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사진첩을 보니, 꼬박일기에 올리지 않은 것들이 좀 있다.

생각 날 때마다 조금씩 올려야지.

 

이 사진을 보고, 딱 떠오른 제목은. 든든.

앞으로 이 꼬박 삼형제가 기대된다.

 

2019.7.18.

 

2019.10.3.

 

:

아래에 1편이 있으니 순서대로 보세요. [아래 클릭].

(촬영 순서대로 사진만 주욱-)

 

바로가기 > 1편

 

 

 

 

 

 

 

 

 

 

 

 

 

 

 

 

 

 

 

 

 

 

 

 

 

 

 

 

 

 

 

 

 

 

 

 

 

 

 

 

 

 

 

 

 

 

 

 

 

 

 

 

 

 

 

 

 

 

 

 

 

 

 

 

 

 

 

 

 

 

 

 

 

 

 

 

 

 

 

 

 

 

 

 

 

 

 

 

 

 

 

[추가]

세상에,

아래 사진은 해원이 어릴 적이다.

(우리는 나 닮은 줄 알았는데...)

 

 

 

 

 

 

 

 

 

 

 

 

 

 

 

 

 

 

 

 

 

 

 

 

 

 

 

 

 

 

 

 

 

 

 

 

 

 

 

 

 

 

 

 

 

 

 

 

 

 

 

마지막, 이음이가 만든 사람이다.

맨 위가 얼굴(자세히 보면 눈과 코 있음), 중간에 양쪽 팔, 맨 아래 두 다리가 있다.

 

 

 

*메모1_컴퓨터 바꾸고, 모니터 세팅이 좀 달라졌나.. 색감이 애매하네. 조금씩 잡아가얄듯.

*메모2_잔인한 4월을 보내고 있다. 이래저래 집중이 잘 안되는데... 가족으로부터 힘을 얻었다. 감사.

 

 

:

언제 봄날이 좋지 않은 적 있었냐만은,

올해는 남다르다.

초롱산 품에 자리한 아름다운 집과 황우리까지 합류한 꼬박이들 덕택이겠지.

정말 오랜 만에 올리네. 그간 사진을 많이 찍지 못한 것도 있고, 게으르기도 했다. 다시 시작하자.

오래된 카메라이지만, 이렇게 인생을 남길 수 있으니 충분한 도구다.

 

(코멘트도 쓰고 싶은데.. 해원이 글을 기다리자. 이번엔 사진 순서를 철저히 시간 흐름 그대로. pc에서 사진 클릭하면 커져요~)

 

 

 

 

 

 

 

 

 

 

 

 

 

 

 

 

 

 

 

 

 

 

 

 

 

 

 

 

 

 

 

 

 

 

 

 

 

 

 

 

 

 

 

 

 

 

 

 

 

 

 

 

 

 

 

*코멘트 안쓰려 했는데, 아래 울림이 슛팅자세가 너무 마음에 든다ㅋㅋㅋㅋ

 

 

 

 

 

 

 

 

 

 

 

 

 

 

 

 

 

 

 

 

 

 

 

 

 

 

 

 

 

 

 

 

 

 

 

 

 

 

 

 

 

 

 

 

 

 

 

 

 

 

 

 

 

 

 

 

 

 

 

 

 

 

 

 

 

 

 

 

 

 

 

 

 

 

 

 

 

 

 

 

 

바로 보기 > 2편 

:

1.

긴 방학이다.

체력적으로 힘든건 사실이지만 아이들도 나도 각자의 리듬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는 기분이 든다.

아이들은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오히려 싸우는 시간이 덜 하고 같이 재밌게 노는 방법을 터득 해 가는 것 같다.

하루종일 소리 치고 울고 싸우는 날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날은 하루종일 카드놀이 하나로 하루를 보낸다. 

언제나 '경쟁자' 이기만 했던 형제들이 이제는 조금 '동지'가 된 느낌이랄까.

무당벌레 훈련중ㅋㅋㅋㅋㅋ

우리의 아지트

 

 

2.

며칠 전 남편이 벼르고 벼르던 커다란 화이트보드를 사서 마루에 설치 했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무언가 설명 해 주는 것을 인생 최고의 낙 중 하나로 생각하는 남편은 그 행복을 더 극대화 시켜주기 위한 도구로 이 거대 칠판을 구입 한 것이다. 

(오늘 밤에도 자야 하는 아이들을 붙들고 '감옥과 죄수'에 대한 설명을 하느라 30분을 떠드는 바람에 나만 혼자 애먹었다)

남편이 처음 커다란 칠판을 사겠다고 했을 때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막상 집에 설치 되어 있는 이 칠판을 보니 너무나 황바람스러운 이 물체에  웃음이 났다. 

 

그래도 요 칠판이 있으니 아이들도 아빠도 신이나서 마루에 앉아 그리고 쓰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커다란 화이트보드와 함께 할 이야기가 더 다양해졌다. 

(방금도 남편은 아까 자기 전에 (엄마가 말리는 바람에)아이들이게 다 설명 해주지 못 한 무언가를 그려 놓았다.........)

 

 

3.

오늘은 어제 아이들이 밭에 만들어 놓은 돌 화덕에 불을 지펴 마쉬멜로를 구워 먹었다.

어제 드디어 아랫밭 만들기에 돌입해서 풀을 베고 있는데 울림이랑 이음이가 옆에 오더니 둘이서 꿍짝꿍짝 뭔가 신나게 만든다.

해가 다 지도록 안들어 오며 만들던 것이 오늘 아침 보니 돌로 만든 작은 화덕이다.

꼼꼼하게 잘도 쌓았다. 둘이 낑낑대며 저렇게 커다란 돌을 옮겨 화덕을 지켜 볼 의자도 만들었다.

언제부턴가 울림 이음이의 시그니처 포즈

저렇게 열심히 만들었는데, 가만히 두기엔 아까워 작은 불에도 구워먹기 좋은 마쉬멜로우를 구워 먹자고 아이들과 약속했다.

낮엔 볕이 뜨거워 해질 무렵 하기로 하고 밭일을 하는데 아이들이 옆에 와서 "파이어~ 파이어~" 노래를 부른다.

슬슬 시작하기에 앞서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도 초대 하자고 했더니 벌써 초대 했단다ㅎㅎ

 

초대 손님들을 모시고 저 쪼그만 화덕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젓가락에 마쉬멜로우 하나씩 꽂아 구워 먹는다.

우리도 옆에서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유기농 곰돌이 젤리를 젓가락에 꽂아 먹는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신나게 먹었다. 조그만 화덕이지만 나름 화력이 좋다. 

아이들 덕분에 즐거워진 어른들은 다음에 한번 날 잡고 화덕을 더 크게 만들어 생선도 구워먹고 소세지도 구워 먹자고 했다.

곰돌이 젤리 굽는 우리ㅋㅋㅋ

 

그나저나 저기 밭으로 써야 되는데 아까워서 어떻게 옮기지...

 

 

4.

이건 얼마전에 아주 오랜만에 열폭 했던 나의 감정의 쓰나미 기록.

2020. 3. 19
어제 밤 오랜만에 이음이에게 크게 화를 냈다. 어른들이 늘 별거 아닌 일로 싸우듯, 아이에게 화를 내는 것도 어느날 별거 아닌 일로 화를 내게 된다. 어제가 그랬다. 이를 닦기 전 캬라멜을 먹겠다고 하는 이음이. 안 된다고 하는 엄마. 결국 이음이는 대성통곡을 나는 신경질. 이음이가 캬라멜을 먹겠다고 하기 전 이미 만화 예고편 귀파기 등을 하면서 시간이 많이 흘렀고 평소보다 취침 시간이 늘어지니 점점 지쳐갔다. 남편은 바빠서 없었고 저녁도 못 먹은 나는 배도 고프고 신경이 더 예민해 져 있었다. 울고 불고 하는 이음이에게 소리치고 강압적으로 달랜 후 결국 내가 원하던 대로 캬라멜을 먹지 않고 이를 닦이고 자려고 누웠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너무 못나서 눈물이 핑 돈다. 사실 귀도 내가 파주고 싶어서 파줬고, 평소에는 이 닦기 전에 먹고 싶은거 다 먹게 해 줬는데 갑자기 내가 어른이라고 아이에게 강압적으로 소리치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 내가 너무 못나고 속상하고 미안했다. 아이들이 책을 고르는 사이 몰래 훌쩍거리고 있는데 이음이가 와서는 미안하다고 한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오히려 이음이가 놀라 “엄마 울어?”라며 내 눈을 쳐다본다. “이음아 엄마가 더 미안해. 귀도 엄마가 파주고 싶어서 파주고 평소에는 먹으라고 했었는데 엄마 힘들다고 안된다고 하고 엄마가 어른이라고 무섭게 해서 정말 미안해...” 조용히 방에 있던 울림이가 슬 나오니 이음이가 달려가 “형아~ 엄마 운다~?” 하고 말하니 울림이가 나지막히 말한다. “알아 듣고 있었어” 사실 울림이는 이음이 보다 내가 훌쩍이고 있는걸 먼저 알고 있었다. 내 눈에 눈물이 잔뜩 고여 있는걸 보더니 방으로 슬쩍 들어가서 책보는 척 하며 상황이 마무리 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아까 내가 이음이에게 소리치고 방으로 들어와 있을때에도 마루에서 울고 있는 이음이에게 울림이가 열심히 달래줬었다. “이음아- 어떻게 하고 싶어서 그래? 지금 먹고 싶어서? 그냥 내일 먹자. 내일 먹고 지금 빨리 가서 엄마한테 이 닦아 달라고 해~ 응? 이음아~”라며 계속 이음이를 설득했다. 부쩍 커버린 울림이도 기특해서 꼭 안아 주며 고맙다고 했다. “울림아 정말 고마워. 아까 이음이도 달래주고 엄마 우는 것도 모르는 척 해줘서"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던 우리도 옆에서 이제야 안심이 되는 듯 웃는다. 

이 글은 읽을 때 마다 그날 느낀 감정이 생생해서 마음이 몽글몽글하고 눈물이 난다. 

나는 아이들 덕분에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5.

 

코로나와 그로 인해 길어진 방학으로 아이들과 부대끼며고 아웅다웅 지내며 지칠때도 있지만,(딱 3시간 정도 만이라도 혼자 카페에 가서 글 쓰고 싶다)

한편으로는 늘 마음에 품고 있었지만 막상 용기 내지 못했던 '학교도 어린이집도 안 보내며 아이들과 함께 지내기'를 실현할 수 있어 즐겁다.

 

아- 언제나 언제나 사랑스러운 나의 꼬박이들.

간만에 꼬박일기에 꼬박이들 이야기를 적었다.

역시, 세상에서 자식 덕질이 제일 재밌다!

 

 

:

2월 20일은 우리 생일, 21일은 이음이의 생일이다.

그런데 마침 올해는 아랫집 할아버지의 생일도(음력 이여서 매해 바뀌는데 올해는) 2월 20일!

생일 파티겸 간만에 아랫집 윗집 식구들 모두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

 

조금씩 준비해서 만나자고 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진수 성찬이다.

아랫집에서는 파스타(크림-토마토 두가지 맛!)와 챱스테이크, 닭봉, 유부초밥을.

우리집에서는 셀러드와 약밥, 홍합스튜, 그리고 생일 케이크를 구워 갔다. 

어느 패밀리 레스토랑 못지 않은 메뉴와 맛에 행복한 마음으로 함께 식사를 하고 케이크에 초를 불었다.

 

 

생일 파티를 하러 가기 전에 할아버지는 뭘 좋아하실까 같이 고민 하는데

울림이 이음이 모두 "할아버지는 우리들 그림을 제일 좋아하지~!"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리고는 울림이가 갑자기 하나 더 생각이 났는지

"아! 할아버지 밀크 캬라멜 좋아해!"라고 한다.

"할아버지 집에 밀크 캬라멜이 많은데 이거 삼촌거냐고 물어보니까 삼촌이 할아버지가 좋아신다고 했었어"라며ㅎㅎ

하지만 그건 이미 할아버지네 많이 있다는 아이들 말에 다같이 문구점에 가서 찾아보기로 했다.

어른들이 이례적으로 주고 받는 선물을 내가 사서 드리는 것 보다

작고 소소하더라도 아이들의 눈으로 직접 고른 선물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구점에 들어가 이곳저곳 둘러보고 있는데 한참을 둘러보던 울림이가 여기 귀여운 향초 있다며 나를 부른다.

알록달록 귀여운 과일 모양에 향초들이다. 울림-이음-우리가 하나씩 드리면 좋을 거 같아 각자 하나씩 골랐다.

그걸로는 아쉬워 이음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피카추 그림이 그려진 연필 세트를,

울림이는 색연필과 연필을 바꿔 낄 수 있는 알록달록한 연필-색연필 세트를,

우리는 빤짝이가 잔뜩 붙어 있는 작은 수첩을 하나씩 골랐다.

 

선물을 준비하고 나니 아이들이 아니면 줄 수 없는 이 선물들이,

포장해서 드리기 직전까지 자기가 같고 싶다며 마음에 들어 하던 것들을

"그래도 할아버지 생일 이니까"라며 큰맘 먹고 전하는 그 마음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드리면서 본인들도 기대가 됐는지 주는 사람들이 꺅꺅 거리며 더 난리다.

선물을 뜯고 나서도 이건 어디에 쓰고 어떻게 쓰는거라며 신나게 설명한다.

할아버지도 그런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는지 "이런 선물은 평생 처음이다~"라시며 웃으신다.

 

울림이랑 이음이가 할아버지께 직접 그린 카드도 하나씩 드렸다. 

울림이는 할아버지 사진을 보고 열심히 그리더니 정말 비슷하게 그렸다.

할아버지도 "내 머리카락이 세가닥이냐~!"라며 장난스레 말씀 하시면서도 울림이가 이렇게 자기를 그려 준건 처음이라며 좋아하셨다.

 

선물 전달식을 마무리 하고 오랜만에 윗집 아랫집 식구들 다같이 둘러앉아 술 한잔 하며 도란도란 즐겁게 이야기 나눴다.

특히 삼촌이랑 남편까지 이렇게 다같이 모인게 오랜만이어서 평소와는 조금 색다른 느낌.

 

대화 중에 내가 '삼촌이 워낙 깔끔한 성격이어서 아이들이 자주 놀러와서 힘든일은 없냐고, 혹시 집에서 내가 지도해야 할 일들은 없겠냐'고 물었는데

"그건 아이들과 저의 일이라서요"라는 삼촌의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삼촌도 아이들과의 불편함 지점을 나에게 말하신적이 한번도 없었다.

아이들이 불편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기 보다 그 문제를 늘 아이들과 직접 해결하려고 하셨던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올해는 신기하게도 양력인 내생일과 음력인 할머니 생신이 또 하루 차이가 되어

겸사겸사 우리 엄마 아버지가 오셔서 하루, 또 우인이 언니가 와서 하루 함께 만나 저녁을 먹었다.

