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나의 대답과는 무관하게 우다다 달려가 왁자지껄 놀다 오지만 때때로 나는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어
"밥 먹고 가야지" "할머니 할아버지도 좀 쉬셔야해" "오늘은 좀 늦었으니 집에서 놀자~" 라며 아이들을 붙잡아 두곤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또
"놀자고 안하고 자전거만 타고 올게" "농구만 하고 올게" "어제 두고 온 잠바만 가지고 올게"
라며 어떻게든 내려갈 핑계를 만들어 낸다.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리가 이사 오기 바로 전 해에 지금 사시는 곳으로 집을 지어 들어오셨다.
우리가 이사 오기 직전에 우리 집에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들으시고는 한 여름 땅벌에 쏘여 가며 우리 집 주변의 풀들을 모두 뽑아 주셨다. 우리가 이곳에 살게 된 이후에도 알게 모르게 챙겨 주신 것들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늘 대가 없이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분들.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리가 처음 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 사랑을 실천하는 분들이다. 뭘 하든 대가를 바랐던 나는 이분들 앞에 항상 작아졌다 커졌다 하며 마음을 키웠다. 아마 늘 옆에 붙어 있던 아이들은 그런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며 나보다 더 마음을 키웠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울림이와 이음이가 처음 아랫집으로 내려오던 순간을 아직도 마음속에 고이 접어 간직하고 계신다.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실 때면 그때 아이들의 표정, 했던 말들, 행동 하나하나 기억하고 계시니까. 나는 가끔 이런 우리의 관계를 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만나 하루하루를 함께 마주하며 살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온 우주가 우리를 응원해 준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 우리는 이웃 운이 진짜 좋아. 그치? 집은 좀 좁고 그래도 이웃 운이 너무 좋아서 다른 데로 갈 수가 없네"
며칠 전 이음이가 한 말이다. 이음이 말처럼 우리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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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 2
눈썰매를 탑니다. ‘우리’는 맨 앞에, 이음이는 그 뒤에, 울림이는 그그 뒤에, 나는 맨뒤에 겹겹이 포개 앉아 가파른 비탈길을 쏜살같이 달립니다. 발뒤꿈치를 방향키로 삼아 길을 잡지만, 더러는 몸을 가누지 못해 작은 둔덕에 쑤셔박히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더 신이 납니다. 한참을 마을길을 미끄러져 내려가 멈추고, 다시 올라오려고 하는데 ‘우리’가 눈썰매에 태워 끌어달라고 합니다. ‘그래. 어서 타.’ 라고 하자, 이음이가 야무지게 나무랍니다. “‘우리’ 안 돼. 할아버지 다리 아파.” 눈썰매에 타려고 하는 ‘우리’를 이음이가 끌어내리려고 하자, ‘우리’가 주먹을 불끈 쥡니다. 금방이라도 이음이를 한 대 칠 듯한 ‘우리’의 장갑 낀 왼 주먹에서 묵직함이 느껴집니다. 이음이도 주먹을 쥐고 둘 사이 실강이가 벌어지는 순간, 갑자기 울림이가 소리칩니다.
‘어디서 주먹질이야!’
차렷자세로 꼿꼿이 선 채 내뱉는 카랑카랑한 쇳소리가 찬결(찬 기운)에 가늘게 떨립니다. 울림이와 이음이는 눈밭에서 나뒹굴며 놀고, ‘우리’와 나는 하는 수 없이 빈 눈썰매를 끌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갑니다. 얼마쯤 올라왔을까, 메아리처럼 ‘우리’가 소리칩니다.
‘어디서 주먹질이야.’
‘우리’ 얼굴에는 지그시 웃음을 머금고 있습니다. 상수리나무 가지 끝에 아침 노을이 묻어있습니다. 바람이 스치면 비늘눈처럼 노을 가루가 떨어집니다. 올 한 해도 가슴에 곱고 따스한 꿈을 그리시길 두손모읍니다.
2022. 1. 6
‘우리’가 ‘등산 하자.’라고 할 땐, 길에서 10m쯤 되는, 제법 가파른 우리 집 언덕을 오르자라는 말이에요. 얼마나 재빠르게 올라가는지 가끔 이음이와 울림이가 뒤쳐질 때도 있어요. 눈 가득 덮인 언덕을 네 발로 기어오를 땐 밑에서 보면 눈다람쥐 같아요. 먼저 올라가선 손을 잡고 올라오라며 ‘우리’가 손을 내밀어요. 나는 ‘우리’의 자그마한 손을 붙잡고 언덕 가장자리를 오르지요. 오늘은,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다져져 길에 엉겨붙은 얼음덩이를 깨뜨렸어요. 엄마 차가 미끄러지지 말라고요. 뾰족한 돌로, 막대기로, 나중에는 ‘우리’가 가져온 작은 망치로 톡톡 깨뜨렸어요. 깨진 얼음 조각은 유리 같다며 ‘우리’가 빈 페이트 통에 쓸어담아 집으로 가져갔어요. ‘우리’는 눈을 치우거나 눈이 녹으면 늘 아깝다며 아쉬워 해요.
그러다가 나보고 배 고프냐고 물어요. 그렇다고 하니 해바라기 씨를 까먹자고 해요. 해바라기 씨 먹는 건 누구한테 배웠냐고 하니 이음이 형이 알려 줬다고 해요. 씨를 까서 입에 넣어주니, 입에서 해바라기 꽃이 필까, 배에서 필까, ‘우리’가 이야기해요. 곁에서 듣고있던 이음이가 나도 어릴 땐 저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해요. 볕 좋은 벽에 나란히 기대앉아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며 놀고 있으니, 엄마가 밥 먹으라고 데리러 왔어요.
2022. 1. 8
‘우리’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있어요. 아궁이에서 불장난을 하고 기어나오다가, 비를 가리려고 얹어 둔 야트막한 판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혔나 봐요. 눈물이 핑그르르 돌 만큼 꽤 아플 텐데, 이음이 같으면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 텐데 얼굴만 찡그린 채 꾹 참고 있어요. 손등 위를 호 불어주며 괜찮으냐고 하니, 돌머리라서 괜찮다고 해요. 이제부터 ‘우리’를 ‘돌머리 우리’라고 해야 하겠구나 하니,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요. 그럼 ‘괜찮아 우리’라고 할까 라고 하니 그것도 아니래요. 그럼 하는 수 없이 ‘등산 잘하는 우리’라고 해야 하겠구나 하니 고개를 끄덕여요. 겨울로 들어서면서 ‘우리’ 딴 이름이 ‘자전거 타는 우리’에서 ‘등산 잘하는 우리’로 바뀌었어요. 이음이한테 물어봤어요. 울림이 형을 주먹으로 때려본 적이 있느냐고. 한 번 있었다고 해서,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하니, 얼른 울었다고 하며, 울어야 울림이 형에게 더 맞지 않는다고 해요. 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들려주니 막 웃었어요.
2022. 1. 14
초인종이 울립니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흰 망아지 한 마리가 장갑 낀 손으로 눈 치우는 삽을 가리키며 빌려달라고 합니다. 다시 딸그락딸그락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귀여운 눈토끼 한 마리가 마루 밑에 넣어둔 눈가래를 꺼내고 있습니다. 눈토끼를 따라 눈 덮인 숲길로 나갑니다. 두 볼이 바알갛게 달아오른 눈토끼는 어느새 눈을 움켜 쥐고 한 입 먹더니 앙금앙금 언덕을 기어오릅니다. 뒤따라 오르며 눈토끼 꼬리를 잡았다 놓았다 하는 나는, 한 마리 늙은 곰입니다. 꼭대기에 올라간 눈토끼는 미끄러지듯 데굴데굴 굴러 도랑에 쑤셔박히며, 그게 신나는지 자꾸 되풀이합니다. 하얀 고양이 한 마리는 ‘호도도독 호도도독’ 소리를 지르며 눈밭을 내달립니다. 울림이는 이제 커서 무릎 위에 앉으면 망아지 같고, 이음이는 고양이처럼 폭 안기고, 밤벌레처럼 토실토실한 ‘우리’ 토끼를 품에 안으면 오히려 내가 안긴 듯 포근합니다.
2022. 1. 17
‘할아버지, 할아버지 집이 밖에 있으면 좋겠어.’
‘우리’가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들고 왔어요. ‘모자 사세요!’ 엄마가 잠자리에서 몇 번이나 들려주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다 알고 있을 텐데, 귀를 쫑긋하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놀라워 하는 표정이에요. 어느덧 날은 어둑해지고 축구 하러 갔던 엄마가 돌아오자, 울림이와 이음이는 먼저 집으로 달려가고, ‘우리’는 뒤늦게 일어섭니다. 집으로 바래다 달라며 어부바 해 달라고 하더니, 마음을 바꿔 안아 달라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앞을 보고 ‘우리’는 뒤를 보고 간다며. 신을 신어야지 하며 내려놓자, 잠깐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는,
‘할아버지, 할아버지 집이 밖에 있으면 좋겠어.’
라고 해요. 왜냐고 물으니, 신을 신지 않아도 되니까 라면서요. 아! ‘우리’는 집이 밖에 있고 또 밖에 있고 하면, 대청마루가 ‘우리’네 집까지 이어져서 신발을 갈아신지 않고 이대로 할아버지 품에 안겨 집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2022. 1. 18
"한 나절이 다 가도록 모자를 사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빨간 모자 하나도 사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모자 사세요!’라는 그림책을 읽어주다가,이 대목에 이르러, ‘아, 가엾어라. 아무도 모자를 사 주지 않으니.’ 라고 하니까, ‘우리’가 말했어요.
“책 안에 들어가 빨간 모자 하나 사 와.”
어쩌지요. 나는 늙어 책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잃어버렸으니. ‘우리’는 책 안으로 들어갈 줄 아는 사람을 알고 있다고 하니, 내일 만나면 물어봐야 하겠어요.
2022. 1. 21
올해 여덟 살인 이음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 영원히 세 살이던 ‘우리’는 갑자기 두 살을 더 먹어, 삼월이면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 간다고 해요. 쓸쓸한 표정으로, ‘우리’가 유치원에 가면 할아버지는 누구와 놀지? 라고 하니까, ‘할아버지는 단이(우리집 강아지)와 놀아.’ 라고 딱 잘라 말해요. 어디에서 배웠는지 ‘아주 그냥’이란 말을 쓰고, 짜장면을 먹다가 손에 옷에 묻은 국물을 손가락으로 쓱쓱 비비고는 ‘티도 않나.’ 라고 하는 ‘우리’는 어느덧 나에게 ‘미래의 아이’가 되어 가요. ‘미래의 아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배워 빌려 쓴 말이에요. 어제 ‘우리’가 ‘미래의 차’란 말을 해서 무슨 뜻인지 몰라 울림이가 설명해주었는데, 그 때도 못 알아듣고 나중에 생각해보니 ‘앞으로 갖고(타고) 싶은 차’라는 뜻이었어요. 요즘 엄마 차가 자꾸 고장 나서 바꿔야 하나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한 말일 거예요.
2022. 1. 28
“아빠가 말한 용이잖아.”
회호리구름이 일고 빗방울이 떨어지며 하늘에 용이 나타나자 ‘우리’가 한 말이에요. 영화 속에서 아빠 갓파가 들려준 용 이야기는 맨처음에 나오는데, 놀랍게도 ‘우리’는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어요. 이음이는 할머니 무릎 위에, 울림이는 그 곁에, ‘우리’는 내 무릎에 앉았다가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가 내 왼팔을 부둥켜안고 하면서 2시간 18분 동안 눈을 떼지 않고 ‘갓파 쿠와 여름방학을’이란 애니메이션을 함께 보았어요. 갓파(河童 かっぱ)는 일본 전설 속에 나오는 강이나 바다에 사는 요괴로, 바가지 머리를 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머리 꼭대기에 움푹 파인 곳(접시)이 있고, 거기에는 물이 들어 있는데 물이 없어지면 죽는다고 해요. 팔다리에는 물갈퀴가 있고, 새 주둥이를 하고 거북이처럼 등딱지가 있는데, 장난을 좋아해 아이들을 물속으로 끌어당겨 씨름을 하기도 하고 특별히 오이를 잘 먹는다고 해요. 전설 속 갓파를 2008년 6월 도쿄 한복판으로 끌어와 펼쳐지는 이야기인데, 어린 갓파 ‘쿠’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가슴을 울렸어요.
“아빠가 말했어. 인간은 물과 땅을 우리에게서 빼앗고 금방 바람이나 하늘 신들이 사는 곳까지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그 대신 영혼을 잃어버리겠지 라고.”
자꾸만 내 겨드랑이를 파고들더니 ‘우리’가 내 무릎을 베고 곤히 잠들었어요. 낮잠 잘 시간인데 울림와 이음이가 우리 집에 놀러온다니까 엉겁결에 따라온 듯해요. 이불을 덮어주고 가만히 무릎을 빼내어 베개를 베어주었어요. 하르르 꽃잎 한 장이 내려와 앉았을까. 하늘거리는 나비의 날갯짓 고요한 숨결이 함박눈 내린 새벽 같아요. 한 시간 남짓 그렇게 잠들었을까. 짓궂게 울림이가 곁에 누워 끌어안고 볼을 만지니, ‘우리’가 깨어났어요. 금방 울먹이며 엄마를 찾아요. ‘엄마가 보고 싶구나.’ 두툼한 윗옷에 싸 안아 엄마에게 데려다 주었어요.
2021. 1. 19
부드러운 새의 속깃털이 날리는 듯하더니 가루눈이 뿌리고 눈연기로 하얗게 흩어져요. 소복히 쌓인 눈을 따라 아이들이 왔어요. 눈 위에 드러누웠다가 엎드려 헤엄치기도 하고, 끝내 ‘우리’는 눈을 먹었어요. 나는 부엌 창가에 기대어 그 광경을 훔쳐보고 있었어요.
2021. 1. 26
부산한 발길에 떠들썩한 목소리, 갑자기 언덕길이 환합니다. 밭에서 대나무로 엮은 낡은 꽃울타리를 뜯어내고 있는데, 울림이와 이음이가 언덕을 뛰어내려가고 있어요. 나는 짐짓 모른 체 ‘너희들 어디 가니?’ 하고 물으니, 아이들은 가던 걸음을 재촉하며 ‘아랫집 할아버지네.’ 하고 대답해요. 마치 남의 일처럼 ‘그렇구나.’ 하고 딴청을 부리며 하던 일을 계속하니, 이음이가 ‘할아버지는 옆집 할아버지, 텃밭 할아버지이잖아. 우린 아랫집 할아버지 집에 가.’ 하며 나를 거들떠보지 않고 우리 집으로 달려갑니다. 현관엔 아이들 신발이 나자빠져 뒹굴고 있겠지요. 아이들이 늘 눈부신 건 가슴에 빛덩이를 품고 있기 때문이지요.
2021. 2. 1
아이들이 서천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새해 인사하러 왔다고, 해뜨리 삼촌이 그린 그림과 함께 황금성 선생님이 보내준 사진이에요. 울림이 손에는 ‘책도 조금만 읽어라.’ 하는 할아버지 편지가 쥐어져 있네요. 울림이는 책에 폭 빠져 있으니까요. 아이들에겐 서천 할아버지인 친할아버지와 강화도 할아버지인 외할아버지와 초롱산 할아버지인 아랫집 할아버지가 있어요.
2021. 2. 6
<어쩌구와 저쩌구가 경험하는 이상한 모험>은 다음 편에
<어쩌구와 저쩌구의 이상한 모험. 1
등장인물 : 어쩌구, 저쩌구, 달도맨(나쁨), 루로전기, 자장지, 가제영감
#1
저쩌구 : 어! 넌?
어쩌구 : 자장지. (아마 자장지를 가리키는 듯함)
#2
어쩌구와 저쩌구가 자장지에 함께 올라탔는데, 저쩌구만 타고 있고, 루로전기가 나타났어요.
울림이의 연재만화 ‘어쩌구와 저쩌구가 경험하는 이상한 모험’, 다음 편을 기대하세요^^
2021. 2. 17
수북이 가루눈이 쌓이고 다시 겨울이 온 듯해요. 말긋말긋 꽃눈들은 맨몸으로 이 추위를 견디고 있겠지요. 숯으로 그린, 아이들 그림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아궁이 불을 쬐고 있어요. 가운데가 물개를 그린 ‘우리’ 그림, 왼쪽 아래가 이음이 그림, 어쩌구 저쩌구를 그린 울림이 그림은 오른쪽에 있어요.
2021. 2. 20
눈밭에서 고라니처럼 소리 지르며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어요. 뜰에 나온 나를 보자, 자빠질 듯 ‘우리’가 달려와, 언덕으로 이어진 마당 가장자리에 오똑 멈춰섰어요. ‘우리야!’ 하고 반갑게 소리쳐요. 내가 ‘우리’를 부를 땐 늘, 첫음절인 ‘우’를 높게 소리내지요. 털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장화를 신은 ‘우리’는 눈사람처럼 서서 아무말없이 나를 내려다봐요. 그러더니 팔을 내려 허벅지에 붙인 채 두 다리를 벌려요. 나도 따라 두 다리를 벌리고 ‘우리’ 흉내를 내자, 얼른 다리를 오무리고, 그런 채로 서로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어요. 나와 ‘우리’는 벌써 ‘배를 튼 사이’라 아무말 하지 않아도 서로를 잘 알아요. 며칠전 마당에서 놀다가 느닷없이 배를 보여달라잖아요. 내가 배를 보여주자, 우리도 웃옷을 걷어붙이고 배를 보여줬어요.
어제 그제는 아이들과 연을 날리며 놀았어요. 엊저녁 통나무 작업장에 올라가 날린 연은 바람을 타고 하늘에 떠있는 매보다 높이 올라갔어요. 까마득히 올라갔다가는 끝내 세차게 굽이치는 바람에, 울림이 연은 얼레에 묶인 실이 풀리어 초롱산을 넘어가고, 이음이 연은 바위절벽 아래로 떨어져 높다란 나무에 걸렸지만요. 언제인가 연을 찾으러 초롱산에 올라가자고 약속하며 아쉬운 발길을 돌렸어요. 나에게는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가, 꽃이 지고 나서야 늘그막에 가슴에 피어나는 눈물겹게 아름다운 꽃이에요.
2021. 2. 28
‘할아버진 손바닥에 바람을 일으켜 너희들을 쓰러뜨릴 수 있어.’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다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내자, 어디 해보라며 이음이가 먼저 내 앞에 떡 버티고 섭니다. 오른 손바닥을 펼친 뒤 가지껏 힘을 모아 앞으로 쫙 내뻗어 봅니다. 이음이는 꼼짝도 않습니다. 한 차례 더 해보지만, 딱 잘라 ‘봐, 안 되지.’ 하며 어림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다음은 울림이 차례입니다. 나는 울림이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에 울림이만은 쓰러뜨릴 자신이 있습니다. 힘을 모으고 손을 뻗어 울림이 겨드랑이 가까이에 대자, 울림이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섭니다. ‘봤지, 너희들.’ 하며 큰소리쳐 보지만, 간지럼을 잘 타는 울림이는 그저 배시시 웃기만 합니다. 다시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부챗살처럼 손을 펼쳐 파란 하늘에 매 일곱 마리를 띄우며, ‘할아버진 새들도 날게 할 수 있다.’고 하자, 이음이는 언제 보았는지 ‘아니잖아. 먼저 이렇게 옆으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고(하늘에 매가 나는 것을 보고) 나서 손을 들었잖아.’ 라며 통 믿으려 들지 않습니다.
엊그제는 공을 차다가 아이들에게 토네이도슛을 선보이겠다고 했습니다. 가끔 공이 휘는 바나나킥과 발로 마당을 차 흙바람을 일으켜 회오리슛을 자랑했지만, 이번에야말로 너무 빨라 축구공이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습니다. ‘어디 해 봐.’ 하는 아이들 앞에서, 공을 세워 놓은 채 힘껏 헛발질을 하곤, 앞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봐, 공이 안 보이잖아.’ 라고 말하는데, 아이들은 내 발 밑에 그대로 멈춰있는 공만 쳐다보며 어처구니없어 하는 표정을 짓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곤 나 혼자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자지러지게 웃습니다. ‘할아버지 얼굴 빨개지는 거 봐.’ 멀뚱멀뚱 아이들이 쳐다봅니다. 이럴 때마다 내가 아이들과 놀아주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나와 놀아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며칠 집에서 쉬었다가 학교로 돌아간 우인기가 틀어준 노래를 듣습니다. 마룻바닥에 무겁게 갈아앉아 있던 공기가 날아올라 새털처럼 가볍게 떠다닙니다. 오늘도 바람에 몸을 맡기고 춤추는 나뭇가지처럼 출렁입니다.
2021. 3. 1
온종일 비가 내립니다. 부엌 창문 밖, 텃밭으로 오르는 언덕 오른쪽에 집이 한 채 있습니다. 집 임자가 살려고 손수 지은, 다락이 있는 이층 통나무집입니다. 오랫동안 세를 놓고 보살피지 않아 이제는 낡고 칙칙한 빛깔을 띠고 있습니다. 집 왼쪽에 버드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데, 물이 올라 연둣빛 바람이 일렁이는 듯합니다. 빛 바랜 거무스름한 통나무집이 산뜻한 연둣빛에 묻힐 듯한데, 버드나무 실가지가 한결같이 집 쪽으로 쏠리고, 집 전체가 부옇게 그렁그렁 눈물 속에 부풀어오르는 까닭은 그 곳에 울림이 이음이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2021. 3. 3
‘얘들아, 어서 집에 가야지.’ 날이 어둑해져서 지나가듯 말을 꺼냈는데, 전혀 뜻밖에 ‘아직 안 깜깜하잖아.’ 하고 ‘우리’가 대꾸를 해요. 그저 아무말 없이 형들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던 ‘우리’ 그런 말을 한 건 처음이에요. 그 말이 하도 귀여워, 손을 펴 ‘우리’ 눈을 가리고, 윗옷을 들춰 ‘우리’ 얼굴을 덮어씌워 어둡게 해보지만, ‘우리’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자꾸 안 깜깜하다고 해요. 점심 때가 되어, 집에 가서 밥 먹어야지 하면, 밥 먹으러 가면 다시 못 논다며, 안 가려고 떼를 쓰던 울림이 이음이 생각이 나요. 아이들은 놀아도 놀아도 시간이 모자른 듯해요.
요즘 ‘우리’와는 하키 놀이 비슷한 걸 하며 놀아요. ‘우리’가 처음 시작한 놀이인데, 마당비로 작은 축구공을 쳐서 몰고다니는 거예요. 공이 굴러가면 그저 웃으며 따라가고, 아직 아무런 규칙이 없어요. 그러다가 마당을 벗어나 공이 비탈길을 내려가면 큰소리로 웃으며 데굴데굴 굴러가듯 따라가 주워오곤 하지요.
어젠 새학기가 시작되어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가는 아이들을 아내와 함께 배웅하러 나갔어요. ‘너희들, 못 놀아서 어떡하지?’ 하니, 이음이가 ‘어린이집에 갔다와서 마음껏 놀면 되지.’ 라며 환하게 소리쳐요.
2021. 3. 4
큰일났어요. ‘우리’가 나보고 밀차(손수레)를 사달라고 해요. ‘반들’이네 집에도 밀차가 있는데, 우리 집에는 없다고요. ‘반들’이는 ‘우리’ 친구예요. 그래서 밀차를 어디에다 쓰려느냐고 물으니까, 작은 축구공을 넣어둔대요. 빚을 내서라도 ‘우리’에게 노란 밀차 한 대를 뽑아줘야 하겠어요.
하나 더 일러바칠 게 있어요. 글쎄 어제 ‘우리’가 ‘이음이 바보!’라고 놀렸대요. 사연은 이래요. 나하고 ‘우리’는 마당에서 작은 축구공으로 하키 놀이를 하고, 어제따라 책벌레인 울림이는 ‘why’라는 책을 들고 와서는 폭 빠져있었어요. 이음이는 혼자 심심해서 나보고 축구를 하자더니, 데구루루 마루 밑으로 들어간 작은 축구공을 따라 들어가 공을 움켜쥔 채 꼼짝도 않고 있었거든요. 다행스럽게, 몇 번이나 ‘우리’가 ‘바보’라고 소리쳐도, ‘이음’이는 아무 대거리도 하지 않았어요.
2021. 3. 5
벌써 열흘이 지났나 봐요. 연이 잘 날지 않자, 울림이가 ‘아빠가 오면 잘 날 텐데...’ 라고 해요. ‘그럴 거야, 아빠는 무엇이든지 잘하니까.’ 라고 내가 말하자, 울림이는 ‘아빠(이름)는 바람이니까.’ 하며 배시시 웃어요. 괜히 내 말이 싱겁게 돼 버렸어요. ‘아빠가 화내면?’ 엊저녁 아궁이 불에 마시멜로를 구워 먹으며, 울림이가 꺼낸 말이에요. 그 때 마침 아이들 아빠가 퇴근해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나는 또 잊고, 아이들 아빠가 화내는 모습을 잠깐 떠올려 보았는데, ‘토네이도’ 라며, 울림이와 이음이가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아빠 이름을 가지고 놀아요. 아빠가 오면, 이음이도 울림이 형아도 아궁이 불도 할아버지네 집도 다 집어삼켜버린다며. 그러자 곁에서 듣고 있던 ‘우리’가 ‘삼촌도(집어삼켜요.)!’ 라고 해요. 내가 ‘삼촌?’ 하고 되묻자 ‘할아버지도!’ 라고 하며, 대화에 끼어들어요. 아이들 아빠가 화내는 모습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데 말이에요.
2021. 3. 7
오늘은 아이들과 ‘스무고개’가 아니라, ‘무한대고개’ 수수께끼 놀이를 했어요.
첫째 고개 : 우리 집에 있어?
울림이 : 없어.
둘째 고개 : 울림이 집에는 있는 거니?
울림이 : 없어.
셋째 고개 : 이 세상에 있기는 한 거니?
울림이 : 없어.
...
답이 무엇이었는지 아세요? 울림이가 머릿속으로 상상한 것은 ‘이 세상에 없는 진흙 덩어리’였어요.
울림이 :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어릴 때 엄마 아빠와 친구였어요. (‘엄마 아빠를 닮아 할아버지도 잔소리가 많다’고 말하려는 거예요.)
나 : 왜?
울림이 : 왜 그렇게 잔소리가 많아요.
복수초 곁에 또 한 송이가 흙을 들추고 뾰족하게 고개를 내밀었어요. 흙을 들추었다기보다는, 복수초의 속삭임을 듣고 땅이 문을 열어준 것이겠지요.
2021. 3. 11
요즘은 ‘우리’에게도 짓궂게 장난을 쳐요. 마당에서 놀다가 ‘우리’가 넘어지면, 나는 부리나케 ‘이~오 이~오’ 구급차 소리를 내며 달려가지요. ‘우리’는 얼른 일어나며 ‘괜찮아요.’ 라고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 하겠는데.’ 하며 놀려요. 그러면 아파서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듯한 울음을 삼키며 ‘괜찮아요, 괜찮아요.’를 되풀이해요. ‘우리’는 병원에 가고, 주사 맞는 것을 무서워하거든요. 내가 자꾸 놀려서인지, 어제는 내 뒤를 따라 오다가 넘어졌는데, 툭툭 털고 일어나며 혼자서 ‘괜찮아요.’ 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뒤돌아보거나 묻지도 않았는데 말이에요. 올해 네 살인데도, 몇 살이냐고 물으면 ‘세 살’이라고 우기는 ‘우리’. 네 살이 되면 어린이집에 가야 된다고 했는지, 엄마 곁에 꼭 붙어있고 싶어서 해가 지나도 ‘우리’는 영영 나이를 먹지 않아요.
2021. 3. 14
‘어디야? 어디야?’ 하고 내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더니, ‘놀러갈래요.’ 하고는 전화가 끊깁니다. ‘우리’ 목소리입니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지나서야 잠바를 두 겹이나 껴입고, 엄마가 다듬어서 보냈을 머리핀 두 개를 꽂고 왔습니다. 울림이와 이음이는 방안에서 지우 삼촌과 놀고,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해서 ‘우리’와 나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초롱산 아래 통나무를 옮기는 커다란 크레인이 보입니다. 저기 가 볼까 하니, ‘우리’가 선뜻 따라나섭니다. 두발자전거를 끌고 끙끙대며 비탈길을 올라가니, 자동차 뒤꽁무니가 보입니다. ‘우찬이 아빠 차다.’(처음엔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아 ‘우상’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제대로 알고는 서로 쳐다보며 웃었어요.) 우찬이는 이음이 친구인데, 우찬이 아빠 차라는 걸 ‘우리’는 금방 알아챕니다.
며칠 전부터 우찬이네 집을 짓는다고 통나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지름이 어른 손으로 두 뼘이나 되는 ‘더글라스 퍼’라는 아름드리나무를 기계톱으로 켜는 일입니다. 귀를 후벼파는 시끄러운 기계톱 소리, 눈보라처럼 날리는 톱밥. ‘우리’는 내 다리에 바싹 붙은 채, 오랫동안 뚫어지게 지켜보고 서있습니다. 문득 ‘캄펑의 개구쟁이’에 나오는 만화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고무나무 숲에서 윙윙대는, 주석을 채취하는 준설기에서 나는 소리를 듣던, 만화 속 주인공. 어느새 나도 ‘라트’의 어린시절로 돌아가, ‘우리’와 함께 서있습니다.
2021. 3. 15
아이들 말처럼 나는 이제 ‘늙은이’이어서 아이들만큼 높이 뛰거나 빨리 달리지 못해요. 놀이기구인 ‘방방’ 위에서 놀 때도,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거나, 누웠거나 엎드려 있지요. 아이들은 내 둘레를 방방 뛰어다니다가 마치 나무 위를 오르듯 내 등을 타거나 내 목을 두 손으로 휘감고 놀지요. 링 위에서 레슬링을 할 때는, 울림이 혼자 편을 먹고, 나는 이음이와 ‘우리’와 한 편을 먹어요. 먼저 이음이가 나섰다가 힘에 부쳐 ‘터치’라 하며 내 손바닥을 치면 내가 나가 싸우고, 내가 힘들면 ‘우리’와 터치를 하지요. 고라니처럼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울림이는 이제 아무도 상대할 수 없어요. 아이들이 킥보드를 타거나 두발자전거로 쏜살같이 내달릴 때도, 나는 길 한쪽에 비켜서서 서로 부딪치거나 비탈로 떨어지지 않도록 손짓을 하거나 크게 소리치는 일밖에 하는 일이 없지요.
울림이 이음이는 지금보다 어릴 때부터도 무엇이든지 혼자 힘으로 해 보겠다고 우겼어요. 톱질, 망치질, 도끼질,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까지도 끝내 저희들 손으로 해 보아야 직성이 풀려요. 그럴 때 나는 곁에서 조바심 치며 지켜보는 수밖에 없어요. ‘우리’도 형들을 닮았어요. 엊그제는 손가락에 붙인 밴드가 떨어져 새 것으로 붙여주겠다고 하니, 내 손을 밀치며 제 손으로 덕지덕지 감아놓더니 또 그 위에 약을 발라야 한다잖아요. 이제 ‘우리’는 혼자 외발손수레에 올라타기도 해요. 그러던 울림이가 이제 제 힘으로 되지 않을 땐 내게 부탁을 해요. ‘나무총’을 만들며 나무를 빗금으로 자르는 건 힘드니 나한테 도와달라고 하더니, 어제는 나무 모서리에 못을 박아 달라고 가져왔어요. 남에게 도움을 청할 줄 아는 만큼 울림이 마음이 성큼 커버렸어요. 땅에서 발을 뗀 채 바람처럼 내달리다가도 자전거 핸들이 삐뚤어질 땐 ‘할아버지’ 소리지르며 고쳐달라고 내게 뛰어오는 ‘우리’는 봄하늘이 안겨 오는 듯해요.
2021. 3. 16
집에 뛰어가더니, 울림이가 로봇자동차를 가지고 왔어요. 무선조종기로 전후좌우로 움직이게 할 수 있고, 차 앞에는 두 손이 달려 있어 물건을 집을 수도 있어요. 바퀴는 무한궤도(탱크 바퀴)로 가벼운 장애물도 뚫고 지나갈 수 있어요. 마당가에 있는 지하수 펌프 위 평평한 함석에 놓고 한 번 멋지게 선을 보이더니, 아무도 만지지 못하게 연결한 선을 빼어버려요.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음이와 ‘우리’가 어느만큼 거리를 둔 채 손으로 만지지도 않고 ‘나도 한 번 해 보겠다.’고 떼를 쓰지 않는거예요. 울림이에게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위엄까지 느껴졌어요. 그 위엄은, 이런 복잡한 기계를 조립할 수 있다는 울림이만의 자부심에서 오는 것 같았어요. 곁에서 보다 못해 ‘이음이와 우리도 해 보고 싶을 거야.’ 하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어요. 울림이는 뻐기듯 ‘집에 들어가서 해 줄 게.’ 하며, 우리 집으로 뛰어들어가더니, 안방 침대 위에서 먼저 ‘우리’에게, 나중에 이음이에게 어떻게 조종하는지 찬찬히 설명해주고 한 번씩 움직여 보게 해주었어요. 가끔 느끼지만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어요. 그 질서는 아무리 동생 것이라도 남의 것을 만질 땐 꼭 허락을 받는 거예요.
요즘은 ‘우리’도 만화영화에 맛을 들여, 우리집에 오면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만화영화(보고 싶어요.)’ 라고 해요. 엄마는 못 보게 하는데, 갑자기 엄마가 들이닥치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지요. 만화영화를 보다가 초인종이 울리면 얼른 텔레비전을 끄고 시치미를 뚝 떼지만, 집에 가서 저희들이 먼저 털어놓거나, ‘우리’가 말을 배우고 난 뒤부터는 ‘형아들 뭐했어?’ 하고 엄마가 물어보면 ‘만화’라고 일러바치지요. 안방에 텔레비전을 들여놓은 뒤로부터는, 허구한 날 텔레비전을 켜놓고 멍하니 죽치고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아이들도 텔레비전을 보면 마음이 사나워지는 것 같아 아예 텔레비전을 없애기로 마음 먹었어요. 그러면서 생각한 것이 울림이네처럼 빔프로젝트를 사서 가끔 영화를 보자는 것이었어요. 먼저 아이들에게 번지르르하게 자랑을 늘어놓았어요. 할아버지네는 너희 집보다 엄청 좋은 빔프로젝트를 사서 밤낮으로 틀어놓을 거라고.
아이들이 물었어요. 할아버지는 돈이 없지 않느냐고. 우물쭈물 내가 대답했지요. 초롱산에서 산삼을 캐거나, (지금도 어디에서 숨어서 자라고 있을) 댕구알버섯을 팔아서 사겠다고. 그러자 울림이가 조용히 말했어요. ‘그냥 싼 거 사.’ 라고 말이에요. 한껏 부풀려 놓았던 풍선이, 울림이가 툭 던진 그 한 마디로 탁 터져버렸어요. 엊그제는 아내와 빔프로젝트 사는 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아내는 너무 비싸니까 좀더 생각해보자 하고, 나는 기왕 사는 바에 제대로 된 것을 마련하자고 하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울림이가 ‘질투 나서 그러는 거지.’ 라고 하잖아요. 울림이에게 또 한 방 얻어맞아 지금 나는 그로기(실신) 상태예요. 글쎄 내가 울림이네 집에 있는 걸 보고 시샘이 나서 덩달아 빔프로젝터를 산다는 거예요.
2021. 3. 17
울림 여자친구 이름을 아세요? 예, 맞아요. ‘안’이에요. 울림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반에 여자친구가 있느냐고 물어봤어요. 울림이는 ‘아니야.’라고 했어요. ‘안’이야라고? 그럼 여자친구 이름이 ‘안’이겠구나 하니, 아니라고 해서, 그래 ‘안’이라고. 울림이는 얼굴엔 웃음이 가득한 채 짜증을 내듯이 아니라잖아 라고 되풀이했어요. 가만히 물러설 내가 아니지요. 그래 ‘안’이라잖아. 울림이는 죽을상이었어요. 그렇게 되어 울림이 여자친구는 이 세상에 없는 ‘안’이 되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안’은 잘 있느냐고 짓궂게 물어봤지요. 이제 울림이는 삼학년으로 올라가고, 울림이와 나는 그 일을 까맣게 잊었는데, 엊그제 이음이와 놀다가 무슨 말 끝에 이음이가 속삭이듯 ‘아니(‘안’이)’는 울림이형 여자친구 이름이잖아 라고 하며 씩 웃어요. 아침에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니 눈물이 나도록 크게 웃었어요.
날이 끄무레해서인지 엊그제 저녁에는 아궁이에 불이 잘 들지 않았어요. 두 사람이 앉기에는 비좁은 아궁이 앞에서 이음이가 나무 부스러기를 집어넣고 몽당비로 불을 부치고 하더니 죽어가던 불씨가 살아났어요. 이음이 너, 인디언 이름으로 ‘불을 살리는 자(사람)’라고 불러야 하겠구나 라고 했어요. 울림이가 오자, 이제부터 이음이 이름을 ‘불을 살리는 자’라고 부를 거라며, 이음이 이름은 오래 전에 까먹었다고 하니, 방금 할아버지가 이음이라고 했잖아 하며 울림이가 따져요. 나는 또 장난스럽게 하여튼 다시는 이음이란 이름은 안 부를 거라며 이음이라는 이름을 꺼냈어요. 비탈길에서 킥보드를 탈 때도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나는 더 크게 ‘불을 살리는 자’라고 외쳤어요. 울림이가 그 이름은 너무 길어 싫다고 해서 ‘불을 살리는 자, 불을 살리는 사람’을 줄여 ‘불사’라고 하니, 저희들끼리 ‘겨울왕국’에 나오는 ‘엘사’가 좋니, ‘불사’가 좋니? 하다가, 정작 어둑해져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는 이음이가 나보고 ‘할아버지, 나는 이음이라고 불러.’ 라고 조용하면서도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어요. 아무래도 엄마 아빠가 지어 준 ‘이음’이란 이름이 좋은가 봐요.
2021. 3. 18
‘우리’가 도시락 가방을 메고 우리 집에 왔어요. 엄마가 아침 먹고 할아버지 집에 놀러가라니까 하도 섧게 울어서 할 수 없이 도시락을 싸보냈다고 해요. 그림책을 읽으며 빵과 햄과 딸기도 먹고 ‘붕놀이(장난감 자동차 놀이)’도 하다가 마당으로 나왔어요. 햇빛이 비치니 ‘우리’가 ‘아, 따뜻하다!’ 라고 해요. 자전거를 타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한 발을 핸들 위로 들어올리는데 몸이 기우뚱하며 넘어졌어요. ‘다시 해 볼 까.’ 하고 ‘우리’ 오른발을 잡아 자전거 손잡이 위로 올려줘도 비틀거리며 다시 넘어져요. ‘아빠는 그렇게 탔는데.’ 라고 하니까, ‘응, 아빠도 그렇게 탔어.’ 라고 하더니, ‘그 건 안 돼.’ 하며 그만두어요. 여기에서 말하는 아빠는, ‘캄펑의 개구쟁이’라는 만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의 아빠를 가리키는 거예요.
며칠전 ‘우리’와 함께 ‘캄펑의 개구쟁이’를 읽었는데, 만화 속에서 아빠가 두 다리를 핸들 위로 올리고 있는 모습(사진)이 떠올라 ‘우리’가 따라한 거예요. 갑자기 생각난 게 아니라, 어쩌면 ‘우리’는 그 장면을 마음에 꼭 새겨두었을지 몰라요. 마늘밭에서 걷어낸 짚을 길가에 까는 것을 도와주다가, ‘할아버지 터널 봐.’ 라고 하더니, ‘한 번 들어가 볼까.’ 하는 내 목소리에 힘입어, ‘우리’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지나는 10m 남짓한 긴 시멘트 관을 아래에서 위로 기어올라왔어요. 나는 윗구멍에 얼굴을 들이밀고 잇달아 소리치며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 아찔한 모험은 울림이 이음이도 여태껏 한 번도 도전하지 못한 거예요.
2021. 3. 19
학교에 갔다오자마자 가방을 멘 채 우리집으로 달려와 ‘연못놀이’를 하고 있어요. 울림이와 이음이는 호미를 가져다가 수국나무 아래에다 구덩이를 파고 ‘우리’는 조그만 물조리개에 물을 담아 와 퍼붓는 거예요. ‘야, 할아버지 밤에 가다가 연못이 빠지겠다.’ 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아요. 이음이 등에 꼭 붙어있는 어린이집 가방에는, 이음이가 삐뚤빼뚤 글씨를 쓴 동그란 이름표가 매달려 있어요. ‘ㅣㅇ음황’, ‘이’는 거꾸로 돌아앉아 ‘음’을 바라보고 있고’, ‘황’은 얼마나 크게 썼는지 ‘이음’을 끌어안고도 남아요.
뜰에는 이제막 무스까리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어요. ‘얘들아, 이 꽃 이름이 뭐지?’ 울림이가 먼저 달려왔어요. 쭈그려 앉아 꽃을 보더니, ‘포도알꽃’이라고 하며, 이음이 도감에 그렇게 적혀 있다고 우겨요. 그러고 보니 보랏빛 작은 알갱이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게 포도송이 같아요. 이음이는 알 것 같아요. 무엇이든지 귀에 담아 두고 있거든요. 입을 오물오물하더니 ‘미시까리!’ 라고 소리쳐요. 나는 얼른 이음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워담아, ‘봐, 이음이가 무스까리 라고 했잖아.’ 라며 ‘미시까리’를 무스까리라고 고쳐 말했어요. 울림이는 이음이가 ‘미시까리’라고 말했다고 우겨대지만 나는, ‘그럴 수도 있지. 저렇게 빼뚜름히 서서 말을 하면, 말이 입에서 나오다가 미끄러져서 무스까리가 미시까리가 될 수 있어.’ 라고 덩달아 우겨요. 그러면 ‘미숫가루’도 미끄러진 것이냐며, 울림이가 기가 찬 듯 웃으며 대들어요.
마침 아이들 아빠 차가 언덕을 올라오고 있어요. ‘야! 아빠다.’ 하더니 이음이가 뭐라는지 알아요. 아빠가 집에 온 건 우리가 한 시간 더 놀 수 있다는 뜻이라며, 말도 안 되는 뜻을 갖다 붙여요. 그러면서 이음이는 도끼질을 시작하고, 울림이는 대나무를 쪼개고, ‘우리’는 벌써 두 벌째 젖은 옷을 갈아입으러 갔어요.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고 소리친 것도 꽤 오래됐어요. 아마 하룻밤이 지난 지금 아침에도 밖에 나가면 밤새 집에 가지 않고 아이들이 뛰놀고 있을 거예요.
2021. 3. 25
집에 가지 않으려고 떼를 쓰는 아이들과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울림이, 이음이, ‘우리’ 차례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음이는 집에 갈게 하면서 장난스레 우리 집쪽으로 발걸음을 되돌리고, 아쉬운 듯 벽돌에 숯으로 그림을 그리고는 그제서야 일어섭니다. ‘우리’는 두발자전거를 끌고, 나 보고는 작은 축구공을 들고 오라고 해서, 나는 축구공을 볼모로 잡혀 따라갑니다. 집에 올라서자 ‘우리’는 그예 방방을 타고 가라며 나를 붙잡습니다. 빙글빙글 뛰어다니다가 엉금엉금 기어다니다가 그물 위에 드러눕습니다. 동쪽 하늘에 활 모양의 현(弦)을 엎어 놓은 것 같은 하현달이 떠있습니다. ‘아! 달이 떴네.’ 하니, ‘우리’가 ‘나무가 떴네.’ 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파란 하늘연못에 나무도 떠있습니다.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 일어서면, ‘우리’가 밀어뜨기를 되풀이합니다. 창문을 열고 ‘우리’ 밥 먹어어야지 하고 소리치는 엄마에게, ‘우리’가 나를 안 보내줘요 라고 일러바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겨우 빠져나왔는데, 마당에 놓인 지붕 달린 자전거를 타고는, 이건 뭐고 이건 뭐고 이건 기름 넣는 거고 하며 고 조그만 입으로 재잘거리며 설명을 늘어놓습니다. 손으로 배를 가리키며 ‘할아버지도 기름 넣어야 해.’ 하니까 ‘아니야, 밥이야.’ 하더니, 그제사 나를 풀어주며 ‘안뇽!’ 이라고 합니다.
2021. 3. 26
‘우리’가 ‘자전거’라고 소리낼 때,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어요. 꽈리를 문 듯 입안 가득 몽글몽글 공기방울이 피어나, 마치 영화 속 부시맨이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렸어요. 아! 그 소리가 ‘자전거’를 뜻하는구나 하고 알았을 때도, 따라할 수도 없고, 새소리처럼 받아적을 수도 없었어요. 그러다 엊저녁에서야 제대로 알아들었어요. ‘우리’는 ‘자전거’를 ‘장겅거’라고 소리내요. 여린입천장소리인 ‘ㅇ’소리와 ‘ㄱ’ 소리가 네 차례나 이어지니, 입안 가득 동그라미를 물고 있는 듯 들린 거지요. 이제 ‘우리’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해요. 어제는 괴물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괴물이 나타나서 돌도 던지고, 나무도 던지고, 할아버지 집도 던져서 괴물이 죽었는데, 할아버지 집 속에는 할아버지도 들어 있었다며 혼자 숨넘어가듯 크게 웃어요. 또 괴물을 만나 ‘메롱!’ 이라고 해서 괴물이 죽었는데, 내가 ‘괴물이 약올라서 죽었겠다.’ 라고 하니, 그 말은 무슨 뜻인지 몰라, 그건 아니라고 해요. 어제는 ‘어흥!’ 하며 내가 괴물이 되어, 혼자 집에 놀러온 ‘우리’와 온종일 ‘괴물놀이’를 했어요. ‘우리’가 신이 날 때는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보고 자전거를 달려요. 그러다가 가끔 풀숲으로 들어가기도 하지요. ‘우리’는 늘 파아란 하늘에 살고 있어요.
2021. 3. 31
나무를 하러간 사이에 벌써 두 차례나 ‘우리’한테서 전화가 와 있어요. 전화를 거니 ‘우리’가 받아요. 아침이면 전화를 걸어 ‘할아버지, 어디 있어?’, ‘놀고 싶어.’ 라고 하더니, 오늘은 달리기 시합을 하고 싶다고 해요. 부엌 창으로 내다보니, ‘우리’는 보이지 않고 현관 문이 소리 없이 열려요. 서둘러 나가 어서 오라고 맞이하니, 달려와 우리 식구들 품에 폭 안겨요. ‘우리’ 등에 매달려 온 가방에는, 장난감 자동차와 엄마가 싸서 보낸 도시락이 들어 있어요. 참(간식)으로 먹으라고 넣은 꿀을 섞은 옥수수 알갱이에요. 사진은, 내 신발 옆에 벗어 놓은 ‘우리’ 신발이에요. 이렇게 ‘우리’가 우리 집에 놀러 왔어요.
2021. 4. 3
울림이 이음이를 학교와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이에요. 엄마는 차에서 내리더니 뒤로 돌아가 뒷자리에 앉아 있던 ‘우리’를 번쩍 들어 내려요. 엄마가 텃밭 앞에 쭈그려 앉아요. 엄마 따라 ‘우리’도 엄마 곁에 쭈그려 앉아요. 때를 맞춰 지붕 너머에서 아침 햇살이 건너오고, 텃밭에는 이제막 새순들이 흙을 들추고 고개를 내밀고 있겠지요. 엄마와 ‘우리’가 쪼르라니 앉아 있는 뒤쪽은 아지랑이가 어른거리는 듯 부옇게 흐려요. 요즘 내 가슴에 간직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에요.
2021. 4. 6
저녁나절 마른 대나무를 쪼개 불쏘시개를 만드는데 ‘우리’가 왔어요. ‘모자 어딨어?’ 하고 묻자, 순간 ‘우리’가 어리둥절해 하는 듯했어요. 아침에 엄마를 뒤세우고, 살랑살랑 밝게 빛나는 녹둣빛 모자를 쓰고 ‘우리’가 걸어왔거든요. 모자를 가지고 한나절은 놀았어요. 눈이 안 보이게 푹 눌러 쓰고 자전거를 달리고, 엄지손가락으로 코를 눌러 돼지코 흉내도 내고, 나무 꼬챙이에게도 모자를 씌워 주고, 내 모자 위에 ‘우리’ 모자를 덧씌우며 까르르 웃고, 그 모자를 쓰고 내가 만든 으아리 꽃울타리 밑을 ‘터널’이라며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는데... 어쩌면 ‘우리’는 그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는 줄도 몰라요. ‘우리’에게는 자꾸자꾸 시간 가는 대로 이 세상 모든 게 낯설고 새롭게 보일 테니까요. 어른들은 지나간 시간에 얽매여 시큼털털한 것들을 곱씹고 사는데, ‘우리’는 나뭇가지에서 갓 따낸 싱그러운 ‘야생사과’ 한입 햇살 가득 베물고 있어요.
2021. 4. 7
엊그젠 이음이가 와서는 ‘할아버지 집에 오랜만에 왔지.’ 하길래, 얼떨결에 나도 ‘아, 그래! 그 동안 너희들 어디 먼 데 갔다 왔구나.’ 하며 장단을 맞춰 보지만 어딘가 어설프게만 느껴졌어요. 그러고 보니, 토요일 낮에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아침엔 거미줄 같은 가랑비 어른거리고 하루종일 날씨가 궂었던 일요일 빼고 오늘(월요일) 왔으니 겨우 하루 우리 집에 오지 않은 거예요. 나는 겨우 ‘하루’라고 말하지만, 이음이게는 어쩌면 천 년이란 긴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지요. 이음이가 오랜만에 왔다고 말할 때, 나도 ‘할아버지도 이음이가 보고 싶어 그 새 폭삭 늙어버렸다.’고 하며 모자를 벗어 허옇게 센 머리를 보였주었으면 좋았으련만은, 이음이와 나는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는 듯해요. 하긴 온종일 부엌 창문으로 아이들 집만 바라보고 있으면, 보다못해 지우가 ‘아버지, 이젠 그만 쳐다봐요.’ 라며 안스러워 하니까요.
땔나무를 하고 있는데, ‘우리’가 쪼르르 달려와서 김밥 하나를 쥐어주고 갑니다. 다시 쪼르르 집으로 달려가더니 또 김밥 하나를 건네주며 환하게 웃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을 잘 나눠 줍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젤리사탕 같은 것도 먼저 제 입에 하나 넣고 나에게도 하나 줍니다. 오늘은 이음이가 어린이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마당에 놓인 긴 탁자 밑을 보더니, 호수 같다고 합니다. 무리진 토끼풀이 호수 물 같고, 띄엄띄엄 피어 있는 봄까치꽃이 연꽃 같아 참 예쁘다고 합니다. 그 너머에는 내가 좋아하는 제비꽃이 자갈 사이에 피어 수줍게 웃고 있습니다. 나비가 수선화꽃을 스치며 날개가 노란빛으로 물들었는지, 노랑나비가 날아가며 수선화 꽃잎을 노랗게 물들였는지 알 수 없는 맑게 갠 봄날입니다.
2021. 4. 8
처음에는 이음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할아버지, 꽃 모양을 보고 동쪽인지 남쪽인지 알 수 있는 나무 이름이 뭐지?’ 하고 물어볼 때였어요. 한참만에 생각이 떠올라 ‘아, 참나무. 참나무 가운데 단단한 상수리나무.’ 라고 대답했어요. 벌써 서너 달이 훌쩍 넘은 일이에요. 등산길을 내느라 벌목해 놓은 상수리나무 가지를 주워 와 톱으로 베고 있는데 아이들이 왔어요. 이렇게 촘촘한 곳은 겨울에 자라고, 성긴 곳은 여름에 자라났으며, 산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나이테를 보고 남쪽 북쪽을 알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나이테를 둘러싼 짙은 무늬가 마치 꽃잎인 듯 예뻤는데, 이음이는 제 마음속 나이테에 그 고운 꽃무늬를 깊게 새겨두었던 거예요. 요즘 울림이는 말수도 적어지고 건들건들 겉도는 것 같아, 어제는 ‘너, 사춘기지?’ 하니까, 아직 초등학교 삼학년이라서 ‘삼춘기’라며 제법 말을 가지고 놀아요. 언제가는 울림이 저는 부천에서 태어나서 ‘부처님(부천님)’이라며, 땅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하는 흉내를 내기도 하더니, 지금 그런 나이인가 봐요.
2021. 4. 9
‘우리’가 구들방에 들어가더니 책 한 권을 들고 와서는, 이 책 엄마 집에도 있다고 해요. ‘어린이라는 세계’라는 책인데, 이 책을 읽으면 아랫집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생각난다며, 아이들 생일 때 엄마가 저희에게 선물한 거예요. ‘아, 그렇구나!’ 글씨도 모르는 ‘우리’가 저 나름대로 책 표지에 그려진 그림 같은 것을 보며 익혀 두었나 봐요. 오늘도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나는 울림이 자전거를 끌고 마을 저 아래까지 놀러갔어요. 논을 흙으로 메워 비닐하우스를 지은 터에 마사 흙이 내 키만큼 쌓여 있었어요. 미끄러지듯 올라가 내려오기를 수차례, ‘우리’와 나는 구름비행길 타고 날아가 몽골 고비에 서 있는 듯했어요. 마사 흙더미 아래 노랗게 피어 있는 민들레를 보자, ‘우리’가 ‘민들레꽃’이라고 또렷이 말해요. 누가 이름을 알려줬냐고 물어보니 그냥 알았대요. ‘민들레꽃이 나를 민들레라고 불러달라고 했구나.’ 하니, ‘응’이라고 대답해요. 오지 않으려는 ‘우리’를 데리고 집으로 올라오며, 애기똥풀 꽃가지도 꺾어 보이고, ‘할아버지, 메롱!’ ‘우리, 메롱!’ 혀를 내밀며 놀았어요.
2021. 4. 10
‘우리’가 밀차(외발 손수레)를 몰고 다니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남기기로 했어요. 곁에서 울림이가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내 보내려고 그러냐고 물어요. 하긴 돌이 지나면서 밀차를 타고 다니고, 세 살부터는 손수 몰고 다녔으니까 그럴 만도 하네요. ‘우리’가 ‘빨간불이에요.’ 묻는 것은 파란불이어야 출발한다는 뜻이에요. 사진을 찍으려 하니, 운전 솜씨가 평소보다 영 서툴러요. 오늘도 ‘우리’가 저희 집으로 밀차를 몰고 갔어요. 밀차는 ‘우리’ 곁에서 하룻밤 행복하게 보낼 거예요.
2021. 4. 23
오늘도 ‘우리’와 함께 자전거를 끌고 마을길을 내려갔습니다. 비탈이 가파른 곳은 발바닥으로 브레이크를 잡으며 내려가고, 기울기가 느슨한 곳은 발을 땅에서 뗀 채 바람을 가르며 달려갑니다. 작은 다리를 지나 마을회관 쪽으로 가는데, 빈 밭에 쌓여 있는 흙무더기를 보자, 그리로 가보자고 하여 발길을 돌립니다. 걸어서도 올라가고 자전거를 끌고도 올라가선 미끄러지듯 내려옵니다. 그러다 자전거 오른쪽 바퀴가 빠졌습니다. 손으로 나사를 조여 보지만 다시 빠져, ‘우리’ 자전거는 내가 끌고간 울림이 자전거에 싣고, ‘우리’는 빠진 바퀴를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도랑물 소리를 좋아합니다. 물소리가 들리면 걸음을 멈추고 물소리를 듣습니다. 가끔 차가 지나가면 얼른 달려와 내 뒤에 섭니다. 낯선 사람을 만나도 내 등뒤에 숨습니다. ‘아빠 차다!’ 아빠가 퇴근해서 집으로 가다가 ‘우리’를 보고 차를 멈춥니다. ‘아빠 차 타고 갈까?’ ‘우리’는 고개를 젓습니다. ‘그럼 이따 만나.’ 하곤 아빠 차가 먼저 올라갑니다. ‘이따 만나.’ ‘이따 만나.’ ‘이따 만나.’ 아빠가 떠난 뒤, ‘우리’는 혼자서 높게 낮게 말의 가락을 바꿔가며, 아빠가 다정스레 건네던 말을 세 차례나 되풀이합니다.
‘우리’가 놀러왔어요. 가방 속에 넣어온 그림책을 꺼내 로봇자동차가 그려진 스티커 붙이는 놀이를 하다가, 내 핸드폰을 잠깐 달라고 해요. 핸드폰 화면에 떠 있는 이것저것을 누르며 ‘이 건 뭐야?’ ‘이 건 뭐야?’ 꼬치꼬치 캐묻더니, 사진을 눌러서 펼쳐 봐요 한 장 한 장 넘기더니, 지난번에 만화영화를 보며 먹던 과자 사진이 나오자 그 과자가 먹고 싶다고 해요. 과자를 찾으러 다락에 올라갔는데, 마침 엄마가 ‘우리’를 데리러 왔어요. 엄마는 바깥에서 점심 약속이 있나 봐요. ‘우리’가 안 가려고 해요. 점심은 할아버지 집에서 먹으면 된대요.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 준다고 해도 안 간대요. 엄마는 밖에 나가면 늦어질 텐데 걱정이라고 해요. 내가 나서서, 올 때 할아버지 아이스크림도 사 가지고 오라고 하니 그제야 엄마를 따라나서요. ‘우리’는 손가락 두 개를 펴더니 ‘두 개.’ 하더니,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펴요. 하나, 둘, (셋)까지 셀 줄 아는 ‘우리’에게 ‘다섯’은 엄청 많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사는 세상엔 ‘하나’, ‘둘’, ‘(셋)’, 그리고 ‘많다’이니까요. 아이스크림을 사 가지고 돌아올 땐, 할아버지 집에 먼저 들르자고 엄마한테 약속을 받아내더니, 차에 타고는 할아버지는 무슨 아이스크림이 좋은지 물어 봐요. 저녁 무렵 아이스크림을 들고 달려왔어요. 엄마가 깜빡 잊고 집으로 올라가려다, ‘우리’가 말을 해서 차를 돌려 할아버지 집으로 먼저 왔다고 해요. 나는 지금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어요. ‘우리’가 손에 쥐어준 복숭아 맛 아이스크림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먹고 있어요.
2021. 4. 24
이게 어찌 된 일인가요. 나는 결코 그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아이를 왜 셋이나 낳았지.’ 하고요. 사실은 이래요. 그 날 ‘우리’는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보채고, 이음이는 나무 계단 위 내 곁에 앉아 동그란 나무 조각을 유리처럼 맨들맨들하게 해 달라고 해서 이렇게 말했지요. ‘할아버지가 셋이었으면 좋겠다. 하나는 우리와, 하나는 이음이와, 하나는 울림이와 놀아주게.’ 그러자 이음이가 ‘아이를 왜 셋이나 낳았지.’ 하고 먼저 말한 거예요. 그러고 나서 아이들이 보챌 때면 이음이 말이 재미있어 따라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엄마한테 가서는 할아버지가 그 말을 했다고 일러바치고, 엄마는 할아버지가 하는 말은 장난이라고 말했다나요. ‘이실직고’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아이들 셋이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울림이는 내 머리를, 이음이와 ‘우리’는 내 두 발을 잡아 들어올려 날마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위를 떠다니게 하니까요. 출렁이는 방방 위에 누워 있을 때처럼요.
