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18

 

엄마 차 둘레에서 서성대는 아이들을 보니, 방학인데도 아침 일찍 어디를 가려는가 봅니다. ‘야, 너희들 어디 가?’ 하고 소리치니, 이음이가 어린이집에 간다고 합니다. 아, 어린이집은 방학이 아닌가 봅니다. ‘할아버지 이제 눈 안 아파?’ 이음이가 묻습니다. 어제 도라지를 캐다가 눈에 흙이 들어가 잠깐 병원에 갔다 온 일을, 이음이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다섯 살 이음이가 지금 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차는 타지 않고, 울림이와 이음이는 언덕으로 조금 내려가더니 길가에서 놀고 있습니다. 가까이 가 보니, 땅속에서 흘러나온 물이 얼어붙은 위에서, 얼음을 지치기도 하고, 돌로 얼음을 깨뜨리기도 합니다. 이러다간 엄마 혼자 어린이집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서둘러 아이들을 들어올려 차에 태웁니다. 앞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어디 가느냐고 묻자 그냥 ‘엄마.’ 라고만 합니다. ‘엄마?’ 하고 되물으니, 뒷자리에 타고 있던 울림이가, ‘엄마와 같이 간다는 뜻이야.’ 라고 알려줍니다. ‘엄마라는 말 속에 그런 긴 뜻이 있었구나.’ 라고 하니, 엄마가 빙긋이 웃습니다. 아이들을 태운 차는 몇 걸음 못 가서 또 멈춥니다. 배웅하는 아내와 인사를 하는데, 이제 다시는 영영 못 볼 사람들처럼 오랫동안 헤어지는 인사를 나누고 미끄러지듯 차는 마을로 내려갑니다.

^^ 그림은, 울림이 이음이가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에게 준 새해 선물입니다.

 

 

 

2020. 1. 24

 

망원경을 목에 걸고,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장난감 총을 들고 울림이와 이음이가 달려옵니다. 오늘은 우리가 집에서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포장지를 뜯고 설명서 그림 보고 어찌어찌 하더니, 스폰지 총알을 넣고는 유리창 쪽으로 쏩니다. 바깥에는 막 해가 지려 합니다. 놓지지 않고 나는, ‘타르왁(тарвага)’이란 땅다람쥐에 얽힌 몽골 옛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옛날 옛날에, 몽골 초원에 해가 일곱 개가 떴어. 해가 하나만 떠도 더운데 일곱 개나 떴으니 세상이 얼마나 뜨겁고 더웠을까. 세상의 물들이 모두 말라서 가뭄에 시달려야 했지. 동물들은 목이 말라 고통을 받고 풀들도 바싹 타들어 갔어.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큰일이 일어날 듯했어. 그래서 사람과 동물들은 세상에서 가장 활을 잘 쏘는 '에르히 메르겡'을 찾아가서 해를 없애달라고 부탁을 했지 ... “ 창밖에 지는 해는, 수천 개의 바늘잎 같은 빛 화살을 쏘아대고, 아이들은 개어 놓은 이불 뒤에 숨어 해를 겨냥하여 총을 쏩니다. 그예 하나만 남아 있던 해는, 울림이와 이음이가 쏟아붓는 총탄에 맞고 붉게 상처를 입은 채 산 너머로 떨어져버렸습니다.

 

 

 

 

2020. 2. 5

 

뜨락에 싸락눈이 하얗게 쌓여있습니다. 새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아래채 공방 처마 끝에 앉습니다. 크기는 동고비만 한데 등빛이 검푸릅니다. 또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함께 치솟아 날개에 햇살 가득 펼치고는 남쪽 하늘로 날아갑니다. 쪼르르 아이들이 달려옵니다. 울림이가 뛰어오고 이윽고 이음이가 오고 한참 뒤에 우리가 따라옵니다. 집에 들어올 줄 알았는데 뜰에서 눈을 가지고 놉니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코코아 타 줄 물을 끓이고, 나는 이쪽저쪽 오가며 아이들 몰래 부엌 창으로 밖을 내다봅니다. 눈 치우는 가래를 끌고 다니지만 눈이 잘 모아지지도 뭉쳐지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혼자 아래채 계단을 올라가더니, 어! 미끄러질 텐데 어떡하지 하는 순간, 거꾸로 엎드려 엉금엉금 기어내려와 아궁이로 달려갑니다. 날마다 내 곁에 앉아 군불을 때는 곳입니다. 이제 우리는 장작을 두 손으로 들어 아궁이 속으로 넣을 줄도 압니다. 잠깐 꿈을 꾸었나 봅니다. 아이들이 마당 끝으로 달려가더니 포르르 날아 해가 뜨는 동쪽 숲으로 사라졌습니다. 뜰에는 아이들이 남긴 귀여운 발자국만 여기저기 찍혀 있습니다.

 

 

 

2020. 2. 13

 

세발자전거를 탄 채 우리가 손을 들어 손수레를 가리킵니다. 저는 세발자전거를 타고 갈 테니, 나보고는 손수레를 끌고 오라는 뜻입니다. 마을길로 내려가면서 우리는 가끔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봅니다.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뒤따라오는 나를 보고는 얼굴이 환해집니다.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마을 쪽에서 차 한 대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손수레를 길가에 받치며, ‘우리야, 차 와.’ 하니까, 얼른 세발자전거에서 내려 내 다리를 붙듭니다. 나는 몸을 숙여 우리를 꼭 안아줍니다.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는, 아랫집 민기와 민서 누나를,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꼼짝 않고 서서 바라봅니다.

‘아빠뿌까’ ‘엄마뿌까’ 다시 길을 올라오면서, 무슨 말인지 자꾸 되뇝니다. 저러다간 금방이라도 말문이 트일 듯합니다. 자건거에서 내려서는 손수레 가까이 다가섭니다. ‘우리, 손수레 타고 싶구나.’ 하니 ‘응’ 하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리를 들어올려 손수레에 태우니, 다시 손짓으로 세발자전거를 가리킵니다. 자건거를 손수레에 함께 실어달라는 뜻입니다. ‘오랑오랑’ 산개구리가 우는 다랑논으로 내려갑니다. 우리가 ‘무우’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는 어둑한 곳에는 도랑물이 졸졸졸 흐르고 있습니다. 저 쪽 산기슭 아래 다랑논에서는 무언가 움직이는 둣 물결이 일고, 마른 연꽃 줄기로 산개구리가 기어오르는 모습이 넘어가는 햇살에 어슴푸레 빛나 보입니다.

 

 

2020. 2. 15

 

어제는,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손가락으로 차를 가리키며 ‘부우’라고 했거든요. 세발자전거는 무어라고 할까 하곤, 내가 자전거를 가리키니, 또 ‘부우’라고 합니다. 우리에겐, 바퀴가 달린 탈 수 있는 모든 것은 ‘부우’라고 하는 듯합니다. ‘엄마뿌까’가 ‘엄마 차 타고 갔다.’라는 뜻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벌써 문장을 말한다기보다는, ‘엄마뿌까’를 통째로 한 단어(낱말)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하는 말에는 ‘엄마’ ‘아빠’ ‘엉아’ ‘임이(이음이)’ ‘함미(할머니)’ ‘응’ ‘떼떼뽀뽀(칙칙폭폭)’ 들이 있습니다.

 

 

 

2020. 2. 21

 

아이들이 구들방으로 놀러왔습니다. 이불 위에 장난감을 풀어놓습니다. 나는 짐짓 ‘그게 뭐니?’ 라고 묻습니다. ‘그것도 몰라. 어제 생일 선물로 받은 거잖아.’ 라고 따집니다. ‘그랬구나. 할아버지는 하늘에서 떨어진 줄 알았지.’ 하고 시치미를 뗍니다. 어제는 내 생일과 우리 생일이 겹쳐, 오늘 태어난 이음이 생일을 당겨, 자정이 가까워질 때까지 우리 집에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나 : ‘어제가 이음이 생일이었구나.’

이음 : ‘아니, 오늘이 내 생일이야.’

나 :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나’를 가리킴)

이음 : ‘아니, 내 생일이라고.’ (‘이음’이를 가리킴)

나 : ‘그러니까 내 생일이라고.’ (‘나’를 가르킴’)

이음 :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너가 아니고 나.

나 : <나도 이음이를 가리키며> 그래, 너 아니고 나 말이야.

거의 울상이 된 이음이는 ‘할아버지, 웃기려고 그러는 거지.’ 라고 말하더니, 느닷없이 ‘나 생일이 아니고 할아버지 생일이야.’ 라고 합니다. 이음이는 이렇게 거꾸로 말하면 제가 말하려고 하는, ‘오늘이 이음이 생일이라는 것’을 제대로 나타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니가 웃기려고 하는 거지. 어떻게 할아버지가 어제도 태어나고 오늘도 태어나니?’ 이음이는 거의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입니다.

 

 

 

2020. 2. 22

“오늘 낮에 이음이와 같이 쓴 이야기입니다. 이음이는 기뻐서 울 때도 있다고 합니다.”

 

이음이는 곤히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온누리가 잠든 듯한 고요함이 가느단 울음소리에 흔들립니다. ‘누구일까?’ 고개를 돌려 이 구석 저 구석 두리번거립니다. 엉금엉금 기어가 창문을 열어봅니다. ‘오르랑 오르랑’ 창가에 몰려와 다닥다닥 붙어있는 산개구리 울음소리만 방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잠이 덜 깬 두 눈에는 부스스한 햇빛이 어립니다. ‘이음아, 우릴 좀 살려 줘.’ 가만히 보니, 종이 위 어항 속에 갇힌 물고기 세 마리가 실낱같은 목소리로 애타게 소리칩니다. 이음이는 가엾은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하지.’ 이음이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종이 아래쪽에 강을 그리고, 그곳에다 물고기들을 쏟아줍니다. 물고기들은 꼬리를 흔들며 헤엄쳐 갑니다. 물풀 속에 숨어 잡히지 않았던 할머니 할아버지 물고기가 손자 물고기들을 꼬옥 안아줍니다. 이음이 얼굴에도 환히 웃음이 번집니다. 그러다 다시 종이 한 장을 가져다가 어항에 줄을 그어 화살표로 잇고 커다란 바다를 그립니다. 물고기 다섯 마리가 마음껏 뛰어놀기엔 이음이는 강이 답답해 보였나 봅니다. 바다에 풀어놓은 물고기들은 기뻐서 웁니다. 저희들 마음을 알아준 이음이가 무척 고맙습니다. 그 날 밤 이음이는 꿈을 꾸었습니다. 낮에 놓아 주었던 물고기들이 그림 속에서처럼 바다를 헤엄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해가 뜨고 초승달이 떠있는 하늘입니다. 물고기들은 파아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음이는 몸이 근질근질거립니다. 아래를 쳐다보니 몸에서 비늘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반짝거리는 비늘을 달고 물고기들과 함께 어깨를 겯고 이음이는 하늘을 마음껏 누빕니다. 이음이는 자꾸자꾸 꿈을 꾸고 싶습니다. 오늘 낮엔 부연히 미세먼지가 끼어 밖에 나가놀지 못하고, 방안에 갇혀 끄적끄적 그림만 그려야 했으니까요.

