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이음

 

 

태어난 인간의 첫 얼굴을 보았다. 뱃속에 있었다고 생각하면 크고 태어난 존재라 생각하면 너무나 작은. 아직은 ‘덩어리’에 가까웠던 그 작은 인간의 첫 얼굴을 기억한다. 귀여우면서도 웃기고 이상하면서도 사랑스럽고 부처의 얼굴만큼이나 평화롭고 신비로웠던 그 얼굴과 마주한 순간. 내가 처음 엄마가 되었던 그 순간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첫아이 울림이의 탄생 순간이 특히 선명하다. 환한 대낮에 태어나서 그런가. 작은 방 한 칸에서 오로지 나와 남편 둘이서 진통하던 순간들. 극한의 고통과 극한의 환희, 그리고 아름다운 고요가 공존하던 순간. 

 

아이가 아직 얼굴을 드러내기 전, 나의 음부에서 아이의 머리가 이마까지만 볼록 나와 있는 순간에 산파 선생님이 나에게 말했다. “이제 아기 나왔다. 머리 한번 볼래요?” 그때 나는 정신이 없기도 하고 그걸 묻는 선생님도 너무 생소해서 “아니요!”라고 대번에 거절했지만, 지금은 그때 보지 못한 그 순간이 아쉽기만 하다. 뭐든 처음은 소중하기 마련인데. 그 처음을 놓쳐 버린 것만 같아서.

 

그러니까 사실은, 아이의 얼굴을 가장 처음 본 것은 내가 아니라 남편이다. 남편은 울림이를 처음 본 순간을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아기는 힘차게 몸을 뒤틀면서 쑤욱 튀어나왔다. 손은 엑스자로 가슴에 모으고 있었다. 뒤통수에서 얼굴 옆면을 거쳐 나와 얼굴이 딱 마주쳤다. 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서둘러 아가를 엄마 가슴에 올려 주었다핏덩이가 이리 예뻐 보이긴 처음이다(...) 얼떨결에 내 팔에 아이가 누워 울고 있다. 태어난 시간은 오후 1시 43분. 햇살이 밝았다. 산모 휴게실에서 창을 등지고 서서 아이를 둥실둥실 가볍게 흔들었다. 처음에는 별 소용이 없더니 이내 잠잠해진다. 가끔씩 웃는다. 아니태어난지   안된 아기가  손안에서 웃다니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처럼 연신 입을 옹아린다. 나도 모르게 내 입도 같은 모양으로 움직였다. 눈을 뜨려고 노력한다. 한쪽만 힐끔 떠서 보고는 다시 금방 감는다. ‘당신이 나한테 기타를 쳐 주었던 아빠가 맞나?’하고 확인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든 눈 좀 맞춰보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꼬박이도 내 마음을 알았는지 힘겹게 양쪽 눈을 뜨고 나를 똑바로 한번 쳐다 봐 주더니 다시 울기 시작했다.  번째로 눈물이  돌았다.

 

아이가 처음 본 우리 얼굴은 어땠을까. 글을 쓰다 문득 궁금해져서 울림이에게 물었다. “울림아, 엄마 처음 봤을 때 기억나?” 울림이는 아주 잠깐의 고민도 없이 대답한다. “그럴 리가.” 올해 열세 살이 된 울림이는 이제 논리가 없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나는 이 녀석이 T일거라고 확신한다) 둘째 이음이와 셋째 우리 에게도 물어봤지만 역시 ‘엄마 왜 저래?’ 하는 눈치다.(이 녀석들도 T에 근접한 녀석들이다) 당연한 줄 알면서도 왠지 서운하다. ‘나는 아직 다 기억하는데...’ 괜히 혼자 꽁해진다. 아이들은 계속 커가고 얼굴도 계속 변해 가는데 나는 여전히 아이들을 보며 처음의 얼굴을 떠올린다. 처음의 기억이 강렬해서일까, 변하고 흘러가는 이 시간들이 아쉬워서일까.(202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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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온는 날 우리랑 산책을 하다가 사슴벌레 한마리를 만났다.

우리가 며칠만이라도 데리고 있고 싶다고 해서 잠시 키웠다.