2021. 4. 25
오늘 하루 아이들이 오지 않는다. 아침나절엔 아이들이 아빠와 방방을 뛰며 노는 모습을 한참동안 흐뭇이 지켜보았는데.
저물녘에도 방방을 뛰며 노는 아이들 목소리가 귀에 자글자글하고, 밥 먹으라는 엄마 목소리도 스쳐갔는데.
금방이라도 금방이라도 ‘우리’가 저 언덕을 내려오면 가슴이 쿵쾅거리며 무너질 것만 같아, 지그시 손바닥으로 가슴을 누르고는 비껴서서 저녁 하늘을 본다.
잠 잘 때에도 아침에 일어나서도 ‘우리’ 목소리가 자꾸 나를 따라다닌다. 내가 일하고 나서 놀자고 하면 ‘그래도, 그래도.’ 하며 달리기 시합을 먼저 하자고 하던.
2021. 5. 4
‘우리’가 가지고 노는 컵에는 영문자로 ‘나는 플라스틱이 아니에요’ 라고 적혀 있어요. 뒤쪽에는 옥수수 전분으로 만들었다고 한글로 풀어놓았는데, 아이스크림이 담겨 있었다고 해요. 방방(트램펄린)에 올라와서는 컵에 담아온 자갈을 쏟아 버리더니, 콧등과 눈에, 입가에 컵 주둥이를 대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여요. 그러더니 바닥에 휙 던지고는 컵도 방방을 태워주고 축구공이라고 발로 차고 다니기도 하다가 컵 앞쪽 두 군데가 위아래로 찢어졌어요. 찢어진 두 쪽을 아래로 열어젖히더니 엘리베이터 문이라고 해요. ‘우리’가 벗어놓은 양말 두 짝을 태우자 문은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올라가요. 내가 크게 소리내어 층수를 세고, ‘우리’는 빨강 검정 짝짝이 양말 손님을 5층에다 13층에다 내려주곤 다시 내려와요. 지금도 궁금하기만 해요. 어떻게 엘리베이터가 컵 같은 통인 줄 알았을까요. 읍내 롯데마트에서 타 봤다고 하지만, 뚫어지게 쳐다보았을 ‘우리’ 모습을 떠올려 봐요.
2021. 5. 5
‘나의 문어 선생님(My Octopus Teacher)’은 울림이가 좋다고 해서 보게 됐어요. 2021년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 수상작으로, 며칠전 엄마가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 보았다는 영화에요. 할아버지도 보았다고 하자, 아이들은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어요. 이음이는, 문어가 상어에게 물려 다리 하나가 뜯겨 나갔는데 그 곁에 다시 조그만 다리가 생겨 자라나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어요. 울림이와 이음이 목소리가 가장 높고 빨라진 곳은 다시 상어가 문어를 공격하는 장면에서였어요. 문어는 마치 방패를 들고 선 것처럼 수없이 많은 빨판에 온갖 조개와 굴 껍데기를 붙여 몸을 숨기더니, 그래도 상어가 달려들자 어느새 몸을 피해 상어 등에 올라탄 거예요. 상어는 제 등 위에 달라붙어 있는 문어를 더는 공격할 수는 없었어요. 이 이야기를 할 적에는 아이들이 마치 저희들이 문어가 된 것처럼 볼이 발가스레 피어났어요. 문어가 걸어가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는 엄마에게 가장 가슴 뭉클했던 장면은 암컷 문어가 새끼를 낳고 죽어가는 마지막 장면이었어요. 어젯밤엔 아내와 함께 ‘윤희에게’라는 영화를 보았어요. 좀처럼 영화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 아내가 참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보았다고 해요. ‘이 눈은 언제 그치려나.’ 라고 하는 영화 속 대사처럼, 그치지 않고 언제까지나 가슴에 펼쳐지는 잔잔한 이야기에요. 창밖엔 줄곧 세차게 봄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2021. 5. 12
‘우리’가 흙더미에서 기차놀이를 하다가 꿈 이야기를 들려줬어요. ‘꿈에... 컴컴한데... 엄마 뱃속에서... 아기가 나왔어.’ 이렇게 ‘우리’가 한 말을 적어 놓으니 짧기만 한데, 그 말을 들을 땐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어요.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내가 물었어요. 그래서 기분이 어땠어? ‘우리’는 동생이 있으면 좋겠어? 무슨 까닭인지 ‘우리’는 대답을 않고, 꿈 이야기는 더는 이어지지 않았어요. 전에 ‘우리’ 동무 ‘반들’이네 엄마 뱃속에 아기가 있다고 ‘우리’가 말한 적이 있었어요. 엄마가 밥 먹으라고 ‘우리’를 불러요. 우리는 기차놀이하던, 움푹 파인 넓다란 흙구덩이를 그대로 가지고 가고 싶어 해요. 가만히 둘게, 밥 먹고 와서 놀아라고 하니까, 그래도 아쉬운지 흙 한 줌과 길쭉하고 네모난 돌멩이 기차를 들고 갔어요.
2021. 5. 22
엊그제 하루종일 비가 뿌리던 날, 아내가 고구마를 튀겨 아이들 집에 갖다 주러 갔어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우리’가 나와 ‘할머니 보고 싶었어.’ 라고 말하더라며, 그 말을 전하면서도 아내는 가슴이 설레는 듯했어요. 어제도 등에 자동차 장난감을 한 짐 지고 와 안방 침대에 쏟아 놓으며, ‘할아버지 집에 오고 싶었어.’ 라고 말했어요. ‘우리’는 혼자 ‘붕(자동차)’을 운전하여 서천에도 가고 강화에도 가는 붕놀이를 했어요. ‘우리’ 눈빛에는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버지가 보고 싶은 그리움이 가득 일렁여요.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꽃 지는 봄산처럼
꽃 진 봄산처럼
나도 누군가의 가슴
한 번 울렁여 보았으면
함민복 ‘마흔 번째 봄’
2021. 5. 23
오늘은 흙더미에서 ‘붕놀이’를 했어요. 마을로 내려가는 오른쪽 산기슭에 이음이 친구 ‘우찬’네가 집을 지어 이사를 오는데, 통나무집 짓는 게 궁금해서 ‘우리’한테 같이 내려가보자고 하니 안 가고 싶다고 해요. “‘우리’는 집 짓는 게 궁금하지도 않니?” 하고 따지듯 물어도 하나도 안 궁금하다고 해요. 나도 물러서지 않고 잠깐만 보고 와서 ‘붕놀이’를 하자니까, ‘우리’가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글쎄 ‘엄마가 찾을 수 있어.’ 라고 하잖아요. 엄마가 찾으면 가까이 있어야 하니까 멀리 가면 안 된다는 논리예요. 그 전에는 엄마가 몇 번이나 소리쳐 불러도 꿈쩍 않았는데, 한 마디로 가기 싫다는 것을 에둘러 말한 거예요. 그래서 물어봤어요. ‘우리’ 너, 저 번에는 할아버지와 집 짓는 거 보러 갔잖아 하고요.
우리 : 그 때는 크레인 보러 갔어.
나 : 지금도 크레인이 있잖아.
우리 : 지금은 안 움직이잖아. (이 말도 가기 싫다는 ‘뜻이에요.)
며칠전엔 ‘우리’네 베란다에서 같이 ‘붕놀이’를 하다가, 문득 집에 세워 둔 자전거가 생각났나 봐요. 언덕을 내려오며, “할머니, 할머니 집에 ‘우리’ 자전거 있어?” 하고 ‘우리’가 소리쳐요. 아내가 부러 ‘없어.’ 하고 딱 잘라 말하니까, ‘우리’가 혼잣말인 듯 ‘할머니가 지금 잘못 말하고 있는 거야.’ 하며 해맑은 표정으로 먼저 뛰어내려가요. 뒤따라 오며 그 말이 무척 귀엽게 느껴졌어요. ‘잘못 말하고 있는 거야.’ 할머니 말은 틀렸다는 것을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아직 ‘ㄷ’ 발음과 ‘ㅈ’ 발음이 헷갈리게 들리지만은 ‘우리’는 제 생각과 느낌을 한껏 표현해 내요. 이음이는 ‘먹으는 거, 잡으는 거’를 거쳐 ‘먹는 거, 잡는 거’로 소리냈지만, ‘우리’는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먹는 거, 잡는 거’라고 소리내는 것도 달라요.
2021. 5. 25
이음이와 ‘우리’가 잠옷 바람으로 왔어요. 킥보드와 자전거를 타고 마을 언덕길을 내달리고, 마당에서 물놀이 하고, 이제막 익기 시작한 오디를 따먹으며 바깥에서 한참 놀다가, 할머니를 보러 방에 들어갔어요 ‘야들 보소.’ 하는 말이 들려 안방에 들어가 보니, 아이들이 아내 배에 올라타고 목을 끌어안고, 할머니 어서 일어나라고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며 야단이에요. 한참 있다 조용해서 다시 들어가보니, ‘우리’는 아내 팔을 베고, 이음이는 침대 곁에 쭈그려 앉아 강아지 키우는 영상을 보고 있어요. 할머니 병문안 왔다더니 저러고들 있어요.
2021. 5. 31
‘우리야, 물 꼭 잠가.’ ‘우리야, 물 꼭 잠가.’ 하고 아내가 두 차례 되풀이하여 말하니까 ‘우리’가 물조리를 들고 달려가며. ‘물 꼬옥 잠갔어.’ 하며 ‘꼭’을 ‘꼬옥’으로 두음절 늘여 말해요. 엄마 생일 때였던가.’ 그그그 누구보다 엄마를 사랑해.’ 라고 쓴 울림이 편지가 떠올랐어요. 잠깐 ‘우리’가 보이지 않길래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진흙에서 놀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다시 왔어요. 그러곤 또 붕놀이를 하재요. 흙더미에서 자동차 놀이를 하다가, 공을 차기고 하다가, 굴러가는 공을 따라 내려가 길가에서 오디를 따 먹기도 하다가, 아내와 함께 우찬이네 집 짓는 데까지 갔어요. 아직 기와를 얹지는 않았지만 나무와 천으로 지붕을 덮어 이제 거의 집 모양을 갖추었어요. 안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집으로 올라오는데, 갈림길에서 아내가 ‘우리’에게 이제 엄마 집에 데려다 줄까 하고 물었어요. ‘아직 20분 안 됐어.’ 라며 ‘우리’는 더 놀다 가고 싶어 해요. ‘20분이 뭐야. 훨씬 지났는데.’ 하고 내가 말하니까. ‘우리’는 지금 40분이라고 해요. ‘우리’는 아직 40분밖에 안 지났다고 가기 싫다는 말이에요. ‘우리’는 숫자를 잘 모르고 20분이 40분보다 훨씬 긴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자 아내가 장난스레 ‘40분이 뭔데?’ 하고 물으니까, 조금 생각하다가 ‘비밀이야.’ 라고 말해요. 엄마나 형들한테 듣긴 했는데 ‘우리’는 40분이란 뜻을 저도 몰라 안 가르쳐 준다는 말일 거예요. 말을 조금씩 익혀가는 ‘우리’가 여간 사랑스럽지 않아요. 요즘은 ‘게임 중독’이란 말도 쓸 줄 알아요. 오늘 아침에도 내복 바람으로 달려와 내 품에 폭 안기곤 붕놀이를 하러 밖에 나가재요.
2021. 6. 6
신현태 : 이제야 ‘우리’를 만나는구나!
이후란 : 니가 동화 속에 나오는 ‘우리’구나!
어제 아침 두 분 선생님이 초롱산에 들러 처음으로 ‘우리’를 만났어요. ‘우리’는 수줍어 고개를 숙이고 엄마 곁에 꼭 붙어 있었어요. 갑자기 현태 선생님은 차로 가더니, 무언가를 들고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왔어요. ‘칼림바Kalimba’라는 악기였어요. 선생님이 문방구에 들렀다가 ‘우리’ 생각이 나서 사둔 거래요. 손톱으로 튕겨서 소리내는 악기인데, 선생님은 어려서 양철을 오려 돌돌 말아 튕기며 이런 악기 놀이를 하며 놀았다고 해요. 나중에 다시 엄마와 함께 ‘우리’, 울림이, 이음이가 집에 왔어요. 엄마가 갑자기 준비한 선물이라며, 종이에 무언가를 싸서 선생님께 건네 주었어요. 외할머니가 만들어 ‘우리’에게 선물한 듯한 비누 공예품과 조그만 장난감 자동차였어요. 나는 그 자동차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어요. 형들을 학교에 배웅하러 갈 때에도 날마다 우리 집에 올 때에도 제 몸처럼 등에 붙어있는 가방에 소중히 모시고 다니는 거예요. ‘우리’도 선생님에게 제가 가장 아끼는 보물을 주고 싶었던 거예요. 오늘 아침 아내가 말했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마치 내가 선물을 받은 듯 기뻤어.’
2021. 6. 8
제목 : ‘어차피 못 씻어!’
울림이와 이음이가 뽕나무에 매달려 오디를 따고 있어요. ‘우리’의 손가락과 손바닥, 입가에는 벌써 검보라빛 오딧물로 흥건히 물들었어요. 수돗가로 가더니 물을 틀어 비누를 잔뜩 칠하고 거품을 내며 손을 씻어요. 아무리 씻어도 금방 물든 오딧빛은 약간 바랜 채 그대로 남아 있어요. “‘우리’ 너, 어떡할거니? 엄마가 보면.” 하고 말하니, 엄마한테는 손을 안 보여 주겠다고 해요. 그래, 엄마한테는 놀다가 손이 없어졌다고 해라 하며, 다시 뽀득뽀득 손을 씻어 주고 입가도 닦아 주었어요. 조금 있다가 이음이가 수돗가로 달려가고, 뒤따라 무슨 말소리가 들렸는데, 처음엔 내가 잘못 들었나, 누가 뭐라고 말을 했는지, 더구나 ‘우리’가 한 말이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어차피 못 씻어!’ ‘우리’가 이음이에게 소리친 말이에요. 무슨 뜻인지 짐작하겠어요. 저도 순간 무슨 말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어요. 씻어 봤자 오딧물이 안 지워지니 쓸모 없는 짓이란 뜻이었어요. ‘어차피 씻으나 마나야.’ 라는 말이겠지요. ‘어차피’란 말을 네 살짜리 아이가 쓴 것도 재미있지만, 조금 전 ‘우리’가 겪은 일을 이렇게 여섯 마디로 뭉뚱그려서 나타낸 게 놀라워요. 어차피 못 씻어!’ 그 자리에 알맞은 말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머릿속에서 제 힘껏 만든 문장이지요.
2021. 6. 9
‘우리’ 가방을 떠난 ‘붕(장난감 자동차)’은 지금 어디를 달려가고 있을까요. 청양을 지나 부여로, 저녁놀 가득 번지는 논산으로, 신현태 선생님 마음속으로 씽씽 달리고 있어요. 선생님이 보내온 글과 그림이에요. 어쩌면 ‘우리’가 겪는 첫번째 이별이었을 '붕카의 떠남'.....선물을 받았지만 마음 한쪽에 아쉬움이 잔잔히 남아있어요. "우리야! 붕카는 잘 있어요"~~
2021. 6. 10
‘모자를 한 것 같아.’ 지칭개 작은 꽃봉오리 앉은 무당벌레 를 보고 이음이가 한 말입니다. 그러더니 할아버지한테 앉고 싶다며 풀을 뽑고 있는 내 무릎에 앉습니다.
나 : ‘내 무릎에 모자를 했네.’
이음 : ‘그건 아니지. 머리에 해야지.’
나 : ‘그럼 이건 뭐라고 하지?’
이음 : ‘이건 합체한 거지.’
요즘 이음이는 어린이집에 잘 가지 않습니다. 형 울림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곤 곧바로 우리 집으로 달려옵니다. 무릎에 앉힌 채, 요즘 형과 많이 싸우지 라고 묻자 처음엔 아니라고 하더니, 조금 싸운다고 합니다. 동생 우리는 자꾸 쫓아오고 형 울림이는 저 멀리 달아나고, 가운데에서 이음이는 제 나름대로 힘들어 하는 듯 보입니다. 개망초와 민들레도 서로 친척이라며 두 손을 다리는 꼭 붙여 움직이지 못하는 풀 흉내를 내거나, 공벌레 흉내를 내며 허리를 굽히는 이음는 여전히 귀엽습니다.
2021. 6. 18
어서 엄마는 집에 가라고 되뇌자 엄마는 짐짓 서운한 표정으로, 집에 가서 혼자 펑펑 운다고 해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바짓가랑이만 붙잡고 있어요. 엄마는 혼자 집으로 가고 ‘우리’는 흙더미 위에서 붕놀이를 하며, 어두울 때까지 할아버지와 계속 놀자더니 잠은 엄마 곁에서 잔대요. 오늘 처음 ‘우리’를 무등(목말) 태워 주었어요. ‘우리’는 내 이마를 잡은 채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라고 속삭였어요. 잠깐 바람처럼 스쳐가는 ‘우리’ 말에 마음이 간지러웠어요.
2021. 6. 23
‘할아버지, 아픈 데 괜찮아졌어요?’
앞마당에서 소리치는 우렁찬 ‘우리’ 목소리는 서천할아버지를 닮았어요.
‘어, 괜찮아.’ 있는 힘껏 소리치자 ‘우리’는,
‘엄마, 엄마, 할아버지 괜찮대.’ 하며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내일 (놀러) 갈게.’ 라고 해요. 그러더니, 울림이가 두 손에 이음이 신발을 신고 강아지처럼 기어서 내려오고, 이음이는 뒤쫓아 오고, ‘우리’는 구르듯이 작은 언덕길을 뛰어와요.
늘 그렇듯이 ‘우리’와 나는 붕놀이를 해요.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우리’가 내년에 어린이집에 간다고 해요. ‘우리’가 어린이집에 가면 할아버지는 누구하고 놀지? 라고 하니, ‘우리’는 금방 마음을 바꿔 어린이집에 안 가고 할아버지와 논다고 해요. 그러더니 내 손을 잡아 ‘우리’ 바지를 만지게 하며, 오늘은 기저귀를 안 차고 팬티를 입었다고 자랑스레 이야기해요. 일년 가운데 낮이 가장 긴 날, 낮과 밤 사이에 나는 ‘우리’와 함께 있었어요.
2021. 7. 6
텔레비전 속 만화영화에 빠진 이음이에게 슬그머니 장난을 치고 싶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음이가 너무 좋아.’ 하며, 앉아 있는 이음이를 부둥켜안고는 침대에 쓰러졌습니다. 넘어지면서도 이음이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마치 나를 타이르듯이 ‘나를 좋아하면 잘해 줘야지. 만화영화 볼 땐...’ 이라며, 만화영화 볼 땐 가만히 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나는 맥없이 이음이를 껴안은 손을 놓습니다. 이제는 이음이에게도 말이 밀립니다. 사진은, 아음이 할아버지가 보내주셨습니다.
2021. 7. 15
강아지를 보러 개집에 들어갈 땐 꼭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우리’는 요즘 형들과 붙어다니며 잘 놀고 있어요. 어제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등이 가렵다고 긁어 달라고 해요. ‘업드렷!’ 하면, ‘우리’는 무릎을 꿇고 팔굽혀펴기하듯 엎드리고, 나는 옷속으로 ‘효자손’을 넣어 등을 긁어 주지요. 내가 손으로 긁어주려고 하면 꼭 등긁개(등긁이)로 긁어 달래요. 토돌토돌 땀띠가 난 듯한 등을 긁어 주다간 가끔 엉덩이도 긁어 주지요. 등이 시원해지면 곧 붕놀이가 시작 되고, ‘효자손’은 어느새 ‘우리’가 가장 아끼는 차 위로 올라가 ‘크레인’으로 변신해요. ‘우리’는 끊임없이 뭐라고 뭐라고 지껄여요. 나는 ‘우리’가 하는 말을 거의다 알아들어요. 아마 엄마와 형들, 아빠 다음으로 나는 ‘우리’와 가장 말이 잘 통할 거예요.
2021. 8. 29
아이들 집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풀을 깎고 있었어요. 뒤에서 차가 멈추더니 창문이 열리고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며 아이들이 소리를 쳐요. 몇 년만에 만난 것처럼 그렇게 반가워할 수 없어요. 어제도 밭에서 당근을 옮겨심고 무씨를 뿌릴 때 만났거든요. 오늘은 쉬는 날이니까 엄마하고 도서관 나들이를 가나 봐요. 엄마 뒤에 앉은 ‘우리’는 자리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나를 그윽하게 쳐다보고 있어요. 마치 천 년을 두고 앞에 서있는 소나무를 바라보던 바위의 눈빛 같았어요. 차는 미끄러져 내려가고, 얼마 있지 않으면 엄마와 함께 밤을 주우러 나올 아이들을 생각하며 밤나무 아래 칡덩굴이 엉킨 풀숲을 말끔히 깎았어요. 부엌 뜰에 이름 모를 풀꽃이 날아와 꽃을 피우고 있어요. 커다란 잎과 몸집에 견주어 꽃은 작아요. 꽃은 파르스름하니 나팔꽃 같고 열매는 꽈리 같아요. 창문으로 아이들이 사는 집이 보여요. 세 아이가 소리치면 초롱산 골짜기는 마치 떠들썩한 교실에 들어선 듯해요.
2021. 9. 3
길을 쓸고 있는데, 아이들 집 쪽으로 올라가던 차가 멈췄어요. 먼저 엄마가 내리고 뒤따라 이음이와 ‘우리’가 내리더니, 반가이 ‘할아버지’ 하고 소리치며 뛰어올라 왔어요. 가까이 와서 ‘우리’가 걸치고 있던 윗도리를 자꾸 벗으려고 하니, 이음이가 맨위에 채워져 있던 단추를 조심스레 끌러줘요. 아, 그러고 보니 윗옷을 벗어 한 손으로 빙빙 돌리고 올라오던 이음이 형처럼 따라 하고 싶었나 봐요. 요즈음 이음이는 어린이집엔 가지 않아요.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데 힘을 아껴두어야 한대요. 집에 들어오더니 ‘우리’가 무슨 좋은 냄새가 난다더니 옥수수 냄새라고 해요. 아내가 갓 쪄낸 옥수수를 주니 그 자리에서 두 자루나 먹었어요. 그것도 키를 재어 가장 큰 것으로요. 저녁나절 엄마 카카오톡으로 사진 한 장이 날아왔어요. 어제 아침 집에 와서도 나무조각으로 집들을 지었는데, 기차가 다니는 정겨운 마을, ‘우리’가 꿈꾸는 마을일까요? 나는 사진을 받고 ‘우리’에게 답장을 썼어요.
‘우리’ 마음속엔 예쁜 마을이 도근도근 숨쉬고 있구나.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은 초롱산 기슭 백동마을(내가 사는 마을 이름)이야. 날마다 울림이 이음이 ‘우리’가 뛰노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얼굴도 볼 수 있으니까. 오늘도 할머니 할아버지 곁에 있어 주어 고마워^^
2021. 9. 18
‘우리’가 문을 열고 나와 서있어요. 나는 ‘우리야!’ 하고 소리쳤어요. 뒤따라 이음이가 나오더니 ‘할아버지’ 하고 손을 흔들어요. 아이들을 보러 언덕을 뛰어 올라갔어요. 이윽고 책을 든 채 울림이가 나와요. 아직 엄마 아빠는 아무런 기척이 없어요. 마루 위에 놓인 접는 걸상에 앉으니, 그것은 작다며 ‘우리’가 큰 걸상을 가져와 펴 주어요. ‘우리’와 나란히 앉으니 세상이 참 예뻐 보여요. ‘여기서 바라보니 하늘이 참 곱구나.’ 라고 하니, ‘우리’가 ‘구름도 멋있어.’ 라고 되받아요. 내가 ‘우리’ 등을 긁어주고 있는데, 이음이가 내 손등을 만지며 왜 이렇게 꺼칠꺼칠하냐고 물어요. 늙어서 그렇다고 하니, 이음이가 작은 목소리로 ‘할아버지, 죽지 마.’ 라고 해요. 가슴이 아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이음이가 다시 할아버지는 형제가 몇인지 물어 봐요. 넷이라고 하니까, 그네를 타며 책을 읽고 있던 울림이가 형제가 많으면 좋지 라며 이야기에 끼어들어요.
얼떨결에 나는 할머니 형제는 아홉이라고 했어요. 그러자 울림이가 혼잣말로 ‘일병이, 이병이, 삼병이’ 라고 하잖아요. 나는 넘겨 짚어 ‘너, 윤구병 선생님을 알아?’ 하고 물으니, 아빠가 이야기해 주었다고 해요. 선생님 형제는 첫째가 윤일병, …, 아홉째가 윤구병이거든요. 할아버지는 변산반도에 윤구병 선생님을 만나러 간 적이 있다고 하니, 아빠한테 말한다고 문을 열고 들어갔어요. 아빠도 벌써 일어나 있었나 봐요. 할아버지가 옛날 이야기 해줄까 하며, ‘춥지도 덥지도 않는 어느 날…’ 하며 이야기를 풀어냈어요. 실은 엊그제 아이들과 함께 읽은 ‘팥빙수의 전설’이란 동화예요. 아이들은 다 알면서도 처음 듣는 것처럼 귀를 기울여요. 나는 줄거리만 거칠게 이야기하는데, 곁에서 듣고 있는 이음이는 사이사이에 팥빙수 할머니 목소리를 흉내내며 대사를 정확히 이야기해요. 아직 글씨도 모르는 이음이가 어떻게 그 이야기를 섬세하게 다 기억하고 있는지 참 신기해요.
2021. 9. 19
일하다 쉬며 누워서 보는 아이들 집이에요. 오늘은 아침 일찍 아이들이 서천할아버지네 가서 집은 텅 비고, 가을볕에 자전거만 졸고 있어요. 아내는 아이들이 없으니 집에 향기가 사라졌다고 해요. 목화송이 부푸는 하늘은 파아랗기만 한데 입가엔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서늘한 바람 …’이란 노래가 맴돌아요.
2021. 9. 21
걸상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데 ‘우리’가 내 무릎으로 올라오더니 내 눈가에 내 볼에 붙은 것을 떼어줍니다. 예초기로 언덕을 깎을 때 묻은 풀 부스러기입니다. 하나 하나 떼어주는 고 조그만 손가락이 여간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우리’와 나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있는 듯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걷기 전부터, 말을 배우기 전부터 내 손수레를 타고다녀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이들과 엄마는 어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오셔서 강화로 데리고 같습니다. 울림이 말로는 3박3일인데, 가는 날은 강화에 가서 자기만 해야 하니까 그런 셈이 나온 것 같습니다. 다시 초롱산은 고요 속으로 돌아가고, 이따금 풀벌레 소리만 가늘게 떨립니다.
2021. 9. 28
이야기 하나 ‘딸꾹질’
‘우리’가 침대 위를 기어다니며 ‘붕놀이’를 하고 있어요. 꼬물꼬물 발가락이 귀여워 뒤에서 양쪽 새끼발가락을 잡았는데, 뒤돌아 보며 그건 딸꾹질할 때 하는 거래요. 그 말이 귀여워 나는 계속 ‘우리’ 새끼발가락을 붙잡고, ‘우리, 너 지금 딸꾹질하고 있지?’ 하며 딸꾹질 놀이를 했어요. 밖에서 도토리를 가지고 놀고 있는 이음이에게 ‘우리’가 들려 준 얘기를 하니, 그게 아니라고, 딸꾹질을 할 땐 새끼발가락이 아니라 새끼손가락을 꼭 눌러야 한다며, 서천에 사시는 친할머니가 가르쳐 주었다고 해요.
이야기 둘 ‘가여워’
‘가여워’
이음이와 내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곁에서 놀고 있던 ‘우리’가 혼잣말처럼 꺼낸 말이에요. 이음이가 ‘할아버지, 단이는 몇 번 결혼을 해?’ 하고 물어, 일년에 두 번이라고 하니, 이음이가 그 동안 단이가 나은 새끼가 엄청 많았겠다 라고 하던 때였어요. ‘우리’는 문득 올봄에 태어난 강아지들이 생각났나 봐요. 지금은 텅 빈, ‘우리’가 꼭 신발을 벗고 들어가던 개집에 꼬물꼬물거리던 강아지가 가여웠던가 봐요.
이야기 셋 ‘오디’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나는 뛰어서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있는데, 길 아래 쪽을 쳐다보며 ‘우리’가 ‘오디가 열었나?’ 하는 거예요. 갑자기 오디 따먹던 생각이 났나 봐요. ‘오디는 (초)여름에 열어.’ 라고 대답하니, 여름이 언제냐고 다시 물어, 더울 때라고 하니, ‘우리’는 지금 덥다고 해요. ‘야, 니가 덥다고 오디가 열리냐.’ 하고 놀리니, ‘우리’도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터뜨려요.
이야기 넷 ‘오줌 멀리 누기’
며칠 전에 ‘우리’가 오줌이 마렵다고 해서 언덕으로 데려가니, 자꾸 앉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동안 변기에 앉아서 눠서 그랬나 봐요. 오줌은 서서 이렇게 누는 거야 라고 가르쳐 주며, 울림이와 이음이와 할아버지는 누가 멀리 오줌을 누나 내기를 했다는 얘기도 들려 줬어요. 이제는 오줌이 마려우면 쉬 마렵다며 내 바지를 잡아 끌고가서는 둘이서 누가 멀리 누나 내기를 하지요. 엊저녁엔 넷이서 오줌 누기 시합을 했어요. 울림이와 이음이는 멀리 누려고 물을 잔뜩 마시고 참느라고 난리였어요.
2021. 9. 29
이음이 한글 배우기 1
‘이음이 한글 가르치기’란 말보다 ‘이음이 한글 배우기’라는 말이 어울릴 듯해요. 어차피(‘우리’가 쓰는 말) 한글은 이음이가 배우기 때문이지요. 며칠전 엄마가 와서 이음이가 한글을 배우고 싶어 한다고 해요. 아이들이 그림과 글자로 일기를 쓰는데, 이음이도 울림이 형처럼 글씨로 적어 보고 싶다고 한대요. 이음이가 배우고 싶다면 한 번 가르쳐 보겠다고 선뜻 대답했어요. 나도 내 아이들이 글자를 배우고 싶다고 할 때까지 한글을 가르치지 않고 초등학교에 보냈어요. 이음이가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는 글자는 ‘이, 음, 우, 유, 두’ 다섯 개예요. 나는 ‘가, 나, 다, 라 …’부터가 아니라, 이음이가 알고 있는 글자로부터 한글을 가르쳐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유’는 우유갑에서 날마다 봐서 저도 모르게 익히게 되었다고 해요. 나는 먼저 이음이가 모르는 ‘으’이라는 글자를 적어 읽어 보라고 했어요. ‘음’이라는 글자가 나타내는 소리가 한 소리 ‘음’으로 뭉뚱그려진 것이 아니라, 낱낱의 소리 ‘으’ 소리(모음)와 ‘ㅁ’ 소리(자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러고 나서 ‘이’에다 ‘ㅁ’을 붙인 ‘임’이라는 글자를 읽어 보라고 하니, 금방 ‘임’이라고 소리내며, ‘이런 거야!’ 하며 이음이도 놀라워 했어요. 나는 아이들이 글자를 배우는 일이 글자 하나하나를 익히는 것이 아니라 한글이라는 틀, 동시에 우리말의 틀을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2021. 9. 30
엄마 팔뚝에는 문신이 새겨져 있어요. 한쪽에는 이음이가, 또 한쪽에는 ‘우리’가 볼펜으로 그려넣은 예쁜 문신이에요. 엄마가 두 팔뚝에 새겨진 문신을 보여줄 때, 엄마 얼굴에는 뿌듯해 하는 느낌이 묻어났어요. 문득 지우가 병설유치원에 다닐 때 만들어 준 카네이션이 생각났어요. 삐뚤빼뚤 종이를 오려 만든 카네이션 꽃을 가슴에 달고 학교에 가 아이들 앞에 섰을 때 나는 내가 퍽 자랑스러웠어요. 사진은 우리 집 강생이들이에요. 비가 그치고 살짝 부푼 듯한 파란 하늘을 매 한 마리가 동그라미를 그리며 천천히 돌고 있어요.
2021. 10. 2
“‘우리’는 세 살이야.”
묻지도 않았는데 나이 이야기가 나오자, ‘우리’가 말했어요. 나는 얼른 알아채고 “‘우리’는 내년에 어린이집에 가고 싶지 않구나.” 라고 하니, 풀죽은 목소리로 ‘응’이라고 해요. ‘우리’는 올해 네 살이고, 내년에는 다섯 살이거든요. “‘우리’는 엄마가 좋지. 엄마 곁에 있고 싶지.” 라고 이어 말하니, ‘우리’가 속삭이듯이 ‘할아버지, 좋아!’ 하며, 엎드려 기어와 조그만 두 손으로 내 볼을 어루만져요. 내가 ‘우리’ 마음을 보듬어 주어서 그런가 봐요.
오늘은 집 둘레길을 세 바퀴 돌았어요.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나는 걸어서요. 가다가 풀섶에 밤이 떨어졌나 살피기도 하고, 자동차 바퀴에 밟혀 뭉그러진 도토리도 주워서 만져보고, 빠알갛고 마알간 넝쿨 열매도 따서 맛보고, 너무 시어서 같이 퉤퉤 뱉고, 미국자리공 열매를 으깨서 검보랏빛 물이 든 손가락을 치켜들고 ‘아이고, 무서버라(무서워라)’ 놀이도 했어요.
2021. 10. 3
엊그제 ‘우리’가 내게 다가와 속삭이듯 수줍게 “‘우리’는 할아버지가 좋아.” 라고 했을 때, 마치 사랑의 고백을 듣는 듯했어요. 어젯밤에는 울림이네 풀밭에서 장작불을 피워놓고 모닥불놀이을 했어요. 불가에 둘러앉아 한참 놀고 있는데, 아빠 곁에 앉아있던 ‘우리’가 아빠에게 “‘우리’는 할아버지가 좋아.” 라고 말했어요. 아빠는 ‘우리’는 왜 할아버지만 좋아? 우리 가족 모두 좋지 라는 뜻으로 말을 고쳐주었어요. 그러자 얼른 ‘우리’는 아빠도 좋고, 울림이 이음이 형도, 삼촌 할머니도 다 좋아 라고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왔어요. 그러다가 가장 중요한 엄마를 빠뜨렸어요. 아빠가 ‘엄마는?’ 하니까 그제사 ‘아! 엄마도 좋아.’ 라고 서둘러 말했어요. 아빠는 한 가지 잊은 게 있어요. ‘우리’가 할아버지가 좋아 라고 말할 때 ‘우리’ 속에는 이미, ‘우리’가 좋아하는 아빠 엄마, 울림이 이음이 형,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지원이 이모가 들어있다는 사실을요.
2021. 10. 8
이음 : 할아버지가 지리산에 있을 때, 나는 (이 세상에) 없었지?
나 : 음, 한 살쯤이었을까, 엄마 뱃속에 있었을까?
이음 : 아, 애기씨로. … 근데 그 때 내 생각은 있었을까?
이음이는 묻고 있어요,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지금처럼 생각하고 있었는지. 사람이 죽으면, 몸은 땅에 묻혀 썩지만 마음(생각)은 죽지 않고 살아 다른 옷(몸)을 입고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얘기해 주었어요.
나 : 이음이는 틀림없이 좋은 곳으로 가 다시 태어날거야.
이음 : 할아버지도 좋은 곳에 갈거야.
나 : 자꾸 자꾸 다시 태어나다가 아주 아주 착해지면 빛처럼 환해져서 다시는 이 세상에 오지 않아.
이음 : 부처님처럼.
나 : 응.
일곱 살 이음이와 네 살 ‘우리’가 그린 그림이에요. 울림이가 일곱 살이고, 이음이가 네 살 때 그린 그림과 거의 비슷해요. 요즘 ‘우리’는 달팽이를 제법 잘 그리는데, 더듬이는 꼭 세 개를 그려넣어요.
2021. 10. 10
이제 나는 아랫집 할아버지일뿐 더는 이음이와 울림이 친구가 아니에요. 요즘 이음이와 울림이는 집에 오면 ‘지우 삼촌’만 찾아요. 인터넷 게임을 알고나서부터는요. 지난번 이음이보고 ‘할아버지, 이음이 친구지?’ 하고 말하니, 이음이가 ‘그럴리가 있어? 할아버지이지.’ 하는 표정으로 바라봐서 괜히 머쓱했어요. 엄마가 불러 울림이와 이음이는 밥 먹으러 가고, ‘우리’만 남아 나보고 집에 바래다 달래요. 닭이 닭장에서 꼬꼬 소리내서 무섭다나요.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앞서가고, 나는 터덜터덜 뒤따라갑니다. 내가 ‘터덜터덜’ 입으로 소리내고 가면, ‘우리’는 그 말이 우스운가 봅니다. 집에 가선 장난감을 마당에 놓고 왔다고 해서 되돌아와 다시 가는데, 언덕 도랑에 가로질러 놓은 다리까지 배웅해준다고 하니까 개미가 있어 무섭다고 해요. 맨날 다니는 길이 무섭긴 뭐가 무서워요. 집까지 같이 가자는 이야기이지요. 나는 나이를 먹지 않고 늘 네 살에 늘 머물러 있는 듯해요. 네 살인 ‘우리’하고만 친구 사이이니까요. 달팽이 그림은 ‘우리’ 수첩에서 옮겨왔어요.
2021. 10. 15
이음이가 드디어 두발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됐어요. 며칠 전 거추장스러운 보조바퀴를 떼어내고 자전거 뒤를 서너 차례 잡아주었는데, 엊그제는 아무 도움 없이 혼자 50m남짓 달려갔어요. 이음이는, 내가 어릴 때 아버지에게 어떻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는지 자세히 알고 있어요. 그 이야기를 들려 준 지 두 해나 지났는데, 지금까지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으며 재미있어 해요. 이음이도 자전거를 나처럼 배웠어요. 뒤에서 자전거 꽁무니를 잡고 따라가가다 슬그머니 손을 놓고는, ‘이음아, 할아버지 손 놓았어.’ 하면 이음이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며 몇 바퀴 못 가고 넘어졌어요. 몇 번 넘어지곤 하다가 ‘할아버지, 이제 잡지 말아 봐.’ 라고 말하곤 혼자 내달렸던 거예요. 이음이 스스로도 대견한지 소리없이 흐뭇이 웃었어요. 넘어질 땐 자전거와 함께 땅에 나뒹굴어서, 자전거 탈 땐 넘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해 주었어요. 그 말을 하며, 지리산에 살 때 신현태 선생님이 지게를 질 때는 지게를 벗어 나뭇짐을 부리는 것을 먼저 배워야 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안장이 높아 혼자 올라탈 수는 없지만, 이제 멈출 때는 사뿐히 뛰어내릴 줄도 알아요. 이음이는 두발자전거를 타고 또 다른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갔어요.
그림은, 울림이 만화 속 주인공들이에요.
2021. 10. 20
올 들어 첫추위가 찾아온 날 금당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나들이를 갔어요. 엄마는 빨래를 널고 온다고 해서, 우리 먼저 지우 삼촌 차를 타고 떠났어요. ‘우리’는 앞자리 할아버지 무릎에 앉고, 울림이와 이음이는 뒷자리 할머니 곁에 앉았어요. 마치 햇살 반짝이며 시냇물 흘러가듯 차는 어깨를 들썩이며 마을길을 내려갔어요. 학교에 닿자마자 자전거를 타고 마음껏 텅빈 운동장을 내달리고 놀이터에서 한참이나 놀았어요. 얼마전 축구를 배우기 시작한 엄마는 혼자 공 모는 연습을 하고, 삼촌은 농구를 하고, 할머니는 꽃씨를 모으다가 잔디밭에서 은행을 주웠어요. 나중엔 편을 갈라 축구를 했어요.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이음이가 같은 편을 먹고, 울림이는 삼촌과 엄마와 한 편이 됐어요. 울림이가 공을 몰고 오자 할아버지가 울림이 몸을 잡아 넘어뜨리며 반칙을 했지만, 공은 또르르르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갔고 끝내는 2대2로 비겼어요. 엄마가 싸온 참(간식)을 먹고, 돌아올 무렵에는 시이소와 미끄럼틀을 타고 나란히 앉아 그네도 탔어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은 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어린시절로 돌아가고 있었어요. 유난히 파아란, 엄마가 깨끗이 빨아 널은(넌) 눈부신 하늘을 보며, ‘우리’와 할아버지는 더 오래토록 엄청 늦게까지 놀고 싶었어요.
2021. 10. 22
틀림없이 ‘찝게(집게)’라고 들렸어요. 나뿐 아니라 아내 귀에까지도요. ‘우리’가 고구마를 캐는데 밭에 올라와서는 ‘할아버지, 찝게.’ 라고 소리쳤거든요. 갑자기 무슨 찝게일까 하는데 ‘찝게 먹어.’ 라고 해서, ‘우리’ 뒤를 따라가면서도 혹시 ‘쥬스’라고 한 말을 잘못 들었나 했어요. 그런데 내려가보니 ‘식혜’였어요. 식혜를 가지고 와서 같이 먹자고 한 거예요. 식혜 한 깡통을 따서 나눠 마시며 ‘할아버지는 찝게라고 한 줄 알았어.’ 라고 하니까, ‘당연히 찝게는 아니지.’ 라며 딱 잘라 말해요. 아직도 나는 ‘우리’가 소리내는 ‘ㅅ(ㅆ), ㄷ(ㄸ), ㅈ(ㅉ)’ 들은 잘 가려내지 못할 때가 있어요. 어쩌면 ‘우리’가 ‘식혜’라는 말은 모를 거라는 생각이 굳어져 안 들렸는지도 몰라요. 마치 ‘우리’가 좋아하는 반찬 가운데 ‘숙주나물’이나 ‘고사리’가 있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에요.
2021. 10. 25
‘뛰어다니는 풀’
울림이가 손에 무언가를 쥐고 와서 ‘뛰어다니는 풀’이라고 해요. 나는 금방 알아들었어요. ‘메뚜기구나!’ 라고 하니, 손가락 사이에 낀 메뚜기를 보여주며, 벼메뚜기라고 해요. 한참 지나, 울림이 이음이와 같이 마을길을 올라오며 ‘할아버지는 오래전에 메뚜기를 뛰어다니는 풀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 풀도 푸른 빛깔을 띠고 메뚜기 푸른 빛깔을 띠고, 메뚜기는 풀 조각이 뛰어다니는 것 같아.’ 라고 하니까, 울림이 저도 그렇게 똑같이 생각했다고 해요. 푸르고 맑은 바랭이풀 영혼이 벼메뚜기로 옮아가는 신비로운 순간을 나와 울림이가 함께 본 거예요.
사진은 울림이(위)와 이음이(아래)가 벽돌에 숯으로 그린 그림이에요.
2021. 10. 26
‘자석의 탄생’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는 자석을 서로 가지려고 다투었어요. 곁에서 지켜보던 엄마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자석을 내다버리려고 쓰레기 종량제 봉투에다 넣었어요. 그런데 엄마는 마음이 약해 자석이 탄생했어요. 이음이가 들려준 이야기예요. 마음 약한 엄마 때문에 거의 죽을 뻔했던 자석이 다시 태어난 것이지요. 아, 이럴 때 ‘탄생’이란 말을 쓰는구나! 이음이에게서 탄생이란 말을 처음 듣는 순간이었어요.
뒷이야기
‘아이고! 아깝다. 할아버지 같으면 자석을 멀리 던져버렸을 텐데.’ 라고 하니, ‘할아버지는 장난꾸러기여서 던지는 척하다가 돌려줄 걸.’ 이라고 이음이가 말했어요. 나중에 학교에서 돌아온 울림이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니, 할아버지는 자석을 더 많이 사주었을 거라고 대답했어요.
사진은, 이음이가 그린 이음이네 집이에요.
2021. 10. 27
이음이 한글 배우기 2 ‘감’의 탄생
오랜만에 이음이가 한글을 배우러 왔어요. 며칠전에 지나가는 말로 ‘우리’라는 글자를 쓸 수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나서, 먼저 이음이한테 아는 글자를 적어 보라고 했어요. ‘리, 으, 응, 우, 유, 야, 아, 음, 움, 어, 이’ 열한 자인데, ‘리, 응, 움’은 이음이가 새로 알게 된 글자이고, ‘리’는 거울에 비친 것처럼 거꾸로 써 놓았어요. 이음이는 동그라미 ‘ㅇ’이 없는 ‘ㅣ’도 [이]라고 하는 게 아직 이상하다고 했어요. 그건 무척 중요하다며, 이음이가 모르는 글자 ‘기’를 종이에 적고는, 이 글자는 ‘[기~ㅣ](일부러 길게 소리냄)라는 소리를 적은 걸까, [가~ㅏ]라는 소리를 적은 걸까?’ 하고 물어보니, ‘기’라는 소리를 적은 거래요. ‘그래, 맞아.’ 라고 칭찬하자, 이음이는 무언가 찾아낸 듯, ‘할아버지, 나, 감(열매)도 쓸 수 있어.’ 하더니 색연필로 커다랗게 ‘감’이라고 적었어요. 놀라운 일이에요. 이음이 쪽에서 보면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낸 거예요. 다시 이음이 말로 고치면 ‘감’이라는 글자가 ‘탄생’한 거지요. 이음이는 ‘ㄱ’에다 ‘ㅏ’를 붙이면 [가]라고 읽고, ‘가’ 아래 ‘ㅁ’을 붙이면 [감]이란 소리를 나타낸다는 것을 찾아낸 거예요. 시나브로 이음이는 한글의 원리를 깨치고 있어요. 그러고는 ‘응’이라는 소리에서, 위에 있는 동그라미 ‘ㅇ’은 소리가 없는데, 아래에 있는 ‘ㅇ(이응)’은 왜 소리가 있는지가 궁금하다고 했어요. 옛날에는 소리값이 있는 ‘ㅇ’은 꼭지 달린 ‘ㆁ’으로 구별하여 썼다고 하니, 이음이도 앞으로 그렇게 쓰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오늘 드디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라는 말을 글자로 적었어요!
2021. 10. 29
처음 있는 일이에요. 저리 비키라고, 안 보이는 데로 가라고 ‘우리’가 눈치를 줘요. 처음에는 자꾸 귀찮게 무엇을 물어봐서 그런 줄 짐작했어요. ‘우리’에게, 엄마 뱃속에 있기 전에는 어디 있었느냐고 캐물었거든요. ‘우리’는 엄마 젖을 먹고 있었다고 말했어요. ‘아니,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젖을 먹고 있어.’ 라고 하니까,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곁에서 듣고 있던 이음이가, ‘우리’는 엄마 뱃속에서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고 하는 것일 거야 라며 손가락 빠는 흉내를 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는 왼쪽 새끼손가락이 긁혀 혼자 쓰린 아픔을 참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나보고 저리 가라고 한 거예요. 며칠전에, 자다가 눈이 아팠다고 했던 ‘우리’ 말이 떠올랐어요. 그 때는 눈을 뜨고 있었다며. 아, 아이들도 모두 잠든 한밤중에 홀로 깨어 그 아픔을 참고 있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어요. 가끔 꿈 이야기도 하는 ‘우리’ 말을 듣고 있으면 새나 꽃들의 이야기를 듣는 듯해요. 그림은, 울림이 ‘동물도감’에 나오는 고슴도치예요.
2021. 11. 4
새벽녘 살짝 비가 뿌리고 숲속에 가을이 무겁게 내려앉았어요. 마당 한 귀퉁이에 받쳐 놓은 ‘우리’ 자전거가 어느새 꽃나무처럼 우리 집 풍경이 됐어요. ‘우리’ 몸의 한 부분이었던 자전거, 왼쪽 손잡이가 떨어져 고쳐 달라고 끌고 오면 푸른 테이프로 칭칭 감아 주곤 했는데… 이제는 추억 속으로 사라진 ‘우리’의 세 살이 세발자전거에 고스란히 얹혀 지금도 꿈속을 달음박질치고 있어요.
2021. 11. 5
“‘우리’는 기저귀 안 하고 이제 팬티 입어.”
‘우리’가 한 말이에요. ‘우리’가 언제 이 말을 했는지 들려주려고 해요. 달리기 내기를 할 때, 울림이가 있으면 울림이가 심판을 보지만, ‘우리’와 나, 이음이 셋이 있을 적엔 번갈아가며 ‘준비, 시작’이라고 출발하는 말을 해요. 한번은 이음이 차례인데, ‘준비, 시작’이라고 하지 않고, ‘준비, 시~’하고 한참 끌더니 ‘자장면’이라고 하는 거예요. ‘시작’이 아니고, ‘시자장면’이니, 이 때 출발하면 물론 반칙을 하는 거지요. 그 말이 재미있었는지 다음날부터 ‘우리’는 웃음 가득 머금고는 ‘시~자장면, 시~자장면’이라고 몇 차례나 되풀이했어요. ‘준비’라는 말은 잊어버리고요.
엊그제였어요. 뜬금없이 “‘우리’는 기저귀 안 하고 이제 팬티 입어.”라고 말하는 거예요. 순간 ‘무슨 말일까? 기저귀 안 찬 지가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 하며, 너무 차분하게 말해서 깜박 속을 뻔했어요. 그러다 생각이 났어요. 언제인가 내 차례일 때, ‘준비’라는 말을 꺼내놓고 한참 뜸을 들이며 ‘저기 하늘 좀 봐. 오늘은 매가 아주 낮게 날아.’ 하며 딴소리를 하다가 재빨리 ‘시작’이라 소리치곤 나 혼자 내달린 적이 있었거든요. ‘우리’는 그 때 생각이 나서 나를 따라한 거예요. 나는 뒤늦게서야 알아채고 “‘우리, 너!” 하는 사이에 ‘우리’는 먼저 자전거를 타고 내뺐어요. 물론 ‘준비, 시작’이란 말도 빼놓고요. 아침이면 저기 언덕에 서서 ‘안녕!’이라고 먼저 소리치고, 내가 손을 흔들며 안녕!’이라고 답하면 따라서 손을 흔드는, 초롱산 숲속에 하나뿐인 귀여운 친구, ‘우리’가 있어 날마다 몸 가눌 길 없는 기쁨을 누리고 살아요.
2021. 11. 8
아이들이 뛰어오던 발소리도, 까르르 웃음소리에 출렁이던 언덕도 초겨울 비에 젖습니다. 덩그러니 남은 까치집, 창으로 내다보이는 상수리 나무에 앉았던 이파리들도 날아가고 지금은 옷깃을 여미고 집으로 돌아가는 계절입니다. 비가 그치자 아이들이 달려왔어요. 들어서자마자 얼어붙은 듯한 차가운 두 손을 만져보라며 내밉니다. 이음이가 구름이 헥헥거리며 숨차게 달려가다 땀이 나서 비가 온다고 하니, ‘우리’도 한 마디 거듭니다. ‘구름이 해를 덮었어. (그래서) 비가 떨어져. (손으로 접는 시늉을 하며) 구름이 접혀서 비가 오는 거야.’
2021. 11. 9
예쁜 조약돌이나 가랑잎을 줍듯, 나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과 ‘우리’가 쓰는 말을 모읍니다. 곁에 종이가 있으면 얼른 적어 두지만, 밖에서 놀 때 ‘우리’가 하는 말은 땅바닥에 적거나 혼자 속으로 되풀이하여 기억해 둡니다. 요즘 문득 알게 된 ‘우리’의 말버릇 가운데 하나는, ‘우리’는 저를 가리킬 때 ‘나’를 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라고 말하지, ‘나는, 내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엄마 아빠 형들이 ‘우리’라고 부르니, ‘우리’는 저를 ‘우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어제 이음이에게 이 말을 하니, 이음이가 “‘우리’야, ‘우리’가 ‘나’야.” 하고 말해 줘도, ‘우리’는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만 짓습니다. 언제부터 ‘우리’가 저를 ‘나’라고 말할까요? 이제부터 ‘우리’를 ‘나’라고 불러볼까 하는 재미난 생각도 합니다. 사진은,이음이가 그리고 쓴 그림문자와 한글입니다. ‘이음이랑 엄마’란 글자도 보이는데, 나머지는 알 수 없는 상형문자입니다.
2021. 11. 12
‘바람이 나와서 말라.’
‘엄마 차도, 뱀이 그래서 죽은 거야.’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놀면서 ‘우리’가 한 말이에요. ‘우리’와 나만이 알 수 있는 두 문장으로 이어진 수수께끼 같은 말을, 울림이와 이음이에게 풀어 보라고 했어요. 울림이는 장난스럽게, 이음이는 차분하게, 서로 다투며 제 생각을 이야기했어요. 여러분도 무슨 말일까 짐작해 보아요. ‘우리’는 지금 서로 다른 시간에 겪은 일을 한 순간에 일어난 일처럼 이야기하고 있어요.
첫째, 여름날 엄마 차에서 (에어컨) 바람이 나온다.
둘째, 뱀이 엄마 차(짐작)에 깔려 죽었다.
셋째, 죽은 뱀이 말라 있었다.
이제 어렴풋이 짐작이 가나요? 얼마전 ‘우리’가 나와 함께 눈으로 본 것은, ‘우리’네 집으로 올라가는 찻길에서 차바퀴에 깔려죽어 말라 비틀어진 뱀이었어요. 그 길로 다니는 차는 엄마 차이고, 깔려죽은 뱀을 마르게 한 것은 엄마 차에서 나온 바람이었을 거라고, ‘우리’는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 뱀을 보자, ‘아! 불쌍해.’ 라고 말했어요.
2021. 11. 16
“‘우리’는 손이 없다고.”
길에 떨어진 가랑잎을 쓸어 모읍니다. ‘우리’가 나오고, 곧이어 이음이가 나옵니다. 풀숲에 수북이 가랑잎이 쌓이자, 이음이는 ‘낙엽산’이라고 부릅니다. 마당비도 가져오고 뜨락을 쓰는 비도 가져와 낙엽산을 만듭니다. 낙엽 무더기 위를 뛰어다니던 ‘우리’가 아까부터 나한테 어제 두고간 세발자전거를 가져다 달라고 보챕니다. ‘너희들이 가지고 와야지.’ 하는 엄마 목소리가 들립니다. 나도 덩달아 “‘우리’는 손이 없어요.” 하며 거듭니다. ‘손’이 없다니? ‘우리’는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한 표정입니다. 나를 따라 집에 와서 이음이는 킥보드를, ‘우리’는 자전거를 끌고 다시 집으로 갑니다. 이음이가 ‘우리’한테 장난감 트럭도 가져와야지 하는 바람에 한 손으로는 장난감 트럭을 들고 한 손으로는 자전거를 끌고 길을 올라갑니다. 이음이는 다시 길에 놓여있는 뜨락비도 ‘우리’한테 가져오라고 합니다.
“‘우리’는 손이 없다고.”
‘우리’는 투덜대며 집으로 갑니다. ‘우리’는 아까 내가 한 말 뜻을 알아차리고 금방 배워 따라합니다.
2021. 11. 19
내일 아침에는 ‘우리’와 이음이와 함께 새총 만들 Y자 나뭇가지를 찾으러 산에 가기로 했어요. 울림이도 따라가고 싶다고 해요. 학교는 어떻게 하려고? 체험학습을 내면 되지 않을까 하니, 그건 안 되고 내일 아침 감기 걸리면 된다고 해요. 울림이와 이음이와 둘러서서 감기 걸리는 여러가지 길을 찾기 시작했어요. 물장난에서부터 이마를 100도로 올리는 방법까지. 내가 장난말로 이음이가 울림이 형이 열받도록 막 약을 올리는 것은 어떨까 하니, 여태까지 잠자코 앉아 있던 ‘우리’가 갑자기 ‘메롱, 메롱!’ 하는 거예요. 설마 이런 말은 모르겠지 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우리’는 다 알아듣고 있는 거예요. 내가 꼭 안아 주니까 숨이 막힌다고 놓아 달래요. 밭일을 마치고 마루에 걸터앉아 신을 갈아 신는데, 저만치 숲의 안섶에 커다란 나뭇잎 몇 이파리가 팔랑거려요. ‘가지 끝에 새가 날아와 앉았을까, 저 곳에만 바람이 부는 걸까?’ 하는 순간, 숲 가장자리에 서있는 졸참나무 이파리들이 마구 손을 흔들고, 바람이 지나는 길이 보여요. 아침이면 ‘우리’ 웃음소리로 맑게 메아리지던 숲속으로 저물어 가는 눈빛이 참 고와요. 이윽고 나무들은 총총 머리에 별을 이고 또 하룻밤 나들잇길을 떠나지요.
2021. 11. 21
이제부터 할아버지는 ‘초롱산 할아버지’라고 불러. 서천에 사는 친할아버지는 ‘서천 할아버지’이고, 강화에 사는 외할아버지는 ‘강화 할아버지’이고, 할아버지는 초롱산에 사니까. 가만히 있더니 그 말에 대답은 않고; “‘우리’는 자전거 타는 ‘우리’야.” 라고 해요. ‘우리’는 저를 ‘자전거 타는 우리’라고 불러 달라는 거예요. ‘자전거 타는 우리와 초롱산 할아버지’ 무슨 책이나 영화 제목 같지 않나요? 드디어 울림이 이음이 생물도감과 ‘우리’도감이 책으로 나왔어요. 엄마가 펴낸, 손바닥만한 크기의 사랑스런 책이에요.
2021. 11. 22
‘할아버지, 눈 와!’ 이음이가 소리를 질렀어요. 창밖에 흩뿌리던 비가 어느새 싸래기눈으로 바뀌었어요. 곧바로 ‘엄마한테 전화해.’ 라고 말했을 때, 순간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이음이를 바꿔주니, ‘엄마, 눈 와!’ 라고 하는 거예요. 이음이는 첫눈 내리는 모습을 방안에 있을 엄마에게 맨처음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사진은, 엊저녁 늦게까지 집에서 곤히 잠들었다가 엄마 품에 안겨 돌아가는데, 미처 따라기지 못한 ‘우리’ 신발이에요. 엄마에게 안겨가면서 잠깐 눈을 뜨곤 ‘할아버지 집에서 놀고 싶어.’ 하던 목소리도 신발과 함께 떠나지 못하고 있어요.
2021. 11. 23
‘할아버지, 나중에도 할아버지 집에 놀러오고 싶은데 …’ 내 품에 안겨 이음이가 꺼낸 말이에요. 이음이는 이다음에 커서도 지금처럼 할아버지 집에 놀러오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언제인가는 아이들이 초롱산을 떠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지만,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슬펐어요. 얼른 마음을 일으켜세워 ‘언제든지 오면 되지.’ 라고 하니까, 길을 몰라 찾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걱정스럽게 이야기해요. 그래서 생각난 것이 ‘초롱산 할아버지’였어요. 아이들이 나를 가리킬 때 ‘아랫집 할아버지’라고 하는데, 이제부터라도 ‘초롱산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초롱산이란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해서요. 초롱산은 우리가 사는 이 땅에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이음아, 네 마음속엔 이미 초롱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 있단다. 할아버지는, 하늘 높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미끄러지던 매의 날개짓으로 저물녘이면 웍웍 울던 뒷산 바위 부엉이 소리로 네가 나무에 바짝 붙어 깨금발 하고 따먹던 검보랏빛 오디 열매로 잎새에 물결치는 햇살로 나뭇가지를 흔들면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로 빈 숲길을 스치는 바람으로 언제까지나 초롱산에 살아있을 거야.’
