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해가 가고 한여름이 되어서야 지난해 겨울의 이야기를 옮겨 담는다.
그동안 정말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남편 논문 막바지로 몇 달간 혼자서 삼형제와 집안일을 도맡느라 하루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간 몇달,
남편 논문이 끝나가니 그동안 미뤄 놨던 집안 곳곳의 일들을 해결 하느라 몇달,
이제 좀 생활이 안정 되어 가나 싶었더니 아이들 첫 방학이 왔다.
정신없이 지나간 저 시간들 속에서 나와 남편은 없던 살도 다 빠질 정도의 엄청난 고난의 시간이었는데
그나마 큰 탈 없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언제나 처럼 인자하신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사실 생각 해 보면 아이들 보다 내가 더 두분께 의지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오늘도 아이들은 점심을 먹고 (낮잠 자자는 엄마에게 도망쳐)아랫집 할아버지네로 뛰어간다.
아이들 방학이 시작 된지 열흘 쯤 되었는데,
오히려 방학하고 이래저래 일정이 많이 생겨 집에 잘 못 있다보니 어제 오늘 오랜만에 할머니네서 실컷 논다.
엊그제는 집에서 울림이랑 이음이가 "아~ 그러고보니 요즘 할아버지네를 못갔네. 빨리 가야겠다"며 마치 꼭 해야 할 일을 깜빡 한 사람들 처럼 말한다.
지난번 천안에 하루 자고 오는 일이 있어 나가는 날에도 출발 직전에 마당에 나오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발견한 이음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묻지도 않았는데 소리소리 지르며 누구네 가고 가서 뭐하고 얼마나 있다가 오는지를 열심히 전한다.
낯을 많이 가리던 막내 우리도 이제는 할머니 할아버지랑 친해져
마당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발견하면 먼저 "어---!!!" 하며 손을 뻗어 인사한다.
2.
2018.11.28
환자복만 걸친 채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는 아내가 추워 보였는지, 간호사가 담요 한 장을 가져다 덮어줍니다 무늬 없는 얇은 천을 보고 아내는 아이들 그림이 떠올랐나 봅니다 ‘여보, 아이들 그림 잘 남겨둬 아이들 그림을 수놓고 싶어’
아내는 수술실로 들어가면서도, 얼굴에 낙서를 한 울림이와 이음이 모습이 떠올라 가만히 웃었다고 합니다 길고 어두운 굴을 지나듯 외롭고 아픈 시간을 아이들을 생각하며 혼자 견뎌냈겠지요
세 시간 남짓 수술을 받고 돌아와 병실에 누운 아내 눈가에 눈물이 맺혀 내 가슴으로 번집니다 지난 번 이마를 다쳐 응급실 침대에 덩그러니 남아,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던 울림이가 겹쳐 떠오릅니다
닷새만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서둘러 아이들이 계단을 내려옵니다 등 뒤에 감추었던 풀꽃 다발을 이음이가 아내에게 내밉니다 냉이풀꽃 개망초 민들레 방아꽃 개쑥부쟁이 들과 마른 꽃대궁, 쑥스러운 듯 조심스레 울림이도 꽃다발을 건넵니다 아내는 아이들을 꼭 안아줍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다발입니다
아내를 생각하며 아이 엄마는 정성껏 저녁을 지어놓았습니다 아내는 ‘이렇게 마음 쓰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젊은사람이 참 예뻐요’ 라고 내게 말합니다
아이들이 저리 예쁜 까닭도 ‘우리를 처음 세상으로 이어주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 맑은 호숫가에 풀꽃 잔잔히 물결치는 엄마가 피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친구 순복이는 카톡에 올려놓은 이음이 사진을 보고는, ‘이 맑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세상을 보면 얼마나 경이로울까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음이는 우리를 처음의 세상으로 이어 주네요’ 라고 했습니다
11.26
주말이라 아이들과 만화영화 한 편을 봤습니다 ‘야수와 미녀’는 아이들에겐 너무 길고 지루한지 앞 부분 조금 지나자 그만 본다고 해서 껐습니다 뭉실뭉실 시커먼 구름이 피어나듯 야수가 나타나고 ‘너희들 무섭지’ 하고 지우가 묻자, 이음이는 ‘안 무서운데 눈물이 나’ 라고 말합니다 속으로는 무서웠다는 것을 저렇게 말하는구나 라고만 짐작했습니다 저녁에 엄마를 만나자마자 ‘아빠가 잡혀갔어’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여자주인공 벨의 아버지가 야수에게 잡혀 갇히는 장면을 보고 이음이는, 벨이 가엾고 슬퍼 눈물이 났던 것입니다
울림이가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고 누워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스무고개처럼 마음속에 생각한 것을 알아맞히는 다섯고개 놀이를 했는데, 이제 몸짓을 보고 무엇을 나타내는지 맞히라는 것입니다 너무 평화롭게 누워 있어서 ‘자는 무엇’ ‘죽은 무엇 무엇’이라고 해도 아니라고 합니다 하도 답답했는지 참지 못하고 울림이가 답을 가르쳐 줍니다 ‘너무 데친 브로커리’
문턱을 넘어서 저 쪽 대청마루는 ‘어른 세상’, 이 쪽 안방은 ‘아기 세상’ 울림이가 생각해 낸 놀이입니다 오늘 이음이는 킹콩입니다 문 밖에서는 두 주먹 불끈 어깨를 올려 가슴에 힘을 주고 울부짖는 어른 킹콩이었다가 문턱만 넘어서면 응애응애 마냥 귀여운 아기 킹콩으로 바뀝니다 얼굴이 빨개질 만큼 나무 침대 모서리에 세게 부딪혀도 킹콩이라서 괜찮다고 울음을 참습니다
아이들은 오롯이 그 순간에 머물러 있습니다
-
고 귀여운 옷을 입고 이음이가 방으로 들어옵니다 ‘너 그 옷’ 놀란 척 크게 눈을 뜨고 말하자 얼른 ‘엄마가 입혀 줬어’ 라고 합니다 ‘넌 안 입고 싶었는데’ 이음이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너무 귀여워 쓰러질 것 같다던 그 옷입니다
보드게임 젠가 놀이를 하는데 아이들 눈이 자꾸, 아내가 켜 놓은 텔레비전 쪽으로 갑니다 ‘너희들 주말도 아닌데’ 지우가 말하자 이음이는 얼굴을 숙이며 ‘안 볼라 했는데 눈이 자꾸 가’라고 합니다 울림이는 아예 등을 돌려 앉습니다
주말이 아니면 만화영화 같은 것을 보지 않기로 엄마와 약속한 까닭입니다
마당에서 콩타작을 합니다 도리깨질은 힘에 부치는지 아이들은 작대기로 두드리다가 콩대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서리콩을 집어던지고 놉니다
콩대를 뒤집고 달래망 밖으로 흩어진 콩을 줍고 있는데, 무슨 까닭인지 이음이가 ‘왜 밤이 안 오지’라고 묻습니다 ‘할아버지가 얼른 불러올까’라고 하는데 곁에서 아내가 거듭니다 ‘밤도 너희들처럼 해찰 떠느라고 그래, 오다가 꽃도 보고 벌레도 보고 그러느라고’ 울림이가 밤이 오면 집에 가야한다니까 그제야 이음이는 조용해집니다
언제인가 울림이가 ‘할아버지, 이음이 꿈이 뭔지 알아요’ 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는 울림이 꿈은 ‘늙어도 떠나지 않고 이 세상에 있는 거’라고 합니다 울림이는 사랑하는 식구 곁을 떠나지 않고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습니다
