박'은 첫 아이 울림이로 부터 시작해 둘째 이음, 셋째 우리까지의 태명이다. 울림이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여러 상황이 정리되고 안정을 찾아갈 때쯤 '이녀석을 앞으로 뭐라고 부를까'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우리 부부는 별것도 아닌 이 이름에도 한참을 고민했다. (나중에 진짜 이름 '울림'을 정할 때도 마지막까지 결정을 못 해 2만원의 벌금을 냈다) 그러다 문득 남편을 놀리던 '꼬마박사'의 줄임말로 '꼬박'이라는 단어가 떠올라 사전을 찾아보게 되었고, '어떤 상태를 고스란히 그대로'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가 마음에 들어 얼렁뚱땅 정해버렸다. (지나친 고민의 결과는 항상 얼렁뚱땅이 되고 만다)

 

첫째 꼬박이 울림이의 탄생과 함께 생겨난 나의 블로그 <꼬박일기>도 이 태명을 이어받아 시작했다. 이왕 쓰기로 한 거 '꼬박꼬박 잘 쓰자'라는 의미도 함께 담아. 쓰다 보니 매일 쓰는 그 행위의 뿌듯함만큼이나 지극히 개인적인 이 글을 보고 안부와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들의 관심과 인사가 좋았다. 우리를 응원해주고, 선물을 보내주고, 우리 집에 찾아와 주는 친구들이 고마웠다. 그래서 나도 점점 그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게 됐다. 어느 날은 자주 보지 못하는 가족들에게, 또 어떤 날은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던 친구들이나 보고 싶은 친구들에게 전하는 마음을 담았다. 처음 매일 쓰던 열의는 많이 옅어지고 지금은 가끔 명맥만 이어오는 블로그가 되었지만 그래도 꼬박일기는 나에게 꽤나 뿌듯한 존재다.

 

그동안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도 많았지만 나는 지금껏 이른 나이에 결혼과 출산을 한 것에 후회 한 적은 없다. 아이들로 인해 내 삶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이 너무 한쪽으로만 기울었는지 어느새 내 삶에는 나보다 아이들로 채우는 날이 더 많아졌다. 기울어진 마음은 어떤 면면에서 나를 점점 두렵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생길 공허와 공백을 채우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다섯 살 '우리'가 아직 집에 있는 이유는 떠나갈 '우리'보다 남겨질 내가 더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런 두려움과 공허를 넘어보려 꼬박일기를 썼다. 쓰고 나면 매일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날들도 아이들을 빼면 별 볼 일 없어 보일 것 같았던 나도. 그저 각각의 존재 만으로 마음이 채워지곤 했다.

 

안부를 묻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불안함과 공허를 채우기 위해 썼던 편지 같은 글들이 이제는 되려 나에게 돌아온다. 그동안 잘 해왔다고, 지금도 그럭저럭 괜찮다고. 그래서인지 지난 꼬박일기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자주 울컥이고 만다. 처음에는 그 울컥임이 되돌아갈 수 없는 순간들에 대한 그리움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아름다웠던 그 시절들이 나에게 주는 위로라고 느낀다. 자주 감정이 요동치고 시도때도 없이 울컥이는 나와는 달리 침착하고 이성적인 남편도 오래된 꼬박일기를 보며 훌쩍이는건(만취 상태에 봐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런 이유가 아닐까 생각 해 본다. 어느새 나도 남편도 지나온 시절에 울컥이는 나이가 되었다. 그 울컥이는 시간을 함께해준 존재들이 고맙다. 그 고마운 존재들의 이야기를 꼬박일기에 오래오래 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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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 노해원

 

 

