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여전히 틈만 나면 "아랫집 놀러 가도 돼?"라고 묻는다.
대체로 나의 대답과는 무관하게 우다다 달려가 왁자지껄 놀다 오지만 때때로 나는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어
"밥 먹고 가야지" "할머니 할아버지도 좀 쉬셔야해" "오늘은 좀 늦었으니 집에서 놀자~" 라며 아이들을 붙잡아 두곤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또
"놀자고 안하고 자전거만 타고 올게" "농구만 하고 올게" "어제 두고 온 잠바만 가지고 올게"
라며 어떻게든 내려갈 핑계를 만들어 낸다.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리가 이사 오기 바로 전 해에 지금 사시는 곳으로 집을 지어 들어오셨다.
우리가 이사 오기 직전에 우리 집에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들으시고는 한 여름 땅벌에 쏘여 가며 우리 집 주변의 풀들을 모두 뽑아 주셨다. 우리가 이곳에 살게 된 이후에도 알게 모르게 챙겨 주신 것들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늘 대가 없이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분들.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리가 처음 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 사랑을 실천하는 분들이다. 뭘 하든 대가를 바랐던 나는 이분들 앞에 항상 작아졌다 커졌다 하며 마음을 키웠다. 아마 늘 옆에 붙어 있던 아이들은 그런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며 나보다 더 마음을 키웠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울림이와 이음이가 처음 아랫집으로 내려오던 순간을 아직도 마음속에 고이 접어 간직하고 계신다.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실 때면 그때 아이들의 표정, 했던 말들, 행동 하나하나 기억하고 계시니까. 나는 가끔 이런 우리의 관계를 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만나 하루하루를 함께 마주하며 살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온 우주가 우리를 응원해 준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 우리는 이웃 운이 진짜 좋아. 그치? 집은 좀 좁고 그래도 이웃 운이 너무 좋아서 다른 데로 갈 수가 없네"
며칠 전 이음이가 한 말이다. 이음이 말처럼 우리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
2022. 1. 2
눈썰매를 탑니다. ‘우리’는 맨 앞에, 이음이는 그 뒤에, 울림이는 그그 뒤에, 나는 맨뒤에 겹겹이 포개 앉아 가파른 비탈길을 쏜살같이 달립니다. 발뒤꿈치를 방향키로 삼아 길을 잡지만, 더러는 몸을 가누지 못해 작은 둔덕에 쑤셔박히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더 신이 납니다. 한참을 마을길을 미끄러져 내려가 멈추고, 다시 올라오려고 하는데 ‘우리’가 눈썰매에 태워 끌어달라고 합니다. ‘그래. 어서 타.’ 라고 하자, 이음이가 야무지게 나무랍니다. “‘우리’ 안 돼. 할아버지 다리 아파.” 눈썰매에 타려고 하는 ‘우리’를 이음이가 끌어내리려고 하자, ‘우리’가 주먹을 불끈 쥡니다. 금방이라도 이음이를 한 대 칠 듯한 ‘우리’의 장갑 낀 왼 주먹에서 묵직함이 느껴집니다. 이음이도 주먹을 쥐고 둘 사이 실강이가 벌어지는 순간, 갑자기 울림이가 소리칩니다.
‘어디서 주먹질이야!’
차렷자세로 꼿꼿이 선 채 내뱉는 카랑카랑한 쇳소리가 찬결(찬 기운)에 가늘게 떨립니다. 울림이와 이음이는 눈밭에서 나뒹굴며 놀고, ‘우리’와 나는 하는 수 없이 빈 눈썰매를 끌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갑니다. 얼마쯤 올라왔을까, 메아리처럼 ‘우리’가 소리칩니다.
‘어디서 주먹질이야.’
‘우리’ 얼굴에는 지그시 웃음을 머금고 있습니다. 상수리나무 가지 끝에 아침 노을이 묻어있습니다. 바람이 스치면 비늘눈처럼 노을 가루가 떨어집니다. 올 한 해도 가슴에 곱고 따스한 꿈을 그리시길 두손모읍니다.
