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친 김에 마구 옮겨 본다.
그러다 보면 내 글도 마구 쓰게 되겠지.
2.
2019.6.10
‘모자를 한 것 같아.’ 지칭개 작은 꽃봉오리 앉은 무당벌레 를 보고 이음이가 한 말입니다. 그러더니 할아버지한테 앉고 싶다며 풀을 뽑고 있는 내 무릎에 앉습니다.
나 : ‘내 무릎에 모자를 했네.’
이음 : ‘그건 아니지. 머리에 해야지.’
나 : ‘그럼 이건 뭐라고 하지?’
이음 : ‘이건 합체한 거지.’
요즘 이음이는 어린이집에 잘 가지 않습니다. 형 울림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곤 곧바로 우리 집으로 달려옵니다.
무릎에 앉힌 채, 요즘 형과 많이 싸우지 라고 묻자 처음엔 아니라고 하더니, 조금 싸운다고 합니다. 동생 우리는 자꾸 쫓아오고 형 울림이는 저 멀리 달아나고, 가운데에서 이음이는 제 나름대로 힘들어 하는 듯 보입니다.
개망초와 민들레도 서로 친척이라며 두 손을 다리는 꼭 붙여 움직이지 못하는 풀 흉내를 내거나, 공벌레 흉내를 내며 허리를 굽히는 이음는 여전히 귀엽습니다.
6.12
‘우인이 이모하고 지우 삼촌은 어릴 때 왜 싸우지 않았을까?’ 아이들을 앉혀 놓고 묻자, 울림이가 ‘두 개 있어서.’ 라고 대답합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해 다시 묻자, 울림이는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습니다. 그제사 생각이 났습니다. 똑같은 게 두 개씩 있으니 서로 가지려고 싸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울림이와 이음이는, 모종삽도 호미도 물조리도 망치도 킥보드도 자전거도 똑같은 걸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야, 우인이 이모는 여자아이고 지우 삼촌은 남자아이라, 노는 게 달랐기 때문이야.’
언제인가 이음이가 울면서 ‘나는 형이 하는 거 다 하고 싶어.’ 라고 소리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울림이는 동생이라고 마냥 양보만 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우인이한테 늘 네가 누나이니 양보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동생과 나이 차이가 한 해 보름밖에 나지 않는데, 그 일을 생각하면 우인이한테 참 미안합니다.
동생이라고 무턱대고 양보하지 않는 울림이는, 여섯 살 차이가 나는 막내 우리에게도 무엇을 빌릴 때는 먼저 우리의 생각을 물어 봅니다.
모든 것을 형처럼 하고 싶은 이음이는 형이 너무 좋고 세상에서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너, 평생 안 놀아 준다.’는 울림이의 말이 이음이에겐 무엇보다도 무섭게 느껴졌을 테지요.
요즘은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음이도 ‘할아버지, 평생 안 놀아 줄 거야.’ 라며 나에게 겁을 줍니다.
6.14
아침을 먹는 나를 기다렸다가, 밥을 다 먹자마자 이음이는 내 손을 끌고 안방으로 갑니다.
‘할아버지, 텔레비전 보자.’ ‘안 돼.’ ‘바둑 볼게.’
이음이는, 가끔 내가 바둑을 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바둑을 조금 보다말고 이음이는 혼잣말로, ‘만화 보고 싶은 기분이 난다.’ 고 합니다. 단단히 잠가 둔 내 마음이 스스르 풀립니다.
우인이와 지우는 어릴 적에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자랐습니다. 저녁이면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어주거나 촛불을 켜서 그림자놀이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얼마 전에 우인이에게 어떻게 영어 선생이 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우인이는, ‘아마 어릴적 음악을 들으며 소리에 집중할 수 있어 그러지 않았을까.’ 하고 대답합니다.
오늘도 낮에 놀러와 이음이는 텔레비전을 보자고 조릅니다. 엄마가 왜 텔레비전을 보지 말라고 할까 라고 물으니, 눈이 나빠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아는 것으로 꽉 차 있는 이음이 머리가 조금씩 비워져.’ 라고 하니, 이음이는 텔레비전을 조금 보다가 머리가 비워졌나 만져보라고 합니다.
이음이 큰 머리를 두손으로 어루만지며 약간 가벼워진 것 같다고 하니, 이음이는 조금 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스스로 텔레비전을 끄고 일어섭니다.