그 당시 나는 휴학을 하고 일 년 정도 고창에서 농악 전수생으로 지내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워낙 개방적인 환경에서 자라온 탓에(혹은 워낙 내 멋대로 살아온 탓에) 주변에서도 딱히 말릴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의외의 사람이 나를 붙잡았는데 바로 당시 남자 친구이자 현 남편 H였다. 우리는 오래된 부모님 모임에서 만나 부모님 몰래(부모님 빼고 다 알게) 사귀고 있던 3년 차 연인이었다. 다정한 듯 무심한 충청도 사람 특유의 우유부단함을 가진 그는 나에게 지금까지 그렇게 단호하게 'NO'를 얘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예상 밖의 그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기뻤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휴학에 안 좋은 점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이상하게 '장거리 연애도 힘들고...'라고 속삭인 말이 '너와 절대 떨어져 지낼 수 없어' 같은 영화 대사처럼 들리는 바람에 더 고민할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 휴학을 하지 않은 그 한 해 사이 누군가 이미 정해 두기라도 한 것처럼 결혼, 출산, 졸업과 귀촌까지의 일들이 이뤄졌다.

 

그렇게 나는 스물셋에 엄마가 됐다. 그 당시엔 내가 그렇게나 어리다고 실감하지 못했는데 지금 그때 사진을 들춰 보면 왜 주변에서 '애가 애를 낳았네'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처음 엄마가 되었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나는 내가 엄마라는 사실이 종종 낯설다. 올해로 10년 차. 그 사이 두 명의 꼬박이가 더 태어나 삼 형제의 엄마가 된 지금의 내가 놀랍다. '내가 애 셋 엄마라고? 허, 참...' 헛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변함없이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며 그래도 다섯 식구 삼시세끼 굶기지 않고 무사히 생명 유지하고 살아온 사실만으로 뿌듯하다. 그동안 내 삶의 많은 선택지 속에서 나름 주도권을 갖고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그 역시도 어쩌면 이미 누군가의 큰 그림 속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떤 선택을 했느냐보다 어떤 선택을 했든지 간에 그 속에서 나름의 해답을 찾으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육아도 마찬가지다. 특히 요즘의 육아는 과도한 선택의 연속이다. 출산 방식이나, 유아용품, 음식, 훈육 방법부터 수면 습관까지. 오만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과도한 정보들을 전해 듣고 나면 오히려 선택이 어려워지고 불안한 마음만 커진다. 처음 큰 꼬박이를 낳고 모유 수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규칙적인 수유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듣고 시도해 본 적이 있다. 아무리 신생아여도 시도 때도 없이 주지 말고 2시간에 한 번씩 먹이면서 규칙을 만들어 가야 나중에 편하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당시 모유 양이 많지 않았음에도 어떻게든 2시간에 규칙을 만들어 보려고 반나절을 고생했던 적이 있다. 젖을 물리면 금방 달래질 것을 안고 업고 둥개둥개 하며 달래느라 팔이 떨어질 것 같아 반나절 만에 포기했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원래 하던 대로 아이가 울거나 힘들어할 때 젖을 물렸다. 한 시간에 한 번이 됐다가 두 시간에 한 번이 됐다가 어느 날은 서너 시간에 한 번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때 생각했다. '육아도 그냥 각자 취향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육아도 엄마와 아이의 취향이 생겨나는 과정이고 제각각 그 취향에 맞춰 살아가도 그럭저럭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개인적으로 부모는 자고로 옆에서 따뜻한 온기만 전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딱히 훌륭한 육아 정보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러니 앞으로 적어 갈 나의 글들은 그저 육아와 함께 (조금이라도) 성장한 나의 고군분투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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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들이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 지는 계절이 왔다. 양말을 신지 않으면 발이 시리고 아침 저녁으로는 긴팔을 입어야 한다. 누구라도 붙어 있으면 기분이 좋은. 완연한 가을이다.

 

 

 

2.

 

브런치와 함께 긴 글쓰기에 도전 해 보려 한다. 아마도 꼬박일기의 확장판이 될 듯 싶다. 숏폼 시대에 익숙함에서 벗어나 길게 적어나가 보기 위해서다. 앞만 보고 가는 세상 속에서 가끔은 뒤로 가는 것이 고지식한 나의 어쩔 수 없는 취향. 글은 길어질 수록 나를 더 드러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수시로 샛길로 빠지고 톨스토이 선생님을 만나고 좌절하고 오만가지 번뇌에 시달리게 되지만. 얼마 전 만난 일두님의 말마따나 용맹정진하고 활기유지 하기 위해 일단 부딪쳐 본다.

