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글을 읽으며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와 아이들이 함께 있던 그 순간들을 떠올린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 아이들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그만 울컥하여 눈물을 흘리고 만다.
거짓 없고 맑은 그 순수들이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난다.
할아버지 글을 옮기다 멈추어 선지도 어느덧 3년.
이제 막 학교에 갔던 여덟 살 울림이는 열한 살 고학년이 되었고,
다섯 살 꼬맹이 이음이는 여덟 살이 되어 학교에 갔다.
걸음걸이 뒤뚱거리며 겨우 몇 마디 하던 두 살 '우리'는 이제 자전거도 씽씽 타고 할아버지랑 말장난도 쉽게 하는 다섯 살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여전히 집에 오자마자 아랫집으로 우다다 달려간다.
오늘도 '우리'는 자전거에 몸을 싣고, 울림이 이음이는 할아버지와 삼촌이 만들어 주신 농구 골대에 공을 집어넣으며 신나게 논다.
2.
2019. 9. 2
오늘은 아이들과 산을 올랐습니다. 마을로 내려가다 왼쪽으로 오르는 산길은 아이들에겐 가파르지만, 산밭으로 이어진 길이 포장이 되어 있어 쉬엄쉬엄 오르면 됩니다.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 강아지 ‘단’이와 ‘보리’, 고양이 ‘호미’와 ‘밤이’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오릅니다.
나중엔 엄마도 따라왔습니다. 오르다가 칡꽃도 보고 매미 허물도 보고 죽은 황금풍뎅이도 보고 놀라서 후두둑 날아가는 새도 보고, 숲 사이로 집이 보일 땐 ‘야, 우리 집이다.’ 아이들이 소리치기도 합니다. 한참 오르다 보니 길을 가로질러, 휘어진 비닐하우스 막대가 하나가 꽂혀 있습니다. ‘저게 문인가 보다.’ 하니, 울림이가 여기서 잠깐 멈춰 함께 통과하자고 합니다. 울림이는 뭔가 대단한 것을 본 것처럼 뒤돌아서서, ‘야, 터널이다!’ 라고 잇따라 소리칩니다. 나는 뒤따라 온 엄마가 실망할까봐 그냥 막대 하나 덜렁 꽂아 놓은 거라고 하니, 엄마는 보자마자 울림이처럼 ‘야, 터널이다.’ 라고 놀란 듯 소리칩니다. 지난 봄 이음이가 소풍 가는 날이 생각납니다. 그 날은 구름이 잔뜩 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했는데, 이음이보다 더 가슴 졸이며 안타까워 하던 엄마, 작은 일에도 놀라고 설레는 엄마 품에서 아이들은 가슴 도근도근거리며 세상을 만납니다.
고갯마루에 오르니 멀리 홍성 읍내와 내포 신도시가 보입니다.
사진은, 울림이가 그린 장수풍뎅이와 사슴벌레, 아내와 함께 풀벌레를 살펴보는 아이들입니다.
2019. 9. 3
울림이가 자주 하는 말은 아니지만, 어쩌다 ‘이음이와 똑같은 것을 달라’고 하면 나는 끝까지 따져 묻습니다. 이 세상에 똑같은 것이 어디 있느냐고, 공장에서 찍어내지 않고는 똑같은 것은 없다고. 오른손과 왼손이 똑같다고 울림이가 두 손을 펼쳐 보이면, 어디가 똑같으냐며, 나는 지문과 손금까지 짚어 가며 다그칩니다. 이음이가 똑같이 말하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어제는 산을 내려오는데 이음이가, 울림이가 길바닥에서 주운 황금풍뎅이와 똑같은 것을 잡아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음이가 다음에 할 말을 미리 알기에 서둘러 내가 먼저 말합니다. ‘할아버지가 완전 똑같은 것을 잡아줄게. 웅웅 소리를 내며 하늘을 나는 새처럼 큰 것, 지구보다 더 크고, 우주보다 더 큰 것’이라고 하면, 이음이는 더는 보채지 않습니다.
울림이는 자존심이 세서인지, 제가 아는 것을 누구한테도 배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즘 들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혼자 생각했다든지, 책을 보고 알았다든지, 그나마 윤경아 선생님이 가르쳐 주었다고는 합니다. 셈하는 것도 한글을 읽고 쓰는 것도 말입니다. 며칠 전에는 ‘달개비’라는 풀꽃 이름을 알기에, 놀란 듯 누가 가르쳐 줬냐고 물었습니다. 울림이가 ‘책에서...’ 라며 머뭇머뭇하자, 곁에서 이음이가 ‘그 거 할아버지 가르쳐 줬잖아.’ 라고 울림이 대신 대답합니다. 자존심이 상한 듯 울림이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달개비, 닭의장풀’이라고 일러 준 걸 나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습니다.