사진은, 늘 우리 집 나무난간 아래 놓여 있는 아이들 킥보드와 자전거입니다.
6.15
‘머라고(뭐라고)?’ 이음이가 자주 쓰는, 경상도 억양이 묻어나는 이 말투는 아무래도 엄마에게서 온 듯합니다.
이음이가 쓰는 말이 하도 귀여워 그대로 적어 두기도 합니다.
‘호도독호도독’은 빨리 달리는 시늉을 할 때 쓰는 말이고, 원숭이를 흉내낼 땐 ‘우끼우끼’ 라고 합니다.
더러 내가 못 알아들으면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는, 이음이가 책에서 본 ‘흰머리독수리’라는 말을 내가 얼른 알아듣지 못하자 ‘흰 색깔 할 때 흰이라고 해 봐.’ 라며 보기를 들어 쉽게 알려줍니다.
이음이가 혼자 만들어 쓰는 말도 있습니다. 홀쭉이라는 말을 모르는 이음이는, 뚱뚱이라는 말에 맞서는 낱말로 ‘얇은이’이라는 말을 씁니다.
‘얇은이’라고 할 땐, 엄지와 검지를 거의 붙을 듯이 사이를 떼어 요렇게 라며 몸짓으로 보여줍니다.
사진은, 부엌 앞뜰에 핀 산수국입니다. 눈부시게 피었다가 가슴 서늘히 지는 꽃도 있지만, 산수국처럼 소리없이 조용히 피었다가 지는 꽃도 있습니다.
6.18
날이 어둑어둑하면 재넘이(산바람)가 산꼭대기에서 내려오고, 굴뚝 연기 자욱이 깔릴 무렵이면 슬금슬금 도깨비들이 나타납니다.
문을 열고 빼꼼히 내다보던 막내 ‘우리’ 도깨비가 돌계단을 구르듯 내려오고, 이어 꽥꽥 소리 지르며 이음이와 울림이 도깨비가 튀어나옵니다.
한바탕 귀여운 도깨비들이 뛰놀고 간 마당에는 부지깽이나 몽당비 대신 킥보드와 자전거가 나뒹굴고 있습니다.
6.24
‘동자꽃이 피었네.’ ‘하얀 동자꽃도 피기 시작했어요.’ 새벽이면 아내와 내가 주고받는 인사말입니다.
초롱산을 넘어온 해는, 아이들이 사는 지붕에서 우리 집 뜰로 눈부신 햇살을 쏟아붓습니다.
마당 가득 햇살이 번질 무렵 아이들이 하나둘 집에서 튀어나옵니다.
울림이와 이음이는 ‘할아버지, 할머니’ 크게 소리쳐 부르고, 막내 우리도 ‘어어’라며 반갑게 소리를 지릅니다.
막내 우리는 물장난과 손수레(밀차) 타는 것을 좋아합니다. 손수레에 다가가 한 발을 올리면, 태워 달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태우고 산길 한 바퀴를 돕니다. 비탈을 내려가다가 손으로 뽕나무를 가리키면 오디를 따 우리 입에 넣어줍니다.
울림이는 거의 저녁에 머리를 감기 때문에 가지런히 빗어도 자고 일어나면 오른쪽 머리칼이 치뻗어 있습니다.
‘너희 반 여학생 다 죽었다. 멋진 머리칼에 반해.’ 내가 놀리면, 울림이는 아니야 아니야라고 하면서 해죽이 웃습니다.
햇살 가득한 아이들은 어디에도 그늘이 없습니다.
6.25
‘튀겨 먹든지 놓아주든지 할아버지 좋은 대로 해.’
풀밭에서 잡은 홍그래비(방아깨비) 새끼를 내 손에 쥐어 주며, 이음이가 하는 말입니다. 말투나 표정이 아빠를 닮았습니다.
이음이는 신발 속에 흙이나 모래가 들어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럴 땐 내 무릎에 앉히고 신발을 털어 줍니다.
형 울림이가 세상에서 가장 멋있다고 말하지만, ‘내 사랑을 받아주세요.’ 라며 날마다 엄마한테 풀꽃을 꺾어 바치는 이음이도 참 사랑스럽고 마음이 따뜻한 아이입니다.
얼마 전엔 식구들이 있는 자리에서 ‘할아버지는 바보’라고 하길래, 비밀인데 어떻게 알았냐고 했더니, 할아버지 마음속에 들어가 보았다고 합니다.