 

 

 

3.

부끄러워 슬그머니 숨어서 하려 했는데, 부딪치고 깨져봐야 성장한다는 멘토 선생님(남편)의 말을 듣고 블로그에도 차근차근 공유 하려 한다. 

https://brunch.co.kr/@ggobak3bro

 

노해원의 브런치

기획자 | 계획 하기를 좋아하지만 포기도 빠른 사람. 꼬박이들과 좌충우돌 성장중.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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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달성

2022. 5. 20. 23:37 일기/꼬박일기

 

오늘은 목표한 한 달의 마지막 날이다. 늦은 적은 있어도 빼먹지는 않고 했다.

그래도 한 3일 전 부터 몸이 베베 꼬이는 걸 보면 이정도가 딱 나의 적정치 인가보다. 

 

한 달간 꼬박일기를 쓰며 가장 좋았던 점은

그냥 두었으면 흘러가 버렸을 반짝이는 순간들을 되돌아보고 붙잡아 둘 수 있었다는 것. 오랜만에 안부를 물어오는 친구들, 언제나처럼 응원해 주는 친구들을 떠올리며 보고 싶은 마음을 가득 채웠다는 것. 무엇보다 동네에서 남편에게 "해원씨 아이맥 얼른 사줘요"라고 압박해 주는 이웃이 생겼다는 것이다. 

 

사실 꼬박일기를 쓰기 전부터 올해, 5년, 10년 정도 단위의 큰 목표를 세워 두었다.

목표를 긴 호흡으로 크게 세워 두니 오히려 당장 앞에 놓인 것들에 더 최선을 다 하게 된다.

'당장 앞에 놓여 있는 일도 해결 못하면 더 큰 일은 절대 할 수 없지'라는 마음이 생겼달까. 조금 바보 같은 나의 투쟁 심리랄까. 

아무튼 그 덕에 무사히 이번 목표를 달성했고 이제 다시 다음 단계를 계획 한다.

 

그래도 당분간은 가벼운 마음으로 밀린 드라마를 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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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바람씨의 컨디션 난조로 작년에 아이들과 함께 일회용 카메라로 찍었던 사진들을 올려본다.

2021 여름의 기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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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2022. 5. 19. 00:30 일기/꼬박일기

 

요즘은 나의 하루 피곤도를 아이들을 재우고 난 후 얼마나 빨리 일어나는가로 측정한다. 

요 며칠은 측정은커녕 잠이 들어 버리는 바람에 놀라서 호다닥 깼다.

 

오늘은 아침일찍 아이들 등원하고 지원네 음식 받으러 가볍게 갔다가 또 한 시간 넘게 놀다 왔다.

다 같이 파자마 바람으로 만나서 수다 떨고 커피 마시고 그림 그리고 놀다가 정작 원래 목적인 음식을 두고 와서 오후에 다시 갔다 왔다. 예나 지금이나 덜렁거리는 건 똑 닮은 노자매. 

 

손을 대면 할퀴어서 발만 살포시. 깜비오 발바닥 느낌 넘조아
우리의 첫 인사. "깜비오 놀아 줄까?"
우리가 찍은 깜비오
능숙하게 이모 크레용 꺼내서 그림 그릴 준비하는 우리. "엄마, 뭐 그려 줄까?" (뒤에 그림도 '우리'가 그린 그림)
자동차와 거북이
인사는 찐하게
퇴장은 쿨하게

 

 

집으로 돌아와 이런저런 집안일을 좀 하고 점심은 우리가 며칠 전부터 노래를 부르던 자연드림 사골라면을 끓여줬다. 어린이에게 라면을 끓여 주는 것이 양심에 여간 걸리는 일이 아니라서 미루고 또 미뤘는데 오늘은 결국 해주고 말았네. 나는 감자라면 먹으려고 반개만 끓여줬는데 나중에 더 먹고 싶어 해서 다음엔 한 개를 다 끓여 주겠다 약속했다. 라면 한 개를 다 먹을 수 있는 다섯 살 이라니. 넌 정말 놀라운 어린이야. 