이음이가 돌계단을 올라가며 혼자말로 ‘여기 소루쟁이가 많네.’ 라고 합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음이를 꼬옥 안아줍니다. 지난 번 당근이라고 하길래, 소루쟁이 뿌리라고 내가 가르쳐 줬거든요.
2019. 9. 4
‘빡빡이 삼촌.’ 마실 물을 갖다주고 뒤돌아서 있는, 머리를 짧게 깎은 지우를 보고, 이음이가 들릴락 말락 작게 소리칩니다. ‘이음이는 지우 삼촌이 무섭나 보구나.’ 라고 하니, 이음이는 큰소리로 다시 ‘빡빡이 삼촌.’ 이라고 소리칩니다. 지우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길래, ‘이음이가 무서워 들어가는가 보다.’ 라고 말하니, 이음이는 지우 삼촌이 벌벌 떨면서 들어갔다고 합니다.
아까부터 우리는 손수레 곁에 서서 ‘어어어’ 라며 소리지릅니다. 손수레를 태워 달라는 신호입니다. 내가 가려면 이음이는 저와 놀아 달라고 못 가게 하고, 우리는 다시 ‘어어어’ 라고 소리치며 손짓으로 나를 부릅니다. 울림이가 색연필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간 사이, 이음이에게 허락을 받고 우리를 손수레에 태웁니다. 산길을 한 바퀴 돌고 마당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데, 어느새 우리는 손수레 안에서 잠들었습니다.
울림이와 이음이는 색칠 공부를 하다 말고 아기 놀이를 합니다. 이음이는 내 윗옷을 들추고 배로 들어가고, 울림이는 등으로 들어가 내 목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내밀어 옷이 다 늘어났습니다.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소리치자 울림이는 돌아가고, 안 가려고 떼쓰는 이음이를 업고 집에 데려다 줍니다.
2019. 9. 8
가랑잎을 들추고 꼬물꼬물 아이들이 기어나옵니다. 큰바람 속에 어디 숨어 있었는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빗방울 툭툭 털고는 돌계단을 내려옵니다. 울림이 손을 잡고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 우리는 나를 보자 반가운 낯빛입니다. 나는 우리를 보듬어 안습니다.
‘우리 집은 전기가 나가 불이 몇 번 깜박깜박 했는데, 강화에 외할아버지 집은 정전이 되어 한 시간이나 촛불을 켰는데, 지금도 그러고 있을 거라’고, 오랜만에 만난 울림이가 쉬지 않고 떠들어 댑니다. 이음이는 아빠한테 들었다며, 얼굴에 열이 올라 불이 올라 머리가 반짝반짝 빛난다며, 재미나는 이야기라고 들려줍니다. 나중에 울림이가 ‘불이 올라.’를 ‘화가 올라.’로 고쳐줍니다. 누가 화가 치밀어 머리카락이 다 빠졌다는 이야기인지, 무슨 사연인지도 모른 채 나는 그냥 재미있게 듣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외발 손수레에 태워 숲길 한 바퀴를 돌고, 울림이와 이음이와 아내와 함께 마룻바닥에 퍼질러앉아 딱지치기를 했습니다.
2019. 9. 9
울림이 딱지상자 속에 들어있는 딱지는 백 장이 더 되는 듯합니다. 색종이로 접은 것, 우유갑으로 접은 것, 딱지 두 장을 겹쳐 놓아 앞뒤 얼굴이 똑같은 것, 별 모양을 한 것도 있고, 어떤 딱지는 신문지를 뭉쳐 유리테이프로 둘둘 감아 놓았습니다. 울림이가 하는 말로 ‘방어력이 좋은’ 얇은 딱지도 있고, ‘공격력이 센’ 배가 부른 딱지도 있습니다.
나도 어릴적 보물상자가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딱지와 구슬, 사금파리와 갑오징어뼈 들이 있었습니다. 울림이와 어릴적 내가 다른 점은, 나는 집에 들어갈 때 그 보물상자를 마루 밑 깊숙이 숨겨 두었고, 울림이는 엄마가 딱지상자를 잘 모셔 두었다가 꺼내준다는 점입니다. 하기사 엄마는 울림이가 쓱쓱 그린 낙서까지 정성스레 챙겨 두니까요.