마음속에 들어가 보니, 할아버지는 심술이 네 개 있고, 할머니는 착한 것이 일곱 개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내가 들려준 놀부의 오장칠부 이야기에서 따온 듯합니다.)
걸핏하면 ‘할아버지 싫어.’ ‘나, 집에 갈거야.’ 라며 나를 놀리고 겁을 주지만, 이음이는 내 무릎에 앉는 걸 좋아하고, 집에 갈 때는 꼭 내 등에 업히거나, 가슴에 안겨 갑니다.
6.28
‘할머니,할머니’ 팔짝팔짝 뛰며 이음이가 소리지릅니다. 아내는 가슴 설레면서도 마음 한켠으로 살짝 두려움 같은 것이 스쳐간다고 합니다. ‘내가 정말 잘 살고 있는 건가?’ 하루 동안 보지 못했는데 저리 온몸으로 반갑게 맞이하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손수레에 태우고 산길 두 바퀴를 돌았습니다. 이제 마음이 조금씩 이어지나 봅니다.
으름나무 잎을 따서 건네주니, 나뭇잎으로 내 얼굴을 간지럽히며 장난을 칩니다. 숲 그늘 아래를 지날 때, 내가 ‘아이, 시원하다.’고 하면 저도 따라 ‘음음’이라고 소리냅니다.
막내 우리는 비탈진 언덕에서 킥보드나 자전거를 굴려 놓고 뒤따라가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킥보드는 혼자 굴러가다 풀섶에 쓰러지고, 우리는 소리를 지르며 구르듯이 그곳으로 달려갑니다.
넘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 뛰어가는 우리를 뒤쫓아가거나 먼저 달려가 앞에 섭니다. 우리는 달려와 서있는 내 다리를 꽉 붙잡습니다.
나는 다시 앞으로 달려가고, 멀리서 울림이가 달려오고 이음이가 달려오고 뒤따라 우리가 달려오고, 나는 몸을 낮춰 아이들을 안은 채 뒤로 넘어집니다. 세상을 다 안은 듯합니다.
7.1
막내 우리가 제 키를 훌쩍 뛰어넘는 긴 고추막대를 어깨에 멘 채 질질 끌고 다닙니다. 곁을 살피지 않고 앞만 보고 다니니까, 다치지 않으려면 옆 사람이 비껴나야 합니다.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막대기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우리를 보고, 아내가 ‘아무것도 모르니 힘이 세구나.’ 라고 합니다.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내가 이음이에게 ‘너, 저번에 할아버지 보고 바보라고 했지. 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힘이 세다고 하잖아.’ 라고 하니, 이음이는 아니라고 아니라고 거듭 우깁니다.
그러다가 내 품에 안겨 있던 이음이가, 뜬금없이 ‘할아버지, 시장이 뭐야?’ 라고 묻습니다. 마음속으로 ‘시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곳, 또 배가 고프다 라는 뜻도 있고’ 하면서 말을 꺼내려는데, 또다시 ‘사람이 뭐야?’ 라고 묻습니다.
‘사람, 뭐라고 해야지?’ 하는 순간, ‘꽃이 뭐야?’ 라고 묻습니다.
그제서야 눈치 챘습니다. 이음이는 ‘시장, 사람, 꽃’ 들이 무엇인지 모르니, 제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 하면서 얼굴을 마구 부비니까, 나를 놀린 게 재미있는 듯 자지러지게 웃습니다.
# 뒷이야기
오늘 아침 이음이를 만났습니다. 뒤란에서 땄다는 블루베리 한 알을 보여 주길래, ‘그게 뭐니?’ 라고 물어 보니, ‘그것도 몰라. 블루베리지.’ 라고 합니다.
나 :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블루베리를 어떻게 알아?
이음 : 자고 나니까 머릿속에 생겨났어.
사진은, 한 해 전 이음이 모습입니다.
7.6
텔레비전 속 만화영화에 빠진 이음이에게 슬그머니 장난을 치고 싶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음이가 너무 좋아.’ 하며, 앉아 있는 이음이를 부둥켜안고는 침대에 쓰러졌습니다.
넘어지면서도 이음이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마치 나를 타이르듯이 ‘나를 좋아하면 잘해 줘야지. 만화영화 볼 땐...’ 이라며, 만화영화 볼 땐 가만히 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나는 맥없이 이음이를 껴안은 손을 놓습니다. 이제는 이음이에게도 말이 밀립니다.