 

내 생일 날 아침에는 엄마랑 아버지가 아랫집 할머니할아버지네서 아침을 먹게 되었는데,

할머니가 엄마에게 해원이 낳고 키우느라 고생 많았다며 제일 큰 조기를 구워주셔서 너무 큰 감동을 받드셨다고 했다.

이런 대접은 생전 처음 이라며...

매번 드리는 것 보다 받는게 많아 죄송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할머니 생신에는 부담 드리고 싶지 않아 몰래 선물만 드리려고 했는데(지난번 할아버지 처럼).

준비한 선물을 빨리 알리고 싶던 아이들의 엉덩이가 들썩들썩 입이 간질간질 하는 바람에 진즉에 다 들통나고ㅋㅋㅋ

나중엔 오히려 내가 케익이랑 이쁜 꽃다발을 선물 받아 버렸다ㅠㅠ 

 

 

(거의 반 강제로) 나도 아이들과 남편에게 귀여운 선물들을 받았다.

울림이의 편지에는 눈물까지 찔끔 났던.

길었던 생일만큼 오래도록 행복했던 날들 이었다: )

 

:

1.

내친 김에 마구 옮겨 본다.

그러다 보면 내 글도 마구 쓰게 되겠지.

 

2.

2019.6.10

‘모자를 한 것 같아.’ 지칭개 작은 꽃봉오리 앉은 무당벌레 를 보고 이음이가 한 말입니다. 그러더니 할아버지한테 앉고 싶다며 풀을 뽑고 있는 내 무릎에 앉습니다.
나 : ‘내 무릎에 모자를 했네.’
이음 : ‘그건 아니지. 머리에 해야지.’
나 : ‘그럼 이건 뭐라고 하지?’
이음 : ‘이건 합체한 거지.’
요즘 이음이는 어린이집에 잘 가지 않습니다. 형 울림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곤 곧바로 우리 집으로 달려옵니다.
무릎에 앉힌 채, 요즘 형과 많이 싸우지 라고 묻자 처음엔 아니라고 하더니, 조금 싸운다고 합니다. 동생 우리는 자꾸 쫓아오고 형 울림이는 저 멀리 달아나고, 가운데에서 이음이는 제 나름대로 힘들어 하는 듯 보입니다.
개망초와 민들레도 서로 친척이라며 두 손을 다리는 꼭 붙여 움직이지 못하는 풀 흉내를 내거나, 공벌레 흉내를 내며 허리를 굽히는 이음는 여전히 귀엽습니다.

 

6.12

‘우인이 이모하고 지우 삼촌은 어릴 때 왜 싸우지 않았을까?’ 아이들을 앉혀 놓고 묻자, 울림이가 ‘두 개 있어서.’ 라고 대답합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해 다시 묻자, 울림이는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습니다. 그제사 생각이 났습니다. 똑같은 게 두 개씩 있으니 서로 가지려고 싸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울림이와 이음이는, 모종삽도 호미도 물조리도 망치도 킥보드도 자전거도 똑같은 걸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야, 우인이 이모는 여자아이고 지우 삼촌은 남자아이라, 노는 게 달랐기 때문이야.’
언제인가 이음이가 울면서 ‘나는 형이 하는 거 다 하고 싶어.’ 라고 소리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울림이는 동생이라고 마냥 양보만 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우인이한테 늘 네가 누나이니 양보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동생과 나이 차이가 한 해 보름밖에 나지 않는데, 그 일을 생각하면 우인이한테 참 미안합니다.
동생이라고 무턱대고 양보하지 않는 울림이는, 여섯 살 차이가 나는 막내 우리에게도 무엇을 빌릴 때는 먼저 우리의 생각을 물어 봅니다.
모든 것을 형처럼 하고 싶은 이음이는 형이 너무 좋고 세상에서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너, 평생 안 놀아 준다.’는 울림이의 말이 이음이에겐 무엇보다도 무섭게 느껴졌을 테지요.
요즘은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음이도 ‘할아버지, 평생 안 놀아 줄 거야.’ 라며 나에게 겁을 줍니다.

 

6.14

아침을 먹는 나를 기다렸다가, 밥을 다 먹자마자 이음이는 내 손을 끌고 안방으로 갑니다.
‘할아버지, 텔레비전 보자.’ ‘안 돼.’ ‘바둑 볼게.’
이음이는, 가끔 내가 바둑을 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바둑을 조금 보다말고 이음이는 혼잣말로, ‘만화 보고 싶은 기분이 난다.’ 고 합니다. 단단히 잠가 둔 내 마음이 스스르 풀립니다.
우인이와 지우는 어릴 적에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자랐습니다. 저녁이면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어주거나 촛불을 켜서 그림자놀이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얼마 전에 우인이에게 어떻게 영어 선생이 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우인이는, ‘아마 어릴적 음악을 들으며 소리에 집중할 수 있어 그러지 않았을까.’ 하고 대답합니다.
오늘도 낮에 놀러와 이음이는 텔레비전을 보자고 조릅니다. 엄마가 왜 텔레비전을 보지 말라고 할까 라고 물으니, 눈이 나빠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아는 것으로 꽉 차 있는 이음이 머리가 조금씩 비워져.’ 라고 하니, 이음이는 텔레비전을 조금 보다가 머리가 비워졌나 만져보라고 합니다.
이음이 큰 머리를 두손으로 어루만지며 약간 가벼워진 것 같다고 하니, 이음이는 조금 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스스로 텔레비전을 끄고 일어섭니다.
사진은, 늘 우리 집 나무난간 아래 놓여 있는 아이들 킥보드와 자전거입니다.

 

6.15

‘머라고(뭐라고)?’ 이음이가 자주 쓰는, 경상도 억양이 묻어나는 이 말투는 아무래도 엄마에게서 온 듯합니다.
이음이가 쓰는 말이 하도 귀여워 그대로 적어 두기도 합니다.
‘호도독호도독’은 빨리 달리는 시늉을 할 때 쓰는 말이고, 원숭이를 흉내낼 땐 ‘우끼우끼’ 라고 합니다.
더러 내가 못 알아들으면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는, 이음이가 책에서 본 ‘흰머리독수리’라는 말을 내가 얼른 알아듣지 못하자 ‘흰 색깔 할 때 흰이라고 해 봐.’ 라며 보기를 들어 쉽게 알려줍니다.
이음이가 혼자 만들어 쓰는 말도 있습니다. 홀쭉이라는 말을 모르는 이음이는, 뚱뚱이라는 말에 맞서는 낱말로 ‘얇은이’이라는 말을 씁니다.
‘얇은이’라고 할 땐, 엄지와 검지를 거의 붙을 듯이 사이를 떼어 요렇게 라며 몸짓으로 보여줍니다.
사진은, 부엌 앞뜰에 핀 산수국입니다. 눈부시게 피었다가 가슴 서늘히 지는 꽃도 있지만, 산수국처럼 소리없이 조용히 피었다가 지는 꽃도 있습니다.

 

6.18

날이 어둑어둑하면 재넘이(산바람)가 산꼭대기에서 내려오고, 굴뚝 연기 자욱이 깔릴 무렵이면 슬금슬금 도깨비들이 나타납니다.
문을 열고 빼꼼히 내다보던 막내 ‘우리’ 도깨비가 돌계단을 구르듯 내려오고, 이어 꽥꽥 소리 지르며 이음이와 울림이 도깨비가 튀어나옵니다.
한바탕 귀여운 도깨비들이 뛰놀고 간 마당에는 부지깽이나 몽당비 대신 킥보드와 자전거가 나뒹굴고 있습니다.

 

6.24

‘동자꽃이 피었네.’ ‘하얀 동자꽃도 피기 시작했어요.’ 새벽이면 아내와 내가 주고받는 인사말입니다.
초롱산을 넘어온 해는, 아이들이 사는 지붕에서 우리 집 뜰로 눈부신 햇살을 쏟아붓습니다.
마당 가득 햇살이 번질 무렵 아이들이 하나둘 집에서 튀어나옵니다.
울림이와 이음이는 ‘할아버지, 할머니’ 크게 소리쳐 부르고, 막내 우리도 ‘어어’라며 반갑게 소리를 지릅니다.
막내 우리는 물장난과 손수레(밀차) 타는 것을 좋아합니다. 손수레에 다가가 한 발을 올리면, 태워 달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태우고 산길 한 바퀴를 돕니다. 비탈을 내려가다가 손으로 뽕나무를 가리키면 오디를 따 우리 입에 넣어줍니다.
울림이는 거의 저녁에 머리를 감기 때문에 가지런히 빗어도 자고 일어나면 오른쪽 머리칼이 치뻗어 있습니다.
‘너희 반 여학생 다 죽었다. 멋진 머리칼에 반해.’ 내가 놀리면, 울림이는 아니야 아니야라고 하면서 해죽이 웃습니다.
햇살 가득한 아이들은 어디에도 그늘이 없습니다.

 

6.25

‘튀겨 먹든지 놓아주든지 할아버지 좋은 대로 해.’
풀밭에서 잡은 홍그래비(방아깨비) 새끼를 내 손에 쥐어 주며, 이음이가 하는 말입니다. 말투나 표정이 아빠를 닮았습니다.
이음이는 신발 속에 흙이나 모래가 들어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럴 땐 내 무릎에 앉히고 신발을 털어 줍니다.
형 울림이가 세상에서 가장 멋있다고 말하지만, ‘내 사랑을 받아주세요.’ 라며 날마다 엄마한테 풀꽃을 꺾어 바치는 이음이도 참 사랑스럽고 마음이 따뜻한 아이입니다.
얼마 전엔 식구들이 있는 자리에서 ‘할아버지는 바보’라고 하길래, 비밀인데 어떻게 알았냐고 했더니, 할아버지 마음속에 들어가 보았다고 합니다.
마음속에 들어가 보니, 할아버지는 심술이 네 개 있고, 할머니는 착한 것이 일곱 개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내가 들려준 놀부의 오장칠부 이야기에서 따온 듯합니다.)
걸핏하면 ‘할아버지 싫어.’ ‘나, 집에 갈거야.’ 라며 나를 놀리고 겁을 주지만, 이음이는 내 무릎에 앉는 걸 좋아하고, 집에 갈 때는 꼭 내 등에 업히거나, 가슴에 안겨 갑니다.

 

6.28

‘할머니,할머니’ 팔짝팔짝 뛰며 이음이가 소리지릅니다. 아내는 가슴 설레면서도 마음 한켠으로 살짝 두려움 같은 것이 스쳐간다고 합니다. ‘내가 정말 잘 살고 있는 건가?’ 하루 동안 보지 못했는데 저리 온몸으로 반갑게 맞이하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손수레에 태우고 산길 두 바퀴를 돌았습니다. 이제 마음이 조금씩 이어지나 봅니다.
으름나무 잎을 따서 건네주니, 나뭇잎으로 내 얼굴을 간지럽히며 장난을 칩니다. 숲 그늘 아래를 지날 때, 내가 ‘아이, 시원하다.’고 하면 저도 따라 ‘음음’이라고 소리냅니다.
막내 우리는 비탈진 언덕에서 킥보드나 자전거를 굴려 놓고 뒤따라가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킥보드는 혼자 굴러가다 풀섶에 쓰러지고, 우리는 소리를 지르며 구르듯이 그곳으로 달려갑니다.
넘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 뛰어가는 우리를 뒤쫓아가거나 먼저 달려가 앞에 섭니다. 우리는 달려와 서있는 내 다리를 꽉 붙잡습니다.
나는 다시 앞으로 달려가고, 멀리서 울림이가 달려오고 이음이가 달려오고 뒤따라 우리가 달려오고, 나는 몸을 낮춰 아이들을 안은 채 뒤로 넘어집니다. 세상을 다 안은 듯합니다.

 

7.1

막내 우리가 제 키를 훌쩍 뛰어넘는 긴 고추막대를 어깨에 멘 채 질질 끌고 다닙니다. 곁을 살피지 않고 앞만 보고 다니니까, 다치지 않으려면 옆 사람이 비껴나야 합니다.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막대기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우리를 보고, 아내가 ‘아무것도 모르니 힘이 세구나.’ 라고 합니다.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내가 이음이에게 ‘너, 저번에 할아버지 보고 바보라고 했지. 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힘이 세다고 하잖아.’ 라고 하니, 이음이는 아니라고 아니라고 거듭 우깁니다.
그러다가 내 품에 안겨 있던 이음이가, 뜬금없이 ‘할아버지, 시장이 뭐야?’ 라고 묻습니다. 마음속으로 ‘시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곳, 또 배가 고프다 라는 뜻도 있고’ 하면서 말을 꺼내려는데, 또다시 ‘사람이 뭐야?’ 라고 묻습니다.
‘사람, 뭐라고 해야지?’ 하는 순간, ‘꽃이 뭐야?’ 라고 묻습니다.
그제서야 눈치 챘습니다. 이음이는 ‘시장, 사람, 꽃’ 들이 무엇인지 모르니, 제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 하면서 얼굴을 마구 부비니까, 나를 놀린 게 재미있는 듯 자지러지게 웃습니다.

# 뒷이야기
오늘 아침 이음이를 만났습니다. 뒤란에서 땄다는 블루베리 한 알을 보여 주길래, ‘그게 뭐니?’ 라고 물어 보니, ‘그것도 몰라. 블루베리지.’ 라고 합니다.
나 :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블루베리를 어떻게 알아?
이음 : 자고 나니까 머릿속에 생겨났어.

사진은, 한 해 전 이음이 모습입니다.

7.6

텔레비전 속 만화영화에 빠진 이음이에게 슬그머니 장난을 치고 싶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음이가 너무 좋아.’ 하며, 앉아 있는 이음이를 부둥켜안고는 침대에 쓰러졌습니다.
넘어지면서도 이음이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마치 나를 타이르듯이 ‘나를 좋아하면 잘해 줘야지. 만화영화 볼 땐...’ 이라며, 만화영화 볼 땐 가만히 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나는 맥없이 이음이를 껴안은 손을 놓습니다. 이제는 이음이에게도 말이 밀립니다.

사진은, 이음이 할아버지가 보내주셨습니다.

 

7.7

‘할아버지’ ‘할머니’ 울림이가 부릅니다. 날은 어둑해지고 터덜터덜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나와 아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목청껏 소리칩니다.
‘어’ 하며 보이지 않는 울림이에게 소리질러 대답합니다. ‘어’는 막내 우리가 나를 부를 때 내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아내는 가슴이 뛴다고 합니다.
‘울림이가 무엇을 보여 주고 싶은가봐.’ 끌고 가던 손수레를 세워두고 아내와 나는 작은 언덕을 오릅니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울림이는 내 손을 끌고가 나무 난간에 세웁니다. ‘아, 노을을 보여 주고 싶었나 보구나!’
‘조금 전엔 더 예뻤어요.’ 곁에 있는 엄마 말을 들으니, 울림이와 이음이, 우리를 안은 엄마가 나란히 서서 노을을 보고 있었나 봅니다. 곧 큰바람이 오려는듯 서쪽 하늘이 참 곱습니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강아지풀로 콧수염 만드는 걸 가르쳐 주고, 나는 내게 달려와 무릎을 꼭 붙잡은 우리를 두 팔로 들어올립니다.
내 품에 안긴 우리는 작은 두 손으로 내 볼을 만집니다. 울림이와 이음이는 내 두 손에 입맞춤을 하며 밤새 헤어지는 인사를 합니다.