2022. 1. 6
‘우리’가 ‘등산 하자.’라고 할 땐, 길에서 10m쯤 되는, 제법 가파른 우리 집 언덕을 오르자라는 말이에요. 얼마나 재빠르게 올라가는지 가끔 이음이와 울림이가 뒤쳐질 때도 있어요. 눈 가득 덮인 언덕을 네 발로 기어오를 땐 밑에서 보면 눈다람쥐 같아요. 먼저 올라가선 손을 잡고 올라오라며 ‘우리’가 손을 내밀어요. 나는 ‘우리’의 자그마한 손을 붙잡고 언덕 가장자리를 오르지요. 오늘은,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다져져 길에 엉겨붙은 얼음덩이를 깨뜨렸어요. 엄마 차가 미끄러지지 말라고요. 뾰족한 돌로, 막대기로, 나중에는 ‘우리’가 가져온 작은 망치로 톡톡 깨뜨렸어요. 깨진 얼음 조각은 유리 같다며 ‘우리’가 빈 페이트 통에 쓸어담아 집으로 가져갔어요. ‘우리’는 눈을 치우거나 눈이 녹으면 늘 아깝다며 아쉬워 해요.
그러다가 나보고 배 고프냐고 물어요. 그렇다고 하니 해바라기 씨를 까먹자고 해요. 해바라기 씨 먹는 건 누구한테 배웠냐고 하니 이음이 형이 알려 줬다고 해요. 씨를 까서 입에 넣어주니, 입에서 해바라기 꽃이 필까, 배에서 필까, ‘우리’가 이야기해요. 곁에서 듣고있던 이음이가 나도 어릴 땐 저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해요. 볕 좋은 벽에 나란히 기대앉아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며 놀고 있으니, 엄마가 밥 먹으라고 데리러 왔어요.
2022. 1. 8
‘우리’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있어요. 아궁이에서 불장난을 하고 기어나오다가, 비를 가리려고 얹어 둔 야트막한 판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혔나 봐요. 눈물이 핑그르르 돌 만큼 꽤 아플 텐데, 이음이 같으면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 텐데 얼굴만 찡그린 채 꾹 참고 있어요. 손등 위를 호 불어주며 괜찮으냐고 하니, 돌머리라서 괜찮다고 해요. 이제부터 ‘우리’를 ‘돌머리 우리’라고 해야 하겠구나 하니,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요. 그럼 ‘괜찮아 우리’라고 할까 라고 하니 그것도 아니래요. 그럼 하는 수 없이 ‘등산 잘하는 우리’라고 해야 하겠구나 하니 고개를 끄덕여요. 겨울로 들어서면서 ‘우리’ 딴 이름이 ‘자전거 타는 우리’에서 ‘등산 잘하는 우리’로 바뀌었어요. 이음이한테 물어봤어요. 울림이 형을 주먹으로 때려본 적이 있느냐고. 한 번 있었다고 해서,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하니, 얼른 울었다고 하며, 울어야 울림이 형에게 더 맞지 않는다고 해요. 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들려주니 막 웃었어요.
2022. 1. 14
초인종이 울립니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흰 망아지 한 마리가 장갑 낀 손으로 눈 치우는 삽을 가리키며 빌려달라고 합니다. 다시 딸그락딸그락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귀여운 눈토끼 한 마리가 마루 밑에 넣어둔 눈가래를 꺼내고 있습니다. 눈토끼를 따라 눈 덮인 숲길로 나갑니다. 두 볼이 바알갛게 달아오른 눈토끼는 어느새 눈을 움켜 쥐고 한 입 먹더니 앙금앙금 언덕을 기어오릅니다. 뒤따라 오르며 눈토끼 꼬리를 잡았다 놓았다 하는 나는, 한 마리 늙은 곰입니다. 꼭대기에 올라간 눈토끼는 미끄러지듯 데굴데굴 굴러 도랑에 쑤셔박히며, 그게 신나는지 자꾸 되풀이합니다. 하얀 고양이 한 마리는 ‘호도도독 호도도독’ 소리를 지르며 눈밭을 내달립니다. 울림이는 이제 커서 무릎 위에 앉으면 망아지 같고, 이음이는 고양이처럼 폭 안기고, 밤벌레처럼 토실토실한 ‘우리’ 토끼를 품에 안으면 오히려 내가 안긴 듯 포근합니다.
2022. 1. 17
‘할아버지, 할아버지 집이 밖에 있으면 좋겠어.’