해쓱해진 국화꽃 무리 곁을 지나며 오늘도 ‘할아버지 이 꽃이 날아왔어’라고 말하는 이음이 꿈은, 커서 어른이 되면 아빠와 술 한 잔 하는 겁니다
11.30
미세먼지를 뚫고 아이들이 뛰어옵니다 울림이는 손가락으로 코를 틀어쥔 채, 뒤따라온 이음이는 이렇게 왔다며 손등으로 코를 누르며 ‘돼지’라며 웃습니다
울림이 주머니 속에 이음이 등 뒤에 숨겨 온 자동차로 한참을 놀다가, 다락에서 꽃 이름 맞히기 놀이를 했습니다
‘어린이 식물도감’을 보고 울림이가 꽃 생김새를 말로 그려내면 이름을 맞혀야 합니다 ‘털이 났어’ 하면 ‘개쉬땅나무’, ‘가시가 났어, 어디에, 머리에’ 하면 ‘절굿대’ 아무리 풀과 나무에 관심이 깊다지만 이건 너무 어렵습니다 괜히 ‘오이풀’을 보고는 이 풀은 오이 냄새가 난다고 얼버무립니다
이제는 그림을 그려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울림이는 어떤 것이라도 눈에 띄게 도드라진 곳을 잘 잡아 그려냅니다
울림이가 엎드려 왼손으로 연필을 잡고 열심히 그리고 있는데 이음이도 종이를 달라고 합니다 서랍을 뒤지다 보다 사진이 나옵니다 지리산에 살 때 식구 넷이서 함께 떠난 유럽 여행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이 사람은 누구’ ‘할머니’, ‘이 사람은 누구’ ‘할아버지’, ‘할아버지 뒤에 있는 이건 뭐지’ 체코 작은 마을 ‘체스키 크롬로프’ 장난감 가게 앞에 피노키오 인형이 서있습니다
잘 몰라 하는 이음이에게 코를 길게 늘어뜨리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생각난 듯 말하려고 하지만 입에서 맴돌 뿐 영 이름이 떠오르지 않은가 봅니다 귓속말로 ‘피노키오’라로 하자 울상을 지으며 대청마루로 나갑니다
이음이는 요즈음 무엇이든지 제 힘으로 하려고 합니다 과자를 싼 종이를 벗겨 달라고 할 때도 조금만 찢어 손에 쥐어 주어 나머지는 이음이가 스스로 찢어 먹게 해야 합니다 제가 맞혀야 했는데, ‘할아버지, 싫어’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 이음이에게 미안하다며 달래어 안고 들어옵니다
어느 날인가는 문득 ‘아빠가 회사에 간 것처럼 지내야 해’라고 말해 대견스러우면서도 가슴이 싸한 적이 있습니다 학위 논문으로 바쁜 아빠가 집에 있더라도 없는 것처럼 지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이음이는 아빠와 놀고 싶은데 또 참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쯤 나처럼 창 밖에 뜬 별을 보다가 아이들도 잠들었겠지요 아닙니다 아이들이 곧 별이고 꽃입니다
12.3
맑은 바람과 햇살을 데불고 아이들이 옵니다 며칠째 아이들이 집에 들르지 않아 마당을 쓸면서도 마늘밭에 볏짚을 덮어 주면서도 귀와 눈은 늘 아이들에게 쏠립니다 어제는 아장아장 숲길 내려가는, 두 살 난 ‘이랑’이란 아이를 만났습니다 엄마 친구들이 손님으로 왔나 봅니다
오늘 아침엔 다섯 살인 ‘담인’이를 할아버지에게 소개해 준다며 집에 데려왔습니다 날마다 뛰어 내려오던 돌계단을 담인이를 보살피며 조심스레 내려옵니다 방 안에 들어와서도 모든 게 낯선지 담인이는 주춤주춤합니다
등 뒤에 몰래 숨겨 온 장난감을 짠 하고 멋지게 보여 주고 싶었는데, 아이들이 궁금해 문을 열고 들어선 할머니에게 들키자 이음이는 속이 상해 뒤돌아서 벽 구석에 얼굴을 묻습니다 핑그르르 담인이 눈에도 눈물이 돕니다 나중에는 속초에서 ‘완벽한 날들’이란 동네책방을 가꾸시는, 담인이 엄빠 아빠도 오셨습니다
한참 동안 팽이를 가지고 놀다가, 방에 놓인 ‘어린이 식물도감’을 이리저리 펼쳐보더니 무슨 생각이 난 듯 울림이는 엎드려 그림을 그립니다
지붕 꼭대기에 십자가가 달려 있어 교회냐고 물으니 병원이라고 합니다 울림이는, 여기 이사 와서 얼마 되지 않아 온몸에 열꽃이 나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했던 이음이가 생각났나 봅니다 곰돌이가 새겨진 윗옷을 입고 주스를 먹고 있는 이음이, 오른쪽 별 모양 스티커가 붙어 있는 병실 서랍, 그 오른쪽에 ‘우리’를 안고 있는 엄마, 왼쪽으로는 아픈 아기와 양쪽 곁에 아기 엄마와 의사 선생님, 그 왼쪽으로 3층 엘리베이터... 울림이는 그 때 그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병실 서랍 안에 든 과자까지도
오른 쪽 지붕 위 생쥐는 상상해서 그려 넣었다고 하면서, 생쥐가 사는 집 지붕 양쪽에 커다란 토끼 귀를 그린 것은 생쥐가 고양이 오는 소리를 얼른 알아 듣고 빨리 달아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음이도 ‘구름아 놀자 구름아 놀자 해서 노는 거야’ 라며 왼손에 구름을 잡고 있는 아이 그림을 보여줍니다 늘 눈사람처럼 두 눈과 입, 작대기처럼 생긴 두 팔과 다리를 그리던 이음이가, 오늘 처음 이야기가 담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음이가 구름아 놀자고 말할 때 정말 하늘에서 구름이 내려와 손에 잡히는 듯했습니다 내가 전에 하늘나라에 가면 구름을 타고 놀거야 하며, 하늘나라엔 안 간다는 아음이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그 구름일까요
12.3
구름 속에서 햇살이 터져 나오듯, 이틀째 보이지 않던 울림이가 텃밭으로 올라옵니다 흙에 묻었던 *무우를 꺼낸다고 하니 같이하고 싶어 합니다 내가 마늘밭에 볏짚을 덮는 것도 창 밖으로 봤다고 아쉬워했습니다
삽과 호미를 가지러 가자고 하니 ‘고랑이, 고랑이’ 하며 고랑을 달려갑니다 오늘은 ‘이랑’이란 아이의 이름 뜻을 알려주었습니다 여기 움푹 팬 곳은 ‘고랑’이고, 이 길로 사람도 다니고 빗물도 다니지 이 고랑에서 밭두둑까지를 ‘한 이랑’이라고 한다며 발을 벌려 알려주었는데 자꾸 ‘고랑’을 ‘고랑이’이라고 부르는 울림이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울림이는 호미로 나는 삽으로 흙을 파내자 그 안에 무우를 넣었던 흰 쌀자루 끝자락이 보입니다 자루가 어느만큼 드러나자 손수레를 가지러 간 사이 울림이는 제법 깊은 구덩이에서 무우 한 자루를 꺼내놓았습니다 손에 묻은 흙을 털며 숨을 몰아쉬는 울림이는 안간힘을 썼나 봅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났냐고 묻자 도깨비 힘이라고 어깨를 올리며 뿌듯해 합니다 누군가에 보여 주고 싶어 둘러보지만 저만치 떨어져 난로에 지필 땔나무를 나르느라 아빠는 겨를이 없습니다 울림이는 도깨비 힘을 몰래 감추어 두었다가 울림이를 화나게 하는 사람을 멀리 던질 때 쓴다고 합니다
문득 논산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우리 반 아이였던 태연이와 원영이가 생각납니다 우리 반 반장이고 3학년 선배들도 이길 수 없었던 씨름꾼 원영이는, 키 작은 우리 반 아이를 업고 과수원 언덕길을 올라 은진 관촉사로 봄소풍을 갔지요 아이들 말로는 주먹으로 한 대 치면 맞은 사람이 교실 이 쪽 창가에서 맞은편 벽으로 나가떨어져 마을 어른들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태연이가, 주먹을 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학교 앞 구름산으로 놀러갔을 때 풀꽃을 묶어 내게 건네주던 태연이는 새벽 호수처럼 눈빛이 잔잔한 아이였습니다
