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메일 정리를 하다 결혼식을 준비하며 남편이 보냈던 메일을 발견했다. 주례 선생님이 결혼을 앞두고 고민거리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말씀하셨던 것에 답하는 메일이었다. 날짜를 보니 결혼식 5일 전.

이 메일을 보니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우리 남편은 이때도 걱정이 많았네. 난 순탄하게 진행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우리의 기억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올해로 결혼한 지 벌써 10년 차다. 뱃속에 있던 울림이는 이제 11살이 되었다. 되돌아보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그 시간들이 속절없이 흘러가 버린 것만 같아 조금 슬프다. 

 

우리는 전통혼례로 결혼했다. 겉으로 보는 모습만 전통혼례고 진행은 모두 우리 마음대로 했으니 퓨전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갑작스럽게 준비하게 된 결혼식이었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고민해 왔던 사람들처럼 우리가 하고 싶은 결혼식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 고무신 신고 도시를 누비던 여자와 머리를 허리까지 기르며 전 세계를 누비던 남자가 만났으니 정해진 방식대로 진행하는 것이 성에 찰리가 없었다. 종이를 실로 꿰매어 청첩장을 만들고, 청첩장에 하나하나 편지를 쓰고, 웨딩사진, 옷과 화장, 행사 진행과 계획을 모두 우리가 도맡아 했다. 틀에 박힌 뻔한 결혼식은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하나. 지나치게 소비 중심적인 결혼 문화를 따라가고 싶지 않은 마음 둘. 주변에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많아 그들과 함께 하면 재밌는 것들을 할 수 있겠다는, 그들이 주는 자신감이 셋. 이 세 가지 마음이 우리를 움직이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이런 반골기질의 토대를 만들어 주신 부모님 영향도 컸다. 오랜 세월 노동운동과 교육운동을 하며 살아오신 부모님은 우리의 이런 결정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사실 결혼의 핵심 포인트는 서로 다르게 살아온 두 가정의 만남이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의 가정에 대해 이해나 설득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부모님들이 나와 남편이 만나기 전부터 각별히 알고 지내온 사이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소 갑자기 준비하게 된 이 결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각자 부모님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황바람

 

우리가 연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부모님들이 오랫동안 이어온 '글과 그림'이라는 모임 덕분이었다. 남편과 사귀기 훨씬 전에, 내가 중학생 때 이 모임에서 남편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남편이 아마 20대 초반쯤 됐을 거다. 거기서 나는 나처럼 부모님 따라 놀러 온 어린이 무리에 놀고 있었고, 남편은 어른들 무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까맣고 깡마른 몸에 노랗고 긴 머리. 호주에서 막 돌아와 잼배를 치는 히피 같은 그의 모습은 어린 마음에도 정말이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이상한 모습과 이상한 기억으로 남아 있던 그 사람이 내가 스무 살이 되고 처음 이 모임을 가게 되었을 때. 하필(?) 그때 너무나 멀끔한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마른 몸은 그대로였지만 짧은 머리에(이 부분이 가장 중요했던 것 같다) 잼배가 아닌 DSLR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하필이면 또 그 여러 사람들 중에 20대가 우리 둘 뿐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술에 취해 같이 등을 맞대어 별을 보았고,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대화를 나눈 뒤 번호를 주고받았다.(이 상황에서 남편과 나의 의견이 갈리는데. '먼저 별을 보러 가자고 한 사람(나)'과  '먼저 번호를 따간 사람(남편)' 중에 누가 더 관심이 있었는지에 대해 아직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주고받은 번호로 우연을 가장한 몇 차례의 만남 후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결혼식은 부모님 만큼이나 부모님의 그 모임에서 더 큰 잔치였다. 덕분에 가족들 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적극적인 지지와 응원을 몸소 느꼈다. 사람도 많고 진행도 직접 하느라 정신없는 결혼식이었지만 양가 부모님 모두가 함께 손을 잡고 입장을 하고, 식구들 모두가 나와 함께 율동을 했던 순간들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남편이 살던 아주 작은 자취집에 온 식구들이 모여 율동 연습을 하고, 결혼식 준비를 가장한 술자리, 그리고 모두가 뒤엉켜 잠들었던 그 순간들은 더 기억에 남고. 식중에 내가 편지를 읽다 부모님이 산딸기 따주셨던 이야기를 하며 오열하는 바람에 여전히 친구들에게 '산딸기 뿌엥'으로 놀림받지만 꽤나 즐겁고 만족스러운 결혼식이었다.