사진은, 이음이 할아버지가 보내주셨습니다.
7.7
‘할아버지’ ‘할머니’ 울림이가 부릅니다. 날은 어둑해지고 터덜터덜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나와 아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목청껏 소리칩니다.
‘어’ 하며 보이지 않는 울림이에게 소리질러 대답합니다. ‘어’는 막내 우리가 나를 부를 때 내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아내는 가슴이 뛴다고 합니다.
‘울림이가 무엇을 보여 주고 싶은가봐.’ 끌고 가던 손수레를 세워두고 아내와 나는 작은 언덕을 오릅니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울림이는 내 손을 끌고가 나무 난간에 세웁니다. ‘아, 노을을 보여 주고 싶었나 보구나!’
‘조금 전엔 더 예뻤어요.’ 곁에 있는 엄마 말을 들으니, 울림이와 이음이, 우리를 안은 엄마가 나란히 서서 노을을 보고 있었나 봅니다. 곧 큰바람이 오려는듯 서쪽 하늘이 참 곱습니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강아지풀로 콧수염 만드는 걸 가르쳐 주고, 나는 내게 달려와 무릎을 꼭 붙잡은 우리를 두 팔로 들어올립니다.
내 품에 안긴 우리는 작은 두 손으로 내 볼을 만집니다. 울림이와 이음이는 내 두 손에 입맞춤을 하며 밤새 헤어지는 인사를 합니다.
7.22
비닐하우스에서 마늘을 다듬어 엮고 있는데 이음이가 찾아왔습니다. 내 곁에 앉으려는 이음이를 보고 아내가 ‘먼지가 나서 어떡하니.’ 라고 하니, ‘괜찮은데 어떡하니.’ 라며 장난스레 맞받아칩니다.
이윽고 울림이가 뒤따라 들어와선 손에 쥐고 온 숫자가 적힌 딱지로 카드놀이를 하자고 합니다. 할머니는 일해야 하니까 우리 셋이 하자고 하니 짝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늘 그렇듯 울림이는 이음이와, 나는 아내와 편을 먹고 놀이를 합니다.
한 장씩 내어 엎어 놓고 숫자가 큰 사람이 나머지를 가져가는 놀이입니다. 내가 17을 내자, 울림이가 얼른 뒤집어 보곤 이음이한테 19를 내라고 합니다.
내가 ‘그건 반칙이야. 가르쳐 주는 게 어딨어.’ 라고 하니, 옆에서 이음이가 ‘어차피 숫자를 모르는데.’ 라며 남의 이야기하듯 합니다. 이음이 저는 숫자를 모르니까 형이 가르쳐 줘도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입니다.
밥 먹으라고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울림이는 집으로 가고, ‘싫어.’ 하며 이음이는 나보고 다시 카드놀이를 하자고 합니다.
이음이 제가 나누어 준다며 카드를 섞으며 ‘나는 할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는 내가 되고...’ 혼자말을 합니다. 이음이 말을 제대로 받아 적지는 못했지만, 이음이는 할아버지 마음이 되어 내가 이기도록 숫자가 큰 카드를 골라 나눠준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아직 숫자를 읽지 못하지만, 날마다 놀이에서 지는 나를 가엾이 여겨 이리저리 카드를 고르는 이음이 모습은 그대로 한 떨기 사랑스러움입니다.
비닐하우스 아래 개망초 꽃너울이 흘러 넘쳐 내 마음 둑이 와르르 무너지는 저녁입니다.
7.25
‘할머니’ 하고 이음이가 비닐하우스에 들어서자, ‘우야’ 하며 아내는 이음이는 꼭 껴안아 줍니다.
‘오랜만에 칼싸움 한 번 해 보자.’ 라는 이음이 말에 작은 대나무 막대기로 서로 찌르고 막고 놀고 있는데, 울림이가 뒤따라와 카드놀이를 하자고 합니다.
‘어차피 숫자도 모르는데.’ 오늘은 내가 먼저 이음이 말을 흉내냅니다. 이 말을 하면서 속으로 이음이가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움찔했는데, 이음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생각에 잠겼다가 ‘어제부터 계속해서 생각했는데’ 라고 합니다.
어제부터 계속 생각해서 숫자 읽는 걸 알아냈다는 것입니다. 귀여운 장난말이지만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카드놀이를 시작합니다.