집에 놀러 왔다가 혼자 돌아가려는 담인이를 지우가 바래다 주려 하자, ‘삼촌, 나무다리 지나 처음 돌계단 있지 거길 내려올 때 담인이가 힘들어 해’ 라고 걱정하던 울림이도, 깊이 숨겨 둔 힘을 제대로 쓰겠지요
*맞춤법에서 ‘무우’를 ‘무’라고 고쳐쓰자고 했을 때 어느 한글학자는, 이제 ‘무•우’라고 소리내는 사람은 없지만 눈으로 보는 글자니까 ‘무우’를 그냥 두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없다’를 뜻하는 ‘무’와 같은 글자와 헷갈릴 수 있으니까 그 생각이 떠올라 ‘무우’라고 적어 봤어요
12.4
온종일 절름거리는 비에 갇혔던 아이들이 해질녘이 되어서야 집으로 건너옵니다
장화를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방에 들어온 아이들은 주머니와 옷 속에 감추어 온 풍선과 그림책을 하나하나 꺼내 놓습니다
‘더 크게 더 크게’ 잇달아 이음이는 재촉하고 조금씩조금씩 부풀어오르던 풍선이 그만 터져버립니다 터진 풍선 주둥이 오목한 끝을 모아 붙잡고 힘껏 불자 풍선은 다시 봉긋 솟아오르고 순간 흐려졌던 이음이 얼굴이 환히 피어납니다
터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부풀리다 놓아 버린 울림이 풍선이 푸르르르 몸을 떨며 날아갑니다 어릴 적 지우와 놀던 놀이가 생각났습니다 ‘사람 풍선 놀이’
먼저, 내가 숨을 들여마셔 한껏 배를 내밀었다가 숨을 내쉬어 배를 쑥 들이밀고는 쓰러지는 시늉을 해보입니다
아이들은 저만치 침대 위에 서있습니다 손나발을 하고 내가 후우 소리를 내며 숨을 불어넣으면 아이들 배는 자꾸자꾸 부풀어오르고, 입에서 손을 떼자마자 아이들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찌그러져 아무데나 날아가선 쓰러집니다 때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쭈그려앉았다가 일어서선 까르르 넘어지고, 지우가 저녁 먹으러 가자고 하지 않았으면 언제까지나 이렇게 놀았을 것입니다
-
아내가 밥을 지어 울림이 식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습니다 운달아 먹어서인지 울림이는 밥 한 그릇을 거뜬히 비우고 더 달라고 합니다
밥을 먹은 아이들은, 대청마루에서 사과를 깎는 내 둘레를 빙빙 돕니다 천천히 빨리 아이들이 멈추면 함께 멈추고, 달리는 아이들 발 빠르기에 맞춰 사과 껍질을 깎습니다 다 깎은 사과를 통째로 건네니 이음이 가슴속 기쁨도 잔뜩 부풉니다 야금야금 사과를 갉아먹다가 꼭지가 드러나니 ‘도토리사과’라고 부릅니다
다시 아이들이 돕니다 어질어질합니다 저러다 넘어질라, 나는 부산 영도다리가 되고 기차 건널목 차단기가 됩니다 아이들은 ‘대문놀이’라고 부릅니다 통행새는 인사를 하는 겁니다 손을 가지런히 눈썹 위에 붙여 ‘허수아비, 안녕’ ‘수염 할아버지, 안녕’ 이라며 장난스레 인사를 건네고 더러는 병원차라고 그냥 지나가고 더러는 상어가 되어 헤엄쳐 가기도 합니다
만날 때마다 장난을 치니 아이들은 아무리 해도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신용을 잃은 셈입니다 아까만 해도 그렇습니다 ‘곤충들의 운동회’라는 그림책을 읽어 주는데, 이야기 마지막에 다달아 사마귀가 나와 춤추는 장면에서 곤충들이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배꼽이 빠진다는 그런 말이 책에도 나오느냐고 할아버지가 끼어 넣었다고 마구 우기다가, 쪼르르 달려가선 엄마한테 가서 보여주고는 잠잠해집니다
나는 그저 책 읽어주는 할아버지, 같이 노는 동무일 뿐입니다 오늘은 점심을 먹고 일찍 왔길래 너희들 어린이집에 안 가서 좋겠다고 하니, 이음이가 대뜸 ‘할아버지도 좋지, 우리와 놀아서’ 라고 말을 던집니다 그나마, 아직도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12.9
‘나는 웃을라는 건데’
‘곤 친구나봐’ (곤’은 만화영화에 나오는 아기 용 이름입니다)
‘먹으지 그래’
아이들이 도토리나 솔방울 조약돌을 모으듯, 나는 이음이 말을 모읍니다
울림이 곁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는 이음이게, ‘할아버지는 구름아 놀자 하고 구름과 노는 그림이 너무 좋아’ 라고 하자 조물조물 고 조그만 입술로 이음이는 ‘나는 잘 못 그리는데 손이 그렸어’ 하고 말합니다
이음이는 ‘인어공주(사진2)’와 ‘꽃 기린’(사진3)을 그렸습니다 아내는 이음이가 그린 눈(사진1)이 참 선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요즘 들어 이음이는 걸핏하면 잘 토라집니다 제 성에 차지 않으면 ‘할아버지 싫어’ ‘할머니 싫어’ ‘삼촌 싫어’ ‘형 싫어’ 하며 구석에 고개를 박고 마음이 풀릴 때까지 마냥 서 있습니다 무슨 까닭인지 헤아릴순 없지만 미안하다고 달래 보기도 하고 저만치 떨어져 지켜보기도 하지만 마음이 아픕니다
오늘 아침 이음이는, 살짝 눈이 내려앉은 계단을 걸어 곧바로 오지 않고 갈참나무 아래 밭둑길로 빙 돌아옵니다 창 밖으로 내다보던 울림이가, 뒤뚱뒤뚱 이음이 걷는 흉내를 냅니다
네 살배기 이음이는 지금 뒤뚱뒤뚱 혼자 속앓이를 하며 자라나고 있습니다
12.10
이음이가 말한 ‘나는 잘 못 그리는데 손이 그렸어’를 어른들이 쓰는 말로 옮기면, ‘나는 잘 못 그리는데 어쩌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은 금이 구름 모양이 되어 마치 아이가 구름을 손에 쥐고 노는 듯한 그림이 되었어’가 아닐까요
시인과 아이가 다른 점은, 아이들은 제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낱말로 제 생각을 그려내는 데 있겠지요
집에 텔레비전이 없는 아이들은 주말이면 가끔 우리 집에서 만화영화를 봅니다 오늘도 엄마와 약속한 만큼만 보고 텔레비젼을 껐습니다 무얼하고 놀지라고 해서 우리 구들방에 가서 책 읽자고 하니 이음이가 싫다고 합니다
만화영화를 보다가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에 가면 재미있는 장면이 지나갈까봐 끝내 방에 쓰레기통을 가져와 오줌을 눈 이음이, 만화영화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겠지요
나 : 너희들 눈 좀 쉬어야지
울림 : 쉬면서 보면 되지
나 : 어떻게 쉬면서 봐
울림 : (비스듬히 눕는 시늉을 합니다)
나 : 그게 쉬는 거니
이음 : (이불을 뒤집어쓰며) 이렇게 ‘얼굴을 없애고’
눈 좀 쉬자니까 이음이는 이불로 ‘눈을 가리고’ 보자는 것입니다
비늘 그리가 어렵다고 하며 울림이가 그린 인어공주, 그 곁엔 어릴적 못을 가지고 기찻길에서 놀던 내 이야기를 듣고 그린 그림입니다
기찻길 위를 달리는 기차와 못, 지렁이와 두더지가 그려져 있습니다
어른들은 머릿속 숱한 낱말을 알면서도 ‘상상의 문’ 앞에서 멈춰 서 버리고, 몇 안 되는 낱말을 가슴에 품은 아이들은 ‘상상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햇살 쏟아지는 파란 하늘을 마음껏 헤엄쳐 다닙니다
12.11
내 친구 순복이가, 이음이와 울림이가 그린 그림을 보자마자 몸에서 터져나오는 기쁨을 그대로 쏟아 놓습니다
‘와, 천상의 그림입니다. 바로 이것이지요. 내 생각을 없애면 하늘이 저절로 그려주는 그림, 시, 노래 들이 있지요. 그것이 우리를 감동케 하고 전율케 하고 우리의 기쁨이 되고 힘이 되고 ... 찬란한 오늘을 맞이하게 되리니 그것은 또한 영원하리라.’