 

 

 

 

2020. 2. 25

비밀인 듯 나중에 보여준다더니, 깜빡하고 그냥 갔어요. 울림이가 쓴, 이렇게 긴 이야기글은 처음 마주해요. 왼손잡이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씨도 거꾸로 쓰지요. ‘화조새하라버지가딸각딸각우리장남감을가지고논다. 화조새하라버지이름은김종도.’ (화조새 할아버지가 딸각딸각 우리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화조새 할아버지 이름은 김종도.) ‘화조새’가 뭔지 모르겠어요. 뒷장에 ‘하라버지 애기’라고 쓰고, 새 한 마리가 젖병을 들고 있는 걸 보면 무슨 새 이름인가 봐요.

 

 

 

2020. 2. 26

 

내 생일에 건네 주지 못한 우리 선물이 엊그제 도착했습니다. 보동보동한 귀여운 손으로 내 손에 쥐어 주는 선물은, 이리저리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면 빛깔이 바뀌는 작은 마술 수첩입니다. 엄마 생일이 곧 다가옵니다.  ‘엄마한테는 무슨 선물을 하지?’ 울림이가 말을 꺼냅니다. ‘엄마는 꽃을 좋아하잖아.’ 예쁜 꽃만 보면 엄마에게 꺾어 바치는 아이들이 떠올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가 말했습니다. ‘엄마는 밥도 좋아해.’ 라고 울림이가 말합니다. 그 말을 이어받아 이음이는 ‘엄마는 나도 좋아해.’ 라고 말합니다. ‘그럼, 이음이를 예쁘게 포장해서 엄마한테 선물하면 되겠네.’ 라고 말하니, 이음이는 무릎을 굽히고 두 팔을 오무려, 보이지 않는 상자 속으로 들어가는 흉내를 냅니다. 울림이도 뒤따라 ‘엄마는 나도 좋아하고 우리도 좋아해.’ 라고 합니다. 이렇게 아이들은 엄마의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다.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합니다.  이음이가 선물 상자 깊숙히 들어가 꼼짝하지 않은 지는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사진은, 비를 맞고 있는 우리 저전거입니다. 얼른 달려가 나무난간에 옮겨 놓았습니다. 아내는, 비 맞는 자전거를 보니 마음이 아프다고 했어요.

 

 

 

2020. 3. 2

 

아이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다녀갔습니다. 오늘이 엄마 생일이기도 하지만, 불현듯 손자들이 보고싶어 강화도에서 단숨에 달려왔습니다. 아이들이 어찌 저리 곱게 자랐을까. 어렴풋이 나는, 엄마 아빠의 포근한 품과 할머니 할아버지의 고운 손길을 떠올렸는데, 이틀 동안 함께 지내며 그분들의 봄햇살 따스한 사랑을 내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음아, 장구 배워 볼래? 네가 배운다면 할아버지가 가져다 줄게.’

나처럼 아이들을 윽박지르지 않고, 아이들 의견을 묻고 기다려주는 외할아버지 속에서, ‘작은나무’라는 인디언 소년 이야기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에 나오는 할아버지가 겹쳐 왔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손자가 부르면, 앞서가던 걸음을 멈춘 채 손에 든 짐을 내려놓고 몸을 낮춰 이야기를 듣던 할아버지 ... 엄마에게도 높임말을 쓰고, 손자들을 하늘처럼 섬기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우리 구들방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가셨습니다.

 

 

2020. 3. 7

 

오늘 겨우내 잠 든 밭을 깨워 풀을 뽑고 거름을 얹고 흙을 뒤집어 감자를 심을 두둑을 만들었어요. 해마다 하는 일이지만 또 낯설고 농사일은 늘 서툴기만 합니다. 아까시나무에는 어느새 날아왔는지 쓰스빙 쓰스빙 곤줄박이 한 마리가 지저귀고, 오늘도 아이들이 돌계단을 올라 밭으로 달려옵니다. 막내 ‘우리’도 꽥꽥 소리를 지르며 뛰어옵니다. ‘너도 형들을 닮았구나.’ 하니, 뒤따라오던 이음이가 ‘할아버지, 내가 더 크게 소리질러 볼게.’ 하더니,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입만 크게 벌립니다.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뒤로 쓰러지는 척합니다. 이음이는 지난해 내가 해 준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구가 도는 소리는 너무 커서 우리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했거던요.

아이들과 ‘얼음땡놀이’를 했습니다. 놀이 규칙은 늘 아이들이 정하기에 우리는 웃기만 하다 끝이 납니다. 하루 해가 저뭅니다. 초롱산 위로 열사흘 달이 떠오르고, 집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우리’는 손수레에 태우고 이음이와 울림이는 걸려서 데려다 줍니다. 우리는 헤어질 때 손을 흔들지 않고, 손바닥을 펴 코 밑에 대고 인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경찰이나 군인들이 이마에 대고 하는 인사는, 언제인가 엄마가 무섭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2020. 3. 9

 

겨우내 마늘밭을 덮어 두었던 짚을 걷었어요. 하얗고 얇은 막 속에서 뾰족이 마늘 싹이 돋아났어요. 파르스름하니 햇빛이 어른거려 더욱 고왔어요. 오늘은 밖이 따스한지 이음이와 우리가 가운뎃머리를 묶고 왔어요. 저희들끼리 꿩의 머리라고 깔깔대더니, 이음이가 닭 흉내를 내어 한참 웃었어요. 울림이가 오늘은, 구덩이를 파놓고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얹고 그 위에 흙을 덮고는 나를 몰래 빠뜨리려고 했어요. 운이 좋게 흙을 너무 두텁게 덮어 빠지지는 않았지만 울림이 장난이 날마다 늘어요. 동강할미꽃에 벌이 날아들고 드디어 숲길에 생강나무 노란 꽃이 피었어요. 김유정 소설 ‘동백꽃’(생강나무꽃을, 강원도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지요.)에서처럼 알싸한 꽃내가 숲을 흔들어 놓겠지요. 잘 지내요.

 

 

2020. 3. 14

 

‘이러다간 할아버지가 되겠다.’ 이음이가 내뱉은 말입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된다며 아이들 등을 떠미는 내말에, 이렇게 멀어서 산에 갔다 오면 할아버지가 다 되어 있겠다는 뜻입니다. ‘그럼, 할아버지는 어떻게 되냐?’ 웃으며 되물었지만 아이들은 여간 힘들지 않나 봅니다. 점심을 먹고 우리 집으로 달려온 아이들에게, ‘오늘은 초롱산에 한 번 올라가 볼까?’ 하며 가볍게 던진 말이었는데 정말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숲이 우거져 나무하러 다니던 길은 없어진 지 오래이고, 길도 없는 가파른 비탈을 오르며, 고라니 똥과 멧돼지가 파헤쳐 놓은 구덩이도 보고 가랑잎을 뚫고 나온 현호색과 가느단 나뭇가지에 봉긋이 솟은 진달래 꽃봉오리도 만났습니다. 산기슭에서는 보이지 않던 굴참나무도 눈에 띕니다. 아, 커다란 매 두 마리를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은 없습니다. 꼭대기가 가까워지자 아이들 키를 훌쩍 뛰어넘는 조릿대 사이로 큰 절벽 아래 너른 빈 터가 나오는데, 여기저기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는 걸 보니 마을사람들이 말하는 절터인가 봅니다. 이음이는 엄마가 보고 싶다고 합니다. 좀처럼 그런 말을 하지 않는 울림이도 엄마를 보고 싶어 합니다. 어디에선가 아이들을 부르는 엄마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렇게, 검은 돌에 ‘초롱산 339M 홍성군’이라고 적혀 있는 초롱산 꼭대기에 올라섰습니다. 아이들이 살던 홍성 읍내 부영아파트도 보이고 오른쪽으론 예산군 광시면과 멀리 예당저수지 물줄기도 보입니다. 네 시간 남짓 긴 산행, 아이들은 지금쯤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잠에 곯아떨어졌을 겁니다. 초롱산 산신령을 만나지 못해 못내 아쉬워 하는 이음이는, 어느새 머리칼이 새하얘지고 꿈속에서 산신령 할아버지 친구를 만나 실컷 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2020. 3. 25

 

울림이가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도둑이 있었어. 거지 집에 물건을 훔치러 갔는데 아무것도 없어, 닭깃털 하나를 뽑아왔어. 하나로는 모자라서 다시 거지 집에 가서 닭 한 마리를 훔쳐와 치킨을 해먹고, 깃털을 다 뽑아 그 깃털로 이야기를 썼는데,(아이들은 깃털로 잉크를 찍어 글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지금 할아버지에게 들려 준 이야기야.’ 그러곤 그 거지가 바로 도둑이고,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한대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울림이가 들려준, 도둑이 거지가 사는 곳으로 도둑질하러간 장면만 떠올려도 참 재미있습니다. 어느 날 도둑들이 모였습니다. 한 늙은 도둑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늙은 도둑 : ‘우리, 거지네 집을 털러갈까?’

젊은 도둑 :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무것도 없는 집으로 무얼 털러 간다는 말이에요.

늙은 도둑 : 우린 오랫동안 셀 수 없이 부자집을 털어 왔잖아. 많이 있는 곳을 터는 것보다 아무도 없는 곳을 터는 것이 진짜 실력 있는 도둑이 아닐까.

젊은 도둑은 뭔가 아리송하지만, 늙은 도둑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젊은 도둑 : 한데, 재미가 없잖아요. 그 곳에는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으니까요. 높다란 담도 뾰족한 창살도 밤하늘을 찢는 개 짓는 소리도 더구나 cctv도 없잖아요.

늙은 도둑 : 그러니까 말일세. 아무도 지키지 않으니까 오히려 더 아슬아슬하지 않을까. 자신 안에 쌓아둔 보이지 않는 담을 넘어야 하고, 시시각각 자기를 돌아봐야 하니까 말이야. 이를 일러 ‘허공에서 무엇을 얻는다.(득허 得虚)’라고 하네.

내가 이렇게 뻔한 고리타분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 ‘그냥 재미로 한 얘기야.’ 하며, 울림이는 내가 쌓아올린 이야기의 탑을 발로 툭 차 뭉개버리겠지요.

사진은, 얼마 전 엄마 생일 때 울림이가 선물한 축하 글입니다.

 

 

 

2020. 4. 5

 

어제 그제 이틀 동안 어디로 나들이를 떠났는지 아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부엌 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우리가 그동안 아이들에게 의지하고 살았나 봐요.’ 라고 하는 아내 목소리에 쓸쓸함이 묻어납니다. 아이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초롱산 골짜기가 텅빈 듯합니다. 자다가 눈을 떠서도, 엊그제 놀다가 다친 우리가 눈에 어른거립니다.