내가 이름을 지어 키우는 동안 불러주자고 하니까 

우리는 혼자 아주 작은 소리로 '비 오는날.. 브이자(아이들이 붙여준 길 이름)에서 주웠다...'라고 중얼 거리다니

'이 사슴벌레 이름은 비브야!'라고 말한다.

'비'오는날 '브'이자 에서 주은 사슴벌레라고 해서 '비브'

 

우리가 그린 비브

 

 

2. 

생에 첫 은니 씌웠다.

할때는 무서워 하더니 하고 나서는 자기 입 속에 무려 '은'(우리에겐 금 다음으로 좋은 거)이

있다는 것에 굉장한 뿌듯함을 느낀다.

아랫집 할아버지에게도 깜짝 놀래켜 주며 자랑하고 싶다며 입을 열면 다 보이니까 편지를 써서갔다.

 

까만색으로 색칠 되어 있는게 은늬다

 

 

3.

우리는 어려서부터 인형을 좋아한다.

제작년인가, 산타할아버지가 선물해준 재규어 인형을 한창 데리고 다니다가 

요즘은 내가 몇년 전에 뜨개질 해준 땅콩이를 들고 다닌다.

원래는 곰인형인데 내가 몸만 만들어 두고 얼굴을 완성 시키지 못한 채 몇년이 흘렀고,

그 사이 이녀석의 정체성은 땅콩이 되었다.

요즘은 우리가 하도 휘두르고 다녀서 인형이 아닌 쌍절곤으로 다시 정체성이 바뀌는 중... (몸이 길어짐)

 

우리가 찍은 땅콩이 사진(다리 사이에 튀어 나온거 거시기 아님... 의도한거 아님...)

 

 

 

4.

막둥이는 정말 못말리게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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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시 서른세 살이 됐다.(만 나이로) 작년 서른세 살은 새로운 시작이었고, 올해는 도약하고 싶은데 여전히 비틀거리고 갈팡질팡 한다. 그러다 훌쩍 3월이 왔고 내 생일도 3월인데 나는 3형제의 엄마고 인격도 3개쯤 돼서 그런지 갑자기 3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3이 두 개나 들어가는 나이를 두 해나 맞이하고 있는 나를 좀 더 특별하게 대해줘야겠다 마음먹어 본다. 방황이 일상이 되어가는 것 같은 삶 속에 매일 좌절하다 보면 이 방황에 끝이 있을까, 이 방황이 끝나면 또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이 참 고달프게 느껴지다가도 오히려 한발 물러서게 될 때가 있다. 한 발짝 물러서면 문제 아닌 것을 너무 오래 문제라 생각하며 붙잡고 있는 것도 보이고 비틀거리면서도 방향은 잘 맞춰 가고 있네 하며 안도한다. '느리고 휘청거려도 목적지만 잘 찾으면 되지.' 하고 생각했다.
 

머리 잘랐음

 
 
2.


얼마 전 9시까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8시 반에 일어났다. 깜짝 놀라 부리나케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는데 덩달아 늦게 일어난 남편이 "아침 안 먹고 가야 되는거 아니야?"라고 말했다. 내가 "늦어도 아침은 먹어야지."라고 답하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울림이가 "아빠 나는 태어나서 아침 안 먹은 적이 한 번도 없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새삼 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 10년 넘게 매일 빼먹지 않고 한 일이 있네.' 이 정도 꾸준함이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메여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잘 지키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에 자부심이 생겼다.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세계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나와 남편인데(주로 남편은 음악감상, 나는 스포츠 시청) 간혹 말동무가 필요 할 때면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최근엔 남편이 술에 취하면 나에게 자꾸 자신이 소크라테스식 화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내면의 이야기를 캐묻는다. 나는 남편의 그 진지한 태도가 재밌기도 하고 나 역시 내 내면의 이야기가 궁금하여 성실하게 답한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 화법이 진짜 효과가 있는 건지 아니면 나를 향한 그의 진심 덕분인지(내 느낌은 둘 다 아닌 거 같긴 한데) 어쨌든 나름 도움이 된다.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데 대체로 결론은 '진심을 다해 살아갈 것.' 
 