예순이 넘어서도 아이 마음과 눈을 지닌 친구입니다
요즘 울림이네 어린이집 열매반은 고무줄로 노는 놀이가 한창인가 봅니다 며칠전엔 고무줄총을 만들어 놀더니, 어제부터는 손가락에 고무줄을 끼워 사진기를 만드는 걸 배워 내게 가르쳐 줍니다 언제인가 ‘할아버지, 내가 가르쳐 주니까 내가 할아버지 선생님이지’ 하던 울림이 말이 생각납니다
12.12
‘할아버지, 팔씨름 할래’ 울림이가 내기를 걸어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울림이에게 져주는 일은 없습니다 반칙을 써서라도 꼭 이깁니다
간지럼을 잘 타는 줄 알기에, 울림이 손목을 잡고는 손가락으로 손등을 간지르거나, 울림이가 더 힘을 주면 다른 한 손으로 겨드랑이를 간지럽힙니다 울림이는, 할아버지 반칙이라고 두 손을 모아 누르다가 몸을 일으켜 세워 온몸으로 내리누릅니다
이제는 또 씨름을 하자고 합니다 내던질 수도 없고,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하듯 ‘지는 씨름’을 하자고 말합니다 먼저 지려고 방바닥에 넘어지려는 울림이를 끌어당겨 안고는 뒤로 넘어져, 내가 이겼다고 좋아합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지는 씨름을 가르쳤습니다 학교에서도 ‘자전거 천천히 달리기’ ‘연필 깎기’ ‘새소리 알아맞히기’ ‘체육대회에서 꼴찌한 반 상품 모아주기’ ‘맨발로 걸어 보고 글쓰기’ 들을 하면서 지는 싸움, 천천히 사는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세상 밖으로 나가 늘 깨지고 들어오는 우리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너댓 살 먹은 아이와 아빠가 달리기 내기를 합니다 아빠들은 빨리 달리는 척하거나 넘어지는 시늉을 하여 아이에게 져주는데, 만화 속 아빠는 나처럼 주책없이, 번개처럼 달려와 내가 이겼다고 두 손을 들고 촐싹댑니다 한겨레신문에 실린 ‘비빔툰’이란 만화 한 장면입니다
아이는 제 힘껏 달려와 뒤늦게 결승선에 다다릅니다 엄마는 우리 다운이 잘했다고 이등을 해도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달려서 참 잘했다고 꼬옥 안아줍니다
12.13
군불을 때는 구들방에도 아내와 내가 없자, 뒤돌아서 집으로 가는 울림이를 불러세웁니다
‘할아버지, 좋은 소식 나쁜 소식 가운데 어느 것 먼저’
‘좋은 소식’
잠깐 생각하다가 ‘내가 온 것’이라고 대답하곤 울림이는 해죽이 웃습니다
나쁜 소식은 이음이가 독감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진화’라는 말을 자연스레 씁니다 무슨 뜻인지 물어보니 힘이 세어지는 거랍니다 동무인 산들이의 고무줄 사진기가 진화한다고 했을 때, ‘진화’는 성능이 좋다는 뜻이랍니다
오늘 울림이는 비가 어떻게 오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내가, 옛날 아이들은 비를 하느님이 눈 오줌이라 생각했다고 말했거든요
강물이 바다로 모이고 바다에서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이 조금씩조금씩 올라가 구름이 되어 비가 온다고 합니다
내가 ‘구름이 몸이 무거워 막 터는구나’ 라고 하자, 내 수준에 맞추어 ‘구름 속 괴물이 바닷물을 집어삼켜 내뿜는다’고 울림이는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줍니다
이음이 없이 혼자 있어서 그런지 울림이는 ‘할아버지의 아빠 엄마는 살아있는지, 동생은 몇 명인지’도 물어봅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쯤엔 무슨 생각이 났는지 혼잣말인 듯 ‘이 세상에는 하느님이 없을수도 있어’ 라고 합니다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울림이 말처럼 오늘 우리 집에 울림이가 온 것이 가장 좋은 소식이고, 아이들이 이 세상에 내려온 것이 하늘의 기쁜 소식입니다
12. 16
풀린 햇살과 함께 아이들이 건너왔습니다 두 눈이 때꼰한 게 몹시 앓았나 봅니다 아직 기침이 떨어지지 않아,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아내가 꼬옥 안아줍니다 아내 품에 안긴 이음이는 고개를 들어 아내를 올려다보더니 그 눈으로 다시 나를 쳐다보곤 싱긋이 웃습니다
한아름 색칠 공부책을 펼쳐놓습니다 그동안 밖에 나오지 못해 방안에서 울림이와 색칠 공부를 하며 놀았나 봅니다 무지개 빛깔로 칠해 놓은 거북이도 있고, 책 겉장 안쪽에는 아이와 자동차인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자동차냐고 조심스레 묻자, 그림 속 아이가 생각하는 것을 그렸다고 하면서 무엇인지는 저도 모른다고 합니다
울림이는 집으로 되돌아가 곤충과 버섯, 나무도감을 가지고 왔습니다 힘에 겨운지 끙끙거리며 들고오다가 한 권은 도랑을 건너다 떨어뜨렸습니다
아무래도 나무나 버섯보다는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는 곤충에 더 관심이 가는지, 곤충도감을 펼치며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처음엔 개미, 다음엔 벌, 다음엔 바퀴벌레, 다음엔 집게벌레, 다음엔 지네 여기 이사 왔을 때 벌레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말벌이 나왔을 땐 119 아저씨들이 오고, 밖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2층 책상에 올라가 창 밖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봤다고 합니다
어제인가는 아빠가 무당벌레를 집어 변기 속에 넣었는데 울림이가 휴지로 건져 밖에 내보내 주었다고도 합니다
울림이는 버섯 이름도 많이 압니다 괴물버섯이라고 알고 있던 ‘마귀곰보버섯’, ‘노루궁뎅이버섯’ ‘번데기동충하초 ‘ ... 무엇 하나 내보일 게 없는 나는, 지리산 대나무숲에서 본 ‘망태버섯’을 자랑했습니다
곁에서 서리태를 고르고 있는 아내가, 아이들이 이리저리 콩을 섞어 놓자 이것 내다팔 거라고 하니, 울림이는 콩을 팔아 도감을 사달라고 합니다
그건 그런데 글씨를 모르는 울림이가 ‘벌실동충하초’라는 버섯 이름을 어떻게 외우고 있는지는 지금도 궁급합니다
12. 18
울림이가 와서 사고가 났다고 했을 때도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난 것을 보았구나 생각했습니다 손으로 가리키며 차를 바꿨다도 했을 때도 차가 또 고장이 났나 짐작했습니다
나중에 이음이와 같이 집에 와서 그림을 그려가며 해 준 이야기를 듣고서야 엄마 차가 사고가 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울림이 이야기 속 사건은 이렇습니다
‘왼쪽으로 감나무가 서 있는 야트막한 고갯길을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가는 마을길에서 일어났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차들이 지나다니는 큰길이 나옵니다 엄마는 아이들을 태우고 어린이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마을길은 겨우 차 한 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아, 앞에서 오는 흰 트럭을 보고 엄마는 자연스레 속도를 늦추었을 겁니다 브레이크를 밟자 미끄러지며 잠깐 비껴 선 트럭과 부딪쳐, 엄마 차는 왼쪽 도랑으로 빠지고 트럭은 아슬아슬 오른쪽 논둑에 걸쳤습니다 엄마는 처음엔 엔진이 고장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빙판길이었습니다 왼쪽 언덕이 높아 그늘이 지고 어젯밤 살짝 내린 눈비로 얼어 있었던 것이겠지요 흰 트럭을 몰고 온 사람은 마을 이장님인데, 마을사람 일곱이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울었습니다’
울림이는, 마치 차 안에 있지 않고 밖에서 사고를 보고 있는 듯 자세히 들려주었습니다 이음이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울림이가 쉬지 않고 이야기하자 엎드려 그림만 그립니다
너희들은 어땠냐고 묻자, 안전띠를 매어 아무 일도 없었다며, 할아버지들이 엄마 차로 다가와서, ‘우리’와 이음이를 안아 내리고 그 사이에 울림이는 혼자 빠져나왔는데 몇 번 넘어졌다고 합니다 아마 빙판길을 건너느라 그랬을 겁니다
아찔한 순간 엄마는 얼마나 놀랐을까요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며 들뜬 듯 이야기하면서 천천히 사고 속을 빠져나왔습니다
이음이 그림입니다 위에 오른쪽에 크게 그려 놓은 차가 엄마 차입니다 부딪친 곳은 까맣게 칠해 놓았습니다 가운데 아래 기차는 왜 그렸는지, 기차 오른쪽 아래 사람은 그리다 말고 왜 지웠는지는, 이음이 마음속으로 들어가 봐야 알겠지요
12.18
이음이가 종이를 돌돌 말아 유리테이프를 붙입니다 다시 종이 한 장을 말아 가로 세로로 붙여 십자 모양을 만듭니다 울림이가 방에 들어와 이음이가 만든 것을 보고 ‘나 따라 하지마’ 라며 십자 모양으로 만든 사이로 종이를 덧붙입니다