그나저나 카드놀이는 우리가 질 게 불보듯 뻔합니다. 울림이는 미리 카드를 골라 19 같은 큰 숫자는 제가 가지고, 우리에게는 10보다 낮은 숫자를 나눠 주는 까닭입니다.
울림이는 남에게 지는 걸 무척 싫어 합니다.
엊그제도 나는 아무 잘못이 없었습니다. 수돗가에서 물장난을 하다 울림이가 이음이 바지에다 호스로 물을 뿌렸습니다. 두어 차례 물을 뿌리자 이음이도 참지 못하고 발로 울림이를 찼습니다. 이음이 발은 비껴나갔지만 울림이가 일어나 다시 이음이를 차려고 해서, 나는 얼른 이음이를 안고 피하며 공을 차듯 울림이 엉덩이를 차는 시늉을 했습니다.
울림이는 물조리개에 물을 담아 나에게 뿌리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건 그러려니 하지만, 이음이도 형을 따라 작은 물조리개에 물을 담아 나를 쫓아오는 것입니다. 늘 일어나는 일이지만 무척 억울합니다.
이리저리 물을 피해 주강사님 집까지 달아났습니다. 마침 그곳에 바깥수도가 있어 호스를 찾아 울림이에게 마구 물을 뿌렸습니다. 형이 물을 맞으니까 이음이는 막대기를 들고 나에게 대어들고, 울림이는 우두커니 선 채 속이 상해 어쩔줄 몰라 합니다.
쫓아오는 울림이를 피해, 나는 뒤따라온 우리를 안고 숨가쁘게 뒷길로 달아났습니다.
집에 와서도 울림이는 수돗가 호스로 나에게 물을 뿌립니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내게는 닿지 않고 성이 풀리지 않은 물줄기는 오히려 울림이를 적시고, 우리는 분수처럼 흩어지는 물을 맞으며 마냥 좋아합니다.
보다못한 아내가 나를 붙잡아 울림이 앞에 세우고, 울림이는 실컷 내게 앙갚음을 합니다.
그제야 속이 풀렸는지 집으로 뛰어올라가 울림이는 엄마에게 자랑하듯 떠벌립니다. 아마 내게 이겼다고 말하겠지요.
7.28
‘애기 낳는 거 그 거 해보자.’ 라며 이음이는 내 런닝구를 들추고 뱃속으로 들어가 한참 꼬물꼬물거리더니 밖으로 나옵니다. ‘야, 아기가 태어났구나!’ 하는 내말에 이음이는 지팡이 짚는 시늉을 하며, 태어나자마자 할머니가 됐다고 장난을 칩니다. 갑자기 오래전에 하던 애기놀이가 생각났나 봅니다.
지난 겨울에는 응애응애 기어다니며 애기놀이를 자주 했는데, 요즘 이음이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오줌을 누다가도 내가 가까이 가면 눈을 감으라고 합니다.
오늘도 이음이와 울림이가 만화영화를 보고있는데, 내가 지나가는 말로 ‘너희들 만화 본다고 오줌 마려운 거 참고 있지.’ 하니까, 이음이는 정말 그렇다며 손으로 고추를 쥐고 있습니다.
잠깐 텔레비전 끄고 오줌 누고 오라니까 울림이가 안 된다고 하고, 물병을 가져다 준다고 하니까 이음이는 부끄러워서 안 된다고 합니다.
실랑이를 벌이다가 끝내는 방구석에서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린 채 이음이는 세숫대야에 오줌을 누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들려준 ‘나의라임오렌지나무’란 소설이 생각 납니다. 서부영화를 보다가 오줌이 마려워 극장 벽에다 오줌을 눈, 그마저도 제제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오줌을 눠 다시는 극장에 들어오지 말게 했던 이야기.
8.24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거나 어디에 갔다오면, 보이지 않는데도 마당에 서서 ‘할머니, 할아버지’ 크게 소리쳐 부릅니다.
언제인가부터 울림이는 이른 아침 잠옷을 입은 채 밖으로 나와 윗밭으로 올라옵니다. 헝클어진 머리칼, 입가엔 침 흘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혼자 일어나 오줌을 누고, ‘우리’가 자는 방에도 가보았다고 합니다. 꿈 꾼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가끔은 참깨 밭 그늘 아래에서 내 무릎에 앉혀 울림이가 가져온 그림책을 읽어 줄 때도 있습니다.