 

오늘은 어린이들을 일찍 하원하기로 마음먹고 2시에 학교에 갔다. 생협에서 쭈쭈바 하나씩 사들고 울림이 이음이를 데리고 오랜만에 다 같이 홍성도서관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갔더니 새로 들어온 책들이 많아서 어린이들도 나도 신나게 책을 골라 잔뜩 빌려왔다. 홍성도서관은 작년부터 한 사람당 스무 권씩을 빌릴 수 있는데 네 사람 이름으로 거의 다 빌렸으니 족히 50권은 빌려 온 것 같다. 대부분 동화책과 만화책 이기 때문에 50권이라고 해도 일주일도 안돼서 다 본다. 책을 이렇게 잔뜩 빌려 놓으면 들고 올 때는 고생이지만 며칠은 조용히 지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기분이 좋다. 

 

집에 오자마자 익은 딸기부터 체크 하는 이음이

 

 

집에 와서 어린이들은 책 읽고 나는 못다 한 집안일을 다 하고 다시 홍동에 갔다.

저녁시간에는 웬만해선 나가는 일이 없는 우리 집 식구들인데 오랜만에 오는 반가운 손님이 있어 함께 식사를 하러 나갔다. 

그런데 의사소통 불찰로 각자 다른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었고... 배가 고파 예민했던 나는 조금 화가 났지만 그런 엄마를 옆에서 열심히 보필해 주는 어린이들에게 감동받아(혹은 배가 좀 채워졌기 때문에) 금세 마음이 풀렸다(내가 단순한 건지 아이들이 똑똑한 건지). 밥을 다 먹고 나니 손님은 강의하는 시간이 되어 멀리서 눈인사만 하고, 그래도 오랜만에 이 시간에 나와 있는 것이 아쉬워 지원이 얼굴이나 잠깐 보러 뜰에 갔다. 요즘 뜰에서는 술만 팔고 있어서 맞은편 편의점에서 어린이 음료수와 과자를 사갔다. "저희 모구모구(음료수 이름) 한잔 하고 갈게여~" 씩씩하게 외치고 몇 분 기분만 좀 내다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이들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엄마가 하는 말을 척척 들어줘서 속으로 '이거 맥이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다행히(?) 순수하게 엄마를 돕고 싶었던 어린이들이었기에 나는 또 감동을 받아 어린이들을 꼬옥 껴안아 주고 무사히 잠들었다. 

 

 

 

오늘은 좀 피곤해서 그저 하루를 나열해 보기만 했는데도 또 한 바닥이 가득 찼다.

피곤에 쩔어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잘 몰랐는데 이렇게 돌아보니 또 사랑이다.

주변에서는 나에게 '가볍게 한 줄만 써, 그래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그러기에 나는 매일 이렇게 받는 게 많은 사람이다. 이번생에 가볍게 살기는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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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여전히 틈만 나면 "아랫집 놀러 가도 돼?"라고 묻는다.

대체로 나의 대답과는 무관하게 우다다 달려가 왁자지껄 놀다 오지만 때때로 나는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어

"밥 먹고 가야지" "할머니 할아버지도 좀 쉬셔야해" "오늘은 좀 늦었으니 집에서 놀자~" 라며 아이들을 붙잡아 두곤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또 

"놀자고 안하고 자전거만 타고 올게" "농구만 하고 올게" "어제 두고 온 잠바만 가지고 올게"

라며 어떻게든 내려갈 핑계를 만들어 낸다.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리가 이사 오기 바로 전 해에 지금 사시는 곳으로 집을 지어 들어오셨다.