‘울림이는 좋겠다, 따라 하는 동생이 있어서’ 라며 미리 울림이 마음을 다독입니다
이음이가 묻습니다 ‘할아버지도 동생이 있으면 좋겠지’ ‘응’ ‘아기 동생이 있으면 좋겠지’ ‘그러엄’
어느새 울림이는 별 모양을 만들고, 이음이는 그걸 따라 합니다 울림이는 이음이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너 평생’이라고 하자, 마법에 걸린 듯 이음이는 따라 하던 것을 멈춥니다
‘너 평생, 뭐하고 했어’ 라고 따져 묻자 울림이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너 평생 안 놀아 준다고 했지’ 라고 떠보지만 아니라고 우깁니다 ‘평생 간지럼 태운다고 했지’ ‘평생 웃긴다고 했지’ ... 온갖 말로 대답을 끌어내려고 해도 멋쩍게 웃으며 아니라고만 합니다
무엇이 이음이를 얼어붙게 했을까요 아무래도 안 놀아준다고 한 것 같아 ‘나도 울림이가 안 놀아주면 슬픈 텐데, 엄마 아빠도 너희들과 안 놀아주면 슬프겠지’ 라고 말해 봅니다 그러자 뜬금없이 이음이가, 엄마는 우리와 안 놀아준다고 합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엄마가 얼마나 바쁜 줄 아느냐고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 젖 먹이고 회사 가는 아빠 아침 차려주고 ... 라며 엄마 편을 듭니다 나도 거듭니다 어린이집 안 가려는 너희들 붙잡아 차에 태워야지 너희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나무에 기어올라가고 땅을 파 들어가고 도랑을 헤엄쳐가고 ... 아이들은 소리 없이 웃으며 그림책 보듯 신나게 내 이야기를 다 듣고 있다가 그런 적 없다고 딱 잘라 말합니다
책상 다리에 기대어 풀죽어 앉아있는 이음이 마음을 딴 데로 돌리려고 ‘단이가 낳은 강아지가 눈을 떴어 까만 게 참 귀여워’ 라고 하니, 이음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장난말로 ‘할아버지 옆에서 없어져서 봤어’ 라고 합니다
이음이가 집에 갔다 온다고 하자 울림이도 따라 나섭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말은 ‘너 평생’이라고 해도 울림이와 이음이가 서로를 얼마나 아끼는지
부엌 창문으로 바라보니, 울림이가 뒤따라오는 이음이 손을 붙잡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습니다
* ‘할아버지 옆에서 없어져서 봤어’는 ‘할아버지 옆에서 몰래 숨어서 봤어’ 라는 이음이 말입니다
* 사진은,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보고 있는 지우를 흉내내는 이음이
모습입니다
12.12
‘할머니, 할머니’ 울림이가 소리칩니다 부엌과 대청마루 사이에 난 창문으로 까치발을 딛기도 하고 폴짝폴짝 뛰면서, 저를 보아 달라고 할머니를 부릅니다 아마도 키를 자랑하고 싶은 듯합니다
아무리 해 봐도 이음이 키로는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할머니를 볼 수 없습니다 이음이는 대청에 놓인 방석을 가져다 쌓고 그 위에 올라가 힘껏 손을 뻗쳐 보지만 창턱에도 닿지 않습니다
울림이도 방석을 들고 와 이음이가 쌓아놓은 곁에 쌓아올립니다 이웃에 살다가 이사를 가 이제는 손님으로 온, 다섯 살 난 우림이도 방석 하나를 짚더니 그냥 놓아두고는 부엌으로 들어갑니다
울림이는 우림이가 두고 간 방석을 들어 덧쌓으려고 하는데, 우림이가 달려와 무턱대고 방석을 잡아당깁니다 울림이는 놓아주지 않고 금방이라도 싸움이 터질 듯합니다 ‘울림아, 그건 우림이가 집었던 건데’ 라며 울림이를 달래자, 마지못해 놓기는 했지만 마음이 언짢은지 울상을 짓습니다
이럴 땐 나도 어찌할 바 몰라 굳은 듯 서있습니다 방석 위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울림이를 보며, 이음이 눈에는 슬픔이 물결칩니다 문득 무슨 생각이 스쳐갔는지 얼굴이 환해지더니 ‘이렇게 하면 다 볼 수 있는데’ 라고 소리치며 이음이는 부엌으로 달려갑니다 부엌에 할머니가 있으니까요
울림이는, 이음이가 쌓아 놓은 방석을 들어다 더 높이 쌓습니다 이음이 말 한 마디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문제가 쉽게 풀렸습니다 그 지혜는 머리에서 온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왔음을 이음이 눈빛이 말해줍니다
오늘도 이음이가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울림이는, 이제 장난말이 되어 버린 ‘너, 평 ... ‘ 이라고 말합니다 ‘할아버지 다 알아, 너 평생 안 놀아 준다고 했지 할아버지가 니 마음속에 들어가 봤거든’ 아무말도 않는 걸 보니 내 짐작이 맞나 봅니다
‘어떻게 들어가는지 알아’ 라고 묻자 울림이는 고개를 젓습니다 ‘코로 들어가는 거야’ 라고 하며 나는 어떻게 코로 들어가는지 보여 준다고,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가지런히 무릎에 두 손을 얹고 눈을 감습니다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려고 하는데,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눈 떠 눈 떠 봐’ 이음이가 소리칩니다 눈을 떠보니 글쎄, 울림이가 한 손으로 코를 쥔 채 큭큭대고 있습니다 덩달아 이음이도 코를 틀어쥡니다 저렇게 코를 막고 있으니 오늘 울림이 이음이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글렀습니다
12.22
‘할아버지, 정말 하늘나라가 있어’ 울림이가 묻습니다
오래 전 한 할머니 수녀님이 성당을 떠나시면서, 남아 있는 수녀님에게 ‘자매야, 우리 나중에 집에서 만나자’ 라며 헤어지는 인사를 나누는데, 나는 그 말이 슬펐습니다 어쩌면 그 말은 수도원에서 다시 만나자는 뜻이었을 텐데, 나는 이 세상에 나그네로 살다가 돌아갈 집을 떠올렸습니다
‘울림아, 사람들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지’ 라고 하자 그건 안다고 합니다 돌아간다는 말은 온 곳으로 도로 간다는 뜻이니까, 사람이 죽으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데, 그곳을 ‘하늘나라’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 구름이 떠다니고 새가 날아다니는 하늘을 가리키는 것을 아닐꺼야
그러자 앉음새를 바로하며 공룡은 어떻게 생겨났느냐고 진지하게 묻습니다 늘 궁금했나 봅니다
‘공룡은 먼 별에서 왔을까, 질흙으로 빚은 것일까’ 생명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다고 해 ‘우리’가 엄마 뱃속에서 헤엄치며 놀다가 세상에 나와서 두 발로 기어다니다고 이제 뒤뚱뒤뚱 걸으려고 하는 것처럼, 공룡도 그렇게 생겨난 건 아닐까
그러자 ‘할아버지, 우주는’ 이라고 묻더니 어디에서 들었는지,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모으며 이렇게 작은 점이 폭발하여 우주가 되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잘 몰라 아빠한테 물어보면 쉽게 말해줄 거라고 하니 울림이는 아빠도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아빠가 하는 일을 말해 줍니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살고 건강하지 않고 시골에는 사람들이 적게 사니까 도시 사람들이 시골로 오면 도시와 시골이 다 좋아진다’며 아빠는 그런 일을 한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음이 자는 거 보고 온다고 늦었는데, 지금 깨어났을지 모른다며 울림이는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12.24
아, 울림이에게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하늘나라를 말해 주지 않았군요
풀과 나무,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와 하늘을 나는 새, 가시덤불 속 토끼와 언덕을 오르는 사슴, 이음이와 울림이가 서로 사이좋게 어울려 재미있게 노는 세상이 하늘나라라고
나도 잠깐 하늘나라를 맛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해 가을 개심사로 소풍을 갔습니다 학교에서 개심사는 걸어서 두세 시간 걸릴 만큼 꽤나 멉니다 소풍이 끝나고 아이들은 거의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걸어서 학교에 왔습니다
깻송이 싸아한 바람, 맑은 햇살에 여문 콩꼬투리 터지는 소리 한참을 걸어오는데 밀잠자리 한 마리 날아와 내 어깨에 날개를 접습니다
잠자리와 함께 숨을 고르며 학교 운동장 구령대에 앉았는데 처음 보는 동네아이들이 달려와 내 가슴에 안기고 목에 기어오릅니다 한 순간 꿈인 듯 그윽한 고요 속에 잠겼던 적이 있습니다