 

7.22

비닐하우스에서 마늘을 다듬어 엮고 있는데 이음이가 찾아왔습니다. 내 곁에 앉으려는 이음이를 보고 아내가 ‘먼지가 나서 어떡하니.’ 라고 하니, ‘괜찮은데 어떡하니.’ 라며 장난스레 맞받아칩니다.
이윽고 울림이가 뒤따라 들어와선 손에 쥐고 온 숫자가 적힌 딱지로 카드놀이를 하자고 합니다. 할머니는 일해야 하니까 우리 셋이 하자고 하니 짝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늘 그렇듯 울림이는 이음이와, 나는 아내와 편을 먹고 놀이를 합니다.
한 장씩 내어 엎어 놓고 숫자가 큰 사람이 나머지를 가져가는 놀이입니다. 내가 17을 내자, 울림이가 얼른 뒤집어 보곤 이음이한테 19를 내라고 합니다.
내가 ‘그건 반칙이야. 가르쳐 주는 게 어딨어.’ 라고 하니, 옆에서 이음이가 ‘어차피 숫자를 모르는데.’ 라며 남의 이야기하듯 합니다. 이음이 저는 숫자를 모르니까 형이 가르쳐 줘도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입니다.
밥 먹으라고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울림이는 집으로 가고, ‘싫어.’ 하며 이음이는 나보고 다시 카드놀이를 하자고 합니다.
이음이 제가 나누어 준다며 카드를 섞으며 ‘나는 할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는 내가 되고...’ 혼자말을 합니다. 이음이 말을 제대로 받아 적지는 못했지만, 이음이는 할아버지 마음이 되어 내가 이기도록 숫자가 큰 카드를 골라 나눠준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아직 숫자를 읽지 못하지만, 날마다 놀이에서 지는 나를 가엾이 여겨 이리저리 카드를 고르는 이음이 모습은 그대로 한 떨기 사랑스러움입니다.
비닐하우스 아래 개망초 꽃너울이 흘러 넘쳐 내 마음 둑이 와르르 무너지는 저녁입니다.

 

7.25

‘할머니’ 하고 이음이가 비닐하우스에 들어서자, ‘우야’ 하며 아내는 이음이는 꼭 껴안아 줍니다.
‘오랜만에 칼싸움 한 번 해 보자.’ 라는 이음이 말에 작은 대나무 막대기로 서로 찌르고 막고 놀고 있는데, 울림이가 뒤따라와 카드놀이를 하자고 합니다.
‘어차피 숫자도 모르는데.’ 오늘은 내가 먼저 이음이 말을 흉내냅니다. 이 말을 하면서 속으로 이음이가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움찔했는데, 이음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생각에 잠겼다가 ‘어제부터 계속해서 생각했는데’ 라고 합니다.
어제부터 계속 생각해서 숫자 읽는 걸 알아냈다는 것입니다. 귀여운 장난말이지만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카드놀이를 시작합니다.
그나저나 카드놀이는 우리가 질 게 불보듯 뻔합니다. 울림이는 미리 카드를 골라 19 같은 큰 숫자는 제가 가지고, 우리에게는 10보다 낮은 숫자를 나눠 주는 까닭입니다.
울림이는 남에게 지는 걸 무척 싫어 합니다.

엊그제도 나는 아무 잘못이 없었습니다. 수돗가에서 물장난을 하다 울림이가 이음이 바지에다 호스로 물을 뿌렸습니다. 두어 차례 물을 뿌리자 이음이도 참지 못하고 발로 울림이를 찼습니다. 이음이 발은 비껴나갔지만 울림이가 일어나 다시 이음이를 차려고 해서, 나는 얼른 이음이를 안고 피하며 공을 차듯 울림이 엉덩이를 차는 시늉을 했습니다.
울림이는 물조리개에 물을 담아 나에게 뿌리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건 그러려니 하지만, 이음이도 형을 따라 작은 물조리개에 물을 담아 나를 쫓아오는 것입니다. 늘 일어나는 일이지만 무척 억울합니다.
이리저리 물을 피해 주강사님 집까지 달아났습니다. 마침 그곳에 바깥수도가 있어 호스를 찾아 울림이에게 마구 물을 뿌렸습니다. 형이 물을 맞으니까 이음이는 막대기를 들고 나에게 대어들고, 울림이는 우두커니 선 채 속이 상해 어쩔줄 몰라 합니다.
쫓아오는 울림이를 피해, 나는 뒤따라온 우리를 안고 숨가쁘게 뒷길로 달아났습니다.
집에 와서도 울림이는 수돗가 호스로 나에게 물을 뿌립니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내게는 닿지 않고 성이 풀리지 않은 물줄기는 오히려 울림이를 적시고, 우리는 분수처럼 흩어지는 물을 맞으며 마냥 좋아합니다.
보다못한 아내가 나를 붙잡아 울림이 앞에 세우고, 울림이는 실컷 내게 앙갚음을 합니다.
그제야 속이 풀렸는지 집으로 뛰어올라가 울림이는 엄마에게 자랑하듯 떠벌립니다. 아마 내게 이겼다고 말하겠지요.

 

7.28

‘애기 낳는 거 그 거 해보자.’ 라며 이음이는 내 런닝구를 들추고 뱃속으로 들어가 한참 꼬물꼬물거리더니 밖으로 나옵니다. ‘야, 아기가 태어났구나!’ 하는 내말에 이음이는 지팡이 짚는 시늉을 하며, 태어나자마자 할머니가 됐다고 장난을 칩니다. 갑자기 오래전에 하던 애기놀이가 생각났나 봅니다.
지난 겨울에는 응애응애 기어다니며 애기놀이를 자주 했는데, 요즘 이음이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오줌을 누다가도 내가 가까이 가면 눈을 감으라고 합니다.
오늘도 이음이와 울림이가 만화영화를 보고있는데, 내가 지나가는 말로 ‘너희들 만화 본다고 오줌 마려운 거 참고 있지.’ 하니까, 이음이는 정말 그렇다며 손으로 고추를 쥐고 있습니다.
잠깐 텔레비전 끄고 오줌 누고 오라니까 울림이가 안 된다고 하고, 물병을 가져다 준다고 하니까 이음이는 부끄러워서 안 된다고 합니다.
실랑이를 벌이다가 끝내는 방구석에서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린 채 이음이는 세숫대야에 오줌을 누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들려준 ‘나의라임오렌지나무’란 소설이 생각 납니다. 서부영화를 보다가 오줌이 마려워 극장 벽에다 오줌을 눈, 그마저도 제제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오줌을 눠 다시는 극장에 들어오지 말게 했던 이야기.

 

8.24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거나 어디에 갔다오면, 보이지 않는데도 마당에 서서 ‘할머니, 할아버지’ 크게 소리쳐 부릅니다.
언제인가부터 울림이는 이른 아침 잠옷을 입은 채 밖으로 나와 윗밭으로 올라옵니다. 헝클어진 머리칼, 입가엔 침 흘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혼자 일어나 오줌을 누고, ‘우리’가 자는 방에도 가보았다고 합니다. 꿈 꾼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가끔은 참깨 밭 그늘 아래에서 내 무릎에 앉혀 울림이가 가져온 그림책을 읽어 줄 때도 있습니다.
며칠 전부터는 이음이도 함께 데리고 나옵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 혼자 눈 떠 마주하는 세상은 아이들에게 어떤 모습일까요.

 

8.25

‘우리 반에 은진이라는 여자아이가 있는데 꾀를 부렸어.’ 마당에서 풀을 매고 있는데 이음이가 말을 건넵니다. ‘무슨 꾀를 부렸을까?’ 궁금해서 물으니, 은진이가 마이쭈를 준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집에 있다고 했답니다. 이음이는 그 일이 참 서운했나 봅니다.
어제는, 미끄럼틀에서 이음이를 떠민 우상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안되겠다. 할아버지하고 사탕 한 보따리를 사서 우상이를 찾아 가야겠다’고 하니, 이음이가 ‘단 거 많이 먹어 이빨 다 빠지게.’ 라고 해서 한바탕 웃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거나 집에서 쉬는 날엔 아이들은 흙이나 벌레, 풀이나 나무하고 놉니다.
오늘 아침엔, 날개가 이슬에 젖어 죽은 듯 보이는 배치레잠자리와 톡톡 튀는 송장메뚜기를 가지고 놀았습니다. 울림이는 송장메뚜기를 손에 쥐고 메뚜기가 얼굴에 가면을 썼다고 하고, 이음이는 이제 놓아 주라고 합니다.
조금 시간이 흘렀을까. 오무리고 있는 이음이 손엔 공벌레 대여섯 마리가, 울림이가 든 바랭이풀 이파리엔 민달팽이가 매달려 있습니다.
부드러운 모래와 새 깃털, 상수리 열매 껍질과 말라죽은 지렁이를 가지고 놀고, 달개비 풀과 부들 이름도 아는 아이들, 나는 풀섶에 떨어진 귀뚜라미 뒷다리를 보아도 얼른 아이들부터 찾습니다.

 

8.27

‘너희 학교에선 장난이란 과목도 배우니?’ 내가 묻자, ‘아니.’ 하고 배시시 웃는 울림이 얼굴에는 다글다글 장난기가 붙어 있습니다.
아내가 꽃밭에 물을 주고 있는데 이음이한테 몰래 수도꼭지를 잠그게 하고는 시치미를 떼고, 내 머리에 모래를 뿌리고 달아나는가 하면, 그제는 아이들이 오르내리는 돌계단에 풀을 매는 내 쪽으로 오줌을 누었습니다.
‘밤에 살그머니 장난요정이 귓속으로 들어갔나 보다.’ 라고 해도 귓등으로 듣는 듯합니다. 하지 말라는 건 끝내 하고야 맙니다.
이제 울림이는 어른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제 눈으로 보고 제 손으로 만져 세상을 배우고 있습니다.

 

8.28

이음이가 싫어하는 냄새 가운데 하나는 치과의사 선생님이 끼는 장갑 냄새입니다. 이음이가 생각하는 엄마의 가장 예쁜 모습은, 이음이가 꺾어 온 꽃을 든 빨간 치마를 입은 모습입니다.
한 해 동안 아이들과 뒹굴다 보니, 아이들 속살 보드라운 마음결을 어느 만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울림이가 화가 났을 땐 이치에 맞게 찬찬히 이야기하면 풀리고, 이음이가 토라졌을 땐 먼저 다친 마음부터 안아줘야 합니다.
울림이는 총명하고, 이음이는 눈물 많고 마음이 따스한 아이입니다.
아이들 보여준다고 아내는 죽은 풀벌레를 벽돌 위에 얹어 놓고, 나는 아침부터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아이들이 궁금히 여기는 ‘거미’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8.31

정작 서울에는 왜 갔는지 생각나지 않는다는 울림이를 네 차례나 다그쳐 답을 알아냈습니다.
어제도 울림이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 가서 자고 왔는데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친할머니가 옆방에서 잤고, 외할버지가 숙소 가는 길을 일곱 번이나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오늘 아침엔 그림을 그려가며 외할아버지가 어떻게 길을 잃었는지와 남산에서 케이블카를 탄 이야기를 하고, 서울에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스티커를 자랑했습니다.
그제는 아빠 졸업식(학위수여식)이 있어 서울에 갔는데, 울림이는 그 일보다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옆방에서 자고, 외할아버지가 길을 헤맨 것이 마음에 깊이 남았나 봅니다.
하루 못 봤는데 우리가 쑥 자란 것 같습니다. 걸음걸이마저 여유가 느껴집니다.

 

 

:

1.

요 근래 글이 쓰고 싶어 근질근질 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상황이, 손이, 몸이, 머리가 온갖 핑계를 대며 쓰지 못하고 있다.

사실 최근에 많은 일들과 많은 생각이 복잡하게 영켜 글로 잘 풀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에 턱턱 막혔던 것도 같다.

잘 하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왜 매번 이렇게 무언갈 하려 하면 이렇게나 잔뜩 힘이 들어가는지.

2020년 목표 1번에는 '뭐라도 해보기(힘빼고)'를 넣어야 겠다.

 

아무튼, 이렇게 글쓰기 전에 마음이 복잡 할때 아랫집 할아버지의 일기를 옮긴다.

차곡차곡 쌓여 있는 할아버지의 글을 읽다 보면 마음이 따뜻해 지고 위로 받고 또 용기가 생긴다.

 

울림이는 이제 1학년이 다 끝나 가는데 옮기지 못한 할아버지의 글 속 울림이는 아직 입학식이다.

이제는 적어도 계절 별로 한번씩은 옮겨 놓자는 생각에 계절도 적어 두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다 옮기고 싶은데...

 

이곳으로 이사온 지 벌써 일년이 넘어간다. 

겨우 기어 다니던 우리는 이제 뛰어 다니고, 

아직 아기 같았던 이음이의 말투도 점점 또렷해 지고,

아직 유치원생이던 울림이는 이제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다.

 

아이들과 할아버지 할머니는 여전히 좋은 이웃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로 지내고 있다.

 

 

2.