쪼르르 언덕길 따라 내려가는 공을 붙잡으려다가 그만 엎어졌습니다. 얼른 달려가 일으켜 세우자 금방 울음은 그쳤는데 코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안고 뛰어와 휴지로 왼쪽 코도 막고, 부드러운 수건에 물을 묻혀 핏자국을 닦아주었는데, 다행히 피는 그쳐 있었습니다. 입가로 피가 흘러들어가, 이렇게 헹구어 내라고 내가 먼저 물을 마신 뒤 입안에서 우물우물하다 뱉어버리니, 우리가 환히 웃습니다. 우리에게 물을 주니 우물우물하기도 전에 삼켜 버리곤 웃습니다. 다시 물을 주자 또 삼키곤 재미있는 듯 웃습니다. 엄마가 놀랠까봐 아내에게 데리고 가니. ‘우리가 콧등에 팥을 갈았네.’하며 꼭 안아줍니다.

 

 

2020. 6. 9

 

나는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도 자주감자처럼 곁에서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에요. 아이들이 ‘아랫집 할아버지, 하비’라고 부르는 나는, 키가 조금 더 크고 힘이 조금 더 세고 풀이나 나무 이름을 몇 가지 더 아는 늙은 친구일 뿐이지요. 가끔 우리를 손수레에 태워 숲길 한 바퀴 돌고, 동화책을 함께 읽고, 뽕나무 윗가지를 잡아당겨 아이들이 오디를 딸 수 있게 해 주고, 코감기가 다 낫지 않았는지 줄줄 흘러내리는 울림이 콧물을 보드라운 뽕잎이나 칡잎으로 닦아주는 일이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모두예요. 하지만, 언덕에 풀을 베고 있을 때 ‘할아버지, 댕댕이덩굴은 베지 마.’ 하고 울림이가 말할 때나, 이음이가 ‘지칭개, 소루쟁이, 고마리’ 풀이름을 알고,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우리가 고 조그만 입술로 ‘오디’라고 소리내어 말할 때, 내 마음 잔잔히 빛나는 기쁨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지요.

 

 

2020. 6. 10

 

며칠 전에 아빠가 뜰에 ‘방방’(트램펄린)을 세워주었어요. 아침에 눈을 떠서도 한낮에도 쉴 새 없이 아이들이 올라가 뛰고 있어요. 멀리서 보면 벼논에서 톡톡 튀는 메뚜기들 같고 나뭇잎에 튕기는 햇살 같아요. 이틀날, 어른들도 탈 수 있다며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가 아내와 나를 데리러 왔어요. 아이들이 통통 뛰니까, ‘솜이’(고양이)도 아이들이 뛸 때마다 아래로 쳐지는그물을 잡으려고 밑에서 함께 폴짝폴짝 뛰고 있어요. 한참 뛰어놀다가 아내는 어지럽다며 먼저 내려가고, 아이들은 저희들은 누워 있을 테니 나보고 세게 뛰라고 해요. 내가 뛸 때마다 아이들은 엎어졌다 뒤집어지기도 하고, 서로 머리를 부딪혀 내가 그만하려고 하면, 자꾸 ‘앵콜’이라고 해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되풀이하다 달아나듯이 빠져나왔어요.

 

 

2020. 6. 18

 

오늘쯤은 이 얘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엊그제 아침 엄마는 소리내어 섧게 울었어요. 아내는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얼른 삼태기로 덮었어요. 아이들은 지우 차로 학교와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나는 숲속에 구덩이를 파고 머리를 해 뜨는 쪽으로 해서 눕혀 부드러운 흙으로 덮어주고, 커다란 돌을 얹어 놓았어요. 엄마는 무서운 꿈을 꾸었어요. 하루종일 엄마 차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어요. 저녁 늦게 부엌 불이 켜지지 않아 걱정이 되었어요. 엄마는 아이들과 함께 이 커다란 슬픔을 어떻게 견디었는지 모르겠어요.

잠깐 우리 곁에 다녀간 아기천사. 한 쪽 눈이 파아랗고, 털이 솜처럼 하얘 아이들이 ‘솜이’라 불렀던 고양이가 하늘나라로 갔어요. ‘엄마가 왜 저렇게 울어?’ 하고 우리에게 물으니, ‘엉아 (학교에) 가서.’ 다행히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어제는 아이들이 솜이를 묻은 곳에 데려다 달라고 해서 숲길을 올라가니, 엄마는 또 울었어요. ‘엄마, 또 울어.’ 하며 울림이가 저만치 내려와 혼잣말인 듯 얘기해요. 고맙다고, 아내와 나에게 인사를 온 엄마는, 슬픔으로 여윈 두 손으로 솜이를 묻은 내 손을 꼭 잡았어요.

 

 

2020. 6. 28

 

며칠전 울림이 친구 산들이가 놀러왔어요. 나는 무슨 말이라도 걸려고, ‘산들아, 어떻게 왔어?’ 하고 물었어요. 아무 대답이 없어, ‘걸어서 왔어?’ 또 대답이 없어, ‘그러면, 날아서 왔어? 우리 아이들은 날마다 날아다니는데.’ 하니, 어이가 없다는 듯 산들이는 고개를 돌려 딴 데를 쳐다보고 있어요. 혼자 괜히 멋쩍어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려고, ‘우리 울림이는 순간이동도 해.’ 하니까, 곧바로 ‘내가 언제?’ 하며 울림이는 시치미를 딱 잡아떼고, 이음이마저 아니라는 듯 얼굴이 굳어져 있어요. ‘분신술도 하는데 ...’ 내가 말끝을 흐리며 이야기하는 동안, 아이들은 나무난간 계단을 뛰어내려가 멀리 가버렸어요. 울림이와 이음이는 나한테 올 적에만, 겨드랑이 깊숙이 감춰 두었던 눈부신 날개를 펴 날아오는가 봐요. 팔꿈치는 겨드랑이에 붙인 채 손바닥은 쫙 펴서 앞으로 내밀고 이리왔다저리갔다 하며 순간이동을 하던 이음이가 눈에 어른거려요.

 

 

2020. 6. 29

 

엊그제는 아이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오셔서 저녁을 같이하자고 해서, 언덕 위 통나무집으로 올라갔어요. 이음이가, 형이 축구하다가 시멘트 바닥에 살이 쓸렸다고 했는데, 울림이는 안방 낮은 걸상에 앉아있었어요. 드러내놓은 무릎에 까진 상처가 무척 쓰라려 보였어요. 울림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며 포켓몬카드 몇 장을 골라 건네주며 자랑을 했어요.

저녁을 먹으며 술 한 나누는데, 느닷없이 방안에서 울림이 울음소리가 터져나왔어요. 일하다 조금 늦게 온 아빠가 무릎에 난 상처를 소독해 주고 있나 봐요. 저렇게 자자러지게 우는 소리는 처음 들어봐요. 이사 온 첫해에는 이마를 몇 바늘 꿰맬 만큼 많이 다쳤어도 저리 울지는 않았는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오셔서 그런 것일까요. 그런데 아까부터 이음이 얼굴 표정이 야릇해요. 자랑스러움일까, 우쭐거리기라도 하는 걸까. 터져나오는 기쁨을 참고 있는 듯하지만, 비싯비싯 눈가로 삐져나오는 웃음은 어쩔 수 없나봐요. 드디어 형이 울음을 터뜨린 거예요. 좀처럼 울지 않던 형이, 그것도 오랫동안을. 조그만 일만 터져도 울기부터 하는 이음이는 갑자기 키가 커진 듯, 위에서 아래로 형을 내려다보는 기분이었을까요. ‘야, 울림이 너, 이제 사람 됐다. 울기도 하고.’ 라며 놀리는 듯 말하니, 한참만에 방에서 나오는 울림이는 멋쩍은 듯 배시시 웃어요. 아, 나에게도 놀림거리가 생겼어요. 울림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와서 자랑하듯이, 나는 가끔 주머니에서 ‘놀림감’을 꺼내어 울림이를 놀려 먹을 거예요.

 

 

2020. 7. 5

 

‘구름 아저씨, 비껴 주세요.’ 달이 구름에 가리자, 이음이가 한 말이에요. 어느덧 나는 동화 속으로 들어왔어요. 동화 속에서 ‘우리’가 뭐라뭐라 하면서 엄마 옷자락을 끌어당겨요. 뭐라뭐라 달이 나왔으니 같이 가서 보자는 이야기예요. 이럴 때 구름을 사이에 두고 달님과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한다고 해요.

뜰에 서서 ‘우리’가 웃고 있어요. 아이들 이모 지원씨가 ‘우리’가 웃는 모습이 나와 닮았다고 해요. 지우 어릴적 모습이 떠올라요. 저리 달님처럼 환히 웃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친구 하나 없이 사람을 만나지 않고 구석에 혼자 갇혀 있어요. 가끔 지우는 우인이의 아픈 그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우는 늘 아이들 외할아버지와 술 한 잔 하고 싶어해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한결같이 섬기는 마음으로 마주하는, 아이들 외할아버지가 지우는 편한가 봐요. 아이들 외할버지는 마냥 허허로우시기만 하시지 않아요. 무심한 듯 하시지만, ‘지우씨, 도자기 시작해야지요. 너무 기다리면 안 돼요.’ 라고 하실 때는, 지우를 꿰뚫어 보는 듯해요.

아이들은 마루난간에서, 지우가 가르쳐 준 대로 맥주 깡통을 꽉 눌러 발에 끼고 깡통로봇처럼 뛰어다니다가, 마당으로 집어 던지고 뜰에서 축구를 하기도 해요. 일하다 늦게 온 아빠가 술 한 잔 하는 동안, 엄마는 우리 집에서 아이들을 씻기고 밤이 이슥할 때야 돌아갔어요. 지우는 혼자 남아 술을 마시고 있어요. 실은 오늘 아이들 외할아버지가 둘째 따님 지원씨를 데리고 온다고 해서 지우는 기다리고 있었어요. 지우는 아이들 외할아버지와 술을 주거니받거니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지도 몰라요.

 

 

2020. 7. 9

 

밭을 내려오는데, 뜰에 세발자전거에 앉아 있던 ‘우리’가 나를 쳐다봐요. 내가 손을 흔드니까, 엄마한테 고개를 돌려 무어무어라고 해요. 그 전 같으면 같이 손을 흔들었을 텐데, 이제 제법 말을 할 줄 아니 엄마한테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나무계단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지, 손으로 무엇을 만지작거리는 엄마는 가만히 웃음을 지어요. ‘우리’가 뭐라고 했을까? 엄마의 고운 그늘 아래 ‘우리’가 피어나고, 오늘 아침 이 세상 모든 꽃들이 활짝 피어났어요.

 

 

2020. 7. 12

 

온종일 하늘이 끄무레하더니 저물녘 빗줄기가 조금 세차지자 꼼짝도 않던 아이들이 꼬물꼬물 기어나와요. 빨강 우산은 울림이, 흰 우산은 이음이, ‘우리’는 분홍 우산. 우산을 빙빙 돌리는 울림이, 우산은 뒤집어지고, 마당에 쭈그려앉아 ‘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이음이, ‘우리’는 뒤늦게 콩콩콩 나무계단을 내려오고 ... 마치 이웃집토토로 마을에 사는 아이들 같아요. 느슨해진 거친 현을 긁는 치렁치렁 늘어진 목쉰 빗소리가, 창을 사이에 두고 아이들이 사는 나라에는 피아노 맑은 건반 위를 통통 뛰어다니며 빗방울이 춤추고 있어요.