‘우리’가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들고 왔어요. ‘모자 사세요!’ 엄마가 잠자리에서 몇 번이나 들려주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다 알고 있을 텐데, 귀를 쫑긋하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놀라워 하는 표정이에요. 어느덧 날은 어둑해지고 축구 하러 갔던 엄마가 돌아오자, 울림이와 이음이는 먼저 집으로 달려가고, ‘우리’는 뒤늦게 일어섭니다. 집으로 바래다 달라며 어부바 해 달라고 하더니, 마음을 바꿔 안아 달라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앞을 보고 ‘우리’는 뒤를 보고 간다며. 신을 신어야지 하며 내려놓자, 잠깐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는,
‘할아버지, 할아버지 집이 밖에 있으면 좋겠어.’
라고 해요. 왜냐고 물으니, 신을 신지 않아도 되니까 라면서요. 아! ‘우리’는 집이 밖에 있고 또 밖에 있고 하면, 대청마루가 ‘우리’네 집까지 이어져서 신발을 갈아신지 않고 이대로 할아버지 품에 안겨 집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2022. 1. 18
"한 나절이 다 가도록 모자를 사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빨간 모자 하나도 사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모자 사세요!’라는 그림책을 읽어주다가,이 대목에 이르러, ‘아, 가엾어라. 아무도 모자를 사 주지 않으니.’ 라고 하니까, ‘우리’가 말했어요.
“책 안에 들어가 빨간 모자 하나 사 와.”
어쩌지요. 나는 늙어 책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잃어버렸으니. ‘우리’는 책 안으로 들어갈 줄 아는 사람을 알고 있다고 하니, 내일 만나면 물어봐야 하겠어요.
2022. 1. 21
올해 여덟 살인 이음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 영원히 세 살이던 ‘우리’는 갑자기 두 살을 더 먹어, 삼월이면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 간다고 해요. 쓸쓸한 표정으로, ‘우리’가 유치원에 가면 할아버지는 누구와 놀지? 라고 하니까, ‘할아버지는 단이(우리집 강아지)와 놀아.’ 라고 딱 잘라 말해요. 어디에서 배웠는지 ‘아주 그냥’이란 말을 쓰고, 짜장면을 먹다가 손에 옷에 묻은 국물을 손가락으로 쓱쓱 비비고는 ‘티도 않나.’ 라고 하는 ‘우리’는 어느덧 나에게 ‘미래의 아이’가 되어 가요. ‘미래의 아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배워 빌려 쓴 말이에요. 어제 ‘우리’가 ‘미래의 차’란 말을 해서 무슨 뜻인지 몰라 울림이가 설명해주었는데, 그 때도 못 알아듣고 나중에 생각해보니 ‘앞으로 갖고(타고) 싶은 차’라는 뜻이었어요. 요즘 엄마 차가 자꾸 고장 나서 바꿔야 하나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한 말일 거예요.
2022. 1. 28
“아빠가 말한 용이잖아.”
회호리구름이 일고 빗방울이 떨어지며 하늘에 용이 나타나자 ‘우리’가 한 말이에요. 영화 속에서 아빠 갓파가 들려준 용 이야기는 맨처음에 나오는데, 놀랍게도 ‘우리’는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어요. 이음이는 할머니 무릎 위에, 울림이는 그 곁에, ‘우리’는 내 무릎에 앉았다가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가 내 왼팔을 부둥켜안고 하면서 2시간 18분 동안 눈을 떼지 않고 ‘갓파 쿠와 여름방학을’이란 애니메이션을 함께 보았어요. 갓파(河童 かっぱ)는 일본 전설 속에 나오는 강이나 바다에 사는 요괴로, 바가지 머리를 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머리 꼭대기에 움푹 파인 곳(접시)이 있고, 거기에는 물이 들어 있는데 물이 없어지면 죽는다고 해요. 팔다리에는 물갈퀴가 있고, 새 주둥이를 하고 거북이처럼 등딱지가 있는데, 장난을 좋아해 아이들을 물속으로 끌어당겨 씨름을 하기도 하고 특별히 오이를 잘 먹는다고 해요. 전설 속 갓파를 2008년 6월 도쿄 한복판으로 끌어와 펼쳐지는 이야기인데, 어린 갓파 ‘쿠’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가슴을 울렸어요.
“아빠가 말했어. 인간은 물과 땅을 우리에게서 빼앗고 금방 바람이나 하늘 신들이 사는 곳까지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그 대신 영혼을 잃어버리겠지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