2021. 11. 24
눈싸움을 하다가 이음이는 먼저 돌아가고, 혼자 남아 나무 난간 턱에 쌓인 눈 위에서 붕놀이를 하던 ‘우리’는 내 품에 안겨 집으로 돌아갑니다.
‘할아버지, 뒤가 계속 보여.’ 할아버지 등 뒤로 길이 계속 따라오고 강아지 단이도 쫓아옵니다.
‘할아버지가 우리를 안고 가니 눈이 네 개이구나. 앞에 두 개, 뒤에 두 개.’
언덕을 올라서자, ‘우리’에게 따뜻한 꿀차를 먹으러 들어오라는 엄마 목소리가 부엌 창으로 새어나옵니다.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뜬금없이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엄마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하며, 갑자기 ‘우리’가 무얼 포기하지 않는다고 하는지, ‘우리’ 말을 잘못 들었는지 이상하게 여깁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조금전 ‘우리’에게 ‘점심 먹고 이따 만나.’ 라고 하니까, ‘점심 먹고?’ 라며 ‘우리’가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거든요. ‘우리’는 얼른 다시 만나 놀고 싶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할아버지에 놀러올(놀러갈) 거야, 라고 말한 것입니다.
2021. 11. 25
아침나절 이음이가 새의 깃털을 주으러 가자고 전화가 왔어요. 이음이를 만나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 물으니, 책을 보다가 깃털펜이 나와 만들고 싶었다고 해요. 먼저 닭장에 들러 닭의 깃털을 세 개 줍고, 이음이랑 ‘우리’와 함께 가까운 숲속으로 들어갔어요. 열흘 전쯤 나무 하러 갔다가 숲길에 깃털이 부스스 흩어져 있는 걸 본 적이 있거든요. 매가 잡아먹고 남긴 산비둘기 깃털 같았어요. 그 사이 세찬 바람에 모두 날려갔는지 몇 차례 둘러봐도 깃털 하나 보이지 않았어요. 나중에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비둘기나 까마귀 깃털은 너무 가늘어 깃털펜으로 쓸 수 없다고 해요. ‘펜(pen)'의 어원이 라틴어로 '깃털'이라는 의미를 지닌 'penna'인 것도 알게 되었고요.
다시 수북이 쌓인 가랑잎을 밟으며 산으로 올라갔어요. 저만치 예산이 보이는 산마루까지 올라갔는데도 오늘따라 까치 깃털 하나 만날 수 없었어요. 내친김에 산을 돌아 저 쪽 골짜기로 감을 따먹으러 갔어요.아무도 돌보지 않는 감나무 높이 바알갛게 익은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어요. 이따금 새들이 감을 쪼아먹으러 왔어요. 장대로 쳐서 바닥에 떨어져 뭉개진 것은 그 자리에서 먹었어요. ‘우리’ 입술에 감물이 덕지덕지, 첫눈이 온 뒤라 꿀처럼 달았어요. 그 가운데 성한 것 하나는 엄마에게 갖다 준다고 나뭇잎에 싸서 이음이가 들고 왔어요. 덤불을 지나며, 떨어뜨릴까 조심하라고 하니, 이음이가 ‘손에 든 감을 엄마라 생각하고 죽지(다치지) 않게 잘 들고 간다.’고 해요. 언제 친구로 사귀었는지 이음이가 ‘바위 친구’라고 부르는 곁으로, 길이 아닌 곳으로 내려가다가 그만 넘어졌어요. 가랑잎 위에 나동그라져 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감을 떨어뜨리지 않은 채 왼손에 고이 받쳐들고 있었어요. 넘어지는 순간에도 엄마 생각을 했나 봐요.
2021. 12. 9
‘좋은 장소 찾으러 갑시다.’ 라며, 전화를 받자마자 느닷없이 이음이가 어른 말투로 말했어요. 엊그제 함께 산책을 가자고 했는데, 달려오는 울림이 이음이 손엔 사진기가 들려 있는 걸 보면 멋진 곳을 찾아 사진을 찍고 싶다는 이야기인가 봐요. 마을회관까지 가기로 했어요. 울림이 이음이는 킥보드를 타고 미끄러지듯, ‘우리’는 엄청 빨리 달려, 나는 뒤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갔어요. 바람이 휘몰아치듯 아이들 떠들썩한 소리에 조용하던 온 마을이 들썩거려요. ‘안녕하세요.’ 라며 이제 어른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해요. 마을회관 빈 터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쓰는 운동기구가 있는데, 아이들은 제 키와 몸집에 맞게 놀이기구처럼 타고 놀아요. 네 시가 넘어 집을 나왔으니 이제 곧 어두워지려고 해요. 저 너머에서 오셨는지 낯선 할머니 두 분과 할아버지 한 분이 회관을 나오시면서 아이들이 참 예쁘다며 딸을 셋이나 두었느냐고 물으셔요. 머리카락도 길고 곱상하니 여자아이처럼 보였나 봐요. 아니라고, 아들 셋이라고 말하는 순간 내가 아빠가 된 듯했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가 안아 달라고 해요. 얼마만큼 올라오는데 이음이가, 할아버지가 힘드니 ‘우리’한테 내려서 걸어가라고 하니, ‘우리’는 싫다는 몸짓으로 나를 더 꼭 붙잡아요. 다시 등에 업혀 오면서, 따라오는 강아지들을 ‘단이씨’ ‘보리씨’라고 부르더니, 엄마 이름은 노해원이고, 아빠 이름은 황바람이라며 ‘해원씨’ ‘바람씨’ 라고 혼자 불러 보아요. 저기 달님이 있다며 먹는 시늉을 하길래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에는 ‘우리’가 한 쪽 베문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운 초생달이 떠 따라오고 있었어요.
2021. 12. 13
‘우리’는 두 다리를 까딱까딱하다가 어느새 엄마 무릎을 베고 잠이 들고, 울림이는 가끔 지루한지 기지개를 켜는데, 이음이는 처음 앉은 그대로 흐트러지지 않고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어요. 어쩌면 그 자세로 아빠 연주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예요. 지난 금요일 저녁에는 기타리스트 조대연 연주회가 있었어요. 홍동면 장곡리 ‘오누이다목적회관’에서 마을사람들을 모시고 열린 조촐하고 정겨운 음악회였어요. 독주가 끝나고 이어 아빠 황바람과 함께 세 사람이 연주하는 차례가 됐어요. ‘시네마천국’이란 영화음악이 흐르는데, 아빠 기타소리는 뒤늦게 나오고, 그 소리마저 가느단 빗소리나 벌레소리처럼 끊일 듯 말 듯 들려와 이음이를 무척 애태웠나봐요.
다음날 아침 아내를 만나자, 이음이는 아빠 (기타) 소리가 너무 작아 안타까웠다고 말하는데, 그 표정과 말소리를 생생하게 붙잡아 글로 쓸 수 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라고 아내가 아쉬워했어요. 아내는 개망초와 냉이 같은 풀꽃들이 모여 사는 세상을 이야기하면서, 아빠 기타소리는 대연이 삼촌 기타소리를 더 빛나게 해주는 아름다운 역을 다해냈다고 이음이에게 말해 주었다고 해요. 물론 두 번째 함께하는 연주곡에선 아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기타소리가 먼저 나와 마을사람들의 큰 환호성과 함께 손뼉소리가 터지고 이음이 마음이 활짝 꽃 피어났겠지만요.
2021. 12. 24
엊그제 저녁에는 아이들과 엄마와 함께 마을활력소에서 열린 아카펠라 공연에 갔어요. 마을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연습을 하는, 아직 이름도 정하지 않은 노래 모임인데, 성탄의 기쁨을 함께하고 한 해를 보내는 작은 음악회를 열어 마을사람들을 불렀어요. 손님은 서른 남짓 왔는데, 거의 아이들과 젊은이들이고, 늙은이는 아내와 나뿐이었어요. 노래를 하다 음정(?)이 틀리면 다시 처음부터 부르고, 어설프고 소박한 그대로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 주었어요.
1부, 2부가 끝날 때마다 경품행사가 있었는데, 경품으로 나온 선물은, 노래를 부르는 아홉 사람이 준비한, 저마다 사연이 있는 정성스러운 물건이었어요. 책이나 장난감, 손수 가꾼 채소 들이 있었는데, 가장 갖고 싶었던 선물은, 언제든지 부르면 그분들이 와서 노래를 불러준다는 약속이 적힌 엽서였어요. ‘뭉게구름’ ‘수고했어, 오늘도’ … 내 무릎에 앉아 두 발을 까닥이는 ‘우리’와 박자에 맞춰 손뼉을 치는 이음이와 울림이. 홍동에 살아서 누리는 조촐한 기쁨이었어요.
2021. 12. 24
기차를 타러 가는 길인데, 이음이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할아버지 지금 어디 있냐?’고, ‘집에 놀러 가도 되냐?’고. 할아버지 먼 데 가서 저녁에 돌아온다고 하니, 전화기 너머에서 ‘지금이 저녁이지.’ 하고 소리치는 ‘우리’ 목소리가 들려와요. 별일 없으면 이음이는 ‘우리’를 데리고 날마다 집으로 놀러 와요. 지금 놀러오고 싶다는 말일 거예요. 통화가 끝나자마자 다시 ‘우리’가 전화를 걸어 ‘할아버지, 별 따 줘.’ 라고 해요. ‘그래, 알았어.’ 라곤 했지만, 여간 걱정이 아니에요. 며칠전 ‘우리’가 크리스마스에는 별을 따는 것이라고 해서, 그냥 지나가는 말인 줄만 알았어요. 별 따는 장대라도 준비해야 하는지, 기차를 타고 가며 덜컹거리는 기차 바퀴 따라 생각이 흔들리고 있어요.
2021. 12. 25
아이들이 성탄 인사를 보내왔어요. 다행히 별은 ‘우리’가 딸 수 있다고 하네요. 오늘 만나면 별을 어떻게 따는지 물어 봐야 하겠어요. 또 ‘비밀이야.’ 하며 안 가르쳐 줄 수도 있겠지만요. 밖에 가루눈이 뿌리고 있어요. 아궁이에 장작 한 부섴을 넣으니 삼킬 듯이 빨아들여요.
할아버지 별 우리가 딸 수 있어서 안 따도 돼요. 선물 고마워요. -우리-
오늘 트리 만들었는데 못 보여줘서 다음에 보여 드릴게요. -울림-
머랭사탕도 고맙고 케이크도 고마운데 케이크에 있는 난쟁이 누가 먹어요? 나눠 먹어요? -이음-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도 메리크리스마스! -울림 이음 우리-
‘머랭사탕도 고맙고 케이크도 고마운데 케이크에 있는 난쟁이 누가 먹어요? 나눠 먹어요?’
엊저녁 아이들이 보낸 성탄 인사에서, 이음이가 한 말이 떠올라요.엊그제인가 이음이와 ‘우리’가 집에 놀러왔어요. 아내가 사과를 깎아 주자, 이음이가 한두 입 먹더니 오른쪽 이가 아프다며 얼굴을 찡그려요.이가 썩었나 보구나 하니, 아니라고 새 이가 돋아나 아프다며 이럴 땐 얼음을 먹어야 한대요.‘아이스크림을 줄까.’ 아내가 말하니, ‘아이스크림!’ 하고 곁에서 ‘우리’가 반가워해요.장난말로 아이스크림은 이가 아플 때 먹는 거라고 하니, ‘우리’가 또박또박 말했어요.‘아니야, 아이스크림은 먹고 싶을 때 먹는 거야.’ 라고.아내는 아이스크림 대신 얼린 망고를 냉장고에서 꺼내 작은 접시 두 개에 나누어 주었는데, 쏟다 보니 이음이 그릇에는 수북이, ‘우리’ 그릇에는 너댓 개가 담겼어요.‘우리’는 제 그릇에 담겨 있는 망고를 다 먹고는, 아직도 제법 남아 있는 이음이 그릇은 아예 넘보지 않고, 먹던 사과를 먹어요.오늘은 느닷없이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가 달려와 문을 열어젖히더니 AA건전지를 여덟 개를 빌려 달래요. 서랍을 다 뒤지고 손전등에 있는 건전지를 빼내어 여덟 개를 맞췄어요.문제는, 이 여덟 개를 어떻게 나누어 가져가는가예요. 알고보니 집에서 오면서 울림이 이음이는 세 개씩, ‘우리’는 두 개를 가져간다고 정하고 온 거예요. 셈을 아는 울림이와 이음이가 정한 것이겠지요.‘우리’는 두 개를 주머니에 넣은 뒤, 안 흘리게 지퍼를 잠가 주니 기분 좋게 뒤따라 뛰어갔어요.엄마는 늘 큰아이 울림이나 둘째 이음이나 막내 ‘우리’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는데, ‘우리’는 아직 셈을 모르는 듯해요. 물론 말로는 열까지 셀 줄 알지만요.
2021. 12. 30
‘우리’가 침대에서 뛰어내리다가 몸을 잘못 가누어, 방바닥에서 엎드려 놀고 있는 이음이 머리에 부딪혔어요. 이음이는 아팠는지 얼른 일어나 주먹을 쥐고 ‘우리’ 어깻죽지를 때렸어요. 그렇게 끝났으면 됐는데, ‘우리’가 하나도 안 아프다고 자꾸 우기는 바람에 두 대나 더 맞았어요. 나도 이음이한테 맞아 봤는데 이음이 주먹이 꽤 맵거든요. 어제는 비행기 장난감을 가지고 와서는 비행기 이름이, 내 귀에 들리기는, ‘수퍼이스’라고 하는 거예요. ‘수퍼이스?’ 라고 내가 따라 하니까 아니라고 해요. ‘스파이스?’ 그래도 아니라고 해요. 아무래도 잘 몰라서 이음이한테 물어보니까 ‘슈퍼윙스’라고 해요. 그러면서 ‘우리’한테 따라해보라면서 ‘슈•퍼•윙•스’라고 하니까, ‘우리’는 ‘알고 있다고.’ ‘알고 있다고.’ 라고 몇 차례나 되풀이하면서 한 마디도 따라하지 않는 거예요. ‘우리’는 울림이 이음이와는 달리 우직한 구석이 있어요.
엄마 차 둘레에서 서성대는 아이들을 보니, 방학인데도 아침 일찍 어디를 가려는가 봅니다. ‘야, 너희들 어디 가?’ 하고 소리치니, 이음이가 어린이집에 간다고 합니다. 아, 어린이집은 방학이 아닌가 봅니다. ‘할아버지 이제 눈 안 아파?’ 이음이가 묻습니다. 어제 도라지를 캐다가 눈에 흙이 들어가 잠깐 병원에 갔다 온 일을, 이음이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다섯 살 이음이가 지금 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차는 타지 않고, 울림이와 이음이는 언덕으로 조금 내려가더니 길가에서 놀고 있습니다. 가까이 가 보니, 땅속에서 흘러나온 물이 얼어붙은 위에서, 얼음을 지치기도 하고, 돌로 얼음을 깨뜨리기도 합니다. 이러다간 엄마 혼자 어린이집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서둘러 아이들을 들어올려 차에 태웁니다. 앞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어디 가느냐고 묻자 그냥 ‘엄마.’ 라고만 합니다. ‘엄마?’ 하고 되물으니, 뒷자리에 타고 있던 울림이가, ‘엄마와 같이 간다는 뜻이야.’ 라고 알려줍니다. ‘엄마라는 말 속에 그런 긴 뜻이 있었구나.’ 라고 하니, 엄마가 빙긋이 웃습니다. 아이들을 태운 차는 몇 걸음 못 가서 또 멈춥니다. 배웅하는 아내와 인사를 하는데, 이제 다시는 영영 못 볼 사람들처럼 오랫동안 헤어지는 인사를 나누고 미끄러지듯 차는 마을로 내려갑니다.
^^ 그림은, 울림이 이음이가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에게 준 새해 선물입니다.
2020. 1. 24
망원경을 목에 걸고,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장난감 총을 들고 울림이와 이음이가 달려옵니다. 오늘은 우리가 집에서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포장지를 뜯고 설명서 그림 보고 어찌어찌 하더니, 스폰지 총알을 넣고는 유리창 쪽으로 쏩니다. 바깥에는 막 해가 지려 합니다. 놓지지 않고 나는, ‘타르왁(тарвага)’이란 땅다람쥐에 얽힌 몽골 옛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옛날 옛날에, 몽골 초원에 해가 일곱 개가 떴어. 해가 하나만 떠도 더운데 일곱 개나 떴으니 세상이 얼마나 뜨겁고 더웠을까. 세상의 물들이 모두 말라서 가뭄에 시달려야 했지. 동물들은 목이 말라 고통을 받고 풀들도 바싹 타들어 갔어.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큰일이 일어날 듯했어. 그래서 사람과 동물들은 세상에서 가장 활을 잘 쏘는 '에르히 메르겡'을 찾아가서 해를 없애달라고 부탁을 했지 ... “ 창밖에 지는 해는, 수천 개의 바늘잎 같은 빛 화살을 쏘아대고, 아이들은 개어 놓은 이불 뒤에 숨어 해를 겨냥하여 총을 쏩니다. 그예 하나만 남아 있던 해는, 울림이와 이음이가 쏟아붓는 총탄에 맞고 붉게 상처를 입은 채 산 너머로 떨어져버렸습니다.
2020. 2. 5
뜨락에 싸락눈이 하얗게 쌓여있습니다. 새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아래채 공방 처마 끝에 앉습니다. 크기는 동고비만 한데 등빛이 검푸릅니다. 또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함께 치솟아 날개에 햇살 가득 펼치고는 남쪽 하늘로 날아갑니다. 쪼르르 아이들이 달려옵니다. 울림이가 뛰어오고 이윽고 이음이가 오고 한참 뒤에 우리가 따라옵니다. 집에 들어올 줄 알았는데 뜰에서 눈을 가지고 놉니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코코아 타 줄 물을 끓이고, 나는 이쪽저쪽 오가며 아이들 몰래 부엌 창으로 밖을 내다봅니다. 눈 치우는 가래를 끌고 다니지만 눈이 잘 모아지지도 뭉쳐지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혼자 아래채 계단을 올라가더니, 어! 미끄러질 텐데 어떡하지 하는 순간, 거꾸로 엎드려 엉금엉금 기어내려와 아궁이로 달려갑니다. 날마다 내 곁에 앉아 군불을 때는 곳입니다. 이제 우리는 장작을 두 손으로 들어 아궁이 속으로 넣을 줄도 압니다. 잠깐 꿈을 꾸었나 봅니다. 아이들이 마당 끝으로 달려가더니 포르르 날아 해가 뜨는 동쪽 숲으로 사라졌습니다. 뜰에는 아이들이 남긴 귀여운 발자국만 여기저기 찍혀 있습니다.
2020. 2. 13
세발자전거를 탄 채 우리가 손을 들어 손수레를 가리킵니다. 저는 세발자전거를 타고 갈 테니, 나보고는 손수레를 끌고 오라는 뜻입니다. 마을길로 내려가면서 우리는 가끔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봅니다.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뒤따라오는 나를 보고는 얼굴이 환해집니다.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마을 쪽에서 차 한 대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손수레를 길가에 받치며, ‘우리야, 차 와.’ 하니까, 얼른 세발자전거에서 내려 내 다리를 붙듭니다. 나는 몸을 숙여 우리를 꼭 안아줍니다.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는, 아랫집 민기와 민서 누나를,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꼼짝 않고 서서 바라봅니다.
‘아빠뿌까’ ‘엄마뿌까’ 다시 길을 올라오면서, 무슨 말인지 자꾸 되뇝니다. 저러다간 금방이라도 말문이 트일 듯합니다. 자건거에서 내려서는 손수레 가까이 다가섭니다. ‘우리, 손수레 타고 싶구나.’ 하니 ‘응’ 하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리를 들어올려 손수레에 태우니, 다시 손짓으로 세발자전거를 가리킵니다. 자건거를 손수레에 함께 실어달라는 뜻입니다. ‘오랑오랑’ 산개구리가 우는 다랑논으로 내려갑니다. 우리가 ‘무우’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는 어둑한 곳에는 도랑물이 졸졸졸 흐르고 있습니다. 저 쪽 산기슭 아래 다랑논에서는 무언가 움직이는 둣 물결이 일고, 마른 연꽃 줄기로 산개구리가 기어오르는 모습이 넘어가는 햇살에 어슴푸레 빛나 보입니다.
2020. 2. 15
어제는,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손가락으로 차를 가리키며 ‘부우’라고 했거든요. 세발자전거는 무어라고 할까 하곤, 내가 자전거를 가리키니, 또 ‘부우’라고 합니다. 우리에겐, 바퀴가 달린 탈 수 있는 모든 것은 ‘부우’라고 하는 듯합니다. ‘엄마뿌까’가 ‘엄마 차 타고 갔다.’라는 뜻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벌써 문장을 말한다기보다는, ‘엄마뿌까’를 통째로 한 단어(낱말)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하는 말에는 ‘엄마’ ‘아빠’ ‘엉아’ ‘임이(이음이)’ ‘함미(할머니)’ ‘응’ ‘떼떼뽀뽀(칙칙폭폭)’ 들이 있습니다.
2020. 2. 21
아이들이 구들방으로 놀러왔습니다. 이불 위에 장난감을 풀어놓습니다. 나는 짐짓 ‘그게 뭐니?’ 라고 묻습니다. ‘그것도 몰라. 어제 생일 선물로 받은 거잖아.’ 라고 따집니다. ‘그랬구나. 할아버지는 하늘에서 떨어진 줄 알았지.’ 하고 시치미를 뗍니다. 어제는 내 생일과 우리 생일이 겹쳐, 오늘 태어난 이음이 생일을 당겨, 자정이 가까워질 때까지 우리 집에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나 : ‘어제가 이음이 생일이었구나.’
이음 : ‘아니, 오늘이 내 생일이야.’
나 :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나’를 가리킴)
이음 : ‘아니, 내 생일이라고.’ (‘이음’이를 가리킴)
나 : ‘그러니까 내 생일이라고.’ (‘나’를 가르킴’)
이음 :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너가 아니고 나.
나 : <나도 이음이를 가리키며> 그래, 너 아니고 나 말이야.
거의 울상이 된 이음이는 ‘할아버지, 웃기려고 그러는 거지.’ 라고 말하더니, 느닷없이 ‘나 생일이 아니고 할아버지 생일이야.’ 라고 합니다. 이음이는 이렇게 거꾸로 말하면 제가 말하려고 하는, ‘오늘이 이음이 생일이라는 것’을 제대로 나타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니가 웃기려고 하는 거지. 어떻게 할아버지가 어제도 태어나고 오늘도 태어나니?’ 이음이는 거의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입니다.
2020. 2. 22
“오늘 낮에 이음이와 같이 쓴 이야기입니다. 이음이는 기뻐서 울 때도 있다고 합니다.”
이음이는 곤히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온누리가 잠든 듯한 고요함이 가느단 울음소리에 흔들립니다. ‘누구일까?’ 고개를 돌려 이 구석 저 구석 두리번거립니다. 엉금엉금 기어가 창문을 열어봅니다. ‘오르랑 오르랑’ 창가에 몰려와 다닥다닥 붙어있는 산개구리 울음소리만 방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잠이 덜 깬 두 눈에는 부스스한 햇빛이 어립니다. ‘이음아, 우릴 좀 살려 줘.’ 가만히 보니, 종이 위 어항 속에 갇힌 물고기 세 마리가 실낱같은 목소리로 애타게 소리칩니다. 이음이는 가엾은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하지.’ 이음이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종이 아래쪽에 강을 그리고, 그곳에다 물고기들을 쏟아줍니다. 물고기들은 꼬리를 흔들며 헤엄쳐 갑니다. 물풀 속에 숨어 잡히지 않았던 할머니 할아버지 물고기가 손자 물고기들을 꼬옥 안아줍니다. 이음이 얼굴에도 환히 웃음이 번집니다. 그러다 다시 종이 한 장을 가져다가 어항에 줄을 그어 화살표로 잇고 커다란 바다를 그립니다. 물고기 다섯 마리가 마음껏 뛰어놀기엔 이음이는 강이 답답해 보였나 봅니다. 바다에 풀어놓은 물고기들은 기뻐서 웁니다. 저희들 마음을 알아준 이음이가 무척 고맙습니다. 그 날 밤 이음이는 꿈을 꾸었습니다. 낮에 놓아 주었던 물고기들이 그림 속에서처럼 바다를 헤엄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해가 뜨고 초승달이 떠있는 하늘입니다. 물고기들은 파아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음이는 몸이 근질근질거립니다. 아래를 쳐다보니 몸에서 비늘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반짝거리는 비늘을 달고 물고기들과 함께 어깨를 겯고 이음이는 하늘을 마음껏 누빕니다. 이음이는 자꾸자꾸 꿈을 꾸고 싶습니다. 오늘 낮엔 부연히 미세먼지가 끼어 밖에 나가놀지 못하고, 방안에 갇혀 끄적끄적 그림만 그려야 했으니까요.
2020. 2. 25
비밀인 듯 나중에 보여준다더니, 깜빡하고 그냥 갔어요. 울림이가 쓴, 이렇게 긴 이야기글은 처음 마주해요. 왼손잡이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씨도 거꾸로 쓰지요. ‘화조새하라버지가딸각딸각우리장남감을가지고논다. 화조새하라버지이름은김종도.’ (화조새 할아버지가 딸각딸각 우리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화조새 할아버지 이름은 김종도.) ‘화조새’가 뭔지 모르겠어요. 뒷장에 ‘하라버지 애기’라고 쓰고, 새 한 마리가 젖병을 들고 있는 걸 보면 무슨 새 이름인가 봐요.
2020. 2. 26
내 생일에 건네 주지 못한 우리 선물이 엊그제 도착했습니다. 보동보동한 귀여운 손으로 내 손에 쥐어 주는 선물은, 이리저리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면 빛깔이 바뀌는 작은 마술 수첩입니다. 엄마 생일이 곧 다가옵니다. ‘엄마한테는 무슨 선물을 하지?’ 울림이가 말을 꺼냅니다. ‘엄마는 꽃을 좋아하잖아.’ 예쁜 꽃만 보면 엄마에게 꺾어 바치는 아이들이 떠올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가 말했습니다. ‘엄마는 밥도 좋아해.’ 라고 울림이가 말합니다. 그 말을 이어받아 이음이는 ‘엄마는 나도 좋아해.’ 라고 말합니다. ‘그럼, 이음이를 예쁘게 포장해서 엄마한테 선물하면 되겠네.’ 라고 말하니, 이음이는 무릎을 굽히고 두 팔을 오무려, 보이지 않는 상자 속으로 들어가는 흉내를 냅니다. 울림이도 뒤따라 ‘엄마는 나도 좋아하고 우리도 좋아해.’ 라고 합니다. 이렇게 아이들은 엄마의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다.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합니다. 이음이가 선물 상자 깊숙히 들어가 꼼짝하지 않은 지는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사진은, 비를 맞고 있는 우리 저전거입니다. 얼른 달려가 나무난간에 옮겨 놓았습니다. 아내는, 비 맞는 자전거를 보니 마음이 아프다고 했어요.
2020. 3. 2
아이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다녀갔습니다. 오늘이 엄마 생일이기도 하지만, 불현듯 손자들이 보고싶어 강화도에서 단숨에 달려왔습니다. 아이들이 어찌 저리 곱게 자랐을까. 어렴풋이 나는, 엄마 아빠의 포근한 품과 할머니 할아버지의 고운 손길을 떠올렸는데, 이틀 동안 함께 지내며 그분들의 봄햇살 따스한 사랑을 내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음아, 장구 배워 볼래? 네가 배운다면 할아버지가 가져다 줄게.’
나처럼 아이들을 윽박지르지 않고, 아이들 의견을 묻고 기다려주는 외할아버지 속에서, ‘작은나무’라는 인디언 소년 이야기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에 나오는 할아버지가 겹쳐 왔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손자가 부르면, 앞서가던 걸음을 멈춘 채 손에 든 짐을 내려놓고 몸을 낮춰 이야기를 듣던 할아버지 ... 엄마에게도 높임말을 쓰고, 손자들을 하늘처럼 섬기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우리 구들방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가셨습니다.
2020. 3. 7
오늘 겨우내 잠 든 밭을 깨워 풀을 뽑고 거름을 얹고 흙을 뒤집어 감자를 심을 두둑을 만들었어요. 해마다 하는 일이지만 또 낯설고 농사일은 늘 서툴기만 합니다. 아까시나무에는 어느새 날아왔는지 쓰스빙 쓰스빙 곤줄박이 한 마리가 지저귀고, 오늘도 아이들이 돌계단을 올라 밭으로 달려옵니다. 막내 ‘우리’도 꽥꽥 소리를 지르며 뛰어옵니다. ‘너도 형들을 닮았구나.’ 하니, 뒤따라오던 이음이가 ‘할아버지, 내가 더 크게 소리질러 볼게.’ 하더니,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입만 크게 벌립니다.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뒤로 쓰러지는 척합니다. 이음이는 지난해 내가 해 준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구가 도는 소리는 너무 커서 우리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했거던요.
아이들과 ‘얼음땡놀이’를 했습니다. 놀이 규칙은 늘 아이들이 정하기에 우리는 웃기만 하다 끝이 납니다. 하루 해가 저뭅니다. 초롱산 위로 열사흘 달이 떠오르고, 집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우리’는 손수레에 태우고 이음이와 울림이는 걸려서 데려다 줍니다. 우리는 헤어질 때 손을 흔들지 않고, 손바닥을 펴 코 밑에 대고 인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경찰이나 군인들이 이마에 대고 하는 인사는, 언제인가 엄마가 무섭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2020. 3. 9
겨우내 마늘밭을 덮어 두었던 짚을 걷었어요. 하얗고 얇은 막 속에서 뾰족이 마늘 싹이 돋아났어요. 파르스름하니 햇빛이 어른거려 더욱 고왔어요. 오늘은 밖이 따스한지 이음이와 우리가 가운뎃머리를 묶고 왔어요. 저희들끼리 꿩의 머리라고 깔깔대더니, 이음이가 닭 흉내를 내어 한참 웃었어요. 울림이가 오늘은, 구덩이를 파놓고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얹고 그 위에 흙을 덮고는 나를 몰래 빠뜨리려고 했어요. 운이 좋게 흙을 너무 두텁게 덮어 빠지지는 않았지만 울림이 장난이 날마다 늘어요. 동강할미꽃에 벌이 날아들고 드디어 숲길에 생강나무 노란 꽃이 피었어요. 김유정 소설 ‘동백꽃’(생강나무꽃을, 강원도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지요.)에서처럼 알싸한 꽃내가 숲을 흔들어 놓겠지요. 잘 지내요.
2020. 3. 14
‘이러다간 할아버지가 되겠다.’ 이음이가 내뱉은 말입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된다며 아이들 등을 떠미는 내말에, 이렇게 멀어서 산에 갔다 오면 할아버지가 다 되어 있겠다는 뜻입니다. ‘그럼, 할아버지는 어떻게 되냐?’ 웃으며 되물었지만 아이들은 여간 힘들지 않나 봅니다. 점심을 먹고 우리 집으로 달려온 아이들에게, ‘오늘은 초롱산에 한 번 올라가 볼까?’ 하며 가볍게 던진 말이었는데 정말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숲이 우거져 나무하러 다니던 길은 없어진 지 오래이고, 길도 없는 가파른 비탈을 오르며, 고라니 똥과 멧돼지가 파헤쳐 놓은 구덩이도 보고 가랑잎을 뚫고 나온 현호색과 가느단 나뭇가지에 봉긋이 솟은 진달래 꽃봉오리도 만났습니다. 산기슭에서는 보이지 않던 굴참나무도 눈에 띕니다. 아, 커다란 매 두 마리를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은 없습니다. 꼭대기가 가까워지자 아이들 키를 훌쩍 뛰어넘는 조릿대 사이로 큰 절벽 아래 너른 빈 터가 나오는데, 여기저기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는 걸 보니 마을사람들이 말하는 절터인가 봅니다. 이음이는 엄마가 보고 싶다고 합니다. 좀처럼 그런 말을 하지 않는 울림이도 엄마를 보고 싶어 합니다. 어디에선가 아이들을 부르는 엄마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렇게, 검은 돌에 ‘초롱산 339M 홍성군’이라고 적혀 있는 초롱산 꼭대기에 올라섰습니다. 아이들이 살던 홍성 읍내 부영아파트도 보이고 오른쪽으론 예산군 광시면과 멀리 예당저수지 물줄기도 보입니다. 네 시간 남짓 긴 산행, 아이들은 지금쯤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잠에 곯아떨어졌을 겁니다. 초롱산 산신령을 만나지 못해 못내 아쉬워 하는 이음이는, 어느새 머리칼이 새하얘지고 꿈속에서 산신령 할아버지 친구를 만나 실컷 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2020. 3. 25
울림이가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도둑이 있었어. 거지 집에 물건을 훔치러 갔는데 아무것도 없어, 닭깃털 하나를 뽑아왔어. 하나로는 모자라서 다시 거지 집에 가서 닭 한 마리를 훔쳐와 치킨을 해먹고, 깃털을 다 뽑아 그 깃털로 이야기를 썼는데,(아이들은 깃털로 잉크를 찍어 글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지금 할아버지에게 들려 준 이야기야.’ 그러곤 그 거지가 바로 도둑이고,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한대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울림이가 들려준, 도둑이 거지가 사는 곳으로 도둑질하러간 장면만 떠올려도 참 재미있습니다. 어느 날 도둑들이 모였습니다. 한 늙은 도둑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늙은 도둑 : ‘우리, 거지네 집을 털러갈까?’
젊은 도둑 :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무것도 없는 집으로 무얼 털러 간다는 말이에요.
늙은 도둑 : 우린 오랫동안 셀 수 없이 부자집을 털어 왔잖아. 많이 있는 곳을 터는 것보다 아무도 없는 곳을 터는 것이 진짜 실력 있는 도둑이 아닐까.
젊은 도둑은 뭔가 아리송하지만, 늙은 도둑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젊은 도둑 : 한데, 재미가 없잖아요. 그 곳에는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으니까요. 높다란 담도 뾰족한 창살도 밤하늘을 찢는 개 짓는 소리도 더구나 cctv도 없잖아요.
늙은 도둑 : 그러니까 말일세. 아무도 지키지 않으니까 오히려 더 아슬아슬하지 않을까. 자신 안에 쌓아둔 보이지 않는 담을 넘어야 하고, 시시각각 자기를 돌아봐야 하니까 말이야. 이를 일러 ‘허공에서 무엇을 얻는다.(득허 得虚)’라고 하네.
내가 이렇게 뻔한 고리타분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 ‘그냥 재미로 한 얘기야.’ 하며, 울림이는 내가 쌓아올린 이야기의 탑을 발로 툭 차 뭉개버리겠지요.
사진은, 얼마 전 엄마 생일 때 울림이가 선물한 축하 글입니다.
2020. 4. 5
어제 그제 이틀 동안 어디로 나들이를 떠났는지 아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부엌 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우리가 그동안 아이들에게 의지하고 살았나 봐요.’ 라고 하는 아내 목소리에 쓸쓸함이 묻어납니다. 아이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초롱산 골짜기가 텅빈 듯합니다. 자다가 눈을 떠서도, 엊그제 놀다가 다친 우리가 눈에 어른거립니다.
쪼르르 언덕길 따라 내려가는 공을 붙잡으려다가 그만 엎어졌습니다. 얼른 달려가 일으켜 세우자 금방 울음은 그쳤는데 코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안고 뛰어와 휴지로 왼쪽 코도 막고, 부드러운 수건에 물을 묻혀 핏자국을 닦아주었는데, 다행히 피는 그쳐 있었습니다. 입가로 피가 흘러들어가, 이렇게 헹구어 내라고 내가 먼저 물을 마신 뒤 입안에서 우물우물하다 뱉어버리니, 우리가 환히 웃습니다. 우리에게 물을 주니 우물우물하기도 전에 삼켜 버리곤 웃습니다. 다시 물을 주자 또 삼키곤 재미있는 듯 웃습니다. 엄마가 놀랠까봐 아내에게 데리고 가니. ‘우리가 콧등에 팥을 갈았네.’하며 꼭 안아줍니다.
2020. 6. 9
나는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도 자주감자처럼 곁에서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에요. 아이들이 ‘아랫집 할아버지, 하비’라고 부르는 나는, 키가 조금 더 크고 힘이 조금 더 세고 풀이나 나무 이름을 몇 가지 더 아는 늙은 친구일 뿐이지요. 가끔 우리를 손수레에 태워 숲길 한 바퀴 돌고, 동화책을 함께 읽고, 뽕나무 윗가지를 잡아당겨 아이들이 오디를 딸 수 있게 해 주고, 코감기가 다 낫지 않았는지 줄줄 흘러내리는 울림이 콧물을 보드라운 뽕잎이나 칡잎으로 닦아주는 일이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모두예요. 하지만, 언덕에 풀을 베고 있을 때 ‘할아버지, 댕댕이덩굴은 베지 마.’ 하고 울림이가 말할 때나, 이음이가 ‘지칭개, 소루쟁이, 고마리’ 풀이름을 알고,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우리가 고 조그만 입술로 ‘오디’라고 소리내어 말할 때, 내 마음 잔잔히 빛나는 기쁨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지요.
2020. 6. 10
며칠 전에 아빠가 뜰에 ‘방방’(트램펄린)을 세워주었어요. 아침에 눈을 떠서도 한낮에도 쉴 새 없이 아이들이 올라가 뛰고 있어요. 멀리서 보면 벼논에서 톡톡 튀는 메뚜기들 같고 나뭇잎에 튕기는 햇살 같아요. 이틀날, 어른들도 탈 수 있다며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가 아내와 나를 데리러 왔어요. 아이들이 통통 뛰니까, ‘솜이’(고양이)도 아이들이 뛸 때마다 아래로 쳐지는그물을 잡으려고 밑에서 함께 폴짝폴짝 뛰고 있어요. 한참 뛰어놀다가 아내는 어지럽다며 먼저 내려가고, 아이들은 저희들은 누워 있을 테니 나보고 세게 뛰라고 해요. 내가 뛸 때마다 아이들은 엎어졌다 뒤집어지기도 하고, 서로 머리를 부딪혀 내가 그만하려고 하면, 자꾸 ‘앵콜’이라고 해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되풀이하다 달아나듯이 빠져나왔어요.
2020. 6. 18
오늘쯤은 이 얘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엊그제 아침 엄마는 소리내어 섧게 울었어요. 아내는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얼른 삼태기로 덮었어요. 아이들은 지우 차로 학교와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나는 숲속에 구덩이를 파고 머리를 해 뜨는 쪽으로 해서 눕혀 부드러운 흙으로 덮어주고, 커다란 돌을 얹어 놓았어요. 엄마는 무서운 꿈을 꾸었어요. 하루종일 엄마 차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어요. 저녁 늦게 부엌 불이 켜지지 않아 걱정이 되었어요. 엄마는 아이들과 함께 이 커다란 슬픔을 어떻게 견디었는지 모르겠어요.
잠깐 우리 곁에 다녀간 아기천사. 한 쪽 눈이 파아랗고, 털이 솜처럼 하얘 아이들이 ‘솜이’라 불렀던 고양이가 하늘나라로 갔어요. ‘엄마가 왜 저렇게 울어?’ 하고 우리에게 물으니, ‘엉아 (학교에) 가서.’ 다행히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어제는 아이들이 솜이를 묻은 곳에 데려다 달라고 해서 숲길을 올라가니, 엄마는 또 울었어요. ‘엄마, 또 울어.’ 하며 울림이가 저만치 내려와 혼잣말인 듯 얘기해요. 고맙다고, 아내와 나에게 인사를 온 엄마는, 슬픔으로 여윈 두 손으로 솜이를 묻은 내 손을 꼭 잡았어요.
2020. 6. 28
며칠전 울림이 친구 산들이가 놀러왔어요. 나는 무슨 말이라도 걸려고, ‘산들아, 어떻게 왔어?’ 하고 물었어요. 아무 대답이 없어, ‘걸어서 왔어?’ 또 대답이 없어, ‘그러면, 날아서 왔어? 우리 아이들은 날마다 날아다니는데.’ 하니, 어이가 없다는 듯 산들이는 고개를 돌려 딴 데를 쳐다보고 있어요. 혼자 괜히 멋쩍어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려고, ‘우리 울림이는 순간이동도 해.’ 하니까, 곧바로 ‘내가 언제?’ 하며 울림이는 시치미를 딱 잡아떼고, 이음이마저 아니라는 듯 얼굴이 굳어져 있어요. ‘분신술도 하는데 ...’ 내가 말끝을 흐리며 이야기하는 동안, 아이들은 나무난간 계단을 뛰어내려가 멀리 가버렸어요. 울림이와 이음이는 나한테 올 적에만, 겨드랑이 깊숙이 감춰 두었던 눈부신 날개를 펴 날아오는가 봐요. 팔꿈치는 겨드랑이에 붙인 채 손바닥은 쫙 펴서 앞으로 내밀고 이리왔다저리갔다 하며 순간이동을 하던 이음이가 눈에 어른거려요.
2020. 6. 29
엊그제는 아이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오셔서 저녁을 같이하자고 해서, 언덕 위 통나무집으로 올라갔어요. 이음이가, 형이 축구하다가 시멘트 바닥에 살이 쓸렸다고 했는데, 울림이는 안방 낮은 걸상에 앉아있었어요. 드러내놓은 무릎에 까진 상처가 무척 쓰라려 보였어요. 울림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며 포켓몬카드 몇 장을 골라 건네주며 자랑을 했어요.
저녁을 먹으며 술 한 나누는데, 느닷없이 방안에서 울림이 울음소리가 터져나왔어요. 일하다 조금 늦게 온 아빠가 무릎에 난 상처를 소독해 주고 있나 봐요. 저렇게 자자러지게 우는 소리는 처음 들어봐요. 이사 온 첫해에는 이마를 몇 바늘 꿰맬 만큼 많이 다쳤어도 저리 울지는 않았는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오셔서 그런 것일까요. 그런데 아까부터 이음이 얼굴 표정이 야릇해요. 자랑스러움일까, 우쭐거리기라도 하는 걸까. 터져나오는 기쁨을 참고 있는 듯하지만, 비싯비싯 눈가로 삐져나오는 웃음은 어쩔 수 없나봐요. 드디어 형이 울음을 터뜨린 거예요. 좀처럼 울지 않던 형이, 그것도 오랫동안을. 조그만 일만 터져도 울기부터 하는 이음이는 갑자기 키가 커진 듯, 위에서 아래로 형을 내려다보는 기분이었을까요. ‘야, 울림이 너, 이제 사람 됐다. 울기도 하고.’ 라며 놀리는 듯 말하니, 한참만에 방에서 나오는 울림이는 멋쩍은 듯 배시시 웃어요. 아, 나에게도 놀림거리가 생겼어요. 울림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와서 자랑하듯이, 나는 가끔 주머니에서 ‘놀림감’을 꺼내어 울림이를 놀려 먹을 거예요.
2020. 7. 5
‘구름 아저씨, 비껴 주세요.’ 달이 구름에 가리자, 이음이가 한 말이에요. 어느덧 나는 동화 속으로 들어왔어요. 동화 속에서 ‘우리’가 뭐라뭐라 하면서 엄마 옷자락을 끌어당겨요. 뭐라뭐라 달이 나왔으니 같이 가서 보자는 이야기예요. 이럴 때 구름을 사이에 두고 달님과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한다고 해요.
뜰에 서서 ‘우리’가 웃고 있어요. 아이들 이모 지원씨가 ‘우리’가 웃는 모습이 나와 닮았다고 해요. 지우 어릴적 모습이 떠올라요. 저리 달님처럼 환히 웃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친구 하나 없이 사람을 만나지 않고 구석에 혼자 갇혀 있어요. 가끔 지우는 우인이의 아픈 그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우는 늘 아이들 외할아버지와 술 한 잔 하고 싶어해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한결같이 섬기는 마음으로 마주하는, 아이들 외할아버지가 지우는 편한가 봐요. 아이들 외할버지는 마냥 허허로우시기만 하시지 않아요. 무심한 듯 하시지만, ‘지우씨, 도자기 시작해야지요. 너무 기다리면 안 돼요.’ 라고 하실 때는, 지우를 꿰뚫어 보는 듯해요.
아이들은 마루난간에서, 지우가 가르쳐 준 대로 맥주 깡통을 꽉 눌러 발에 끼고 깡통로봇처럼 뛰어다니다가, 마당으로 집어 던지고 뜰에서 축구를 하기도 해요. 일하다 늦게 온 아빠가 술 한 잔 하는 동안, 엄마는 우리 집에서 아이들을 씻기고 밤이 이슥할 때야 돌아갔어요. 지우는 혼자 남아 술을 마시고 있어요. 실은 오늘 아이들 외할아버지가 둘째 따님 지원씨를 데리고 온다고 해서 지우는 기다리고 있었어요. 지우는 아이들 외할아버지와 술을 주거니받거니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지도 몰라요.
2020. 7. 9
밭을 내려오는데, 뜰에 세발자전거에 앉아 있던 ‘우리’가 나를 쳐다봐요. 내가 손을 흔드니까, 엄마한테 고개를 돌려 무어무어라고 해요. 그 전 같으면 같이 손을 흔들었을 텐데, 이제 제법 말을 할 줄 아니 엄마한테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나무계단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지, 손으로 무엇을 만지작거리는 엄마는 가만히 웃음을 지어요. ‘우리’가 뭐라고 했을까? 엄마의 고운 그늘 아래 ‘우리’가 피어나고, 오늘 아침 이 세상 모든 꽃들이 활짝 피어났어요.
2020. 7. 12
온종일 하늘이 끄무레하더니 저물녘 빗줄기가 조금 세차지자 꼼짝도 않던 아이들이 꼬물꼬물 기어나와요. 빨강 우산은 울림이, 흰 우산은 이음이, ‘우리’는 분홍 우산. 우산을 빙빙 돌리는 울림이, 우산은 뒤집어지고, 마당에 쭈그려앉아 ‘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이음이, ‘우리’는 뒤늦게 콩콩콩 나무계단을 내려오고 ... 마치 이웃집토토로 마을에 사는 아이들 같아요. 느슨해진 거친 현을 긁는 치렁치렁 늘어진 목쉰 빗소리가, 창을 사이에 두고 아이들이 사는 나라에는 피아노 맑은 건반 위를 통통 뛰어다니며 빗방울이 춤추고 있어요.
2020. 7. 15
‘나, 홀수 짝수 알아.’ 이음이가 말을 꺼냈어요. 우인이가 ‘내가 문제 낼게 알아맞혀 봐.’ 라고 말했어요.
우인 : 3
이음 : 홀수
우인 : 7
이음 : 홀수
우인 : 8
이음 : (한참 생각함.)
나 : 바로 옆에 있으니까.
이음 : (다시 생각하다가) 홀수
우인 : 틀렸어.
이음이는 홀수 짝수 홀수 짝수 손가락을 꼽아 셈하는데, 잘못 세었나 봐요. 우인가 다시 해 보자고 했어요.
우인 : 5
이음 : 홀수
우인 : 10
아내 : (뒤에서 우인이 몰래 양손 손가락을 서로 짝지어 보여줌)
이음 : 짝수
우인 : 9
아내 (다시 손가락을 붙여 하나가 짝이 없음을 보여줌)
이음 : 홀수
우인 : 야! 이음이 너, 학교 안 가도 되겠다.
이음 : 나, 학교 안 가.
다음에 무슨 말이 이어질지 몹시 궁금했어요.
이음 : 나, 어린이집에 가.
나는 무슨 말을 기다린 것일까요? 이음이가, 나는 다 아니까 커서 학교에 안 가도 된다는 그런 말 ... 이음이는 한 방에 날려버렸어요.
2020. 7. 16
‘우리’를 손수레에 태워 숲길을 오르는데, 참 오랜만에 이음이가 함께 태워 달라고 해요. 이음이는 내가 무릎이 아프다는 것을 알거든요. ‘그래, 타.’ 하니까, 이음이가 ‘할아버지, 괜찮아?’ 라고 묻자,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도 따라 ‘괜•찮•아?’ 라고 해요. ‘우리’는 앞으로 당겨가고, 이음이는 뒷자리에 앉고, 이음이는 다시 ‘할아버지, 왜 빨리 낫지 않아?’ 라고 물어요.
나 : 나이가 들어서 그래.
이음 : 알아, 늙으면 죽을 수도 있잖아.
나 : 그럼, 김종철 선생님도 돌아가셨잖아.
이음 : 산책하다 ...
이음이는 엄마 아빠에게 들어, 선생님이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어요.
나 : 그 전에 잠을 통 못 주무셨대. 밤이면 귀에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이음 : (소리없이 웃으며) 진짜 비행기가 지나간 것 아니야.
나 : 다른 사람은 못 들었는걸. 그런 병을 ‘이명’이라고 해.
이음 : 나도 병 이름 알아.
나 : 니가 무슨 병 이름을 알아? (니가 어디가 아프다고 병 이름을 아느냐고 물은 거예요.)
이음 : 쥐병.
나 : 쥐병?
나는 순간, 오랫동안 잘 낫지 않는 ‘지병’이란 말일까, 또 쥐를 잡아넣은 병일까 하고 생각했어요. 이음이가 ‘안전교육 책에서 봤는데.’ 라고 하자, 그때서야 발에 쥐가 나는 것을 말하는구나 하고 눈치챘어요.
이음 : 어떤 아이가 잘난 체한다고 멀리 헤엄쳐 가다가 갑자기 발이 ...
이야기를 다 끝내기 전에 집에 닿았어요. 손수레를 나무난간에 걸쳐 ‘우리’를 내려주고, 이음이는 짐처럼 쏟아 달라고 해서, 마당에 부어 놓고 돌아왔어요.
2020. 7. 18
어둑해진 뒤에서야 내일 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비설거지를 했어요. 낮에 아내가 꽃밭에서 뽑아놓은 풀이 가득찬 손수레를 비우고 돌아오는데, 풀숲에서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반딧불이가 반짝이고 있었어요. 풀잎 사이로 반짝이는 모습이 구름 사이로 비치는 아슴한 별빛 같았어요.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아쉬운 듯 발걸음을 뗐는데, 그 때 나는 아이들 생각을 했나 봐요. 내 마음이 이어졌는지, 방에 들어오자 아내가, 아이들한테서 반딧불이 봤느냐고 전화가 왔다고 해요. 얼른 전화를 걸어 어서 밖으로 나오라고 했어요. 그 때 시각이 8시 38분이었어요. 먼저 나가서 숲길에서 기다리는데, 울림이와 이음이가 손전등을 들고 뛰어내려왔어요. 그새 날아갔는지 사그라진 불빛이, 숨죽여 기다리면 되살아나고, 가슴이 조마조마했어요. 우리와 엄마, 이모 지원씨도 나왔어요. 우리는 나를 보자마자 ‘한미(할머니)는 어디 있어?’ 하고 아내를 찾아요. 울림이와 이음이는 반딧불이를 잡고 싶어하는데, 손전등을 비추면 보이지가 않았어요. 손전등을 들고 뛰어다니던 아이들을 보고 지원씨가 혼잣말인 듯 너희들이 반딧불이 같다고 해요. 우리가 달려와 엄마 다리를 꽉 붙잡고 있길래, ‘어, 반딧불이가 날아와 엄마 다리에 붙었네.’ 하고 내가 소리치자, 어느새 울림이는 손전등을 가랑이 사이에 거꾸로 끼고 반딧불이 흉내를 내며 잰걸음으로 숲길을 오르내려요. 이음이도 따라하고 꽁무니에 불을 켠 채 아이들 반딧불이가 밤하늘 밝히며 언제까지나 동동 떠다니고 있었어요.
뒷이야기
다시 반딧불이를 찾아나선 아이들을 두고 집에 들어왔는데, 밖에서 울림이가 반딧불이 애벌레를 찾았다고 크게 소리를 쳤어요. 아까 엄마가, 반딧불이가 날아가지 않고 한곳에 머물러 있는 걸 보면 애벌레 같다고 했는데, 끝내 울림이가 찾아냈어요. 손전등을 비추니 밥그릇 뚜껑에 담긴 반딧불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고 꽁무니에 흐릿한 불빛을 달고 기어가고 있었어요. 나중에 엄마한테 문자가 왔는데, 애벌레가 아니고 날개가 퇴화한 늦반딧불이 암컷이라고 해요.
2020. 7. 19
아이들이 놀러왔어요. 신발에 붙인 스티커 인형을 자랑하더니, 아내에게도 보여주려고 할머니를 찾아요. 내가 ‘여보!’ 하고 부르자, 이음이도 ‘여보!’ 하며 내 흉내를 내고, 우리도 따라 ‘여보!’ 하고 아내에게 달려가요. ‘우야(아이구)! 내 새끼들.’ 뒤꼍에서 일하다 나온 아내가, 흙 묻은 손을 털고 아이들을 꼭 안아줘요. 이제 제법 말문이 터진 우리가 ‘한미, 이리 와 봐.’ 라고 할 땐, 아내는 몸이 다 간지럽다고 해요. 신발 왼쪽 오른쪽을 바꿔 신은 우리를 보니, 이음이 생각이 나요. 발이 불편해 보여 제대로 신겨 줘도, 다음날이면 이음이는 또 바꿔 신고 나타나요. 배움은 때가 있나 봐요. 그 날도 신발을 바꿔 신고 와서, 이음이에게 발 모양을 손으로 그려 보여 주고는 이렇게 신는 거라고 가르쳐 준 뒤로, 다시는 바꿔 신지 않았어요. 오늘도 이음이에게 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었는데, 우리는 세 살이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겠지요. (엊그제 일어난 일이에요.)
2020. 7. 27
우리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하비, 어디 있어?’ 하길래, 밭에 있다고 하니 전화를 끊어요. 다시 전화가 와서 뭐라뭐라 하는데, 곁에서 엄마가 ‘하비, 놀러 갈게.’ 라고 하니, 우리도 따라 ‘하비, 놀러 갈게.’ 라고 말해요. 밭일을 멈추고 계단 쪽으로 마중을 갔는데, 비옷을 입고 나를 쳐다보자마자 ‘하비!’ 라며 온몸으로 기뻐해요. 형들은 어디 갔는지, 들깨를 모종하는 내 곁에서 혼자 놀아요. 흙을 파선 두꺼비집 놀이도 하고, 흙을 집어 위에서 내 손에 뿌리며 ‘비가 온다.’ 라고도 해요. 손수레를 태워 달라기에, 아침에 마을일을 나간 할미한테 가자고 하니까, 아까 엄마차 타고 오다가 할미를 봤다고 해요. 마을회관 지나 길가에 풀 뽑은 흔적 따라 시내버스가 다니는 큰길까지 나왔으나, 아내는 보이지 않았어요. 이제 집에 갈까 하니 싫다고 해요. 내려오는 데만 삼십 분 남짓 걸렸을 거예요. 나중엔 우리가 ‘하비 집 밥 먹자.’ 해서 겨우 길을 돌렸어요. 우리는 맨밥을 구운 김에 싸주어도 잘 먹거든요. ‘하비, 엄마하고 엉아하고 이모하고 할미하고 같이 밥 먹어.’ 라고 할 땐 마음이 싸아했어요. 지나가던 트럭이 멈추더니, 마을아주머니가 ‘혼자예요?’ 하길래, 오늘은 형들이 함께 오지 않아 물어보시는구나 해서 ‘예’ 하고 대답했는데, 생각해 보니 ‘손자예요?’ 하고 물었던 거예요.
2020. 7. 30
이음이 말투가 떠올랐을까요. 낯선 작가에 내용도 모르는 ‘미움’이란 그림책을 선뜻 주문한 까닭은. 혼잣말인 듯 무뚝뚝한 말투, 굵은 금으로 그려진 그림이 좋았어요. 책을 주문하면서 먼저 아이들에게 읽어줄 생각을 했어요. 아이들이 오면 나도 그림책 있다며 자랑하고, 무뚝뚝한 말투로 읽어줄 거예요. 아이들은 날마다 잔치에요. 비가 와도 잔치, 비가 그쳐도 잔치, 엊그제는 이모 지원씨가 홍성에 방을 구했다며 잔치 ... 이번주 토요일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와서 또 잔치가 벌어지겠지요. 우리 목소리는 잠에서 막 깨어난 새소리 같아요. 벌써 우리집 마당 한바퀴를 돌고갔어요.
2020. 8. 3
엊그제는 아이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이모 지원씨가 왔어요. 이음이가 먼저 달려와 식구들이 온다고 알려주었어요. 이윽고 외할아버지와 ‘우리’가 문으로 들어섰어요. ‘우리’는 신발을 벗더니 문 쪽으로 앞을 두어 가지런히 놓았어요. 이제는 왼쪽 오른쪽 신발을 가려 신은 줄 아는 듯해요. 엄마가 가르쳐 주었을까. 형들을 따라한 것일까. 며칠 전만 해도, 한 쪽 신발은 날아와 대청 문턱을 넘고 다른 쪽은 뒤로 내팽개쳤는데.
‘우리’는 마루를 빙빙 돌아요. 외할아버지 까슬한 수염도 만져 보고, 조심스레 지우의 빡빡 깎은 짧은 머리칼도 만져보고, 앉아있는 내 등 뒤에 와 목을 움켜잡고 매달리기도 해요. 아이들은 안방에 들어가 우인이와 카드놀이를 하다가 ‘벼랑 위의 포뇨’라는 만화영화를 보고, 외할아버지는 식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일어서셨어요. 빗속에 처음 피어난 날, 짙은 보랏빛으로 새치름하게 보였던 큰꽃으아리 꽃잎 여섯 장이, 닷새가 지나자 빛이 엷어지고 너부데데한 얼굴을 하고 있어요.
2020. 8. 6
비바람이 잠깐 그친 사이, 무너진 길을 돌아보고 오다 엄마 차를 만났어요. 뒷자리에 ‘우리’가 혼자 타고 가길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디 가느냐고 물었어요. ‘떼떼뽀뽀엄마뿌’ 라고 하길래, 속으로 ‘엄마 차를 타고 어디 간다는 말이구나.’ 라고만 짐작했어요. 엄마가 말을 이어받아 지원이가 기차역에 와서 데리러 가는 길이라고 했어요. 헤어지고 숲길을 올라오다가 그 때서야 생각이 났어요. 아, 내가 왜 ‘우리’ 말을 못 알아들었을까, ‘우리’는 제 생각을 정확히 나타낸 것이었어요. ‘엄마 뿌(차) 타고 떼떼뽀뽀(기차) 역에 간다.’는 말을 한 거예요. ‘떼떼뽀뽀’를 먼저 꺼낸 것은 기차라는 말을 먼저 꼭 하고 싶었던 거예요. 내가 알아들었으면, ‘우리’가 얼마나 좋아했을까. 아이들 몸짓 하나 말 한 마디에는 다 뜻이 있는 줄 알면서도 내가 놓친 거예요. 새벽 숲을 뒤흔드는, 너울 같은 큰바람에도 오늘 아침 큰꽃으아리 나머지 두 송이가 피었어요.