 

 

2020. 7. 15

 

‘나, 홀수 짝수 알아.’ 이음이가 말을 꺼냈어요. 우인이가 ‘내가 문제 낼게 알아맞혀 봐.’ 라고 말했어요.

우인 : 3

이음 : 홀수

우인 : 7

이음 : 홀수

우인 : 8

이음 : (한참 생각함.)

나 : 바로 옆에 있으니까.

이음 : (다시 생각하다가) 홀수

우인 : 틀렸어.

 

이음이는 홀수 짝수 홀수 짝수 손가락을 꼽아 셈하는데, 잘못 세었나 봐요. 우인가 다시 해 보자고 했어요.

우인 : 5

이음 : 홀수

우인 : 10

아내 : (뒤에서 우인이 몰래 양손 손가락을 서로 짝지어 보여줌)

이음 : 짝수

우인 : 9

아내 (다시 손가락을 붙여 하나가 짝이 없음을 보여줌)

이음 : 홀수

우인 : 야! 이음이 너, 학교 안 가도 되겠다.

이음 : 나, 학교 안 가.

 

다음에 무슨 말이 이어질지 몹시 궁금했어요.

이음 : 나, 어린이집에 가.

 

나는 무슨 말을 기다린 것일까요? 이음이가, 나는 다 아니까 커서 학교에 안 가도 된다는 그런 말 ... 이음이는 한 방에 날려버렸어요.

 

 

2020. 7. 16

‘우리’를 손수레에 태워 숲길을 오르는데, 참 오랜만에 이음이가 함께 태워 달라고 해요. 이음이는 내가 무릎이 아프다는 것을 알거든요. ‘그래, 타.’ 하니까, 이음이가 ‘할아버지, 괜찮아?’ 라고 묻자,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도 따라 ‘괜•찮•아?’ 라고 해요. ‘우리’는 앞으로 당겨가고, 이음이는 뒷자리에 앉고, 이음이는 다시 ‘할아버지, 왜 빨리 낫지 않아?’ 라고 물어요.

 

나 : 나이가 들어서 그래.

이음 : 알아, 늙으면 죽을 수도 있잖아.

나 : 그럼, 김종철 선생님도 돌아가셨잖아.

이음 : 산책하다 ...

이음이는 엄마 아빠에게 들어, 선생님이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어요.

나 : 그 전에 잠을 통 못 주무셨대. 밤이면 귀에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이음 : (소리없이 웃으며) 진짜 비행기가 지나간 것 아니야.

나 : 다른 사람은 못 들었는걸. 그런 병을 ‘이명’이라고 해.

이음 : 나도 병 이름 알아.

나 : 니가 무슨 병 이름을 알아? (니가 어디가 아프다고 병 이름을 아느냐고 물은 거예요.)

이음 : 쥐병.

나 : 쥐병?

 

나는 순간, 오랫동안 잘 낫지 않는 ‘지병’이란 말일까, 또 쥐를 잡아넣은 병일까 하고 생각했어요. 이음이가 ‘안전교육 책에서 봤는데.’ 라고 하자, 그때서야 발에 쥐가 나는 것을 말하는구나 하고 눈치챘어요.

이음 : 어떤 아이가 잘난 체한다고 멀리 헤엄쳐 가다가 갑자기 발이 ...

이야기를 다 끝내기 전에 집에 닿았어요. 손수레를 나무난간에 걸쳐 ‘우리’를 내려주고, 이음이는 짐처럼 쏟아 달라고 해서, 마당에 부어 놓고 돌아왔어요.

 

 

2020. 7. 18

 

어둑해진 뒤에서야 내일 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비설거지를 했어요. 낮에 아내가 꽃밭에서 뽑아놓은 풀이 가득찬 손수레를 비우고 돌아오는데, 풀숲에서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반딧불이가 반짝이고 있었어요. 풀잎 사이로 반짝이는 모습이 구름 사이로 비치는 아슴한 별빛 같았어요.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아쉬운 듯 발걸음을 뗐는데, 그 때 나는 아이들 생각을 했나 봐요. 내 마음이 이어졌는지, 방에 들어오자 아내가, 아이들한테서 반딧불이 봤느냐고 전화가 왔다고 해요. 얼른 전화를 걸어 어서 밖으로 나오라고 했어요. 그 때 시각이 8시 38분이었어요. 먼저 나가서 숲길에서 기다리는데, 울림이와 이음이가 손전등을 들고 뛰어내려왔어요. 그새 날아갔는지 사그라진 불빛이, 숨죽여 기다리면 되살아나고, 가슴이 조마조마했어요. 우리와 엄마, 이모 지원씨도 나왔어요. 우리는 나를 보자마자 ‘한미(할머니)는 어디 있어?’ 하고 아내를 찾아요. 울림이와 이음이는 반딧불이를 잡고 싶어하는데, 손전등을 비추면 보이지가 않았어요. 손전등을 들고 뛰어다니던 아이들을 보고 지원씨가 혼잣말인 듯 너희들이 반딧불이 같다고 해요. 우리가 달려와 엄마 다리를 꽉 붙잡고 있길래, ‘어, 반딧불이가 날아와 엄마 다리에 붙었네.’ 하고 내가 소리치자, 어느새 울림이는 손전등을 가랑이 사이에 거꾸로 끼고 반딧불이 흉내를 내며 잰걸음으로 숲길을 오르내려요. 이음이도 따라하고 꽁무니에 불을 켠 채 아이들 반딧불이가 밤하늘 밝히며 언제까지나 동동 떠다니고 있었어요.

 

뒷이야기

다시 반딧불이를 찾아나선 아이들을 두고 집에 들어왔는데, 밖에서 울림이가 반딧불이 애벌레를 찾았다고 크게 소리를 쳤어요. 아까 엄마가, 반딧불이가 날아가지 않고 한곳에 머물러 있는 걸 보면 애벌레 같다고 했는데, 끝내 울림이가 찾아냈어요. 손전등을 비추니 밥그릇 뚜껑에 담긴 반딧불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고 꽁무니에 흐릿한 불빛을 달고 기어가고 있었어요. 나중에 엄마한테 문자가 왔는데, 애벌레가 아니고 날개가 퇴화한 늦반딧불이 암컷이라고 해요.

 

 

2020. 7. 19

 

아이들이 놀러왔어요. 신발에 붙인 스티커 인형을 자랑하더니, 아내에게도 보여주려고 할머니를 찾아요. 내가 ‘여보!’ 하고 부르자, 이음이도 ‘여보!’ 하며 내 흉내를 내고, 우리도 따라 ‘여보!’ 하고 아내에게 달려가요. ‘우야(아이구)! 내 새끼들.’ 뒤꼍에서 일하다 나온 아내가, 흙 묻은 손을 털고 아이들을 꼭 안아줘요. 이제 제법 말문이 터진 우리가 ‘한미, 이리 와 봐.’ 라고 할 땐, 아내는 몸이 다 간지럽다고 해요. 신발 왼쪽 오른쪽을 바꿔 신은 우리를 보니, 이음이 생각이 나요. 발이 불편해 보여 제대로 신겨 줘도, 다음날이면 이음이는 또 바꿔 신고 나타나요. 배움은 때가 있나 봐요. 그 날도 신발을 바꿔 신고 와서, 이음이에게 발 모양을 손으로 그려 보여 주고는 이렇게 신는 거라고 가르쳐 준 뒤로, 다시는 바꿔 신지 않았어요. 오늘도 이음이에게 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었는데, 우리는 세 살이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겠지요. (엊그제 일어난 일이에요.)

 

 

2020. 7. 27

 

우리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하비, 어디 있어?’ 하길래, 밭에 있다고 하니 전화를 끊어요. 다시 전화가 와서 뭐라뭐라 하는데, 곁에서 엄마가 ‘하비, 놀러 갈게.’ 라고 하니, 우리도 따라 ‘하비, 놀러 갈게.’ 라고 말해요. 밭일을 멈추고 계단 쪽으로 마중을 갔는데, 비옷을 입고 나를 쳐다보자마자 ‘하비!’ 라며 온몸으로 기뻐해요. 형들은 어디 갔는지, 들깨를 모종하는 내 곁에서 혼자 놀아요. 흙을 파선 두꺼비집 놀이도 하고, 흙을 집어 위에서 내 손에 뿌리며 ‘비가 온다.’ 라고도 해요. 손수레를 태워 달라기에, 아침에 마을일을 나간 할미한테 가자고 하니까, 아까 엄마차 타고 오다가 할미를 봤다고 해요. 마을회관 지나 길가에 풀 뽑은 흔적 따라 시내버스가 다니는 큰길까지 나왔으나, 아내는 보이지 않았어요. 이제 집에 갈까 하니 싫다고 해요. 내려오는 데만 삼십 분 남짓 걸렸을 거예요. 나중엔 우리가 ‘하비 집 밥 먹자.’ 해서 겨우 길을 돌렸어요. 우리는 맨밥을 구운 김에 싸주어도 잘 먹거든요. ‘하비, 엄마하고 엉아하고 이모하고 할미하고 같이 밥 먹어.’ 라고 할 땐 마음이 싸아했어요. 지나가던 트럭이 멈추더니, 마을아주머니가 ‘혼자예요?’ 하길래, 오늘은 형들이 함께 오지 않아 물어보시는구나 해서 ‘예’ 하고 대답했는데, 생각해 보니 ‘손자예요?’ 하고 물었던 거예요.

 

 

2020. 7. 30

이음이 말투가 떠올랐을까요. 낯선 작가에 내용도 모르는 ‘미움’이란 그림책을 선뜻 주문한 까닭은. 혼잣말인 듯 무뚝뚝한 말투, 굵은 금으로 그려진 그림이 좋았어요. 책을 주문하면서 먼저 아이들에게 읽어줄 생각을 했어요. 아이들이 오면 나도 그림책 있다며 자랑하고, 무뚝뚝한 말투로 읽어줄 거예요. 아이들은 날마다 잔치에요. 비가 와도 잔치, 비가 그쳐도 잔치, 엊그제는 이모 지원씨가 홍성에 방을 구했다며 잔치 ... 이번주 토요일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와서 또 잔치가 벌어지겠지요. 우리 목소리는 잠에서 막 깨어난 새소리 같아요. 벌써 우리집 마당 한바퀴를 돌고갔어요.

 

 

 

2020. 8. 3

 

엊그제는 아이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이모 지원씨가 왔어요. 이음이가 먼저 달려와 식구들이 온다고 알려주었어요. 이윽고 외할아버지와 ‘우리’가 문으로 들어섰어요. ‘우리’는 신발을 벗더니 문 쪽으로 앞을 두어 가지런히 놓았어요. 이제는 왼쪽 오른쪽 신발을 가려 신은 줄 아는 듯해요. 엄마가 가르쳐 주었을까. 형들을 따라한 것일까. 며칠 전만 해도, 한 쪽 신발은 날아와 대청 문턱을 넘고 다른 쪽은 뒤로 내팽개쳤는데.