 

2019.3.2

기분이 좋은가 봅니다. 이음이가 대청마루를 내달리며 혼자 소리를 지릅니다. 그럴 땐 온몸으로 소리를 내는 듯합니다.
‘우리, 멧돼지가 파 놓은 구덩이 보러 갈까.’ 아이들을 데리고 산길을 오릅니다. 오솔길 왼쪽 제법 가파른 비탈을 내려갑니다. 저만치 다랑논에 서너 군데 커다란 구덩이가 파헤쳐져 있습니다.
‘할아버지, 물이 고여 있어.’ ‘응, 멧돼지들이 내려와 웅덩이를 파고 목욕을 한 곳이야.’ 신기한 듯 한참이나 내려다 봅니다.
‘우리, 나무하고 갈까.’ 지난해 마을 어른이 표고버섯을 키우려고 베어가고 남은 참나무 가지들이 여기저기 누워 있습니다.
울림이는 기계톱으로 나무를 베는 것을 늘 보고 싶어 합니다. 강화도 사시는 외할아버지가 쓰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음이 손을 잡고 산비탈을 올라 오솔길을 내려가는데, 어느새 끙끙대며 울림이가 기계톱을 들고 옵니다. 울림이는 기계톱이 어디 있는지 눈여겨 보아 두었나 봅니다.
‘너 어떻게 그렇게 무거운 걸 들고 와’ 놀라서 묻자 ‘나는 도깨비잖아.’ 울림이가 배시시 웃습니다.
‘너희들 위험하니 저만치 떨어져 있어’ 아이들을 멀찌감치 푹신한 가랑잎 위에 앉혀 놓고, 나무를 벱니다. 나무를 서너 도막이나 잘랐을까 하는데, 울림이가 뭐라고 소리칩니다.
얼른 기계톱을 멈추고 쳐다보니, 이음이가 울상을 짓고 있습니다. 너무 소리가 커서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음이는 아직 어리고 소리에 퍽 예민합니다. 이음이를 데려다 저 위쪽에 앉혀 놓고, 몇 도막 더 자르고 그만두었습니다.
울림이는 아내가 꽃밭 만드는 데 가고, 나는 손수레를 끌고 와서 땔감을 싣고 그 위에 이음이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

이음이는 형을 잘 따르고 무척 좋아합니다. 더구나 형한테서는 좋은 냄새가 나고 결혼하고 싶다고 합니다. 나도 형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니, 우리 울림이와 똑같은 형을 갖고 싶은지 물어봅니다.
울림이 이음이는, 친할머니 친할아버지도 있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있습니다.
계순옥 황금성, 김정남 노광훈 할머니 할아버지 이름도 알고 있고, 해뜨리 평원이 삼촌, 지원이 여원이 이모 이름도 압니다. 마을에도 많은 삼촌과 이모들이 있습니다.
지난 번 잠깐 들르신 장선생님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 세상이 아이들 키우기에는 알맞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만,
도란도란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는,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연둣빛 번지는 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3

부옇게 미세먼지가 끼는 날이면, 아이들은 집 안에서 놀거나 입마개를 하고 뛰어서 우리 집으로 옵니다.
냉이를 캐던 그 날도 미세먼지가 끼었습니다. 한참 냉이를 캐다가 뒤돌아보니 어느 새 이음이가 입마개를 벗어 던졌습니다.
‘야, 이음이 너 미세먼지’ 라고 소리 치니까, 이음이는 언덕에 웅크리고 누운 채 주먹을 쥔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숨을 꼭 참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숨을 못 쉬어 죽겠다고 하니, 참았던 숨을 내쉬며 빙긋이 웃는 이음이 모습이 떠올라 지금도 웃음이 납니다.
울림이는 미세먼지가 코로 들어와 폐에 쌓인다고 가르쳐 주며, 호흡기관과 소화기관을 안다고 합니다. 그 날 그 날 미세먼지 수치를 알려주는 것도 울림이가 하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제법 높은 산기슭이라, 아랫동네에 비가 오면 여긴 눈이 내리고, 온통 숲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목이 컬컬할 만큼 미세먼지가 낄 때가 있습니다.
어느덧 편리함에 길들여진 우리 삶이 미세먼지를 부르고, 아이들이 마음껏 숨쉬고 놀 수 있는 곳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3.4

늦잠을 깨운 아이처럼 부스스 봄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투정 부리듯 봄도 이 땅엔 오고 싶지 않은가 봅니다. 산허리에 먼지 연기가 가득합니다.
울림이 가는 걸 보려고, 아내는 일찍 바깥에 일하러 나가 있습니다.
‘할아버지, 오늘 어디 가는지 알아.’ 저만치 문 앞에서 울림이가 묻습니다. ‘입학식.’ ‘어떻게 알았어.’ ‘할아버지가 생각했지.’
오늘은 울림이 초등학교 입학식입니다. 엄마 아빠 우리 이음이와 함께 학교에 갑니다.
저 아이들이 있어 그나마 봄은 피어나고, 세상은 눈부십니다.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우리 집에 왔습니다. 울림이 손에는, 선물 받은 꽃그릇과 구슬 주머니가 들려있습니다.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도 입학식에 오셨다고 합니다.
방에서 구슬치기 놀이를 하다가 문득 엊그제 ‘할아버지, 나 귀를 움직일 수 있다’고 하던 울림이 말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귀를 움직일 수 있느냐고 묻자, 두 귀 모두라며 귀를 움직여 보입니다.
나는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사람들도 옛날에는 개나 고양이처럼 귀를 움직였다고 해. 사냥할 때 집중하려고 그랬던 거지. 더는 사냥을 하지 않게 되자 ‘이개근’이란 근육은 퇴화되고, 지금은 몇몇 사람만 귀를 움직일 수 있단다.’
곁에서 내 말을 듣고 있던 이음이가, 할아버지도 귀를 움직일 수 있냐고 묻습니다. 나는 볼을 씰룩거리고 눈을 찡그려 보기도 하면서 할아버지는 안 된다며, 이음이는 움직일 수 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이음이는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방법을 몰라서 그런 게 아니야. 진화해서 그런 거야.’ 이음이는 진화해서 귀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털끝만큼도 장난칠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음이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울림이, 너는 아직 진화가 덜 된 거야.’ 울림이는 펄펄 뛰듯 아니라고 합니다. 나는 얼른 장난말이라고 얼버무렸습니다.
이음이는 엄마가 보고 싶다며 집에 갔다 온다고 방을 나갑니다.

 

3.5

학교 첫날 울림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담임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물어봐도 잘 말해 주지 않습니다. 겨우 알아낸 건, 담임선생님이 여선생님이고 1반 선생님보다는 나이가 적고 뒷머리를 땋았다는 겁니다.
산들이는 1반이고, 하온이는 같은 반인 2반이라는 걸 오자마자 먼저 떠들썩하게 얘기하는 걸 보면 울림이에겐 동무 사이가 더 마음이 쓰이나 봅니다.
요즘도 학교에서 아이들도 줄을 세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이 청소를 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우리 때는 왼쪽 가슴에, 접은 손수건 위에 이름표를 달고 ‘앞으로 나란히’ 줄을 맞춰 섰습니다.
청소는, 비로 쓸고나면 석필이나 초를 가지고 교실과 골마루 나무 바닥을 반들반들하게 문질렀습니다.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너무 미끄러워 아이들이 넘어질 때도 있었습니다.
나는 교사가 되어서도 평생 아이들과 함께 청소를 했습니다. 청소도 소중한 공부라고 생각하여 우리 학교는 수업 시간 사이에 청소 시간을 따로 만들어 넣었습니다. 하지만 몇몇 젊은 선생님 말고는 대부분 선생님들은 하던 대로 아이들에게만 청소를 시키고 딴 일을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입학 선물로 변기를 사 줄까’ 하니 빙긋이 웃던 울림이 얼굴이 떠오릅니다.
울림이는 저희 집 말고 다른 화장실은 잘 가지 않습니다. 우리 집에서 놀다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하면 벌써 저희 집 화장실에 가 있습니다. 요즘은 많이 진화했습니다. 지난 번엔 언덕에서도 오즘을 누었으니까요.
이음이는 변기를 선물 한다는 내 말을 듣자마자 또 신이 났습니다. ‘공부하다가 똥이나 오줌이 마려우면, 교실 변기에 앉아 똥 오줌을 누며 공부하고 ...’ 라면서 그 장면을 떠올리며 혼자서 무척 재미있나 봅니다.

 

3.8

어제는 아이들과 비석치기 놀이를 했습니다. 아내가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네모난 납작한 돌을 골라 왔습니다. 비석치기 하는 돌을 아내는 ‘목자’라고 부릅니다. 오랜만에 하는 놀이라 아내와 나는 아이들보다 더 들떠 있습니다.
마당에 두 줄을 긋고, 울림이와 아내, 이음이와 내가 편을 먹었습니다. 어느 쪽이 먼저 하는가는 가위바위보로 정하기로 했습니다.
울림이와 이음이가 뒤돌아서 등을 붙이고 가위바위보를 합니다. ‘가위 바위 보’ 이음이는 꼼짝 않고 가만히 있습니다. 무슨 일일까. ‘이음아 손을 올려 가위바위보를 내야지.’ ‘자, 다시 가위 바위 보’ 이음이는 까치발을 들고 어깨만 올립니다.
아, 이음이는 뒤돌아서 하는 가위바위보를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입니다. 손짓을 해서 가르쳐 주니, 그제야 보를 내어 이겼습니다.
처음엔 발등에 돌을 얹고, 다음엔 발목 사이에, 그 다음엔 무릎과 가랑이 사이에 돌을 끼우고 그러다가 차츰 올라가 배꼽 위, 어깨 위, 등 위, 머리 위로 돌을 얹어 나르며 비석치기 놀이를 했습니다.
이음이는 거의 한 번도 저 쪽 금에 닿지 못하고 가는 길에 돌을 떨어뜨렸지만, 놀이에 집중하는 모습이 너무 진지해서 우습기도 하고 참 대견스러워 보였습니다.
이음이에겐 모두 처음 있는 일입니다. 울림이가 아닌 아내와 편을 먹은 일,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놀이를 마무리한 일이 그렇습니다. 놀이 규칙을 잘 모르는 이음이는, 그 동안 놀이를 하다가 지면 억지를 부리거나 울음을 터뜨렸거든요.
울림이는 초등학교에 이음이는 어린이집 ‘나무반’에, 그만큼 떨어진 사이에서, 이음이는 혼자 서는 연습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3.9

오늘도 비석치기를 하자고 할 줄 알았는데, 아이들은 까마득히 잊고 밭에 오자마자 제법 비탈진 언덕을 오르내립니다. 물을 주려고 밭으로 이어놓은 호스 줄을 잡고 마치 산을 타듯 오릅니다. 올라오다 주르륵 미끄러져 울음을 터뜨리다 금방 그치고는, 이음이는 다시 야무지게 가파른 산을 오릅니다. 온통 흙을 뒤집어 쓴 듯합니다. 아내는, 인절미에 흙고물을 묻혀 놓은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아이들은 흙을 잔뜩 머금은 마른 풀뿌리를 언덕 아래로 집어던지고 놉니다. 에고 너희들 때문에 할아버지 ‘죽겠다’(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제목). 너희들이 학교 간 뒤 몰래 집을 짊어지고 이사 가야겠다고 하니, 그건 절대 안 된다고 합니다.
좀처럼 어린이집이나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지 않는 울림이가, 물어 보지도 않았는데도 먼저 학교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늘은 손을 뺀 나머지 몸으로 제 이름을 표현하는 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나는 학교에서 엉덩이로 이름 쓰는 것도 가르치느냐고 짐짓 놀려댔지만, 나중에 ‘할아버지, 나 우리 반에서 두 명 빼고 친구들 이름을 다 알아.’ 라고 했을 때, 아이들은 저렇게 놀이를 하면서 자연스레 친구들 이름을 익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제 그제 이틀은 계단 오르내리는 걸 했다고 합니다. 교실이 2층에 있으니까 다치지 않게 조심스레 오르내리는 공부를 했나 봅니다.
할아버지 학교에서는 계단을 뛰어내리고, 난간에 올라 미끄럼도 타고, 교실 창에 줄을 매어 오르내리는 것도 가르친다고 하니 곁에서 아내가, 할아버지는 아이들한테 그런 위험한 걸 다 가르친다고 핀잔을 합니다.
선생님도 예쁘시고, 학교도 재미있다고 하니 참 다행입니다.

 

3.10

단이가 짖더니 산속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나고 이윽고 꽹과리 소리가 납니다. 지리산에 살 적에도 가끔, 대숲 골짜기 큰 나무 아래 바위 틈에 치성을 드린 흔적이 남아 있곤 했는데, 어쩌면 ‘홍동의 강원도’라 부르는 여기도 외딸고 깊은 곳이라 사람들이 찾아와 굿을 하나 봅니다. 초롱산 어디쯤인가 등잔처럼 생긴 명당이 있다고 했는데, 맑은 기운이 감돌아 그런가 보다 생각해 보지만, 꽹과리 소리는 여전히 귀에 거슬립니다. 내가 받은 서양 교육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지도 않는 아이들을 떠올립니다. ‘할아버지, 저 게 무슨 소리야.’ 하고 울림이가 물으면, 나는 짐짓 못 들은 체하며 ‘어디에 무슨 소리가 나는데’ 라고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저기 산 속 꽹과리 소리 말이야.’ ‘아, 저 소리.’ 한참 뜸을 들이곤 ‘으음, 무당이란 사람들이 굿을 하는 거야. 사람들이 아프지 말고 나쁜 일이 생기지 말아 달라고 산신령님에게 비는 거야,’
꽹과리는 왜 치냐고 물으면, 주무시는 산신령님을 깨우려는 거라고 말할 겁니다.
울림이는 틀림없이 내 말이 사실일까 아닐까 갸우뚱거리며 머릿속으로 셈을 할 테고, 곁에서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던 이음이는, 재미난 상상을 하며 고 귀여운 입으로 산신령님 구름 타고 어쩌고저쩌고 막 지꺼릴 겁니다.’
그 사이 짧은 굿은 끝났습니다.

 

3.11

어제는 아이들과 주사위 놀이를 했습니다. 주사위 세 알을 한꺼번에 던져, 나온 숫자들을 더해 그 수만큼 말이 앞으로 나아가는 놀이입니다.
주사위 놀이판은 울림이가 그려 왔습니다. 1에서 60까지. 그런데 5와 6이 거꾸로 적혀 있어, 그 곁에 나머지 숫자들도 넘어져 있은 듯 보입니다.
마름모꼴로 둘러싸인 숫자에 가면 한 번 더 주사위를 놀 수 있고, 동그라미로 감싼 숫자에 다달으면 달리던 말을 서로 바꿔 타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숫자에 가면 사다리를 타고 앞으로 몇 칸 더 갈 수 있고, 어떤 숫자에 가면 미끄럼을 타고 도로 뒤로 돌아와야 합니다.
울림이가 한참 설명하고 나서야 우리 넷이 주사위를 놀았습니다. 어쩌다 보니 내가 먼저 말이 나고, 아내가 그 다음, 이음이가 그그 다음, 울림이가 골찌로 났습니다.
울림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주사위 판을 거두며 그만하자고 합니다. 우린 또 그만두어야 합니다.
나는 그제야 울림이에게 들려주려고 생각해 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할아버지가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야. 마을에 사는 한 젊은이가 학교를 다니다가 나라에 전쟁이 나 싸움터에 끌려갔어. 군인들이 수류탄 던지는 훈련을 하는데 그 젊은이가 차례가 됐지. 수류탄 알지. 석류처럼 생긴, 던지면 쾅 터지는 것. 고리를 빼고 던지려는 순간 저 앞에 어미 토끼가 새끼 토끼 여러 마리를 데리고 지나가는 거야. 젊은이는 차마 그 곳으로 던지지 못해 앞에 떨어뜨렸고 젊은이는 그만 흩어지는 쇳조각에 맞아 죽었어.’
나는 이야기를 들려준 뒤, 참 용기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울림이에게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곁에서 듣고 있던 이음이가 갑자기 ‘할아버지, 이렇게 던지면 되지.’ 라며 주먹 쥔 오른손을 몸의 왼쪽으로 방향으로 바꾸어 던지는 시늉을 해 보입니다.
나는, 이미 수류탄은 손끝을 떠났고 그 건 어렵다고 이음이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참 용기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음이는 총명합니다. ‘총명하다’고 할 때 ‘총(聰)’은 ‘귀가 밝다’ 라는 뜻입니다.