2020. 8. 10
엊저녁 저희 집에 와서 ‘우리’가 처음 그린 그림이에요. 마치 바위에 새겨 놓은 듯한 암각화 속엔, 엄마, 할머니, 우인이 이모, 엉아, 강아지, 엄마 차, 아빠 차 들이 있어요. 그림 속,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가며, 짚신벌레 같은 것이 셋이 있는데, 가운데 가장 크고 긴 것이 나를 그린 거예요. 짚신벌레 옆으로 위로 아래로 가늘고 긴 털은 손발이고요. 암호 같아 보이지만, 다시 만나 ‘우리’에게 물어보면, 누굴 그렸는지 하나 하나 다 알아맞힐 것 같아요. (아, 아래 종이가 찢긴 곳에도 짚신벌레 하나가 더 있네요.)
2020. 8. 17
금방이라도 눈이 감길 듯해요. ‘우리, 너 졸리는구나.’ 차 옆자리에 앉아 내가 놀리면, ‘아니.’ 하곤 눈에 힘을 주어 동그랗게 떠요. 또 눈이 감기고 내가 졸리는구나 놀리고 ‘우리’는 아니라고 하고, 몇 차례 그러다 쏟아지는 잠에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는 ‘우리’는 잠이 들어요. 어제 ‘우리’네 식구들과 예산출렁다리로 나들이를 가, 내포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엊그제는 ‘우리’가 전화를 걸어 ‘하비 집에 가서 맛있는 거 같이 먹어.’ 해서 기다렸는데, 텃밭에서 따서 삶은 옥수수 한 봉지를 가지고 와서 나누어 먹었어요. 오늘은 뒷마당에 엄마 아빠가 만들어 놓은 실내수영장에 가서 첨벙첨벙 물놀이를 했어요. 물 가운데 서서 부르르 몸을 떠는 ‘우리’가 추워 보여, ‘우리, 너 춥지.’ 하니까 어제처럼 아니라며 ‘우리’는 웃음을 지어 보여요.
2020. 8. 24
여름방학이 끝나고, 어제는 엄마 차를 타고 우인이를 학교 사택에 데려다 주고 왔어요.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침에 먼저 일어난 아빠가 ‘우리’ 보고 엄마를 깨우라 하니, ‘우리’가 ‘엄마 혼자 일어날 수 있어.’ 라고 하더래요. 앞 운전석에 엄마, 바로 뒷자리에 타고 가는 ‘우리’ 모습이 마치 영화 한 장면 같아요.
2020. 8. 26
바람의 끝자락일까. 싸리비로 쓸듯 벼논을 쓸어가면 사그락사그락 소리가 나요. 아이들은 아직 오지 않았어요. 어제 홍성읍내 지원 이모네 집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온다며, 나는 어느 구석에서 잘 거라며 이음이가 들떠 얘기했는데 ... ‘우리’가 받쳐놓고 간 자동차만 마당에 외롭게 서 있어요. 지금은 산자락에 숨겨두고 있지만, 곧 여울처럼 큰바람이 온산을 뒤흔들어놓겠지요. ‘사각사각’의 본딧말이 ‘사그락사그락’인데, 이런 뜻들을 지니고 있어요. ‘벼, 보리, 밀 따위를 잇따라 벨 때 나는 소리’ ‘눈이 내리거나 눈 따위를 밟을 때 잇따라 나는 소리’ ‘연한 과자나 배, 사과 따위를 자꾸 씹을 때 나는 소리’ ‘갈대나 풀 먹인 천 따위의 얇고 빳빳한 물체가 자꾸 스칠 때 나는 소리’ ‘종이 위에 글씨를 잇따라 쓸 때 나는 소리’
2020. 9. 4
아이들이 놀러왔어요. 울림이는 그냥 뛰어서, 이음이와 ‘우리’는 하늘이 맑고 파란데 우산을 쓰고 달려와요. 아이들과 함께 우산바랭이 풀로 우산을 만들며 놀았어요. 어제는 빌궁 삼촌네 가서 저녁을 먹고 왔대요. 옥원이 이모는 지원이 이모 집에서 자고, 오늘 데리러 간다고 해요. 걸상에 앉았던 울림이가 혼자 구구단 몇 개를 외더니, 나에게 ‘6*3’은 하고 물어봐요. ‘18’하고 대답하니, 아니라고 해요. 다시 ‘2*9’는 하길래 ‘18’이라고 하니 아니라며, ‘29아나(이구아나)’라고 해요. ‘6*3’은 ‘63빌딩(육삼빌딩)’이래요. 나도 어릴적 생각이 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얇은이(홀쭉이를 가르키는, 이음이가 쓰는 말)는?’ 하고 물었어요. 곰곰이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비사이로막가’라고 일러주었어요. 앞마당에서 풀을 뽑고 있는 엄마 재채기 소리가 들려오자, ‘우리’가 물어요. ‘이게 뭐지?’ 그러곤 얼마 있지 않아 쪼르르 엄마한테 달려갔어요.
2020. 9. 8
어젯밤 별 너댓 송이가 바람에 밀려와 반짝이더니, 눈부신 햇살을 안고 ‘우리’가 달려오고 있어요. ‘우리 너, 머리 깎았구나.’ 하니 ‘이모가 깎아 줬어.’ 라며 또렷이 대답해요. 왼쪽 얼굴에 보이지 않던 상처가 있어 물어보니, 이음이가 곁에서, ‘우리’가 나무 계단에서 자전거와 함께 넘어져서 그렇다고 해요. 이음이는 짧게 깎은 단발머리가 너무 싫다고 해요. 아빠 젊었을 때처럼 허리까지 기르면 좋겠냐고 하니, 발바닥에 닿았으면 좋겠다고 해요.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밭언덕을 오를 땐 이음이 머리카락을 붙잡고 오르고, 밤에는 이음이 머리카락은 우리 집에서 재우고 이음이 몸뚱이는 저희 집에서 자기로 했어요.
좁다란 나무난간 턱을 고양이처럼 아슬아슬하게 기어다니는 ‘우리’와 이음이를 데리고 통나무 작업장으로 올라갔어요. 며칠 줄곧 비가 와서 도랑이 깊게 패어 물이 제법 많이 흘러요. 둑을 쌓고 나뭇잎배도 띄워 보내고 한참이나 놀다 왔어요.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에 오늘도 ‘우리’는 머리를 감고 배를 씼었어요.
2020. 9. 17
켜켜이 쌓인 어둠 속에 도랑물 소리와 풀벌레 소리만 가득해요. 불빛에 풀잎 끝 맺힌 빗방울들이 반짝이고, 어기적어기적 두꺼비 한 마리 길을 건너고 있어요. 비 그친 하늘 구름 사이로 별들이 일렁이는데, 아이들 집은 불이 꺼진 채 컴컴해요. 어디로 간 것일까. 낮에만 해도 내게 전화를 걸어 ‘할아버지 어디 있어, 언제 올 거야?’ 셋이 번갈아가며 물었는데. 지하수가 또 고장나고 크레인이 왔다갔다는데, 물이 나오지 않아 다른 집에 가서 자고 오는 걸까. 아이들이 없다는 생각이 밀려와 갑자기 이 세상에 우리만 홀로 남겨진 듯한데, 이따금 바위산에서는 부엉이가 울어요.
2020. 9. 18
내일 아이들을 만나면 이렇게 말할 거예요.
‘어떤 아이 둘이 길을 가는데, 큰아이가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동생인 듯한 아이에게, 꼬챙이에 비닐을 둘둘 감아 놓은 것을 보고 허수아비 같다고 했어. 그러고는 길 쪽으로 몸을 돌리는데, 마침 꼬마가 끌고 내려가는 자전거에 걸려 넘어졌어. 넘어진 큰아이는 화를 내며 꼬마 아이 가슴팍을 때렸어.’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음이는 ‘그 거 형과 우리 이야기잖아.’ 라고 말하고, 울림이는 멋적은 듯 배시시 웃겠지요. 아이들은 저희들 이야기인 줄 뻔히 알면서도, 저희들이 이야기 속에 나오면 재미있어 하며 끝까지 들어요.
정말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자전거를 끌고 그저 앞만 보고 내려갔을 뿐이에요. 무릎과 팔꿈치가 시멘트 바닥에 쓸려 너무 아픈 나머지 엉겁결에 울림이가 그랬다는 생각이 들지만요. 엉엉 울면서 울림이는 집으로 가고, 세게 맞지는 않았지만 너무 속상한 ‘우리’도 울면서 엄마 품으로 달려갔어요. 두고간 킥보드와 자전거를 들고 터덜터덜 뒤따라가는데, 이음이가 혼잣말인 듯 ‘모두 어린아이였으면 좋겠다. 혼내지 않게.’ 라며, 울림이 형에 대한 서운함을 이야기해요. 가끔 울림이는 어른처럼 구나봐요. 어제도 차에 깔려 죽은 두꺼비를 보려고 이음이가 달려가니까, 먼저 보고 온 울림이가 뒤따라가며 ‘어린이는 안 보는 게 좋을 걸.’ 하고 말하던 것이 떠올라요.
2020. 9. 19
울림이네 집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이에요. 하나는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 돌계단으로 질러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숲으로 난 샛길로 에돌아 가는 길이에요. 샛길은, 지난번 큰비가 왔을 때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덮쳐서 한쪽이 무너졌어요. ‘우리’가 자전거를 끌고 좁다란 길을 건너올 때마다 안타까웠는데 오늘에서야 메웠어요. 돌을 쌓은 뒤, 내가 삽으로 흙을 퍼서 담으면, 울림이는 손수레를 끌고가 쏟아붓고, 이음이는 갈퀴로 흙을 고르게 펴요. 우리 곁에서 농사 공부한 지 두 해가 지난 울림이와 이음이는 제법 큰일꾼이에요. 내가 발로 구르며, 이렇게 단단하게 다져야 나중에 비가 와도 푹 꺼지지 않는다고 하니, 아이들도 통통 뛰면서 따라해요. 지우 삼촌이 와서 발로 구르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음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귓속말인 듯 작은 목소리로 울림이가 ‘할아버지, 이음이가 지우 삼촌 1톤이래.’ 라고 해요. ‘뭐, 지우 삼촌 몸무게가 1톤이라고!’ 나는 혼자 껄껄 웃어요. 초사흘달이 떴어요. 마치 박주가리 솜털씨앗 같아요. 곧이어 하늘 속에 잠겨있던 별들이 하나둘 떠오르겠지요.
2020. 9. 21
마당에서 고추잠자리를 쫓아다니다가, V자 길로 밤을 털러 갔어요. V자 길은, 마을에서 올라오다 아이들 집과 우리 집으로 갈라지는 세 갈래 길을, 울림이가 이름을 붙이고 이음이와 나까지 셋이만 알고 부르는 말이에요. 낮은 곳은 잠자리채로 털고, 높다란 가지에 매달린 밤송이는 돌을 던져 땄어요. 밤송이가 떨어지는 곳에는 풀이 우거지고 칡넝쿨이 뒤엉켜 있어, 아이들을 기다리게 하고 집에 올라가 예초기를 가져와 말끔히 벴어요. 기계 다루는 게 서툴고 풀벌레들이 다칠까봐 늘 애타고 안절부절못하지만, 이럴 때는 내가 예초기를 쓸 줄 안다는 게 뿌듯하게 느껴져요. 밤들은 까서 ‘우리’가 등에 진 가방에 넣어요. ‘우리’에게는 밤송이 터는 일이 처음일 거예요. 나머지 밤송이는 내일 대나무 장대로 털기로 하고 헤어지는데, 울림이 이음이가 번갈아 달려와, 할아버지 할머니 지우 삼촌도 먹으라고 밤 세 알을 내 뒷주머니에 몰래 넣고는 달아나요.
2020. 9. 22
‘할아부지, 할아부지, 할아부지, 할아부지,’ 엄마 차에서 내리자마자 소리쳐 부르고는, ‘우리’가 자전거를 타고 샛길로 달려와요. 이음이도 나를 부르며 뒤따라 오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날마다 이렇게 넘치는 기쁨을 누리며 사는지요. 이음이가 킥보드에 앉은 채 비탈을 내려가다 멈춰선 ‘우리’ 자전거와 맞부딪쳤어요. 넘어진 이음이를 보고 ‘괜찮아?’ 하곤 ‘우리’가 걱정스럽게 물어봐요. 이음이가 손목에 조금 벗겨진 생채기를 보여주자, ‘우리’는 ‘이음이 안 아파.’ 를 두어 번 되풀이하는데, 물어보는 말이 아니라 ‘이음이는 아프지 않다.’고 하는 말처럼 들려요. 그래서 이음이도 ‘이음이 아파, 이음이 아파.’ 라고 되뇌어요. ‘우리’는 손가락으로 왼쪽 이마 위아래를 가리키며, 지난번 나무 계단에서 넘어져 많아 아팠다고 몸짓으로 말해요.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하늘이 갈대 위로 눈부시게 빛나요.
2020. 9. 24
‘우리’ 몸에 늘 붙어다니는 자전거는 발판이 없는 두발자전거예요. 브레이크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손아귀 힘이 모자라,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갈 땐 얼른 안장에서 일어나 두 발로 털털털털 뛰어가지요. ‘우리’ 두 발이 자전거 페달과 브레이크인 셈이지요. 얕은 내리막길에서 내가 ‘우리, 발 놓아.’ 하면, 땅에서 두 발을 떼곤 아슬아슬 신나게 달려요. 자전거 방향을 바꿀 때는, 오른손을 뒤로 해서 안장을 들고 빙 한 바퀴 돌아요. 안장을 들고 자전거 앞뒤를 바꾸는 건 ‘우리’가 몸으로 깨친 듯해요. 신발을 신을 때 잘 들어가지 않으면 신발 앞꿈치를 바닥에 툭툭 치는 것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할아부지, 안녕!’ 부엌 창문으로 ‘우리’가 소리치면 비로소 나에게 아침이 밝아오지요. 무밭에 웃거름 주다 바라본 저녁 하늘이에요.
2020. 9. 26
‘할아버지, 옷 빨아 입어.’ 느닷없이 이음이가 말을 꺼냈어요. ‘아, 이 옷, 일할 때 입는 옷이야.’ 라고 말했지만, 순간 적잖이 당황스러웠어요. 흙투성인 바짓가랑이가 더러워 보였던 거예요. 하긴 여기에 살다 보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 잠옷 차림으로 마당이나 길을 나서고, 일할 때만 일옷으로 갈아입는데, 그 옷마저 며칠만에 갈아입지요. 아이들도 우리 집으로 올 땐 잠옷 바람이에요. 울림이는 수더분한 구석이 있는데, 이음이는 퍽 깔끔해요. 색칠할 때도 조금이라도 금 밖으로 나가는 것을 참지 못해요. 이음이가 가장 싫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신발 속으로 흙이 들어가는 거예요. 저녁나절 무밭에 물을 주고 있는데, 이음이는 제가 해보겠다고 하며, 손에 쥐고 있는 입마개(마스크)를 내게 맡기며, ‘할아버지, 주머니는 깨끗하지?’ 하며 물었어요. 요즘은 바람의 빛깔도 결도 소리도 달라진 듯해요. 어제는 산을 오르다가 물봉선화 한 무리를 만났어요. 가만히 앉아, 깔대기 같은 대롱 꽃이 어디에 매달려 있는지 살펴보았어요. 꽃빛은 자줏빛을 띤 빨간색인 연짓빛이에요.
2020. 9. 29
땅콩밭을 둘러친, 검정색 그물로 된 달래망을 개고 있는데 아이들이 달려왔어요. 이음이가 저도 해보겠다며 옆에서 거드니, 울림이도 같이한대요. 나는 길 위쪽으로 올라가 달래망을 팽팽하게 잡고, 아이들은 아래에서 둘둘 말아 올려요. 한참이나 하다가 힘에 부치는지, 아이들은 한숨 자고 해야겠다며 달래망을 베개 삼아 길바닥에 드러누웠어요. 두말할것도없이 울림이가 먼저 그랬어요. 아이들과 일을 하다 보면 놀이인지 일인지 알 수가 없어요.
‘우리’가 많이 달라졌어요. 형들 따라 놀러 오거나, 혼자서도 자전거를 끌고 우리 집으로 달려왔는데, 요즘은 엄마가 데려다 줘야만 해요. 놀다가도 엄마가 없으면 놀란 듯 두리번거리며 엄마를 찾고, 엄마 뒤만 졸졸 따라다녀요. 아내한테 얘기하니, ‘아시타나’ 보다 라고 하는데,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올봄만 해도, 커서 엄마와 결혼하겠다는 이음이 생각이 겹쳐 왔어요. 물소리 그친 도랑에는 풀벌레 소리가 흐르고, 하늘에서 내려와 다소곳이 앉은 개쑥부쟁이 꽃이 머잖아 뜰과 언덕을 연보랏빛으로 뒤덮겠지요.
2020. 10. 5
추석을 쇠고 오랜만에 울림이가 학교에 갑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긴급 돌봄’이라며, 학교 가는 울림이 따라 이음이도 어린이집에 갑니다. 차창 밖으로 두 손을 내밀어 이음이와 울림이는 헤어지는 인사로, 나와 아내와 하이파이브를 천 번이나 했어요. 학교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자마자, 울림이는 체험활동을 가서 만들었다며 마들렌이란 빵 세 개를, 이음이는 선생님이 삶아주었다며 쥐밤(산밤) 여섯 알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왔어요.
어제 만들다 만, 대나무 칼과 칼집을 마무리해서 허리에 차고 산적을 잡으러 나섰어요. 산길을 내려가다 금방 산적 잡으러 가던 것도 잊어버리고, 칼집을 묶은 비닐끈과 길섶에서 주운 상수리를 가지고 놀았어요. 아름드리 상수리나무 아래 피어있는 메리골드 꽃을 보고 이음이가 느닷없이 ‘곤드레밥’이라고 해서 한참이나 웃었어요. 날은 어둑해지고 이음이는 발목에 줄이 묶인 채 울림이에게 끌려갑니다. 이음이는 엎드려 졸졸 따라갑니다. 내가 얼른 끈을 풀어 안고 가는데, 내 품에 안겨서도 이음이는 강아지 흉내를 내며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며 집으로 갑니다.
2020. 10. 8
무슨 일인지 울림이 혼자 방으로 뛰어들어 와서 ‘잠깐 할머니를 볼 일이 있어 왔다.’며 침대로 올라와,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아내를 살펴 보고는 곧장 집으로 달려갔어요. 손에 연필을 쥔 걸 보니 아내를 그리려나 보다고 생각했어요. 얼마쯤 지났을까, 울림이와 이음이가 달려오고 그 뒤를 ‘우리’와 엄마가 오고 있어요. 보여줄 게 있다며 울림이와 이음이가 주머니에서 몇 겹 접은 종이를 꺼내는데, 그림편지일까 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 도감’이라고 해요. 울림이 학교에서 숙제로, 집에서 기르고 싶은 동식물을 하나씩 골라, 그에 관한 내용을 책이나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도감을 만들어 오라고 했대요. 울림이는 ‘리버쿠터’라는 거북이 도감을 만들고 있는데, 이음이도 덩달아 도감을 만들고 싶어, 무엇을 만들까 하다가, 문득 ‘할머니 할아버지 도감’을 생각해 낸 것이었어요. ‘할아버지 도감’에는 이렇게 적어 놓았어요.
앞표지 : 할아버지 도감
1쪽(이음) : 콧털 한 가닥, 콧털이 하얗다.
2쪽(울림) : 알통이 없는데 힘이 세다. 맨날 일한다. 재밌다.
3쪽(이음) : 하얀 머리카락 까만 머리카락이 있다.
4쪽(울림) : 맨날 똑같은 옷만 입는다.
5쪽(이음) : 할아버지는 맨날 우리 아이들을 다른 아이로 말한다. 밀차를 잘 끄신다. 맨날 목욕한다. 개구쟁이다.
6쪽(울림) : 배가 뽈록 나왔다.
뒤표지 : 끝. 2020. 10. 7.
아이들 고모할머니가 내가 페이스북에 올려놓은 글에 달아 놓으신 댓글에, 아이들이 ‘날마다 아랫집 할아버지에게 행복을 안겨주네요.’라고 하셨는데, 오늘도 가슴 뻐근한 행복을 선물 받았어요.
2020. 10. 8
지난해만 해도 엄마가 좋아한다는 가수 ‘아이콘’의 노래 ‘사랑을 했다 우리가 만나 ...’를 흥얼거리고 다녔는데, 얼마전부터 엄마가 손홍민 축구에 관심을 보이자, 울림이와 이음이는 저희가 서로 손홍민이라고 우기며 바람 빠진 축구공을 들고 뛰어왔어요. 축구 하면 또 김종도 아닌가. 까불지 마라, 너희 손홍민 형제들 코를 납작하게 해 주마. 나는 아이들을 제치며 요리조리 공을 몰아 골을 넣고는, 머쓱해진 아이들 앞에서 참새처럼 뛰며 혼자 소리지르고 좋아하지요. 문제는 ‘우리’예요. 나와 ‘우리’가, 울림이와 이음이가 같은 편을 먹었는데, ‘우리’는 공만 보면 손으로 잡고 우리 편 골대 너머 저만치 들고 가서는 혼자 공을 몰고 오는 거예요. 누구라도 ‘우리’ 앞을 막아서는 안 되기에, 나는 울림이와 이음이를 손으로 붙잡아 길을 내주어야 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울음보를 터뜨리거든요. 그렇게 애써 공을 몰아 상대편 골대 앞에 가서는 다시 공을 손으로 잡아 우리 편 골대로 되돌아오는 일을 ‘우리’는 되풀이하는 거예요. ‘반칙이다. 시시하다.’고 이음이는 투덜대고, 울림이는 ‘우리, 귀엽지.’ 하고 말하는데, 나는 문득 하이타니 겐지로가 쓴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에 나오는 ‘해파리 소녀’의 한 장면을 떠올렸어요. 지금 아이들이 다니는 길엔 한창 개쑥부쟁이가 흐드러지게 피었어요.
2020. 10. 15
요즘은 아이들과 ‘방방’을 타고 놀아요. ‘트램펄린’이란 놀이기구인데, 우리말로 ‘잇달아 공중으로 뛰는 모양’이라는 뜻을 지닌 ‘방방’이란 말이 잘 어울려요. 아이들과 뛰면서 빙빙 돌다보면 소용돌이치는 물결 같아요. 어지러워서 그만 쉬려고 하면, ‘우리’가 ‘엄청 많이, 엄청 많이’ 하자고 해서 멈출 수가 없어요. 아이들은 지칠 줄 몰라요. 놀다보면 아이들은 가끔 나를 ‘아빠’라고 불러요. 아이들에게 가까운 사람은 모두 ‘아빠’인가 보아요. 지난번에도 모래놀이를 하다가 ‘우리’가 나를 보고 ‘아빠’라고 부르더니, 뭐가 잘못되었는지 혼잣말로 ‘아빠 아니 할아버지’ 라고 더듬듯이 고쳐 말해서 혼자 웃었어요.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새나 꽃이 사람의 말을 하면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을 만나면 늘 ‘방방’ 위를 뛰고 있는 기분이에요.
2020. 10. 19
아침에 뜰을 거닐던 아내가, 날씨가 추우지니 쑥부쟁이 꽃빛이 더 짙다고 해요. 보랏빛은 빨강과 파랑 가운데 서있는 빛깔인데, 경계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답게 느껴져요. 낮과 밤, 뭍과 물, 땅과 하늘, 비올녘, 시월에서 십일월로 건너가는 가을과 겨울 사이에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지요. 울림이가 뛰어와 톱으로 나무를 베어 달라고 하고, 잇달아 이음이가 쫓아와 정전가위로 막대기를 잘라 달라 하고 ... 뒤늦게 달려온 ‘우리’가 할아버지 밀차 태워 달라고 해서 엊저녁에는 저 아래 가로등이 비추는 마을길까지 갔다왔어요. ‘엄청 많이’라는 말을 배워, 아주 멀리 가자고 ‘우리’가 자꾸 졸라대요.
2020. 10. 20
울림이가 달려왔어요. 학교에 일찍 갈 수 있었는데, 이음이가 입을 옷을 고르느라 30분이나 걸렸다고 해요. 울림이 말로는 정확히 37분이래요. 아침에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예요. 이음이는 파란 운동복 바지에 바둑판 무늬 윗도리를 입고 연둣빛 얇은 목도리를 두르고 햇빛 반짝이는 숲 위를 날아 어린이집에 갔어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이들은 윗밭으로 올라왔어요. 고구마를 캐고 있는데, 저희들이 하겠다며 호미를 가지고 가요. 그러더니 느닷없이 ‘저희가 도움이 되긴 해요?’ 라며 이음이가 물어요.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아니, 전혀 도움이 안 돼.’ 라고 딱 잘라 말해도, 아이들은 전혀 마음 쓰지 않아요. 이음이는 뾰족 내민 고구마를 손으로 잡아당기고, 울림이는 오늘따라 장난스레, 흙을 부드럽게 해 준다며 꼬챙이로 찌르고 갈퀴를 가져와 밭두둑을 긁어요. ‘너희들이 곁에만 있어도 엄청 도움이 돼.’ 라고 다시 고쳐 말하자, 이음이가 ‘왜요?’ 라고 물어요. ‘옷도 멋있게 입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웃게 해 주고, 귀엽고 사랑스러우니까.’
‘깜짝 놀랄 뻔했어.’
‘우리’가 한 말이에요. 나무난간 위에서 자전거를 타며 혼자 놀고 있기에, 밭을 내려오다가 ‘우리, 뭐 하니?’ 하니까, 얼른 자전거에서 내려와, 마당 빨랫대에 널어놓은 헝겊강아지를 손으로 가리켜요. 아마, 우리 집에도 강아지가 있다고 자랑하고 싶어나 봐요. 그러더니 할아버지 집에 ‘애기 강아지’ 보러가자며 내 손을 잡고 따라와요. 눈 뜬 지 며칠이 지났는데 강아지 네 마리는 집에서 나오려 하지 않아요. ‘우리’가 개집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꿇은 채 강아지를 만져 보려고 고개를 들이미는데, 내가 ‘오요요요’ 하자 한 마리가 불쑥 앞으로 기어나오니, 움찔 물러나며 ‘우리’가 한 말이에요. ‘어떻게 깜짝 놀랄 뻔할 수가 있어. 깜짝 놀라면 놀란 거지, 놀라려다가 안 놀랄 수가 있는 거야.’ 울림이 이음이였으면 이렇게 따지며 말장난을 하며 놀았을 텐데, ‘우리’가 하는 말은 마냥 귀엽고 신비스럽기만 해요. ‘우리’는 누구한테 이런 말을 들었을까요. 혼자 생각한 말은 아닐까요. 아마 ‘크게 놀라지 않았어.’나 ‘깜짝 놀라긴 했는데, 아무일도 없어 괜찮아.’와 같은 뜻으로 썼겠지요. 더듬더듬 말의 세계를 찾아가며, ‘우리’는 저 높고 빛나는 언덕으로 올라가겠지요.
*’애기 강아지’는 ‘우리’가 쓰는 말이에요.
2020. 10. 23
가끔 나는 ‘우리’에게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는 낱말을 쓸 때가 있어요. 오늘은 갑자기 바깥 날씨가 차가워져서, 손수레를 탄 ‘우리’에게 ‘바람이 쌀쌀하네.’ 라고 말했어요. 내 말을 받아 ‘우리’는 놀랍게도 ‘바람이 불어 시원하다.’ 라고 해요. ‘우리’가 ‘시원하다.’ 라고 말했어요! 언제인가는 ‘우리’에게서 이 말을 꼭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내가 ‘우리’에게 처음 들려준 말이거든요. 그 땐 여름이었고, ‘우리’는 거의 말을 못했어요. ‘우리’를 손수레에 태워 그늘 아래로 지나갈 때면, ‘아, 시원하다.’ 라고 자꾸 되풀이 했어요. ‘우리’도 내 말을 따라 신음 소리처럼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그 땐 전혀 뜻 모를 웅얼거림이었는데, 지금 또렷이 ‘시원하다.’고 말하고 있어요. 마을로 올라오는 샛길로 들어서는데, ‘우리’가 ‘이 거 무슨 냄새지?’ 하고 물어요. 내가 되받아 ‘무슨 냄샐까?’ 라고 하니, 무슨 생각이 났는지, ‘아빠가 불을 땠어.’ 라고 하길래, ‘아, 연기 냄새구나.’ 라고 하니 그건 아니래요. 마른 볏짚 냄새일까, 가을 들녘 냄새겠지요. 손수레에서 내려 함께 벼를 벤 빈 논으로 내려 갔어요. 청개구리도 보고 벼메뚜기도 잡고, 볏짚도 한 단 묶어 가지고 왔어요. 청개구리를 쫓아갈 때는 ‘우리’도 쭈그려앉아 개구리 걸음으로 폴짝폴짝 뛰었어요. 가을빛이 짙어지자 숲도 더 깊어진 듯해요. 오는 길에도 바람이 세차게 불어, 우수수 가랑잎비가 내리고, ‘우리’와 나는 흰구름 하얀 새깃털이 되어 파란 하늘을 떠다녔어요.
2020. 10. 28
참나무 가운데, 왼쪽부터 떡갈나무 갈참나무 상수리나무 가랑잎이에요. 떡갈나무와 갈참나무 잎은 동시란 달걀꼴에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고, 상수리나무 잎은 길고 갸름하며 가장자리에 비늘처럼 뾰족한 톱니가 있어요. 떡갈나무는 잎자루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진 속 떨갈나무는 잎자루가 뚜렷해, 떡갈나무와 갈참나무의 잡종인 ‘떡갈참나무’인지도 모르겠어요. 이웃에 사는 노씨 어른은, 상수리나무를 ‘참나무’라고 하고, 갈참나무를 ‘가나무’라고 부르는데, ‘가나무’ 원목에는 버섯이 잘 피지 않는다고 해요.
‘할아버지, 나왔다!’ 내가 마당으로 나오자, ‘우리’가 부엌 창문 안에서 보며 크게 소리쳐요. ‘아, 우리구나!’ 라고 하니까 뭐라뭐라 말하는데, 잘 알아듣지 못해 성큼성큼 언덕을 올라 ‘우리’네 뜰로 들어서니, ‘아빠,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왔어.’ 하며 그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어요. 내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우리’ 가슴이 콩콩 뛰는 듯했어요. 오늘 아침에도 세발자전거를 탄 ‘우리’와 함께 엄청 멀리 나들이를 다녀왔어요. 제제와 뽀르뚜가 아저씨가 놀러가 물장난 치던 그 슬픈 강물에 떠가는 가랑잎처럼 하염없이 떠다니다가 왔어요.
2020. 11. 1
낮에 언덕에 자란 호박을 따서 아이들과 함께 만든 할로윈데이 호박등이에요. 촛불을 넣어 어젯밤 아이들 집 문앞에 몰래 두고 왔는데, 아이들 엄마 해원씨가 사진을 찍어 보냈어요. 울림이 동무 산들이도 초롱산으로 놀러왔어요. 밖에는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고, 문득 한용운 선생의 시가 떠올라요.
병을 앓고 나서
仙巖寺病後作
흘러오니 남쪽 땅의 끝인데
앓다가 일어나니 어느덧 가을 바람……
매양 천리길을 혼자 가다가
길 막히면 도리어 흐뭇하더군.
客遊南地盡
病起秋風生
千里每孤往
窮途還有情
초가을 병 핑계로 사람 안 만나고
하얀 귀밑머리 늙음이 물결치네.
꿈은 괴로운데 친구는 멀고
더더욱 찬비 오니 어쩌겠는가.
初秋人謝病
蒼鬢歲生波
夢苦人相遠
不堪寒雨多
2020. 11. 3
‘우리’ 할아버지가 보낸 단풍 사진이에요. 마음마저 곱게 물드는 듯해요. 그 길의 끝은 늘 그리움으로 이어져 있겠지요. ‘우리’ 마음을 글로 옮겨 보았어요.
할아버지가 마당으로 나왔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까치발 들고 부엌 창문으로 내다보며 크게 소리쳤어요.
성큼성큼 할아버지가 돌계단으로 올라와요.
땅이 흔들리듯 쿵쾅쿵쾅 할아버지 발소리가 울릴 때마다, 내 가슴은 콩닥콩닥 뛰어요.
빼곰히 문을 열고 나서자 갑자기 햇살이 쏟아지고
할아버지는 우리 집 앞마당에 무리지어 핀 제비꽃으로 숨어들고
나는 머리가 하늘에 닿은 아름드리 나무로 섰어요.
2020. 11. 5
길을 가다가 바지춤을 추키려고 손수레를 멈추고 ‘할아버지 바지 좀 올릴 테니 기다려.’ 라고 하니, 손수레에 탄 ‘우리’가 제 바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엉아와 꺼풀(커플)’이라고 해요. 그러고보니 울림이도 똑같은 빛깔의 바지를 입은 걸 본 적이 있어요. 산모롱이를 돌아서자 산속에서 새소리가 들리니, ‘저 소리 뭐지?’ 하며 ‘우리’가 물어요.
나 : 까치 소리야.
우리 : 아니야, 째째야.
나 : 째째?
우리 : 임이(이음이)가 째째라고 했어.
‘우리’는 ‘할아버지 말은 틀리고, 이음이 말이 맞다.’는 듯 딱 잘라 말해요. 나는 아무 대꾸도 못했지만, 이음이를 만나면 따지려고 해요. ‘이음이 너, 어떻게 우리한테 까치를 째째라고 가르치냐.’고. 이음이 표정이 궁금해요. 이음이는 아마 이렇게 말할 거예요. ‘할아버지, 우리는 아직 아기니까 아기말로 알려 줘야지.’ 오늘은 마을사람들이 ‘대령리’ 라고 부르는 ‘대영리’를, 고개 넘어 굴다리 밑을 지나 두 시간 가까이 걸려 갔다 왔어요. 나도 처음 가 본 길이에요. 청양에서 오는 650번 시내버스를 보자, ‘우리’는 저 차를 타고 싶다고 해요. 언제인가 시내버스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우리’와 함께 엄청 멀리 가보자고 약속했어요.
2020. 11. 9
어제는 아이들과 함께 양파밭을 덮을 왕겨를 실으러 갔어요. 차창밖으로 홍동천 너머 울림이가 다니는 학교가 보이자, 울림이는 ‘홍동초등학교다.’ 하고 소리치더니, 홍동초등학교는 이순신 장군이 지키고 있다고 해요. 그러자 곁에 있던 이음이가 밤이 되면 학교를 지키려고 이순신 장군이 운동장을 한 바퀴 돈다고 해요. 나는 그 말이 재미있어,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고 물으니, 지원이 이모가 말해 주더래요. 울림이와 이음이가 꾸며낸 이야기를 들려줄 때처럼 목소리가 들뜨지 않고, 차분하게 말해서 나도 그런가 보다 하고 나는 아무 대꾸도 못했어요. 마치 ‘오늘 아빠가 회사 갔어.’ 라는 말처럼 자연스럽게 들렸어요. 몇 차례 푸대(자루)에 왕겨를 오삽으로 퍼담더니 힘에 부치는지, 줄지어 세워놓은 왕겨 푸대 위를 마치 헤엄치듯이 기어다니며 놀다가, 온몸이 왕겨투성이인 채 돌아왔어요.
2020. 11. 12
‘단이’와 ‘보리’는 하루종일 고라니를 쫓아다녀요. 늘 허탕을 치곤 논두렁에 빠져 아랫도리는 다 젖은 채 진흙투성이로 돌아와요. 그러다 그예 고라니를 잡았어요. ‘단이’와 ‘보리’ 두 마리 힘으로는 어림없지만, 어제는 마을을 떠돌아다니는 도둑개가 함께 고라니를 몰아 잡은 거예요. 마늘밭에 짚을 깔다가 보니, 고라니가 산으로 올라가길래 이제 살았구나 했는데,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려 서둘러 달려가니, 입을 벌리고 두 눈은 뜬 채 도랑에 고꾸라져 숨이 끊어져 있었어요. 아이들이 뒤따라왔어요. 사내아이들이라 그런지, 아니면 그런 주검을 눈으로 자주 봐서 그런지, 가엾어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다큐를 찍는다며 집으로 돌아가 사진기를 가지고 왔어요. 정작 산기슭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준 사람은 나와 ‘우리’였어요. 울림이는 동영상을 20분 2초를 찍었다고 해요.
2020. 11. 15
‘할아버지저울림이애요7시쯤오시면돼겟어요’ 울림이가 엄마 손전화기로 내게 보낸 첫 문자예요. 어제는 울림이 생일이라 아내와 내가 저녁 초대를 받았어요. 아이가 태어난 날에 이웃을 불러 함께 축하해 주고 싶은 엄마 아빠 마음이 따듯하게 느껴졌어요. 엄마 아빠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레고 장난감을, 지원이 이모는 아기자기한 학용품 한 묶음을, 나는 ‘캄펑의 개구쟁이 1,2’와 ‘이빨 사냥꾼’이란 그림책을 선물했어요. 울림이네 집 부엌과 대청을 가로지르는 들보에는 ‘생•일•축•하•합•니•다’라는 글귀가 한 해 줄곧 붙어 있어요. 그래요, 울림이네 집은 날마다 새 생명이 태어나듯 기쁨과 설렘으로 물결치고 있어요. 사진은, 오늘 딱지치기 마을 잔치에 나가 딱지를 치는 이음이(오른쪽에 날고 있는 아이)와, 잠깐 자리를 비운 엄마가 보고 싶어 먼 길을 나섰다가 홍동중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우리’ 모습이에요.
2020. 12. 6
엊그제 아침에는 잠옷 바람으로 단이와 보리, 밤이 아침을 주러 나갔다가, 날씨가 제법 차서 얼른 들어오려는데, 학교에 가려고 뜰에 나온 아이들이 반가이 나를 불러요. 언덕을 뛰어올라가며, ‘야, 오늘같이 추운 날에도 학교를 가냐, 집에서 쉬어야지.’ 하고 장난스레 말을 거니, 아이들은 시큰둥하게, ‘할아버지는 잠옷을 입어서 그렇지.’ 라고 울림이가 말을 꺼내자, 덩달아 이음이는 몇 차례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너무 덥다고 너스레를 떨어요. 괜스레 말을 꺼내 놓고 혼자 머쓱해졌어요. 이제 아이들이 너무 커 버려 이런 말이 통하지 않는 듯해요. 초롱산으로 이사 온 다음날 아침, 부엌문을 빼곰히 열고 얼굴을 내밀던 일곱 살 울림이와 네 살 이음이가 떠올라요.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되었지요. 언제인가 아이들 외할아버지가 오셔서 닭장을 치운다고, 이음이 보고 아랫집 할아버지한테 가서 ‘장화 빌려 주세요.’ 라고 (공손히) 말하라고 하니까, 이음이가 ‘우린 친구니까 그냥 달라고 하면 돼.’ 라고 했다는 일도 생각나고, 언덕에 뒷짐을 지고 서서 ‘야, 김종도’ 하고 부르던 아이들 목소리도 그리워요.
2020. 12. 11
‘우리’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몸을 흔들며 엄청 빨리 달려왔어요. 달려오면서 ‘엄청 빨리!’ 라고 소리쳐요.’ 며칠 못 본 사이에 목소리도 커진 듯해요. ‘할아버지, 엄마한테 할아버지(에게) 간다고 했어.’ 라며, 쫄쫄 따라와요. 그 사이 울림이 이음이도 달려왔어요. 뒤뜰 마루에 눕혀져 있는 사다리를 보자, 올라가고 싶은지 ‘저 거.’ 라며 아는 척해요. 지난번에 한 번 타 본 적이 있거든요. 사다리를 세워 주자 한 칸 한 칸 조심스레 올라가더니 마지막 한 칸을 두고 머뭇거려요. ‘올라가 봐. 할아버지가 잡아줄게.’ 라고 부추키니, ‘여기 올라가면 위험해.’ 라며 더는 오르지 않아요. ‘우리’가 ‘위험하다’라는 말을 썼어요! 내려올 땐 맨 아래칸을 밟지 않아 주르르 미끄러졌어요. 울림이에 이어서 이음이도 올라가니, ‘우리’도 다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요. 올라가며 발을 헛디딜 듯해, ‘우리, 너는 발에 눈이 없니?’ 라고 하니, ‘우리’는 어리둥절하며 여기 있다고 하는 듯 손으로 왼쪽 눈을 가리켜요. ‘할아버지는 손에도 눈이 있고, 발에도 눈이 있다.’고 하면서 두 눈을 감은 채 손으로 ‘우리’ 볼을 만져 봐요. 이제 ‘우리’에게도 슬금슬금 장난을 걸어봐요.
사진은, 꼭 한 해 전 ‘우리’ 모습이에요.
2020. 12. 15
문을 열고 엄마가 나오고, 이윽고 울림이가 나옵니다. ‘오늘 같이 추운 날도 학교에 가나 보다.’ ‘이음이는 어린이집에 안 가는가 보지.’ 하는 순간 이음이도 나옵니다. 아내가 부엌 창으로 내다 보며, ‘세 마리가 나왔다.’ 하길래, ‘아니, 두 마리지.’ 하니까, 아내는 아이들이 나오자 달려간 우리 집 강아지 단이까지 세 마리라고 합니다. ‘그러네. 우리 강생이(강아지) 세 마리.’ 오늘 ‘우리’는 아빠와 함께 집에 있나 봅니다. 차는 뒤로 나아가더니 방향을 틀어 숲길을 스르르 미끄러지듯 내려갑니다. 나는 가끔 아이들이 떠나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뜰에 나섰다가도 뒤돌아설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시려 와서요.
초인종이 울립니다. 이 시각에 누구일까. 아이들이겠지. 현관문을 열고 나가니 울림이, 이음이, 엄마 등에 업힌 우리가 와 있습니다. 엄마 손에 들린, 속이 훤히 보이는 플라스틱 통 안에는 반딧불이 세 마리가 들어있습니다. 아, 반딧불이를 보여 주려고 여덟 시가 다 된 어둑어둑한 때 우리 집에 온 것입니다.
뜰을 나섭니다. 울림이를 손에 잡고 반딧불이를 찾아 나섭니다. 무엇이 얼비친 것은 아닐까. 반딧불이 한 마리가 풀섶에서 반짝이다가 곧 사라집니다. 우리도 걸려 함께 숲길을 흘러갑니다. 아이들 집 마당에 올라서니 반딧불이 두세 마리가 떠다닙니다. 울림이와 이리저리 몰아 두 마리를 잡고, 한 마리는 거미줄에 걸린 것을 잡았습니다.
‘왜 할아버지 집에는 반딧불이가 없을까?’ ‘반딧불이는 아이들을 좋아하나 봐.’ 라며 말을 주고받는데, 이음이는 ‘할아버지 집에는 아이가 너무 커서 그런가 봐.’ 라고 말합니다. 너무 큰 아이는 지우를 말합니다. ‘지우 삼촌은 어른이야.’ 라며 엄마가 웃습니다. 하늘에는 뭇별이, 내 가슴에는 꽁무니에 등을 단 반딧불이가 동동 떠흐르는 밤입이다.
오늘 울림이는 선생님한테 초콜릿 두 개를 받았다고 합니다. ‘열, 스물, 서른 ... 아흔’ 우리말로 숫자 세는 것을 다 외워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말로 ‘백’은 ‘온’이라고 한다며, 할아버지가 어릴적 숨바꼭질 같은 놀이를 할 때에는, ‘하나, 둘, 셋 ... 아흔아홉, 온’ 하고 아이들을 찾아나섰다고 하니, 그렇게 많이 세느냐고 합니다. 내가 빨리 세는 흉내를 내니, 울림이도 ‘일, 이, 삼, 사 ...’ 하며 숨이 넘어갈 듯 숫자를 세고, 재미있는 듯 이음이가 웃습니다.
우리를 손수레에 태우고 가다, 길에 민달팽이가 있다고 하니, 울림이가 반딧불이를 준다고 나뭇잎으로 줍습니다. 반딧불이는 이슬 같은 것을 먹는다고 하니, 울림이는 엊저녁에 잡은 것은 늦반딧불이 수컷이며, 달팽이가 기어간 흔적을 끝까지 쫓아가 잡아먹는다고 하며, 엄마와 같이 찾아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처음 만났을 때, ‘아빠 공부 다 끝났어.’ 라고 소리치던 울림이는, 마치 제가 겪은 일처럼 나에게 ‘공부하는데 참 힘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음이는, 학위 논문을 마무리한 아빠에게 선물한다며, 고마리와 여뀌 꽃을 바랭이 줄기로 묶어 집에 가지고 갑니다.
2019. 9. 19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우리는 손수레에 타서도 칭얼거립니다. 손수레를 흔들어 보기도 하고 위로 갔다 아래로 갔다 해도 그대로입니다. 이음이가 풀섶에서 강아지풀을 꺾다가, 손수레 사이에 끼워 둔 가위를 건네주자 그제야 얼굴이 펴집니다. 이음이에게 그 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저는 박사라서 다 안다며 입은 옷을 보여줍니다. 박사가 입는다는, 무릎 가까이까지 내려오는 갈색 외투입니다. 아빠 황박사도 이런 옷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아’ 하는 건 기분이 좋다는 뜻이랍니다.
오늘은 이음이가 오줌 마려운 것을 어떻게 아는지 알려주었습니다. 오줌이 마려우면 고추가 머리에게 전화를 걸어 안다고 합니다. 숲길을 도는데 산에 사는 작은 모기가 눈에 띕니다. 올해 들어와서 초저녁이면 유난히 극성입니다. 우리 머리 둘레로 빌빙 도는 모기를 두 손으로 잡으려 하자, 이음이는 ‘외할아버지는 한 손으로 잡을 수 있다.’며 시늉을 해 보입니다. 형 자랑, 아빠 자랑, 외할아버지 자랑, 이음이는 자랑쟁이입니다.
2019. 9. 21
문 앞까지 몰려와 서성이던 어둠이 문을 열자마자 떠밀듯이 확 덮칩니다. 부엌 창으로 새어나오던 울림이네 집 전등은 꺼져 있습니다. 아침마다 가슴 딛고 미끄러지듯 숲길을 내려가던 아이들이, 오늘은 강화에 있는 외할머니댁에 갔습니다. 토끼풀 밭에 꽂아 둔 나지막한 꽃등이 아이들이 오르내리던 언덕길을 어렴풋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따금 바위산에서 올빼미가 울고, 흐린 하늘엔 풀벌레 소리만 가득합니다.
이제 딱지치기도 시들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구슬놀이 한 지도 참 오래되었습니다. 킥보드는 대청마루 밑에 잠들어 있고, 베이블레이드나 자동차 변신 로봇 들이 더는 마당에 나뒹굴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사이에 ‘순간이동’이나 ‘변신’이란 말은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울림이가 학교에 가고 글자도 배우고 바깥세상을 만나며 동화 속에서 빠져나오는 듯합니다. 하기는 우리가 외발 손수레를 혼자 밀고 열 걸음 남짓 가니, 시간도 꽤 흘렀습니다.
어제는 울림이가 ‘오랜만에 킥보드 한 번 타볼까.’ 하더니 반 바퀴도 돌지 않고 그마저 금방 그만둡니다. 울림이와 이음이는 킥보드를 타고, 나는 우리를 손수레에 태우고 누가 빨리 가나 내기를 하곤 했는데, 산을 오르는 비탈길과 마당이 참 심심합니다.
2019. 9. 24
고마리 줄지어 피어난 속으로 도랑물이 소리내며 흘러갑니다. 어느새 벌과 꽃등에가 찾아들었습니다. 밤새 이슬 젖은 위를 햇빛이 비추며, 울림이네 지붕에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납니다. 콩잎에는 섬서구메뚜기 곁에서 베짱이가 가늘게 더듬이를 떨고 있습니다.
이음이는 오늘 어린이집에서, 홍성읍에 있는 남산으로 가을나들이를 떠납니다. 울림이는 물기 어린 바깥 차창에 우스꽝스러운 사람 얼굴을 그렸다가 다시 차에서 내려 낙서를 하고, 저러다가 차는 언제 떠날지 모르겠습니다. 차창에 손바닥을 대니, 우리도 안에서 고 귀여운 손바닥을 펴서 내 손바닥에 마주댑니다.
2019. 9. 26
방에서 아이들 소리가 새어나옵니다. 아, 살았나 보다. 어제는 고뿔이 걸렸는지 우리는 줄줄 콧물이 나오고 이음이는 39도까지 열이 올랐는데. 윗밭에서 갓을 솎아주다가 아내는 ‘아이들 소리가 나서 참 좋다.’고 합니다. 누군가 밖에 나왔는가 봅니다. 내가 아이들이 나왔다고 하니, 아내는 까치 소리라며 얼마나 보고 싶으면 그렇게 들리느냐고 합니다. 가끔 새소리나 닭이 홰를 치는 소리가 아이들 소리로 들리기도 하니까요.
오늘 아침엔 내가 제대로 들었습니다. 울림이가 밖에 나와 소리치고 있습니다. ‘빨리 나와.’ ‘당장 안 나와.’ 가만히 들으니, 울림이는 서둘러 밥을 먹고 학교 가기를 기다리고 식구들은 아직 아침을 먹고 있나 봅니다. ‘오늘은 아빠가 데려다 줘.’ 이음이 목소리도 들립니다. 이음이는 아파 어린이집에 못 가고, 아빠가 울림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려는가 봅니다. 이음이는 괜찮을까. 두 눈이 퀭하니 온몸에 열이 가득하던 이음이가 생각납니다.
2019. 9. 28
오미자를 담근 유리병들을 엄마 혼자 들기에는 힘들어 보여, 함께 나누어 들고 울림이네에 잠깐 들렀습니다. 할아버지가 왔다고 인사를 하라고 하자, 오르르 아이들이 몰려나옵니다. 아이들은 잘 됐다며 집에서 놀다 가라고 나를 붙듭니다. 울림이는 아빠한테 내가 못 가게 문을 닫으라고 하고, 이음이는 내 손을 붙잡고 안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아직 할아버지가 아침을 먹지 않았으니, 밥을 먹고 놀자고 하니 울림이와 이음이는 멈칫하는데, 우리가 따라나와 나에게 장화 한 짝을 건넵니다. 신을 신고 밖에 나가자는 뜻입니다. 우리를 번쩍 들어 품에 앉고 나무 계단을 내려서니, 마당 귀퉁이에 민들레 한 송이가 피어 있습니다. 우리가 신은 장화 빛깔을 닮은 연노란 민들레는, 아이들이 보고 싶어 날마다 뜰에서 서성이는 외할머니 마음일까요.
2019. 9. 30
‘야, 너 이 거 없지.’ 바둑판을 내밀어 보이며 이음이가 자랑합니다. 여기에서 ‘야, 너’는 물론 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전에 울림이와 서로 ‘자랑 내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울림이가 ‘우리 집엔 레고, 베이브레이드, 킥보드가 있어.’ 라며 이것저것 다 끌어내어 자랑을 하면, 나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단이, 보리, 호미, 밤이’ 우리 집에 사는 강아지와 고양이 이름을 들먹이며 자랑을 하고, 기가 죽은 듯 아무말이 없던 울림이가 생각납니다.
나무 난간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바둑과 오목을 두고 알까기 놀이도 합니다. 오목은 외할아버지한테 두 번이나 이겼다는데 아무래도 외할아버지가 져 준 듯합니다. 몇 수 놓기 전에, 한꺼번에 두 알을 놓거나 내가 놓은 바둑돌 위에 제 것을 겹쳐 놓으며 울림이는 제가 이겼다고 우깁니다. 알까기도 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손가락으로 바둑알을 눌러 마치 끌어당기듯 내 바둑알 가까이 와서 튕겨냅니다.
아내는 밖으로 아침을 차려옵니다. 벌써 바나나와 빵을 먹었다고 하는 아이들에게는 밥에 참기름과 깨를 버무려 김밥을 싸 줍니다. 울림이가 ‘먹보 귀신’이라 부르는 우리는, 입에다 두어 개 넣고, 잘게 자른 김밥을 두 손에 하나씩 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분이 참 좋은가 봅니다. 앉아 있는 내 등에 등을 기대고 서서 느긋이 사과를 먹기도 하고, 아내 두 발을 붙잡고 서서 빙긋이 웃기도 합니다.
2019. 10. 7
아이들과 엄마와 함께 밤을 주으러 갑니다. 마을길을 내려가니, 혼자 사시는 할머니 집에 묶어 둔 개가 짓습니다. 손수레에 탄 우리가 ‘웍’ 하며 그 소리를 흉내냅니다. 나는 우리가 내는 소리를 따라합니다. 요즘 우리는 말을 배우고 있습니다. 울림이는 ‘엉아’, 이음이는 ‘임이’라고 부릅니다. 밤 몇 톨 줍고 돌아오는 길에 고욤 두 알과 감꼭지 닮은 버섯 하나를 따서 나뭇잎에 싸 가지고 옵니다. 지금 그 길에 사느란 가을비가 내립니다.
2019. 10. 11
아이들이 학교에 가나 봅니다. 울림이가 마당에 나와 ‘할머니’ 하고 부르더니, 고개를 젖히고 서둘러 무엇인가를 입에 털어넣습니다. 이윽고 이음이가 ‘할아버지’ 부르고는, ‘야, 너 머리 깎았지.’ 라고 소리칩니다. 이음이 말이 따뜻이 내 가슴에 머뭅니다. 마을사람들이 절집 같다는 외딴 곳에 사는, 아무도 눈여겨 보아 주지 않는 나를, 더구나 머리 깎은 것을 알아주는 이가 있으니 말입니다. 얼마 전, 울림이와 이음이도 머리를 깎았습니다. ‘야, 너희 머리 깎았구나.’ 하고 문 앞에 서 있는 아이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울림이는 윗머리와 아랫머리가 층이 나게 가지런하게 깎았습니다. 아내는 도토리처럼 귀엽다고 합니다. 늘 보던 머리 생김새와는 달라, 어디서 깎았느냐고 물어보니, ‘저 위에 무료로 깎아주는 데서 깎았다.’고 이음이가 장난스레 대답합니다. 아, 엄마가 깎아주었나 봅니다. 아이들 머리는 늘 엄마가 깎아주는데, 이 번엔 머리 맵시가 조금 다릅니다. 젊었을 때는 내 머리와 우리 아이들 머리도 아내가 깎아주었습니다. 가끔은 내가 아내 머리를 깎아주기도 했는데, 따뜻한 그 시절이 생각납니다.
2019. 10. 13
‘’야, 김종도.’ 성큼성큼 언덕을 내려오더니 돌계단 끝에 떡 버티고 서서 이음이가 나를 부릅니다. 아이들 집 쪽으로 발길을 옮기시던 장길섭 선생님이, ‘너, 할아버지와 친구구나.’ 라고 하시더니 여긴 평등한 세상이라며 웃습니다. 그 날은 통나무 일을 하시는 목정 선생님이 우리 식구와 울림이네 식구를 저녁식사에 부르셨습니다. 문당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이장 일을 하시는 장 선생님도 함께 모셨는데, 잠깐 사이를 내어(틈을 내어) 우리 집에 들르신 겁니다. 이음이가 내 이름을 대놓고 부른 일은 처음입니다. 아무래도 조금 낯선 사람 앞에서 나를 제 친구라고 우쭐거리고 싶었는 듯 보입니다. 이러나저러나 이음이가 내 이름을 불러줘서 나는 기분이 좋습니다. 울림이가 절대 밟지 말라는, 모르고도 밟지 말라는, 아이들이 마당에 쌓아 놓은 모래성이 아침 햇살에 빛납니다.
2019. 10. 19
마당에서 아이들이 부드러운 흙을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데리러 왔습니다.
울림 : 싫어. 밥 먹고 다시 놀게 하면 갈게.
이음 : 할아버지 집에서 자고 갈 거야.
우리 : (처음에는 따라나서더니, 형들이 가지 않자 절레절레 도리질을 치며 가기 싫다고 합니다.)
엄마는 해가 저 산 너머로 내려가면 오라고 하면서 혼자 돌아갑니다. 그러던 아이들이 오늘은, ‘엄마한테 갈까.’ 하니, 우리는 타고 있던 자전거를 눕혀 두고 내 품에 안기고, 이음이와 울림이는 뒤따라옵니다. 우리는 요즘 몸에 붙은 듯 세발자전거를 타고 다닙니다. 발걸이도 없는 자전거를 두 발을 땅에 딛고 계단도 오르고, 가끔 넘어지기도 하지만 비탈진 언덕을 제법 몸을 잘 가누며 오르내립니다.
어제는 아이들에게 잠자리채 만드는 방법을 일러주었습니다. 긴 대나무에 굵은 철사를 동그랗게 휘어 붙잡아 매고 나서, 이것으로 잠자리를 잡았다고 하니, 울림이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어떻게 잡았을까.’ 하고 물으니, 울림이가 잠자리채를 내 목에 걸어 잡아당겨 한참이나 웃었습니다. ‘이 동그란 철사 안에 무엇을 넣었을까(쳤을까). 우리 둘레에 있어.’ 라고 하니, 울림이는 꽃을 따서 넣었다고 합니다. 꽃으로 잠자리나 나비를 꾀어 낸다는 뜻이겠지요. 벌이나 나비, 잠자리 들이 날아다니다가 걸리는 것이라고 귀띔을 하니, 한참만에 이음이가 거미줄이라고 합니다. ‘야, 오늘은 이음이가 맞혔구나.’ 하고 꼭 안아주고 싶지만, 울림이가 틀림없이 서운해 할 것이기에 무심한 듯 ‘그래, 맞아.’ 라고만 했습니다. 엄마도 이런 잠자리채는 처음 본다고 합니다. 채에 쳐 놓은 거미줄에 잠자리가 걸리면 날개가 다칠까봐 조심스레 떼어주던 어린시절로 잠깐 돌아갑니다.
2019. 10. 21
초인종이 잇달아 울립니다. 문 앞에서 빤히 올려다 보는데 처음 보는 얼굴입니다. 숲길을 쓸 때 낯선 차 두 대가 세워져 있어 울림이네 손님이 왔나 했는데 이 아이들인가 봅니다. 울림이 친구인 여덟 살 ‘세라’와 이음이 친구인 다섯 살 ‘종민’. 눈빛이 서양 아이인 듯한데, 동생 이름이 이종민이니 엄마가 외국인인가 봅니다. 울림이와 이음이는 새로 사귄 친구들을 아내와 나에게 소개하고 싶어 서둘러 달려왔습니다.
'할아버지, 이게 뭐야?’ 단이 털에 묻은 풀씨를 보고, 세라가 묻습니다.