2019. 9. 10
아내 보고는 장난스레 ‘할멈’ 이라 부르고 나한테는 ‘늙은이’ 라고 하더니, 내 이름을 알고부터는 ‘김종도’ 하고 소리칩니다. 나는 ‘왜 !’ 라고 대답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아이들은 나를 ‘종도쌤’이라고 불렀습니다. 곁에 선생님들이 버릇 없다고 넌지시 아이들을 꾸짖기도 했지만, 교감 일을 맡게 되었을 때도 아이들은 한결같이 내 이름을 불렀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어느 신부님이, 내가 교실이나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섞여 공을 차고 엉켜 뒹굴며 뛰어노는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아이들이 내게 와서 자연스레 어깨동무하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울림이가 내 머리에 모래를 뿌리고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른들은 걱정하지만, 나는 그 때 울림이를 어떻게 골탕 먹일까 하는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울림이가 내 이름을 알고 불러 줘서 참 좋습니다.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가는, 울림이와 이음이를 태운 차가 비탈을 미끄러지듯 내려갑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곁으로 세월이란 강물도 스르르 흘러갑니다.
2019. 9. 13
그냥 ‘할아버지가 미안해.’ 라고 말할 걸 그랬습니다. 이음이가 ‘할아버지, 나빠.’ 라고 했을 때, ‘생각해 봐, 할아버지가 무얼 잘못했어.’ 라며 일의 앞뒤를 이야기하려고 하자, 갑자기 이음이 두 눈이 부풀어 오르더니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딱지치기를 하다 벌어진 일입니다. 이음이와 울림이는 같은 편을 먹었는데, 몇차례 돌아 이음이가 칠 차례인데 울림이가 딱지를 치려고 우기다가, 서로 발로 차고 딱지 쥔 손으로 얼굴을 때리며 다투었습니다. 나는 얼른 이음이를 품으로 감싸고 울림이를 꼼짝 못하게 두 손으로 내려눌렀습니다. 그러자 울림이는 ‘이음아, 나 살려 줘.’ 라고 소리치고, 도리어 이음이는 나를 발로 차고 꽉 쥔 주먹으로 때렸습니다. 내가 손으로 뻗어 막자, 딱지를 던지고 벗어 놓은 신발을 던졌습니다. 나도 같이 이음이가 던진 신발을 주워 던지고, 딱지는 멀리 길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울림이는 벌써 항복하고 뒤로 물러섰는데, 이음이가 끝까지 버티다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이음이 뒷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음이를 생각하면 내내 누르는 듯 가슴이 뻐근했는데, 다음날 아침 아이들은 까맣게 잊은 듯 ‘할머니, 할아버지!’ 라고 소리칩니다. 어제는 엄마가 배가 아프다며 맨밥을 얻으러 왔습니다. 엄마가 아파서인지 이음이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나는 장난말로 ‘너, 할아버지한테 하듯 엄마 배에 올라가 쿵쿵 뛰었지.’ 라고 하니까, 그건 아니라고 합니다. 오늘 새벽, ‘우리 구들방 옆 방에 웬 아이 둘이 들어와 자더라.’는 꿈 얘기를 하니, 아내와 우인이가 ‘이음이와 울림이가 보고 싶어 그런거야.’ 라고 합니다.
2019. 9. 14
바람이네 식구들이 추석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참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울림이, 이음이, 우리, 엄마, 아빠 온식구가 함께 우리 집에 모인 일은 처음 입니다. 이음이는 서천 할아버지 선물이라며 책 한 권을 들고 왔습니다. ‘신동엽 시전집’입니다. ‘그 거 할아버지가 엄청 좋아하는 책인데 어떻게 하지’ 라며 호들갑스레 떠드니까, ‘그냥 받어.’ 라며 쿡 찔러 줍니다. ‘산에 언덕에’라는 시노래를 황금성 선생님의 웅숭깊은 목소리로 듣고 싶습니다.
오늘은 울림이 이음이 우리를 외발 손수레에 태워 마을회관까지 갔다 왔습니다. 빈 집 울타리에서 탱자도 따고 꽃사과도 따고, 도랑 가에서 아이들이 바닷속 해마 같이 생겼다는 물봉선화도 몇 송이 꺾어 왔습니다. 외발 손수레의 연료는 풀잎과 나뭇잎입니다. 아이들이 풀잎이나 나뭇잎을 바퀴와손잡이가 이어진 곳에 꽂아 두면, 손수레는 이 세상 어디로든지 갈 수 있습니다. 바다로 헤엄쳐 가고 하늘로도 날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