 

결혼식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이벤트 기획에 재미와 자신감을 얻은 우리는 그다음 이벤트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적절한 시기에 찾아온 큰 이벤트가 있었으니, 바로 큰 아이 울림이의 돌잔치였다. 우리가 귀촌해 완주에 살게 된 지 1년 차쯤 됐을 때다. 마침 옆동네 전주 청년몰에 작은 식당을 하던 친구를 필두로 음식과 장소가 해결되고, '이렇게 해봐' '저렇게 해봐'하는 옆 사람들의 말에 혹해 생각보다 일을 크게 벌였다. 결혼식 때와 마찬가지로 재주 많은 친구들을 동원하고, 재주 많은 가족들까지 적극적으로 동원했다. 부모님들이 각자 하나씩 노래하고 춤추고 장구치고 시를 읽으니 벌써 행사의 반이 채워졌다. 이곳저곳에서 달려와 준 친구들이 마치 원래 역할이 주어 진 듯 알아서 척척 진행해 주어 어느새 모두가 함께 만든 돌잔치가 되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며 진정한 축하와 응원, 그리고 커다란 지지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 어떤 비싼 선물 보다도 값진 선물이었다. 생각해 보면 선물 같은 이 인연들을 자꾸 보고 싶고 자랑하고 싶어 우리는 이렇게 자꾸 일을 벌이는 걸 지도 모르겠다. 

 

© 노해원

 
가족 이벤트 들을 하나 둘 성공적으로 마치고, 우리의 이벤트 병은 범위를 더 넓혀 지역으로 뻗어 나갔다. 결혼식도 돌잔치도 본래는 사적인 목적을 갖고 있는 행사이기 때문에 함께 하는 친구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 마을, 우리 지역 사람들과 친구들이 함께 즐거울 수 있는 이벤트를 열어 보고 싶었다. 그때 남편과 나, 그리고 내 영혼의 단짝 친구 다솜이가 매일같이 모여 쿵짝대던 청년모임 '다해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이름 앞글자를 따 만든 모임 이름 '다해바'는 '자유롭게 무엇이든 다 해보자'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활동이라 하기엔 너무 사소 했지만 그게 우리의 목적 이기도 했다. 더 사소하고, 더 내밀한 곳으로 향하는. 우리 셋은 여러모로 죽이 잘 맞았는데 특히 잘 맞는 것은 음주가무를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지역에서 락페스티벌을 열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 당시 완주는 이제 막 청년들이 웅성웅성하던 때였다. 완주 CB센터 사무국장님의 도움을 받아 고산시장에서 200만원의 예산을 얻었다. 그 돈으로 낮에는 프리마켓을 열고 저녁에는 락페스티벌을 했다. 우리의 이상을 채우기엔 적은 예산이었지만 지역에 실력 깨나 있는 뮤지션들, 그리고 옷깃만 스쳤던 서울에 유명(우리 입장에서) 인디 뮤지션들까지 염치 불문 열심히 섭외했다. 사실 우리 좋자고 시작했던 일인데 마을 사람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나와 밤늦게까지 행복해하는 모습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이벤트 중독자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여전히 조금의 틈만 보이면 달려들어 마을 예술가 친구들과 공연, 전시, 잡지 만들기 등을 기획한다. 나는 왜 이런 걸 좋아하게 되었을까. 왜 계속 이런 일에 눈이 가고 마음이 가서 자꾸만 움직이게 되는 걸까.
 

© 황바람 / 복태와 한군(선과 영)

 

허례허식이 없는 삶을 살고 싶다. 요즘 글을 쓰면서도 자주 생각한다. 잔뜩 꾸미는 글은 쓰지 말자고. 내가 계속 무언가 기획하는 것도 비슷한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우리답게 만들어 가고 싶다. 허례허식 없이 진심을 담는 일들을 계속 만들어 가고 싶다. 나는 지금까지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산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풍요롭게 살아 본 적도 없다. 그래도 경제적 관념으로 봤을 때는 가난하게 살았던 시절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함 없이 살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가난 속에서도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배워왔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도 그 진심이 닿는 곳. 그곳에서의 풍요를 배우고 느끼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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