아랫집 갈 때는 이렇게 인사 하고 뒤도 안 돌아 보고 가는데, 어린이 집은 왜 안 가니...

 

 

이번 주말에는 홍성군 여자 축구팀의 일원으로 도 대회에 나간다. 아직 선발로 뛸 수 있을지 후보 선수로 응원만 하다 오게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덕분에 아주 알차게 훈련하고 있다. 그 사이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은 조만간 다시 풀어내기로 하고. 남편에게 "올해는 글쓰기와 축구만 하겠어!"라고 선언하고는 일주일에 세 번 축구를 하고 한 달에 한 번 축구 글쓰기를 한다. 과몰입러답게 어느 한쪽으로만 자꾸 쏠리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요즘은 아이들과 열심히 NBA를 본다.
 

당진 원정, 태안-당진-홍성 팀

 

 
4.


이 글을 쓰기 시작 했을 때는 3월이었는데, 어느새 4월이 됐다.
 

 
 
어제는 울림이랑 한바탕 싸웠다. 우여곡절(남편 혼자 고군분투) 끝에 잘 화해 해놓고 금세 다시 똑같은 상황으로 싸울 뻔 했다. 그 모습을 지켜 본 남편은 '울림이가 아직 아이 같은 면이 있네'하고 안심했다가 '해원이도 아직 아이 같은 면이 있네'하고 걱정했다고 한다ㅋㅋㅋ 나는 울림이와 싸우고 나서 한참 괴로워 하다 울림이 보다 10배는 더 극성이었던 나의 어린시절을 생각하며 '이정도는 양호하지' 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이와 크게 싸우고 나면 마음이 무척이나 힘든데, 그래도 거기에 매몰 되어 있지 않으려 노력한다. 격해진 감정에 상처뿐인 말들은 걷어내고 아이와 나의 진심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 해 본다. 아이가 받고 싶었던 사랑과 내가 주려던 사랑의 모양이 달랐음을 찾아내고 다시 천천히 맞춰 간다. 싸울땐 다신 안 볼 것 처럼 으르렁 거려도 금방 다시 마주 보며 웃을 수 있는 관계라는 것에 안도한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잘 쌓아왔기 때문이라 생각하면서.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짐한다. 사랑하고, 더 사랑하자고. 아무런 이유없이 그냥 사랑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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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들이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 지는 계절이 왔다. 양말을 신지 않으면 발이 시리고 아침 저녁으로는 긴팔을 입어야 한다. 누구라도 붙어 있으면 기분이 좋은. 완연한 가을이다.

 

 

 

2.

 

브런치와 함께 긴 글쓰기에 도전 해 보려 한다. 아마도 꼬박일기의 확장판이 될 듯 싶다. 숏폼 시대에 익숙함에서 벗어나 길게 적어나가 보기 위해서다. 앞만 보고 가는 세상 속에서 가끔은 뒤로 가는 것이 고지식한 나의 어쩔 수 없는 취향. 글은 길어질 수록 나를 더 드러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수시로 샛길로 빠지고 톨스토이 선생님을 만나고 좌절하고 오만가지 번뇌에 시달리게 되지만. 얼마 전 만난 일두님의 말마따나 용맹정진하고 활기유지 하기 위해 일단 부딪쳐 본다.

 

 

 

3.

부끄러워 슬그머니 숨어서 하려 했는데, 부딪치고 깨져봐야 성장한다는 멘토 선생님(남편)의 말을 듣고 블로그에도 차근차근 공유 하려 한다. 

https://brunch.co.kr/@ggobak3bro

 

노해원의 브런치

기획자 | 계획 하기를 좋아하지만 포기도 빠른 사람. 꼬박이들과 좌충우돌 성장중.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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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달성

2022. 5. 20. 23:37 일기/꼬박일기

 

오늘은 목표한 한 달의 마지막 날이다. 늦은 적은 있어도 빼먹지는 않고 했다.

그래도 한 3일 전 부터 몸이 베베 꼬이는 걸 보면 이정도가 딱 나의 적정치 인가보다. 