우리가 이사 오기 직전에 우리 집에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들으시고는 한 여름 땅벌에 쏘여 가며 우리 집 주변의 풀들을 모두 뽑아 주셨다. 우리가 이곳에 살게 된 이후에도 알게 모르게 챙겨 주신 것들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늘 대가 없이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분들.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리가 처음 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 사랑을 실천하는 분들이다. 뭘 하든 대가를 바랐던 나는 이분들 앞에 항상 작아졌다 커졌다 하며 마음을 키웠다. 아마 늘 옆에 붙어 있던 아이들은 그런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며 나보다 더 마음을 키웠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울림이와 이음이가 처음 아랫집으로 내려오던 순간을 아직도 마음속에 고이 접어 간직하고 계신다.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실 때면 그때 아이들의 표정, 했던 말들, 행동 하나하나 기억하고 계시니까. 나는 가끔 이런 우리의 관계를 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만나 하루하루를 함께 마주하며 살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온 우주가 우리를 응원해 준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 우리는 이웃 운이 진짜 좋아. 그치? 집은 좀 좁고 그래도 이웃 운이 너무 좋아서 다른 데로 갈 수가 없네"

며칠 전 이음이가 한 말이다. 이음이 말처럼 우리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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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 2

 

눈썰매를 탑니다. ‘우리’는 맨 앞에, 이음이는 그 뒤에, 울림이는 그그 뒤에, 나는 맨뒤에 겹겹이 포개 앉아 가파른 비탈길을 쏜살같이 달립니다. 발뒤꿈치를 방향키로 삼아 길을 잡지만, 더러는 몸을 가누지 못해 작은 둔덕에 쑤셔박히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더 신이 납니다. 한참을 마을길을 미끄러져 내려가 멈추고, 다시 올라오려고 하는데 ‘우리’가 눈썰매에 태워 끌어달라고 합니다. ‘그래. 어서 타.’ 라고 하자, 이음이가 야무지게 나무랍니다. “‘우리’ 안 돼. 할아버지 다리 아파.” 눈썰매에 타려고 하는 ‘우리’를 이음이가 끌어내리려고 하자, ‘우리’가 주먹을 불끈 쥡니다. 금방이라도 이음이를 한 대 칠 듯한 ‘우리’의 장갑 낀 왼 주먹에서 묵직함이 느껴집니다. 이음이도 주먹을 쥐고 둘 사이 실강이가 벌어지는 순간, 갑자기 울림이가 소리칩니다.

‘어디서 주먹질이야!’

차렷자세로 꼿꼿이 선 채 내뱉는 카랑카랑한 쇳소리가 찬결(찬 기운)에 가늘게 떨립니다. 울림이와 이음이는 눈밭에서 나뒹굴며 놀고, ‘우리’와 나는 하는 수 없이 빈 눈썰매를 끌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갑니다. 얼마쯤 올라왔을까, 메아리처럼 ‘우리’가 소리칩니다.

‘어디서 주먹질이야.’

‘우리’ 얼굴에는 지그시 웃음을 머금고 있습니다. 상수리나무 가지 끝에 아침 노을이 묻어있습니다. 바람이 스치면 비늘눈처럼 노을 가루가 떨어집니다. 올 한 해도 가슴에 곱고 따스한 꿈을 그리시길 두손모읍니다.

 

 

2022. 1. 6

 

‘우리’가 ‘등산 하자.’라고 할 땐, 길에서 10m쯤 되는, 제법 가파른 우리 집 언덕을 오르자라는 말이에요. 얼마나 재빠르게 올라가는지 가끔 이음이와 울림이가 뒤쳐질 때도 있어요. 눈 가득 덮인 언덕을 네 발로 기어오를 땐 밑에서 보면 눈다람쥐 같아요. 먼저 올라가선 손을 잡고 올라오라며 ‘우리’가 손을 내밀어요. 나는 ‘우리’의 자그마한 손을 붙잡고 언덕 가장자리를 오르지요. 오늘은,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다져져 길에 엉겨붙은 얼음덩이를 깨뜨렸어요. 엄마 차가 미끄러지지 말라고요. 뾰족한 돌로, 막대기로, 나중에는 ‘우리’가 가져온 작은 망치로 톡톡 깨뜨렸어요. 깨진 얼음 조각은 유리 같다며 ‘우리’가 빈 페이트 통에 쓸어담아 집으로 가져갔어요. ‘우리’는 눈을 치우거나 눈이 녹으면 늘 아깝다며 아쉬워 해요.