‘우리’는 마루를 빙빙 돌아요. 외할아버지 까슬한 수염도 만져 보고, 조심스레 지우의 빡빡 깎은 짧은 머리칼도 만져보고, 앉아있는 내 등 뒤에 와 목을 움켜잡고 매달리기도 해요. 아이들은 안방에 들어가 우인이와 카드놀이를 하다가 ‘벼랑 위의 포뇨’라는 만화영화를 보고, 외할아버지는 식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일어서셨어요. 빗속에 처음 피어난 날, 짙은 보랏빛으로 새치름하게 보였던 큰꽃으아리 꽃잎 여섯 장이, 닷새가 지나자 빛이 엷어지고 너부데데한 얼굴을 하고 있어요.

 

 

2020. 8. 6

 

비바람이 잠깐 그친 사이, 무너진 길을 돌아보고 오다 엄마 차를 만났어요. 뒷자리에 ‘우리’가 혼자 타고 가길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디 가느냐고 물었어요. ‘떼떼뽀뽀엄마뿌’ 라고 하길래, 속으로 ‘엄마 차를 타고 어디 간다는 말이구나.’ 라고만 짐작했어요. 엄마가 말을 이어받아 지원이가 기차역에 와서 데리러 가는 길이라고 했어요. 헤어지고 숲길을 올라오다가 그 때서야 생각이 났어요. 아, 내가 왜 ‘우리’ 말을 못 알아들었을까, ‘우리’는 제 생각을 정확히 나타낸 것이었어요. ‘엄마 뿌(차) 타고 떼떼뽀뽀(기차) 역에 간다.’는 말을 한 거예요. ‘떼떼뽀뽀’를 먼저 꺼낸 것은 기차라는 말을 먼저 꼭 하고 싶었던 거예요. 내가 알아들었으면, ‘우리’가 얼마나 좋아했을까. 아이들 몸짓 하나 말 한 마디에는 다 뜻이 있는 줄 알면서도 내가 놓친 거예요. 새벽 숲을 뒤흔드는, 너울 같은 큰바람에도 오늘 아침 큰꽃으아리 나머지 두 송이가 피었어요.

 

 

2020. 8. 10

 

엊저녁 저희 집에 와서 ‘우리’가 처음 그린 그림이에요. 마치 바위에 새겨 놓은 듯한 암각화 속엔, 엄마, 할머니, 우인이 이모, 엉아, 강아지, 엄마 차, 아빠 차 들이 있어요. 그림 속,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가며, 짚신벌레 같은 것이 셋이 있는데, 가운데 가장 크고 긴 것이 나를 그린 거예요. 짚신벌레 옆으로 위로 아래로 가늘고 긴 털은 손발이고요. 암호 같아 보이지만, 다시 만나 ‘우리’에게 물어보면, 누굴 그렸는지 하나 하나 다 알아맞힐 것 같아요. (아, 아래 종이가 찢긴 곳에도 짚신벌레 하나가 더 있네요.)

 

 

 

2020. 8. 17

 

금방이라도 눈이 감길 듯해요. ‘우리, 너 졸리는구나.’ 차 옆자리에 앉아 내가 놀리면, ‘아니.’ 하곤 눈에 힘을 주어 동그랗게 떠요. 또 눈이 감기고 내가 졸리는구나 놀리고 ‘우리’는 아니라고 하고, 몇 차례 그러다 쏟아지는 잠에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는 ‘우리’는 잠이 들어요. 어제 ‘우리’네 식구들과 예산출렁다리로 나들이를 가, 내포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엊그제는 ‘우리’가 전화를 걸어 ‘하비 집에 가서 맛있는 거 같이 먹어.’ 해서 기다렸는데, 텃밭에서 따서 삶은 옥수수 한 봉지를 가지고 와서 나누어 먹었어요. 오늘은 뒷마당에 엄마 아빠가 만들어 놓은 실내수영장에 가서 첨벙첨벙 물놀이를 했어요. 물 가운데 서서 부르르 몸을 떠는 ‘우리’가 추워 보여, ‘우리, 너 춥지.’ 하니까 어제처럼 아니라며 ‘우리’는 웃음을 지어 보여요.

 

 

2020. 8. 24

 

여름방학이 끝나고, 어제는 엄마 차를 타고 우인이를 학교 사택에 데려다 주고 왔어요.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침에 먼저 일어난 아빠가 ‘우리’ 보고 엄마를 깨우라 하니, ‘우리’가 ‘엄마 혼자 일어날 수 있어.’ 라고 하더래요. 앞 운전석에 엄마, 바로 뒷자리에 타고 가는 ‘우리’ 모습이 마치 영화 한 장면 같아요.

 

 

2020. 8. 26

 

바람의 끝자락일까. 싸리비로 쓸듯 벼논을 쓸어가면 사그락사그락 소리가 나요. 아이들은 아직 오지 않았어요. 어제 홍성읍내 지원 이모네 집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온다며, 나는 어느 구석에서 잘 거라며 이음이가 들떠 얘기했는데 ... ‘우리’가 받쳐놓고 간 자동차만 마당에 외롭게 서 있어요. 지금은 산자락에 숨겨두고 있지만, 곧 여울처럼 큰바람이 온산을 뒤흔들어놓겠지요. ‘사각사각’의 본딧말이 ‘사그락사그락’인데, 이런 뜻들을 지니고 있어요. ‘벼, 보리, 밀 따위를 잇따라 벨 때 나는 소리’ ‘눈이 내리거나 눈 따위를 밟을 때 잇따라 나는 소리’ ‘연한 과자나 배, 사과 따위를 자꾸 씹을 때 나는 소리’ ‘갈대나 풀 먹인 천 따위의 얇고 빳빳한 물체가 자꾸 스칠 때 나는 소리’ ‘종이 위에 글씨를 잇따라 쓸 때 나는 소리’

 

 

2020. 9. 4

 

아이들이 놀러왔어요. 울림이는 그냥 뛰어서, 이음이와 ‘우리’는 하늘이 맑고 파란데 우산을 쓰고 달려와요. 아이들과 함께 우산바랭이 풀로 우산을 만들며 놀았어요. 어제는 빌궁 삼촌네 가서 저녁을 먹고 왔대요. 옥원이 이모는 지원이 이모 집에서 자고, 오늘 데리러 간다고 해요. 걸상에 앉았던 울림이가 혼자 구구단 몇 개를 외더니, 나에게 ‘6*3’은 하고 물어봐요. ‘18’하고 대답하니, 아니라고 해요. 다시 ‘2*9’는 하길래 ‘18’이라고 하니 아니라며, ‘29아나(이구아나)’라고 해요. ‘6*3’은 ‘63빌딩(육삼빌딩)’이래요. 나도 어릴적 생각이 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얇은이(홀쭉이를 가르키는, 이음이가 쓰는 말)는?’ 하고 물었어요. 곰곰이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비사이로막가’라고 일러주었어요. 앞마당에서 풀을 뽑고 있는 엄마 재채기 소리가 들려오자, ‘우리’가 물어요. ‘이게 뭐지?’ 그러곤 얼마 있지 않아 쪼르르 엄마한테 달려갔어요.

 

 

2020. 9. 8

 

어젯밤 별 너댓 송이가 바람에 밀려와 반짝이더니, 눈부신 햇살을 안고 ‘우리’가 달려오고 있어요. ‘우리 너, 머리 깎았구나.’ 하니 ‘이모가 깎아 줬어.’ 라며 또렷이 대답해요. 왼쪽 얼굴에 보이지 않던 상처가 있어 물어보니, 이음이가 곁에서, ‘우리’가 나무 계단에서 자전거와 함께 넘어져서 그렇다고 해요. 이음이는 짧게 깎은 단발머리가 너무 싫다고 해요. 아빠 젊었을 때처럼 허리까지 기르면 좋겠냐고 하니, 발바닥에 닿았으면 좋겠다고 해요.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밭언덕을 오를 땐 이음이 머리카락을 붙잡고 오르고, 밤에는 이음이 머리카락은 우리 집에서 재우고 이음이 몸뚱이는 저희 집에서 자기로 했어요.

좁다란 나무난간 턱을 고양이처럼 아슬아슬하게 기어다니는 ‘우리’와 이음이를 데리고 통나무 작업장으로 올라갔어요. 며칠 줄곧 비가 와서 도랑이 깊게 패어 물이 제법 많이 흘러요. 둑을 쌓고 나뭇잎배도 띄워 보내고 한참이나 놀다 왔어요.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에 오늘도 ‘우리’는 머리를 감고 배를 씼었어요.

 

 

2020. 9. 17

 

켜켜이 쌓인 어둠 속에 도랑물 소리와 풀벌레 소리만 가득해요. 불빛에 풀잎 끝 맺힌 빗방울들이 반짝이고, 어기적어기적 두꺼비 한 마리 길을 건너고 있어요. 비 그친 하늘 구름 사이로 별들이 일렁이는데, 아이들 집은 불이 꺼진 채 컴컴해요. 어디로 간 것일까. 낮에만 해도 내게 전화를 걸어 ‘할아버지 어디 있어, 언제 올 거야?’ 셋이 번갈아가며 물었는데. 지하수가 또 고장나고 크레인이 왔다갔다는데, 물이 나오지 않아 다른 집에 가서 자고 오는 걸까. 아이들이 없다는 생각이 밀려와 갑자기 이 세상에 우리만 홀로 남겨진 듯한데, 이따금 바위산에서는 부엉이가 울어요.

 

 

2020. 9. 18

 

내일 아이들을 만나면 이렇게 말할 거예요.

‘어떤 아이 둘이 길을 가는데, 큰아이가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동생인 듯한 아이에게, 꼬챙이에 비닐을 둘둘 감아 놓은 것을 보고 허수아비 같다고 했어. 그러고는 길 쪽으로 몸을 돌리는데, 마침 꼬마가 끌고 내려가는 자전거에 걸려 넘어졌어. 넘어진 큰아이는 화를 내며 꼬마 아이 가슴팍을 때렸어.’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음이는 ‘그 거 형과 우리 이야기잖아.’ 라고 말하고, 울림이는 멋적은 듯 배시시 웃겠지요. 아이들은 저희들 이야기인 줄 뻔히 알면서도, 저희들이 이야기 속에 나오면 재미있어 하며 끝까지 들어요.

정말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자전거를 끌고 그저 앞만 보고 내려갔을 뿐이에요. 무릎과 팔꿈치가 시멘트 바닥에 쓸려 너무 아픈 나머지 엉겁결에 울림이가 그랬다는 생각이 들지만요. 엉엉 울면서 울림이는 집으로 가고, 세게 맞지는 않았지만 너무 속상한 ‘우리’도 울면서 엄마 품으로 달려갔어요. 두고간 킥보드와 자전거를 들고 터덜터덜 뒤따라가는데, 이음이가 혼잣말인 듯 ‘모두 어린아이였으면 좋겠다. 혼내지 않게.’ 라며, 울림이 형에 대한 서운함을 이야기해요. 가끔 울림이는 어른처럼 구나봐요. 어제도 차에 깔려 죽은 두꺼비를 보려고 이음이가 달려가니까, 먼저 보고 온 울림이가 뒤따라가며 ‘어린이는 안 보는 게 좋을 걸.’ 하고 말하던 것이 떠올라요.