며칠 전부터는 이음이도 함께 데리고 나옵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 혼자 눈 떠 마주하는 세상은 아이들에게 어떤 모습일까요.
8.25
‘우리 반에 은진이라는 여자아이가 있는데 꾀를 부렸어.’ 마당에서 풀을 매고 있는데 이음이가 말을 건넵니다. ‘무슨 꾀를 부렸을까?’ 궁금해서 물으니, 은진이가 마이쭈를 준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집에 있다고 했답니다. 이음이는 그 일이 참 서운했나 봅니다.
어제는, 미끄럼틀에서 이음이를 떠민 우상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안되겠다. 할아버지하고 사탕 한 보따리를 사서 우상이를 찾아 가야겠다’고 하니, 이음이가 ‘단 거 많이 먹어 이빨 다 빠지게.’ 라고 해서 한바탕 웃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거나 집에서 쉬는 날엔 아이들은 흙이나 벌레, 풀이나 나무하고 놉니다.
오늘 아침엔, 날개가 이슬에 젖어 죽은 듯 보이는 배치레잠자리와 톡톡 튀는 송장메뚜기를 가지고 놀았습니다. 울림이는 송장메뚜기를 손에 쥐고 메뚜기가 얼굴에 가면을 썼다고 하고, 이음이는 이제 놓아 주라고 합니다.
조금 시간이 흘렀을까. 오무리고 있는 이음이 손엔 공벌레 대여섯 마리가, 울림이가 든 바랭이풀 이파리엔 민달팽이가 매달려 있습니다.
부드러운 모래와 새 깃털, 상수리 열매 껍질과 말라죽은 지렁이를 가지고 놀고, 달개비 풀과 부들 이름도 아는 아이들, 나는 풀섶에 떨어진 귀뚜라미 뒷다리를 보아도 얼른 아이들부터 찾습니다.
8.27
‘너희 학교에선 장난이란 과목도 배우니?’ 내가 묻자, ‘아니.’ 하고 배시시 웃는 울림이 얼굴에는 다글다글 장난기가 붙어 있습니다.
아내가 꽃밭에 물을 주고 있는데 이음이한테 몰래 수도꼭지를 잠그게 하고는 시치미를 떼고, 내 머리에 모래를 뿌리고 달아나는가 하면, 그제는 아이들이 오르내리는 돌계단에 풀을 매는 내 쪽으로 오줌을 누었습니다.
‘밤에 살그머니 장난요정이 귓속으로 들어갔나 보다.’ 라고 해도 귓등으로 듣는 듯합니다. 하지 말라는 건 끝내 하고야 맙니다.
이제 울림이는 어른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제 눈으로 보고 제 손으로 만져 세상을 배우고 있습니다.
8.28
이음이가 싫어하는 냄새 가운데 하나는 치과의사 선생님이 끼는 장갑 냄새입니다. 이음이가 생각하는 엄마의 가장 예쁜 모습은, 이음이가 꺾어 온 꽃을 든 빨간 치마를 입은 모습입니다.
한 해 동안 아이들과 뒹굴다 보니, 아이들 속살 보드라운 마음결을 어느 만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울림이가 화가 났을 땐 이치에 맞게 찬찬히 이야기하면 풀리고, 이음이가 토라졌을 땐 먼저 다친 마음부터 안아줘야 합니다.
울림이는 총명하고, 이음이는 눈물 많고 마음이 따스한 아이입니다.
아이들 보여준다고 아내는 죽은 풀벌레를 벽돌 위에 얹어 놓고, 나는 아침부터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아이들이 궁금히 여기는 ‘거미’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8.31
정작 서울에는 왜 갔는지 생각나지 않는다는 울림이를 네 차례나 다그쳐 답을 알아냈습니다.
어제도 울림이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 가서 자고 왔는데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친할머니가 옆방에서 잤고, 외할버지가 숙소 가는 길을 일곱 번이나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오늘 아침엔 그림을 그려가며 외할아버지가 어떻게 길을 잃었는지와 남산에서 케이블카를 탄 이야기를 하고, 서울에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스티커를 자랑했습니다.
그제는 아빠 졸업식(학위수여식)이 있어 서울에 갔는데, 울림이는 그 일보다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옆방에서 자고, 외할아버지가 길을 헤맨 것이 마음에 깊이 남았나 봅니다.
하루 못 봤는데 우리가 쑥 자란 것 같습니다. 걸음걸이마저 여유가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