 

3.17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아이들을 데리러 왔습니다. 벗어 놓은 겉옷을 입히는 데도 한나절이 걸립니다. 이리 달아나고 저리 숨고, 입혀 놓으면 도로 벗고, 아이들은 쉬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합니다.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할아버지 어릴 땐 비 사이로 막 뛰어다녔어.’ 말이 떨어지자마자 울림이는 바람처럼 언덕을 올라 ‘이렇게 말이지’ 하며 현관문 앞에 서 있습니다.
이음이는 손바닥을 펴서는 새의 날개처럼 겨드랑이 붙인 채, 스케이트를 타듯 몸을 오른쪽을 비스듬히 옮겼다 왼쪽을 눕혔다 가끔 고개를 들고 비 사이로 빠져나갑니다. 저러다간 한밤중에나 집에 닿을 듯합니다.
어제는 아빠가 앞마당에 텐트를 쳐주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어서 일 마치고 여기 들어와.’ 이음이 울림이가 번갈아 고개를 내밀며 소리칩니다.
아내는 집들이 간다며 돌아가 과자 두 봉지를 챙겨 왔습니다. 텐드 안은 아늑하며, 마당 앞인데도 먼 들판으로 나온 듯 괜히 마음이 들뜹니다.
텐트 안 빨랫줄에 걸어 놓은 아이들 그림책을 보여줍니다. 울림이가 칠해 놓은 빛깔은 어찌 저렇게 고울까요. 이음이가 그어 놓은 금도 이제 이야기로 살아나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들려주는 동화 속 세상으로 들어온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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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 안에서 울림이가 그림을 그립니다. 벽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 방엔 한 사람이 권투 연습을 하다가 개미를 쳐다보고 있고 왼쪽 방에서는 시끄럽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소리치는 모습도 눈에 보이듯 그렸습니다. 콧수염도 있고 뒤로는 방귀를 뿡뿡 뀌고 있습니다.
소리치는 사람의 볼에 동그라니 붉게 칠하고는, 소리치다가 오히려 저쪽 사람에게 반해 볼이 붉어졌다고 합니다.
나는 재미있는 듯 이야기를 지어냅니다. ‘울림이가 교실을 날아다녀 여학생들이 소리치고, 소리치던 여학생들이 도리어 울림이한테 반해서 볼이 발가스레 물들고 울림이반 여학생들 얼굴이 다 빨개지고 ... ‘ 울림이는 헤벌쭉 웃습니다.
그런 울림이를 그저께는 몹시 나무랬습니다. 울림이 너 그럴 수가 있느냐고. 이음이가 형을 그렇게 좋아하는 줄 알면서 혼자 떼어놓고 초등학교에 갔다고.
어린이집에 가면 이음이 손을 잡고 교실에도 데려다 주고 지켜 주었는데, 이음이는 이제 어린이집에도 가기 싫다고 하며 엄마한테 일찍 데리러 오라 하고.
이음이는 아니라고 하는데, 나는 못 들은 체 쉬지 않고 울림이를 혼냅니다. 울림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여덟 살이라 ... ‘ 여덟 살이라 저도 할 수 없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라는 뜻인데, 나는 ‘그래서 우리하고만 초등학교에 같이 입학하고 싶다고 하고 ... ‘
그예 이음이가 크게 소리칩니다. ‘나는 어린이집이 너무 좋아.’
울림이가 가르쳐준, 친구들과 선생님 이름입니다. 선생님을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교실에 앉아있는 듯합니다. 이름은 울림이가 불러주는 대로 적어 잘못 적었을 수 있습니다.
최희영 김용원 박주원 신민서 신지용 정우연 송하율 김소율 윤혜린 남혜민 최민 유하온 황울림 윤경아 선생님

 

3.20

마을을 둘러 살펴보러 왔는지 경찰관 두 분이 우리 집에 들렀습니다. 외진 곳에 아이들 목소리가 들려 더욱 정겹게 느꼈을 겁니다.
마당에 서서 이야기하는 경찰관에게, 들어와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아내가 부릅니다. 울림이와 이음이도 함께 따라 들어와 탁자에 마주앉습니다.
아이들은 경찰관이 묻는 말에만 짧게 대답하곤, 우리 집에 처음 들른 날처럼 아내가 주는 음료와 사과를 먹고마실 뿐 아무 말 없이 조용합니다.
‘아이들이 참 얌전하네요.’ 라고 한 분이 묻자, ‘아니에요, 얘들 날아다녀요’ 라고 하니, 울림이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습니다.
한참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일어섭니다. 아이들보고 인사하러 나가자고 하니까 제 자리에 앉아 꼼짝도 않습니다.
저만치 차에 타 시동을 걸려고 하자, 이음이가 뛰어나와 ‘야, 아저씨 잘 가.’ 라며 소리칩니다. ‘쟤 살아났네.’ 한 분이 웃으며 손을 흔듭니다.
‘울림이 너 무서워 덜덜 떨고 있었지.’ 나는 울림이를 짓굿게 놀립니다.
울림이 : 아니.
나 : 그럼 뭐했어. 혼자 자고 있었어.
울림이 : 그래, 너무 안 무서워 자고 있었다.
나 : 집이 덜덜 떨며 흔들리고 있던데, 너 잘못한 거 있지.
울림이 : 집이 잘못했나 보지.
나 : 아니, 어떻게 집이 잘못해.
울림이 : (잠깐 생각하다가) 우릴 춥게 했잖아.
하긴 구들방이 있는 바깥채보다 안채가 더 춥습니다. 이 쯤에서 나는 슬그머니 물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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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모나이트 사건’

겨우내 마늘밭을 덮은 볏짚을 걷고 있는데, 아이들이 일 그만하고 같이 놀자고 소리칩니다. 하던 일을 마무리하려고 꾸물대니까 밭으로 올라옵니다.
아이들 손을 잡고 조심조심 비탈을 내려오는데, 울림이가 집에 잠깐 들렀다 가자고 합니다. 암모나이트 같은 것을 찾았다고 합니다. 마치 굉장한 것을 발견한 듯 목소리가 들떠 있습니다.
등이 번들거리고 마치 아주까리 씨앗처럼 생겼는데, 납작한 돌 위를 기어갑니다.
아이들이 마음속에 그려놓은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려고 머뭇거리다가, 이건 알려줘야 할 것 같아 조심스레 입을 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알고 있는데 ... ‘ 잠깐 멈췄다가 ‘이건 진드기야.’ 라고 말했습니다. 가까이 다가오던 엄마가 멈칫하며 뒤로 물러섭니다.
손톱 끝을 모아, 이만큼 작은 것이 개나 고양이 같은 짐승에게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어 이렇게 통통하게 된 거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크게 실망할 줄 알았는데, 이마저도 신기한 듯 자세히 내려다봅니다.
뜰에 내려서자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보랏빛 알갱이 무스까리 꽃을 보여주었는데 어서 방에 가서 놀자며 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꽃밭 귀퉁이 흰 노루귀와 연보랏빛 노루귀 꽃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아이들은 아직 달팽이 집이나 꼬물꼬물거리는 것에 더 눈이 갑니다.

 

3.22

울림이와 카드놀이를 합니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 이건 몇이야 이건 몇이야 하며 숫자를 물었는데, 오늘은 10, 20, ... 180까지 거침없이 읽어내려 갑니다.
깜짝 놀란 목소리로 너 어디서 이걸 배웠어 하니까, 저절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울림이가 저절로 알게 되었다는 말은, 여기저기서 듣고 배운 것을 제 나름대로 정리해서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숫자를 제대로 알고 있나 보려고, 423을 종이에 적어 읽어 보라고 하니 까먹었다고 합니다. 지난 번에 울림이가 ‘일십백’이라고 하길래 숫자 읽는 법을 가르쳐 준 적이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라고 하니 더듬더듬 ‘사백이십삼’이라고 읽습니다. 다시 903을 써 주니까 ‘구백삼’이라고 금방 읽어냅니다.
‘이제 울림이 학교 안 가도 되겠다, 숫자도 다 읽고.’ 라고 하니, 학교는 가야 한다고 합니다. 하온이란 친구가 보고 싶어 학교에 가야 한다고 합니다.
하온이가 결석하면 어떡할래, 하온이가 멀리 이사 가면 어떡할래 라고 놀리자, 뜬금없이 오늘 학교에서 연필 잡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야, 학교에서 그런 것도 다 가르쳐 주는구나.’ 하니, 빙긋이 웃으며 연필 잡는 법은 알고 있었다고 능청스레 말합니다.
울림이에게 또 당했습니다. 울림이는, 내가 학교 가지 말라고 말리는 줄 알고, 아직 배울 게 있으니 학교에 가야 한다며 내 말을 살짝 피해 간 겁니다.

시들해진 나는, 곁에 있던 이음이에게도 형한테 다 배우니까 학교 안 가도 되겠다니까, 이음이는 작은 목소리로 또렷하게 말합니다.
‘나는 아직 글씨를 잘 몰라 학교에 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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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다가도 자꾸 아이들 집으로 눈이 갑니다. 어제도 늦더니 오늘도 해가 다 지도록 아이들이 집에 오지 않습니다.
며칠 전, 반에서 주원이가 말을 듣지 않아 선생님 곁으로 자리를 옮겨, 선생님 곁에 주원이 울림이 하온이 이런 차례로 앉았다고 했는데 ...
오늘은 거름더미를 만들었습니다. 높이 1.5m 길이 4m 쯤 되는 철망을 둥그렇게 엮어, 안쪽 둘레를 볏짚으로 둘러 쌓아가며, 가운데 깻묵과 왕겨를 켜켜이 쌓은 뒤 짚으로 이엉을 엮어 덮었습니다.
철망은 지우가 가랑잎을 쌓아 두려고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가랑잎이 썩으면 달큼한 냄새가 납니다.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아이들 집에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을 하니, 아내가 내려가 전화를 해 보자고 합니다.
불빛을 비추며 차가 언덕을 올라옵니다. 해맑은 아이들 소리가 납니다. 아, 다행입니다.
울림이가 윗니를 뺐다고 합니다. 어스름 속을 뛰어내려 오더니, 아내에게 들렀다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는 나에게 달려옵니다.
손전등으로 이를 비추어 봅니다. 이를 빼는데 하나도 안 아팠는데, 앞니를 빼다가 잘못 건드렸는지 입술이 아팠다고 합니다. 마알간 잇몸에는 아직 핏기가 남아 있습니다.
아이들 소리에 갑자기 밖이 환해진 듯합니다. 아이들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까닭이겠지요.

 

3.24

‘할아버지 뭐 해?’ 오이 덩굴이 올라갈 울타리를 손보고 있는데, 이음이가 묻습니다.
‘오이가 손 잡고 올라갈 수 있게 울타리를 고치고 있어.’ ‘나도 올라가고 싶다.’ ‘이음이도 오이가 되면 되지.’
‘내가 어떻게 오이가 돼.’ 내 대답이 싱거웠던지, 울림이를 따라가 징검다리 놀이를 합니다.
잔디씨를 뿌려 키운 잔디밭에 벽돌로 테두리를 쳐 놓았는데, 벽돌을 듬성듬성 빼내어 징검다리를 건너듯 건너다닙니다.
아이들에겐 모든 것이 놀이입니다. 가랑잎을 쌓아 두려고 만든 철망 속에 들어가선 그걸 굴리고 다니기도 하고, 작은 비닐 온상을 떠받치는 쫄대를 난간 위에 걸쳐 놓고는 낚시 놀이를 합니다.
그마저 시시해지면 내가 일하는 곳에 와서 연장을 가지고 놉니다. 호미 괭이 삽 톱 정전가위 들도 모두 아이들에겐 장난감입니다.
손이 시려 보여 집에 가서 장갑을 가져오라니까, 집에 가면 점심을 먹으라고 하니까 안 간다고 하더니, 엄마가 부르니 할 수 없이 달려갑니다.
울림이가 먼저 달려가고. ‘나 좀 데리고 가지.’ 하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뒤따라 가던 이음이가 끝내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 때 무엇인가에 소스라치듯 놀란 엄마가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그 소리에 이음이는 울던 것도 까먹었습니다.
‘또 단이가 뼈다귀를 물어다 놓았을까.’ 뛰어올라가 보니 마당에 어른 손가락만한 지네 한 마리가 엎드려 있습니다. 조심스레 집어 보니 죽어 있습니다.
이럴 땐 엄마도 애기 같습니다. 울림이가 그러는데 우리 집에서 벌레를 가장 안 무서워 하는 사람은 우리라고 합니다. 지난 번에 우리가 무당벌레를 집어 입에 넣은 것을 엄마가 꺼냈다고 합니다.

 

3.25

마당에 벽돌을 깝니다. 장화를 팔에 끼고 로봇처럼 아이들이 걸어옵니다. 아이들은 방에 들어가 놀자고 보챕니다. ‘이것 다 깔고 놀자, 너희들이 도와줘.’
길바닥에 까는 벽돌이라 제법 크고 무겁습니다. 이음이는 벽돌을 하나씩 들어나르다가 힘이 부치는지 깔아 놓은 벽돌 위에 앉아 쉽니다.
어디서 힘이 났는지 울림이는 네 장씩 묶어 놓은 벽돌을 한꺼번에 들어나릅니다. 더러 떨어뜨려 벽돌 귀퉁이가 깨지고, 바닥에 놓다가 손가락끝이나 발등을 찧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벽돌 한 쪽부터 조심스레 놓는 것을 배웁니다.
일을 하면서 우리는 ‘벌레가 나타났다’ 놀이를 합니다. 내가 ‘벌레가 나타났다, 엄마.’ 하면, 아이들은 ‘아아아아아’ 엄마 흉내를 냅니다.
‘아빠’ 하면 ‘으으으으으’, ‘울림이 이음이’ 하면 가만있다가, ‘우리’ 하면 ‘집어 먹어.’ 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내가 말하면 울림이는 ‘예’라고 대답합니다. 여전히 다른 말은 친구한테 하듯 반말을 하면서도.
아마 엄마가 학교에서도 집에서 하듯 ‘응’ ‘그래’ 하며 반말을 쓸까 봐 존댓말을 가르치나 봅니다. 나는 참 어색한데 그냥 듣고만 있습니다.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고 데리러 왔는데도 가지 않자, 아빠가 곧 오니 같이 오라고 엄마는 우리를 업은 채 먼저 갑니다.
언덕 아래 아빠 차가 옵니다. 아이들은 달립니다. 어느새 울림이는 비탈을 올라 사잇길로, 이음이는 언덕길을 바람처럼 달려갑니다. 세상에 저토록 아빠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을까요.
일을 마치고 일어서는데, 그 새 저녁을 다 먹었는지 아이들이 창밖을 내다보며 소리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세요.’ 라며 재미있는지 몇 번이고 되풀이합니다. 아이들이 처음 쓰는 존댓말입니다.