 

 

2020. 9. 19

 

울림이네 집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이에요. 하나는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 돌계단으로 질러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숲으로 난 샛길로 에돌아 가는 길이에요. 샛길은, 지난번 큰비가 왔을 때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덮쳐서 한쪽이 무너졌어요. ‘우리’가 자전거를 끌고 좁다란 길을 건너올 때마다 안타까웠는데 오늘에서야 메웠어요. 돌을 쌓은 뒤, 내가 삽으로 흙을 퍼서 담으면, 울림이는 손수레를 끌고가 쏟아붓고, 이음이는 갈퀴로 흙을 고르게 펴요. 우리 곁에서 농사 공부한 지 두 해가 지난 울림이와 이음이는 제법 큰일꾼이에요. 내가 발로 구르며, 이렇게 단단하게 다져야 나중에 비가 와도 푹 꺼지지 않는다고 하니, 아이들도 통통 뛰면서 따라해요. 지우 삼촌이 와서 발로 구르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음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귓속말인 듯 작은 목소리로 울림이가 ‘할아버지, 이음이가 지우 삼촌 1톤이래.’ 라고 해요. ‘뭐, 지우 삼촌 몸무게가 1톤이라고!’ 나는 혼자 껄껄 웃어요. 초사흘달이 떴어요. 마치 박주가리 솜털씨앗 같아요. 곧이어 하늘 속에 잠겨있던 별들이 하나둘 떠오르겠지요.

 

 

2020. 9. 21

 

마당에서 고추잠자리를 쫓아다니다가, V자 길로 밤을 털러 갔어요. V자 길은, 마을에서 올라오다 아이들 집과 우리 집으로 갈라지는 세 갈래 길을, 울림이가 이름을 붙이고 이음이와 나까지 셋이만 알고 부르는 말이에요. 낮은 곳은 잠자리채로 털고, 높다란 가지에 매달린 밤송이는 돌을 던져 땄어요. 밤송이가 떨어지는 곳에는 풀이 우거지고 칡넝쿨이 뒤엉켜 있어, 아이들을 기다리게 하고 집에 올라가 예초기를 가져와 말끔히 벴어요. 기계 다루는 게 서툴고 풀벌레들이 다칠까봐 늘 애타고 안절부절못하지만, 이럴 때는 내가 예초기를 쓸 줄 안다는 게 뿌듯하게 느껴져요. 밤들은 까서 ‘우리’가 등에 진 가방에 넣어요. ‘우리’에게는 밤송이 터는 일이 처음일 거예요. 나머지 밤송이는 내일 대나무 장대로 털기로 하고 헤어지는데, 울림이 이음이가 번갈아 달려와, 할아버지 할머니 지우 삼촌도 먹으라고 밤 세 알을 내 뒷주머니에 몰래 넣고는 달아나요.

 

 

2020. 9. 22

 

‘할아부지, 할아부지, 할아부지, 할아부지,’ 엄마 차에서 내리자마자 소리쳐 부르고는, ‘우리’가 자전거를 타고 샛길로 달려와요. 이음이도 나를 부르며 뒤따라 오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날마다 이렇게 넘치는 기쁨을 누리며 사는지요. 이음이가 킥보드에 앉은 채 비탈을 내려가다 멈춰선 ‘우리’ 자전거와 맞부딪쳤어요. 넘어진 이음이를 보고 ‘괜찮아?’ 하곤 ‘우리’가 걱정스럽게 물어봐요. 이음이가 손목에 조금 벗겨진 생채기를 보여주자, ‘우리’는 ‘이음이 안 아파.’ 를 두어 번 되풀이하는데, 물어보는 말이 아니라 ‘이음이는 아프지 않다.’고 하는 말처럼 들려요. 그래서 이음이도 ‘이음이 아파, 이음이 아파.’ 라고 되뇌어요. ‘우리’는 손가락으로 왼쪽 이마 위아래를 가리키며, 지난번 나무 계단에서 넘어져 많아 아팠다고 몸짓으로 말해요.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하늘이 갈대 위로 눈부시게 빛나요.

 

 

2020. 9. 24

 

‘우리’ 몸에 늘 붙어다니는 자전거는 발판이 없는 두발자전거예요. 브레이크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손아귀 힘이 모자라,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갈 땐 얼른 안장에서 일어나 두 발로 털털털털 뛰어가지요. ‘우리’ 두 발이 자전거 페달과 브레이크인 셈이지요. 얕은 내리막길에서 내가 ‘우리, 발 놓아.’ 하면, 땅에서 두 발을 떼곤 아슬아슬 신나게 달려요. 자전거 방향을 바꿀 때는, 오른손을 뒤로 해서 안장을 들고 빙 한 바퀴 돌아요. 안장을 들고 자전거 앞뒤를 바꾸는 건 ‘우리’가 몸으로 깨친 듯해요. 신발을 신을 때 잘 들어가지 않으면 신발 앞꿈치를 바닥에 툭툭 치는 것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할아부지, 안녕!’ 부엌 창문으로 ‘우리’가 소리치면 비로소 나에게 아침이 밝아오지요. 무밭에 웃거름 주다 바라본 저녁 하늘이에요.

 

 

2020. 9. 26

 

‘할아버지, 옷 빨아 입어.’ 느닷없이 이음이가 말을 꺼냈어요. ‘아, 이 옷, 일할 때 입는 옷이야.’ 라고 말했지만, 순간 적잖이 당황스러웠어요. 흙투성인 바짓가랑이가 더러워 보였던 거예요. 하긴 여기에 살다 보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 잠옷 차림으로 마당이나 길을 나서고, 일할 때만 일옷으로 갈아입는데, 그 옷마저 며칠만에 갈아입지요. 아이들도 우리 집으로 올 땐 잠옷 바람이에요. 울림이는 수더분한 구석이 있는데, 이음이는 퍽 깔끔해요. 색칠할 때도 조금이라도 금 밖으로 나가는 것을 참지 못해요. 이음이가 가장 싫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신발 속으로 흙이 들어가는 거예요. 저녁나절 무밭에 물을 주고 있는데, 이음이는 제가 해보겠다고 하며, 손에 쥐고 있는 입마개(마스크)를 내게 맡기며, ‘할아버지, 주머니는 깨끗하지?’ 하며 물었어요. 요즘은 바람의 빛깔도 결도 소리도 달라진 듯해요. 어제는 산을 오르다가 물봉선화 한 무리를 만났어요. 가만히 앉아, 깔대기 같은 대롱 꽃이 어디에 매달려 있는지 살펴보았어요. 꽃빛은 자줏빛을 띤 빨간색인 연짓빛이에요.

 

 

2020. 9. 29

 

땅콩밭을 둘러친, 검정색 그물로 된 달래망을 개고 있는데 아이들이 달려왔어요. 이음이가 저도 해보겠다며 옆에서 거드니, 울림이도 같이한대요. 나는 길 위쪽으로 올라가 달래망을 팽팽하게 잡고, 아이들은 아래에서 둘둘 말아 올려요. 한참이나 하다가 힘에 부치는지, 아이들은 한숨 자고 해야겠다며 달래망을 베개 삼아 길바닥에 드러누웠어요. 두말할것도없이 울림이가 먼저 그랬어요. 아이들과 일을 하다 보면 놀이인지 일인지 알 수가 없어요.

‘우리’가 많이 달라졌어요. 형들 따라 놀러 오거나, 혼자서도 자전거를 끌고 우리 집으로 달려왔는데, 요즘은 엄마가 데려다 줘야만 해요. 놀다가도 엄마가 없으면 놀란 듯 두리번거리며 엄마를 찾고, 엄마 뒤만 졸졸 따라다녀요. 아내한테 얘기하니, ‘아시타나’ 보다 라고 하는데,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올봄만 해도, 커서 엄마와 결혼하겠다는 이음이 생각이 겹쳐 왔어요. 물소리 그친 도랑에는 풀벌레 소리가 흐르고, 하늘에서 내려와 다소곳이 앉은 개쑥부쟁이 꽃이 머잖아 뜰과 언덕을 연보랏빛으로 뒤덮겠지요.

 

 

2020. 10. 5

 

추석을 쇠고 오랜만에 울림이가 학교에 갑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긴급 돌봄’이라며, 학교 가는 울림이 따라 이음이도 어린이집에 갑니다. 차창 밖으로 두 손을 내밀어 이음이와 울림이는 헤어지는 인사로, 나와 아내와 하이파이브를 천 번이나 했어요. 학교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자마자, 울림이는 체험활동을 가서 만들었다며 마들렌이란 빵 세 개를, 이음이는 선생님이 삶아주었다며 쥐밤(산밤) 여섯 알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왔어요.

어제 만들다 만, 대나무 칼과 칼집을 마무리해서 허리에 차고 산적을 잡으러 나섰어요. 산길을 내려가다 금방 산적 잡으러 가던 것도 잊어버리고, 칼집을 묶은 비닐끈과 길섶에서 주운 상수리를 가지고 놀았어요. 아름드리 상수리나무 아래 피어있는 메리골드 꽃을 보고 이음이가 느닷없이 ‘곤드레밥’이라고 해서 한참이나 웃었어요. 날은 어둑해지고 이음이는 발목에 줄이 묶인 채 울림이에게 끌려갑니다. 이음이는 엎드려 졸졸 따라갑니다. 내가 얼른 끈을 풀어 안고 가는데, 내 품에 안겨서도 이음이는 강아지 흉내를 내며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며 집으로 갑니다.

 

 

2020. 10. 8

 

무슨 일인지 울림이 혼자 방으로 뛰어들어 와서 ‘잠깐 할머니를 볼 일이 있어 왔다.’며 침대로 올라와,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아내를 살펴 보고는 곧장 집으로 달려갔어요. 손에 연필을 쥔 걸 보니 아내를 그리려나 보다고 생각했어요. 얼마쯤 지났을까, 울림이와 이음이가 달려오고 그 뒤를 ‘우리’와 엄마가 오고 있어요. 보여줄 게 있다며 울림이와 이음이가 주머니에서 몇 겹 접은 종이를 꺼내는데, 그림편지일까 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 도감’이라고 해요. 울림이 학교에서 숙제로, 집에서 기르고 싶은 동식물을 하나씩 골라, 그에 관한 내용을 책이나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도감을 만들어 오라고 했대요. 울림이는 ‘리버쿠터’라는 거북이 도감을 만들고 있는데, 이음이도 덩달아 도감을 만들고 싶어, 무엇을 만들까 하다가, 문득 ‘할머니 할아버지 도감’을 생각해 낸 것이었어요. ‘할아버지 도감’에는 이렇게 적어 놓았어요.

 

앞표지 : 할아버지 도감

1쪽(이음) : 콧털 한 가닥, 콧털이 하얗다.

2쪽(울림) : 알통이 없는데 힘이 세다. 맨날 일한다. 재밌다.

3쪽(이음) : 하얀 머리카락 까만 머리카락이 있다.

4쪽(울림) : 맨날 똑같은 옷만 입는다.

5쪽(이음) : 할아버지는 맨날 우리 아이들을 다른 아이로 말한다. 밀차를 잘 끄신다. 맨날 목욕한다. 개구쟁이다.

6쪽(울림) : 배가 뽈록 나왔다.

뒤표지 : 끝. 2020. 10. 7.