그러다가 나보고 배 고프냐고 물어요. 그렇다고 하니 해바라기 씨를 까먹자고 해요. 해바라기 씨 먹는 건 누구한테 배웠냐고 하니 이음이 형이 알려 줬다고 해요. 씨를 까서 입에 넣어주니, 입에서 해바라기 꽃이 필까, 배에서 필까, ‘우리’가 이야기해요. 곁에서 듣고있던 이음이가 나도 어릴 땐 저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해요. 볕 좋은 벽에 나란히 기대앉아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며 놀고 있으니, 엄마가 밥 먹으라고 데리러 왔어요.

 

 

2022. 1. 8

 

‘우리’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있어요. 아궁이에서 불장난을 하고 기어나오다가, 비를 가리려고 얹어 둔 야트막한 판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혔나 봐요. 눈물이 핑그르르 돌 만큼 꽤 아플 텐데, 이음이 같으면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 텐데 얼굴만 찡그린 채 꾹 참고 있어요. 손등 위를 호 불어주며 괜찮으냐고 하니, 돌머리라서 괜찮다고 해요. 이제부터 ‘우리’를 ‘돌머리 우리’라고 해야 하겠구나 하니,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요. 그럼 ‘괜찮아 우리’라고 할까 라고 하니 그것도 아니래요. 그럼 하는 수 없이 ‘등산 잘하는 우리’라고 해야 하겠구나 하니 고개를 끄덕여요. 겨울로 들어서면서 ‘우리’ 딴 이름이 ‘자전거 타는 우리’에서 ‘등산 잘하는 우리’로 바뀌었어요. 이음이한테 물어봤어요. 울림이 형을 주먹으로 때려본 적이 있느냐고. 한 번 있었다고 해서,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하니, 얼른 울었다고 하며, 울어야 울림이 형에게 더 맞지 않는다고 해요. 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들려주니 막 웃었어요.

 

 

2022. 1. 14

 

초인종이 울립니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흰 망아지 한 마리가 장갑 낀 손으로 눈 치우는 삽을 가리키며 빌려달라고 합니다. 다시 딸그락딸그락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귀여운 눈토끼 한 마리가 마루 밑에 넣어둔 눈가래를 꺼내고 있습니다. 눈토끼를 따라 눈 덮인 숲길로 나갑니다. 두 볼이 바알갛게 달아오른 눈토끼는 어느새 눈을 움켜 쥐고 한 입 먹더니 앙금앙금 언덕을 기어오릅니다. 뒤따라 오르며 눈토끼 꼬리를 잡았다 놓았다 하는 나는, 한 마리 늙은 곰입니다. 꼭대기에 올라간 눈토끼는 미끄러지듯 데굴데굴 굴러 도랑에 쑤셔박히며, 그게 신나는지 자꾸 되풀이합니다. 하얀 고양이 한 마리는 ‘호도도독 호도도독’ 소리를 지르며 눈밭을 내달립니다. 울림이는 이제 커서 무릎 위에 앉으면 망아지 같고, 이음이는 고양이처럼 폭 안기고, 밤벌레처럼 토실토실한 ‘우리’ 토끼를 품에 안으면 오히려 내가 안긴 듯 포근합니다.

 

 

2022. 1. 17

 

‘할아버지, 할아버지 집이 밖에 있으면 좋겠어.’

‘우리’가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들고 왔어요. ‘모자 사세요!’ 엄마가 잠자리에서 몇 번이나 들려주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다 알고 있을 텐데, 귀를 쫑긋하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놀라워 하는 표정이에요. 어느덧 날은 어둑해지고 축구 하러 갔던 엄마가 돌아오자, 울림이와 이음이는 먼저 집으로 달려가고, ‘우리’는 뒤늦게 일어섭니다. 집으로 바래다 달라며 어부바 해 달라고 하더니, 마음을 바꿔 안아 달라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앞을 보고 ‘우리’는 뒤를 보고 간다며. 신을 신어야지 하며 내려놓자, 잠깐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는,

‘할아버지, 할아버지 집이 밖에 있으면 좋겠어.’