 

4.1

층층나무를 옮겨심고 있는데,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이들이 달려와 소리칩니다. 우리를 업고 엄마도 뒤따라 왔습니다.
‘호미’가 쥐를 던지며 놀고 있다고, 처음 보는 광경인 듯 무척 놀라워 하는 표정입니다. 늘 겪는 일이지만 덩달아 나도 아이들처럼 가슴이 뜁니다.
저만치 앞에 두고 달아나면 쫓아가 입으로 물어다 던졌다가 놓고 가끔은 앞발로 움켜쥐면서, 고양이가 쥐를 갖고 놀고 있습니다.
그런 생쥐를 울림이는 손으로 만지고도 싶고 키우고도 싶다고 합니다.
가끔, 이런 아이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왔을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지난 주 토요일엔 아이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뵈었습니다. 겉으로는 서로 결이 달라보이는 듯하지만 마음속에 곱고 맑은 하늘을 지니고 사시는 분들이십니다.
아, 저 뿌리에서 엄마 가지가 돋아나고 그 끝에 봄날 연둣빛 눈부신 새순으로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4.3

가끔은,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가 제법 어른스러워진 울림이 앞에서 내가 재롱을 떠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산을 내려오다가, 수염 기른 도사 할아버지가 들고 다니는, 지팡이 닮은 나무를 주워 와선, 아이들에게 너스레를 떱니다.
‘할아버지가 산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산신령이 나타나서 내 앞에 무릎을 꿇더니, 내가 장군일 걸 알아채곤 장군님 하며 이 칼을 바치는 거야.’ 하며, 나무를 들고 휘익 바람을 가르듯 휘둘러 보입니다.
옆에서 빙긋이 웃고 있던 울림이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산신령이 잘못 본 거지.’ 하며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합니다.
갑자기 찌그러져 어디론가 숨어들고 싶지만, ‘너희들 한 번 덤벼 봐, 후회하고 말거야.’ 하며 우렁차게 소리를 칩니다. ‘후회하고 말 거야.’는 놀이를 할 때 이음이가 나한테 자주 쓰는 말입니다.
나무는 칼이 되었다가 땅에 놓으면 밧줄이 되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몸을 가누며 밧줄을 타고 다니며 놉니다.
이음이는 넘어져 손가락이 긁혀 쓰라린 듯 엄마가 보고 싶다고 글썽입니다. 나는 방에 들어가 상처를 소독한 뒤 약을 듬뿍 발라주고, 울림이 손에 박힌 가시도 빼어줍니다.
엄마가 오자 이음이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울림이는 가시가 어떻게 박혔는지 설명하느라 바쁘고, 나는 이음이를 아내는 울림이를 업고 집에 바래다 줍니다.

 

4.4

어디에서 들었나 봅니다. 네 잎 토끼풀이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울림이는 ‘할아버지, 네 잎 토끼풀 찾았어.’ 하면서, 세 잎에다가 한 잎을 붙여 보여줍니다.
한 잎을 덧붙여서라도 행운을 바라는가 봅니다. 울림이는 ‘행운’을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도 들은 이야기를 해 줍니다. 세 잎 토끼풀의 꽃말은 ‘행복’이고, 네 잎 토끼풀은 ‘행운’이라고. 울림이는 ‘행복’을 갖고 싶다고 합니다.
세 잎 토끼풀을 뜯어 가득 손에 쥐고 엄마 아빠에게 주고 싶어 합니다. 울림이가 바라는 행복 가운데 하나는, 아빠가 어서 박사 논문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논문이 통과되어 늘 아빠가 곁에서 함께 놀아주는 게 울림이가 그리는 행복입니다.
혹시 알고 있나요. 사람의 입에서 따뜻한 입김과 차가운 입김이 나온다는 것을. 어제 울림이가 알려주었습니다.
손바닥에다 ‘하’ 하고 불면 따뜻한 입김이, ‘후’ 하고 불면 차가운 입김이 나온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울림이와 이음이와 함께 노는 것이 날마다 누리는 조촐한 ‘행복’입니다.

 

4.9

툭닥 툭탁 망치질 소리가 골짜기를 흔듭니다. 엄마가 사 준 자그마한 망치입니다. 유리를 낄 때 창틀에 덧대는 나무에 못을 박던 망치가 떠오릅니다.
울림이는 손끝이 야무집니다. 엊그제는 책상 귀퉁이마다 못을 박는데 하도 모질게 내려쳐 ‘죽는다, 죽어.’ 하니까, ‘못이 죽어.’ 하며 빙긋이 웃습니다. 망치 자루 어디쯤을 잡아야 망치 끝에 힘이 가는지 가늠하며 세상을 배웁니다.
‘오랜만에 절벽이나 타 볼까.’ 지난해 가을만 해도 나뒹굴까봐 조마조마했는데 이제 제법 땅에 몸을 붙이고 재빠르게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립니다.
마음도 넉넉해진 듯합니다. 높이 2m 너비 20cm 시멘트 난간 위에 서서는, 나무 막대기를 칼처럼 쥐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할아버지는 배가 없으니까 장군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부르는 장군은 이순신 장군을 가리킵니다.
내가 배를 불쑥 내밀며, 너희 내 배에 올라타 놀지 않았느냐며, 여기 배가 있으니 장군님이라고 우깁니다. 그 전 같으면 ‘그 배가 아니고.’ 하며 따졌을 텐데, 오늘은 저도 배를 쑤욱 내밀며 장군 흉내를 냅니다.
아장아장 걸어서 우리도 우리 집으로 오고, 아이들은 밭 가생이 풀처럼 하루가 다르게 자라납니다.

 

4.10

‘할아버지, 궁금한 게 있는데...’ 울림이가 묻습니다.
울림이가 손으로 가리키는 것은, 마치 먼지기둥처럼 솟아난, 쇠뜨기 생식줄기인 홀주머니이삭입니다.
‘아, 쇠뜨기란 풀의 꽃줄기야. 뱀밥이라고도 부르지. 할아버지가 살던 운산 아이들은 소가 잘 뜯어먹어 소국수풀이라고도 했어.’ 라며, 그 곁에 흙을 밀고 나오는 쇠뜨기풀을 보여줍니다.
쇠뜨기풀 마디를 떼었다 다시 제자리에 끼우니, 불럭장난감 같다며 재미있는 듯 몇 번이나 되풀이합니다.
모기에 물렸을 때 쇠뜨기풀을 짓이겨 바르면 간지러움이 가라앉는다는 이야기, 코피가 나거나 물속에 들어갈 때는 쑥을 뭉쳐 코와 귀를 막았다는 어릴적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이럴 때 나는 자랑스럽습니다. 울림이보다 많이 아는 것도 있으니까요. 울림이는, ‘논학교’에 풀꽃선생님이 있는데, 할아버지는 풀꽃할아버지라고 나를 치켜세웁니다.
속으로 듣고 싶었던 말입니다. 하긴 학교에서도 담임이 없을 때는 ‘시와풀꽃반’ 동아리를 만들어 스스로를 풀꽃반 담임이라고 부르고 다녔으니까요.

 

4.17

어린이집과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아이들은 아내한테로 뛰어갑니다. 아내는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꽃모를 뜰에 옮겨심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한다며, 아내가 파 놓은 작은 흙구멍에 꽃모를 넣더니 끝내는 아내가 쥐고 있는 모종 칼까지 가지고 갑니다.
부드러운 부엽토가 뿌리를 감싸고 있어, 아기처럼 조심스레 다루어야 한다고 해도, 흙덩이를 부스러뜨리거나 꽃모를 밟습니다.
안되겠다 싶어, 안개꽃 몇 포기를 줄 테니 집에 가서 심어 보라고 하니, 안개꽃을 심으면 우리 집에 비가 오겠다며 장난을 치더니, 그마저 엄마한테 맡기고 또 아내한테 달려듭니다.
손수레에 태워 초롱산까지 데리고 간다고 하자 그제사 따라나섭니다. 조금 올라가면 가파른 자갈길이 나옵니다. 내가 힘든다고 하니, 이음이는 제가 내려서 간다고 합니다.
울림이도 따라 내리고, 우리는 꽃구경도 하고 아까시나무 가시를 따서 코뿔소 흉내도 내며 쉬엄쉬엄 산길을 오릅니다.
길 끝에는 통나무 작업장이 있습니다. 60cm 남짓한 높이에 걸쳐 놓은 통나무 위를 곡예를 하듯 타고 놉니다.
기둥 사이에 매달아 놓은 그네도 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고 있는 아이들을 불러, 엄마가 너희들 찾으러 초롱산에 올라갔겠다고 하니, 아이들은 산을 올려다보며 ‘엄마’ 하고 소리칩니다.
아이들 소리가 맑게 메아리칩니다. 나도 따라 ‘우리야’ 하고 큰소리로 부릅니다.
길을 내려가는데, 멀리서 아이들 찾는 엄마 목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은 다투듯이 비탈진 길을 달려갑니다.

 

4.18

울림이는 꽃다지 이름을 압니다. 언덕에 나란히 앉아 울림이에게, 냉이와 꽃다지가 어디가 다른지 찬찬히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꽃빛만 아니라 잎과 보이지 않는 뿌리도 서로 다르다고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이리저리 살피더니 금방, 냉이는 하트 모양인데 꽃다지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줄기에 매달린 씨앗주머니가, 냉이는 하트 모양이고 꽃다지는 주걱 모양입니다. 나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씨앗이 영글면, 씨앗주머니를 조금씩 아래로 잡아당겨 냉이 줄기를 흔들면 차르르르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씨앗 소리가 납니다. 나는 ‘꽃종소리’라고 부릅니다.
울림이는 이제 저만치 떨어져서도, 우리 민들레와 서양민들레를 가려냅니다. 꽃을 받치고 있는 ‘총포’라는 것 말고도, 꽃빛만 봐도 다르거든요.
오늘은 아이들이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아 놀았다고 합니다. 아내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개구리가 화상을 입을까봐 아이들에게 면장갑을 끼고 만지게 하는 엄마가 참 지혜롭다고 합니다.
개구리는 살갗이 사람 손에 닿으면 화상을 입는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배웠습니다. 울림이 이음이의 영리함이 엄마 아빠에게서 온 것이겠지요.

-

산벚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지지난해 집을 지어 이사 올 때는 그렇다고 치고, 지난해에도 울림이네 닭장 곁에 한 그루가 눈에 뜨었는데,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골짜기만 해도 스무 그루나 되는 듯합니다.
‘할아버지는 무슨 꽃이 좋아?’ 금방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울림이네 마당에 피어 있는 제비꽃이라고 했습니다.
‘울림이는?’ 울림이 제일 작은 꽃이 좋다고 합니다. 조금 전에 보여준 꽃마리를 가리키자 그건 아니라고 합니다.
아, 아내가 보여준 봄맞이꽃인가 봅니다. 어제는 예쁘지 않다고 하더니 하늘거리는 그 조그만 하얀 꽃이 떠올랐나 봅니다.
요즘 들어 울림이는 풀이나 꽃에도 관심을 가집니다. 지난 번 광주리나물 꽃대롱 끝에 고인 꿀을 빨아먹을 때부터인가. 아니면 쇠뜨기풀 줄기를 뗐다 붙였다 할 때부터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어려운 꽃이름 무스까리도 알고 뭉게구름 하얗게 일렁이는 조팝나무 꽃도 압니다.

 

5.2

‘할아버지, 쓰스삐 쓰스삐 이렇게 우는 새가 뭐야?’ 언덕에 앉아 이음이가 묻습니다. ‘아, 지금 우는 저 새, 곤줄박이야.’ ‘그렇구나. 지난 번 새는 오랑오랑 울었지.’ ‘야, 이음이 너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할아버지가 얘기해 줬잖아.’
이음이가 혼자 집에 왔습니다. 장난말로, 엄마가 이음이 보고싶어 어린이집에 안 보냈구나 하니, 오늘은 어린이집이 쉰다고 합니다.
생강밭에 볏짚을 덮으러 가는데 졸래졸래 따라옵니다.
‘할아버지, 누가 이음아 하고 부르지? 엄마 목소리는 아닌데.’ 가만히 들어보니 멀리서 낮닭 우는 소리입니다.
산은 옅고 짙은 푸르름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소나무 잎이 가장 짙고, 상수리나무 잎은 누르스름한 푸른 빛을 띠고, 밤나무 어린 잎인지 바람에 물결치는 산벚나무 잎인지는 희읍스름한 푸른 빛으로 몽실몽실 피어오릅니다.
‘쓰삐 쓰삐’ 내 마음 저 깊은 산속 가장 귀엽고 예쁜 새는 이음이와 울림이와 우리입니다.
‘쓰삐 쓰삐’는, 울림이가 되지빠귀 소리를 흉내낸 말입니다.

 

5.15

이음이에겐 여자친구 봄들이가 있는데, 이음이가 세상에서 가장 멋있다고 하는 울림이에게는 여자친구가 없습니다.
‘울림이 너, 오늘 학교에서 뭐 했니?’ ‘까먹었어.’ ‘공부는 안 하고 예쁜 여자친구만 바라본다고 다 까먹었지?’
울림이는 ‘아니야.’ 라고 딱 잘라 말합니다. 내가 가만 있을 리 없지요.
‘너, 여자 친구 이름이 아니야 구나.’ 울림이는 ‘아니야, 아니, 아니라고’ 하면서, 이음이한테 하듯 한 대 쥐어박을 듯합니다. ‘하여튼 여자친구 성이 ‘안’이구나.’ 울림이는 죽을라고 합니다.
엊그제 아침엔 학교 가는 길에 가방을 메고 돌계단을 내려오더니, 마아가렛 한 송이를 꺾어 갑니다. 아내가 ‘선생님 갖다주려나 봐.’ 라고 했는데, 학교에서 돌아온 울림이에게 ‘너, 그 꽃 아니냐 주려고 했지.’ 라고 물으니, 엄마한테 주었다고 합니다. 울림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은 엄마인가 봅니다.
그래도 나는 ‘아니야’ 잘 있느냐며 얼마 동안 울림이를 놀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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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우이는 늘 꽉찬 친구들.

 

아이들도 잘 큰다.

 

 

한영아, 수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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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이 기록 (글+사진 5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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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같은 느낌이 나는 아름다운 곳에서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살짝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가만히 있으면 절로 평안해지는 곳이에요

이렇게 완성이 되었으나.. 아이들이 1시간 놀았나? ㅎㅎ 한영오빠의 노고가 가득 담겨있답니다

가장 중요한 호스트에요. 보기만 해도 배부른 행복한 부자랍니다~~

아직 서먹한 아이들은 아빠 주변을 돌지요

이제 산책을 좀 하기로 결정!

울림이의 가이드로 시작합니다

씩씩하고 용감한 종민이
쑥쓰러워 하지만 금새 화기애애한 세라
자연박사 울림이와 이음이
그리고 내 맘을 빼앗아간 우리...