 

아이들 고모할머니가 내가 페이스북에 올려놓은 글에 달아 놓으신 댓글에, 아이들이 ‘날마다 아랫집 할아버지에게 행복을 안겨주네요.’라고 하셨는데, 오늘도 가슴 뻐근한 행복을 선물 받았어요.

 

 

 

 

2020. 10. 8

 

지난해만 해도 엄마가 좋아한다는 가수 ‘아이콘’의 노래 ‘사랑을 했다 우리가 만나 ...’를 흥얼거리고 다녔는데, 얼마전부터 엄마가 손홍민 축구에 관심을 보이자, 울림이와 이음이는 저희가 서로 손홍민이라고 우기며 바람 빠진 축구공을 들고 뛰어왔어요. 축구 하면 또 김종도 아닌가. 까불지 마라, 너희 손홍민 형제들 코를 납작하게 해 주마. 나는 아이들을 제치며 요리조리 공을 몰아 골을 넣고는, 머쓱해진 아이들 앞에서 참새처럼 뛰며 혼자 소리지르고 좋아하지요. 문제는 ‘우리’예요. 나와 ‘우리’가, 울림이와 이음이가 같은 편을 먹었는데, ‘우리’는 공만 보면 손으로 잡고 우리 편 골대 너머 저만치 들고 가서는 혼자 공을 몰고 오는 거예요. 누구라도 ‘우리’ 앞을 막아서는 안 되기에, 나는 울림이와 이음이를 손으로 붙잡아 길을 내주어야 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울음보를 터뜨리거든요. 그렇게 애써 공을 몰아 상대편 골대 앞에 가서는 다시 공을 손으로 잡아 우리 편 골대로 되돌아오는 일을 ‘우리’는 되풀이하는 거예요. ‘반칙이다. 시시하다.’고 이음이는 투덜대고, 울림이는 ‘우리, 귀엽지.’ 하고 말하는데, 나는 문득 하이타니 겐지로가 쓴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에 나오는 ‘해파리 소녀’의 한 장면을 떠올렸어요. 지금 아이들이 다니는 길엔 한창 개쑥부쟁이가 흐드러지게 피었어요.

 

 

2020. 10. 15

 

요즘은 아이들과 ‘방방’을 타고 놀아요. ‘트램펄린’이란 놀이기구인데, 우리말로 ‘잇달아 공중으로 뛰는 모양’이라는 뜻을 지닌 ‘방방’이란 말이 잘 어울려요. 아이들과 뛰면서 빙빙 돌다보면 소용돌이치는 물결 같아요. 어지러워서 그만 쉬려고 하면, ‘우리’가 ‘엄청 많이, 엄청 많이’ 하자고 해서 멈출 수가 없어요. 아이들은 지칠 줄 몰라요. 놀다보면 아이들은 가끔 나를 ‘아빠’라고 불러요. 아이들에게 가까운 사람은 모두 ‘아빠’인가 보아요. 지난번에도 모래놀이를 하다가 ‘우리’가 나를 보고 ‘아빠’라고 부르더니, 뭐가 잘못되었는지 혼잣말로 ‘아빠 아니 할아버지’ 라고 더듬듯이 고쳐 말해서 혼자 웃었어요.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새나 꽃이 사람의 말을 하면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을 만나면 늘 ‘방방’ 위를 뛰고 있는 기분이에요.

 

 

2020. 10. 19

 

아침에 뜰을 거닐던 아내가, 날씨가 추우지니 쑥부쟁이 꽃빛이 더 짙다고 해요. 보랏빛은 빨강과 파랑 가운데 서있는 빛깔인데, 경계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답게 느껴져요. 낮과 밤, 뭍과 물, 땅과 하늘, 비올녘, 시월에서 십일월로 건너가는 가을과 겨울 사이에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지요. 울림이가 뛰어와 톱으로 나무를 베어 달라고 하고, 잇달아 이음이가 쫓아와 정전가위로 막대기를 잘라 달라 하고 ... 뒤늦게 달려온 ‘우리’가 할아버지 밀차 태워 달라고 해서 엊저녁에는 저 아래 가로등이 비추는 마을길까지 갔다왔어요. ‘엄청 많이’라는 말을 배워, 아주 멀리 가자고 ‘우리’가 자꾸 졸라대요.

 

 

2020. 10. 20

 

울림이가 달려왔어요. 학교에 일찍 갈 수 있었는데, 이음이가 입을 옷을 고르느라 30분이나 걸렸다고 해요. 울림이 말로는 정확히 37분이래요. 아침에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예요. 이음이는 파란 운동복 바지에 바둑판 무늬 윗도리를 입고 연둣빛 얇은 목도리를 두르고 햇빛 반짝이는 숲 위를 날아 어린이집에 갔어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이들은 윗밭으로 올라왔어요. 고구마를 캐고 있는데, 저희들이 하겠다며 호미를 가지고 가요. 그러더니 느닷없이 ‘저희가 도움이 되긴 해요?’ 라며 이음이가 물어요.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아니, 전혀 도움이 안 돼.’ 라고 딱 잘라 말해도, 아이들은 전혀 마음 쓰지 않아요. 이음이는 뾰족 내민 고구마를 손으로 잡아당기고, 울림이는 오늘따라 장난스레, 흙을 부드럽게 해 준다며 꼬챙이로 찌르고 갈퀴를 가져와 밭두둑을 긁어요. ‘너희들이 곁에만 있어도 엄청 도움이 돼.’ 라고 다시 고쳐 말하자, 이음이가 ‘왜요?’ 라고 물어요. ‘옷도 멋있게 입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웃게 해 주고, 귀엽고 사랑스러우니까.’

 

‘깜짝 놀랄 뻔했어.’

‘우리’가 한 말이에요. 나무난간 위에서 자전거를 타며 혼자 놀고 있기에, 밭을 내려오다가 ‘우리, 뭐 하니?’ 하니까, 얼른 자전거에서 내려와, 마당 빨랫대에 널어놓은 헝겊강아지를 손으로 가리켜요. 아마, 우리 집에도 강아지가 있다고 자랑하고 싶어나 봐요. 그러더니 할아버지 집에 ‘애기 강아지’ 보러가자며 내 손을 잡고 따라와요. 눈 뜬 지 며칠이 지났는데 강아지 네 마리는 집에서 나오려 하지 않아요. ‘우리’가 개집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꿇은 채 강아지를 만져 보려고 고개를 들이미는데, 내가 ‘오요요요’ 하자 한 마리가 불쑥 앞으로 기어나오니, 움찔 물러나며 ‘우리’가 한 말이에요. ‘어떻게 깜짝 놀랄 뻔할 수가 있어. 깜짝 놀라면 놀란 거지, 놀라려다가 안 놀랄 수가 있는 거야.’ 울림이 이음이였으면 이렇게 따지며 말장난을 하며 놀았을 텐데, ‘우리’가 하는 말은 마냥 귀엽고 신비스럽기만 해요. ‘우리’는 누구한테 이런 말을 들었을까요. 혼자 생각한 말은 아닐까요. 아마 ‘크게 놀라지 않았어.’나 ‘깜짝 놀라긴 했는데, 아무일도 없어 괜찮아.’와 같은 뜻으로 썼겠지요. 더듬더듬 말의 세계를 찾아가며, ‘우리’는 저 높고 빛나는 언덕으로 올라가겠지요.

*’애기 강아지’는 ‘우리’가 쓰는 말이에요.

 

 

2020. 10. 23

 

가끔 나는 ‘우리’에게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는 낱말을 쓸 때가 있어요. 오늘은 갑자기 바깥 날씨가 차가워져서, 손수레를 탄 ‘우리’에게 ‘바람이 쌀쌀하네.’ 라고 말했어요. 내 말을 받아 ‘우리’는 놀랍게도 ‘바람이 불어 시원하다.’ 라고 해요. ‘우리’가 ‘시원하다.’ 라고 말했어요! 언제인가는 ‘우리’에게서 이 말을 꼭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내가 ‘우리’에게 처음 들려준 말이거든요. 그 땐 여름이었고, ‘우리’는 거의 말을 못했어요. ‘우리’를 손수레에 태워 그늘 아래로 지나갈 때면, ‘아, 시원하다.’ 라고 자꾸 되풀이 했어요. ‘우리’도 내 말을 따라 신음 소리처럼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그 땐 전혀 뜻 모를 웅얼거림이었는데, 지금 또렷이 ‘시원하다.’고 말하고 있어요. 마을로 올라오는 샛길로 들어서는데, ‘우리’가 ‘이 거 무슨 냄새지?’ 하고 물어요. 내가 되받아 ‘무슨 냄샐까?’ 라고 하니, 무슨 생각이 났는지, ‘아빠가 불을 땠어.’ 라고 하길래, ‘아, 연기 냄새구나.’ 라고 하니 그건 아니래요. 마른 볏짚 냄새일까, 가을 들녘 냄새겠지요. 손수레에서 내려 함께 벼를 벤 빈 논으로 내려 갔어요. 청개구리도 보고 벼메뚜기도 잡고, 볏짚도 한 단 묶어 가지고 왔어요. 청개구리를 쫓아갈 때는 ‘우리’도 쭈그려앉아 개구리 걸음으로 폴짝폴짝 뛰었어요. 가을빛이 짙어지자 숲도 더 깊어진 듯해요. 오는 길에도 바람이 세차게 불어, 우수수 가랑잎비가 내리고, ‘우리’와 나는 흰구름 하얀 새깃털이 되어 파란 하늘을 떠다녔어요.

 

 

2020. 10. 28

 

참나무 가운데, 왼쪽부터 떡갈나무 갈참나무 상수리나무 가랑잎이에요. 떡갈나무와 갈참나무 잎은 동시란 달걀꼴에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고, 상수리나무 잎은 길고 갸름하며 가장자리에 비늘처럼 뾰족한 톱니가 있어요. 떡갈나무는 잎자루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진 속 떨갈나무는 잎자루가 뚜렷해, 떡갈나무와 갈참나무의 잡종인 ‘떡갈참나무’인지도 모르겠어요. 이웃에 사는 노씨 어른은, 상수리나무를 ‘참나무’라고 하고, 갈참나무를 ‘가나무’라고 부르는데, ‘가나무’ 원목에는 버섯이 잘 피지 않는다고 해요.

‘할아버지, 나왔다!’ 내가 마당으로 나오자, ‘우리’가 부엌 창문 안에서 보며 크게 소리쳐요. ‘아, 우리구나!’ 라고 하니까 뭐라뭐라 말하는데, 잘 알아듣지 못해 성큼성큼 언덕을 올라 ‘우리’네 뜰로 들어서니, ‘아빠,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왔어.’ 하며 그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어요. 내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우리’ 가슴이 콩콩 뛰는 듯했어요. 오늘 아침에도 세발자전거를 탄 ‘우리’와 함께 엄청 멀리 나들이를 다녀왔어요. 제제와 뽀르뚜가 아저씨가 놀러가 물장난 치던 그 슬픈 강물에 떠가는 가랑잎처럼 하염없이 떠다니다가 왔어요.