고요한 평화 속을 헤엄쳐 오늘, 성탄엽서를 입에 물고 아이들이 날아와 앉았습니다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는 내 나무 맨꼭대기에 가장 밝게 빛나는 별입니다
12.28
동짓날엔 아이들과 함께 마을회관에 들러 동네 할머니들이 쒀 준 팥죽을 먹었습니다 아이들 입맛에는 맞지 않는지 울림이만 몇 숟가락 뜨고 이음이는 손도 대지 않습니다 그런 줄 알고 엄마는 미리 김밥을 준비했습니다
점심을 먹고는 내포에 있는 도서관으로 갔습니다 읍내를 벗어나 덕산으로 빠지는 길목에서 차가 밀리는지 한참 머뭇거립니다 차가 빨리 안 간다고 이음이가 투정을 부립니다
‘할아버지가 도서관을 당겨올까’ 하니 이음이는 무슨 말인가 눈이 동그래지고, 울림이는 믿지 않는 말투로 ‘그래 한 번 해 봐’ 라고 합니다
내가 힘껏 끌어당기는 척하니까 어느 새 차는 무리 속을 빠져나와 달립니다 ‘봐, 할아버지가 당기니까 차가 앞으로 나아가지’ 라고 하니까 울림이는 ‘그냥 차가 가니까 그렇지’ 라고 우깁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린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줄다리기 하듯, 길가에 서 있는 높은 집도 멀리 보이는 용봉산도 끌어당기며 눈 깜짝할 사이에 도서관에 닿았습니다
늘 와 보고 싶었는데, 도서관에 들어서니 산뜻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이 나들이 온 듯 편안합니다
넓고 바닥도 푹신하여 뛰어놀면 좋겠다고 하니 이음이는, 뛰어도 안 되고 큰소리를 내도 안 된다고 합니다 내가 크게 소리 지르는 척했으면 고 조그만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을 겁니다
왼쪽에 울림이 오른쪽에 이음이를 앉히고 가져다 쌓아놓은 그림책을 읽어주는데, ‘할아버지, 여기 아 아 아 써 있어’ 라고 작은 목소리로 울림이가 말합니다 ‘그렇구나 아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작게, 조금 크게, 아주 크게 차츰 커지면서 ‘아’가 써 있습니다 ‘우리 이렇게 소리 질러볼까’ 말이 떨어지자마자 손나발을 만들어 이음이가 낸 소리가 크고 맑게 도서관에 퍼집니다 다행히 아무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울림이는 ‘아’ 하고 입만 벌리고 있어 너는 왜 소리 지르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제가 낸 소리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책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아이들을 가까스로 떼어내어 집에 돌아왔습니다.
2019.1.5
온 식구가 처음 함께 기차를 탔습니다 강화에 사는 외할아버지 집에 다녀왔습니다 울림이는 생태박물관으로 기억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어린이박물관에서 겪은 일이 가장 많이 생각이 나나 봅니다 문밖에 서서 봇물 터지듯 거기서 보고들은 것을 쏟아냅니다
방에 들어와서도, 집으로 되돌아가 가져온 박물관 지도를 보이며 자세히 이야기해 줍니다 외할아버지와 바둑 둔 이야기, 아는 이모를 만난 이야기도 들려주고 머리가 하얀 이상한 할아버지가 준 단소와 소금도 꺼내 보여줍니다
이음이는 무엇을 줘도 통 입에 대지 않습니다 아내가, 따뜻한 아랫목에 뉘여 배도 만져주고 손도 주물러 줍니다 얼굴이 말가니 더욱 안쓰럽습니다 한참이 지나 괜찮아졌는지 찐 고구마를 달래서 먹습니다
박물관에서 가져온 책자를 펼쳐 색칠을 합니다 울림이는 무지개 빛깔로 섬세하게, 이음이는 산도 사람도 다 초록색으로 칠합니다
이음이는 초록색을 좋아하는구나 하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마음 속에 들어가봤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라고 하며 ‘할아버지 콧구멍에 들어가 생각해봤어’ 라더니 말이 없습니다
이제 몸이 다 나았는지 뛰어다니며 장난을 칩니다 한참 울림이와 뛰다가, 울림이가 이음이보고 어서 쉬하고 놀자고 합니다 이음이는 오줌이 안 마렵다고 하고, 그래도 울림이 말이 맞겠지 하고 화장실에 가 오줌을 누입니다 오줌을 누면서도 이음이는 안 마려운데 라고만 합니다
오줌이 마려운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울림이한테 물어보니 비밀이라고 안 가르쳐 줍니다 겨우 이음이한테 물어봐서 알았습니다 이음이는 일어서서 두 다리를 붙이고 몸을 비트는 흉내를 냈습니다
초등학교 신입생 임시 소집이 있어 아이들은 돌아가고 아내가, 이음이가 ‘지우 삼촌 아직도 아파’ 라고 물었을 때 고맙고 가슴이 찌릿했다고 합니다 밤에 몰래 놀러온다던 이음이는 오지 않습니다.
1.6
시내버스를 타고 읍내 목욕탕에 갔습니다 장터에 있는 목욕탕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몹시 붑빕니다 하동 악양에 있는 목욕탕이 생각납니다
목욕비 삼천 원에 어른 서넛이 들어가면 꽉 차버리는 욕조, 수도꼭지 다섯인 작은 목욕탕이지만 지리산 형제봉 우리 집 곁을 흐르는 골짜기 물을 받아 참 깨끗했습니다
발을 닦다가 아이들 생각이 납니다 울림이는 갈라진 내 발뒤꿈치를 보며 할아버지 발에 지진이 났다고 하고, 엎드린 내 등에 올라타 널 뛰듯 뛰던 이음이는 벌집이라고 합니다
내 옆에 한 할아버지가 조심스레 손으로 발을 문지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실까 몇 번 망설이다가 제가 등을 밀어드릴까요 라고 했더니 선뜻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진 몰랐습니다 등을 밀다가 보니 할아버지는 오른팔이 없으셨습니다
왼쪽 어깨 둘레와 팔뚝 아래까지 찬찬히 밀어 드렸습니다 울림이와 이음이가 있었어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1.7
울림이가 놀다가 두고 간 장난감과 나에게 읽어 보라고 빌려준 책입니다
울림이는 오른쪽 두 번째 파란 공룡을 좋아합니다 그날도 이음이가 그 공룡을 가지고 싶다고 하자, 집에 도로 가서 전갈과 새 모양의 공룡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도 아음이는 형이 가진 것이 더 멋져 보이는지 그 파란 공룡을 달라고 떼를 씁니다 금방 울음이 터질 듯합니다 울림이는 선선히 내놓습니다
제 것을 꼭 챙기는 울림이에게는 좀처럼 없는 일입니다 웬 일이냐고 울림이를 꼭 끌어안아 줍니다 어떻게 그런 마음을 내었느냐고 자꾸 다그치자 ‘그냥 주면 되지’ 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합니다
어제 오늘 아이들이 오지 않아서 도서관에 갔나 어린이집에 갔나 궁금했는데 둘 다 배탈이 났다고 합니다 이럴 땐 내 손에 신비한 힘이 있어 닿기만 하면 요술처럼 아픈 배가 나았으면 좋겠습니다
늦깎이 목사님이 된, 내 친구 병진이가 생각납니다 신도들이 아플 때 나는 치유할 아무런 힘도 없고 다만 하느님 앞에서 눈물을 흘릴 뿐이라던
1.12
편을 갈라 놀 때는 이음이는 언제나 울림이 쪽으로 갑니다 콩을 고르는 내기를 할 때도 울림이가 가르쳐 준 놀이를 할 때도 울림이와 편을 먹습니다 너희들 어떻게 이렇게 사이가 좋으냐고, 떼어 놓고 싶은데 어떻게 하지 라고 물으니, 이음이는 마음을 바꾸면 된다고 합니다 이음이 마음을 바꾸기보다 내 마음을 바꾸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엉겨붙고 나뒹굴며 놀다가 느닷없이 울림이가 이렇게 아빠다리를 해 보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 하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며칠 전 울림이한테, 내가 잡아줄 테니까 꼿꼿이 서서 뒤로 넘어져 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땐 불안했던지 허리를 숙인 채 엉덩이로 내 무르팍에 주저앉거나, 주춤주춤 발뒤꿈치를 디디며 쉽게 넘어지지 못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오늘은 오롯이 몸을 맡기고 무릎과 허리를 곧게 편 채 몇 번이고 뒤로 넘어집니다 아내가 ‘우리 울림이가 마음이 참 넉넉해졌구나’ 라고 하니 아내에게 가서도 똑같이 해 보입니다
아내가 경상도 사람인 줄 아는 울림이는, 아내한테 ‘악어, 쌀’을 소리내 보라고도 합니다 아내가 ‘아그, 살’이라고 하자 우리 외할머니와 같다고 합니다
하루 하루가 다르게 울림이와 이음이 생각이 자라나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백 더하기 백 더하기 백은, 백삼이 아니고 삼백이라는 것도, 백이 열 번이면 천이라는 것도 울림이 혼자 생각해서 알아냈다고 합니다
울림이를 따라 이음이도 돌계단 길을 올라갑니다 ‘자고 일어나서 놀아’ 라는 이음이 말이 밀려오는 어둠을 잔잔히 흔들어 놓습니다
1.17
어디에서 들었는지 울림이가 ‘빛의 속도로 달리면 시간이 늦어진다’며 울림이 저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내가 빛의 속도로 달리게 밤새도록 연습할 거라고 하니, 듣고 있던 이음이가 ‘헤드렌턴을 몸에 넣고 달리면 되지’ 라고 말합니다.