나 : ‘이건 쇠무릎쟁이라는 풀의 씨앗이야. 단이가 풀밭에 돌아다니다가 몸에 묻은 거야.’
세라 : ‘왜 단이(다니)라고 한 줄 알겠다. 많이 다니니까.’
나 : 맞아. 단이는 온 산을 쏘다녀.
울림이와 이음이가 미리 알려주었는지, 세라는 단이(다니) 이름도 알고, 보리가 낯을 가려 사람을 피한다는 것도, 아랫밭도 윗밭도 할아버지 밭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라는 경상도 사투리를 씁니다. 나도 경상도에 살다가 지금은 여기에 산다고 하니, 왜 그런지 묻습니다. 엄마는 러시아 사람이라고 하며, 엄마 아빠가 여행을 하다가 만나게 되었고, 지금은 구미에 산다고 합니다. 개쑥부쟁이 꽃이름을 묻더니, 이 꽃은 밝은 빛깔을 지닌 러시아 전통의 꽃이라고 엄마가 알려 주었다며, 러시아말로 알려주는데 따라 소리 내기가 힘듭니다. 주워 놓은 밤을 까 주었더니, 세라는 처음 먹어 본다며 참 맛있다고 합니다. 아내는 이 꼬마친구들에게 주려고 금방 캔 고구마를 찝니다. 낮에는 아내와 고들빼기를 다듬고 있는데 울림이가 중요한 일이라고 소리치며 우리를 찾습니다. 세라와 종민이가 간다는 것입니다. 울림이도 참 서운한가 봅니다. ‘할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라고 손을 흔들며 세라는 개쑥부쟁이 흐드러진 꽃 사이로 걸어갔습니다. 울림이 이음이 덕분에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예쁘고 귀여운 친구들,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2019. 10. 22
세라가 강아지 이름을 왜 단이라고 했는지 안다고 했을 때, 순간 ‘단군’에서 따왔는지를 알고 있을까 했는데, 많이 다니(단이)니까 단이라고 불렀을 거라고 해서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잠깐 만났지만 세라는 우리말에 관심이 많고, 궁금한 게 참 많은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가 도랑에 우렁이가 살고 있다고 하니, 세라는 울어(우러)서 우렁이인가 하고 묻습니다. 윗밭에 더덕과 도라지를 가리키며, 할아버지 이게 뭐냐고 묻습니다. 단이가 몇 살인지, 단이가 할머니가 되면 몇 살인지,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지도 물었습니다. 열두 살쯤이면 할머니가 되고 그 다음엔 죽는다고 하니, 한숨 섞인 목소리로 ‘아, 안타까워라.’고 가냘프게 내뱉습니다. 오늘 따라 울림이와 이음이도 마음이 들떠 있습니다. 처음 만난 친구들에게 자랑할 것도 많은가 봅니다. 갑자기 ‘쥐와 고양이 놀이’도 하자고 합니다. 꽃밭에 수 천 마리 벌들이 잉잉거려 세라가 무섭다고 해서, 괜찮다며 내가 벌을 잡아볼까 하자, 울림이가 그건 침을 쏘는 벌이 아니고 꽃등에라며 제가 잡는다고 내 앞을 가로막습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있으면 달려와 우리에게 자랑하는 울림이와 이음이에게, 오늘은 아내와 내가 자랑거리여서 기분이 참 좋습니다.
들깨를 베어낸 자리에 마늘을 심으려고 깻대를 뽑고 있는데 아이들이 올라옵니다. ‘이음이가 할머니에게 할 말이 있어.’ 라며 울림이는 할머니를 찾습니다. 이음이가 하고 싶은 말은 말랑말랑한 사탕 봉지에 적혀 있다고 하는데, 이음이가 아내에게 건네준 사탕 봉지에는 ‘힘내요.’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아내가 손에 흙이 묻었다고 하니 사탕을 싼 봉지를 벗겨 입에 넣어줍니다. 쑥스러운 듯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울림이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꺼내 내 손에 쥐어 주는 사탕 봉지에는 ‘사랑해’ 라고 쓰여 있습니다.
밭에서 흙을 쌓아 섬을 만들고는 물을 길러 간 울림이는 돌아오지 않고, 이음이는 혼자 흙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마당에서 엄마가 불러도, 대답이라도 하라고 해도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쭈그려 앉아 있습니다. ‘이음이 너, 배가 고파 대답할 힘도 없구나.’ 하니 장난스레 그렇다고 합니다. 이음이가 먹은 사탕 봉지에는 ‘배고파요.’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함께 두더지 집을 만들다가 내 등에 업혀 이음이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해가 넘어간 뒤에도 어슴푸레한 빛이 있어 이음이는 ‘왜, 아직 어둡지 않아?’ 라고 묻고는, ‘우리가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아 어둠이 기다리고 있나 봐.’ 라고 혼자 대답합니다. 이 곳 초롱산 기슭에는 아이들이 일어나야 해가 뜨고 아이들이 잠들어야 그제야 어둠이 찾아오고, 아이들을 가운데 두고 지구가 돕니다.
2019. 10. 23
어제는 어린이집에 가지 않고 이음이가 우리와 함께 놀러왔습니다. 이음이는 종이를 달라고 해서 스케치북을 찾아 주고, 나는 우리와 놉니다. 우리가 손으로 손수레를 가리키면, 태어나서 아기수레(유모차)보다 더 많이 탔다는, 손수레를 태워 달라는 말이 아니고, 나와 달리기 내기를 하자는 겁니다. 우리 둘만 알아듣는 손짓말입니다. 우리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나는 손수레를 끌고 뒤따라갑니다. 우리는 늘 앞서가다가 잠깐 멈춰 뒤를 돌아봅니다. 내가 따라오는 걸 보고는 그제사 웃고는 소리를 지르며 내달립니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숲길을 내려가 가랑잎 서너 장 도토리 몇 톨 손수레에 싣고 돌아옵니다.
이음이는 아직도 나무난간에 앉아 종이를 자르고 있습니다. 사람과 나비와 별 모양으로 종이를 오려서 종이인형극을 보여줍니다. 이음이는 나비가 되기도 하고 별과도 이야기합니다.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며 비행기가 지나갑니다. 놀란 듯 우리가 세발자전거를 내팽개치고 엉금엉금 계단을 기어올라 내 무릎에 앉습니다. ‘소리야, 달아나라.’ 하고 나는 우리 두 귀를 손바닥으로 막습니다. ‘어, 비행기가 지나갔을까.’ 두 귀를 열었다가 막기를 되풀이하고, 이음이는 재미있는 듯 웃습니다. 가을 바람이 차가운지 내 몸으로 막아달라고 하던 이음이도 얼른 내 품에 안깁니다. 지금 내 마음은 깃털 가벼이 하얀 구름이 떠가는 파란 가을 하늘입니다.
2019. 10. 24
울림이와 ‘쥐와 고양이’ 놀이를 합니다. 내가 고양이가 되어 쥐를 쫓아가면 얼른 계단을 딛고 나무난간으로 올라갑니다. 내가 뒤따라가려 하면 여긴 쥐구멍이라 고양이는 올라올 수 없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난간 둘레를 서성거리면, 고양이가 쥐구멍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하나 있다며, 눈을 감고 오라고 합니다. 이는 울림이가 만든 규칙입니다. 울림이와 이음이는 늘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노는데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웃고 소리 지르고 시간 가는 줄도 모릅니다. 울림이가 만든 ‘사육사와 고양이’ 놀이는, 나와 이음이가 고양이가 되어 사육사를 쫓아가고, 잡힐 만하면 갑자기 사육사가 멈춰서서 주머니 속에서 보이지 않는 모이를 꺼내주고, 우리는 엎드려 모이를 주워 먹는 놀이입니다. 그러고는 사육사는 또 달아나지요. 울림이는 지금쯤 잠들어 있겠지요. 울림이 꿈속으로 들어가려면, 고양이가 쥐구멍으로 들어가듯 눈을 감고 더듬더듬 찾아가면 되겠지요.
2019. 10. 31
‘할머니, 할아버지 있다.’ 아이들끼리 수런거리더니, 이윽고 이음이가 언덕을 내려다보며 ‘할머니.’ 하고 소리칩니다. 아내는 껄렁껄렁 다리를 흔들며, 보이지 않는 이음이 흉내를 냅니다. ‘이리 와 봐.’ 하고 이음이가 아내와 나를 부릅니다. 아내는 이음이가 눈부시어 쳐다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햇살이 울림이네 지붕으로 넘어오는 까닭도 있습니다. 햇살을 헤치며 울림이네 마당으로 올라갑니다. 엄마는 이음이에게 좋은 일이 생겨서 그렇다고 합니다. 아빠가 새로운 레고를 선물했나 봅니다. 이음이는 숲과 들판을 누비는, 한 쪽 바퀴가 큰 자동차를 보여주며 자랑을 쏟아 놓습니다. 뒤에 선 울림이도, 조각들을 맞추기가 꽤 까다로워 보이는, 우주선 같은 레고를 들고 한껏 자랑스러워 합니다. 집으로 들어가면서도 이음이는 ‘이거 좋지.’ 하며 다시 자동차 레고를 들어 보입니다. 언덕을 내려오며 아내는, 우리를 알아주는 아이들이 있어 우리가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2019. 11. 1
아이들이 엄마와 같이 언덕을 내려옵니다. 창문으로 내다보다가 아이들을 맞으러 얼른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오늘 학교에서 음악회가 있어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보러 오라고 부르러 왔습니다. 울림이는 첫번째 나온다며 마음이 들떠 있습니다. ‘할아버지한테는 울림이가 말했으니, 할머니한테는 이음이가 말하면 좋겠다.’고 엄마가 얘기합니다. 엄마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할머니, 우리 음악회 해요.’ 라고 크게 소리치며 울림이가 집으로 달려갑니다. 이음이는 두 눈이 커지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합니다. ‘할아버지가 어서 가서 울림이가 입을 틀어막을게.’ 이음이를 달래고는,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방으로 들어가는 울림이를 쫓아갑니다. 나는 잇달아 소리치는 울림이 입을 틀어막고, 낌새를 알아차린 아내는 아무말도 못 들었다며 시치미를 뗍니다. 그제야 뒤따라온 이음이가 ‘할머니, 오늘 음악회를 하니 와.’ 라고 합니다. 울림이가 어디에 서 있나 두리번거리며, 음악회 내내 가슴이 따뜻해지고 가끔은 두 눈이 젖곤 했습니다. 아내도 아이들이 부르는 ‘가을 밤’이라는 동요를 들으며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는 오늘 아침 막 하늘에서 내려와 늘 아내와 나를 가슴 뛰게 합니다.
강당에서 퍼져 나오는, 5학년 아이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더니, 이음이가 ‘아, 어디서 들은 노래인데.’ 라고 합니다. 내 귀에도 익은 노래입니다. 뒤 운동장으로 올라가서 다시, ‘봐, 어디서 들은 노래 맞지. 내가 거짓말 안 했지.’ 라고 합니다. ‘그래, 맞아.’ 라며 앞뒤도 모른 채 나는 맞장구를 칩니다. 나는 짐짓, ‘거짓말은 어떻게 치지. 그거 되게 어려운데.’ 라고 이음이에게 물어봅니다. 그건 쉬운 거라며 이음이는 보기를 들어 말합니다. ‘하늘에 구름이 있지. 구름 위에 앉아 놀았다고 하는 거는 거짓말이야.’ 그래도 내가 어렵다고 하니까. ‘물고기 알지. 물고기가 땅에서 파닥파닥한다고 하면 거짓말이야.’ 라며 다른 보기를 들어줍니다. 손에 구름 한 귀퉁이를 잡고 있는 아이 하나를 그려 놓고는 ‘구름아 놀자.’고 하던 이음이는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하기는, 단이가 고라니를 쫓아다닌다고 온 산과 다랑이논을 쏘다니다 오면, 내가 아이들 말로 ‘단이 옷이 다 젖었다.’고 하면, 이음이는 ‘그건 옷이 아니고, 털이 젖었다고 하는 거야.’ 라며 어른 말로 바꿔줍니다. 나는 갈수록 나이를 거꾸로 먹고, 아이들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갑니다.
2019. 11. 3
젊은 날,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깁니다. 하루는 뭘 팔러 다니시는 할머니 한 분이 집에 들렀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그 분이 가엾어 수세미 하나를 사 주고, 더운데 잠깐 쉬어 가라고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무심코 지나가는 말로, 이 집 큰아들은 늘그막에 아이들이 많이 모여들 거라고 했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니 아이들이 늘 내 둘레를 맴돌았지만, 늙어서도 그런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찾아들곤 했습니다. 예순이 가까워서도, 담임을 발표하는 날 내 이름이 불리면, 소나기 쏟아지듯 손뼉을 치며 아이들이 그리 좋아할 수가 없기는 했지만요. ‘이 거 귀엽지.’ 하며 울림이가 가리키는, 이음이가 그린 그림입니다. 팔랑개비 같기도 한, 종이 팽이 날개에 그린 그림은, 마치 ‘캄펑의 개구쟁이’ 라는 만화에 나오는 시골 아이들 같이 정겹습니다. 겁나게 귀엽다고 하니, 이음이가 더 귀여운 것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나는 안 된다고, 할아버지 쓰러진다고 두 눈을 가리니, 아이들은 억지로 눈을 가린 내 손을 떼어냅니다. 마치 알밤을 까먹는 다람쥐처럼, 두 손을 오무려 턱밑에 대고 입도 오물오물 이음이는 귀여운 표정을 짓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날마다 찾아오는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가 그 할머니가 말한, 내 노을질 녘에 찾아든 가장 귀한 선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2019. 11. 8
‘할머니, 아직 그거 가슴에 있어요?’ 이음이가 묻습니다. 아내는 윗옷을 들추고 가슴속에 넣어둔 쪽지를 꺼내 보입니다. 순간 이음이 얼굴이 환히 피어나고, 아내는 이음이를 꼭 안아줍니다. 잇달아 우리와 울림이 볼을 쓰다듬고는 보듬어 줍니다. 엊그제 울림이 소풍 가는 날, 김밥과 함께 엄마가 받아쓴, 이음이 편지를 현관 밖에 두고 갔습니다. 몸이 아픈 아내는 이음이 편지를 보자마자 눈물에 젖어 목이 메고, 편지를 가슴속에 고이 넣어두었습니다.
‘할머니, 누워서 김밥 드세요. 그러면 또 소화가 안 되면 앉아서 먹으던가 하세요. 할머니 김밥 안에 좀 빠진 것도 있고, 김밥 그림도 색깔이 없어서 좀 다르게 했어요. 이제 끝. -이음-
(왼쪽 아래에는 ‘누워서 김밥 먹는 아내 모습’을 그려 놓았습니다.)
2019. 11. 9
‘톳제비가 장난을 친 걸까. 어떻게 이게 내 주머니에 들어있는 걸까.’ 옷을 갈아입으려고 주머니를 뒤지니,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서 이것이 나왔습니다. 윗밭에서 양파모를 심고 있을 때, 울림이가 찾아 올라와 자랑하던 것이었어요. 내가 어릴적엔, 단추 구멍에 무명실을 끼어 빙빙 돌려서는 팽팽히 늘였다 줄였다 하면 잉잉 소리를 내며 단추가 돌아가는 노리개였습니다. 아까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를 손수레에 태워 산길을 내려갈 때 차삯을 달라니까, 울림이가 가랑잎 한 닢을 내 왼쪽 바지 주머니에 넣어준 건 기억이 납니다. 생각하면, 아이들이 우리 집 이웃으로 이사온 일도 톳제비 장난처럼 놀라운 일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거나 신기한 것이 있으면, 달려와 맨먼저 우리에게 알려주는, 늘 가슴 뛰게 하는 아이들은 머언먼 신비한 나라에서 왔겠지요.
2019. 11. 11
엊그제는 강화에 사시는, 아이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오셨습니다. 내가 집을 잠깐 비운 사이, 외할아버지가 닭장을 치우신다며 아이들이 장화를 빌리러 왔습니다. 엄마는 ‘아랫집 할아버지에게 가서 장화 빌려주세요.’ 라고 하라며 가르쳐 주자, 이음이는 ‘우린 친구니까 그냥 빌려줘 하면 된다.’고 했답니다. 아내 말로는, 이음이가 광대나물 꽃 한 송이를 건네주며 장화를 빌려갔다고 합니다. 지금도 신발장 천사 인형 앞에 광대나물 꽃이 시든 채 놓여 있습니다. 저녁에는 외할아버지가 나와 아내를 집으로 부르셔서 오랜만에 술 한 잔도 했습니다. 우리가 아내 무릎으로 기어올라 아내에게 안기더니 내 품으로 건너와 폭 안깁니다. 이오덕 선생님 임길택 선생님 권정생 선생님 이야기를 하며 자정이 가까워질 때까지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2019. 11. 14
웃음 가득 베문 채 몸을 흔들며 울림이가 계단을 내려옵니다. ‘울림이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봐.’ 라고 물으니, 세 밤만 자면 생일이라고 합니다. 태어난 기쁨을 온몸으로 드러냅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다녀가시고, 엊저녁에 서천에 사시는 친할머니 친할아버지가 오셔서 저녁을 함께했습니다. 할아버지 수염을 어루만지던 우리, 엄마를 꼭 안아주던 할머니 모습이 가슴에 따뜻이 남아있습니다. 사진 속에 내가 웃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황금성 선생님이 찍어 보내주셨습니다.
2019. 12. 3
‘부채쉬’란 말을 아시나요. 참 오랜만에 만난 이음이가, ‘할아버지, 부채쉬 보여 줄까.’ 했을 때, 나는 금방 알아챘어요. 오줌이 마렵다고 했으니까요. 어제는 ‘할아버지, 부채쉬 하는 방법을 알려 줄까.’ 해서 ‘그래.’라고 했더니, 힘을 세게 주어야 한다고 했어요. ‘부채쉬’는, 부챗살처럼 퍼지는 오줌’을 가리키는, 이음이가 말들어 낸 말이에요. 이음이와 울림이와 나는 가끔 나란히 언덕에 서서, 누가 오줌을 멀리 누나 내기를 하지요.
2019. 12. 4
‘이음아, 너는 할아버지와 친구지.’
‘응.’
‘할아버지와 친할버지도 친구거든. 그럼 이음이는 친할아버지와도 친구겠네.’
아무리 따져 꼬드겨도 이음이는, 친할아버지와는 친구가 아니랍니다. 엄마는 연극 연습하러 가고, 아이들은 포롱포롱 우리 집 구들방을 날아다닙니다.
2019. 12. 14
아궁이에 군불을 지핍니다. 굴뚝에서 피어올라 소나무 가지를 스치는 연기는, 해 질 무렵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이내’ 같습니다. 아이들 소리가 창문 밖으로 튀어나옵니다. 어젯밤에도 구들방에서 늦게까지 놀다 갔습니다. 처음에는 울림이가 가져온 카드로 ‘메모리 게임’을 했습니다. 두 장의 카드를 뒤집어 같은 그림이 나오면 가져오는 기억력 놀이인데, 아이들이 훨씬 잘해, 아이들이 열 개를 맞추는 동안 나는 하나도 제대로 가져오지 못합니다. 이어서, 울림이가 생각해낸 ‘텔레비전 놀이’를 합니다. 내가 채널을 돌리는 시늉을 하면 울림이는 전등을 끄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이들은 손전등으로 저희 얼굴을 비추며 노래도 하고 광고도 하고 연극도 합니다. 데굴데굴 구르며 웃느라고 무엇 하나 끝까지 마무리 짓지 못합니다. 그 놀이마저 시들해지면,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노래를 하거나 이야기를 들려주는 놀이를 합니다. 서로 먼저 노래를 하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기면 울상을 합니다. 끝내 울림이가 들려주고 싶은 ‘감자 이야기’는 듣지 못하고 나중으로 미루었습니다. 요즘 ‘우리’는 아내 흉내를 내어 뒷짐을 지고 다닙니다.
2019. 12. 19
햇빛이 비치니 창문에 난 아이들 손자국이 드러납니다. 저만치 높이이면 우리 손자국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락 계단도 손을 잡지 않고 혼자 내려옵니다. 곁에서 잡아주려고 하면 손을 뿌리칩니다. 얼마 전에는 아내가, ‘우리가 침대에서 뛰어내렸다.’며 놀라워했습니다. 내가 보니까,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리는 게 아니라, 구름 위를 걷듯 허공을 걷는 것입니다. 바닥에 풀썩 떨어져 손을 짚은 채 다시 일어납니다. 침대에서 거꾸로 흘러 내려와 쳐박히기도 하고,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높이 멀리 날아갑니다.
2019. 12. 26
이음이가 네 살 때 그린 ‘인어공주’를 아내가 수를 놓았어요. 이음이가 그린 인어공주는 눈이 참 선해 보여요. 이럴 땐 ‘착하다’보다는 ‘선하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듯해요. 한자말이어서가 아니라 소리가 부드럽게 느껴지거든요. 수를 놓으면서 아내는, 이음이 마음이 되어 보았다고 해요. 살포시 웃음 띤 가느단 입술 선도 따라 그리기 어려웠다고 해요.
할아버지의 글을 읽으며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와 아이들이 함께 있던 그 순간들을 떠올린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 아이들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그만 울컥하여 눈물을 흘리고 만다.
거짓 없고 맑은 그 순수들이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난다.
할아버지 글을 옮기다 멈추어 선지도 어느덧 3년.
이제 막 학교에 갔던 여덟 살 울림이는 열한 살 고학년이 되었고,
다섯 살 꼬맹이 이음이는 여덟 살이 되어 학교에 갔다.
걸음걸이 뒤뚱거리며 겨우 몇 마디 하던 두 살 '우리'는 이제 자전거도 씽씽 타고 할아버지랑 말장난도 쉽게 하는 다섯 살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여전히 집에 오자마자 아랫집으로 우다다 달려간다.
오늘도 '우리'는 자전거에 몸을 싣고, 울림이 이음이는 할아버지와 삼촌이 만들어 주신 농구 골대에 공을 집어넣으며 신나게 논다.
2.
2019. 9. 2
오늘은 아이들과 산을 올랐습니다. 마을로 내려가다 왼쪽으로 오르는 산길은 아이들에겐 가파르지만, 산밭으로 이어진 길이 포장이 되어 있어 쉬엄쉬엄 오르면 됩니다.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 강아지 ‘단’이와 ‘보리’, 고양이 ‘호미’와 ‘밤이’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오릅니다.
나중엔 엄마도 따라왔습니다. 오르다가 칡꽃도 보고 매미 허물도 보고 죽은 황금풍뎅이도 보고 놀라서 후두둑 날아가는 새도 보고, 숲 사이로 집이 보일 땐 ‘야, 우리 집이다.’ 아이들이 소리치기도 합니다. 한참 오르다 보니 길을 가로질러, 휘어진 비닐하우스 막대가 하나가 꽂혀 있습니다. ‘저게 문인가 보다.’ 하니, 울림이가 여기서 잠깐 멈춰 함께 통과하자고 합니다. 울림이는 뭔가 대단한 것을 본 것처럼 뒤돌아서서, ‘야, 터널이다!’ 라고 잇따라 소리칩니다. 나는 뒤따라 온 엄마가 실망할까봐 그냥 막대 하나 덜렁 꽂아 놓은 거라고 하니, 엄마는 보자마자 울림이처럼 ‘야, 터널이다.’ 라고 놀란 듯 소리칩니다. 지난 봄 이음이가 소풍 가는 날이 생각납니다. 그 날은 구름이 잔뜩 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했는데, 이음이보다 더 가슴 졸이며 안타까워 하던 엄마, 작은 일에도 놀라고 설레는 엄마 품에서 아이들은 가슴 도근도근거리며 세상을 만납니다.
고갯마루에 오르니 멀리 홍성 읍내와 내포 신도시가 보입니다.
사진은, 울림이가 그린 장수풍뎅이와 사슴벌레, 아내와 함께 풀벌레를 살펴보는 아이들입니다.
2019. 9. 3
울림이가 자주 하는 말은 아니지만, 어쩌다 ‘이음이와 똑같은 것을 달라’고 하면 나는 끝까지 따져 묻습니다. 이 세상에 똑같은 것이 어디 있느냐고, 공장에서 찍어내지 않고는 똑같은 것은 없다고. 오른손과 왼손이 똑같다고 울림이가 두 손을 펼쳐 보이면, 어디가 똑같으냐며, 나는 지문과 손금까지 짚어 가며 다그칩니다. 이음이가 똑같이 말하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어제는 산을 내려오는데 이음이가, 울림이가 길바닥에서 주운 황금풍뎅이와 똑같은 것을 잡아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음이가 다음에 할 말을 미리 알기에 서둘러 내가 먼저 말합니다. ‘할아버지가 완전 똑같은 것을 잡아줄게. 웅웅 소리를 내며 하늘을 나는 새처럼 큰 것, 지구보다 더 크고, 우주보다 더 큰 것’이라고 하면, 이음이는 더는 보채지 않습니다.
울림이는 자존심이 세서인지, 제가 아는 것을 누구한테도 배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즘 들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혼자 생각했다든지, 책을 보고 알았다든지, 그나마 윤경아 선생님이 가르쳐 주었다고는 합니다. 셈하는 것도 한글을 읽고 쓰는 것도 말입니다. 며칠 전에는 ‘달개비’라는 풀꽃 이름을 알기에, 놀란 듯 누가 가르쳐 줬냐고 물었습니다. 울림이가 ‘책에서...’ 라며 머뭇머뭇하자, 곁에서 이음이가 ‘그 거 할아버지 가르쳐 줬잖아.’ 라고 울림이 대신 대답합니다. 자존심이 상한 듯 울림이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달개비, 닭의장풀’이라고 일러 준 걸 나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습니다.
이음이가 돌계단을 올라가며 혼자말로 ‘여기 소루쟁이가 많네.’ 라고 합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음이를 꼬옥 안아줍니다. 지난 번 당근이라고 하길래, 소루쟁이 뿌리라고 내가 가르쳐 줬거든요.
2019. 9. 4
‘빡빡이 삼촌.’ 마실 물을 갖다주고 뒤돌아서 있는, 머리를 짧게 깎은 지우를 보고, 이음이가 들릴락 말락 작게 소리칩니다. ‘이음이는 지우 삼촌이 무섭나 보구나.’ 라고 하니, 이음이는 큰소리로 다시 ‘빡빡이 삼촌.’ 이라고 소리칩니다. 지우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길래, ‘이음이가 무서워 들어가는가 보다.’ 라고 말하니, 이음이는 지우 삼촌이 벌벌 떨면서 들어갔다고 합니다.
아까부터 우리는 손수레 곁에 서서 ‘어어어’ 라며 소리지릅니다. 손수레를 태워 달라는 신호입니다. 내가 가려면 이음이는 저와 놀아 달라고 못 가게 하고, 우리는 다시 ‘어어어’ 라고 소리치며 손짓으로 나를 부릅니다. 울림이가 색연필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간 사이, 이음이에게 허락을 받고 우리를 손수레에 태웁니다. 산길을 한 바퀴 돌고 마당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데, 어느새 우리는 손수레 안에서 잠들었습니다.
울림이와 이음이는 색칠 공부를 하다 말고 아기 놀이를 합니다. 이음이는 내 윗옷을 들추고 배로 들어가고, 울림이는 등으로 들어가 내 목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내밀어 옷이 다 늘어났습니다.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소리치자 울림이는 돌아가고, 안 가려고 떼쓰는 이음이를 업고 집에 데려다 줍니다.
2019. 9. 8
가랑잎을 들추고 꼬물꼬물 아이들이 기어나옵니다. 큰바람 속에 어디 숨어 있었는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빗방울 툭툭 털고는 돌계단을 내려옵니다. 울림이 손을 잡고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 우리는 나를 보자 반가운 낯빛입니다. 나는 우리를 보듬어 안습니다.
‘우리 집은 전기가 나가 불이 몇 번 깜박깜박 했는데, 강화에 외할아버지 집은 정전이 되어 한 시간이나 촛불을 켰는데, 지금도 그러고 있을 거라’고, 오랜만에 만난 울림이가 쉬지 않고 떠들어 댑니다. 이음이는 아빠한테 들었다며, 얼굴에 열이 올라 불이 올라 머리가 반짝반짝 빛난다며, 재미나는 이야기라고 들려줍니다. 나중에 울림이가 ‘불이 올라.’를 ‘화가 올라.’로 고쳐줍니다. 누가 화가 치밀어 머리카락이 다 빠졌다는 이야기인지, 무슨 사연인지도 모른 채 나는 그냥 재미있게 듣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외발 손수레에 태워 숲길 한 바퀴를 돌고, 울림이와 이음이와 아내와 함께 마룻바닥에 퍼질러앉아 딱지치기를 했습니다.
2019. 9. 9
울림이 딱지상자 속에 들어있는 딱지는 백 장이 더 되는 듯합니다. 색종이로 접은 것, 우유갑으로 접은 것, 딱지 두 장을 겹쳐 놓아 앞뒤 얼굴이 똑같은 것, 별 모양을 한 것도 있고, 어떤 딱지는 신문지를 뭉쳐 유리테이프로 둘둘 감아 놓았습니다. 울림이가 하는 말로 ‘방어력이 좋은’ 얇은 딱지도 있고, ‘공격력이 센’ 배가 부른 딱지도 있습니다.
나도 어릴적 보물상자가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딱지와 구슬, 사금파리와 갑오징어뼈 들이 있었습니다. 울림이와 어릴적 내가 다른 점은, 나는 집에 들어갈 때 그 보물상자를 마루 밑 깊숙이 숨겨 두었고, 울림이는 엄마가 딱지상자를 잘 모셔 두었다가 꺼내준다는 점입니다. 하기사 엄마는 울림이가 쓱쓱 그린 낙서까지 정성스레 챙겨 두니까요.
2019. 9. 10
아내 보고는 장난스레 ‘할멈’ 이라 부르고 나한테는 ‘늙은이’ 라고 하더니, 내 이름을 알고부터는 ‘김종도’ 하고 소리칩니다. 나는 ‘왜 !’ 라고 대답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아이들은 나를 ‘종도쌤’이라고 불렀습니다. 곁에 선생님들이 버릇 없다고 넌지시 아이들을 꾸짖기도 했지만, 교감 일을 맡게 되었을 때도 아이들은 한결같이 내 이름을 불렀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어느 신부님이, 내가 교실이나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섞여 공을 차고 엉켜 뒹굴며 뛰어노는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아이들이 내게 와서 자연스레 어깨동무하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울림이가 내 머리에 모래를 뿌리고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른들은 걱정하지만, 나는 그 때 울림이를 어떻게 골탕 먹일까 하는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울림이가 내 이름을 알고 불러 줘서 참 좋습니다.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가는, 울림이와 이음이를 태운 차가 비탈을 미끄러지듯 내려갑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곁으로 세월이란 강물도 스르르 흘러갑니다.
2019. 9. 13
그냥 ‘할아버지가 미안해.’ 라고 말할 걸 그랬습니다. 이음이가 ‘할아버지, 나빠.’ 라고 했을 때, ‘생각해 봐, 할아버지가 무얼 잘못했어.’ 라며 일의 앞뒤를 이야기하려고 하자, 갑자기 이음이 두 눈이 부풀어 오르더니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딱지치기를 하다 벌어진 일입니다. 이음이와 울림이는 같은 편을 먹었는데, 몇차례 돌아 이음이가 칠 차례인데 울림이가 딱지를 치려고 우기다가, 서로 발로 차고 딱지 쥔 손으로 얼굴을 때리며 다투었습니다. 나는 얼른 이음이를 품으로 감싸고 울림이를 꼼짝 못하게 두 손으로 내려눌렀습니다. 그러자 울림이는 ‘이음아, 나 살려 줘.’ 라고 소리치고, 도리어 이음이는 나를 발로 차고 꽉 쥔 주먹으로 때렸습니다. 내가 손으로 뻗어 막자, 딱지를 던지고 벗어 놓은 신발을 던졌습니다. 나도 같이 이음이가 던진 신발을 주워 던지고, 딱지는 멀리 길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울림이는 벌써 항복하고 뒤로 물러섰는데, 이음이가 끝까지 버티다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이음이 뒷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음이를 생각하면 내내 누르는 듯 가슴이 뻐근했는데, 다음날 아침 아이들은 까맣게 잊은 듯 ‘할머니, 할아버지!’ 라고 소리칩니다. 어제는 엄마가 배가 아프다며 맨밥을 얻으러 왔습니다. 엄마가 아파서인지 이음이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나는 장난말로 ‘너, 할아버지한테 하듯 엄마 배에 올라가 쿵쿵 뛰었지.’ 라고 하니까, 그건 아니라고 합니다. 오늘 새벽, ‘우리 구들방 옆 방에 웬 아이 둘이 들어와 자더라.’는 꿈 얘기를 하니, 아내와 우인이가 ‘이음이와 울림이가 보고 싶어 그런거야.’ 라고 합니다.
2019. 9. 14
바람이네 식구들이 추석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참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울림이, 이음이, 우리, 엄마, 아빠 온식구가 함께 우리 집에 모인 일은 처음 입니다. 이음이는 서천 할아버지 선물이라며 책 한 권을 들고 왔습니다. ‘신동엽 시전집’입니다. ‘그 거 할아버지가 엄청 좋아하는 책인데 어떻게 하지’ 라며 호들갑스레 떠드니까, ‘그냥 받어.’ 라며 쿡 찔러 줍니다. ‘산에 언덕에’라는 시노래를 황금성 선생님의 웅숭깊은 목소리로 듣고 싶습니다.
오늘은 울림이 이음이 우리를 외발 손수레에 태워 마을회관까지 갔다 왔습니다. 빈 집 울타리에서 탱자도 따고 꽃사과도 따고, 도랑 가에서 아이들이 바닷속 해마 같이 생겼다는 물봉선화도 몇 송이 꺾어 왔습니다. 외발 손수레의 연료는 풀잎과 나뭇잎입니다. 아이들이 풀잎이나 나뭇잎을 바퀴와손잡이가 이어진 곳에 꽂아 두면, 손수레는 이 세상 어디로든지 갈 수 있습니다. 바다로 헤엄쳐 가고 하늘로도 날아갈 수 있습니다.
‘모자를 한 것 같아.’ 지칭개 작은 꽃봉오리 앉은 무당벌레 를 보고 이음이가 한 말입니다. 그러더니 할아버지한테 앉고 싶다며 풀을 뽑고 있는 내 무릎에 앉습니다. 나 : ‘내 무릎에 모자를 했네.’ 이음 : ‘그건 아니지. 머리에 해야지.’ 나 : ‘그럼 이건 뭐라고 하지?’ 이음 : ‘이건 합체한 거지.’ 요즘 이음이는 어린이집에 잘 가지 않습니다. 형 울림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곤 곧바로 우리 집으로 달려옵니다. 무릎에 앉힌 채, 요즘 형과 많이 싸우지 라고 묻자 처음엔 아니라고 하더니, 조금 싸운다고 합니다. 동생 우리는 자꾸 쫓아오고 형 울림이는 저 멀리 달아나고, 가운데에서 이음이는 제 나름대로 힘들어 하는 듯 보입니다. 개망초와 민들레도 서로 친척이라며 두 손을 다리는 꼭 붙여 움직이지 못하는 풀 흉내를 내거나, 공벌레 흉내를 내며 허리를 굽히는 이음는 여전히 귀엽습니다.
6.12
‘우인이 이모하고 지우 삼촌은 어릴 때 왜 싸우지 않았을까?’ 아이들을 앉혀 놓고 묻자, 울림이가 ‘두 개 있어서.’ 라고 대답합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해 다시 묻자, 울림이는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습니다. 그제사 생각이 났습니다. 똑같은 게 두 개씩 있으니 서로 가지려고 싸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울림이와 이음이는, 모종삽도 호미도 물조리도 망치도 킥보드도 자전거도 똑같은 걸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야, 우인이 이모는 여자아이고 지우 삼촌은 남자아이라, 노는 게 달랐기 때문이야.’ 언제인가 이음이가 울면서 ‘나는 형이 하는 거 다 하고 싶어.’ 라고 소리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울림이는 동생이라고 마냥 양보만 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우인이한테 늘 네가 누나이니 양보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동생과 나이 차이가 한 해 보름밖에 나지 않는데, 그 일을 생각하면 우인이한테 참 미안합니다. 동생이라고 무턱대고 양보하지 않는 울림이는, 여섯 살 차이가 나는 막내 우리에게도 무엇을 빌릴 때는 먼저 우리의 생각을 물어 봅니다. 모든 것을 형처럼 하고 싶은 이음이는 형이 너무 좋고 세상에서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너, 평생 안 놀아 준다.’는 울림이의 말이 이음이에겐 무엇보다도 무섭게 느껴졌을 테지요. 요즘은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음이도 ‘할아버지, 평생 안 놀아 줄 거야.’ 라며 나에게 겁을 줍니다.
6.14
아침을 먹는 나를 기다렸다가, 밥을 다 먹자마자 이음이는 내 손을 끌고 안방으로 갑니다. ‘할아버지, 텔레비전 보자.’ ‘안 돼.’ ‘바둑 볼게.’ 이음이는, 가끔 내가 바둑을 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바둑을 조금 보다말고 이음이는 혼잣말로, ‘만화 보고 싶은 기분이 난다.’ 고 합니다. 단단히 잠가 둔 내 마음이 스스르 풀립니다. 우인이와 지우는 어릴 적에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자랐습니다. 저녁이면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어주거나 촛불을 켜서 그림자놀이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얼마 전에 우인이에게 어떻게 영어 선생이 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우인이는, ‘아마 어릴적 음악을 들으며 소리에 집중할 수 있어 그러지 않았을까.’ 하고 대답합니다. 오늘도 낮에 놀러와 이음이는 텔레비전을 보자고 조릅니다. 엄마가 왜 텔레비전을 보지 말라고 할까 라고 물으니, 눈이 나빠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아는 것으로 꽉 차 있는 이음이 머리가 조금씩 비워져.’ 라고 하니, 이음이는 텔레비전을 조금 보다가 머리가 비워졌나 만져보라고 합니다. 이음이 큰 머리를 두손으로 어루만지며 약간 가벼워진 것 같다고 하니, 이음이는 조금 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스스로 텔레비전을 끄고 일어섭니다. 사진은, 늘 우리 집 나무난간 아래 놓여 있는 아이들 킥보드와 자전거입니다.
6.15
‘머라고(뭐라고)?’ 이음이가 자주 쓰는, 경상도 억양이 묻어나는 이 말투는 아무래도 엄마에게서 온 듯합니다. 이음이가 쓰는 말이 하도 귀여워 그대로 적어 두기도 합니다. ‘호도독호도독’은 빨리 달리는 시늉을 할 때 쓰는 말이고, 원숭이를 흉내낼 땐 ‘우끼우끼’ 라고 합니다. 더러 내가 못 알아들으면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는, 이음이가 책에서 본 ‘흰머리독수리’라는 말을 내가 얼른 알아듣지 못하자 ‘흰 색깔 할 때 흰이라고 해 봐.’ 라며 보기를 들어 쉽게 알려줍니다. 이음이가 혼자 만들어 쓰는 말도 있습니다. 홀쭉이라는 말을 모르는 이음이는, 뚱뚱이라는 말에 맞서는 낱말로 ‘얇은이’이라는 말을 씁니다. ‘얇은이’라고 할 땐, 엄지와 검지를 거의 붙을 듯이 사이를 떼어 요렇게 라며 몸짓으로 보여줍니다. 사진은, 부엌 앞뜰에 핀 산수국입니다. 눈부시게 피었다가 가슴 서늘히 지는 꽃도 있지만, 산수국처럼 소리없이 조용히 피었다가 지는 꽃도 있습니다.
6.18
날이 어둑어둑하면 재넘이(산바람)가 산꼭대기에서 내려오고, 굴뚝 연기 자욱이 깔릴 무렵이면 슬금슬금 도깨비들이 나타납니다. 문을 열고 빼꼼히 내다보던 막내 ‘우리’ 도깨비가 돌계단을 구르듯 내려오고, 이어 꽥꽥 소리 지르며 이음이와 울림이 도깨비가 튀어나옵니다. 한바탕 귀여운 도깨비들이 뛰놀고 간 마당에는 부지깽이나 몽당비 대신 킥보드와 자전거가 나뒹굴고 있습니다.
6.24
‘동자꽃이 피었네.’ ‘하얀 동자꽃도 피기 시작했어요.’ 새벽이면 아내와 내가 주고받는 인사말입니다. 초롱산을 넘어온 해는, 아이들이 사는 지붕에서 우리 집 뜰로 눈부신 햇살을 쏟아붓습니다. 마당 가득 햇살이 번질 무렵 아이들이 하나둘 집에서 튀어나옵니다. 울림이와 이음이는 ‘할아버지, 할머니’ 크게 소리쳐 부르고, 막내 우리도 ‘어어’라며 반갑게 소리를 지릅니다. 막내 우리는 물장난과 손수레(밀차) 타는 것을 좋아합니다. 손수레에 다가가 한 발을 올리면, 태워 달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태우고 산길 한 바퀴를 돕니다. 비탈을 내려가다가 손으로 뽕나무를 가리키면 오디를 따 우리 입에 넣어줍니다. 울림이는 거의 저녁에 머리를 감기 때문에 가지런히 빗어도 자고 일어나면 오른쪽 머리칼이 치뻗어 있습니다. ‘너희 반 여학생 다 죽었다. 멋진 머리칼에 반해.’ 내가 놀리면, 울림이는 아니야 아니야라고 하면서 해죽이 웃습니다. 햇살 가득한 아이들은 어디에도 그늘이 없습니다.
6.25
‘튀겨 먹든지 놓아주든지 할아버지 좋은 대로 해.’ 풀밭에서 잡은 홍그래비(방아깨비) 새끼를 내 손에 쥐어 주며, 이음이가 하는 말입니다. 말투나 표정이 아빠를 닮았습니다. 이음이는 신발 속에 흙이나 모래가 들어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럴 땐 내 무릎에 앉히고 신발을 털어 줍니다. 형 울림이가 세상에서 가장 멋있다고 말하지만, ‘내 사랑을 받아주세요.’ 라며 날마다 엄마한테 풀꽃을 꺾어 바치는 이음이도 참 사랑스럽고 마음이 따뜻한 아이입니다. 얼마 전엔 식구들이 있는 자리에서 ‘할아버지는 바보’라고 하길래, 비밀인데 어떻게 알았냐고 했더니, 할아버지 마음속에 들어가 보았다고 합니다. 마음속에 들어가 보니, 할아버지는 심술이 네 개 있고, 할머니는 착한 것이 일곱 개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내가 들려준 놀부의 오장칠부 이야기에서 따온 듯합니다.) 걸핏하면 ‘할아버지 싫어.’ ‘나, 집에 갈거야.’ 라며 나를 놀리고 겁을 주지만, 이음이는 내 무릎에 앉는 걸 좋아하고, 집에 갈 때는 꼭 내 등에 업히거나, 가슴에 안겨 갑니다.
6.28
‘할머니,할머니’ 팔짝팔짝 뛰며 이음이가 소리지릅니다. 아내는 가슴 설레면서도 마음 한켠으로 살짝 두려움 같은 것이 스쳐간다고 합니다. ‘내가 정말 잘 살고 있는 건가?’ 하루 동안 보지 못했는데 저리 온몸으로 반갑게 맞이하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손수레에 태우고 산길 두 바퀴를 돌았습니다. 이제 마음이 조금씩 이어지나 봅니다. 으름나무 잎을 따서 건네주니, 나뭇잎으로 내 얼굴을 간지럽히며 장난을 칩니다. 숲 그늘 아래를 지날 때, 내가 ‘아이, 시원하다.’고 하면 저도 따라 ‘음음’이라고 소리냅니다. 막내 우리는 비탈진 언덕에서 킥보드나 자전거를 굴려 놓고 뒤따라가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킥보드는 혼자 굴러가다 풀섶에 쓰러지고, 우리는 소리를 지르며 구르듯이 그곳으로 달려갑니다. 넘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 뛰어가는 우리를 뒤쫓아가거나 먼저 달려가 앞에 섭니다. 우리는 달려와 서있는 내 다리를 꽉 붙잡습니다. 나는 다시 앞으로 달려가고, 멀리서 울림이가 달려오고 이음이가 달려오고 뒤따라 우리가 달려오고, 나는 몸을 낮춰 아이들을 안은 채 뒤로 넘어집니다. 세상을 다 안은 듯합니다.
7.1
막내 우리가 제 키를 훌쩍 뛰어넘는 긴 고추막대를 어깨에 멘 채 질질 끌고 다닙니다. 곁을 살피지 않고 앞만 보고 다니니까, 다치지 않으려면 옆 사람이 비껴나야 합니다.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막대기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우리를 보고, 아내가 ‘아무것도 모르니 힘이 세구나.’ 라고 합니다.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내가 이음이에게 ‘너, 저번에 할아버지 보고 바보라고 했지. 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힘이 세다고 하잖아.’ 라고 하니, 이음이는 아니라고 아니라고 거듭 우깁니다. 그러다가 내 품에 안겨 있던 이음이가, 뜬금없이 ‘할아버지, 시장이 뭐야?’ 라고 묻습니다. 마음속으로 ‘시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곳, 또 배가 고프다 라는 뜻도 있고’ 하면서 말을 꺼내려는데, 또다시 ‘사람이 뭐야?’ 라고 묻습니다. ‘사람, 뭐라고 해야지?’ 하는 순간, ‘꽃이 뭐야?’ 라고 묻습니다. 그제서야 눈치 챘습니다. 이음이는 ‘시장, 사람, 꽃’ 들이 무엇인지 모르니, 제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 하면서 얼굴을 마구 부비니까, 나를 놀린 게 재미있는 듯 자지러지게 웃습니다.
# 뒷이야기 오늘 아침 이음이를 만났습니다. 뒤란에서 땄다는 블루베리 한 알을 보여 주길래, ‘그게 뭐니?’ 라고 물어 보니, ‘그것도 몰라. 블루베리지.’ 라고 합니다. 나 :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블루베리를 어떻게 알아? 이음 : 자고 나니까 머릿속에 생겨났어.
사진은, 한 해 전 이음이 모습입니다.
7.6
텔레비전 속 만화영화에 빠진 이음이에게 슬그머니 장난을 치고 싶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음이가 너무 좋아.’ 하며, 앉아 있는 이음이를 부둥켜안고는 침대에 쓰러졌습니다. 넘어지면서도 이음이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마치 나를 타이르듯이 ‘나를 좋아하면 잘해 줘야지. 만화영화 볼 땐...’ 이라며, 만화영화 볼 땐 가만히 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나는 맥없이 이음이를 껴안은 손을 놓습니다. 이제는 이음이에게도 말이 밀립니다.
사진은, 이음이 할아버지가 보내주셨습니다.
7.7
‘할아버지’ ‘할머니’ 울림이가 부릅니다. 날은 어둑해지고 터덜터덜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나와 아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목청껏 소리칩니다. ‘어’ 하며 보이지 않는 울림이에게 소리질러 대답합니다. ‘어’는 막내 우리가 나를 부를 때 내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아내는 가슴이 뛴다고 합니다. ‘울림이가 무엇을 보여 주고 싶은가봐.’ 끌고 가던 손수레를 세워두고 아내와 나는 작은 언덕을 오릅니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울림이는 내 손을 끌고가 나무 난간에 세웁니다. ‘아, 노을을 보여 주고 싶었나 보구나!’ ‘조금 전엔 더 예뻤어요.’ 곁에 있는 엄마 말을 들으니, 울림이와 이음이, 우리를 안은 엄마가 나란히 서서 노을을 보고 있었나 봅니다. 곧 큰바람이 오려는듯 서쪽 하늘이 참 곱습니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강아지풀로 콧수염 만드는 걸 가르쳐 주고, 나는 내게 달려와 무릎을 꼭 붙잡은 우리를 두 팔로 들어올립니다. 내 품에 안긴 우리는 작은 두 손으로 내 볼을 만집니다. 울림이와 이음이는 내 두 손에 입맞춤을 하며 밤새 헤어지는 인사를 합니다.
7.22
비닐하우스에서 마늘을 다듬어 엮고 있는데 이음이가 찾아왔습니다. 내 곁에 앉으려는 이음이를 보고 아내가 ‘먼지가 나서 어떡하니.’ 라고 하니, ‘괜찮은데 어떡하니.’ 라며 장난스레 맞받아칩니다. 이윽고 울림이가 뒤따라 들어와선 손에 쥐고 온 숫자가 적힌 딱지로 카드놀이를 하자고 합니다. 할머니는 일해야 하니까 우리 셋이 하자고 하니 짝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늘 그렇듯 울림이는 이음이와, 나는 아내와 편을 먹고 놀이를 합니다. 한 장씩 내어 엎어 놓고 숫자가 큰 사람이 나머지를 가져가는 놀이입니다. 내가 17을 내자, 울림이가 얼른 뒤집어 보곤 이음이한테 19를 내라고 합니다. 내가 ‘그건 반칙이야. 가르쳐 주는 게 어딨어.’ 라고 하니, 옆에서 이음이가 ‘어차피 숫자를 모르는데.’ 라며 남의 이야기하듯 합니다. 이음이 저는 숫자를 모르니까 형이 가르쳐 줘도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입니다. 밥 먹으라고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울림이는 집으로 가고, ‘싫어.’ 하며 이음이는 나보고 다시 카드놀이를 하자고 합니다. 이음이 제가 나누어 준다며 카드를 섞으며 ‘나는 할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는 내가 되고...’ 혼자말을 합니다. 이음이 말을 제대로 받아 적지는 못했지만, 이음이는 할아버지 마음이 되어 내가 이기도록 숫자가 큰 카드를 골라 나눠준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아직 숫자를 읽지 못하지만, 날마다 놀이에서 지는 나를 가엾이 여겨 이리저리 카드를 고르는 이음이 모습은 그대로 한 떨기 사랑스러움입니다. 비닐하우스 아래 개망초 꽃너울이 흘러 넘쳐 내 마음 둑이 와르르 무너지는 저녁입니다.
7.25
‘할머니’ 하고 이음이가 비닐하우스에 들어서자, ‘우야’ 하며 아내는 이음이는 꼭 껴안아 줍니다. ‘오랜만에 칼싸움 한 번 해 보자.’ 라는 이음이 말에 작은 대나무 막대기로 서로 찌르고 막고 놀고 있는데, 울림이가 뒤따라와 카드놀이를 하자고 합니다. ‘어차피 숫자도 모르는데.’ 오늘은 내가 먼저 이음이 말을 흉내냅니다. 이 말을 하면서 속으로 이음이가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움찔했는데, 이음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생각에 잠겼다가 ‘어제부터 계속해서 생각했는데’ 라고 합니다. 어제부터 계속 생각해서 숫자 읽는 걸 알아냈다는 것입니다. 귀여운 장난말이지만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카드놀이를 시작합니다. 그나저나 카드놀이는 우리가 질 게 불보듯 뻔합니다. 울림이는 미리 카드를 골라 19 같은 큰 숫자는 제가 가지고, 우리에게는 10보다 낮은 숫자를 나눠 주는 까닭입니다. 울림이는 남에게 지는 걸 무척 싫어 합니다.
엊그제도 나는 아무 잘못이 없었습니다. 수돗가에서 물장난을 하다 울림이가 이음이 바지에다 호스로 물을 뿌렸습니다. 두어 차례 물을 뿌리자 이음이도 참지 못하고 발로 울림이를 찼습니다. 이음이 발은 비껴나갔지만 울림이가 일어나 다시 이음이를 차려고 해서, 나는 얼른 이음이를 안고 피하며 공을 차듯 울림이 엉덩이를 차는 시늉을 했습니다. 울림이는 물조리개에 물을 담아 나에게 뿌리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건 그러려니 하지만, 이음이도 형을 따라 작은 물조리개에 물을 담아 나를 쫓아오는 것입니다. 늘 일어나는 일이지만 무척 억울합니다. 이리저리 물을 피해 주강사님 집까지 달아났습니다. 마침 그곳에 바깥수도가 있어 호스를 찾아 울림이에게 마구 물을 뿌렸습니다. 형이 물을 맞으니까 이음이는 막대기를 들고 나에게 대어들고, 울림이는 우두커니 선 채 속이 상해 어쩔줄 몰라 합니다. 쫓아오는 울림이를 피해, 나는 뒤따라온 우리를 안고 숨가쁘게 뒷길로 달아났습니다. 집에 와서도 울림이는 수돗가 호스로 나에게 물을 뿌립니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내게는 닿지 않고 성이 풀리지 않은 물줄기는 오히려 울림이를 적시고, 우리는 분수처럼 흩어지는 물을 맞으며 마냥 좋아합니다. 보다못한 아내가 나를 붙잡아 울림이 앞에 세우고, 울림이는 실컷 내게 앙갚음을 합니다. 그제야 속이 풀렸는지 집으로 뛰어올라가 울림이는 엄마에게 자랑하듯 떠벌립니다. 아마 내게 이겼다고 말하겠지요.
7.28
‘애기 낳는 거 그 거 해보자.’ 라며 이음이는 내 런닝구를 들추고 뱃속으로 들어가 한참 꼬물꼬물거리더니 밖으로 나옵니다. ‘야, 아기가 태어났구나!’ 하는 내말에 이음이는 지팡이 짚는 시늉을 하며, 태어나자마자 할머니가 됐다고 장난을 칩니다. 갑자기 오래전에 하던 애기놀이가 생각났나 봅니다. 지난 겨울에는 응애응애 기어다니며 애기놀이를 자주 했는데, 요즘 이음이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오줌을 누다가도 내가 가까이 가면 눈을 감으라고 합니다. 오늘도 이음이와 울림이가 만화영화를 보고있는데, 내가 지나가는 말로 ‘너희들 만화 본다고 오줌 마려운 거 참고 있지.’ 하니까, 이음이는 정말 그렇다며 손으로 고추를 쥐고 있습니다. 잠깐 텔레비전 끄고 오줌 누고 오라니까 울림이가 안 된다고 하고, 물병을 가져다 준다고 하니까 이음이는 부끄러워서 안 된다고 합니다. 실랑이를 벌이다가 끝내는 방구석에서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린 채 이음이는 세숫대야에 오줌을 누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들려준 ‘나의라임오렌지나무’란 소설이 생각 납니다. 서부영화를 보다가 오줌이 마려워 극장 벽에다 오줌을 눈, 그마저도 제제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오줌을 눠 다시는 극장에 들어오지 말게 했던 이야기.
8.24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거나 어디에 갔다오면, 보이지 않는데도 마당에 서서 ‘할머니, 할아버지’ 크게 소리쳐 부릅니다. 언제인가부터 울림이는 이른 아침 잠옷을 입은 채 밖으로 나와 윗밭으로 올라옵니다. 헝클어진 머리칼, 입가엔 침 흘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혼자 일어나 오줌을 누고, ‘우리’가 자는 방에도 가보았다고 합니다. 꿈 꾼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가끔은 참깨 밭 그늘 아래에서 내 무릎에 앉혀 울림이가 가져온 그림책을 읽어 줄 때도 있습니다. 며칠 전부터는 이음이도 함께 데리고 나옵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 혼자 눈 떠 마주하는 세상은 아이들에게 어떤 모습일까요.
8.25
‘우리 반에 은진이라는 여자아이가 있는데 꾀를 부렸어.’ 마당에서 풀을 매고 있는데 이음이가 말을 건넵니다. ‘무슨 꾀를 부렸을까?’ 궁금해서 물으니, 은진이가 마이쭈를 준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집에 있다고 했답니다. 이음이는 그 일이 참 서운했나 봅니다. 어제는, 미끄럼틀에서 이음이를 떠민 우상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안되겠다. 할아버지하고 사탕 한 보따리를 사서 우상이를 찾아 가야겠다’고 하니, 이음이가 ‘단 거 많이 먹어 이빨 다 빠지게.’ 라고 해서 한바탕 웃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거나 집에서 쉬는 날엔 아이들은 흙이나 벌레, 풀이나 나무하고 놉니다. 오늘 아침엔, 날개가 이슬에 젖어 죽은 듯 보이는 배치레잠자리와 톡톡 튀는 송장메뚜기를 가지고 놀았습니다. 울림이는 송장메뚜기를 손에 쥐고 메뚜기가 얼굴에 가면을 썼다고 하고, 이음이는 이제 놓아 주라고 합니다. 조금 시간이 흘렀을까. 오무리고 있는 이음이 손엔 공벌레 대여섯 마리가, 울림이가 든 바랭이풀 이파리엔 민달팽이가 매달려 있습니다. 부드러운 모래와 새 깃털, 상수리 열매 껍질과 말라죽은 지렁이를 가지고 놀고, 달개비 풀과 부들 이름도 아는 아이들, 나는 풀섶에 떨어진 귀뚜라미 뒷다리를 보아도 얼른 아이들부터 찾습니다.
8.27
‘너희 학교에선 장난이란 과목도 배우니?’ 내가 묻자, ‘아니.’ 하고 배시시 웃는 울림이 얼굴에는 다글다글 장난기가 붙어 있습니다. 아내가 꽃밭에 물을 주고 있는데 이음이한테 몰래 수도꼭지를 잠그게 하고는 시치미를 떼고, 내 머리에 모래를 뿌리고 달아나는가 하면, 그제는 아이들이 오르내리는 돌계단에 풀을 매는 내 쪽으로 오줌을 누었습니다. ‘밤에 살그머니 장난요정이 귓속으로 들어갔나 보다.’ 라고 해도 귓등으로 듣는 듯합니다. 하지 말라는 건 끝내 하고야 맙니다. 이제 울림이는 어른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제 눈으로 보고 제 손으로 만져 세상을 배우고 있습니다.
8.28
이음이가 싫어하는 냄새 가운데 하나는 치과의사 선생님이 끼는 장갑 냄새입니다. 이음이가 생각하는 엄마의 가장 예쁜 모습은, 이음이가 꺾어 온 꽃을 든 빨간 치마를 입은 모습입니다. 한 해 동안 아이들과 뒹굴다 보니, 아이들 속살 보드라운 마음결을 어느 만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울림이가 화가 났을 땐 이치에 맞게 찬찬히 이야기하면 풀리고, 이음이가 토라졌을 땐 먼저 다친 마음부터 안아줘야 합니다. 울림이는 총명하고, 이음이는 눈물 많고 마음이 따스한 아이입니다. 아이들 보여준다고 아내는 죽은 풀벌레를 벽돌 위에 얹어 놓고, 나는 아침부터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아이들이 궁금히 여기는 ‘거미’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8.31
정작 서울에는 왜 갔는지 생각나지 않는다는 울림이를 네 차례나 다그쳐 답을 알아냈습니다. 어제도 울림이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 가서 자고 왔는데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친할머니가 옆방에서 잤고, 외할버지가 숙소 가는 길을 일곱 번이나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오늘 아침엔 그림을 그려가며 외할아버지가 어떻게 길을 잃었는지와 남산에서 케이블카를 탄 이야기를 하고, 서울에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스티커를 자랑했습니다. 그제는 아빠 졸업식(학위수여식)이 있어 서울에 갔는데, 울림이는 그 일보다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옆방에서 자고, 외할아버지가 길을 헤맨 것이 마음에 깊이 남았나 봅니다. 하루 못 봤는데 우리가 쑥 자란 것 같습니다. 걸음걸이마저 여유가 느껴집니다.