우리의 매력은 직접 만나지 않은 이상 표현불가..

다자녀 바람오빠는 육아담당

식사 준비팀~

계속 고기 리필~

어느덧 군고구마장수..

카챠의 우크렐레 소리

혼자 독학했다고 해요. 다들 와서 들어 보세요 ㅎㅎ

이제 아이들은 재워야지요

밤 파뤼 시작~

눈을 뜨니.. 진환오빠가 단 한잔씩만 나오는 커피머신이 되어있었지요

녹슨 바람오빠의 기타소리 들으며, 아침도 맛있게~

언제든 오라는 바람오빠네 가족의 따뜻함과 함우의 식구들의 애정을  가득 느끼고 갑니당 ㅎㅎ

 

:

1.

 

한 해가 가고 한여름이 되어서야 지난해 겨울의 이야기를 옮겨 담는다.

그동안 정말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남편 논문 막바지로 몇 달간 혼자서 삼형제와 집안일을 도맡느라 하루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간 몇달,

남편 논문이 끝나가니 그동안 미뤄 놨던 집안 곳곳의 일들을 해결 하느라 몇달,

이제 좀 생활이 안정 되어 가나 싶었더니 아이들 첫 방학이 왔다.

 

정신없이 지나간 저 시간들 속에서 나와 남편은 없던 살도 다 빠질 정도의 엄청난 고난의 시간이었는데

그나마 큰 탈 없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언제나 처럼 인자하신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사실 생각 해 보면 아이들 보다 내가 더 두분께 의지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오늘도 아이들은 점심을 먹고 (낮잠 자자는 엄마에게 도망쳐)아랫집 할아버지네로 뛰어간다.

아이들 방학이 시작 된지 열흘 쯤 되었는데,

오히려 방학하고 이래저래 일정이 많이 생겨 집에 잘 못 있다보니 어제 오늘 오랜만에 할머니네서 실컷 논다.

엊그제는 집에서 울림이랑 이음이가 "아~ 그러고보니 요즘 할아버지네를 못갔네. 빨리 가야겠다"며 마치 꼭 해야 할 일을 깜빡 한 사람들 처럼 말한다. 

지난번 천안에 하루 자고 오는 일이 있어 나가는 날에도 출발 직전에 마당에 나오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발견한 이음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묻지도 않았는데 소리소리 지르며 누구네 가고 가서 뭐하고 얼마나 있다가 오는지를 열심히 전한다.

 

낯을 많이 가리던 막내 우리도 이제는 할머니 할아버지랑 친해져 

마당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발견하면 먼저 "어---!!!" 하며 손을 뻗어 인사한다.

 

 

 

2.

 

2018.11.28

환자복만 걸친 채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는 아내가 추워 보였는지, 간호사가 담요 한 장을 가져다 덮어줍니다 무늬 없는 얇은 천을 보고 아내는 아이들 그림이 떠올랐나 봅니다 ‘여보, 아이들 그림 잘 남겨둬 아이들 그림을 수놓고 싶어’
아내는 수술실로 들어가면서도, 얼굴에 낙서를 한 울림이와 이음이 모습이 떠올라 가만히 웃었다고 합니다 길고 어두운 굴을 지나듯 외롭고 아픈 시간을 아이들을 생각하며 혼자 견뎌냈겠지요
세 시간 남짓 수술을 받고 돌아와 병실에 누운 아내 눈가에 눈물이 맺혀 내 가슴으로 번집니다 지난 번 이마를 다쳐 응급실 침대에 덩그러니 남아,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던 울림이가 겹쳐 떠오릅니다
닷새만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서둘러 아이들이 계단을 내려옵니다 등 뒤에 감추었던 풀꽃 다발을 이음이가 아내에게 내밉니다 냉이풀꽃 개망초 민들레 방아꽃 개쑥부쟁이 들과 마른 꽃대궁, 쑥스러운 듯 조심스레 울림이도 꽃다발을 건넵니다 아내는 아이들을 꼭 안아줍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다발입니다
아내를 생각하며 아이 엄마는 정성껏 저녁을 지어놓았습니다 아내는 ‘이렇게 마음 쓰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젊은사람이 참 예뻐요’ 라고 내게 말합니다
아이들이 저리 예쁜 까닭도 ‘우리를 처음 세상으로 이어주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 맑은 호숫가에 풀꽃 잔잔히 물결치는 엄마가 피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친구 순복이는 카톡에 올려놓은 이음이 사진을 보고는, ‘이 맑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세상을 보면 얼마나 경이로울까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음이는 우리를 처음의 세상으로 이어 주네요’ 라고 했습니다

 

11.26

주말이라 아이들과 만화영화 한 편을 봤습니다 ‘야수와 미녀’는 아이들에겐 너무 길고 지루한지 앞 부분 조금 지나자 그만 본다고 해서 껐습니다 뭉실뭉실 시커먼 구름이 피어나듯 야수가 나타나고 ‘너희들 무섭지’ 하고 지우가 묻자, 이음이는 ‘안 무서운데 눈물이 나’ 라고 말합니다 속으로는 무서웠다는 것을 저렇게 말하는구나 라고만 짐작했습니다 저녁에 엄마를 만나자마자 ‘아빠가 잡혀갔어’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여자주인공 벨의 아버지가 야수에게 잡혀 갇히는 장면을 보고 이음이는, 벨이 가엾고 슬퍼 눈물이 났던 것입니다

울림이가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고 누워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스무고개처럼 마음속에 생각한 것을 알아맞히는 다섯고개 놀이를 했는데, 이제 몸짓을 보고 무엇을 나타내는지 맞히라는 것입니다 너무 평화롭게 누워 있어서 ‘자는 무엇’ ‘죽은 무엇 무엇’이라고 해도 아니라고 합니다 하도 답답했는지 참지 못하고 울림이가 답을 가르쳐 줍니다 ‘너무 데친 브로커리’

문턱을 넘어서 저 쪽 대청마루는 ‘어른 세상’, 이 쪽 안방은 ‘아기 세상’ 울림이가 생각해 낸 놀이입니다 오늘 이음이는 킹콩입니다 문 밖에서는 두 주먹 불끈 어깨를 올려 가슴에 힘을 주고 울부짖는 어른 킹콩이었다가 문턱만 넘어서면 응애응애 마냥 귀여운 아기 킹콩으로 바뀝니다 얼굴이 빨개질 만큼 나무 침대 모서리에 세게 부딪혀도 킹콩이라서 괜찮다고 울음을 참습니다

아이들은 오롯이 그 순간에 머물러 있습니다

-

고 귀여운 옷을 입고 이음이가 방으로 들어옵니다 ‘너 그 옷’ 놀란 척 크게 눈을 뜨고 말하자 얼른 ‘엄마가 입혀 줬어’ 라고 합니다 ‘넌 안 입고 싶었는데’ 이음이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너무 귀여워 쓰러질 것 같다던 그 옷입니다
보드게임 젠가 놀이를 하는데 아이들 눈이 자꾸, 아내가 켜 놓은 텔레비전 쪽으로 갑니다 ‘너희들 주말도 아닌데’ 지우가 말하자 이음이는 얼굴을 숙이며 ‘안 볼라 했는데 눈이 자꾸 가’라고 합니다 울림이는 아예 등을 돌려 앉습니다 
주말이 아니면 만화영화 같은 것을 보지 않기로 엄마와 약속한 까닭입니다
마당에서 콩타작을 합니다 도리깨질은 힘에 부치는지 아이들은 작대기로 두드리다가 콩대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서리콩을 집어던지고 놉니다
콩대를 뒤집고 달래망 밖으로 흩어진 콩을 줍고 있는데, 무슨 까닭인지 이음이가 ‘왜 밤이 안 오지’라고 묻습니다 ‘할아버지가 얼른 불러올까’라고 하는데 곁에서 아내가 거듭니다 ‘밤도 너희들처럼 해찰 떠느라고 그래, 오다가 꽃도 보고 벌레도 보고 그러느라고’ 울림이가 밤이 오면 집에 가야한다니까 그제야 이음이는 조용해집니다
언제인가 울림이가 ‘할아버지, 이음이 꿈이 뭔지 알아요’ 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는 울림이 꿈은 ‘늙어도 떠나지 않고 이 세상에 있는 거’라고 합니다 울림이는 사랑하는 식구 곁을 떠나지 않고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습니다
해쓱해진 국화꽃 무리 곁을 지나며 오늘도 ‘할아버지 이 꽃이 날아왔어’라고 말하는 이음이 꿈은, 커서 어른이 되면 아빠와 술 한 잔 하는 겁니다

 

11.30

미세먼지를 뚫고 아이들이 뛰어옵니다 울림이는 손가락으로 코를 틀어쥔 채, 뒤따라온 이음이는 이렇게 왔다며 손등으로 코를 누르며 ‘돼지’라며 웃습니다
울림이 주머니 속에 이음이 등 뒤에 숨겨 온 자동차로 한참을 놀다가, 다락에서 꽃 이름 맞히기 놀이를 했습니다 
‘어린이 식물도감’을 보고 울림이가 꽃 생김새를 말로 그려내면 이름을 맞혀야 합니다 ‘털이 났어’ 하면 ‘개쉬땅나무’, ‘가시가 났어, 어디에, 머리에’ 하면 ‘절굿대’ 아무리 풀과 나무에 관심이 깊다지만 이건 너무 어렵습니다 괜히 ‘오이풀’을 보고는 이 풀은 오이 냄새가 난다고 얼버무립니다 
이제는 그림을 그려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울림이는 어떤 것이라도 눈에 띄게 도드라진 곳을 잘 잡아 그려냅니다
울림이가 엎드려 왼손으로 연필을 잡고 열심히 그리고 있는데 이음이도 종이를 달라고 합니다 서랍을 뒤지다 보다 사진이 나옵니다 지리산에 살 때 식구 넷이서 함께 떠난 유럽 여행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이 사람은 누구’ ‘할머니’, ‘이 사람은 누구’ ‘할아버지’, ‘할아버지 뒤에 있는 이건 뭐지’ 체코 작은 마을 ‘체스키 크롬로프’ 장난감 가게 앞에 피노키오 인형이 서있습니다
잘 몰라 하는 이음이에게 코를 길게 늘어뜨리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생각난 듯 말하려고 하지만 입에서 맴돌 뿐 영 이름이 떠오르지 않은가 봅니다 귓속말로 ‘피노키오’라로 하자 울상을 지으며 대청마루로 나갑니다
이음이는 요즈음 무엇이든지 제 힘으로 하려고 합니다 과자를 싼 종이를 벗겨 달라고 할 때도 조금만 찢어 손에 쥐어 주어 나머지는 이음이가 스스로 찢어 먹게 해야 합니다 제가 맞혀야 했는데, ‘할아버지, 싫어’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 이음이에게 미안하다며 달래어 안고 들어옵니다
어느 날인가는 문득 ‘아빠가 회사에 간 것처럼 지내야 해’라고 말해 대견스러우면서도 가슴이 싸한 적이 있습니다 학위 논문으로 바쁜 아빠가 집에 있더라도 없는 것처럼 지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이음이는 아빠와 놀고 싶은데 또 참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쯤 나처럼 창 밖에 뜬 별을 보다가 아이들도 잠들었겠지요 아닙니다 아이들이 곧 별이고 꽃입니다

 

12.3

맑은 바람과 햇살을 데불고 아이들이 옵니다 며칠째 아이들이 집에 들르지 않아 마당을 쓸면서도 마늘밭에 볏짚을 덮어 주면서도 귀와 눈은 늘 아이들에게 쏠립니다 어제는 아장아장 숲길 내려가는, 두 살 난 ‘이랑’이란 아이를 만났습니다 엄마 친구들이 손님으로 왔나 봅니다
오늘 아침엔 다섯 살인 ‘담인’이를 할아버지에게 소개해 준다며 집에 데려왔습니다 날마다 뛰어 내려오던 돌계단을 담인이를 보살피며 조심스레 내려옵니다 방 안에 들어와서도 모든 게 낯선지 담인이는 주춤주춤합니다
등 뒤에 몰래 숨겨 온 장난감을 짠 하고 멋지게 보여 주고 싶었는데, 아이들이 궁금해 문을 열고 들어선 할머니에게 들키자 이음이는 속이 상해 뒤돌아서 벽 구석에 얼굴을 묻습니다 핑그르르 담인이 눈에도 눈물이 돕니다 나중에는 속초에서 ‘완벽한 날들’이란 동네책방을 가꾸시는, 담인이 엄빠 아빠도 오셨습니다
한참 동안 팽이를 가지고 놀다가, 방에 놓인 ‘어린이 식물도감’을 이리저리 펼쳐보더니 무슨 생각이 난 듯 울림이는 엎드려 그림을 그립니다
지붕 꼭대기에 십자가가 달려 있어 교회냐고 물으니 병원이라고 합니다 울림이는, 여기 이사 와서 얼마 되지 않아 온몸에 열꽃이 나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했던 이음이가 생각났나 봅니다 곰돌이가 새겨진 윗옷을 입고 주스를 먹고 있는 이음이, 오른쪽 별 모양 스티커가 붙어 있는 병실 서랍, 그 오른쪽에 ‘우리’를 안고 있는 엄마, 왼쪽으로는 아픈 아기와 양쪽 곁에 아기 엄마와 의사 선생님, 그 왼쪽으로 3층 엘리베이터... 울림이는 그 때 그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병실 서랍 안에 든 과자까지도
오른 쪽 지붕 위 생쥐는 상상해서 그려 넣었다고 하면서, 생쥐가 사는 집 지붕 양쪽에 커다란 토끼 귀를 그린 것은 생쥐가 고양이 오는 소리를 얼른 알아 듣고 빨리 달아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음이도 ‘구름아 놀자 구름아 놀자 해서 노는 거야’ 라며 왼손에 구름을 잡고 있는 아이 그림을 보여줍니다 늘 눈사람처럼 두 눈과 입, 작대기처럼 생긴 두 팔과 다리를 그리던 이음이가, 오늘 처음 이야기가 담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음이가 구름아 놀자고 말할 때 정말 하늘에서 구름이 내려와 손에 잡히는 듯했습니다 내가 전에 하늘나라에 가면 구름을 타고 놀거야 하며, 하늘나라엔 안 간다는 아음이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그 구름일까요

 