라고 해요. 왜냐고 물으니, 신을 신지 않아도 되니까 라면서요. 아! ‘우리’는 집이 밖에 있고 또 밖에 있고 하면, 대청마루가 ‘우리’네 집까지 이어져서 신발을 갈아신지 않고 이대로 할아버지 품에 안겨 집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2022. 1. 18

 

"한 나절이 다 가도록 모자를 사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빨간 모자 하나도 사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모자 사세요!’라는 그림책을 읽어주다가,이 대목에 이르러, ‘아, 가엾어라. 아무도 모자를 사 주지 않으니.’ 라고 하니까, ‘우리’가 말했어요.

“책 안에 들어가 빨간 모자 하나 사 와.”

어쩌지요. 나는 늙어 책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잃어버렸으니. ‘우리’는 책 안으로 들어갈 줄 아는 사람을 알고 있다고 하니, 내일 만나면 물어봐야 하겠어요.

 

 

2022. 1. 21

 

올해 여덟 살인 이음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 영원히 세 살이던 ‘우리’는 갑자기 두 살을 더 먹어, 삼월이면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 간다고 해요. 쓸쓸한 표정으로, ‘우리’가 유치원에 가면 할아버지는 누구와 놀지? 라고 하니까, ‘할아버지는 단이(우리집 강아지)와 놀아.’ 라고 딱 잘라 말해요. 어디에서 배웠는지 ‘아주 그냥’이란 말을 쓰고, 짜장면을 먹다가 손에 옷에 묻은 국물을 손가락으로 쓱쓱 비비고는 ‘티도 않나.’ 라고 하는 ‘우리’는 어느덧 나에게 ‘미래의 아이’가 되어 가요. ‘미래의 아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배워 빌려 쓴 말이에요. 어제 ‘우리’가 ‘미래의 차’란 말을 해서 무슨 뜻인지 몰라 울림이가 설명해주었는데, 그 때도 못 알아듣고 나중에 생각해보니 ‘앞으로 갖고(타고) 싶은 차’라는 뜻이었어요. 요즘 엄마 차가 자꾸 고장 나서 바꿔야 하나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한 말일 거예요.

 

 

2022. 1. 28

 

“아빠가 말한 용이잖아.”

회호리구름이 일고 빗방울이 떨어지며 하늘에 용이 나타나자 ‘우리’가 한 말이에요. 영화 속에서 아빠 갓파가 들려준 용 이야기는 맨처음에 나오는데, 놀랍게도 ‘우리’는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어요. 이음이는 할머니 무릎 위에, 울림이는 그 곁에, ‘우리’는 내 무릎에 앉았다가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가 내 왼팔을 부둥켜안고 하면서 2시간 18분 동안 눈을 떼지 않고 ‘갓파 쿠와 여름방학을’이란 애니메이션을 함께 보았어요. 갓파(河童 かっぱ)는 일본 전설 속에 나오는 강이나 바다에 사는 요괴로, 바가지 머리를 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머리 꼭대기에 움푹 파인 곳(접시)이 있고, 거기에는 물이 들어 있는데 물이 없어지면 죽는다고 해요. 팔다리에는 물갈퀴가 있고, 새 주둥이를 하고 거북이처럼 등딱지가 있는데, 장난을 좋아해 아이들을 물속으로 끌어당겨 씨름을 하기도 하고 특별히 오이를 잘 먹는다고 해요. 전설 속 갓파를 2008년 6월 도쿄 한복판으로 끌어와 펼쳐지는 이야기인데, 어린 갓파 ‘쿠’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가슴을 울렸어요.