사실 최근에 많은 일들과 많은 생각이 복잡하게 영켜 글로 잘 풀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에 턱턱 막혔던 것도 같다.
잘 하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왜 매번 이렇게 무언갈 하려 하면 이렇게나 잔뜩 힘이 들어가는지.
2020년 목표 1번에는 '뭐라도 해보기(힘빼고)'를 넣어야 겠다.
아무튼, 이렇게 글쓰기 전에 마음이 복잡 할때 아랫집 할아버지의 일기를 옮긴다.
차곡차곡 쌓여 있는 할아버지의 글을 읽다 보면 마음이 따뜻해 지고 위로 받고 또 용기가 생긴다.
울림이는 이제 1학년이 다 끝나 가는데 옮기지 못한 할아버지의 글 속 울림이는 아직 입학식이다.
이제는 적어도 계절 별로 한번씩은 옮겨 놓자는 생각에 계절도 적어 두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다 옮기고 싶은데...
이곳으로 이사온 지 벌써 일년이 넘어간다.
겨우 기어 다니던 우리는 이제 뛰어 다니고,
아직 아기 같았던 이음이의 말투도 점점 또렷해 지고,
아직 유치원생이던 울림이는 이제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다.
아이들과 할아버지 할머니는 여전히 좋은 이웃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로 지내고 있다.
2.
2019.3.2
기분이 좋은가 봅니다. 이음이가 대청마루를 내달리며 혼자 소리를 지릅니다. 그럴 땐 온몸으로 소리를 내는 듯합니다. ‘우리, 멧돼지가 파 놓은 구덩이 보러 갈까.’ 아이들을 데리고 산길을 오릅니다. 오솔길 왼쪽 제법 가파른 비탈을 내려갑니다. 저만치 다랑논에 서너 군데 커다란 구덩이가 파헤쳐져 있습니다. ‘할아버지, 물이 고여 있어.’ ‘응, 멧돼지들이 내려와 웅덩이를 파고 목욕을 한 곳이야.’ 신기한 듯 한참이나 내려다 봅니다. ‘우리, 나무하고 갈까.’ 지난해 마을 어른이 표고버섯을 키우려고 베어가고 남은 참나무 가지들이 여기저기 누워 있습니다. 울림이는 기계톱으로 나무를 베는 것을 늘 보고 싶어 합니다. 강화도 사시는 외할아버지가 쓰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음이 손을 잡고 산비탈을 올라 오솔길을 내려가는데, 어느새 끙끙대며 울림이가 기계톱을 들고 옵니다. 울림이는 기계톱이 어디 있는지 눈여겨 보아 두었나 봅니다. ‘너 어떻게 그렇게 무거운 걸 들고 와’ 놀라서 묻자 ‘나는 도깨비잖아.’ 울림이가 배시시 웃습니다. ‘너희들 위험하니 저만치 떨어져 있어’ 아이들을 멀찌감치 푹신한 가랑잎 위에 앉혀 놓고, 나무를 벱니다. 나무를 서너 도막이나 잘랐을까 하는데, 울림이가 뭐라고 소리칩니다. 얼른 기계톱을 멈추고 쳐다보니, 이음이가 울상을 짓고 있습니다. 너무 소리가 커서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음이는 아직 어리고 소리에 퍽 예민합니다. 이음이를 데려다 저 위쪽에 앉혀 놓고, 몇 도막 더 자르고 그만두었습니다. 울림이는 아내가 꽃밭 만드는 데 가고, 나는 손수레를 끌고 와서 땔감을 싣고 그 위에 이음이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
이음이는 형을 잘 따르고 무척 좋아합니다. 더구나 형한테서는 좋은 냄새가 나고 결혼하고 싶다고 합니다. 나도 형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니, 우리 울림이와 똑같은 형을 갖고 싶은지 물어봅니다. 울림이 이음이는, 친할머니 친할아버지도 있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있습니다. 계순옥 황금성, 김정남 노광훈 할머니 할아버지 이름도 알고 있고, 해뜨리 평원이 삼촌, 지원이 여원이 이모 이름도 압니다. 마을에도 많은 삼촌과 이모들이 있습니다. 지난 번 잠깐 들르신 장선생님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 세상이 아이들 키우기에는 알맞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만, 도란도란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는,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연둣빛 번지는 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3
부옇게 미세먼지가 끼는 날이면, 아이들은 집 안에서 놀거나 입마개를 하고 뛰어서 우리 집으로 옵니다. 냉이를 캐던 그 날도 미세먼지가 끼었습니다. 한참 냉이를 캐다가 뒤돌아보니 어느 새 이음이가 입마개를 벗어 던졌습니다. ‘야, 이음이 너 미세먼지’ 라고 소리 치니까, 이음이는 언덕에 웅크리고 누운 채 주먹을 쥔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숨을 꼭 참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숨을 못 쉬어 죽겠다고 하니, 참았던 숨을 내쉬며 빙긋이 웃는 이음이 모습이 떠올라 지금도 웃음이 납니다. 울림이는 미세먼지가 코로 들어와 폐에 쌓인다고 가르쳐 주며, 호흡기관과 소화기관을 안다고 합니다. 그 날 그 날 미세먼지 수치를 알려주는 것도 울림이가 하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제법 높은 산기슭이라, 아랫동네에 비가 오면 여긴 눈이 내리고, 온통 숲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목이 컬컬할 만큼 미세먼지가 낄 때가 있습니다. 어느덧 편리함에 길들여진 우리 삶이 미세먼지를 부르고, 아이들이 마음껏 숨쉬고 놀 수 있는 곳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3.4
늦잠을 깨운 아이처럼 부스스 봄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투정 부리듯 봄도 이 땅엔 오고 싶지 않은가 봅니다. 산허리에 먼지 연기가 가득합니다. 울림이 가는 걸 보려고, 아내는 일찍 바깥에 일하러 나가 있습니다. ‘할아버지, 오늘 어디 가는지 알아.’ 저만치 문 앞에서 울림이가 묻습니다. ‘입학식.’ ‘어떻게 알았어.’ ‘할아버지가 생각했지.’ 오늘은 울림이 초등학교 입학식입니다. 엄마 아빠 우리 이음이와 함께 학교에 갑니다. 저 아이들이 있어 그나마 봄은 피어나고, 세상은 눈부십니다.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우리 집에 왔습니다. 울림이 손에는, 선물 받은 꽃그릇과 구슬 주머니가 들려있습니다.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도 입학식에 오셨다고 합니다. 방에서 구슬치기 놀이를 하다가 문득 엊그제 ‘할아버지, 나 귀를 움직일 수 있다’고 하던 울림이 말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귀를 움직일 수 있느냐고 묻자, 두 귀 모두라며 귀를 움직여 보입니다. 나는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사람들도 옛날에는 개나 고양이처럼 귀를 움직였다고 해. 사냥할 때 집중하려고 그랬던 거지. 더는 사냥을 하지 않게 되자 ‘이개근’이란 근육은 퇴화되고, 지금은 몇몇 사람만 귀를 움직일 수 있단다.’ 곁에서 내 말을 듣고 있던 이음이가, 할아버지도 귀를 움직일 수 있냐고 묻습니다. 나는 볼을 씰룩거리고 눈을 찡그려 보기도 하면서 할아버지는 안 된다며, 이음이는 움직일 수 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이음이는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방법을 몰라서 그런 게 아니야. 진화해서 그런 거야.’ 이음이는 진화해서 귀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털끝만큼도 장난칠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음이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울림이, 너는 아직 진화가 덜 된 거야.’ 울림이는 펄펄 뛰듯 아니라고 합니다. 나는 얼른 장난말이라고 얼버무렸습니다. 이음이는 엄마가 보고 싶다며 집에 갔다 온다고 방을 나갑니다.
3.5
학교 첫날 울림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담임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물어봐도 잘 말해 주지 않습니다. 겨우 알아낸 건, 담임선생님이 여선생님이고 1반 선생님보다는 나이가 적고 뒷머리를 땋았다는 겁니다. 산들이는 1반이고, 하온이는 같은 반인 2반이라는 걸 오자마자 먼저 떠들썩하게 얘기하는 걸 보면 울림이에겐 동무 사이가 더 마음이 쓰이나 봅니다. 요즘도 학교에서 아이들도 줄을 세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이 청소를 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우리 때는 왼쪽 가슴에, 접은 손수건 위에 이름표를 달고 ‘앞으로 나란히’ 줄을 맞춰 섰습니다. 청소는, 비로 쓸고나면 석필이나 초를 가지고 교실과 골마루 나무 바닥을 반들반들하게 문질렀습니다.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너무 미끄러워 아이들이 넘어질 때도 있었습니다. 나는 교사가 되어서도 평생 아이들과 함께 청소를 했습니다. 청소도 소중한 공부라고 생각하여 우리 학교는 수업 시간 사이에 청소 시간을 따로 만들어 넣었습니다. 하지만 몇몇 젊은 선생님 말고는 대부분 선생님들은 하던 대로 아이들에게만 청소를 시키고 딴 일을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입학 선물로 변기를 사 줄까’ 하니 빙긋이 웃던 울림이 얼굴이 떠오릅니다. 울림이는 저희 집 말고 다른 화장실은 잘 가지 않습니다. 우리 집에서 놀다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하면 벌써 저희 집 화장실에 가 있습니다. 요즘은 많이 진화했습니다. 지난 번엔 언덕에서도 오즘을 누었으니까요. 이음이는 변기를 선물 한다는 내 말을 듣자마자 또 신이 났습니다. ‘공부하다가 똥이나 오줌이 마려우면, 교실 변기에 앉아 똥 오줌을 누며 공부하고 ...’ 라면서 그 장면을 떠올리며 혼자서 무척 재미있나 봅니다.
3.8
어제는 아이들과 비석치기 놀이를 했습니다. 아내가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네모난 납작한 돌을 골라 왔습니다. 비석치기 하는 돌을 아내는 ‘목자’라고 부릅니다. 오랜만에 하는 놀이라 아내와 나는 아이들보다 더 들떠 있습니다. 마당에 두 줄을 긋고, 울림이와 아내, 이음이와 내가 편을 먹었습니다. 어느 쪽이 먼저 하는가는 가위바위보로 정하기로 했습니다. 울림이와 이음이가 뒤돌아서 등을 붙이고 가위바위보를 합니다. ‘가위 바위 보’ 이음이는 꼼짝 않고 가만히 있습니다. 무슨 일일까. ‘이음아 손을 올려 가위바위보를 내야지.’ ‘자, 다시 가위 바위 보’ 이음이는 까치발을 들고 어깨만 올립니다. 아, 이음이는 뒤돌아서 하는 가위바위보를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입니다. 손짓을 해서 가르쳐 주니, 그제야 보를 내어 이겼습니다. 처음엔 발등에 돌을 얹고, 다음엔 발목 사이에, 그 다음엔 무릎과 가랑이 사이에 돌을 끼우고 그러다가 차츰 올라가 배꼽 위, 어깨 위, 등 위, 머리 위로 돌을 얹어 나르며 비석치기 놀이를 했습니다. 이음이는 거의 한 번도 저 쪽 금에 닿지 못하고 가는 길에 돌을 떨어뜨렸지만, 놀이에 집중하는 모습이 너무 진지해서 우습기도 하고 참 대견스러워 보였습니다. 이음이에겐 모두 처음 있는 일입니다. 울림이가 아닌 아내와 편을 먹은 일,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놀이를 마무리한 일이 그렇습니다. 놀이 규칙을 잘 모르는 이음이는, 그 동안 놀이를 하다가 지면 억지를 부리거나 울음을 터뜨렸거든요. 울림이는 초등학교에 이음이는 어린이집 ‘나무반’에, 그만큼 떨어진 사이에서, 이음이는 혼자 서는 연습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3.9
오늘도 비석치기를 하자고 할 줄 알았는데, 아이들은 까마득히 잊고 밭에 오자마자 제법 비탈진 언덕을 오르내립니다. 물을 주려고 밭으로 이어놓은 호스 줄을 잡고 마치 산을 타듯 오릅니다. 올라오다 주르륵 미끄러져 울음을 터뜨리다 금방 그치고는, 이음이는 다시 야무지게 가파른 산을 오릅니다. 온통 흙을 뒤집어 쓴 듯합니다. 아내는, 인절미에 흙고물을 묻혀 놓은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아이들은 흙을 잔뜩 머금은 마른 풀뿌리를 언덕 아래로 집어던지고 놉니다. 에고 너희들 때문에 할아버지 ‘죽겠다’(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제목). 너희들이 학교 간 뒤 몰래 집을 짊어지고 이사 가야겠다고 하니, 그건 절대 안 된다고 합니다. 좀처럼 어린이집이나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지 않는 울림이가, 물어 보지도 않았는데도 먼저 학교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늘은 손을 뺀 나머지 몸으로 제 이름을 표현하는 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나는 학교에서 엉덩이로 이름 쓰는 것도 가르치느냐고 짐짓 놀려댔지만, 나중에 ‘할아버지, 나 우리 반에서 두 명 빼고 친구들 이름을 다 알아.’ 라고 했을 때, 아이들은 저렇게 놀이를 하면서 자연스레 친구들 이름을 익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제 그제 이틀은 계단 오르내리는 걸 했다고 합니다. 교실이 2층에 있으니까 다치지 않게 조심스레 오르내리는 공부를 했나 봅니다. 할아버지 학교에서는 계단을 뛰어내리고, 난간에 올라 미끄럼도 타고, 교실 창에 줄을 매어 오르내리는 것도 가르친다고 하니 곁에서 아내가, 할아버지는 아이들한테 그런 위험한 걸 다 가르친다고 핀잔을 합니다. 선생님도 예쁘시고, 학교도 재미있다고 하니 참 다행입니다.
3.10
단이가 짖더니 산속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나고 이윽고 꽹과리 소리가 납니다. 지리산에 살 적에도 가끔, 대숲 골짜기 큰 나무 아래 바위 틈에 치성을 드린 흔적이 남아 있곤 했는데, 어쩌면 ‘홍동의 강원도’라 부르는 여기도 외딸고 깊은 곳이라 사람들이 찾아와 굿을 하나 봅니다. 초롱산 어디쯤인가 등잔처럼 생긴 명당이 있다고 했는데, 맑은 기운이 감돌아 그런가 보다 생각해 보지만, 꽹과리 소리는 여전히 귀에 거슬립니다. 내가 받은 서양 교육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지도 않는 아이들을 떠올립니다. ‘할아버지, 저 게 무슨 소리야.’ 하고 울림이가 물으면, 나는 짐짓 못 들은 체하며 ‘어디에 무슨 소리가 나는데’ 라고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저기 산 속 꽹과리 소리 말이야.’ ‘아, 저 소리.’ 한참 뜸을 들이곤 ‘으음, 무당이란 사람들이 굿을 하는 거야. 사람들이 아프지 말고 나쁜 일이 생기지 말아 달라고 산신령님에게 비는 거야,’ 꽹과리는 왜 치냐고 물으면, 주무시는 산신령님을 깨우려는 거라고 말할 겁니다. 울림이는 틀림없이 내 말이 사실일까 아닐까 갸우뚱거리며 머릿속으로 셈을 할 테고, 곁에서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던 이음이는, 재미난 상상을 하며 고 귀여운 입으로 산신령님 구름 타고 어쩌고저쩌고 막 지꺼릴 겁니다.’ 그 사이 짧은 굿은 끝났습니다.
3.11
어제는 아이들과 주사위 놀이를 했습니다. 주사위 세 알을 한꺼번에 던져, 나온 숫자들을 더해 그 수만큼 말이 앞으로 나아가는 놀이입니다. 주사위 놀이판은 울림이가 그려 왔습니다. 1에서 60까지. 그런데 5와 6이 거꾸로 적혀 있어, 그 곁에 나머지 숫자들도 넘어져 있은 듯 보입니다. 마름모꼴로 둘러싸인 숫자에 가면 한 번 더 주사위를 놀 수 있고, 동그라미로 감싼 숫자에 다달으면 달리던 말을 서로 바꿔 타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숫자에 가면 사다리를 타고 앞으로 몇 칸 더 갈 수 있고, 어떤 숫자에 가면 미끄럼을 타고 도로 뒤로 돌아와야 합니다. 울림이가 한참 설명하고 나서야 우리 넷이 주사위를 놀았습니다. 어쩌다 보니 내가 먼저 말이 나고, 아내가 그 다음, 이음이가 그그 다음, 울림이가 골찌로 났습니다. 울림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주사위 판을 거두며 그만하자고 합니다. 우린 또 그만두어야 합니다. 나는 그제야 울림이에게 들려주려고 생각해 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할아버지가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야. 마을에 사는 한 젊은이가 학교를 다니다가 나라에 전쟁이 나 싸움터에 끌려갔어. 군인들이 수류탄 던지는 훈련을 하는데 그 젊은이가 차례가 됐지. 수류탄 알지. 석류처럼 생긴, 던지면 쾅 터지는 것. 고리를 빼고 던지려는 순간 저 앞에 어미 토끼가 새끼 토끼 여러 마리를 데리고 지나가는 거야. 젊은이는 차마 그 곳으로 던지지 못해 앞에 떨어뜨렸고 젊은이는 그만 흩어지는 쇳조각에 맞아 죽었어.’ 나는 이야기를 들려준 뒤, 참 용기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울림이에게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곁에서 듣고 있던 이음이가 갑자기 ‘할아버지, 이렇게 던지면 되지.’ 라며 주먹 쥔 오른손을 몸의 왼쪽으로 방향으로 바꾸어 던지는 시늉을 해 보입니다. 나는, 이미 수류탄은 손끝을 떠났고 그 건 어렵다고 이음이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참 용기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음이는 총명합니다. ‘총명하다’고 할 때 ‘총(聰)’은 ‘귀가 밝다’ 라는 뜻입니다.
3.17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아이들을 데리러 왔습니다. 벗어 놓은 겉옷을 입히는 데도 한나절이 걸립니다. 이리 달아나고 저리 숨고, 입혀 놓으면 도로 벗고, 아이들은 쉬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합니다.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할아버지 어릴 땐 비 사이로 막 뛰어다녔어.’ 말이 떨어지자마자 울림이는 바람처럼 언덕을 올라 ‘이렇게 말이지’ 하며 현관문 앞에 서 있습니다. 이음이는 손바닥을 펴서는 새의 날개처럼 겨드랑이 붙인 채, 스케이트를 타듯 몸을 오른쪽을 비스듬히 옮겼다 왼쪽을 눕혔다 가끔 고개를 들고 비 사이로 빠져나갑니다. 저러다간 한밤중에나 집에 닿을 듯합니다. 어제는 아빠가 앞마당에 텐트를 쳐주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어서 일 마치고 여기 들어와.’ 이음이 울림이가 번갈아 고개를 내밀며 소리칩니다. 아내는 집들이 간다며 돌아가 과자 두 봉지를 챙겨 왔습니다. 텐드 안은 아늑하며, 마당 앞인데도 먼 들판으로 나온 듯 괜히 마음이 들뜹니다. 텐트 안 빨랫줄에 걸어 놓은 아이들 그림책을 보여줍니다. 울림이가 칠해 놓은 빛깔은 어찌 저렇게 고울까요. 이음이가 그어 놓은 금도 이제 이야기로 살아나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들려주는 동화 속 세상으로 들어온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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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 안에서 울림이가 그림을 그립니다. 벽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 방엔 한 사람이 권투 연습을 하다가 개미를 쳐다보고 있고 왼쪽 방에서는 시끄럽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소리치는 모습도 눈에 보이듯 그렸습니다. 콧수염도 있고 뒤로는 방귀를 뿡뿡 뀌고 있습니다. 소리치는 사람의 볼에 동그라니 붉게 칠하고는, 소리치다가 오히려 저쪽 사람에게 반해 볼이 붉어졌다고 합니다. 나는 재미있는 듯 이야기를 지어냅니다. ‘울림이가 교실을 날아다녀 여학생들이 소리치고, 소리치던 여학생들이 도리어 울림이한테 반해서 볼이 발가스레 물들고 울림이반 여학생들 얼굴이 다 빨개지고 ... ‘ 울림이는 헤벌쭉 웃습니다. 그런 울림이를 그저께는 몹시 나무랬습니다. 울림이 너 그럴 수가 있느냐고. 이음이가 형을 그렇게 좋아하는 줄 알면서 혼자 떼어놓고 초등학교에 갔다고. 어린이집에 가면 이음이 손을 잡고 교실에도 데려다 주고 지켜 주었는데, 이음이는 이제 어린이집에도 가기 싫다고 하며 엄마한테 일찍 데리러 오라 하고. 이음이는 아니라고 하는데, 나는 못 들은 체 쉬지 않고 울림이를 혼냅니다. 울림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여덟 살이라 ... ‘ 여덟 살이라 저도 할 수 없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라는 뜻인데, 나는 ‘그래서 우리하고만 초등학교에 같이 입학하고 싶다고 하고 ... ‘ 그예 이음이가 크게 소리칩니다. ‘나는 어린이집이 너무 좋아.’ 울림이가 가르쳐준, 친구들과 선생님 이름입니다. 선생님을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교실에 앉아있는 듯합니다. 이름은 울림이가 불러주는 대로 적어 잘못 적었을 수 있습니다. 최희영 김용원 박주원 신민서 신지용 정우연 송하율 김소율 윤혜린 남혜민 최민 유하온 황울림 윤경아 선생님
3.20
마을을 둘러 살펴보러 왔는지 경찰관 두 분이 우리 집에 들렀습니다. 외진 곳에 아이들 목소리가 들려 더욱 정겹게 느꼈을 겁니다. 마당에 서서 이야기하는 경찰관에게, 들어와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아내가 부릅니다. 울림이와 이음이도 함께 따라 들어와 탁자에 마주앉습니다. 아이들은 경찰관이 묻는 말에만 짧게 대답하곤, 우리 집에 처음 들른 날처럼 아내가 주는 음료와 사과를 먹고마실 뿐 아무 말 없이 조용합니다. ‘아이들이 참 얌전하네요.’ 라고 한 분이 묻자, ‘아니에요, 얘들 날아다녀요’ 라고 하니, 울림이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습니다. 한참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일어섭니다. 아이들보고 인사하러 나가자고 하니까 제 자리에 앉아 꼼짝도 않습니다. 저만치 차에 타 시동을 걸려고 하자, 이음이가 뛰어나와 ‘야, 아저씨 잘 가.’ 라며 소리칩니다. ‘쟤 살아났네.’ 한 분이 웃으며 손을 흔듭니다. ‘울림이 너 무서워 덜덜 떨고 있었지.’ 나는 울림이를 짓굿게 놀립니다. 울림이 : 아니. 나 : 그럼 뭐했어. 혼자 자고 있었어. 울림이 : 그래, 너무 안 무서워 자고 있었다. 나 : 집이 덜덜 떨며 흔들리고 있던데, 너 잘못한 거 있지. 울림이 : 집이 잘못했나 보지. 나 : 아니, 어떻게 집이 잘못해. 울림이 : (잠깐 생각하다가) 우릴 춥게 했잖아. 하긴 구들방이 있는 바깥채보다 안채가 더 춥습니다. 이 쯤에서 나는 슬그머니 물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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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모나이트 사건’
겨우내 마늘밭을 덮은 볏짚을 걷고 있는데, 아이들이 일 그만하고 같이 놀자고 소리칩니다. 하던 일을 마무리하려고 꾸물대니까 밭으로 올라옵니다. 아이들 손을 잡고 조심조심 비탈을 내려오는데, 울림이가 집에 잠깐 들렀다 가자고 합니다. 암모나이트 같은 것을 찾았다고 합니다. 마치 굉장한 것을 발견한 듯 목소리가 들떠 있습니다. 등이 번들거리고 마치 아주까리 씨앗처럼 생겼는데, 납작한 돌 위를 기어갑니다. 아이들이 마음속에 그려놓은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려고 머뭇거리다가, 이건 알려줘야 할 것 같아 조심스레 입을 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알고 있는데 ... ‘ 잠깐 멈췄다가 ‘이건 진드기야.’ 라고 말했습니다. 가까이 다가오던 엄마가 멈칫하며 뒤로 물러섭니다. 손톱 끝을 모아, 이만큼 작은 것이 개나 고양이 같은 짐승에게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어 이렇게 통통하게 된 거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크게 실망할 줄 알았는데, 이마저도 신기한 듯 자세히 내려다봅니다. 뜰에 내려서자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보랏빛 알갱이 무스까리 꽃을 보여주었는데 어서 방에 가서 놀자며 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꽃밭 귀퉁이 흰 노루귀와 연보랏빛 노루귀 꽃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아이들은 아직 달팽이 집이나 꼬물꼬물거리는 것에 더 눈이 갑니다.
3.22
울림이와 카드놀이를 합니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 이건 몇이야 이건 몇이야 하며 숫자를 물었는데, 오늘은 10, 20, ... 180까지 거침없이 읽어내려 갑니다. 깜짝 놀란 목소리로 너 어디서 이걸 배웠어 하니까, 저절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울림이가 저절로 알게 되었다는 말은, 여기저기서 듣고 배운 것을 제 나름대로 정리해서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숫자를 제대로 알고 있나 보려고, 423을 종이에 적어 읽어 보라고 하니 까먹었다고 합니다. 지난 번에 울림이가 ‘일십백’이라고 하길래 숫자 읽는 법을 가르쳐 준 적이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라고 하니 더듬더듬 ‘사백이십삼’이라고 읽습니다. 다시 903을 써 주니까 ‘구백삼’이라고 금방 읽어냅니다. ‘이제 울림이 학교 안 가도 되겠다, 숫자도 다 읽고.’ 라고 하니, 학교는 가야 한다고 합니다. 하온이란 친구가 보고 싶어 학교에 가야 한다고 합니다. 하온이가 결석하면 어떡할래, 하온이가 멀리 이사 가면 어떡할래 라고 놀리자, 뜬금없이 오늘 학교에서 연필 잡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야, 학교에서 그런 것도 다 가르쳐 주는구나.’ 하니, 빙긋이 웃으며 연필 잡는 법은 알고 있었다고 능청스레 말합니다. 울림이에게 또 당했습니다. 울림이는, 내가 학교 가지 말라고 말리는 줄 알고, 아직 배울 게 있으니 학교에 가야 한다며 내 말을 살짝 피해 간 겁니다.
시들해진 나는, 곁에 있던 이음이에게도 형한테 다 배우니까 학교 안 가도 되겠다니까, 이음이는 작은 목소리로 또렷하게 말합니다. ‘나는 아직 글씨를 잘 몰라 학교에 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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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다가도 자꾸 아이들 집으로 눈이 갑니다. 어제도 늦더니 오늘도 해가 다 지도록 아이들이 집에 오지 않습니다. 며칠 전, 반에서 주원이가 말을 듣지 않아 선생님 곁으로 자리를 옮겨, 선생님 곁에 주원이 울림이 하온이 이런 차례로 앉았다고 했는데 ... 오늘은 거름더미를 만들었습니다. 높이 1.5m 길이 4m 쯤 되는 철망을 둥그렇게 엮어, 안쪽 둘레를 볏짚으로 둘러 쌓아가며, 가운데 깻묵과 왕겨를 켜켜이 쌓은 뒤 짚으로 이엉을 엮어 덮었습니다. 철망은 지우가 가랑잎을 쌓아 두려고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가랑잎이 썩으면 달큼한 냄새가 납니다.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아이들 집에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을 하니, 아내가 내려가 전화를 해 보자고 합니다. 불빛을 비추며 차가 언덕을 올라옵니다. 해맑은 아이들 소리가 납니다. 아, 다행입니다. 울림이가 윗니를 뺐다고 합니다. 어스름 속을 뛰어내려 오더니, 아내에게 들렀다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는 나에게 달려옵니다. 손전등으로 이를 비추어 봅니다. 이를 빼는데 하나도 안 아팠는데, 앞니를 빼다가 잘못 건드렸는지 입술이 아팠다고 합니다. 마알간 잇몸에는 아직 핏기가 남아 있습니다. 아이들 소리에 갑자기 밖이 환해진 듯합니다. 아이들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까닭이겠지요.
3.24
‘할아버지 뭐 해?’ 오이 덩굴이 올라갈 울타리를 손보고 있는데, 이음이가 묻습니다. ‘오이가 손 잡고 올라갈 수 있게 울타리를 고치고 있어.’ ‘나도 올라가고 싶다.’ ‘이음이도 오이가 되면 되지.’ ‘내가 어떻게 오이가 돼.’ 내 대답이 싱거웠던지, 울림이를 따라가 징검다리 놀이를 합니다. 잔디씨를 뿌려 키운 잔디밭에 벽돌로 테두리를 쳐 놓았는데, 벽돌을 듬성듬성 빼내어 징검다리를 건너듯 건너다닙니다. 아이들에겐 모든 것이 놀이입니다. 가랑잎을 쌓아 두려고 만든 철망 속에 들어가선 그걸 굴리고 다니기도 하고, 작은 비닐 온상을 떠받치는 쫄대를 난간 위에 걸쳐 놓고는 낚시 놀이를 합니다. 그마저 시시해지면 내가 일하는 곳에 와서 연장을 가지고 놉니다. 호미 괭이 삽 톱 정전가위 들도 모두 아이들에겐 장난감입니다. 손이 시려 보여 집에 가서 장갑을 가져오라니까, 집에 가면 점심을 먹으라고 하니까 안 간다고 하더니, 엄마가 부르니 할 수 없이 달려갑니다. 울림이가 먼저 달려가고. ‘나 좀 데리고 가지.’ 하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뒤따라 가던 이음이가 끝내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 때 무엇인가에 소스라치듯 놀란 엄마가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그 소리에 이음이는 울던 것도 까먹었습니다. ‘또 단이가 뼈다귀를 물어다 놓았을까.’ 뛰어올라가 보니 마당에 어른 손가락만한 지네 한 마리가 엎드려 있습니다. 조심스레 집어 보니 죽어 있습니다. 이럴 땐 엄마도 애기 같습니다. 울림이가 그러는데 우리 집에서 벌레를 가장 안 무서워 하는 사람은 우리라고 합니다. 지난 번에 우리가 무당벌레를 집어 입에 넣은 것을 엄마가 꺼냈다고 합니다.
3.25
마당에 벽돌을 깝니다. 장화를 팔에 끼고 로봇처럼 아이들이 걸어옵니다. 아이들은 방에 들어가 놀자고 보챕니다. ‘이것 다 깔고 놀자, 너희들이 도와줘.’ 길바닥에 까는 벽돌이라 제법 크고 무겁습니다. 이음이는 벽돌을 하나씩 들어나르다가 힘이 부치는지 깔아 놓은 벽돌 위에 앉아 쉽니다. 어디서 힘이 났는지 울림이는 네 장씩 묶어 놓은 벽돌을 한꺼번에 들어나릅니다. 더러 떨어뜨려 벽돌 귀퉁이가 깨지고, 바닥에 놓다가 손가락끝이나 발등을 찧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벽돌 한 쪽부터 조심스레 놓는 것을 배웁니다. 일을 하면서 우리는 ‘벌레가 나타났다’ 놀이를 합니다. 내가 ‘벌레가 나타났다, 엄마.’ 하면, 아이들은 ‘아아아아아’ 엄마 흉내를 냅니다. ‘아빠’ 하면 ‘으으으으으’, ‘울림이 이음이’ 하면 가만있다가, ‘우리’ 하면 ‘집어 먹어.’ 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내가 말하면 울림이는 ‘예’라고 대답합니다. 여전히 다른 말은 친구한테 하듯 반말을 하면서도. 아마 엄마가 학교에서도 집에서 하듯 ‘응’ ‘그래’ 하며 반말을 쓸까 봐 존댓말을 가르치나 봅니다. 나는 참 어색한데 그냥 듣고만 있습니다.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고 데리러 왔는데도 가지 않자, 아빠가 곧 오니 같이 오라고 엄마는 우리를 업은 채 먼저 갑니다. 언덕 아래 아빠 차가 옵니다. 아이들은 달립니다. 어느새 울림이는 비탈을 올라 사잇길로, 이음이는 언덕길을 바람처럼 달려갑니다. 세상에 저토록 아빠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을까요. 일을 마치고 일어서는데, 그 새 저녁을 다 먹었는지 아이들이 창밖을 내다보며 소리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세요.’ 라며 재미있는지 몇 번이고 되풀이합니다. 아이들이 처음 쓰는 존댓말입니다.
4.1
층층나무를 옮겨심고 있는데,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이들이 달려와 소리칩니다. 우리를 업고 엄마도 뒤따라 왔습니다. ‘호미’가 쥐를 던지며 놀고 있다고, 처음 보는 광경인 듯 무척 놀라워 하는 표정입니다. 늘 겪는 일이지만 덩달아 나도 아이들처럼 가슴이 뜁니다. 저만치 앞에 두고 달아나면 쫓아가 입으로 물어다 던졌다가 놓고 가끔은 앞발로 움켜쥐면서, 고양이가 쥐를 갖고 놀고 있습니다. 그런 생쥐를 울림이는 손으로 만지고도 싶고 키우고도 싶다고 합니다. 가끔, 이런 아이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왔을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지난 주 토요일엔 아이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뵈었습니다. 겉으로는 서로 결이 달라보이는 듯하지만 마음속에 곱고 맑은 하늘을 지니고 사시는 분들이십니다. 아, 저 뿌리에서 엄마 가지가 돋아나고 그 끝에 봄날 연둣빛 눈부신 새순으로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4.3
가끔은,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가 제법 어른스러워진 울림이 앞에서 내가 재롱을 떠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산을 내려오다가, 수염 기른 도사 할아버지가 들고 다니는, 지팡이 닮은 나무를 주워 와선, 아이들에게 너스레를 떱니다. ‘할아버지가 산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산신령이 나타나서 내 앞에 무릎을 꿇더니, 내가 장군일 걸 알아채곤 장군님 하며 이 칼을 바치는 거야.’ 하며, 나무를 들고 휘익 바람을 가르듯 휘둘러 보입니다. 옆에서 빙긋이 웃고 있던 울림이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산신령이 잘못 본 거지.’ 하며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합니다. 갑자기 찌그러져 어디론가 숨어들고 싶지만, ‘너희들 한 번 덤벼 봐, 후회하고 말거야.’ 하며 우렁차게 소리를 칩니다. ‘후회하고 말 거야.’는 놀이를 할 때 이음이가 나한테 자주 쓰는 말입니다. 나무는 칼이 되었다가 땅에 놓으면 밧줄이 되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몸을 가누며 밧줄을 타고 다니며 놉니다. 이음이는 넘어져 손가락이 긁혀 쓰라린 듯 엄마가 보고 싶다고 글썽입니다. 나는 방에 들어가 상처를 소독한 뒤 약을 듬뿍 발라주고, 울림이 손에 박힌 가시도 빼어줍니다. 엄마가 오자 이음이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울림이는 가시가 어떻게 박혔는지 설명하느라 바쁘고, 나는 이음이를 아내는 울림이를 업고 집에 바래다 줍니다.
4.4
어디에서 들었나 봅니다. 네 잎 토끼풀이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울림이는 ‘할아버지, 네 잎 토끼풀 찾았어.’ 하면서, 세 잎에다가 한 잎을 붙여 보여줍니다. 한 잎을 덧붙여서라도 행운을 바라는가 봅니다. 울림이는 ‘행운’을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도 들은 이야기를 해 줍니다. 세 잎 토끼풀의 꽃말은 ‘행복’이고, 네 잎 토끼풀은 ‘행운’이라고. 울림이는 ‘행복’을 갖고 싶다고 합니다. 세 잎 토끼풀을 뜯어 가득 손에 쥐고 엄마 아빠에게 주고 싶어 합니다. 울림이가 바라는 행복 가운데 하나는, 아빠가 어서 박사 논문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논문이 통과되어 늘 아빠가 곁에서 함께 놀아주는 게 울림이가 그리는 행복입니다. 혹시 알고 있나요. 사람의 입에서 따뜻한 입김과 차가운 입김이 나온다는 것을. 어제 울림이가 알려주었습니다. 손바닥에다 ‘하’ 하고 불면 따뜻한 입김이, ‘후’ 하고 불면 차가운 입김이 나온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울림이와 이음이와 함께 노는 것이 날마다 누리는 조촐한 ‘행복’입니다.
4.9
툭닥 툭탁 망치질 소리가 골짜기를 흔듭니다. 엄마가 사 준 자그마한 망치입니다. 유리를 낄 때 창틀에 덧대는 나무에 못을 박던 망치가 떠오릅니다. 울림이는 손끝이 야무집니다. 엊그제는 책상 귀퉁이마다 못을 박는데 하도 모질게 내려쳐 ‘죽는다, 죽어.’ 하니까, ‘못이 죽어.’ 하며 빙긋이 웃습니다. 망치 자루 어디쯤을 잡아야 망치 끝에 힘이 가는지 가늠하며 세상을 배웁니다. ‘오랜만에 절벽이나 타 볼까.’ 지난해 가을만 해도 나뒹굴까봐 조마조마했는데 이제 제법 땅에 몸을 붙이고 재빠르게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립니다. 마음도 넉넉해진 듯합니다. 높이 2m 너비 20cm 시멘트 난간 위에 서서는, 나무 막대기를 칼처럼 쥐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할아버지는 배가 없으니까 장군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부르는 장군은 이순신 장군을 가리킵니다. 내가 배를 불쑥 내밀며, 너희 내 배에 올라타 놀지 않았느냐며, 여기 배가 있으니 장군님이라고 우깁니다. 그 전 같으면 ‘그 배가 아니고.’ 하며 따졌을 텐데, 오늘은 저도 배를 쑤욱 내밀며 장군 흉내를 냅니다. 아장아장 걸어서 우리도 우리 집으로 오고, 아이들은 밭 가생이 풀처럼 하루가 다르게 자라납니다.
4.10
‘할아버지, 궁금한 게 있는데...’ 울림이가 묻습니다. 울림이가 손으로 가리키는 것은, 마치 먼지기둥처럼 솟아난, 쇠뜨기 생식줄기인 홀주머니이삭입니다. ‘아, 쇠뜨기란 풀의 꽃줄기야. 뱀밥이라고도 부르지. 할아버지가 살던 운산 아이들은 소가 잘 뜯어먹어 소국수풀이라고도 했어.’ 라며, 그 곁에 흙을 밀고 나오는 쇠뜨기풀을 보여줍니다. 쇠뜨기풀 마디를 떼었다 다시 제자리에 끼우니, 불럭장난감 같다며 재미있는 듯 몇 번이나 되풀이합니다. 모기에 물렸을 때 쇠뜨기풀을 짓이겨 바르면 간지러움이 가라앉는다는 이야기, 코피가 나거나 물속에 들어갈 때는 쑥을 뭉쳐 코와 귀를 막았다는 어릴적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이럴 때 나는 자랑스럽습니다. 울림이보다 많이 아는 것도 있으니까요. 울림이는, ‘논학교’에 풀꽃선생님이 있는데, 할아버지는 풀꽃할아버지라고 나를 치켜세웁니다. 속으로 듣고 싶었던 말입니다. 하긴 학교에서도 담임이 없을 때는 ‘시와풀꽃반’ 동아리를 만들어 스스로를 풀꽃반 담임이라고 부르고 다녔으니까요.
4.17
어린이집과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아이들은 아내한테로 뛰어갑니다. 아내는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꽃모를 뜰에 옮겨심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한다며, 아내가 파 놓은 작은 흙구멍에 꽃모를 넣더니 끝내는 아내가 쥐고 있는 모종 칼까지 가지고 갑니다. 부드러운 부엽토가 뿌리를 감싸고 있어, 아기처럼 조심스레 다루어야 한다고 해도, 흙덩이를 부스러뜨리거나 꽃모를 밟습니다. 안되겠다 싶어, 안개꽃 몇 포기를 줄 테니 집에 가서 심어 보라고 하니, 안개꽃을 심으면 우리 집에 비가 오겠다며 장난을 치더니, 그마저 엄마한테 맡기고 또 아내한테 달려듭니다. 손수레에 태워 초롱산까지 데리고 간다고 하자 그제사 따라나섭니다. 조금 올라가면 가파른 자갈길이 나옵니다. 내가 힘든다고 하니, 이음이는 제가 내려서 간다고 합니다. 울림이도 따라 내리고, 우리는 꽃구경도 하고 아까시나무 가시를 따서 코뿔소 흉내도 내며 쉬엄쉬엄 산길을 오릅니다. 길 끝에는 통나무 작업장이 있습니다. 60cm 남짓한 높이에 걸쳐 놓은 통나무 위를 곡예를 하듯 타고 놉니다. 기둥 사이에 매달아 놓은 그네도 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고 있는 아이들을 불러, 엄마가 너희들 찾으러 초롱산에 올라갔겠다고 하니, 아이들은 산을 올려다보며 ‘엄마’ 하고 소리칩니다. 아이들 소리가 맑게 메아리칩니다. 나도 따라 ‘우리야’ 하고 큰소리로 부릅니다. 길을 내려가는데, 멀리서 아이들 찾는 엄마 목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은 다투듯이 비탈진 길을 달려갑니다.
4.18
울림이는 꽃다지 이름을 압니다. 언덕에 나란히 앉아 울림이에게, 냉이와 꽃다지가 어디가 다른지 찬찬히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꽃빛만 아니라 잎과 보이지 않는 뿌리도 서로 다르다고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이리저리 살피더니 금방, 냉이는 하트 모양인데 꽃다지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줄기에 매달린 씨앗주머니가, 냉이는 하트 모양이고 꽃다지는 주걱 모양입니다. 나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씨앗이 영글면, 씨앗주머니를 조금씩 아래로 잡아당겨 냉이 줄기를 흔들면 차르르르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씨앗 소리가 납니다. 나는 ‘꽃종소리’라고 부릅니다. 울림이는 이제 저만치 떨어져서도, 우리 민들레와 서양민들레를 가려냅니다. 꽃을 받치고 있는 ‘총포’라는 것 말고도, 꽃빛만 봐도 다르거든요. 오늘은 아이들이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아 놀았다고 합니다. 아내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개구리가 화상을 입을까봐 아이들에게 면장갑을 끼고 만지게 하는 엄마가 참 지혜롭다고 합니다. 개구리는 살갗이 사람 손에 닿으면 화상을 입는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배웠습니다. 울림이 이음이의 영리함이 엄마 아빠에게서 온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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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벚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지지난해 집을 지어 이사 올 때는 그렇다고 치고, 지난해에도 울림이네 닭장 곁에 한 그루가 눈에 뜨었는데,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골짜기만 해도 스무 그루나 되는 듯합니다. ‘할아버지는 무슨 꽃이 좋아?’ 금방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울림이네 마당에 피어 있는 제비꽃이라고 했습니다. ‘울림이는?’ 울림이 제일 작은 꽃이 좋다고 합니다. 조금 전에 보여준 꽃마리를 가리키자 그건 아니라고 합니다. 아, 아내가 보여준 봄맞이꽃인가 봅니다. 어제는 예쁘지 않다고 하더니 하늘거리는 그 조그만 하얀 꽃이 떠올랐나 봅니다. 요즘 들어 울림이는 풀이나 꽃에도 관심을 가집니다. 지난 번 광주리나물 꽃대롱 끝에 고인 꿀을 빨아먹을 때부터인가. 아니면 쇠뜨기풀 줄기를 뗐다 붙였다 할 때부터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어려운 꽃이름 무스까리도 알고 뭉게구름 하얗게 일렁이는 조팝나무 꽃도 압니다.
5.2
‘할아버지, 쓰스삐 쓰스삐 이렇게 우는 새가 뭐야?’ 언덕에 앉아 이음이가 묻습니다. ‘아, 지금 우는 저 새, 곤줄박이야.’ ‘그렇구나. 지난 번 새는 오랑오랑 울었지.’ ‘야, 이음이 너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할아버지가 얘기해 줬잖아.’ 이음이가 혼자 집에 왔습니다. 장난말로, 엄마가 이음이 보고싶어 어린이집에 안 보냈구나 하니, 오늘은 어린이집이 쉰다고 합니다. 생강밭에 볏짚을 덮으러 가는데 졸래졸래 따라옵니다. ‘할아버지, 누가 이음아 하고 부르지? 엄마 목소리는 아닌데.’ 가만히 들어보니 멀리서 낮닭 우는 소리입니다. 산은 옅고 짙은 푸르름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소나무 잎이 가장 짙고, 상수리나무 잎은 누르스름한 푸른 빛을 띠고, 밤나무 어린 잎인지 바람에 물결치는 산벚나무 잎인지는 희읍스름한 푸른 빛으로 몽실몽실 피어오릅니다. ‘쓰삐 쓰삐’ 내 마음 저 깊은 산속 가장 귀엽고 예쁜 새는 이음이와 울림이와 우리입니다. ‘쓰삐 쓰삐’는, 울림이가 되지빠귀 소리를 흉내낸 말입니다.
5.15
이음이에겐 여자친구 봄들이가 있는데, 이음이가 세상에서 가장 멋있다고 하는 울림이에게는 여자친구가 없습니다. ‘울림이 너, 오늘 학교에서 뭐 했니?’ ‘까먹었어.’ ‘공부는 안 하고 예쁜 여자친구만 바라본다고 다 까먹었지?’ 울림이는 ‘아니야.’ 라고 딱 잘라 말합니다. 내가 가만 있을 리 없지요. ‘너, 여자 친구 이름이 아니야 구나.’ 울림이는 ‘아니야, 아니, 아니라고’ 하면서, 이음이한테 하듯 한 대 쥐어박을 듯합니다. ‘하여튼 여자친구 성이 ‘안’이구나.’ 울림이는 죽을라고 합니다. 엊그제 아침엔 학교 가는 길에 가방을 메고 돌계단을 내려오더니, 마아가렛 한 송이를 꺾어 갑니다. 아내가 ‘선생님 갖다주려나 봐.’ 라고 했는데, 학교에서 돌아온 울림이에게 ‘너, 그 꽃 아니냐 주려고 했지.’ 라고 물으니, 엄마한테 주었다고 합니다. 울림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은 엄마인가 봅니다. 그래도 나는 ‘아니야’ 잘 있느냐며 얼마 동안 울림이를 놀릴 겁니다.
남편 논문 막바지로 몇 달간 혼자서 삼형제와 집안일을 도맡느라 하루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간 몇달,
남편 논문이 끝나가니 그동안 미뤄 놨던 집안 곳곳의 일들을 해결 하느라 몇달,
이제 좀 생활이 안정 되어 가나 싶었더니 아이들 첫 방학이 왔다.
정신없이 지나간 저 시간들 속에서 나와 남편은 없던 살도 다 빠질 정도의 엄청난 고난의 시간이었는데
그나마 큰 탈 없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언제나 처럼 인자하신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사실 생각 해 보면 아이들 보다 내가 더 두분께 의지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오늘도 아이들은 점심을 먹고 (낮잠 자자는 엄마에게 도망쳐)아랫집 할아버지네로 뛰어간다.
아이들 방학이 시작 된지 열흘 쯤 되었는데,
오히려 방학하고 이래저래 일정이 많이 생겨 집에 잘 못 있다보니 어제 오늘 오랜만에 할머니네서 실컷 논다.
엊그제는 집에서 울림이랑 이음이가 "아~ 그러고보니 요즘 할아버지네를 못갔네. 빨리 가야겠다"며 마치 꼭 해야 할 일을 깜빡 한 사람들 처럼 말한다.
지난번 천안에 하루 자고 오는 일이 있어 나가는 날에도 출발 직전에 마당에 나오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발견한 이음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묻지도 않았는데 소리소리 지르며 누구네 가고 가서 뭐하고 얼마나 있다가 오는지를 열심히 전한다.
낯을 많이 가리던 막내 우리도 이제는 할머니 할아버지랑 친해져
마당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발견하면 먼저 "어---!!!" 하며 손을 뻗어 인사한다.
2.