 

한 달간 꼬박일기를 쓰며 가장 좋았던 점은

그냥 두었으면 흘러가 버렸을 반짝이는 순간들을 되돌아보고 붙잡아 둘 수 있었다는 것. 오랜만에 안부를 물어오는 친구들, 언제나처럼 응원해 주는 친구들을 떠올리며 보고 싶은 마음을 가득 채웠다는 것. 무엇보다 동네에서 남편에게 "해원씨 아이맥 얼른 사줘요"라고 압박해 주는 이웃이 생겼다는 것이다. 

 

사실 꼬박일기를 쓰기 전부터 올해, 5년, 10년 정도 단위의 큰 목표를 세워 두었다.

목표를 긴 호흡으로 크게 세워 두니 오히려 당장 앞에 놓인 것들에 더 최선을 다 하게 된다.

'당장 앞에 놓여 있는 일도 해결 못하면 더 큰 일은 절대 할 수 없지'라는 마음이 생겼달까. 조금 바보 같은 나의 투쟁 심리랄까. 

아무튼 그 덕에 무사히 이번 목표를 달성했고 이제 다시 다음 단계를 계획 한다.

 

그래도 당분간은 가벼운 마음으로 밀린 드라마를 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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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바람씨의 컨디션 난조로 작년에 아이들과 함께 일회용 카메라로 찍었던 사진들을 올려본다.

2021 여름의 기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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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2022. 5. 19. 00:30 일기/꼬박일기

 

요즘은 나의 하루 피곤도를 아이들을 재우고 난 후 얼마나 빨리 일어나는가로 측정한다. 

요 며칠은 측정은커녕 잠이 들어 버리는 바람에 놀라서 호다닥 깼다.

 

오늘은 아침일찍 아이들 등원하고 지원네 음식 받으러 가볍게 갔다가 또 한 시간 넘게 놀다 왔다.

다 같이 파자마 바람으로 만나서 수다 떨고 커피 마시고 그림 그리고 놀다가 정작 원래 목적인 음식을 두고 와서 오후에 다시 갔다 왔다. 예나 지금이나 덜렁거리는 건 똑 닮은 노자매. 

 

손을 대면 할퀴어서 발만 살포시. 깜비오 발바닥 느낌 넘조아
우리의 첫 인사. "깜비오 놀아 줄까?"
우리가 찍은 깜비오
능숙하게 이모 크레용 꺼내서 그림 그릴 준비하는 우리. "엄마, 뭐 그려 줄까?" (뒤에 그림도 '우리'가 그린 그림)
자동차와 거북이
인사는 찐하게
퇴장은 쿨하게

 

 

집으로 돌아와 이런저런 집안일을 좀 하고 점심은 우리가 며칠 전부터 노래를 부르던 자연드림 사골라면을 끓여줬다. 어린이에게 라면을 끓여 주는 것이 양심에 여간 걸리는 일이 아니라서 미루고 또 미뤘는데 오늘은 결국 해주고 말았네. 나는 감자라면 먹으려고 반개만 끓여줬는데 나중에 더 먹고 싶어 해서 다음엔 한 개를 다 끓여 주겠다 약속했다. 라면 한 개를 다 먹을 수 있는 다섯 살 이라니. 넌 정말 놀라운 어린이야. 

 

오늘은 어린이들을 일찍 하원하기로 마음먹고 2시에 학교에 갔다. 생협에서 쭈쭈바 하나씩 사들고 울림이 이음이를 데리고 오랜만에 다 같이 홍성도서관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갔더니 새로 들어온 책들이 많아서 어린이들도 나도 신나게 책을 골라 잔뜩 빌려왔다. 홍성도서관은 작년부터 한 사람당 스무 권씩을 빌릴 수 있는데 네 사람 이름으로 거의 다 빌렸으니 족히 50권은 빌려 온 것 같다. 대부분 동화책과 만화책 이기 때문에 50권이라고 해도 일주일도 안돼서 다 본다. 책을 이렇게 잔뜩 빌려 놓으면 들고 올 때는 고생이지만 며칠은 조용히 지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기분이 좋다. 