‘옷 속에 말고 몸 속에 넣어야지’ 하는 울림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손전등을 옷 속에 넣고 아이들은 두터운 겉옷을 벗고 어둑어둑한 마당을 달립니다. 엄마가 말리는데도 그예 위 아래가 붙은 거추장스러운 북극곰 옷을 벗어던지고 내복만 입은 채, 울림이는 빛의 속도로 돌계단을 올라 사라졌습니다.
1.18
누웠다가도 이음이 표정을 떠올리면 웃음이 터져나옵니다. 어제도 울림이와 이음이가 같은 편을 먹고 내게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울림이는 손전등을 켜 불칼이라며 대들고, 이음이는 대나무를 다듬어 만든 등긁이 칼로 나를 내려칩니다. 손가락 끝과 머리와 이마를 마구 때려 너무 아픕니다. 에라 모르겠다, 너도 한 번 맛봐라. 두루마리휴지로 이음이 이마를 때리는 순간, 이음이 표정이 너무 우습습니다. 멍하니 아프긴 한데 이게 장난인지 아닌지 울지도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입니다. 내가 먼저 울림이한테 엄살을 떨며 일러바칩니다. 이음이가 여기저기 때려 겁나게 아프다고. 이음이는 볼 낯이 없던지 내 등 뒤로 와선 손바닥으로 내 두 눈을 가리고는 할아버지가 없다고 합니다. 나중에 엄마가 왔을 때도 ‘엄마, 이음이가 할아버지를 때렸어’ 라고 울림이가 일러바칩니다. 참 쌤통입니다.
1.20
어느 글에서인가 ‘아옹다옹’이란 말이, 고양이와 개가 싸우는 소리를 흉내낸 말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한데 우리 집 개와 고양이는 사이가 좋습니다. 강아지들은 고양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등에도 올라탑니다.
강아지들은 어미인 ‘단’에게서 배우고, ‘단’은 이웃집에서 기르다 두고 간 ‘보리’를 따라 배웠겠지요.
울림이는 동무인 ‘산들’이를 따라 집으로 올라가고, 나는 혼자 남은 이음이를 외발 손수레에 태워 요리조리 흔들며 산길 한 바퀴를 돕니다.
가는 길에 산비탈에 앉아 조그만 돌도 줍고 가랑잎도 주워 만져봅니다. 고양이 ‘호미’와 ‘호미’를 따라온 강아지 한 마리와 나란히 앉아 나무 사이로 다랑논을 내려다봅니다. 나는 이 순간을 고이 담아 마음속 사진첩에 끼워 둡니다.
비탈 아래로 미끄럼 타듯 내려갔다가 이음이를 안고 올라옵니다. 가파른 비탈을 서둘러 오르다가 이음이를 안은 채 넘어졌습니다.
이음이는 뒤로 나는 앞으로 넘어졌는데, 이음이가 ‘할아버지, 괜찮아’ 라며 걱정스레 묻습니다.
‘이음이가 괜찮으면 할아버지는 다 괜찮아’ 나는 이음이를 다시 손수레에 태워 집으로 갑니다.
1.22
‘할아버지, 아파트에도 이름이 있어’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이음이가 스스로 생각해 낸 듯 하는 말입니다. ‘아, 그렇구나’ 나도 처음 들어본 것처럼 놀라듯 말하니, 아파트 이름이 ‘부영’이라고 합니다. ‘부영아파트’는 여기 이사 오기 앞서 이음이가 살 던 곳입니다.
할아버지 집 이름도 지어 달라고 하니, ‘따듯집’이라며 할아버지 집은 따듯하니까 따듯집이랍니다. 군불을 때는 바깥채 온돌방이 따듯하기 때문입니다.
가게에 가서 엄마가 장을 보는데도, 아이들을 가게 문 앞에서 놀고 있습니다. 이 나이 때 아이들은 졸졸 엄마 뒤를 따라 다니며 이것저것 사 달라고 조를 텐데. 울림이는 복잡한 기능을 가진, 종이로 만든 리모컨에 다시 종이를 돌돌 만 안테나를 끼워, 이음이와 무전기 놀이를 합니다.
엄마는 장을 보다가도 아이들이 먹을 것을 살 때에는, 아이들을 불러 어느 것이 좋은지 물어보고 고릅니다.
웃풍이 세고 바닥이 차가워 방 안에 텐트를 두 겹이나 치고 전기담요를 깔고 자야 하지만, 이음이와 울림이가 사는 집은 참으로 따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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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도 손을 씻어야지’ 먹을것을 조금 차려 놓고 아내가 말합니다. 이음이는 아직 키가 작아 수도꼭지에 손이 닿지 않습니다. 받침대를 갖다 주었는데도 그예 세면대 위에 올라간다고 안아 달라고 합니다. 거품비누를 짜서 손을 씻는데 꼼지락꼼지락 어느 시절에 끝낼지 모르겠습니다. 한동안 꾸물거리다가 쉬가 마렵다고 합니다. 손등엔 아직 거품이 남아 있습니다. ‘아이고, 이음이는 장난꾸러기구나’ 하니 이음이는 ‘내가 장난꾸러기가 아니고, 쉬가 장난꾸러기야’ 라고 합니다. ‘맞아, 이음이는 쉬를 안 하려고 하는데, 쉬가 마렵다고 하는구나’ 하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시원스레 오줌을 누고 다시 세면대로 달려갑니다.
1.24
밥을 먹다가 이번에는 이음이가 아내를 놀립니다. ‘할머니, 악어라고 해 봐’ 곁에서 엄마 웃음소리가 터져나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악어(아거)’를 ‘악오(아고)’ 라고 자꾸 틀리게 소리내며, ‘어’와 ‘으’를 잘 가려내지 못하는 아내가, ‘악으(아그)’라고 틀리게 소리내길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어릴적 지우가 생각납니다. 쌕쌕이 비행기가 낮게 날아 찢어질 듯 소리가 커, 우인이가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면 저도 누나를 따라한다며 귀 위쪽에 토끼귀처럼 두 손을 대곤 했지요.
아직도 왼쪽 신과 오른쪽 신을 가리지 못해 바꿔 신고 다니는 이음이. 어제도 오줌을 누이며, ‘쉬가 장난꾸러기구나’ 라고 하니까, ‘할아버지, 쉬를 혼내 준다고 했는데 왜 아직 안 혼내 줬냐’며 도로 나를 혼내는 이음이. 이음이가 있어 세상은 날마다 첫날이고 나는 나이를 거꾸로 먹습니다.
2.1
곁에서 엄마가 시켰는지 책 읽듯 ‘고맙습니다.’ 말하고는 울림이는 이음이에게 전화를 건네주었나 봅니다.
이음이는 다짜고짜로 그 과자가 어디에서 났냐고 묻습니다. 어제 아이들 외삼촌이 과자를 보내주어서, 울림이 이음이 몰래 엄마 혼자 두고 먹으라고 문 앞에 두고 온 과자입니다.