2018.11.28
환자복만 걸친 채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는 아내가 추워 보였는지, 간호사가 담요 한 장을 가져다 덮어줍니다 무늬 없는 얇은 천을 보고 아내는 아이들 그림이 떠올랐나 봅니다 ‘여보, 아이들 그림 잘 남겨둬 아이들 그림을 수놓고 싶어’ 아내는 수술실로 들어가면서도, 얼굴에 낙서를 한 울림이와 이음이 모습이 떠올라 가만히 웃었다고 합니다 길고 어두운 굴을 지나듯 외롭고 아픈 시간을 아이들을 생각하며 혼자 견뎌냈겠지요 세 시간 남짓 수술을 받고 돌아와 병실에 누운 아내 눈가에 눈물이 맺혀 내 가슴으로 번집니다 지난 번 이마를 다쳐 응급실 침대에 덩그러니 남아,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던 울림이가 겹쳐 떠오릅니다 닷새만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서둘러 아이들이 계단을 내려옵니다 등 뒤에 감추었던 풀꽃 다발을 이음이가 아내에게 내밉니다 냉이풀꽃 개망초 민들레 방아꽃 개쑥부쟁이 들과 마른 꽃대궁, 쑥스러운 듯 조심스레 울림이도 꽃다발을 건넵니다 아내는 아이들을 꼭안아줍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다발입니다 아내를 생각하며 아이 엄마는 정성껏 저녁을 지어놓았습니다 아내는 ‘이렇게 마음 쓰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젊은사람이 참 예뻐요’ 라고 내게 말합니다 아이들이 저리 예쁜 까닭도 ‘우리를 처음 세상으로 이어주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 맑은 호숫가에 풀꽃 잔잔히 물결치는 엄마가 피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친구 순복이는 카톡에 올려놓은 이음이 사진을 보고는, ‘이 맑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세상을 보면 얼마나 경이로울까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음이는 우리를 처음의 세상으로 이어 주네요’ 라고 했습니다
11.26
주말이라 아이들과 만화영화 한 편을 봤습니다 ‘야수와 미녀’는 아이들에겐 너무 길고 지루한지 앞 부분 조금 지나자 그만 본다고 해서 껐습니다 뭉실뭉실 시커먼 구름이 피어나듯 야수가 나타나고 ‘너희들 무섭지’ 하고 지우가 묻자, 이음이는 ‘안 무서운데 눈물이 나’ 라고 말합니다 속으로는 무서웠다는 것을 저렇게 말하는구나 라고만 짐작했습니다 저녁에 엄마를 만나자마자 ‘아빠가 잡혀갔어’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여자주인공 벨의 아버지가 야수에게 잡혀 갇히는 장면을 보고 이음이는, 벨이 가엾고 슬퍼 눈물이 났던 것입니다
울림이가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고 누워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스무고개처럼 마음속에 생각한 것을 알아맞히는 다섯고개 놀이를 했는데, 이제 몸짓을 보고 무엇을 나타내는지 맞히라는 것입니다 너무 평화롭게 누워 있어서 ‘자는 무엇’ ‘죽은 무엇 무엇’이라고 해도 아니라고 합니다 하도 답답했는지 참지 못하고 울림이가 답을 가르쳐 줍니다 ‘너무 데친 브로커리’
문턱을 넘어서 저 쪽 대청마루는 ‘어른 세상’, 이 쪽 안방은 ‘아기 세상’ 울림이가 생각해 낸 놀이입니다 오늘 이음이는 킹콩입니다 문 밖에서는 두 주먹 불끈 어깨를 올려 가슴에 힘을 주고 울부짖는 어른 킹콩이었다가 문턱만 넘어서면 응애응애 마냥 귀여운 아기 킹콩으로 바뀝니다 얼굴이 빨개질 만큼 나무 침대 모서리에 세게 부딪혀도 킹콩이라서 괜찮다고 울음을 참습니다
아이들은 오롯이 그 순간에 머물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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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귀여운 옷을 입고 이음이가 방으로 들어옵니다 ‘너 그 옷’ 놀란 척 크게 눈을 뜨고 말하자 얼른 ‘엄마가 입혀 줬어’ 라고 합니다 ‘넌 안 입고 싶었는데’ 이음이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너무 귀여워 쓰러질 것 같다던 그 옷입니다 보드게임 젠가 놀이를 하는데 아이들 눈이 자꾸, 아내가 켜 놓은 텔레비전 쪽으로 갑니다 ‘너희들 주말도 아닌데’ 지우가 말하자 이음이는 얼굴을 숙이며 ‘안 볼라 했는데 눈이 자꾸 가’라고 합니다 울림이는 아예 등을 돌려 앉습니다 주말이 아니면 만화영화 같은 것을 보지 않기로 엄마와 약속한 까닭입니다 마당에서 콩타작을 합니다 도리깨질은 힘에 부치는지 아이들은 작대기로 두드리다가 콩대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서리콩을 집어던지고 놉니다 콩대를 뒤집고 달래망 밖으로 흩어진 콩을 줍고 있는데, 무슨 까닭인지 이음이가 ‘왜 밤이 안 오지’라고 묻습니다 ‘할아버지가 얼른 불러올까’라고 하는데 곁에서 아내가 거듭니다 ‘밤도너희들처럼 해찰 떠느라고 그래, 오다가 꽃도 보고 벌레도 보고 그러느라고’ 울림이가 밤이 오면 집에 가야한다니까 그제야 이음이는 조용해집니다 언제인가 울림이가 ‘할아버지, 이음이 꿈이 뭔지 알아요’ 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는 울림이 꿈은 ‘늙어도 떠나지 않고 이 세상에 있는 거’라고 합니다 울림이는 사랑하는 식구 곁을 떠나지 않고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습니다 해쓱해진 국화꽃 무리 곁을 지나며 오늘도 ‘할아버지 이 꽃이 날아왔어’라고 말하는 이음이 꿈은, 커서 어른이 되면 아빠와 술 한 잔 하는 겁니다
11.30
미세먼지를 뚫고 아이들이 뛰어옵니다 울림이는 손가락으로 코를 틀어쥔 채, 뒤따라온 이음이는 이렇게 왔다며 손등으로 코를 누르며 ‘돼지’라며 웃습니다 울림이 주머니 속에 이음이 등 뒤에 숨겨 온 자동차로 한참을 놀다가, 다락에서 꽃 이름 맞히기 놀이를 했습니다 ‘어린이 식물도감’을 보고 울림이가 꽃 생김새를 말로 그려내면 이름을 맞혀야 합니다 ‘털이 났어’ 하면 ‘개쉬땅나무’, ‘가시가 났어, 어디에, 머리에’ 하면 ‘절굿대’ 아무리 풀과 나무에 관심이 깊다지만 이건 너무 어렵습니다 괜히 ‘오이풀’을 보고는 이 풀은 오이 냄새가 난다고 얼버무립니다 이제는 그림을 그려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울림이는 어떤 것이라도 눈에 띄게 도드라진 곳을 잘 잡아 그려냅니다 울림이가 엎드려 왼손으로 연필을 잡고 열심히 그리고 있는데 이음이도 종이를 달라고 합니다 서랍을 뒤지다 보다 사진이 나옵니다 지리산에 살 때 식구 넷이서 함께 떠난 유럽 여행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이 사람은 누구’ ‘할머니’, ‘이 사람은 누구’ ‘할아버지’, ‘할아버지 뒤에 있는 이건 뭐지’ 체코 작은 마을 ‘체스키 크롬로프’ 장난감 가게 앞에 피노키오 인형이 서있습니다 잘 몰라 하는 이음이에게 코를 길게 늘어뜨리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생각난 듯 말하려고 하지만 입에서 맴돌 뿐 영 이름이 떠오르지 않은가 봅니다 귓속말로 ‘피노키오’라로 하자 울상을 지으며 대청마루로 나갑니다 이음이는 요즈음 무엇이든지 제 힘으로 하려고 합니다 과자를 싼 종이를 벗겨 달라고 할 때도 조금만 찢어 손에 쥐어 주어 나머지는 이음이가 스스로 찢어 먹게 해야 합니다 제가 맞혀야 했는데, ‘할아버지, 싫어’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 이음이에게 미안하다며 달래어 안고 들어옵니다 어느 날인가는 문득 ‘아빠가 회사에 간 것처럼 지내야 해’라고 말해 대견스러우면서도 가슴이 싸한 적이 있습니다 학위 논문으로 바쁜 아빠가 집에 있더라도 없는 것처럼 지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이음이는 아빠와 놀고 싶은데 또 참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쯤 나처럼 창 밖에 뜬 별을 보다가 아이들도 잠들었겠지요 아닙니다 아이들이 곧 별이고 꽃입니다
12.3
맑은 바람과 햇살을 데불고 아이들이 옵니다 며칠째 아이들이 집에 들르지 않아 마당을 쓸면서도 마늘밭에 볏짚을 덮어 주면서도 귀와 눈은 늘 아이들에게 쏠립니다 어제는 아장아장 숲길 내려가는, 두 살 난 ‘이랑’이란 아이를 만났습니다 엄마 친구들이 손님으로 왔나 봅니다 오늘 아침엔 다섯 살인 ‘담인’이를 할아버지에게 소개해 준다며 집에 데려왔습니다 날마다 뛰어 내려오던 돌계단을 담인이를 보살피며 조심스레 내려옵니다 방 안에 들어와서도 모든 게 낯선지 담인이는 주춤주춤합니다 등 뒤에 몰래 숨겨 온 장난감을 짠 하고 멋지게 보여 주고 싶었는데, 아이들이 궁금해 문을 열고 들어선 할머니에게 들키자 이음이는 속이 상해 뒤돌아서 벽 구석에 얼굴을 묻습니다 핑그르르 담인이 눈에도 눈물이 돕니다 나중에는 속초에서 ‘완벽한 날들’이란 동네책방을 가꾸시는, 담인이 엄빠 아빠도 오셨습니다 한참 동안 팽이를 가지고 놀다가, 방에 놓인 ‘어린이 식물도감’을 이리저리 펼쳐보더니 무슨 생각이 난 듯 울림이는 엎드려 그림을 그립니다 지붕 꼭대기에 십자가가 달려 있어 교회냐고 물으니 병원이라고 합니다 울림이는, 여기 이사 와서 얼마 되지 않아 온몸에 열꽃이 나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했던 이음이가 생각났나 봅니다 곰돌이가 새겨진 윗옷을 입고 주스를 먹고 있는 이음이, 오른쪽 별 모양 스티커가 붙어 있는 병실 서랍, 그 오른쪽에 ‘우리’를 안고 있는 엄마, 왼쪽으로는 아픈 아기와 양쪽 곁에 아기 엄마와 의사 선생님, 그 왼쪽으로 3층 엘리베이터... 울림이는 그 때 그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병실 서랍 안에 든 과자까지도 오른 쪽 지붕 위 생쥐는 상상해서 그려 넣었다고 하면서, 생쥐가 사는 집 지붕 양쪽에 커다란 토끼 귀를 그린 것은 생쥐가 고양이 오는 소리를 얼른 알아 듣고 빨리 달아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음이도 ‘구름아 놀자 구름아 놀자 해서 노는 거야’ 라며 왼손에 구름을 잡고 있는 아이 그림을 보여줍니다 늘 눈사람처럼 두 눈과 입, 작대기처럼 생긴 두 팔과 다리를 그리던 이음이가, 오늘 처음 이야기가 담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음이가 구름아 놀자고 말할 때 정말 하늘에서 구름이 내려와 손에 잡히는 듯했습니다 내가 전에 하늘나라에 가면 구름을 타고 놀거야 하며, 하늘나라엔 안 간다는 아음이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그 구름일까요
12.3
구름 속에서 햇살이 터져 나오듯, 이틀째 보이지 않던 울림이가 텃밭으로 올라옵니다 흙에 묻었던 *무우를 꺼낸다고 하니 같이하고 싶어 합니다 내가 마늘밭에 볏짚을 덮는 것도 창 밖으로 봤다고 아쉬워했습니다 삽과 호미를 가지러 가자고 하니 ‘고랑이, 고랑이’ 하며 고랑을 달려갑니다 오늘은 ‘이랑’이란 아이의 이름 뜻을 알려주었습니다 여기 움푹 팬 곳은 ‘고랑’이고, 이 길로 사람도 다니고 빗물도 다니지 이 고랑에서 밭두둑까지를 ‘한 이랑’이라고 한다며 발을 벌려 알려주었는데 자꾸 ‘고랑’을 ‘고랑이’이라고 부르는 울림이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울림이는 호미로 나는 삽으로 흙을 파내자 그 안에 무우를 넣었던 흰 쌀자루 끝자락이 보입니다 자루가 어느만큼 드러나자 손수레를 가지러 간 사이 울림이는 제법 깊은 구덩이에서 무우 한 자루를 꺼내놓았습니다 손에 묻은 흙을 털며 숨을 몰아쉬는 울림이는 안간힘을 썼나 봅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났냐고 묻자도깨비 힘이라고 어깨를 올리며 뿌듯해 합니다 누군가에 보여 주고 싶어 둘러보지만 저만치 떨어져 난로에 지필 땔나무를 나르느라 아빠는 겨를이 없습니다 울림이는 도깨비 힘을 몰래 감추어 두었다가 울림이를 화나게 하는 사람을 멀리 던질 때 쓴다고 합니다 문득 논산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우리 반 아이였던 태연이와 원영이가 생각납니다 우리 반 반장이고 3학년 선배들도 이길 수 없었던 씨름꾼 원영이는, 키 작은 우리 반 아이를 업고 과수원 언덕길을 올라 은진 관촉사로 봄소풍을 갔지요 아이들 말로는 주먹으로 한 대 치면 맞은 사람이 교실 이 쪽 창가에서 맞은편 벽으로 나가떨어져 마을 어른들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태연이가, 주먹을 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학교 앞 구름산으로 놀러갔을 때 풀꽃을 묶어 내게 건네주던 태연이는 새벽 호수처럼 눈빛이 잔잔한 아이였습니다 집에 놀러 왔다가 혼자 돌아가려는 담인이를 지우가 바래다 주려 하자, ‘삼촌, 나무다리 지나 처음 돌계단 있지 거길 내려올 때 담인이가 힘들어 해’ 라고 걱정하던 울림이도, 깊이 숨겨 둔 힘을 제대로 쓰겠지요
*맞춤법에서 ‘무우’를 ‘무’라고 고쳐쓰자고 했을 때 어느 한글학자는, 이제 ‘무•우’라고 소리내는 사람은 없지만 눈으로 보는 글자니까 ‘무우’를 그냥 두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없다’를 뜻하는 ‘무’와 같은 글자와 헷갈릴 수 있으니까 그 생각이 떠올라 ‘무우’라고 적어 봤어요
12.4
온종일 절름거리는 비에 갇혔던 아이들이 해질녘이 되어서야 집으로 건너옵니다 장화를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방에 들어온 아이들은 주머니와 옷 속에 감추어 온 풍선과 그림책을 하나하나 꺼내 놓습니다 ‘더 크게 더 크게’ 잇달아 이음이는 재촉하고 조금씩조금씩 부풀어오르던 풍선이 그만 터져버립니다 터진 풍선 주둥이 오목한 끝을 모아 붙잡고 힘껏 불자 풍선은 다시 봉긋 솟아오르고 순간 흐려졌던 이음이 얼굴이 환히 피어납니다 터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부풀리다 놓아 버린 울림이 풍선이 푸르르르 몸을 떨며 날아갑니다 어릴 적 지우와 놀던 놀이가 생각났습니다 ‘사람 풍선 놀이’ 먼저, 내가 숨을 들여마셔 한껏 배를 내밀었다가 숨을 내쉬어 배를 쑥 들이밀고는 쓰러지는 시늉을 해보입니다 아이들은 저만치 침대 위에 서있습니다 손나발을 하고 내가 후우 소리를 내며 숨을 불어넣으면 아이들 배는 자꾸자꾸 부풀어오르고, 입에서 손을 떼자마자 아이들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찌그러져 아무데나 날아가선 쓰러집니다 때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쭈그려앉았다가 일어서선 까르르 넘어지고, 지우가 저녁 먹으러 가자고 하지 않았으면 언제까지나 이렇게 놀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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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밥을 지어 울림이 식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습니다 운달아 먹어서인지 울림이는 밥 한 그릇을 거뜬히 비우고 더 달라고 합니다 밥을 먹은 아이들은, 대청마루에서 사과를 깎는 내 둘레를 빙빙 돕니다 천천히 빨리 아이들이 멈추면 함께 멈추고, 달리는 아이들 발 빠르기에 맞춰 사과 껍질을 깎습니다 다 깎은 사과를 통째로 건네니 이음이 가슴속 기쁨도 잔뜩 부풉니다 야금야금 사과를 갉아먹다가 꼭지가 드러나니 ‘도토리사과’라고 부릅니다 다시 아이들이 돕니다 어질어질합니다 저러다 넘어질라, 나는 부산 영도다리가 되고 기차 건널목 차단기가 됩니다 아이들은 ‘대문놀이’라고 부릅니다 통행새는 인사를 하는 겁니다 손을 가지런히 눈썹 위에 붙여 ‘허수아비, 안녕’ ‘수염 할아버지, 안녕’ 이라며 장난스레 인사를 건네고 더러는 병원차라고 그냥 지나가고 더러는 상어가 되어 헤엄쳐 가기도 합니다 만날 때마다 장난을 치니 아이들은 아무리 해도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신용을 잃은 셈입니다 아까만 해도 그렇습니다 ‘곤충들의 운동회’라는 그림책을 읽어 주는데, 이야기 마지막에 다달아 사마귀가 나와 춤추는 장면에서 곤충들이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배꼽이 빠진다는 그런 말이 책에도 나오느냐고 할아버지가 끼어 넣었다고 마구 우기다가, 쪼르르 달려가선 엄마한테 가서 보여주고는 잠잠해집니다 나는 그저 책 읽어주는 할아버지, 같이 노는 동무일 뿐입니다 오늘은 점심을 먹고 일찍 왔길래 너희들 어린이집에 안 가서 좋겠다고 하니, 이음이가 대뜸 ‘할아버지도 좋지, 우리와 놀아서’ 라고 말을 던집니다 그나마, 아직도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12.9
‘나는 웃을라는 건데’ ‘곤 친구나봐’ (곤’은 만화영화에 나오는 아기 용 이름입니다) ‘먹으지 그래’ 아이들이 도토리나 솔방울 조약돌을 모으듯, 나는 이음이 말을 모읍니다
울림이 곁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는 이음이게, ‘할아버지는 구름아 놀자 하고 구름과 노는 그림이 너무 좋아’ 라고 하자 조물조물 고 조그만 입술로 이음이는 ‘나는 잘 못 그리는데 손이 그렸어’ 하고 말합니다 이음이는 ‘인어공주(사진2)’와 ‘꽃 기린’(사진3)을 그렸습니다 아내는 이음이가 그린 눈(사진1)이 참 선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요즘 들어 이음이는 걸핏하면 잘 토라집니다 제 성에 차지 않으면 ‘할아버지 싫어’ ‘할머니 싫어’ ‘삼촌 싫어’ ‘형 싫어’ 하며 구석에 고개를 박고 마음이 풀릴 때까지 마냥 서 있습니다 무슨 까닭인지 헤아릴순 없지만 미안하다고 달래 보기도 하고 저만치 떨어져 지켜보기도 하지만 마음이 아픕니다 오늘 아침 이음이는, 살짝 눈이 내려앉은 계단을 걸어 곧바로 오지 않고 갈참나무 아래 밭둑길로 빙 돌아옵니다 창 밖으로 내다보던 울림이가, 뒤뚱뒤뚱 이음이 걷는 흉내를 냅니다 네 살배기 이음이는 지금 뒤뚱뒤뚱 혼자 속앓이를 하며 자라나고 있습니다
12.10
이음이가 말한 ‘나는 잘 못 그리는데 손이 그렸어’를 어른들이 쓰는 말로 옮기면, ‘나는 잘 못 그리는데 어쩌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은 금이 구름 모양이 되어 마치 아이가 구름을 손에 쥐고 노는 듯한 그림이 되었어’가 아닐까요 시인과 아이가 다른 점은, 아이들은 제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낱말로 제 생각을 그려내는 데 있겠지요 집에 텔레비전이 없는 아이들은 주말이면 가끔 우리 집에서 만화영화를 봅니다 오늘도 엄마와 약속한 만큼만 보고 텔레비젼을 껐습니다 무얼하고 놀지라고 해서 우리 구들방에 가서 책 읽자고 하니 이음이가 싫다고 합니다 만화영화를 보다가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에 가면 재미있는 장면이 지나갈까봐 끝내 방에 쓰레기통을 가져와 오줌을 눈 이음이, 만화영화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겠지요
나 : 너희들 눈 좀 쉬어야지 울림 : 쉬면서 보면 되지 나 : 어떻게 쉬면서 봐 울림 : (비스듬히 눕는 시늉을 합니다) 나 : 그게 쉬는 거니 이음 : (이불을 뒤집어쓰며) 이렇게 ‘얼굴을 없애고’ 눈 좀 쉬자니까 이음이는 이불로 ‘눈을 가리고’ 보자는 것입니다
비늘 그리가 어렵다고 하며 울림이가 그린 인어공주, 그 곁엔 어릴적 못을 가지고 기찻길에서 놀던 내 이야기를 듣고 그린 그림입니다 기찻길 위를 달리는 기차와 못, 지렁이와 두더지가 그려져 있습니다
어른들은 머릿속 숱한 낱말을 알면서도 ‘상상의 문’ 앞에서 멈춰 서 버리고, 몇 안 되는 낱말을 가슴에 품은 아이들은 ‘상상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햇살 쏟아지는 파란 하늘을 마음껏 헤엄쳐 다닙니다
12.11
내 친구 순복이가, 이음이와 울림이가 그린 그림을 보자마자 몸에서 터져나오는 기쁨을 그대로 쏟아 놓습니다 ‘와, 천상의 그림입니다. 바로 이것이지요. 내 생각을 없애면 하늘이 저절로 그려주는 그림, 시, 노래 들이 있지요. 그것이 우리를 감동케 하고 전율케 하고 우리의 기쁨이 되고 힘이 되고 ... 찬란한 오늘을 맞이하게 되리니 그것은 또한 영원하리라.’ 예순이 넘어서도 아이 마음과 눈을 지닌 친구입니다
요즘 울림이네 어린이집 열매반은 고무줄로 노는 놀이가 한창인가 봅니다 며칠전엔 고무줄총을 만들어 놀더니, 어제부터는 손가락에 고무줄을 끼워 사진기를 만드는 걸 배워 내게 가르쳐 줍니다 언제인가 ‘할아버지, 내가 가르쳐 주니까 내가 할아버지 선생님이지’ 하던 울림이 말이 생각납니다
12.12
‘할아버지, 팔씨름 할래’ 울림이가 내기를 걸어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울림이에게 져주는 일은 없습니다 반칙을 써서라도 꼭 이깁니다 간지럼을 잘 타는 줄 알기에, 울림이 손목을 잡고는 손가락으로 손등을 간지르거나, 울림이가 더 힘을 주면 다른 한 손으로 겨드랑이를 간지럽힙니다 울림이는, 할아버지 반칙이라고 두 손을 모아 누르다가 몸을 일으켜 세워 온몸으로 내리누릅니다 이제는 또 씨름을 하자고 합니다 내던질 수도 없고,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하듯 ‘지는 씨름’을 하자고 말합니다 먼저 지려고 방바닥에 넘어지려는 울림이를 끌어당겨 안고는 뒤로 넘어져, 내가 이겼다고 좋아합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지는 씨름을 가르쳤습니다 학교에서도 ‘자전거 천천히 달리기’ ‘연필 깎기’ ‘새소리 알아맞히기’ ‘체육대회에서 꼴찌한 반 상품 모아주기’ ‘맨발로 걸어 보고 글쓰기’ 들을 하면서 지는 싸움, 천천히 사는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세상 밖으로 나가 늘 깨지고 들어오는 우리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너댓 살 먹은 아이와 아빠가 달리기 내기를 합니다 아빠들은 빨리 달리는 척하거나 넘어지는 시늉을 하여 아이에게 져주는데, 만화 속 아빠는 나처럼 주책없이, 번개처럼 달려와 내가 이겼다고 두 손을 들고 촐싹댑니다 한겨레신문에 실린 ‘비빔툰’이란 만화 한 장면입니다 아이는 제 힘껏 달려와 뒤늦게 결승선에 다다릅니다 엄마는 우리 다운이 잘했다고 이등을 해도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달려서 참 잘했다고 꼬옥 안아줍니다
12.13
군불을 때는 구들방에도 아내와 내가 없자, 뒤돌아서 집으로 가는 울림이를 불러세웁니다 ‘할아버지, 좋은 소식 나쁜 소식 가운데 어느 것 먼저’ ‘좋은 소식’ 잠깐 생각하다가 ‘내가 온 것’이라고 대답하곤 울림이는 해죽이 웃습니다 나쁜 소식은 이음이가 독감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진화’라는 말을 자연스레 씁니다 무슨 뜻인지 물어보니 힘이 세어지는 거랍니다 동무인 산들이의 고무줄 사진기가 진화한다고 했을 때, ‘진화’는 성능이 좋다는 뜻이랍니다 오늘 울림이는 비가 어떻게 오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내가, 옛날 아이들은 비를 하느님이 눈 오줌이라 생각했다고 말했거든요 강물이 바다로 모이고 바다에서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이 조금씩조금씩 올라가 구름이 되어 비가 온다고 합니다 내가 ‘구름이 몸이 무거워 막 터는구나’ 라고 하자, 내 수준에 맞추어 ‘구름 속 괴물이 바닷물을 집어삼켜 내뿜는다’고 울림이는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줍니다 이음이 없이 혼자 있어서 그런지 울림이는 ‘할아버지의 아빠 엄마는 살아있는지, 동생은 몇 명인지’도 물어봅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쯤엔 무슨 생각이 났는지 혼잣말인 듯 ‘이 세상에는 하느님이 없을수도 있어’ 라고 합니다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울림이 말처럼 오늘 우리 집에 울림이가 온 것이 가장 좋은 소식이고, 아이들이 이 세상에 내려온 것이 하늘의 기쁜 소식입니다
12. 16
풀린 햇살과 함께 아이들이 건너왔습니다 두 눈이 때꼰한 게 몹시 앓았나 봅니다 아직 기침이 떨어지지 않아,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아내가 꼬옥 안아줍니다 아내 품에 안긴 이음이는 고개를 들어 아내를 올려다보더니 그 눈으로 다시 나를 쳐다보곤 싱긋이 웃습니다 한아름 색칠 공부책을 펼쳐놓습니다 그동안 밖에 나오지 못해 방안에서 울림이와 색칠 공부를 하며 놀았나 봅니다 무지개 빛깔로 칠해 놓은 거북이도 있고, 책 겉장 안쪽에는 아이와 자동차인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자동차냐고 조심스레 묻자, 그림 속 아이가 생각하는 것을 그렸다고 하면서 무엇인지는 저도 모른다고 합니다 울림이는 집으로 되돌아가 곤충과 버섯, 나무도감을 가지고 왔습니다 힘에 겨운지 끙끙거리며 들고오다가 한 권은 도랑을 건너다 떨어뜨렸습니다 아무래도 나무나 버섯보다는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는 곤충에 더 관심이 가는지, 곤충도감을 펼치며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처음엔 개미,다음엔 벌, 다음엔 바퀴벌레, 다음엔 집게벌레, 다음엔 지네 여기 이사 왔을 때 벌레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말벌이 나왔을 땐 119 아저씨들이 오고, 밖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2층 책상에 올라가 창 밖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봤다고 합니다 어제인가는 아빠가 무당벌레를 집어 변기 속에 넣었는데 울림이가 휴지로 건져 밖에 내보내 주었다고도 합니다 울림이는 버섯 이름도 많이 압니다 괴물버섯이라고 알고 있던 ‘마귀곰보버섯’, ‘노루궁뎅이버섯’ ‘번데기동충하초 ‘ ... 무엇 하나 내보일 게 없는 나는, 지리산 대나무숲에서 본 ‘망태버섯’을 자랑했습니다 곁에서 서리태를 고르고 있는 아내가, 아이들이 이리저리 콩을 섞어 놓자 이것 내다팔 거라고 하니, 울림이는 콩을 팔아 도감을 사달라고 합니다 그건 그런데 글씨를 모르는 울림이가 ‘벌실동충하초’라는 버섯 이름을 어떻게 외우고 있는지는 지금도 궁급합니다
12. 18
울림이가 와서 사고가 났다고 했을 때도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난 것을 보았구나 생각했습니다 손으로 가리키며 차를 바꿨다도 했을 때도 차가 또 고장이 났나 짐작했습니다 나중에 이음이와 같이 집에 와서 그림을 그려가며 해 준 이야기를 듣고서야 엄마 차가 사고가 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울림이 이야기 속 사건은 이렇습니다 ‘왼쪽으로 감나무가 서 있는 야트막한 고갯길을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가는 마을길에서 일어났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차들이 지나다니는 큰길이 나옵니다 엄마는 아이들을 태우고 어린이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마을길은 겨우 차 한 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아, 앞에서 오는 흰 트럭을 보고 엄마는 자연스레 속도를 늦추었을 겁니다 브레이크를 밟자 미끄러지며 잠깐 비껴 선 트럭과 부딪쳐, 엄마 차는 왼쪽 도랑으로 빠지고 트럭은 아슬아슬 오른쪽 논둑에 걸쳤습니다 엄마는 처음엔 엔진이 고장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빙판길이었습니다 왼쪽 언덕이 높아 그늘이 지고 어젯밤 살짝 내린 눈비로 얼어 있었던 것이겠지요 흰 트럭을 몰고 온 사람은 마을 이장님인데, 마을사람 일곱이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울었습니다’ 울림이는, 마치 차 안에 있지 않고 밖에서 사고를 보고 있는 듯 자세히 들려주었습니다 이음이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울림이가 쉬지 않고 이야기하자 엎드려 그림만 그립니다 너희들은 어땠냐고 묻자, 안전띠를 매어 아무 일도 없었다며, 할아버지들이 엄마 차로 다가와서, ‘우리’와 이음이를 안아 내리고 그 사이에 울림이는 혼자 빠져나왔는데 몇 번 넘어졌다고 합니다 아마 빙판길을 건너느라 그랬을 겁니다 아찔한 순간 엄마는 얼마나 놀랐을까요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며 들뜬 듯 이야기하면서 천천히 사고 속을 빠져나왔습니다
이음이 그림입니다 위에 오른쪽에 크게 그려 놓은 차가 엄마 차입니다 부딪친 곳은 까맣게 칠해 놓았습니다 가운데 아래 기차는 왜 그렸는지, 기차 오른쪽 아래 사람은 그리다 말고 왜 지웠는지는, 이음이 마음속으로 들어가 봐야 알겠지요
12.18
이음이가 종이를 돌돌 말아 유리테이프를 붙입니다 다시 종이 한 장을 말아 가로 세로로 붙여 십자 모양을 만듭니다 울림이가 방에 들어와 이음이가 만든 것을 보고 ‘나 따라 하지마’ 라며 십자 모양으로 만든 사이로 종이를 덧붙입니다 ‘울림이는 좋겠다, 따라 하는 동생이 있어서’ 라며 미리 울림이 마음을 다독입니다 이음이가 묻습니다 ‘할아버지도 동생이 있으면 좋겠지’ ‘응’ ‘아기 동생이 있으면 좋겠지’ ‘그러엄’ 어느새 울림이는 별 모양을 만들고, 이음이는 그걸 따라 합니다 울림이는 이음이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너 평생’이라고 하자, 마법에 걸린 듯 이음이는 따라 하던 것을 멈춥니다 ‘너 평생, 뭐하고 했어’ 라고 따져 묻자 울림이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너 평생 안 놀아 준다고 했지’ 라고 떠보지만 아니라고 우깁니다 ‘평생 간지럼 태운다고 했지’ ‘평생 웃긴다고 했지’ ... 온갖 말로 대답을 끌어내려고 해도 멋쩍게 웃으며 아니라고만합니다 무엇이 이음이를 얼어붙게 했을까요 아무래도 안 놀아준다고 한 것 같아 ‘나도 울림이가 안 놀아주면 슬픈 텐데, 엄마 아빠도 너희들과 안 놀아주면 슬프겠지’ 라고 말해 봅니다 그러자 뜬금없이 이음이가, 엄마는 우리와 안 놀아준다고 합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엄마가 얼마나 바쁜 줄 아느냐고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 젖 먹이고 회사 가는 아빠 아침 차려주고 ... 라며 엄마 편을 듭니다 나도 거듭니다 어린이집 안 가려는 너희들 붙잡아 차에 태워야지 너희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나무에 기어올라가고 땅을 파 들어가고 도랑을 헤엄쳐가고 ... 아이들은 소리 없이 웃으며 그림책 보듯 신나게 내 이야기를 다 듣고 있다가 그런 적 없다고 딱 잘라 말합니다 책상 다리에 기대어 풀죽어 앉아있는 이음이 마음을 딴 데로 돌리려고 ‘단이가 낳은 강아지가 눈을 떴어 까만 게 참 귀여워’ 라고 하니, 이음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장난말로 ‘할아버지 옆에서 없어져서 봤어’ 라고 합니다 이음이가 집에 갔다 온다고 하자 울림이도 따라 나섭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말은 ‘너 평생’이라고 해도 울림이와 이음이가 서로를 얼마나 아끼는지 부엌 창문으로 바라보니, 울림이가 뒤따라오는 이음이 손을 붙잡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습니다
* ‘할아버지 옆에서 없어져서 봤어’는 ‘할아버지 옆에서 몰래 숨어서 봤어’ 라는 이음이 말입니다 * 사진은,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보고 있는 지우를 흉내내는 이음이 모습입니다
12.12
‘할머니, 할머니’ 울림이가 소리칩니다 부엌과 대청마루 사이에 난 창문으로 까치발을 딛기도 하고 폴짝폴짝 뛰면서, 저를 보아 달라고 할머니를 부릅니다 아마도 키를 자랑하고 싶은 듯합니다 아무리 해 봐도 이음이 키로는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할머니를 볼 수 없습니다 이음이는 대청에 놓인 방석을 가져다 쌓고 그 위에 올라가 힘껏 손을 뻗쳐 보지만 창턱에도 닿지 않습니다 울림이도 방석을 들고 와 이음이가 쌓아놓은 곁에 쌓아올립니다 이웃에 살다가 이사를 가 이제는 손님으로 온, 다섯 살 난 우림이도 방석 하나를 짚더니 그냥 놓아두고는 부엌으로 들어갑니다 울림이는 우림이가 두고 간 방석을 들어 덧쌓으려고 하는데, 우림이가 달려와 무턱대고 방석을 잡아당깁니다 울림이는 놓아주지 않고 금방이라도 싸움이 터질 듯합니다 ‘울림아, 그건 우림이가 집었던 건데’ 라며 울림이를 달래자, 마지못해 놓기는 했지만 마음이 언짢은지 울상을 짓습니다 이럴 땐 나도 어찌할 바몰라 굳은 듯 서있습니다 방석 위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울림이를 보며, 이음이 눈에는 슬픔이 물결칩니다 문득 무슨 생각이 스쳐갔는지 얼굴이 환해지더니 ‘이렇게 하면 다 볼 수 있는데’ 라고 소리치며 이음이는 부엌으로 달려갑니다 부엌에 할머니가 있으니까요 울림이는, 이음이가 쌓아 놓은 방석을 들어다 더 높이 쌓습니다 이음이 말 한 마디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문제가 쉽게 풀렸습니다 그 지혜는 머리에서 온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왔음을 이음이 눈빛이 말해줍니다
오늘도 이음이가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울림이는, 이제 장난말이 되어 버린 ‘너, 평 ... ‘ 이라고 말합니다 ‘할아버지 다 알아, 너 평생 안 놀아 준다고 했지 할아버지가 니 마음속에 들어가 봤거든’ 아무말도 않는 걸 보니 내 짐작이 맞나 봅니다 ‘어떻게 들어가는지 알아’ 라고 묻자 울림이는 고개를 젓습니다 ‘코로 들어가는 거야’ 라고 하며 나는 어떻게 코로 들어가는지 보여 준다고,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가지런히 무릎에 두 손을 얹고 눈을 감습니다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려고 하는데,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눈 떠 눈 떠 봐’ 이음이가 소리칩니다 눈을 떠보니 글쎄, 울림이가 한 손으로 코를 쥔 채 큭큭대고 있습니다 덩달아 이음이도 코를 틀어쥡니다 저렇게 코를 막고 있으니 오늘 울림이 이음이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글렀습니다
12.22
‘할아버지, 정말 하늘나라가 있어’ 울림이가 묻습니다 오래 전 한 할머니 수녀님이 성당을 떠나시면서, 남아 있는 수녀님에게 ‘자매야, 우리 나중에 집에서 만나자’ 라며 헤어지는 인사를 나누는데, 나는 그 말이 슬펐습니다 어쩌면 그 말은 수도원에서 다시 만나자는 뜻이었을 텐데, 나는 이 세상에 나그네로 살다가 돌아갈 집을 떠올렸습니다 ‘울림아, 사람들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지’ 라고 하자 그건 안다고 합니다 돌아간다는 말은 온 곳으로 도로 간다는 뜻이니까, 사람이 죽으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데, 그곳을 ‘하늘나라’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 구름이 떠다니고 새가 날아다니는 하늘을 가리키는 것을 아닐꺼야 그러자 앉음새를 바로하며 공룡은 어떻게 생겨났느냐고 진지하게 묻습니다 늘 궁금했나 봅니다 ‘공룡은 먼 별에서 왔을까, 질흙으로 빚은 것일까’ 생명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다고 해 ‘우리’가 엄마 뱃속에서 헤엄치며 놀다가 세상에 나와서 두 발로 기어다니다고이제 뒤뚱뒤뚱 걸으려고 하는 것처럼, 공룡도 그렇게 생겨난 건 아닐까 그러자 ‘할아버지, 우주는’ 이라고 묻더니 어디에서 들었는지,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모으며 이렇게 작은 점이 폭발하여 우주가 되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잘 몰라 아빠한테 물어보면 쉽게 말해줄 거라고 하니 울림이는 아빠도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아빠가 하는 일을 말해 줍니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살고 건강하지 않고 시골에는 사람들이 적게 사니까 도시 사람들이 시골로 오면 도시와 시골이 다 좋아진다’며 아빠는 그런 일을 한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음이 자는 거 보고 온다고 늦었는데, 지금 깨어났을지 모른다며 울림이는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12.24
아, 울림이에게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하늘나라를 말해 주지 않았군요 풀과 나무,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와 하늘을 나는 새, 가시덤불 속 토끼와 언덕을 오르는 사슴, 이음이와 울림이가 서로 사이좋게 어울려 재미있게 노는 세상이 하늘나라라고 나도 잠깐 하늘나라를 맛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해 가을 개심사로 소풍을 갔습니다 학교에서 개심사는 걸어서 두세 시간 걸릴 만큼 꽤나 멉니다 소풍이 끝나고 아이들은 거의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걸어서 학교에 왔습니다 깻송이 싸아한 바람, 맑은 햇살에 여문 콩꼬투리 터지는 소리 한참을 걸어오는데 밀잠자리 한 마리 날아와 내 어깨에 날개를 접습니다 잠자리와 함께 숨을 고르며 학교 운동장 구령대에 앉았는데 처음 보는 동네아이들이 달려와 내 가슴에 안기고 목에 기어오릅니다 한 순간 꿈인 듯 그윽한 고요 속에 잠겼던 적이 있습니다
고요한 평화 속을 헤엄쳐 오늘, 성탄엽서를 입에 물고 아이들이 날아와 앉았습니다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는 내 나무 맨꼭대기에 가장 밝게 빛나는 별입니다
12.28
동짓날엔 아이들과 함께 마을회관에 들러 동네 할머니들이 쒀 준 팥죽을 먹었습니다 아이들 입맛에는 맞지 않는지 울림이만 몇 숟가락 뜨고 이음이는 손도 대지 않습니다 그런 줄 알고 엄마는 미리 김밥을 준비했습니다 점심을 먹고는 내포에 있는 도서관으로 갔습니다 읍내를 벗어나 덕산으로 빠지는 길목에서 차가 밀리는지 한참 머뭇거립니다 차가 빨리 안 간다고 이음이가 투정을 부립니다 ‘할아버지가 도서관을 당겨올까’ 하니 이음이는 무슨 말인가 눈이 동그래지고, 울림이는 믿지 않는 말투로 ‘그래 한 번 해 봐’ 라고 합니다 내가 힘껏 끌어당기는 척하니까 어느 새 차는 무리 속을 빠져나와 달립니다 ‘봐, 할아버지가 당기니까 차가 앞으로 나아가지’ 라고 하니까 울림이는 ‘그냥 차가 가니까 그렇지’ 라고 우깁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린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줄다리기 하듯, 길가에 서 있는 높은 집도 멀리 보이는 용봉산도 끌어당기며 눈 깜짝할 사이에 도서관에 닿았습니다 늘 와 보고 싶었는데, 도서관에 들어서니 산뜻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이 나들이 온 듯 편안합니다 넓고 바닥도 푹신하여 뛰어놀면 좋겠다고 하니 이음이는, 뛰어도 안 되고 큰소리를 내도 안 된다고 합니다 내가 크게 소리 지르는 척했으면 고 조그만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을 겁니다 왼쪽에 울림이 오른쪽에 이음이를 앉히고 가져다 쌓아놓은 그림책을 읽어주는데, ‘할아버지, 여기 아 아 아 써 있어’ 라고 작은 목소리로 울림이가 말합니다 ‘그렇구나 아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작게, 조금 크게, 아주 크게 차츰 커지면서 ‘아’가 써 있습니다 ‘우리 이렇게 소리 질러볼까’ 말이 떨어지자마자 손나발을 만들어 이음이가 낸 소리가 크고 맑게 도서관에 퍼집니다 다행히 아무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울림이는 ‘아’ 하고 입만 벌리고 있어 너는 왜 소리 지르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제가 낸 소리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책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아이들을 가까스로 떼어내어 집에 돌아왔습니다.
2019.1.5
온 식구가 처음 함께 기차를 탔습니다 강화에 사는 외할아버지 집에 다녀왔습니다 울림이는 생태박물관으로 기억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어린이박물관에서 겪은 일이 가장 많이 생각이 나나 봅니다 문밖에 서서 봇물 터지듯 거기서 보고들은 것을 쏟아냅니다 방에 들어와서도, 집으로 되돌아가 가져온 박물관 지도를 보이며 자세히 이야기해 줍니다 외할아버지와 바둑 둔 이야기, 아는 이모를 만난 이야기도 들려주고 머리가 하얀 이상한 할아버지가 준 단소와 소금도 꺼내 보여줍니다 이음이는 무엇을 줘도 통 입에 대지 않습니다 아내가, 따뜻한 아랫목에 뉘여 배도 만져주고 손도 주물러 줍니다 얼굴이 말가니 더욱 안쓰럽습니다 한참이 지나 괜찮아졌는지 찐 고구마를 달래서 먹습니다 박물관에서 가져온 책자를 펼쳐 색칠을 합니다 울림이는 무지개 빛깔로 섬세하게, 이음이는 산도 사람도 다 초록색으로 칠합니다 이음이는 초록색을 좋아하는구나 하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마음 속에들어가봤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라고 하며 ‘할아버지 콧구멍에 들어가 생각해봤어’ 라더니 말이 없습니다 이제 몸이 다 나았는지 뛰어다니며 장난을 칩니다 한참 울림이와 뛰다가, 울림이가 이음이보고 어서 쉬하고 놀자고 합니다 이음이는 오줌이 안 마렵다고 하고, 그래도 울림이 말이 맞겠지 하고 화장실에 가 오줌을 누입니다 오줌을 누면서도 이음이는 안 마려운데 라고만 합니다 오줌이 마려운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울림이한테 물어보니 비밀이라고 안 가르쳐 줍니다 겨우 이음이한테 물어봐서 알았습니다 이음이는 일어서서 두 다리를 붙이고 몸을 비트는 흉내를 냈습니다 초등학교 신입생 임시 소집이 있어 아이들은 돌아가고 아내가, 이음이가 ‘지우 삼촌 아직도 아파’ 라고 물었을 때 고맙고 가슴이 찌릿했다고 합니다 밤에 몰래 놀러온다던 이음이는 오지 않습니다.
1.6
시내버스를 타고 읍내 목욕탕에 갔습니다 장터에 있는 목욕탕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몹시 붑빕니다 하동 악양에 있는 목욕탕이 생각납니다 목욕비 삼천 원에 어른 서넛이 들어가면 꽉 차버리는 욕조, 수도꼭지 다섯인 작은 목욕탕이지만 지리산 형제봉 우리 집 곁을 흐르는 골짜기 물을 받아 참 깨끗했습니다 발을 닦다가 아이들 생각이 납니다 울림이는 갈라진 내 발뒤꿈치를 보며 할아버지 발에 지진이 났다고 하고, 엎드린 내 등에 올라타 널 뛰듯 뛰던 이음이는 벌집이라고 합니다 내 옆에 한 할아버지가 조심스레 손으로 발을 문지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실까 몇 번 망설이다가 제가 등을 밀어드릴까요 라고 했더니 선뜻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진 몰랐습니다 등을 밀다가 보니 할아버지는 오른팔이 없으셨습니다 왼쪽 어깨 둘레와 팔뚝 아래까지 찬찬히 밀어 드렸습니다 울림이와 이음이가 있었어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1.7
울림이가 놀다가 두고 간 장난감과 나에게 읽어 보라고 빌려준 책입니다 울림이는 오른쪽 두 번째 파란 공룡을 좋아합니다 그날도 이음이가 그 공룡을 가지고 싶다고 하자, 집에 도로 가서 전갈과 새 모양의 공룡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도 아음이는 형이 가진 것이 더 멋져 보이는지 그 파란 공룡을 달라고 떼를 씁니다 금방 울음이 터질 듯합니다 울림이는 선선히 내놓습니다 제 것을 꼭 챙기는 울림이에게는 좀처럼 없는 일입니다 웬 일이냐고 울림이를 꼭 끌어안아 줍니다 어떻게 그런 마음을 내었느냐고 자꾸 다그치자 ‘그냥 주면 되지’ 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합니다 어제 오늘 아이들이 오지 않아서 도서관에 갔나 어린이집에 갔나 궁금했는데 둘 다 배탈이 났다고 합니다 이럴 땐 내 손에 신비한 힘이 있어 닿기만 하면 요술처럼 아픈 배가 나았으면 좋겠습니다 늦깎이 목사님이 된, 내 친구 병진이가 생각납니다 신도들이 아플 때 나는 치유할 아무런 힘도 없고 다만 하느님 앞에서 눈물을 흘릴 뿐이라던
1.12
편을 갈라 놀 때는 이음이는 언제나 울림이 쪽으로 갑니다 콩을 고르는 내기를 할 때도 울림이가 가르쳐 준 놀이를 할 때도 울림이와 편을 먹습니다 너희들 어떻게 이렇게 사이가 좋으냐고, 떼어 놓고 싶은데 어떻게 하지 라고 물으니, 이음이는 마음을 바꾸면 된다고 합니다 이음이 마음을 바꾸기보다 내 마음을 바꾸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엉겨붙고 나뒹굴며 놀다가 느닷없이 울림이가 이렇게 아빠다리를 해 보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 하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며칠 전 울림이한테, 내가 잡아줄 테니까 꼿꼿이 서서 뒤로 넘어져 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땐 불안했던지 허리를 숙인 채 엉덩이로 내 무르팍에 주저앉거나, 주춤주춤 발뒤꿈치를 디디며 쉽게 넘어지지 못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오늘은 오롯이 몸을 맡기고 무릎과 허리를 곧게 편 채 몇 번이고 뒤로 넘어집니다 아내가 ‘우리 울림이가 마음이 참 넉넉해졌구나’ 라고 하니 아내에게 가서도 똑같이 해 보입니다 아내가 경상도 사람인 줄 아는 울림이는, 아내한테 ‘악어, 쌀’을 소리내 보라고도 합니다 아내가 ‘아그, 살’이라고 하자 우리 외할머니와 같다고 합니다 하루 하루가 다르게 울림이와 이음이 생각이 자라나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백 더하기 백 더하기 백은, 백삼이 아니고 삼백이라는 것도, 백이 열 번이면 천이라는 것도 울림이 혼자 생각해서 알아냈다고 합니다 울림이를 따라 이음이도 돌계단 길을 올라갑니다 ‘자고 일어나서 놀아’ 라는 이음이 말이 밀려오는 어둠을 잔잔히 흔들어 놓습니다
1.17
어디에서 들었는지 울림이가 ‘빛의 속도로 달리면 시간이 늦어진다’며 울림이 저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내가 빛의 속도로 달리게 밤새도록 연습할 거라고 하니, 듣고 있던 이음이가 ‘헤드렌턴을 몸에 넣고 달리면 되지’ 라고 말합니다. ‘옷 속에 말고 몸 속에 넣어야지’ 하는 울림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손전등을 옷 속에 넣고 아이들은 두터운 겉옷을 벗고 어둑어둑한 마당을 달립니다. 엄마가 말리는데도 그예 위 아래가 붙은 거추장스러운 북극곰 옷을 벗어던지고 내복만 입은 채, 울림이는 빛의 속도로 돌계단을 올라 사라졌습니다.
1.18
누웠다가도 이음이 표정을 떠올리면 웃음이 터져나옵니다. 어제도 울림이와 이음이가 같은 편을 먹고 내게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울림이는 손전등을 켜 불칼이라며 대들고, 이음이는 대나무를 다듬어 만든 등긁이 칼로 나를 내려칩니다. 손가락 끝과 머리와 이마를 마구 때려 너무 아픕니다. 에라 모르겠다, 너도 한 번 맛봐라. 두루마리휴지로 이음이 이마를 때리는 순간, 이음이 표정이 너무 우습습니다. 멍하니 아프긴 한데 이게 장난인지 아닌지 울지도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입니다. 내가 먼저 울림이한테 엄살을 떨며 일러바칩니다. 이음이가 여기저기 때려 겁나게 아프다고. 이음이는 볼 낯이 없던지 내 등 뒤로 와선 손바닥으로 내 두 눈을 가리고는 할아버지가 없다고 합니다. 나중에 엄마가 왔을 때도 ‘엄마, 이음이가 할아버지를 때렸어’ 라고 울림이가 일러바칩니다. 참 쌤통입니다.
1.20
어느 글에서인가 ‘아옹다옹’이란 말이, 고양이와 개가 싸우는 소리를 흉내낸 말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한데 우리 집 개와 고양이는 사이가 좋습니다. 강아지들은 고양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등에도 올라탑니다. 강아지들은 어미인 ‘단’에게서 배우고, ‘단’은 이웃집에서 기르다 두고 간 ‘보리’를 따라 배웠겠지요. 울림이는 동무인 ‘산들’이를 따라 집으로 올라가고, 나는 혼자 남은 이음이를 외발 손수레에 태워 요리조리 흔들며 산길 한 바퀴를 돕니다. 가는 길에 산비탈에 앉아 조그만 돌도 줍고 가랑잎도 주워 만져봅니다. 고양이 ‘호미’와 ‘호미’를 따라온 강아지 한 마리와 나란히 앉아 나무 사이로 다랑논을 내려다봅니다. 나는 이 순간을 고이 담아 마음속 사진첩에 끼워 둡니다. 비탈 아래로 미끄럼 타듯 내려갔다가 이음이를 안고 올라옵니다. 가파른 비탈을 서둘러 오르다가 이음이를 안은 채 넘어졌습니다. 이음이는 뒤로 나는 앞으로 넘어졌는데, 이음이가 ‘할아버지, 괜찮아’ 라며 걱정스레 묻습니다. ‘이음이가 괜찮으면 할아버지는 다 괜찮아’ 나는 이음이를 다시 손수레에 태워 집으로 갑니다.
1.22
‘할아버지, 아파트에도 이름이 있어’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이음이가 스스로 생각해 낸 듯 하는 말입니다. ‘아, 그렇구나’ 나도 처음 들어본 것처럼 놀라듯 말하니, 아파트 이름이 ‘부영’이라고 합니다. ‘부영아파트’는 여기 이사 오기 앞서 이음이가 살 던 곳입니다. 할아버지 집 이름도 지어 달라고 하니, ‘따듯집’이라며 할아버지 집은 따듯하니까 따듯집이랍니다. 군불을 때는 바깥채 온돌방이 따듯하기 때문입니다. 가게에 가서 엄마가 장을 보는데도, 아이들을 가게 문 앞에서 놀고 있습니다. 이 나이 때 아이들은 졸졸 엄마 뒤를 따라 다니며 이것저것 사 달라고 조를 텐데. 울림이는 복잡한 기능을 가진, 종이로 만든 리모컨에 다시 종이를 돌돌 만 안테나를 끼워, 이음이와 무전기 놀이를 합니다. 엄마는 장을 보다가도 아이들이 먹을 것을 살 때에는, 아이들을 불러 어느 것이 좋은지 물어보고 고릅니다. 웃풍이 세고 바닥이 차가워 방 안에 텐트를 두 겹이나 치고 전기담요를 깔고 자야 하지만, 이음이와 울림이가 사는 집은 참으로 따듯합니다.
-
‘이음도 손을 씻어야지’ 먹을것을 조금 차려 놓고 아내가 말합니다. 이음이는 아직 키가 작아 수도꼭지에 손이 닿지 않습니다. 받침대를 갖다 주었는데도 그예 세면대 위에 올라간다고 안아 달라고 합니다. 거품비누를 짜서 손을 씻는데 꼼지락꼼지락 어느 시절에 끝낼지 모르겠습니다. 한동안 꾸물거리다가 쉬가 마렵다고 합니다. 손등엔 아직 거품이 남아 있습니다. ‘아이고, 이음이는 장난꾸러기구나’ 하니 이음이는 ‘내가 장난꾸러기가 아니고, 쉬가 장난꾸러기야’ 라고 합니다. ‘맞아, 이음이는 쉬를 안 하려고 하는데, 쉬가 마렵다고 하는구나’ 하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시원스레 오줌을 누고 다시 세면대로 달려갑니다.
1.24
밥을 먹다가 이번에는 이음이가 아내를 놀립니다. ‘할머니, 악어라고 해 봐’ 곁에서 엄마 웃음소리가 터져나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악어(아거)’를 ‘악오(아고)’ 라고 자꾸 틀리게 소리내며, ‘어’와 ‘으’를 잘 가려내지 못하는 아내가, ‘악으(아그)’라고 틀리게 소리내길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어릴적 지우가 생각납니다. 쌕쌕이 비행기가 낮게 날아 찢어질 듯 소리가 커, 우인이가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면 저도 누나를 따라한다며 귀 위쪽에 토끼귀처럼 두 손을 대곤 했지요. 아직도 왼쪽 신과 오른쪽 신을 가리지 못해 바꿔 신고 다니는 이음이. 어제도 오줌을 누이며, ‘쉬가 장난꾸러기구나’ 라고 하니까, ‘할아버지, 쉬를 혼내 준다고 했는데 왜 아직 안 혼내 줬냐’며 도로 나를 혼내는 이음이. 이음이가 있어 세상은 날마다 첫날이고 나는 나이를 거꾸로 먹습니다.
2.1
곁에서 엄마가 시켰는지 책 읽듯 ‘고맙습니다.’ 말하고는 울림이는 이음이에게 전화를 건네주었나 봅니다. 이음이는 다짜고짜로 그 과자가 어디에서 났냐고 묻습니다. 어제 아이들 외삼촌이 과자를 보내주어서, 울림이 이음이 몰래 엄마 혼자 두고 먹으라고 문 앞에 두고 온 과자입니다. 서랍 속과 장롱 안과 다락 위 우리 집 살림살이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음이는, 그 과자 상자가 갑자기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퍽 긍금했을 겁니다. 나 : 할머니 오빠가 보내줬어. 이음 : 할머니도 오빠가 있어. 나 : 그럼, 할머니한테도 오빠가 있지. 이음 : 왜 안 알려 줬어. 나 : 미안해, 안 알려 줘서. 이음 : 괜찮아. 지금 알려 줬으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서두는 듯한 울림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할아버지, 우리가 걸었어. 아무 것도 잡지 않고.’ 드디어 우리가 한 발 첫걸음을 뗐나 봅니다. 아지랑이 봄날 아장아장 걸어 상긋한 생강나무 꽃내 번지는 오솔길 따라 ‘우리’도 우리 집으로 날아오겠지요.
-
참 오랜만에 울림이와 이음이가 왔습니다. 너희들 이름도 다 잊어버렸다고, 장난스레 이름을 다시 물어 보기도 했습니다. ‘황이음이야’ 이음이는 나무 인형을 보이며, ‘걱정인형’이라며, 걱정이 있을 때 밤에 말하면 걱정인형이 대신 걱정해 준다고 합니다. 이음이는 걱정이 무어냐고 물으니,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너무 떠든다는 겁니다. 아내가, 할머니도 걱정이 있으니 지금 말할까 하니, 밤에 해야 된다고 해서, 하룻밤 걱정인형을 빌려주었습니다. 울림이는 졸업식이 곧 다가오나 봅니다. 울림이가 졸업식에서 할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듣고, 나도 외웠습니다. ‘산책 도깨비캠프 바깥놀이 논학교 지나간 일들이 모두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울림이 말이 아니고 어른들이 써 준 말이라, 자꾸 고쳐 줘도 ‘산책 도깨비 캠프...’라고, 도깨비와 캠프를 띄워서 문장을 책 읽듯 통째로 외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방에 활짝 봄을 피워 놓고, 내가 끌어주는 손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2.10
그 새 울림이는 레고를 가져온다고 집으로 되돌아가고, 뒤따라온 이음이가 방에 들어오며 기침을 합니다. 기침도 데리고 왔구나 하니, 이음이는 ‘나는 안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기침이 쫓아왔어’ 라고 합니다. 그렇구나 이음이는 안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라고 하자, 이음이는 ‘응’이라며 ‘기침이 내 달리기보다 더 빨라’ 라고 합니다. 엊저녁에는 군불을 때려고 하는데, 이웃에 사는 주강사님이 오셔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들을 온통 재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듯싶어 물어 보니 그렇다고 합니다. 내가 전에 재를 치우는 것을 본 울림이가 아궁이 밖에서 재를 끌어내다가 깊숙이 손이 닿지 않으니까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어떻게 들어갔냐고 하니, 이음이는 이렇게 들어갔다며 두 손을 몸에 딱 붙여 보입니다. 오늘은 아이들에게 준다며 아내는 난로를 피워 고구마를 굽고 땅콩을 볶으며, 나는 난로 곁에서 울림이가 가져온 책을읽어 줍니다. 존 버닝햄이 쓴 ‘호랑이가 책을 읽어 준다면’이란 그림책을 읽어 주며, 어떤 것이 더 좋고 싫은지 물어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를 놀리는 게 싫어’ ‘아니면 독수리가 네 옷을 몽땅 훔쳐가는 게 싫어’ 라고 하니, 울림이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놀리는 게 더 싫다고 합니다. 독수리가 훔쳐가도 옷은 다시 입으면 되지만, 사람들이 놀리는 것은 기억에 남기 때문이랍니다. 그렇게 똑똑한 녀석이 난로에 불을 조절하는 쇠를 덥썩 잡아 오른쪽 집게손가락을 데고는 울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 있습니다.
2.12
최대한 기침보다 더 빨리 갔다온다던 이음이가 뒤늦게 방으로 들어서며 무슨 까닭인지, ‘저절로 마음이 바뀌었다’며 엄마가 떠 준 예쁜 목도리를 두르고 집으로 돌아가고, 끙끙대며 자연 이야기책 여섯 권을 들고온 울림이도, 두 시간만 놀다오라고 했다며 짠 하고 손을 흔들며 계단을 올라갑니다. 참, 울림이가 지난번 난로에 덴 손은 왼쪽 엄지손가락이라고 합니다. 사진은, 요즘 울림이가 만들어서 하는 놀이 카드입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1, 감옥 2, 불도끼 3, 바위 4, 공간 이동 5, 방패 6, 손 레이저 7, 투명인간 보기를 들어, 1번 감옥 카드를 내놓으면, 공격을 받은 사람이 감옥에 갇히는 겁니다.
2.26
울림이와 이음이가 냉이를 캔다고 그릇을 들고 걸어옵니다. 아이들은 냉이 한두 뿌리를 뜯어놓고는, 하켄처럼 호미를 땅에 꽂아 힘을 주고 언덕을 오르내립니다. 온통 흙투성이입니다. 다랑논 이쪽 저쪽 오가며 원앙이가 웁니다. 우리 집 왼쪽 다랑논 맨 위쪽 못에는 원앙이 한 쌍이 삽니다. 아이들이 언덕에 앉아 원앙이 소리를 흉내냅니다. ‘오랑 오랑’ ‘오르랑오르랑’ 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는 명절이나 경삿날에는 부녀자들이 모두 꽃으로 머리를 장식하는 풍습이 있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의 아내가 남편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만일 우트팔라꽃을 얻어 내게 주면 나는 당신의 아내로 있겠지만 얻어 오지 못하면 나는 당신을 버리고 가겠습니다.” 그 남편은 이전부터 원앙새 우는소리 흉내를 잘 내었다. 그래서 곧 궁궐 연못에 들어가 원앙새 우는소리를 내면서 우트팔라꽃을 훔치고 있었다. 그때 연못을 지키는 사람이 물었다. “연못 가운데 그 누구냐?” 그는 그만 실수하여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원앙새입니다.” 연못지기는 그를 붙잡아 데리고 왕에게 갔다. 가는 길에 그는 다시 부드러운 소리로 원앙새 우는소리를 내었다. 연못지기는 말하였다. “너는 아까는 내지 않고 지금 원앙새 우는소리를 내어 무엇 하느냐.”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다짜고짜로 이음이를 바라보고, ‘연못 속 거기 누구냐’고 소리치자, 이음이는 고 귀여운 입으로 ‘오랑오랑’이라며 원앙이 소리를 냅니다. 다섯 살짜리 이음이는 내 이야기를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울림이를 돌아보며 똑같이 ‘너는 누구냐’고 묻자, ‘나는 황울림이다’ 라고 능청스레 말합니다. ‘에고, 그러니까 잡혀가지’라고 하니까, 울림이는 저한테 다시 물어보라고 합니다. ‘너는 누구냐’고 되묻자 울림이는 ‘개굴개굴 ‘ 소리를 내기도 하고, ‘쉭쉭’ 혀를 내밀며 뱀을 흉내내기도 하고, ‘너는 누구냐’를 따라하며 메아리라고도 합니다. 아내가 점심을 먹자고 부릅니다. 아이들과 같이 가락국수와 어묵을 먹다가 슬그머니 울림이에게 장난을 겁니다. ‘울림이 너 아까 잡혀갔잖아. 여기 있는 울림이는 가짜지’ 라고 말하니, 울림이는 진짜라고 우깁니다. 너 이야기 속에서 잡혀가지 않았느냐고 덩달아 나도 우깁니다. 곁에서 이음이도 ‘형 목소리가 달라졌어’라고 함께 거듭니다. 울림이는 진짜라고 하면서도 차츰 목소리가 움츠러듭니다. 나는 ‘울림이 너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잘 모르겠지’ 라며 자꾸 벼랑 끝으로 밀어붙입니다. 아내가 안돼 보였는지 ‘이마에 상처를 확인해 보면 되잖아’ 라고 합니다. 무릎에 눕히고 울림이 앞머리를 들춥니다. ‘아, 여기 상처가 있구나. 진짜 울림이구나’ 라고 하니 그제야 울림이 얼굴도 목소리도 환해집니다.
아이들과 아랫집 할아버지-할머니-삼촌은 점점 더 좋은 벗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우리 부부도)
이번 주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집을 오래 비우시는 일이 생겨서 한동안 못 뵙다 드디어 오늘 만났는데
그 기쁜 마음이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들 오늘 뜬 커다랗고 밝은 달 만큼이나 환했다.
언젠가 할아버지가 달아 두신 댓글에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갔다오거나 쉬는 날이면 거의 우리 집에서 지내거든요 아이들 엄마한테 알려주려고 글로 적었어요"
라고 쓰신 글을 보고 아, 어쩌면 이건 할아버지가 나에게 보낸 편지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더 따뜻해 졌다.
여름에서 가을, 이제 가을에서 겨울로,계절이 바뀔 때 마다 할아버지와 아이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어떤 마음들이 오갈지 기대 된다.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 해 주시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오롯이 담긴 이 글들을 보며
어떤 날은 반성하고, 어떤 날은 감사하고, 어떤 날은 찡- 해지는 그런 나날들.