“아빠가 말했어. 인간은 물과 땅을 우리에게서 빼앗고 금방 바람이나 하늘 신들이 사는 곳까지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그 대신 영혼을 잃어버리겠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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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탱이들

2022. 5. 16. 23:26 일기/꼬박일기

1

비가 너무 오지 않는다. 벌써 가뭄이라니.

비 소식이 생기면 비가 오기 직전에 아랫 밭에 풀을 뽑고 옥수수를 심으려고 했는데 그 핑계로 아랫 밭이 그때 이후 방치되고 있다. 올해도 이렇게 망하는 건가... 밭에다 마음 한번 내기가 왜 이리 어려운지.

 

그래도 정원에는 꽃들이 얼추절추 피어나고 있다.

쬐그만 정원 구석에 놓여진 돌 모서리에서 켈리포니아 포비 하나가 힘겹게 자라나고 있었다. 지난 주말 울림이가 그 싹을 보더니 "얘 이름은 구탱이야! 구석에서 자라니까 구탱이!"라고 한다. 이음이를 부르더니 같이 키우자며 열심히 쓰다듬어 준다. 평평한 데서 잘 자란 꽃 보다 구석진 곳에서, 어느 돌부리 사이에서 나는 그런 꽃들에게 눈이 더 가는 건 어린이들도 마찬가지 인가보다.

 

한 주가 지나고 어제 다시 그 싹을 보러 갔더니 훌쩍 자라 꽃대까지 올라왔다. 옆에 있는 같은 종류의 포비들은는 아직 잎만 나왔는데 신기하게 구탱이만 꽃대가 올라와 있다. 내가 "너희가 이뻐해줘서 잘 컸나 봐! 얘만 꽃대도 나와 있어!"라고 했더니 몹시 뿌듯했는지 이음이와 우리를 불러 자기들끼리 또 분주하게 움직인다. 구탱이 주변에 풀들을 뽑아주고 구탱이를 밀고 있던 돌을 아주 살짝 옮겨주고(이름이 구탱이라 구석 자리는 유지해야 해서 아예 치울 수는 없다고) 물과 좋은 흙을 잔뜩 주었다. 

 

 

 

오늘 저녁 먹기 전에는 이음이가 딸기를 따왔다.

아직 조금 덜 익었지만 엄마랑 아빠에게 빨리 주고 싶었는지 두 개를 따와서 하나는 엄마가 먹고 하나는 아빠를 주라고 한다. 나는 이음이가 전해주는 딸기를 받으며

"딸기가 벌써 익었어??"

하고 놀랐더니 이음이는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해줬는데!!!"

라며 함께 놀란다. 그 말이 귀여워서

"그러니까. 너네도 엄마가 아무것도 안 해줘도 잘 크잖아"

라며 웃었더니 이음이는

"아니? 엄마는 우리한테 엄청 많은걸 해 주고 있잖아"

라고 말했다. 감동한 나머지 나는 요상한 소리를 내며 이음이를 꼬옥 안아 주었다.

 

 

 

 

2

어젯밤에는 아이들을 일찍 재우기 위해 아이들 몰래 시계를 30분 앞당겨 놓았다.

중요한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서다. 아이들과 같이 보기에는 너무 늦게 끝나고 아이들을 재우고 보기에는 전반전을 하나도 못 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큰 어린이들은 시계를 볼 줄 알기 때문에 억지로 일찍 재우기는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쓴 꼼수가 다행히 잘 통했고 전반전이 시작한 지 그리 오래지 않아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오늘 아침이었는데...

자기 전에 30분 앞당겨 놓은 시계를 원상 복귀하는 걸 깜빡한 것이다. 심지어 울림이가 못다 한 숙제를 아침 일찍(7시) 같이 하기로 해서 일찍 일어났는데 울림이 숙제 다 하고 나니 맞춰 놓았던 알람이 울려서 너무 당황했다. 덕분에 올해 들어 처음으로 6시 반에 기상했네^^... 

 

 

 

8할이 지지고 볶는 일상이지만 간혹 아름다운 2할의 순간들이 삶을 빛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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