 

 

 

2020. 11. 1 

 

낮에 언덕에 자란 호박을 따서 아이들과 함께 만든 할로윈데이 호박등이에요. 촛불을 넣어 어젯밤 아이들 집 문앞에 몰래 두고 왔는데, 아이들 엄마 해원씨가 사진을 찍어 보냈어요. 울림이 동무 산들이도 초롱산으로 놀러왔어요. 밖에는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고, 문득 한용운 선생의 시가 떠올라요.

 

병을 앓고 나서

仙巖寺病後作
 
흘러오니 남쪽 땅의 끝인데
앓다가 일어나니 어느덧 가을 바람……
매양 천리길을 혼자 가다가
길 막히면 도리어 흐뭇하더군.
客遊南地盡
病起秋風生
千里每孤往
窮途還有情
 
초가을 병 핑계로 사람 안 만나고
하얀 귀밑머리 늙음이 물결치네.
꿈은 괴로운데 친구는 멀고
더더욱 찬비 오니 어쩌겠는가.
初秋人謝病
蒼鬢歲生波
夢苦人相遠
不堪寒雨多
 

 

 

2020. 11. 3

 

‘우리’ 할아버지가 보낸 단풍 사진이에요. 마음마저 곱게 물드는 듯해요. 그 길의 끝은 늘 그리움으로 이어져 있겠지요.  ‘우리’ 마음을 글로 옮겨 보았어요.

 
할아버지가 마당으로 나왔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까치발 들고 부엌 창문으로 내다보며 크게 소리쳤어요.
성큼성큼 할아버지가 돌계단으로 올라와요.
땅이 흔들리듯 쿵쾅쿵쾅 할아버지 발소리가 울릴 때마다, 내 가슴은 콩닥콩닥 뛰어요.
빼곰히 문을 열고 나서자 갑자기 햇살이 쏟아지고
할아버지는 우리 집 앞마당에 무리지어 핀 제비꽃으로 숨어들고
나는 머리가 하늘에 닿은 아름드리 나무로 섰어요.

 

 

 

2020. 11. 5

 

길을 가다가 바지춤을 추키려고 손수레를 멈추고 ‘할아버지 바지 좀 올릴 테니 기다려.’ 라고 하니, 손수레에 탄 ‘우리’가 제 바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엉아와 꺼풀(커플)’이라고 해요. 그러고보니 울림이도 똑같은 빛깔의 바지를 입은 걸 본 적이 있어요. 산모롱이를 돌아서자 산속에서 새소리가 들리니, ‘저 소리 뭐지?’ 하며 ‘우리’가 물어요.

나 : 까치 소리야.

우리 : 아니야, 째째야.

나 : 째째?

우리 : 임이(이음이)가 째째라고 했어.

‘우리’는 ‘할아버지 말은 틀리고, 이음이 말이 맞다.’는 듯 딱 잘라 말해요. 나는 아무 대꾸도 못했지만, 이음이를 만나면 따지려고 해요. ‘이음이 너, 어떻게 우리한테 까치를 째째라고 가르치냐.’고. 이음이 표정이 궁금해요. 이음이는 아마 이렇게 말할 거예요. ‘할아버지, 우리는 아직 아기니까 아기말로 알려 줘야지.’ 오늘은 마을사람들이 ‘대령리’ 라고 부르는 ‘대영리’를, 고개 넘어 굴다리 밑을 지나 두 시간 가까이 걸려 갔다 왔어요. 나도 처음 가 본 길이에요. 청양에서 오는 650번 시내버스를 보자, ‘우리’는 저 차를 타고 싶다고 해요. 언제인가 시내버스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우리’와 함께 엄청 멀리 가보자고 약속했어요.

 

 

2020. 11. 9

 

어제는 아이들과 함께 양파밭을 덮을 왕겨를 실으러 갔어요. 차창밖으로 홍동천 너머 울림이가 다니는 학교가 보이자, 울림이는 ‘홍동초등학교다.’ 하고 소리치더니, 홍동초등학교는 이순신 장군이 지키고 있다고 해요. 그러자 곁에 있던 이음이가 밤이 되면 학교를 지키려고 이순신 장군이 운동장을 한 바퀴 돈다고 해요. 나는 그 말이 재미있어,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고 물으니, 지원이 이모가 말해 주더래요. 울림이와 이음이가 꾸며낸 이야기를 들려줄 때처럼 목소리가 들뜨지 않고, 차분하게 말해서 나도 그런가 보다 하고 나는 아무 대꾸도 못했어요. 마치 ‘오늘 아빠가 회사 갔어.’ 라는 말처럼 자연스럽게 들렸어요. 몇 차례 푸대(자루)에 왕겨를 오삽으로 퍼담더니 힘에 부치는지, 줄지어 세워놓은 왕겨 푸대 위를 마치 헤엄치듯이 기어다니며 놀다가, 온몸이 왕겨투성이인 채 돌아왔어요.

 

 

2020. 11. 12

 

‘단이’와 ‘보리’는 하루종일 고라니를 쫓아다녀요. 늘 허탕을 치곤 논두렁에 빠져 아랫도리는 다 젖은 채 진흙투성이로 돌아와요. 그러다 그예 고라니를 잡았어요. ‘단이’와 ‘보리’ 두 마리 힘으로는 어림없지만, 어제는 마을을 떠돌아다니는 도둑개가 함께 고라니를 몰아 잡은 거예요. 마늘밭에 짚을 깔다가 보니, 고라니가 산으로 올라가길래 이제 살았구나 했는데,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려 서둘러 달려가니, 입을 벌리고 두 눈은 뜬 채 도랑에 고꾸라져 숨이 끊어져 있었어요. 아이들이 뒤따라왔어요. 사내아이들이라 그런지, 아니면 그런 주검을 눈으로 자주 봐서 그런지, 가엾어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다큐를 찍는다며 집으로 돌아가 사진기를 가지고 왔어요. 정작 산기슭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준 사람은 나와 ‘우리’였어요. 울림이는 동영상을 20분 2초를 찍었다고 해요.

 

 

2020. 11. 15

 

‘할아버지저울림이애요7시쯤오시면돼겟어요’ 울림이가 엄마 손전화기로 내게 보낸 첫 문자예요. 어제는 울림이 생일이라 아내와 내가 저녁 초대를 받았어요. 아이가 태어난 날에 이웃을 불러 함께 축하해 주고 싶은 엄마 아빠 마음이 따듯하게 느껴졌어요. 엄마 아빠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레고 장난감을, 지원이 이모는 아기자기한 학용품 한 묶음을, 나는 ‘캄펑의 개구쟁이 1,2’와 ‘이빨 사냥꾼’이란 그림책을 선물했어요. 울림이네 집 부엌과 대청을 가로지르는 들보에는 ‘생•일•축•하•합•니•다’라는 글귀가 한 해 줄곧 붙어 있어요. 그래요, 울림이네 집은 날마다 새 생명이 태어나듯 기쁨과 설렘으로 물결치고 있어요. 사진은, 오늘 딱지치기 마을 잔치에 나가 딱지를 치는 이음이(오른쪽에 날고 있는 아이)와, 잠깐 자리를 비운 엄마가 보고 싶어 먼 길을 나섰다가 홍동중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우리’ 모습이에요.

 

 

 

2020. 12. 6

 

엊그제 아침에는 잠옷 바람으로 단이와 보리, 밤이 아침을 주러 나갔다가, 날씨가 제법 차서 얼른 들어오려는데, 학교에 가려고 뜰에 나온 아이들이 반가이 나를 불러요. 언덕을 뛰어올라가며, ‘야, 오늘같이 추운 날에도 학교를 가냐, 집에서 쉬어야지.’ 하고 장난스레 말을 거니, 아이들은 시큰둥하게, ‘할아버지는 잠옷을 입어서 그렇지.’ 라고 울림이가 말을 꺼내자, 덩달아 이음이는 몇 차례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너무 덥다고 너스레를 떨어요. 괜스레 말을 꺼내 놓고 혼자 머쓱해졌어요. 이제 아이들이 너무 커 버려 이런 말이 통하지 않는 듯해요. 초롱산으로 이사 온 다음날 아침, 부엌문을 빼곰히 열고 얼굴을 내밀던 일곱 살 울림이와 네 살 이음이가 떠올라요.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되었지요. 언제인가 아이들 외할아버지가 오셔서 닭장을 치운다고, 이음이 보고 아랫집 할아버지한테 가서 ‘장화 빌려 주세요.’ 라고 (공손히) 말하라고 하니까, 이음이가 ‘우린 친구니까 그냥 달라고 하면 돼.’ 라고 했다는 일도 생각나고, 언덕에 뒷짐을 지고 서서 ‘야, 김종도’ 하고 부르던 아이들 목소리도 그리워요.

 

 

2020. 12. 11

 

‘우리’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몸을 흔들며 엄청 빨리 달려왔어요. 달려오면서 ‘엄청 빨리!’ 라고 소리쳐요.’ 며칠 못 본 사이에 목소리도 커진 듯해요. ‘할아버지, 엄마한테 할아버지(에게) 간다고 했어.’ 라며, 쫄쫄 따라와요. 그 사이 울림이 이음이도 달려왔어요. 뒤뜰 마루에 눕혀져 있는 사다리를 보자, 올라가고 싶은지 ‘저 거.’ 라며 아는 척해요. 지난번에 한 번 타 본 적이 있거든요. 사다리를 세워 주자 한 칸 한 칸 조심스레 올라가더니 마지막 한 칸을 두고 머뭇거려요. ‘올라가 봐. 할아버지가 잡아줄게.’ 라고 부추키니, ‘여기 올라가면 위험해.’ 라며 더는 오르지 않아요. ‘우리’가 ‘위험하다’라는 말을 썼어요! 내려올 땐 맨 아래칸을 밟지 않아 주르르 미끄러졌어요. 울림이에 이어서 이음이도 올라가니, ‘우리’도 다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요. 올라가며 발을 헛디딜 듯해, ‘우리, 너는 발에 눈이 없니?’ 라고 하니, ‘우리’는 어리둥절하며 여기 있다고 하는 듯 손으로 왼쪽 눈을 가리켜요. ‘할아버지는 손에도 눈이 있고, 발에도 눈이 있다.’고 하면서 두 눈을 감은 채 손으로 ‘우리’ 볼을 만져 봐요. 이제 ‘우리’에게도 슬금슬금 장난을 걸어봐요.

사진은, 꼭 한 해 전 ‘우리’ 모습이에요.
 

 

 

2020. 12. 15

 

문을 열고 엄마가 나오고, 이윽고 울림이가 나옵니다. ‘오늘 같이 추운 날도 학교에 가나 보다.’ ‘이음이는 어린이집에 안 가는가 보지.’ 하는 순간 이음이도 나옵니다. 아내가 부엌 창으로 내다 보며, ‘세 마리가 나왔다.’ 하길래, ‘아니, 두 마리지.’ 하니까, 아내는 아이들이 나오자 달려간 우리 집 강아지 단이까지 세 마리라고 합니다. ‘그러네. 우리 강생이(강아지) 세 마리.’ 오늘 ‘우리’는 아빠와 함께 집에 있나 봅니다. 차는 뒤로 나아가더니 방향을 틀어 숲길을 스르르 미끄러지듯 내려갑니다. 나는 가끔 아이들이 떠나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뜰에 나섰다가도 뒤돌아설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시려 와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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