이렇게 우리는 아름답게- 이웃 하며 지내고 있다: )
2
10.26
가운데 금을 그어 놓고, 저 쪽은 ‘만화영화 속 세상’ 이 쪽은 ‘만화영화 밖 세상’으로 나눠 우리는 ‘만화영화 놀이’를 합니다
나는 흙바닥에 퍼질러 앉아 만화영화 속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구경합니다 한참 놀다가는 저희들도 모르게 이 쪽으로 건너와 공룡자동차를 가져갑니다 ‘야, 울림이 너 투명인간이냐’ 소리치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이 쪽 세상과 저 쪽 세상을 넘나들며 놉니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금을 넘어가, 싸우다 넘어진 이음이를 구출해 이 쪽 세상으로 건너옵니다 금은 굳어지고 높은 담이 되어 더는 두 세상을 넘나들지 못할 때 우리는 어른이 됩니다 어젯밤에는 울림이이음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서 오랫동안 놀다갔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할아버지 황금성 선생님 노랫소리는 대청마루에 가득 울려 퍼집니다 선생님은 이야기보다 더 많이 노래를 풀어 놓고 갔습니다 할머니 계순옥 선생님과 할아버지가 함께 부른 ‘옹달샘’ 맑은 물에서 마음껏 뛰놀며 울림이와 이음이 막내 ‘우리’는 곱디곱게 커가고 있습니다
10.27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습니다 어느덧 소리는 잦아들고 빗물을 머금은 구름은 몸을 풀고 가뿐히 초롱산 능선을 넘어갑니다 갓 헹구어 낸 햇살 사이로 아이들이 뛰어옵니다 눈부십니다 오늘은 따뜻한 구들방에서 놉니다 쪼르르 다람쥐처럼 목에 기어오르고 배에 올라타고 발목그네를 탑니다 우리는 작은 일로도 크게 웃습니다 오른쪽 팔베개에 누운 이음이 눈에는 잠이 그득합니다 내 귓불을 만지더니 귓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적 졸릴 때 하는 버릇입니다
10. 28
아이들은 돌계단을 타고 우리 집으로 옵니다 어른들도 단숨에 오르내리기 힘든 계단을 뛰어내려 오는 아이들을 보면 늘 조마조마합니다 울림이보다 키가 작은 이음이는 계단을 내려와선 잠깐 꽃무더기에 가려 사라졌다가 곧 마당에 나타납니다 ‘이음아 여길 어떻게 내려와’ ‘이렇게 이렇게 내려오지’ 라며 무릎을 굽히고 조심스레 발을 옮기는 이음이 발자국을 따라 계단을 내려와 봅니다 ‘아, 그렇구나’ 아이들은 제 깜냥대로 힘껏 세상을 살아갑니다 내려올 땐 쉽게 내려오지만 돌계단을 올라갈 땐 날마다 실랑이를 벌입니다 더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이음이는 안고 울림이는 손에 잡고 집 앞뜰까지 바래다 줍니다 한 번은 울림이가 집으로 돌아가다가 ‘엄마, 벌들이 많아서 못 가겠어’ 라며 울상을 짓습니다 짐짓 모르는 채 엄마는 ‘날마다 다니는 길을 오늘 따라 왜 그러니’ 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합니다 하긴 구절초 쑥부쟁이 꽃에 수천 마리 벌과 나비, 꽃등에 들이 윙윙대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나는 알아듣지요 ‘엄마, 나 더 놀고 가고 싶어요’라고 아이들이 오가는 계단길에는, 양옆으로 아내가 심어 놓은 쑥부쟁이 무더기, 오른쪽으로 돌면 지우가 씨를 부어 키워낸 토끼풀꽃, 그 위에 우인이가 일본에서 사다준 태양광 꽃등이 길을 밝힙니다 그 길은 마치 아이들이 내려준 동아줄 같아 나는 그 줄을 타고 올라가 날마다 하늘나라에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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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이들이 왔다’ 아내는 얼른 뛰어가 문을 잠급니다 아이들은 서운하게 뒤돌아서고, 부엌에서 지켜보던 나와 아내는 문을 열고 뛰어나가 ‘너희들 누구니’ ‘너희들 어디서 왔니’ 라고 놀리며 아이들을 꼭 껴안고 엉덩이를 토닥거려줍니다 오래 전 읽은 책에 재미난 할아버지가 나옵니다 아이들은 밤이 되면 할아버지 과수원으로 ‘사과서리’를 하러 갑니다 할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아이들이 몰래 울타리를 넘어와 살금살금 나무에 올라가는 장면을 지켜보다가 아이들이 숨죽이며 사과를 따는 순간 뛰어나와 ‘네 이놈들’ 하고 소리칩니다 자지러질 만큼 깜짝 놀라 달아나는 아이들 뒷모습을 보며 할아버지는 혼자 껄껄 웃습니다 울림이 이음이와 밭일을 하다 보면 땅콩과 고구마를 거둬들인 빈 밭은 아이들 놀이터가 됩니다 두꺼비집을 짓고 놀다가 굴을 뚫어 상수리를 굴려 넣고 공벌레나 무당벌레 애벌레를 잡아가두고 가끔 콩줄기에 붙어 있는 사마귀를 나무 꼬챙이로 건드리고 놉니다 우리 어릴 적에도 고무신 한 켤레면 하루종일 놀았지요 ‘고무신 멀리던지기’ ‘고무신 따먹기’ ‘고무신 숨기기’ 가끔 고무신을 엿으로 바꿔 먹기도 했지만, 고무신은 배가 되고 자동차 기차가 되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되었지요 ‘서머힐학교’를 세운 니일이란 선생님이 말했던가요 어릴 적 마음껏 놀지 못한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면 전쟁놀이를 한다고
*’무당벌레 애벌레’는 울림이가 이름을 가르쳐 주었어요
10.30
아이들이 다녀갔을 텐데... 현관문이 잠겨 있으면 아이들은 부엌문 고리도 흔들어 보고 살금살금 뒷계단을 올라 우리들만의 비밀통로인, 쪽마루로 난 안방 문도 열어 봤을 거예요 저녁 일곱 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을 때, 댓돌 앞 흐릿한 불빛 속 땅바닥에 새겨진 글씨와 마주치자 아이들이 막 뛰어나와 가슴에 안기는 듯했어요 ‘울림 이음 우리 왔다가요 빨리 오세요’
‘우리’를 업은 채 썼을까 마당에 써 놓은 엄마 글씨에는 울림이 이음이의 햇빛 반짝이는 웃음과 호수 잔잔한 눈빛과 물결치는 설렘이 소롯이 담겨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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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못 봤는데 울림이 이음이가 훌쩍 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 손이 가닿으면 금방 엊그제 개구쟁이로 돌아갑니다 대청마루 벽에 방석과 베개를 둘러쌓고 낮은 식탁 밑으로 드나들며 오늘은 ‘아지트놀이’를 합니다 숨었다가 나타나고 또 몸을 숨기고 아이들은 무척 재미있어 합니다 아이들은 구석을 좋아합니다 우리 집에 처음 오는 아이들도 어김없이 2층 다락 구석진 곳으로 숨어듭니다 나도 군대생활을 하면서 주말이 되면 점심도 거른 채 막사 뒤언덕 참호에서 지냈습니다 펼쳐놓은 책장에 어른거리는 마른 풀꽃 그림자, 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힘든 나날을 버티어 냈습니다 교사가 되어서도 수업이 비면, 운동장 너머 논언덕 움푹 패인 아늑한 곳에 몸을 누이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눈을 감으면 서로 몸을 부딪쳐 서걱거리는 풀잎 소리 그렁그렁 속눈썹에 감기는 맑은 햇살 한 오라기 눈을 뜨면 하늘에 고인 파란 물이 마냥 깊어 보였습니다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도, 인디언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비밀장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너희들의 구석은 어디인지 적어 보라고 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빨랫대 아래, 어떤 아이는 학교 오는 길이라고 한 것이 생각납니다 나는 어린시절 아버지가 쓰시던 책상 밑에서 꿈을 꾸었습니다 나는 어디인가 비어 있는 듯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 좋습니다 나는 울림이와 이음이가 언제나 달려들어 숨을 수 있는 그윽한 구석이 되고 싶습니다
10.31
‘할아버지, 우리가 놀던 거 그대로 둬야 해요’ ‘그러엄’ ‘삼촌이 치우면요’ ‘삼촌에게도 부탁하렴’ 그제서야 아이들은 일어섭니다 늘 그렇듯 내게 안겨서 집을 돌아가는 이음이가, 발을 흔들며 장난스레 한 쪽 신발을 벗어 던집니다 나는 주워서 신깁니다 계단을 올라선 울림이도 장화를 벗어 던집니다 그러더니 겉옷마저 벗어 풀섶에 던집니다 ‘너희들 나무늘보 같다’ 아이들 그림책에 나오는 나무늘보는 얼마나 느려터진지, 숲속 동무들을 만나 ‘아안~’ 하고 아침인사를 시작하여 ‘~녀어엉’ 하고 마치면 벌써 저녁이 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음이는 나무늘보 흉내를 냅니다 ‘아아아안...’ 성큼성큼 걸어서 몇 걸음 되지 않는 길을 아이들은 온갖 부산을 떨며 한나절이나 걸려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시간은 아이들 걸음으로 천천히 흘러갑니다 하늘의 해도 느릿느릿 떠서 느릿느릿 집니다 그리고 세상은 아무 일도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대청마루엔 어제 아이들이 ‘아지트놀이’를 하던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10.31
울림이가 넘어져 떨어뜨린 귤을 찾아다니다가 길에 떨어진 상수리 깍정이 하나를 주었습니다 ‘어, 도토리 깍정이구나’ 라고 하니, 이음이가 곧바로 ‘아니, 도토리 모자지’라고 마땅히 그러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아, 그렇구나 도토리 모자’ 어떻게 이런 말을 떠올렸는지 놀랍습니다 그러고는 풀섶에서 상수리 깍정이를 보자 이음이는 혼잣말로 ‘상수리 모자’라고 속삭입니다 상수리는 울림이에게만 알려주었는데, 어떻게 이음이가 알았는지 내일 만나면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풀약’(제초제) ‘잠자리비행기’(헬리콥터) ‘쌕쌕이’(제트기) 같이, 그 뜻이 쉽게 머릿속에 그려지는 말들도 이렇게 태어났을 테지요
아이들은 어른들 말을 그대로 흉내내어 배운다기보다는, 어른들이 쓰는 말을 들으며 저 나름대로 우리 말의 규칙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이음이가 자주 쓰는, ‘먹으는 것’(먹는 것), ‘잡으는 것’(잡는 것), ‘안 배 고파’(배 안 고파) 같은 말이 그러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하는 것을 금방 말로 나타내지 못해 한참 동안 오물오물거리는 이음이 입 모양이 눈에 선합니다 이음이는 찬찬하고 조심스러우며 사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11.1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가고 나 혼자 생강을 캡니다 아이들이 곁에 있다면 서로 먼저 캐겠다고 호미를 들고 달려들 거예요 아이들에게도 밭에 있는 생강을 보는 것은 처음일 거예요 가끔 어른들도 대나무 아니냐고 하거든요 나는 생강을 캐면서 생강 식구들을 소개할 거예요 늙고 쭈글쭈글한 엄마 생강(구강), 그 곁에 다닥다닥 붙은 얼굴 마알간 아기 생강 나는 가족보다는 식구라는 말이 참 좋아요 그 말에는 함께 밥을 먹는다는 뜻이 담겨 있거든요 ‘할아버지, 사마귀 집이에요 지난 번 책에서 봤잖아요’ ‘ 그렇구나 그걸 아직 기억하고 있구나’ 울림이는 생강 잎줄기에 붙은 거품덩이 같은 것을 보고 소리칠 거예요 아이들은 생강 캐는 일도 시시해지면 잎줄기를 던지며 놀 거예요 나는 생강 잎줄기를 끈으로 엮어 머리에 쓰고 아이들과 함께 인디언 놀이를 하겠지요 아이들은 순간순간을 살지요 순간에 머무르다 아무 미련 없이 떠나지요 아이들은 어제에 머물지 않고 늘 오늘을 살지요 산길을 오르는 차 소리가 들려와요 눈을 감아요 아이들 발소리가 들려요 울림이와 이음이가 지금 달려오고 있어요
11.2
강아지 ‘단’이와 ‘보리’가 겨울에 살 집을 만듭니다 ‘단’이 집은 어느 새 고양이 두 마리 ‘밤’이와 ‘호미’가 차지했고, 한데 마른 풀 위에서 웅크리고 자는 ‘보리’가 안쓰러워 어제는 구운 벽돌로 두 칸 집을 지어 속에 볏짚을 두툼하게 깔아 주었습니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울림이와 이음이는 엄마가 갖다 준 색분필로 새로 지은 강아지 집에 그림을 그립니다 지붕 한 켠을 빈 틈 없이 가득 칠해 놓은 이음이는, ‘영화 보기(시작하기) 전 캄캄한 거’를 그렸다고 합니다 갑자기 영화관이 생각났는지 더는 묻지 않았습니다 울림이는 고운 빛깔로 강아지 드나드는 문턱에 체크무늬를 그려 놓았습니다 아이들이 귤을 달라고 해서 집 안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수도꼭지에 손이 닿지 않는 이음이는 아내가 세숫대 위로 번쩍 안아 올려 손을 씻깁니다 아이들이 귤을 먹습니다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그저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엄청 맛있나 보다’ 하고는 얼굴을 쳐다보니 ‘엉엉 울고 싶을 만큼 맛있어’ 라고, 어디에서 들었는지, 혼자 생각한 말인지 장난스레 이음이가 대답합니다
^^ 고양이 ‘밤’이는 울림이가 지어준 이름입니다 강아지 ‘단’이와 소리 짝이 맞는다고 지었는데, 아마 산밤을 주으러 가다가 떠올렸을 겁니다 내가 캄캄한 ‘밤’은 까만 고양이와도 잘 어울린다고 하니 그 생각은 못했다고 하면서도 좋아합니다
11.3
‘예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멈춰 서서 혼잣말을 하더니 나를 부릅니다 노란 꽃술에 주홍 꽃잎 국화꽃입니다 ‘이 거 없는데(없었는데)’ 늘 다니는 길에 피어 있었는데 이음이는 오늘 처음 보나 봅니다 ‘그렇구나 오늘 처음 피어났구나’ ‘할아버지, 밤에 몰래 날아와 여기 꽂혔나 봐’
아이들을 만나면 가끔 장난말로 ‘너희 누구니’ ‘너희들 어디서 왔니’ 처음 본 듯 얘기했는데, 오늘 그게 사실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아이들은 늘 첫날 첫아침입니다 지금 막 피어났습니다 아이들에겐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니’ 라고 묻지 않습니다
마당에 가랑잎이 떨어집니다 해가 건너와 수천 개 이파리에 등불을 켭니다 수런수런 한껏 물든 나뭇잎이 젖어 빛납니다 나는 가만히 속삭입니다
‘너희들 누구니’ ‘너희들 어디서 왔니, 눈부신 이 아침에’
11.4
마을 거리축제가 열리는 날입니다 배추밭에 물을 주고 있는데 아이들이 뛰어옵니다 울림이가 건네주는 마을신문에는 간단한 행사 일정이 실려 있습니다 어린이집 아이들이 나오는 율동은, 이음이 반이 시작해서 울림이 반으로 끝난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율동 끝나면 우리가 쿠키를 팔아요’ ‘그렇구나 할아버지가 다 사줘야지’ ‘할아버지, 어디 있을 거야’ ‘울림이가 잘 보이게 나무 위에 올라가 있지’ 어느 새 이음이가 손을 들어 초롱산을 가리킵니다
등에 업힌 ‘우리’가 먼저 와 있습니다 이음이 반 아이들이 무대로 올라옵니다 아침에 곱게 물든 조팝나무 가지를 머리에 꽂고 흉내를 내더니, 그 인디언 율동을 하려나 봅니다 근데 이음이만 인디언 치마를 입지 않았습니다 이음이가 입기 싫어해서 입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 일 없는듯 아이들은 무대에서 뒹굴고 풍덩풍덩 빠지고 신나게 춤추고 뛰어놉니다 한 줄로 세우지 않고 한 틀에 가두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따듯한 눈길 속에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장구를 세워 놓고 마음껏 두들기는, 울림이 난타 놀이도 끝났습니다 오늘 나 대신 초롱산으로 올라간 사람은 ‘우리’입니다 아내가 들어올려 내 목에 걸터앉은 ‘우리’는 흥에 겨워 줄곧 몸을 들썩거립니다
11.5
‘할아버지’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만 들리고 아이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한참이나 지난 뒤 울림이가 언덕을 올라옵니다 금방 깎은 머리를 보여주려고 달려옵니다 산뜻하고 가지런한 머리칼 엄마가 깎아주었다고 합니다 ‘와, 훨씬 예쁘구나’ 흙손을 털고 꼬옥 안아줍니다 그러고 보니 이음이는 아직 마당에서 머리를 깎고 있습니다 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입니다 오늘은 고구마를 캔 빈 밭에 밀을 심습니다 골을 타고 그 위에 밀씨를 흩뿌립니다 휙 아이들이 던진 밀씨는 길바닥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울림이는 양파 모종을 옮겨 심은 밭에 밀씨 몇 톨을 묻어 두고 옵니다 우리는 노래를 지어 부르며 두둑의 흙으로 밀씨를 덮어줍니다 ‘밀씨를 숨기자 밀씨를 숨기자 새들이 먹지 않게 꼭꼭 숨기자’ 어느덧 가락을 맞춰 후렴인 듯 ‘까치들이 먹지 않게, 부엉이가 먹지 않게, 고라니가 먹지 않게...’를 되풀이합니다 초롱산 절벽에서는 웍웍 부엉이가 울고 있거든요 혼자 떨어져 밀씨를 묻고 있던 이음이가 ‘돼지가 먹지 않게’ 라고 하기에 ‘멧돼지’로 바꿔 부르자 ‘그냥 돼지가 먹지 않게’로 되돌려 놓습니다 노래는 이야기로 흘러갑니다 ‘아무거나 주워먹는 단이가 먹지 않게’, ‘이음이가 밤에 와서 몰래 가져 가지 않게’라고 하자 이음이가 얼른 ‘이음이는 늦잠꾸러기다’ 라고 대꾸합니다 늦잠을 자기 때문에 이음이는 밀씨를 가지고 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은 노래이고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이 없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엔 졸졸 시냇물 흘러가는 이야기나 재잘재잘 나뭇잎에 반짝이는 노래가 다 사라지겠지요
11.6
엄마에게 들려주고 싶었나 봅니다 ‘엄마, 잘 들어 봐 부엉이 소리가 들려’ 겉옷을 챙겨 뒤따라오는 엄마에게 말합니다 잠깐 끊겼던 부엉이가 다시 웁니다 해질녘 이맘때쯤이면 뒷산 절벽에서 우억우억 부엉이가 웁니다 울림이는 어느날 새벽 잠깐 혼자 깨어 고라니 우는 소리도 들었다고 합니다 볏짚을 나르던 아내가, 땅콩 캐낸 밭에서 흙을 파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는 ‘농사 짓는 집에 와서 농사일만 배운다’며 무슨 말끝에 ‘여길 고랑이라고 한단다’ 하고 일러주니, 울림이는 재미있는 듯 ‘고랑이’ ‘고랑이’ 하며 밭길을 달려갑니다 울림이는 이제 제법 고랑 사이로 외발 달린 손수레를 몰아 밭 한 바퀴를 돌아다닙니다 구덩이를 한참 파고 있던 이음이가, 뜬금없이 ‘할아버지, 도깨비는 어느 발이 힘이 세지’라고 묻습니다 이음이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밤에 도깨비를 만나면 왼다리를 걸어 왼쪽으로 넘어뜨리면 이길 수 있다고 한, 오래 전 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조금 전 삽과 호미로 구덩이를 파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야, 두더지가 파 놓은 것 같다’고 했는데, 더 깊이 파고는 두더지보다 힘이 센, 아니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도깨비 오른발로 팠다고 으스대려고 물어본 말이었습니다 도깨비는 왼다리가 약하니까요 날은 어둑어둑해져 저만치 떨어진 아내는 보이지 않고, ‘할머니를 잡아먹은 캄캄한 밤에게 우리도 잡아먹히겠다’고 하니 겁을 먹은 듯 내 품에 안겨 집으로 돌아가던 이음이가 묻습니다 ‘할아버지 딱지 만들 줄 알아 나도 갖고 싶어’
‘그러엄 내일 만들어 줄게 꼭 놀러와’ 아이들을 집까지 바래다 줍니다
11.7
우리는 까마득히 잊고 있지만 아이들은, 우리의 본디 고향이 하늘임을 곧바로 느껴 알고 있는 듯해요 아무렇지도 않는 이 땅에서의 삶이 아이들에게는 늘 낯설고 놀라움으로 가득차 있거든요 초인종이 울려 나가 보니 문 앞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서 있어요 엄마 등에 업힌 ‘우리’, 어제 집으로 돌아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늘 처음 만나는 듯한 울림이와 이음이 울림이는, 과일 낱개를 싸는, 그물처럼 생긴 스티로폼을 하나는 팔뚝에 감고 하나는 머리에 쓴 채 나타났어요 마치 로봇 같아 보였어요 속옷 윗도리에 새겨진 꼬마 요술장이인 듯한 그림, 이음이는 배를 내밀어 자랑하더니 한 쪽 눈을 찡그리며 그림 속 아이 표정을 지어 보였어요 딱지를 만들어 치고 종이비행기를 접어 다락에서 날리고 창 밖이 어두워질 때까지 놀았어요
아이들은, 어제에 묶여 있는 나를 풀어서 늘 지금 여기로 데리고 오지요
-
아침을 먹으며 아내와 내가 주고받은 말입니다 아내 : 아이들이 벌써 내려왔나봐 나 : 일찍 깨어났나 본데 아내 : 아니야 닭 우는 소리야 우리가 단단히 미쳤지 아내가 웃습니다
엊그제인가 나도 밭에서 일하다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는 아이들 소리인지 알고 두리번거렸던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우리 집에 처음 왔던 때가 생각납니다 이사 온 다음 날이었습니다 이사 온 날은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가 돌보고 있었으니까요 웬 아이가 문 앞에 서성이고 있어서 얼른 나가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조금 있다가 조금 작은 아이가 열린 부엌문 사이로 빼꼼히 들여다보고 있어 어서 오라고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이름도 물어 보고 나이도 물어 보고 울림이는 일곱 살, 이음이는 아내가 잘못 알아들어 ‘세 살’ 하고 되묻자 손가락까지 펼쳐 보이며 네 살이라고 야무지게 말했습니다 묻는 말에만 짧게 대답하고 주는 것만 오물오물 먹으며 하도 조용해서 퍽 수줍음을 타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비옷 속에 가방을 메고 놀러왔습니다 들어서자마자 안 보여 준다는 이음이 가방 속에도, 울림이 가방 속에도 그림책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림책도 읽고, 울림이 가방 겉주머니 속을 가득 채운 도꼬마리 열매를 던지며 놀았습니다
‘지하 백층짜리 집’이란 책을 읽다가, 박쥐가 사는 층을 지나 어느 층에 사는 무슨 동물 집에 버섯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그림을 보자 이음이가 말했습니다 ‘버섯 안에 박쥐가 생겼나봐’
11.8
‘지하 백층짜리 집’ 이야기 속 어느 층 천장에, 거꾸로 자라고 있는 버섯을 보고 ‘버섯이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다’고 한다면, ‘박쥐처럼’은 ‘거꾸로’라는 뜻에 갇혀 버린 메마른 말이 될 것입니다 도근도근 이제 막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은 ‘버섯 안에 박쥐가 생겼나봐’라는 이음이 말을, 날이 새면 훨훨 날아 달아날까 봐 얼른 적어 붙잡아 두었습니다 어제는 그림책을 보다가 울림이가 ‘할아버지, 그건 콩벌레가 아니고 공벌레야’ 라고 하자, 내가 못 알아들을까 봐 이음이는 벌떡 일어나 공을 차는 흉내를 내며 이런 공이라고 나를 가르칩니다 아이들에게 다시 배워야 할 나는, 아직도 아이들을 가르치려 드는 버릇이 남아있습니다 비가 내립니다 눈처럼 가랑잎이 떨어집니다 아이들 가슴 위에 소복소복 이야기가 쌓이고 있겠지요
11.10
세상은, 물이 맑은 만큼 맑습니다 내가 어릴 적엔 물이 참 맑았습니다 어릿어릿 눈부신 햇살, 무리지어 몰려다니다가는 작은 발소리 일렁이는 물그림자에도 휙 머리를 돌려 달아나는 송사리떼, 조붓한 논길 따라 흐르는 도랑물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몽골의 홉스골 호수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어릴 적 물을 만났습니다 솔체꽃 솜다리꽃 고운 머릿결 날리는 언덕에 닿아 할짝이던, 시리도록 맑은 물을 이제 이음이와 울림이 눈에서 봅니다
‘솔체꽃’
그이 고운 눈매
호숫가 따라 달빛 번지면
내 마음 풀언덕 일렁이는 꽃안개
가만히 몸을 흔들어 바람을 부르고
눈물 속에 떠오는 슬픈 선 하나
먼길 헤매어 찾아다녔지만
그대 피어 내 안에 있네
11.11
오늘은 이렇게 하고 집에 왔어요 울림이는 나무난간 위에 새똥 구경하느라 내가 나가서야 들어오고, 이음이는 얼굴 안 보여 준다고 눈을 감았지만 벌써 들켰거든요
11.12
‘하느님의 눈물’ ‘짱구네 고추밭 소동’ 미야자와 겐지의 ‘비에도 지지 않고’ 울림이와 이음이에게 줄 책을 고르며 내가 읽을 책도 샀습니다
지난 번 아이들 할아버지가 준, ‘글과그림’에서 펴낸 ‘나와 노래’를 읽다가 이 사람을 처음 만났습니다 투박한 글이 마음에 확 들었습니다 탁동철 선생님이 쓰신 ‘하느님의 입김’ 이란 책의 날개에는 선생님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잘 놀고 잘 삐치고 아이들에게 야단도 자주 맞는다...’ 잘 삐치고 아이들에게 자주 야단을 맞는 이 선생님을 만나면 꼭 안아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습니다
나는 학교에서 거의 2반 담임을 맡겼습니다 옆반 아이들은 우리 반을 ‘바보 2반’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하기사 어느 선생님도 ‘우리교육’이란 잡지에 나를 실으면서 ‘바보 선생’이라고 했으니까요 우리 반 아이들은 시험 보는 날 아침에도 좋아하는 책을 읽었고, 나는 아이들에게 늘, 밥 한 그릇 잘 모실 줄 알고 비질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무엇보다 값진 공부라고 가르쳤으니까요
하지만 탁동철 선생님은 보석처럼 빛나는 것을 아이들 속에서 끄집어내려고 했고, 나는 억지로 구겨 집어넣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다름’은 ‘기다림’에서 오는 것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책날개는 다시 이어서 선생님을 소개합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스스로 반짝거릴 수 있게 곁에서 보아주고 기다려 주는 걸 가장 잘한다’
11.13
울림이가 그림을 그립니다 바퀴로 굴러가는 그냥 자동차가 어느 새 ‘이오이오’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가는 경찰차로 바뀝니다 차 뒤에 감옥이 딸려 있고 사람이 갇혀 있습니다 ‘무슨 나쁜 짓을 한 거야’ 넌지시 말을 건넵니다 대답이 없습니다 ‘밖에서 크게 울어 잡아간 거니’ 장난스레 말을 던져 봅니다 아까 속상한 일이 있어 울림이가 크게 울고 갔거든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논에서 쉬하다 잡혀간 거니’ ‘누가’ ‘이음이가’ 지난 번 이음이가 쉬하기 좋다며 다랑논에서 오줌을 눈 적이 있거든요 하늘을 까맣게 칠합니다 ‘야, 산이구나’ ‘아니, 밤’ ‘삼촌처럼 뚱뚱해서 잡아 간 거니’ ‘밤이니까 일찍 자지 않아서 잡아간 거구나’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왼쪽에 새가 실려가는 차 한 대 또 왼쪽으로 계단이 있는 경찰서가 그려진 그림, 아내가, 텅비어 있는 우리 집 벽에 걸어 두어야겠다고 해서 두고 간 울림이 그림
왜 대답을 하지 않았을까 엄마가 곁에 있어 그랬을까 크게 울었다고 한 말이 마음에 언친 걸까 그러다 잠이 들고 별빛 가물가물 새벽녘에야 떠오른 생각 ‘울림이가 사는 나라엔 아직 나쁜 사람이 없기 때문일 테지’ 아닌가 그냥 말하기 싫은 날도 있지
-
콩을 거두고 있는데 아이들이 올라옵니다 ‘야 너희들 어디서 왔니’ 이제는 늘 처음 만나는 듯 주고받는 인사말이 되었습니다 이깔나무 바늘잎처럼 뾰족이, 보일 듯 말 듯, 아이들과 심은 밀이 어느 새 싹을 틔웠습니다 가까이 가서 밀싹도 보고 마늘밭을 다녀간 고라니 발자국도 만져보고 다시 아이들은 미끄러지듯 언덕을 내려가 집으로 숨어듭니다 현관문을 들어서는데 아내가 나와 목소리를 죽여가며 ‘아이들 왔냐고’고 물어보라고 합니다 나는 크게 말합니다 ‘여보, 아이들 왔어’ 아내도 아이들이 듣게 큰소리로 아이들을 못 봤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미리 아내에게 부탁했겠지요 안방에 숨은 듯합니다 나는 일부러 어디 갔나 하며 지우 방문도 열어보고 다락도 올라가봅니다 한참을 꼼지락거리다 안방 문을 여니, 기다리다 답답했던지 ‘할아버지, 못 찾겠다 꾀꼬리 하면 되잖아’ 하는 울림이 소리가 장롱 속에서 새어나옵니다 ‘어, 목소리만 남겨 놓고 어디로 갔지’ 나는 침대 밑도 들여다보고 이불도 들춰 봅니다 ‘못 찾겠다 꾀꼬리 라고 해야지’ 차츰 소리가 커집니다 ‘아, 못 찾겠다 꼬꼬댁’ ‘못 찾겠다 호히호히호’ (내가 들은 꾀꼬리 소리) ‘못 찾겠다 꾀꼴꾀꼴’ ‘못 찾겠다 꾀꼬르르르’ ‘아니, 못 찾겠다 꾀꼬리’ 이제 울상을 지은 듯한 울림이 목소리입니다 나는 붙박이장 옆 구석진 곳에 몸을 숨깁니다 내 소리가 안 들리자 아이들은 장롱에서 나와 쪼르르 대청마루로 달려갑니다 얼른 아이들이 숨었던 장롱 속에 들어갑니다 밖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아마 ‘백천’ 년이 지나도 내가 숨은 곳은 못 찾을 겁니다
*’백천’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을 때, 울림이가 쓰는 말입니다
11.14
훅 불어 케이크를 밝힌 촛불을 끕니다 ‘나도 끌 걸’ 이음이가 곧 울상을 짓습니다 다시 불을 붙입니다 장난스럽게 울림이가 다시 끄려고 입을 갖다댑니다 우리는 울림이 입을 틀어막습니다 오늘은 일곱 번째 울림이 생일입니다 ‘아빠가 일찍 와서 너무 좋아’ 달려가 아빠 품에 안기던 이음이가 아빠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음이가 일곱 살이면 울림이는 열 살’ 아빠가 대답합니다 ‘내가 열 살이면’ ‘형은 열세 살’ ‘내가 열세 살이면’ ‘형은 열여섯 살’ ‘내가 열여섯 살이면’ ‘형은 열아홉 살’ ‘내가 열아홉 살이면’ ‘형은 스물두 살’ ‘스물두 살이 내가이면’ ‘형은 스물다섯 살’ ‘스물다섯 살이 내가이면’ 스물이 넘어가자 이음이는 숫자를 잃어버릴까 봐 어쩌면 낯선 말이 나오자 숫자를 먼저 댑니다 나는 ‘스물다섯 살이 내가 되면’이란 뜻으로 들었습니다 마치 생명을 불어넣어 꿈틀거리는, 스물다섯이란 숫자가 이음이 몸으로 태어나는 듯했습니다 이음이와 아빠, 엄마와 울림이가, 지우가 선물한 레고를 맞추며 놀고 있습니다 ‘음, 이음이가 아빠 등에 올라타 있구나’ 아빠가 말하자 ‘아빠가 너무 좋아서’ 라며 이음이는 잇달아 몸을 흔들어댑니다 엄마는 엎드려 울림이가 맞출 레고 조각을 찾아주고, 울림이는 아빠에게 자랑합니다 ‘아빠, 내가 혼자 맞추는 거고 엄마는 그냥 찾아주기만 하는 거야’ 창 밖엔 초이렛달이 지긋이 눈을 감은 채 흐뭇이 웃고, 엄마 아빠 울림이 이음이 어느새 아내 등에 업혀 잠든 ‘우리’, 사랑스런 다섯 식구가 띄워 올린 별들이 조용히 하늘을 헤엄쳐 갑니다
11.15
‘너희들 맛있는 거 줄 거다’ 아이들에게 겁을 주는 척할 때 쓰는 말입니다 과자나 사탕을 무기로 꺼내드는 것은 아이들 집에서는 거의 자연 그대로 가꾼, 슴슴한 맛이 나는 것을 먹이는 까닭입니다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밀크카라멜이 있길래 ‘너희들 이 거 한 번 먹어볼래’ 하며 을러대는 척하니까 곧바로 ‘한 번 줘봐’ 라는 말이 아이들 입에서 튀어나옵니다 ‘어떡하지 우수수 이가 쏟아질 텐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지만 들은척만척 아이들은 처음 보는듯 카라멜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손가락으로 눌러 보기도 합니다 ‘어 물렁물렁한데’ 유혹을 이기지 못한 이음이는, 겉을 싼 종이를 벗기고 입에 넣습니다 이음이가 다 먹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울림이는 입에 넣습니다 이음이 윗옷 앞자락에 단물이 떨어집니다 코를 갖다 대니 들크무레한 냄새가 납니다 ‘아무래도 엄마한테 들키겠다, 엄마는 아기가 똥을 쌌는지 안 쌌는지 바지를 입었는데도 엉덩이를 맡아보고 다 아는걸’이라고 하자 이음이는 얼른 엄마한테는 비밀이라고 합니다 비밀은 무슨 비밀 저희들이 먼저 다 일러바칩니다 엄마가 현관문을 두드립니다 이음이가 귓속말로 ‘우린 같은 편이잖아’라고 속삭입니다 마음이 간지럽습니다 아이들이 보면볼수록 예쁩니다 아이들 친할아버지 말씀처럼 아이들과 끈끈한 사랑 놀이에 빠졌나 봅니다 ‘너희들 왜 이렇게 날마다 더 예뻐지냐, 밤에 몰래 엄마 젖 훔쳐 먹는 것 아니야’ ‘아니, 밥 잘 먹고 반찬 잘 먹고 잠 잘 자서 그런 거야’ 팽이 돌듯 핑그르르 한 바퀴 돌아 이음이가 내 품으로 달려듭니다
집으로 가는 길섶 마른 풀 위 오목하게 들어간 곳을 가리키며 ‘보리가 추워서 이렇게 꼬리를 흔들었어’ 라고 하더니 그 속에 들어가선 웅크리고 앉아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들어 보이던 이음이, 그제는 바람개비 접기 어제는 구슬치기 오늘은 종이공 던지기 날마다 무슨 무슨 놀이를 만들어 나와 놀아주는 울림이, 아이들이 또 보고싶습니다 아이들은 그 어디에서도 어제의 그늘이라곤 찾아볼 수 없습니다
11.19
커다란 갈참나무 아래 밭 사잇길로 이음이가 옵니다 넘어질 듯 말 듯, 이음이가 연필로 그려놓은 금처럼 삐뚤빼뚤 달려옵니다 ‘할아버지, 귀여운 거 보여줄까’ 당근을 캐다 말고 엉거주춤 일어나 ‘그래애’ 하면서 반깁니다 순간 궁금해집니다 이음이는 웃옷을 활짝 열어젖히더니 속에 껴입은 옷을 보여줍니다 곱고 빨간 줄무늬를 두른 옷깃, 왼쪽 가슴주머니에 벙긋 웃는 표정을 지은 동그란 가죽 조각이 붙어 있는, 가는 털실로 짠 계옷(털옷)입니다 ‘너무 귀여워서 할아버지 쓰러지겠다 이 옷 다시는 입고 오지마’ 처음에는 안 된다고 우기더니 내가 넘어지는 흉내를 내며 아픈 척을 하자, 안돼 보였는지 이음이는 ‘안 입고 올게’하고 말끝을 흐립니다 다행입니다 하지만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다음날 다시 고 귀여운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놀이를 하면서 가장 멋진 역은 늘 울림이가 도맡아 합니다 ‘경찰놀이’를 할 때도, 울림이는 경찰, 이음이는 경찰강아지(경찰견), 나는 도둑이 됩니다 다행히도 이음이는 아기처럼 기어다니는 강아지 역이 마음에 드는가 봅니다 입으로 내 옷소매를 물어뜯고 앞발로 내 얼굴을 할큅니다 한번은 이음이가 저는 경찰강아지를 할 테니 나보고는 경찰을 하라고 합니다 한참 놀다보니 어느 새 나도 이음이 곁을 네 발로 기어다니고 있습니다 내 꼴이 어찌 우스운지 크으윽 크으윽 숨이 넘어갈 듯 웃음소리도 나지 않고 눈물만 납니다 아이들은 무슨 일인가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경찰이 느닷없이 경찰강아지가 되는, 아이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혼자 미친 듯 웃고 있으니까요
11.21
아이들이 먼저 무엇이라고 물었는데 그 말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도 나이가 들면 하늘나라로 갈 거야 하늘에서 너희들이 오기를 기다리지 재미있게 놀려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이음이는 혼잣말인 듯 쳐다보지도 않고 ‘안 가’라고 딱 잘라 말합니다 순간 어찌할 줄 몰라 ‘할아버지는 구름 타고 놀러 다닐 텐데’라고 어물쩍 말을 돌리자, 부드러워진 표정에서 이음이 생각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울림이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하늘나라로 가는 거야’라고 이음이를 가르칩니다 지금 생각하면 ‘할아버지는 안 죽을 거야 너희들하고 오래오래 재미있게 놀 거야’ 라고 말할 걸 그랬습니다 이음이에게 죽음은 어떤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 곁을 떠나는 것이겠지 그 먼 나라를 잠깐 알게 된 나만 바라보고 따라갈 수 없었던 게지 ‘나의 라임오렌지’ 속 제제 말처럼 죽음은 마음속에서 지워지는 일일까 언제인가 아이들과 ‘심폐소생 놀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디에서 배워 왔는지 울림이는, 한 손으로는 내 코와 입을 틀어막고 배에 올라타 가슴을 짓누릅니다 이러다간 산 사람도 도로 죽을 것 같습니다 내가 눈을 꼭 감고 말도 안 하고 짐짓 죽은 척하자,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지 마’ 눈꺼풀을 뒤집으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던 이음이가 그 순간 죽음을 본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 ‘안 가’라고 했을까 내내 머리속을 떠다니던 그 답은, 나중에서야 울림이 말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없어지는 게 아니고 하늘나라로 가는 거야’ 아, 이음이는 없어지는 게 두려웠던 겁니다
새벽 첫잠을 깬 숲속 아기 새들,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가 재잘대는 소리가 집을 멀리 떠나온 이 곳에서도 들리는 듯합니다
알고 보니 우인이 언니(남편의 풀무학교 후배)의 부모님 이라고 하여서 만나 뵌 적은 없지만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었다.
우리가 이사 오기 전 부터 집 청소, 마당에 엄청난 찹조 제거(전에 살던 분들도 보기 어려 웠던 곳에 흙이 보일 정도로) 등등
물심양면 도와 주셨는데, 요즘은 아이들과 소울메이트가 되어 주셔서 아이들도 나도 기분좋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
요즘 울림이 이음이는 우리집 마당보다 할머니 할아버지네 마당에 가서 노는걸 더 좋아하고
창문 옆 계단에 앉아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오시기를 기다렸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발견하면 곧바로 뛰어 나간다.
최근에는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서먹해 하던 삼촌과 베프가 되어 웃음 소리가 우리 집 까지 들릴 만큼 신나게 놀고
할아버지랑 해가 다 넘어가 어둑어둑 해 질때 까지 산책하다 내가 "울림아 이음아 밥먹어~!!!" 부르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야 집으로 들어오곤 한다.
울림이 이마 찢어 진 날, 할머니 할아버지는 울림이 이음이를 저렇게 안고 업고 다니셨다ㅠㅠ
그러다 최근 아랫집 할아버지와 sns 친구가 됐는데 그곳에 할아버지의 글들,
특히 울림이 이음이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는 글들을 발견 하고는 마음이 너무너무 찡- 해져서
그 후로 나와 남편은 아랫집 할아버지의 글을 매일 기다린다.
어느날 할아버지 한테 "글이 너무 좋아서 매일매일 기다린다"고 했더니 감사하게도 다음 날 부터 더 자주 올려 주시는데,
이것을 나 혼자 보기에 아깝기도 하고(자랑하고 싶기도 하고ㅋ)
이 글들을 잘 모아 뒀다가 나중에 울림이 이음이가 볼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앞으로 블로그에도 차곡차곡 옮겨 보려 한다: )
2.
<아랫집 할아버지 일기>
9.24
비가 오지 않는데도 아이들은 늘 장화를 신고 우리 집으로 건너옵니다 판판한 오솔길을 두고 마치 모험하듯이 바위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와 도랑을 건넙니다 도랑이라고 하지만 비가 와야 바위 틈으로 물이 새어나와 며칠 동안 고여 있는, 가끔 소금쟁이가 뜨고 물맴이가 맴을 돌곤 하는 곳이지요
큰아이 ‘울림’이와 둘째 ‘이음’이와 늘 엄마 등에 업혀 있는 막내 ‘우리’, 아이들이 불편해 보여 제법 두꺼운 널빤지를 잘라 나무다리를 만들었어요 마침 바위 위를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아이들이 ‘아, 다리가 생겼구나!’ 좋아할 줄 알았는데 시큰둥한 표정으로 늘 그렇듯 질퍽거리는 흙을 밟고 도랑을 건넙니다
아이들은 내가 걱정하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놀라움으로 가득한 하늘나라에 살고 있어요 오늘은 짐을 싣는 외발 수레(밀차)에 울림이와 이음이를 태우고 숲길을 세 바퀴나 돌았어요
9.29
맏이 ‘울림’이와 말을 튼 때는 아마 그 일이 있은 뒤일 거예요 사근사근 말을 잘하는 둘째 ‘이음’이와는 달리 ‘울림’이는 뭘 물어봐도 금방 대답을 하지 않거나 짧게 한 마디 하지요 ‘아침엔 뭘 먹었니?’ ‘누룽지’ 어느 날은 ‘시리얼’ 그리곤 곧 말이 끊어지지요 ‘울림아, 이제 우리 집에 올 땐 혼자 와도 돼 맛있는 것 먹고 싶거나 만화영화 보고 싶을 땐 이음이한테 시켜 말하지 않아도 돼’ ‘할아버지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오늘은 길게 얘기했어요 그 일은 어제 아침에 일어났지요 울림이가 뛰어오다가 마당에 넘어졌어요 무척 아픈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어요 ‘울어도 괜찮아, 울림아’ 내가 말하자 순간 깜짝 놀란 듯 보였어요 물론 울지는 않았지만요 만약 내가 ‘아이구 형이니까 잘 참는구나’ 라고 말했으면 오랫동안 말을 트지 못했을지도 모르지요 이제는 울림이도 이음이처럼 다리가 아프다며 내 등에 업혀 산길을 올라요
10.8
큰바람이 지나가고 아까시나무 이파리들이 비에 젖어 여기저기 떨어져 있습니다 대나무비로 길을 쓸고 있는데 아이들이 달려와 저희들도 하고 싶다고 조릅니다 아이들에겐 대나무비가 힘에 겨워 팽이 돌듯 동그라미를 그리며 비척거립니다 ‘울림아, 우리 말타기 놀이 할까’ 가랑이 사이에 대나무비를 끼우고 울림이를 뒤에 태웁니다 금방 울림이가 앞에 타고 싶어해 자리를 바꾸어 달리다가 문득 장난이 치고 싶어 ‘이랴이랴’ 울림이 엉덩이께를 때립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말이잖아’ ‘아, 그렇구나’ 또 달리다가 잊어버린 척 엉덩이를 채찍질 합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다그닥 다그닥’ 죽마를 타고 오늘도 아이들과 숲길 한 바퀴를 돕니다
-
아이들이 이부자리에서 햄버거놀이를 합니다 나도 끼워달라고 조릅니다 맨 밑에 베개를 깔고 내가 엎드리면 그 위에 베개를 얹고 울림이가, 다시 울림이 위에 베개를 얹고 이음이가 엎드리면, 베개는 빵이 되고 나와 아이들은 고기가 됩니다 ‘아이고, 할아버지 죽겠다’ 짐짓 힘든 척 몸을 뒤집으면 마구 웃으며 아이들은 바닥에 나뒹굽니다 나를 잡고 겨우 일어나 앉은 아이들은 아그작아그작 베개를 뜯어 먹는 시늉을 합니다 햄버거 빵 사이에 들어있던 고기가 빵을 뜯어먹는 셈이지요 눈물이 날 만큼 웃으며 순간 아이들과 함께 나는 동화 속으로 들어갑니다
10.14
응급실 침대에 덩그러니 남은 울림이는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칩니다 엄마는 두 손 꼭 움켜쥔 채 내내 창문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울림이는 혼자 그 무서운 시간을 잘 참아냈습니다 그제 아침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음이와 나는 아궁이 앞에 있었는데, 고양이 밥을 준다고 뛰어갔다오다가 나무 난간 모서리에 부딪쳐 넘어진 채 울고 있었습니다 왼쪽 이마에서 솟구치듯 흐르는 피가 부드러운 무명베를 다 적실 만큼 크게 다쳤습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내는 저녁까지도 가슴이 뛴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이 나보고 웃었어요 내가 보일 때까지 서있다가 내가 보이지 않자 뒤돌아갔어요’ 깊게 팬 상처를 꿰매고 돌아오는 길 울림이가 내 품에 안겨 한 말입니다
10.15
‘어디 배꼽이 붙어 있나 보자’ 울림이와 이음이는 얼른 윗옷을 걷어붙이고 배꼽을 보여줍니다 아침에 만나자마자 나는 아이들 배꼽 검사를 합니다
‘옛날에는 산이 날아다녔어 몰래 날아다니다가 사람에게 들키면 그 자리에 멈춰 서지’ 엊저녁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할아버지가 재미있는 이야기 해줄까’ 하니까 아이들은 아주 신이 났습니다 빤히 얼굴을 쳐다보며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래도 안 되겠어 할아버지가 가르치던 아이들이 마구 졸라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줬는데 숨이 넘어갈 만큼 웃다가 배꼽이 빠져 큰일 날 뻔했어 그러곤 다신 재미있는 얘기를 해 달라고 하지 않았어’ ‘지금도 병원에 가면 배를 움켜쥐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너무 웃다가 배꼽이 빠진 사람들이야’ 그러건 말건 아이들은 이야기를 해 달라고 보채지만 나는 끝내 해 주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걱정되어서요
오늘은 다락방에서 ‘캄펑의 개구쟁이’를 읽어 주다가 우리 아이들 키울 때 생각이 나서 아이들을 이불에 눕히고 ‘담요그네’를 태워줍니다 손자가 없는 우리에게 이웃아이들이 찾아와 우린 할머니 할아버지로 살아갑니다
10.16
뒤뜰에서 꽃밭을 만들고 있는데 울림이가 책을 들고 뛰어왔습니다 사람을 쉽게 사귀지 못하고 책을 동무 삼아 살아온 터라 책을 들고 있은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갑니다 교사로 살아가는 내내 학교에서 내게 맡긴 일도 도서관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울림이가 들고 온 책 두 권 가운데 ‘사마귀’라는 자연 이야기 책을 빌렸습니다 사마귀는 일곱 차례 허물을 벗어야 어른이 되고 첫 허물을 벗은 어린 사마귀들은 서로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뿔뿔이 흩어진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날개로 자라날 곳을 가리키는 ‘날개싹’이란 말도 처음 들었습니다 아이들과 사귀려면 아이들이 쓰는 말을 알아야 하겠지요 ‘무슨 사우루스’ 라고 부르는 공룡 이름도 익히고 만화영화에 나오는 로봇자동차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어린이집에 가야 한다고 울림이가 불려간 뒤 아침을 먹고 있는데 부엌 문이 살짝 열리고 이음이가 혼자 나타났습니다 웬 일일까 이음이는 오늘 어린이집에 가지 않나 했는데 형이 왔다갔으니까 저도 할아버지 집에 들렀다 가야 한다며 아주 잠깐 문 밖에 머물렀다 돌아갔습니다)
10. 17
환청이었을까요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간다고 갔는데 ‘할아버지’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밭 가장자리까지 달려갔어요 아무도 없고 돌아와 혼자 땅콩을 캐며 이 행복한 순간도 스쳐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루종일 아이들이 없는 윗집은 텅빈 듯, 키 큰 야윈 거인처럼 쓸쓸히 서 있어요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가 떠올라요 제목도 줄거리도 잊었지만 어슴푸레 마지막 장면이 가슴에 남아 있어요 어느 날 손자와 동무처럼 지내던 할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돌아가셔요 엄숙한 장례식이 끝나고 아이 어머니는 조용히 아이를 불러 할아버지가 남긴 선물이 있다고 이야기해요 아이는 할아버지가 쓰던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상자를 찾아 조심스레 끈을 풀고 열어봐요 상자 속은 텅비어 있고 종이 쪽지엔 ‘너 이 놈, 또 나에게 속았지롱!’ 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
‘할아버지, 어린이집 갔다 와서 놀아요’ 크게 소리치고 아이들이 차를 타고 떠난 뒤 집 안에 들어서자 ‘당신, 친구가 없어 쓸쓸하겠네’ 라며 아내가 놀립니다 요즘은 아이들 말을 배워, 갑자기 아이들이 나타날 때 ‘앗, 순간 이동’이라고 하면 아이들은 너무 좋아합니다 가끔은 아이들을 놀리려고 ‘너희들 누구니’라며 짐짓 처음 본 듯 물으면 이내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라고 되받아칩니다 그러다가 우리끼리 ‘사라져랏’이란 놀이를 만들어 놉니다 ‘사라져랏’이라고 말하면 그 동안 기억이 다 사라지는 것이지요 어제 저녁에도 산길을 한 바퀴 돌다가 울림이에게 ‘너 어디서 왔니?’ 라며 ‘사라져랏’ 놀이를 했습니다 ‘부영아파트’ 잇달아 ‘사라져랏’이라고 말하자 울림이는 ‘완주’ ‘엄마 뱃속’ ‘아기씨’라고 이어서 말합니다 다시 ‘사라져랏’이라고 말하자 울림이는 잠깐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하늘나라’라고 말하고는 곧 ‘할아버지,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와서 하늘나라로 가는 거잖아요’ 라며 자신있는 듯 크게 말합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 아이들을 키울 적에 큰아이 우인이에게 ‘우인아, 우린 이 세상에 잠깐 소풍 온 거’라고 했더니 ‘아빠, 소풍이 왜 이렇게 지루해’ 하던 우인이 말이 떠올라 혼자 배시시 웃습니다
10.18
‘당신이 뭐예요’ 아내와 이야기하다가 아내를 ‘당신’이라고 부르자 곁에 있던 이음이가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는 듯이 나무라는 말투입니다 ‘그럼 뭐라고 부르지?’ 생각이 나지 않는지 이음이는 선뜻 대답을 않다가 한참 만에 ‘할머니라고 해야지’라고 말하는데 자신이 없어 보입니다 놀이에 빠져 있으면 아이들은 가끔 나를 ‘아빠’라고 부르거나, 올해 네 살인 이음이는 친구에게 하듯 거의 ‘너’라고 부릅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그랬습니다 둘러서서 얘기하다 보면 학생들은 나를 ‘삼촌’이라거나 ‘아저씨’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교사로서 위엄이라든지 근엄함이든지 하는 것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길 없어 그랬겠지만, 나는 ‘아저씨’라고 불리는 것이 참 편안했습니다 나는 ‘학교아저씨’로 사는 꿈을 꾼 적이 많습니다 아이들 책걸상을 고쳐주고 유리창이 깨지면 갈아끼워주고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이 다니는 길을 깨끗이 쓸고 차를 몰 줄 안다면 학교버스 운전기사 일을 했어도 좋았겠지요 이 가을날 아이들을 태우고 쑥부쟁이 끄덕이는 ‘모래재’ 고개 넘어 반짝이는 억새꽃 물결을 가르고 노을바다로 풍덩 뛰어드는 꿈을 그려보아요
10.19
아이들과 만든 뒤뜰 꽃밭입니다 ‘할아버지 뭘 심을 거예요’ ‘음, 물망초랑 꽃양귀비, 초롱꽃 그리고 수선화도 옮겨심으려고’ ‘지금 같이 심어요’ ‘할머니가 씨를 부어 놓았으니까 나중에 싹이 나면 우리 같이 심자’ 꽃길도 내고 벽돌도 나르고 아이들과 일하다 보면 어느 새 일은 놀이가 됩니다 울림이는 윗주머니에 있던 유리구슬을 흙에 파묻습니다 ‘야, 구슬이 열리겠구나’ ‘할아버지, 구슬나무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네가 한 번 그려보렴’ ‘아이구, 이음이는 호미나무를 심었구나’ 이음이는 호미를 거꾸로 묻고 흙을 다지고 있습니다 꽃밭놀이도 싫증이 나면 우리는 언덕에 누워 있는 우산바랭이 풀줄기로 우산도 만들고 풀싸움도 하고 그러다 보면 날이 어둑어둑해집니다 울림이가 다짐하듯 묻습니다 ‘할아버지, 우리 나중에 꼭 같이 심어요’ ‘그럼’ ‘우리가 어린이집 가면은요’ ‘할아버지가 기다릴게’ 고개를 숙이고 흙장난을 하던 이음이가 장난스레 또 묻습니다 ‘우리가 자면은요’ ‘그래도 기다려야지’ 기다리다 보면 보드라운 아이들 ‘흙가슴’에도 눈부시게 빛나는 봄이 피어나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10. 20
가뭄 끝에 시원한 비바람 한 줄기가 몰고 오는 풍경이 그러할까요 아이들이 마당에 들어서면 꽃과 나무와 풀들이 수런수런 깨어나 일어서고 벌과 나비의 날개짓이 더욱 바빠져 공기의 흐름마저 바뀝니다 오늘 아침에도 울림이와 이음이가 한바탕 놀다 갔습니다 스스로 팽이가 되어 넘어질 때까지 빙그르르 돌고, 같은 그림을 맞추는 ‘메모리카드’ 놀이도 하고, ‘응애응애’ 기어다니며 ‘아기놀이’도 합니다 ‘아기가 되면 뭐가 좋지’ 라고 묻자 맨먼저 나온 대답이 ‘이를 닦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어요 ‘엄마가 안아준다’ ‘엄마 젖을 먹을 수 있다’ ‘몸집이 작아 안 들키게 숨을 수 있다’ ... 이런 놀이를 하며, 오늘도 나는 살며시 샛문을 열고 아이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갑니다
10. 21
무척 신이 났는지 아이들이 지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옵니다 오늘은 지우가 아이들과 함께 ‘베이블레이드’라고 부르는 태엽팽이를 가지고 놀고, 나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들깨를 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울림이가 윗밭으로 뛰어올라 와 소리칩니다
‘할아버지, 삼촌 수술해야 하겠어요 베이블레이드와 우리 옷을 다 먹어버렸어요’ 이어서 이음이와 지우가 비닐하우스 속으로 뛰어들고, 알고보니 지우가 태엽팽이와 옷을 먹는 척하며 윗옷 속으로 집어넣어 배가 불룩하게 나온 겁니다 장난은 그치지 않고 ‘이음이도 잡아먹어야지’하고 지우가 달려드니 이음이는 내 뒤로 몸을 숨기며 ‘싫어’ ‘나는 맛이 없어’ 라고 자지러질 만큼 놀랍니다
사람에게 마음을 다쳤는지 오랫동안 안으로 꼭꼭 걸어잠가 좀처럼 저를 열어 보이지 않던 지우, 울림이와 이음이가 손을 내밀어 ‘저만 알던 거인’에 나오는 동네아이들처럼, 겹겹이 둘러쌓아 둔 지우의 담장을 허물었나 봅니다 그건 그렇고 어느 틈에 슬그머니 사라진 이음이가 걱정입니다 지우 말을 그대로 믿었나 봅니다
울림이가 집으로 돌아가며, 코뚜레 놀이에 쓰던 병뚜껑과 비닐 끈 그리고 손톱만한 조약돌을 내게 맡깁니다 아이들은 내일이 되면 또 잊어버리겠지만 나는 ‘오늘’을 소중히 간직합니다
10.22
아궁이에 불을 지핍니다 마당을 씁니다 여기저기 아이들이 그어놓은 금이 남아있습니다 오늘은 지리산에서 질그릇을 빚으며 홀로 살아가는 ‘화개요 선생님’이 옵니다 천리포수목원에서 열리는 서정이 어머니 도예전을 함께 보러 가자며 이른 새벽 구례구역에서 기차를 타고 오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놀다 간 자리에는 늘, 장난감 그림책 새깃털 도토리 솔방울 조약돌 같은 것들이 남아있습니다 마당을 쓸며 문득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어떤 자국이 남아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갑니다 이 가을날엔 이슬 한 줌에 도토리 세 알 먹고 마시며 몸을 가볍게 하여 혼잣말처럼 ‘노을 지는 것이 예뻐요’ 라고 하던, 울림이와 함께 바라보던 서녘 하늘에 엷게 노을이 번질 때, 아이들이 마당에 그어놓은 금을 따라, 아이들이 뛰어오던 조붓한 도랑길을 걸어서 조용히 하늘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10.23
이음이가 울고 가는 바람에 미처 말하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내일은 먼 데서 손님이 와서 집에 없단다’고 우리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아이들이 다녀가지는 않았을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당에 남았을 아이들 발자국을 찾아봅니다 텅빈 길 위에는 가랑잎이 나뒹굴고 찬비가 흩뿌려 촉촉히 젖습니다 부옇게 흐린 하늘에 이음이가 신었던 노오란 고무신이 동동 떠있습니다
-
더 놀았으면 하는 아이들을 달래어 집에 바래다 줍니다 ‘울림아, 내일 꼭 우리 집에 놀러 와’ ‘안 오면요’ ‘그럼 할아버지가 엉엉 울거야’ 손을 잡은 채 장난스레 이야기하고 가는데, 아내 손을 잡고 뒤따라 오던 이음이가 달려와 내 손을 쥐더니 ‘할아버지 여기서 같이 살아요’ 라고 말합니다 나는 갑자기 마음이 슬퍼집니다 오늘은 마늘과 양파를 심을 밭에 거름을 내고 산길을 내려오면서, 이음이는 레몬 냄새가 난다고 했는데, 비목나무 잎을 손으로 비비어 냄새도 맡고, ‘땡꿀’이라 부르는 까마중 까맣게 익은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나는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지만 울림이와 이음이는 늘 나를 어린시절로 데려갑니다 맞선을 보고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혼인을 한 나와 아내는, 내 어릴 적 고향으로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내가 살던 집과 다니던 초등학교, 어머니와 개발(?조개)을 캐러 갔던 바닷가를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어린시절 생각이 나, 비탈길을 올라 학교 울타리에 난 개구멍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는데 아내도 괜찮다며 부드럽게 말리고 이제 그러기에는 너무 커 버려 그만두었던 기억이 납니다
10.24
‘쌔게(‘빨리’의 경상도 말) 와 봐요’ 아내가 불러서 마당을 쓸다가 성큼성큼 뛰어가니 혼잣말로 ‘왜 이래 나를 깜짝깜짝 놀래키노(놀라게 하냐)’ 하며 바라보는 밭둑에는 용담 꽃이 피어있습니다 아내가 늘 보고싶어 하는 꽃입니다 갈퀴에 할퀴어지고 낫에 아무렇게나 베어진 풀더미 속에 보랏빛 고운 등을 밝혔습니다 ‘당신이 부르니까 왔지 용담도 으아리도 저기 노오란 산국도’ 지리산이 불러 나도 ‘매화 꽃내 그윽한 골짜기’(악양면 매계리)에 흘러들어가서 살았고, 누구인가 애타게 손짓하여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울림이와 이음이도 여기까지 왔겠지요
10.25
사람 사이가 서먹서먹한 나는, 늘 아이들 속에 있거나 풀과 나무를 동무 삼아 지내왔어요 수업이 비는 시간엔 학교 뜰을 거닐거나 울타리 너머 논길에 쭈그려앉아 봄흙 냄새를 맡거나 풀꽃들을 찬찬히 살펴보았어요 순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던, 내 발길을 붙잡은 타래란도 처음 만났고, 메꽃과 큰메꽃은 꽃의 크기뿐만 아니라 잎의 생김새도 다르고, 흰제비꽃이 보랏빛 제비꽃보다 꽃내가 짙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밭농사를 지으면서부터 풀꽃들과는 사이가 멀어졌어요 언덕에 흐드러진 쇠별꽃 무리는 뜯기고, 밭에 날아와앉은 꽃마리 괭이밥 주름잎 지칭개 봄까치꽃 광대풀 들은 뽑히고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어 오지 않았어요 어느 새 도랑에 여울지는 여뀌나 고마리와도 사이가 뜸해졌는데, 호기심으로 가득 찬 울림이 이음이와 놀면서 풀꽃들이 속삭이는 소리도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강아지풀로 콧수염을 만들어 붙이고 질경이풀로 제기도 차고 옷에 붙는 도꼬마리 도깨비풀 쇠무릎지기 풀씨 이름도 가르쳐 주고 봄이 오면 찔레 새 순도 꺾어먹고 냉이꽃 마른 줄기로 꽃종도 만들어 차락차락 흔들며 놀겠지요
10.26
‘오늘 아침엔 뭘 먹었어’ ‘시리얼, 빵 그리고 으음 없어를 먹었어’ 울림이가 제법 장난말도 칩니다 ‘어떤 빵인데’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지 조금 기다렸다가 ‘어, 할아버지도 알잖아 구름빵, 구름빵처럼 푹신한’ ‘그랬구나’ 나도 알고 있습니다 지난 번 울림이이음이 엄마가 빌려준 그림책 ‘구름빵’을 읽었거든요 ‘구름빵’은 푸근히 안겨오는 빛그림(사진)을 곁들인, 아이의 마음과 엄마의 마음을 이어주는 하늘의 무지개 같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길 가운데 하나는 같은 책을 읽는 것입니다 울림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준다며 ‘도깨비를 빨아 버린 우리 엄마’ 라는 동화를 들려주는데 , 아무리 귀를 기울여 들어도 이야기 흐름이 자연스레 이어지지 않아 그저 고개만 끄덕인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울림이가 책을 빌려줘 읽고 나서는 동화 속 이야기 몇 마디만 던지더라도 서로 알아듣고는 신나게 떠들며 웃어댔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지만, 잠자리에서는 늘 팔베개를 하고는 동화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이 쓰신 ‘황소아저씨’는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여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들려 줬는데, 어느 날 슬그머니 이야기 속으로 우리 아이들을 등장시키자 두근거리는 가슴을 꼭 누르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던 지우 모습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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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금을 그어 놓고, 저 쪽은 ‘만화영화 속 세상’ 이 쪽은 ‘만화영화 밖 세상’으로 나눠 우리는 ‘만화영화 놀이’를 합니다 나는 흙바닥에 퍼질러 앉아 만화영화 속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구경합니다 한참 놀다가는 저희들도 모르게 이 쪽으로 건너와 공룡자동차를 가져갑니다 ‘야, 울림이 너 투명인간이냐’ 소리치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이 쪽 세상과 저 쪽 세상을 넘나들며 놉니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금을 넘어가, 싸우다 넘어진 이음이를 구출해 이 쪽 세상으로 건너옵니다 금은 굳어지고 높은 담이 되어 더는 두 세상을 넘나들지 못할 때 우리는 어른이 됩니다 어젯밤에는 울림이이음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서 오랫동안 놀다갔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할아버지 황금성 선생님 노랫소리는 대청마루에 가득 울려 퍼집니다 선생님은 이야기보다 더 많이 노래를 풀어 놓고 갔습니다 할머니 계순옥 선생님과 할아버지가 함께 부른 ‘옹달샘’ 맑은 물에서 마음껏 뛰놀며 울림이와 이음이 막내 ‘우리’는 곱디곱게 커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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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을 보면서 작고 어리고 순수한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반짝반짝 빛나는지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