 

집에 오자마자 익은 딸기부터 체크 하는 이음이

 

 

집에 와서 어린이들은 책 읽고 나는 못다 한 집안일을 다 하고 다시 홍동에 갔다.

저녁시간에는 웬만해선 나가는 일이 없는 우리 집 식구들인데 오랜만에 오는 반가운 손님이 있어 함께 식사를 하러 나갔다. 

그런데 의사소통 불찰로 각자 다른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었고... 배가 고파 예민했던 나는 조금 화가 났지만 그런 엄마를 옆에서 열심히 보필해 주는 어린이들에게 감동받아(혹은 배가 좀 채워졌기 때문에) 금세 마음이 풀렸다(내가 단순한 건지 아이들이 똑똑한 건지). 밥을 다 먹고 나니 손님은 강의하는 시간이 되어 멀리서 눈인사만 하고, 그래도 오랜만에 이 시간에 나와 있는 것이 아쉬워 지원이 얼굴이나 잠깐 보러 뜰에 갔다. 요즘 뜰에서는 술만 팔고 있어서 맞은편 편의점에서 어린이 음료수와 과자를 사갔다. "저희 모구모구(음료수 이름) 한잔 하고 갈게여~" 씩씩하게 외치고 몇 분 기분만 좀 내다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이들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엄마가 하는 말을 척척 들어줘서 속으로 '이거 맥이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다행히(?) 순수하게 엄마를 돕고 싶었던 어린이들이었기에 나는 또 감동을 받아 어린이들을 꼬옥 껴안아 주고 무사히 잠들었다. 

 

 

 

오늘은 좀 피곤해서 그저 하루를 나열해 보기만 했는데도 또 한 바닥이 가득 찼다.

피곤에 쩔어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잘 몰랐는데 이렇게 돌아보니 또 사랑이다.

주변에서는 나에게 '가볍게 한 줄만 써, 그래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그러기에 나는 매일 이렇게 받는 게 많은 사람이다. 이번생에 가볍게 살기는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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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탱이들

2022. 5. 16. 23:26 일기/꼬박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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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너무 오지 않는다. 벌써 가뭄이라니.

비 소식이 생기면 비가 오기 직전에 아랫 밭에 풀을 뽑고 옥수수를 심으려고 했는데 그 핑계로 아랫 밭이 그때 이후 방치되고 있다. 올해도 이렇게 망하는 건가... 밭에다 마음 한번 내기가 왜 이리 어려운지.

 

그래도 정원에는 꽃들이 얼추절추 피어나고 있다.

쬐그만 정원 구석에 놓여진 돌 모서리에서 켈리포니아 포비 하나가 힘겹게 자라나고 있었다. 지난 주말 울림이가 그 싹을 보더니 "얘 이름은 구탱이야! 구석에서 자라니까 구탱이!"라고 한다. 이음이를 부르더니 같이 키우자며 열심히 쓰다듬어 준다. 평평한 데서 잘 자란 꽃 보다 구석진 곳에서, 어느 돌부리 사이에서 나는 그런 꽃들에게 눈이 더 가는 건 어린이들도 마찬가지 인가보다.

 

한 주가 지나고 어제 다시 그 싹을 보러 갔더니 훌쩍 자라 꽃대까지 올라왔다. 옆에 있는 같은 종류의 포비들은는 아직 잎만 나왔는데 신기하게 구탱이만 꽃대가 올라와 있다. 내가 "너희가 이뻐해줘서 잘 컸나 봐! 얘만 꽃대도 나와 있어!"라고 했더니 몹시 뿌듯했는지 이음이와 우리를 불러 자기들끼리 또 분주하게 움직인다. 구탱이 주변에 풀들을 뽑아주고 구탱이를 밀고 있던 돌을 아주 살짝 옮겨주고(이름이 구탱이라 구석 자리는 유지해야 해서 아예 치울 수는 없다고) 물과 좋은 흙을 잔뜩 주었다. 

 

 

 

오늘 저녁 먹기 전에는 이음이가 딸기를 따왔다.