서랍 속과 장롱 안과 다락 위 우리 집 살림살이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음이는, 그 과자 상자가 갑자기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퍽 긍금했을 겁니다.
나 : 할머니 오빠가 보내줬어.
이음 : 할머니도 오빠가 있어.
나 : 그럼, 할머니한테도 오빠가 있지.
이음 : 왜 안 알려 줬어.
나 : 미안해, 안 알려 줘서.
이음 : 괜찮아. 지금 알려 줬으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서두는 듯한 울림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할아버지, 우리가 걸었어. 아무 것도 잡지 않고.’ 드디어 우리가 한 발 첫걸음을 뗐나 봅니다.
아지랑이 봄날 아장아장 걸어 상긋한 생강나무 꽃내 번지는 오솔길 따라 ‘우리’도 우리 집으로 날아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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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에 울림이와 이음이가 왔습니다. 너희들 이름도 다 잊어버렸다고, 장난스레 이름을 다시 물어 보기도 했습니다. ‘황이음이야’
이음이는 나무 인형을 보이며, ‘걱정인형’이라며, 걱정이 있을 때 밤에 말하면 걱정인형이 대신 걱정해 준다고 합니다. 이음이는 걱정이 무어냐고 물으니,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너무 떠든다는 겁니다.
아내가, 할머니도 걱정이 있으니 지금 말할까 하니, 밤에 해야 된다고 해서, 하룻밤 걱정인형을 빌려주었습니다.
울림이는 졸업식이 곧 다가오나 봅니다. 울림이가 졸업식에서 할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듣고, 나도 외웠습니다.
‘산책 도깨비캠프 바깥놀이 논학교 지나간 일들이 모두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울림이 말이 아니고 어른들이 써 준 말이라, 자꾸 고쳐 줘도 ‘산책 도깨비 캠프...’라고, 도깨비와 캠프를 띄워서 문장을 책 읽듯 통째로 외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방에 활짝 봄을 피워 놓고, 내가 끌어주는 손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2.10
그 새 울림이는 레고를 가져온다고 집으로 되돌아가고, 뒤따라온 이음이가 방에 들어오며 기침을 합니다. 기침도 데리고 왔구나 하니, 이음이는 ‘나는 안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기침이 쫓아왔어’ 라고 합니다. 그렇구나 이음이는 안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라고 하자, 이음이는 ‘응’이라며 ‘기침이 내 달리기보다 더 빨라’ 라고 합니다.
엊저녁에는 군불을 때려고 하는데, 이웃에 사는 주강사님이 오셔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들을 온통 재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듯싶어 물어 보니 그렇다고 합니다.
내가 전에 재를 치우는 것을 본 울림이가 아궁이 밖에서 재를 끌어내다가 깊숙이 손이 닿지 않으니까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어떻게 들어갔냐고 하니, 이음이는 이렇게 들어갔다며 두 손을 몸에 딱 붙여 보입니다.
오늘은 아이들에게 준다며 아내는 난로를 피워 고구마를 굽고 땅콩을 볶으며, 나는 난로 곁에서 울림이가 가져온 책을 읽어 줍니다.
존 버닝햄이 쓴 ‘호랑이가 책을 읽어 준다면’이란 그림책을 읽어 주며, 어떤 것이 더 좋고 싫은지 물어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를 놀리는 게 싫어’ ‘아니면 독수리가 네 옷을 몽땅 훔쳐가는 게 싫어’ 라고 하니, 울림이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놀리는 게 더 싫다고 합니다. 독수리가 훔쳐가도 옷은 다시 입으면 되지만, 사람들이 놀리는 것은 기억에 남기 때문이랍니다.
그렇게 똑똑한 녀석이 난로에 불을 조절하는 쇠를 덥썩 잡아 오른쪽 집게손가락을 데고는 울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 있습니다.
2.12
최대한 기침보다 더 빨리 갔다온다던 이음이가 뒤늦게 방으로 들어서며 무슨 까닭인지, ‘저절로 마음이 바뀌었다’며 엄마가 떠 준 예쁜 목도리를 두르고 집으로 돌아가고, 끙끙대며 자연 이야기책 여섯 권을 들고온 울림이도, 두 시간만 놀다오라고 했다며 짠 하고 손을 흔들며 계단을 올라갑니다. 참, 울림이가 지난번 난로에 덴 손은 왼쪽 엄지손가락이라고 합니다.
사진은, 요즘 울림이가 만들어서 하는 놀이 카드입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1, 감옥 2, 불도끼 3, 바위 4, 공간 이동 5, 방패 6, 손 레이저 7, 투명인간
보기를 들어, 1번 감옥 카드를 내놓으면, 공격을 받은 사람이 감옥에 갇히는 겁니다.
2.26
울림이와 이음이가 냉이를 캔다고 그릇을 들고 걸어옵니다.
아이들은 냉이 한두 뿌리를 뜯어놓고는, 하켄처럼 호미를 땅에 꽂아 힘을 주고 언덕을 오르내립니다. 온통 흙투성이입니다.
다랑논 이쪽 저쪽 오가며 원앙이가 웁니다. 우리 집 왼쪽 다랑논 맨 위쪽 못에는 원앙이 한 쌍이 삽니다. 아이들이 언덕에 앉아 원앙이 소리를 흉내냅니다. ‘오랑 오랑’ ‘오르랑오르랑’
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는 명절이나 경삿날에는 부녀자들이 모두 꽃으로 머리를 장식하는 풍습이 있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의 아내가 남편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만일 우트팔라꽃을 얻어 내게 주면 나는 당신의 아내로 있겠지만 얻어 오지 못하면 나는 당신을 버리고 가겠습니다.”
그 남편은 이전부터 원앙새 우는소리 흉내를 잘 내었다.
그래서 곧 궁궐 연못에 들어가 원앙새 우는소리를 내면서 우트팔라꽃을 훔치고 있었다.
그때 연못을 지키는 사람이 물었다.
“연못 가운데 그 누구냐?”
그는 그만 실수하여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원앙새입니다.”
연못지기는 그를 붙잡아 데리고 왕에게 갔다. 가는 길에 그는 다시 부드러운 소리로 원앙새 우는소리를 내었다.
연못지기는 말하였다.
“너는 아까는 내지 않고 지금 원앙새 우는소리를 내어 무엇 하느냐.”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다짜고짜로 이음이를 바라보고, ‘연못 속 거기 누구냐’고 소리치자, 이음이는 고 귀여운 입으로 ‘오랑오랑’이라며 원앙이 소리를 냅니다. 다섯 살짜리 이음이는 내 이야기를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울림이를 돌아보며 똑같이 ‘너는 누구냐’고 묻자, ‘나는 황울림이다’ 라고 능청스레 말합니다.
‘에고, 그러니까 잡혀가지’라고 하니까, 울림이는 저한테 다시 물어보라고 합니다.
‘너는 누구냐’고 되묻자 울림이는 ‘개굴개굴 ‘ 소리를 내기도 하고, ‘쉭쉭’ 혀를 내밀며 뱀을 흉내내기도 하고, ‘너는 누구냐’를 따라하며 메아리라고도 합니다.
아내가 점심을 먹자고 부릅니다. 아이들과 같이 가락국수와 어묵을 먹다가 슬그머니 울림이에게 장난을 겁니다.
‘울림이 너 아까 잡혀갔잖아. 여기 있는 울림이는 가짜지’ 라고 말하니, 울림이는 진짜라고 우깁니다. 너 이야기 속에서 잡혀가지 않았느냐고 덩달아 나도 우깁니다.
곁에서 이음이도 ‘형 목소리가 달라졌어’라고 함께 거듭니다. 울림이는 진짜라고 하면서도 차츰 목소리가 움츠러듭니다. 나는 ‘울림이 너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잘 모르겠지’ 라며 자꾸 벼랑 끝으로 밀어붙입니다.
아내가 안돼 보였는지 ‘이마에 상처를 확인해 보면 되잖아’ 라고 합니다. 무릎에 눕히고 울림이 앞머리를 들춥니다.
‘아, 여기 상처가 있구나. 진짜 울림이구나’ 라고 하니 그제야 울림이 얼굴도 목소리도 환해집니다.
3.
아직 다 옮기지 못한 할아버지와 꼬박이들의 봄, 여름의 이야기는 (정말로)곧-
더불어 나의 이야기도 앞으로 다시, 차근차근 시작해 보아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