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장터를 열심히 뒤져 운동복과 축구화, 운동가방을 샀다. 남편은 그런 나를 보며 '또 시작됐군'하는 표정이다. 나는 덕질이 취미다. 아마 중학교 때 밴드 NELL을 쫓아다니면서부터 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만화 잡지를 샀던 때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런 것들을 기점으로 꾸준히 얕고 넓은 덕력과 맥시멀 리스트 수집왕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 덕질은 그 행위 자체의 즐거움도 있지만 물건, 혹은 그 대상과 쌓이는 추억 때문에 버리지도 끊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세상엔 이쁘고 귀여운 것들이 너무 많고, 그것들이 하나 둘 쌓여 있으면 기분이 좋다.(어디선가 남편의 절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엄마가 되고 덕질하는 것이 더 좋아지고 자랑스러워진 부분도 있다. 아이들에게 무언가 열렬히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왠지 모르게 뿌듯하다. 아이들을 핑계로 덕질의 범위를 쉽고 편하게 넓혀 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두 번째 남편의 절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느 날 남편과 앞으로 아이들이 '어떤 사람으로 크면 좋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남편이 "나는 우리 아이들이 덕후로 컸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했다. '우리가 하고 싶은걸 아이들에게 바라지 말자'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라는 말을 가슴에 깊이 새겨놓은 우리 부부가 아이들에게 바라는 단 한 가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열렬히 마음을 쏟고, 그것으로 보람과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는 것. 그것이 '아이들이 덕후로 컸으면 좋겠다'는 말에 눌러 담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이 대화의 마무리가 여기서 끝났으면 참 아름다웠을 텐데. 언제나 이상한 방향으로 잘 흘러가는 내 마음의 또 다른 소리가 나를 일깨웠다. '그래.(?) 이제 나의 덕질을 아이들에게 물려줄 때가 왔다!' 나의 덕질을 아이들에게 전파하기로 마음먹게 된 것이다.
첫 시작은 만화를 좋아하는 울림이에게 무조건 먹힐 것이라 확신한 슬.램.덩.크! 초등학교 때 몇 개월간 막내 고모네서 살았던 적이 있다. 그때 중학생, 고등학생이었던 친척언니 오빠가 SBS에서 방영하던 슬램덩크를 녹화까지 해가며 보는 것을 옆에서 곁눈질로 따라 보곤 했다. 그것이 나와 슬램덩크의 첫 만남이었다. 매일 온 가족을 공포에 떨게 할 정도로 무섭게 싸우던 언니오빠가 유일하게 좋은 사이를 유지했던 시간이 슬램덩크를 보는 시간이었다. 심지어 야자 시간이 겹쳐 본방사수를 하기 어려운 날에는 서로를 위해 녹화까지 해주는 모습은 적잖은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런 언니 오빠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이 만화를 제대로 보기도 전에 대단한 뭔가가 있다고 느꼈다. 그들이 녹화해 두었던 비디오는 나에게 남아 나 또한 그들처럼 이 농구만화의 세상에 흠뻑 빠지게 만들었다. 그 비디오를 보고 또 보고 만화책도 빌려 보고 대사도 외우고 그림을 오려서 필통에도 붙이고 다이어리에도 붙여가며 열렬히 좋아했다.(참고로 나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정대만을 좋아했다) 울림이를 향한 나의 계략은 정확히 먹혔다. 덕후의 DNA는 대물림이 되는 건지 울림이에게 슬램덩크를 내 준 순간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울림이도 이 만화책을 보고 또 보고 10번 가까이 완독 했다. 뒷 이야기를 더 만들어 달라고 작가에게 편지를 쓸 뻔하고 팬아트를 그리기까지 했다.(울림이는 산왕의 정우성을 좋아한다) 이러다 올해는 슬램덩크만 보겠다 싶어 지금은 '슬램덩크 금지령'을 선언한 상태다.
슬램덩크의 세상에서 잠시 빠져나온 울림이는 요즘 밴드 음악에 빠져 있다. 이번 여름 엄마의 소원성취를 위해 온 가족이 펜타포트 락페스티벌을 다녀왔던 것. 그리고 갑자기 밴드 oasis에 빠진 엄마와 마흔 살 기념으로 일렉기타를 산 아빠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울림이는 펜타포트에서 보았던 크랙샷의 베이스를 보고 마음이 빼앗겨 베이시스트가 되고 싶다고 했다. 무엇보다 나는 이번 펜타포트에서 울림이와 함께 NELL 공연을 봤던 것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비록 중딩 때쫓아다녔던오빠들(NELL)의 모습과는 사뭇달라졌으나여전한 그들의 음악에 첫 번째감동. 내가 열렬히 사랑했던 그들을 이제는 그들보다 더 열렬히 사랑하는 나의 아이와 함께 보고 있다는 것에 두 번째감동. 꽤 오랜 시간 키가 작아 잘 보이지도 않는 그 자리에서 투정 없이 자리를 함께 지켜준 울림이에게 세번째 감동. 반짝이던 그 밤, 일렁이는 그 마음들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덕후와 덕후 아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덕질의 대물림은 이렇게나 아름다운 것이다. 나의 추억과 아이의 추억이 교차 되는 그 순간들이 사랑스럽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나의 덕질을 자랑스러워 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열렬히 좋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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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이의 슬램덩크 팬아트(뒤로 갈 수록 집중력이 흐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