아직 조금 덜 익었지만 엄마랑 아빠에게 빨리 주고 싶었는지 두 개를 따와서 하나는 엄마가 먹고 하나는 아빠를 주라고 한다. 나는 이음이가 전해주는 딸기를 받으며

"딸기가 벌써 익었어??"

하고 놀랐더니 이음이는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해줬는데!!!"

라며 함께 놀란다. 그 말이 귀여워서

"그러니까. 너네도 엄마가 아무것도 안 해줘도 잘 크잖아"

라며 웃었더니 이음이는

"아니? 엄마는 우리한테 엄청 많은걸 해 주고 있잖아"

라고 말했다. 감동한 나머지 나는 요상한 소리를 내며 이음이를 꼬옥 안아 주었다.

 

 

 

 

2

어젯밤에는 아이들을 일찍 재우기 위해 아이들 몰래 시계를 30분 앞당겨 놓았다.

중요한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서다. 아이들과 같이 보기에는 너무 늦게 끝나고 아이들을 재우고 보기에는 전반전을 하나도 못 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큰 어린이들은 시계를 볼 줄 알기 때문에 억지로 일찍 재우기는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쓴 꼼수가 다행히 잘 통했고 전반전이 시작한 지 그리 오래지 않아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오늘 아침이었는데...

자기 전에 30분 앞당겨 놓은 시계를 원상 복귀하는 걸 깜빡한 것이다. 심지어 울림이가 못다 한 숙제를 아침 일찍(7시) 같이 하기로 해서 일찍 일어났는데 울림이 숙제 다 하고 나니 맞춰 놓았던 알람이 울려서 너무 당황했다. 덕분에 올해 들어 처음으로 6시 반에 기상했네^^... 

 

 

 

8할이 지지고 볶는 일상이지만 간혹 아름다운 2할의 순간들이 삶을 빛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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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돼~!!!"

울림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어딘가를 향해 소리친다.

"아카시아가 벌써 시들고 있어!!!!"

그러고는 곧장 며칠 전에 따 두었던 아카시아 꽃들을 다른 통에 옮겨두고 다시 새로운 아카시아 꽃들을 따러 달려간다.

 

 

 

울림이 등쌀에 못 이겨 또 이렇게 얼렁뚱땅 아카시아 효소를 담그고 있다.

옆에서 같이 하고 싶다는 이음이를 단칼에 거절하며 자기는 혼자서 해내고 싶기 때문에 같이 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는 황울림(결국 따로 하기로 했다). 정말이지 웃기는 짬뽕이다. 

 

 

 

 

2

오랜만에 친구들을 초대했다.

곧 출산을 앞둔 만삭의 오똥이 엄마 호지와 오똥이 아빠 빌궁. 만나자 만나자 하다 못 본지가 벌써 몇 개월...

이러다 애 나오겠다며 급 번개로 만났다. 배불뚝이 호지 직관을 손꼽아 기다려 온 나는 만나기 전부터 두근두근. 애기 낳기 전에 맛난 밥 한번 꼭 해주고 싶었는데 작은 목표 하나 달성한 것 같아 뿌듯했다.

 

 

 

오랜만에 집에 손님들이 와서 그랬는지 꼬박이들은 너무 신난 나머지 이상행동들을 마구 해댔다(울림이는 계속 이상한 연기를 했고 이음이는 이상한 몸짓을, 우리는 이상한 소리를 계속 내며 다녔다). 어린이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해원이 같네 바람이 같네 하며 웃던 정신없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호지는 여전히 아이들과 금세 친해졌고, 빌궁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금세 삐졌다ㅋㅋㅋ 약 5년간 아직 대화 한 번 못해 본 '우리'와 빌궁이 언제쯤 첫 대화의 장을 열 것인지가 앞으로 우리 만남의 최대 관심사. 

 

 

 

나이가 들어 갈수록 오래 알고 지냈던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참 좋다. 

지난 날의 어리숙하고 어설프고 모났던 모습을 지나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서로의 모습을 보는 재미도 있고, 이미 볼꼴 못볼꼴 다 본 것에대한 안도감도 있는 것 같다. 서로 만나서 많은 것을 하지 않았더라도 켜켜이 쌓여가는 시간 속에 함께하는 이 관계들이 참 따뜻하다. 

 

 

 

3

어제는 가인이가 일하는 에코샵 홀씨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재밌는 물건들을 잔뜩 보내주었다.

 

 

 

루페, 나무피리, 새 피리, 스크레치, 손수건, 나무모형 맞추기 등등 엄청 여러 가지가 왔는데, 삼형제 답게 상자를 열어보자마자 분배부터 똑부러지게 하는 꼬박이들. 큰 형아 울림이가 나서서 세 개씩 들어 있는 것은 하나씩 나눠주고 개수가 맞지 않은 것은 어떻게 할지 논의할 수 있도록 의견을 묻는다. 다행히 그동안의 노하우가 쌓여서 그런지 큰 다툼 없이 알아서 척척 잘 나눴다. 

 

가인이는 어린이들이 다 커버려서 재미 없어 할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11살 울림이 포함 모두 취향 저격 당해 자기 전까지 신나게 놀았다. 오늘 아침에도 자기들끼리 일어나 책상 앞에서 스크레치 하고 만들기 하고 노는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가인이모에게 감사를...

 

 

 

사랑으로 가득한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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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 : 엄마 피카소는 왜 유명해? 피카소 그림을 왜 좋아하는 거야?
엄마 : 글쎄... 어른이 되면 될수록 아이 같은 그림을 그리기가 어렵거든. 근데 피카소가 그걸 잘해서 그런거 아닐까? 그러고 보면 참 이상해. 어른들은 아이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고, 아이들은 어른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잖아. 왜 그럴까?
울림 : 어른들은 아이들 그림을 그리기 어려워하고 아이들은 어른들 그림을 그리기 어려우니까?
엄마 : 자신들이 못하는 것에 대한 동경 같은 걸까?
울림 : 응
엄마 : 울림이는 어떤 그림이 좋아?
울림 : 나는~~ 내 그림!

자기애 참 강한 황울림ㅋㅋㅋ 나는 그런 네가 좋아. 오래오래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에게 몇 없는 부모로서의 바람이다.

 

아카시아 잔뜩 따와서 효소 담궈 달라는 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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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이는 지난달 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이음이의 첫 피아노 선생님은 작년에 함께 공연을 진행 했던 동연이 형: )

 



작년 동연이의 피아노 공연을 보며 손가락을 꼬물거리던 이음이는 이후에도 계속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학원을 보내야 하나 과외를 찾아봐야 하나, 학원을 보낸다면 어떤 학원을 보내야 할지, 과외 선생님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수십 가지 고민만 하다 몇 달을 흘려보냈다. 안 되겠다 싶어(+남편의 부추김으로) 동연이에게 상담을 하다가 직접 배우게 된 것. 다행히 이음이도 즐거워하고 두 사람을 이어준(?) 엄마도 뿌듯해하며(정작 동연이는 어떤지 모르겠지만...여튼) 행복하게 진행 중.

어제도 동연이 형네서 피아노를 치고 나오던 이음이는 "엄마 손가락이 간질간질해. 피아노가 치고 싶어서~"라며 설레어했다.



3
최근 나의 단짝이자 껌딱지 '우리'. '우리'는 요즘 바쁜 엄마를 따라다니느라 덩달아 바쁘다.
그래도 옆에서 조용히 자기 할 일 하며 기다려주는(혹은 어쩔 수 없이 익숙해진) '우리'가 참 고맙다.

 

이제 엉아들 처럼 v 도 해주는 황꼬맹쯔
엄마 이 꽃에서 무슨 냄새 나는 줄 알아? 똥냄새 난다? 엄마도 한번 맡아봐~

 



4
어제는 바깥 일정이 있어 멀리 다녀온 남편이 밤늦게 집에 들어오며 (웬일로)야식을 사 왔다.
고급진 새우 초밥이었는데, 저녁으로 먹다가 나와 울림이가 생각나서 싸왔다고.
집을 들어설 때부터 내가 좋아할 것을 상상하며(뭐든 챙겨 오면 좋아함) 이미 뿌듯해져 있는 남편의 표정이 귀여웠다.

 



우리도 벌써 올해로 결혼 10년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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