12.3

구름 속에서 햇살이 터져 나오듯, 이틀째 보이지 않던 울림이가 텃밭으로 올라옵니다 흙에 묻었던 *무우를 꺼낸다고 하니 같이하고 싶어 합니다 내가 마늘밭에 볏짚을 덮는 것도 창 밖으로 봤다고 아쉬워했습니다
삽과 호미를 가지러 가자고 하니 ‘고랑이, 고랑이’ 하며 고랑을 달려갑니다 오늘은 ‘이랑’이란 아이의 이름 뜻을 알려주었습니다 여기 움푹 팬 곳은 ‘고랑’이고, 이 길로 사람도 다니고 빗물도 다니지 이 고랑에서 밭두둑까지를 ‘한 이랑’이라고 한다며 발을 벌려 알려주었는데 자꾸 ‘고랑’을 ‘고랑이’이라고 부르는 울림이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울림이는 호미로 나는 삽으로 흙을 파내자 그 안에 무우를 넣었던 흰 쌀자루 끝자락이 보입니다 자루가 어느만큼 드러나자 손수레를 가지러 간 사이 울림이는 제법 깊은 구덩이에서 무우 한 자루를 꺼내놓았습니다 손에 묻은 흙을 털며 숨을 몰아쉬는 울림이는 안간힘을 썼나 봅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났냐고 묻자 도깨비 힘이라고 어깨를 올리며 뿌듯해 합니다 누군가에 보여 주고 싶어 둘러보지만 저만치 떨어져 난로에 지필 땔나무를 나르느라 아빠는 겨를이 없습니다 울림이는 도깨비 힘을 몰래 감추어 두었다가 울림이를 화나게 하는 사람을 멀리 던질 때 쓴다고 합니다
문득 논산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우리 반 아이였던 태연이와 원영이가 생각납니다 우리 반 반장이고 3학년 선배들도 이길 수 없었던 씨름꾼 원영이는, 키 작은 우리 반 아이를 업고 과수원 언덕길을 올라 은진 관촉사로 봄소풍을 갔지요 아이들 말로는 주먹으로 한 대 치면 맞은 사람이 교실 이 쪽 창가에서 맞은편 벽으로 나가떨어져 마을 어른들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태연이가, 주먹을 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학교 앞 구름산으로 놀러갔을 때 풀꽃을 묶어 내게 건네주던 태연이는 새벽 호수처럼 눈빛이 잔잔한 아이였습니다
집에 놀러 왔다가 혼자 돌아가려는 담인이를 지우가 바래다 주려 하자, ‘삼촌, 나무다리 지나 처음 돌계단 있지 거길 내려올 때 담인이가 힘들어 해’ 라고 걱정하던 울림이도, 깊이 숨겨 둔 힘을 제대로 쓰겠지요

*맞춤법에서 ‘무우’를 ‘무’라고 고쳐쓰자고 했을 때 어느 한글학자는, 이제 ‘무•우’라고 소리내는 사람은 없지만 눈으로 보는 글자니까 ‘무우’를 그냥 두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없다’를 뜻하는 ‘무’와 같은 글자와 헷갈릴 수 있으니까 그 생각이 떠올라 ‘무우’라고 적어 봤어요

 

12.4

온종일 절름거리는 비에 갇혔던 아이들이 해질녘이 되어서야 집으로 건너옵니다
장화를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방에 들어온 아이들은 주머니와 옷 속에 감추어 온 풍선과 그림책을 하나하나 꺼내 놓습니다
‘더 크게 더 크게’ 잇달아 이음이는 재촉하고 조금씩조금씩 부풀어오르던 풍선이 그만 터져버립니다 터진 풍선 주둥이 오목한 끝을 모아 붙잡고 힘껏 불자 풍선은 다시 봉긋 솟아오르고 순간 흐려졌던 이음이 얼굴이 환히 피어납니다
터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부풀리다 놓아 버린 울림이 풍선이 푸르르르 몸을 떨며 날아갑니다 어릴 적 지우와 놀던 놀이가 생각났습니다 ‘사람 풍선 놀이’
먼저, 내가 숨을 들여마셔 한껏 배를 내밀었다가 숨을 내쉬어 배를 쑥 들이밀고는 쓰러지는 시늉을 해보입니다
아이들은 저만치 침대 위에 서있습니다 손나발을 하고 내가 후우 소리를 내며 숨을 불어넣으면 아이들 배는 자꾸자꾸 부풀어오르고, 입에서 손을 떼자마자 아이들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찌그러져 아무데나 날아가선 쓰러집니다 때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쭈그려앉았다가 일어서선 까르르 넘어지고, 지우가 저녁 먹으러 가자고 하지 않았으면 언제까지나 이렇게 놀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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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밥을 지어 울림이 식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습니다 운달아 먹어서인지 울림이는 밥 한 그릇을 거뜬히 비우고 더 달라고 합니다
밥을 먹은 아이들은, 대청마루에서 사과를 깎는 내 둘레를 빙빙 돕니다 천천히 빨리 아이들이 멈추면 함께 멈추고, 달리는 아이들 발 빠르기에 맞춰 사과 껍질을 깎습니다 다 깎은 사과를 통째로 건네니 이음이 가슴속 기쁨도 잔뜩 부풉니다 야금야금 사과를 갉아먹다가 꼭지가 드러나니 ‘도토리사과’라고 부릅니다
다시 아이들이 돕니다 어질어질합니다 저러다 넘어질라, 나는 부산 영도다리가 되고 기차 건널목 차단기가 됩니다 아이들은 ‘대문놀이’라고 부릅니다 통행새는 인사를 하는 겁니다 손을 가지런히 눈썹 위에 붙여 ‘허수아비, 안녕’ ‘수염 할아버지, 안녕’ 이라며 장난스레 인사를 건네고 더러는 병원차라고 그냥 지나가고 더러는 상어가 되어 헤엄쳐 가기도 합니다
만날 때마다 장난을 치니 아이들은 아무리 해도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신용을 잃은 셈입니다 아까만 해도 그렇습니다 ‘곤충들의 운동회’라는 그림책을 읽어 주는데, 이야기 마지막에 다달아 사마귀가 나와 춤추는 장면에서 곤충들이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배꼽이 빠진다는 그런 말이 책에도 나오느냐고 할아버지가 끼어 넣었다고 마구 우기다가, 쪼르르 달려가선 엄마한테 가서 보여주고는 잠잠해집니다
나는 그저 책 읽어주는 할아버지, 같이 노는 동무일 뿐입니다 오늘은 점심을 먹고 일찍 왔길래 너희들 어린이집에 안 가서 좋겠다고 하니, 이음이가 대뜸 ‘할아버지도 좋지, 우리와 놀아서’ 라고 말을 던집니다 그나마, 아직도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12.9

‘나는 웃을라는 건데’
‘곤 친구나봐’ (곤’은 만화영화에 나오는 아기 용 이름입니다)
‘먹으지 그래’
아이들이 도토리나 솔방울 조약돌을 모으듯, 나는 이음이 말을 모읍니다

울림이 곁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는 이음이게, ‘할아버지는 구름아 놀자 하고 구름과 노는 그림이 너무 좋아’ 라고 하자 조물조물 고 조그만 입술로 이음이는 ‘나는 잘 못 그리는데 손이 그렸어’ 하고 말합니다
이음이는 ‘인어공주(사진2)’와 ‘꽃 기린’(사진3)을 그렸습니다 아내는 이음이가 그린 눈(사진1)이 참 선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요즘 들어 이음이는 걸핏하면 잘 토라집니다 제 성에 차지 않으면 ‘할아버지 싫어’ ‘할머니 싫어’ ‘삼촌 싫어’ ‘형 싫어’ 하며 구석에 고개를 박고 마음이 풀릴 때까지 마냥 서 있습니다 무슨 까닭인지 헤아릴순 없지만 미안하다고 달래 보기도 하고 저만치 떨어져 지켜보기도 하지만 마음이 아픕니다
오늘 아침 이음이는, 살짝 눈이 내려앉은 계단을 걸어 곧바로 오지 않고 갈참나무 아래 밭둑길로 빙 돌아옵니다 창 밖으로 내다보던 울림이가, 뒤뚱뒤뚱 이음이 걷는 흉내를 냅니다
네 살배기 이음이는 지금 뒤뚱뒤뚱 혼자 속앓이를 하며 자라나고 있습니다

 

12.10

이음이가 말한 ‘나는 잘 못 그리는데 손이 그렸어’를 어른들이 쓰는 말로 옮기면, ‘나는 잘 못 그리는데 어쩌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은 금이 구름 모양이 되어 마치 아이가 구름을 손에 쥐고 노는 듯한 그림이 되었어’가 아닐까요
시인과 아이가 다른 점은, 아이들은 제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낱말로 제 생각을 그려내는 데 있겠지요
집에 텔레비전이 없는 아이들은 주말이면 가끔 우리 집에서 만화영화를 봅니다 오늘도 엄마와 약속한 만큼만 보고 텔레비젼을 껐습니다 무얼하고 놀지라고 해서 우리 구들방에 가서 책 읽자고 하니 이음이가 싫다고 합니다 
만화영화를 보다가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에 가면 재미있는 장면이 지나갈까봐 끝내 방에 쓰레기통을 가져와 오줌을 눈 이음이, 만화영화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겠지요

나 : 너희들 눈 좀 쉬어야지
울림 : 쉬면서 보면 되지
나 : 어떻게 쉬면서 봐
울림 : (비스듬히 눕는 시늉을 합니다)
나 : 그게 쉬는 거니
이음 : (이불을 뒤집어쓰며) 이렇게 ‘얼굴을 없애고’
눈 좀 쉬자니까 이음이는 이불로 ‘눈을 가리고’ 보자는 것입니다

비늘 그리가 어렵다고 하며 울림이가 그린 인어공주, 그 곁엔 어릴적 못을 가지고 기찻길에서 놀던 내 이야기를 듣고 그린 그림입니다
기찻길 위를 달리는 기차와 못, 지렁이와 두더지가 그려져 있습니다

어른들은 머릿속 숱한 낱말을 알면서도 ‘상상의 문’ 앞에서 멈춰 서 버리고, 몇 안 되는 낱말을 가슴에 품은 아이들은 ‘상상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햇살 쏟아지는 파란 하늘을 마음껏 헤엄쳐 다닙니다

 

12.11

내 친구 순복이가, 이음이와 울림이가 그린 그림을 보자마자 몸에서 터져나오는 기쁨을 그대로 쏟아 놓습니다
‘와, 천상의 그림입니다. 바로 이것이지요. 내 생각을 없애면 하늘이 저절로 그려주는 그림, 시, 노래 들이 있지요. 그것이 우리를 감동케 하고 전율케 하고 우리의 기쁨이 되고 힘이 되고 ... 찬란한 오늘을 맞이하게 되리니 그것은 또한 영원하리라.’
예순이 넘어서도 아이 마음과 눈을 지닌 친구입니다

요즘 울림이네 어린이집 열매반은 고무줄로 노는 놀이가 한창인가 봅니다 며칠전엔 고무줄총을 만들어 놀더니, 어제부터는 손가락에 고무줄을 끼워 사진기를 만드는 걸 배워 내게 가르쳐 줍니다 언제인가 ‘할아버지, 내가 가르쳐 주니까 내가 할아버지 선생님이지’ 하던 울림이 말이 생각납니다

 

12.12

‘할아버지, 팔씨름 할래’ 울림이가 내기를 걸어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울림이에게 져주는 일은 없습니다 반칙을 써서라도 꼭 이깁니다
간지럼을 잘 타는 줄 알기에, 울림이 손목을 잡고는 손가락으로 손등을 간지르거나, 울림이가 더 힘을 주면 다른 한 손으로 겨드랑이를 간지럽힙니다 울림이는, 할아버지 반칙이라고 두 손을 모아 누르다가 몸을 일으켜 세워 온몸으로 내리누릅니다
이제는 또 씨름을 하자고 합니다 내던질 수도 없고,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하듯 ‘지는 씨름’을 하자고 말합니다 먼저 지려고 방바닥에 넘어지려는 울림이를 끌어당겨 안고는 뒤로 넘어져, 내가 이겼다고 좋아합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지는 씨름을 가르쳤습니다 학교에서도 ‘자전거 천천히 달리기’ ‘연필 깎기’ ‘새소리 알아맞히기’ ‘체육대회에서 꼴찌한 반 상품 모아주기’ ‘맨발로 걸어 보고 글쓰기’ 들을 하면서 지는 싸움, 천천히 사는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세상 밖으로 나가 늘 깨지고 들어오는 우리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너댓 살 먹은 아이와 아빠가 달리기 내기를 합니다 아빠들은 빨리 달리는 척하거나 넘어지는 시늉을 하여 아이에게 져주는데, 만화 속 아빠는 나처럼 주책없이, 번개처럼 달려와 내가 이겼다고 두 손을 들고 촐싹댑니다 한겨레신문에 실린 ‘비빔툰’이란 만화 한 장면입니다
아이는 제 힘껏 달려와 뒤늦게 결승선에 다다릅니다 엄마는 우리 다운이 잘했다고 이등을 해도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달려서 참 잘했다고 꼬옥 안아줍니다

 

12.13

군불을 때는 구들방에도 아내와 내가 없자, 뒤돌아서 집으로 가는 울림이를 불러세웁니다
‘할아버지, 좋은 소식 나쁜 소식 가운데 어느 것 먼저’
‘좋은 소식’
잠깐 생각하다가 ‘내가 온 것’이라고 대답하곤 울림이는 해죽이 웃습니다
나쁜 소식은 이음이가 독감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진화’라는 말을 자연스레 씁니다 무슨 뜻인지 물어보니 힘이 세어지는 거랍니다 동무인 산들이의 고무줄 사진기가 진화한다고 했을 때, ‘진화’는 성능이 좋다는 뜻이랍니다
오늘 울림이는 비가 어떻게 오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내가, 옛날 아이들은 비를 하느님이 눈 오줌이라 생각했다고 말했거든요
강물이 바다로 모이고 바다에서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이 조금씩조금씩 올라가 구름이 되어 비가 온다고 합니다
내가 ‘구름이 몸이 무거워 막 터는구나’ 라고 하자, 내 수준에 맞추어 ‘구름 속 괴물이 바닷물을 집어삼켜 내뿜는다’고 울림이는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줍니다
이음이 없이 혼자 있어서 그런지 울림이는 ‘할아버지의 아빠 엄마는 살아있는지, 동생은 몇 명인지’도 물어봅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쯤엔 무슨 생각이 났는지 혼잣말인 듯 ‘이 세상에는 하느님이 없을수도 있어’ 라고 합니다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울림이 말처럼 오늘 우리 집에 울림이가 온 것이 가장 좋은 소식이고, 아이들이 이 세상에 내려온 것이 하늘의 기쁜 소식입니다

 

12. 16

풀린 햇살과 함께 아이들이 건너왔습니다 두 눈이 때꼰한 게 몹시 앓았나 봅니다 아직 기침이 떨어지지 않아,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아내가 꼬옥 안아줍니다 아내 품에 안긴 이음이는 고개를 들어 아내를 올려다보더니 그 눈으로 다시 나를 쳐다보곤 싱긋이 웃습니다 
한아름 색칠 공부책을 펼쳐놓습니다 그동안 밖에 나오지 못해 방안에서 울림이와 색칠 공부를 하며 놀았나 봅니다 무지개 빛깔로 칠해 놓은 거북이도 있고, 책 겉장 안쪽에는 아이와 자동차인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자동차냐고 조심스레 묻자, 그림 속 아이가 생각하는 것을 그렸다고 하면서 무엇인지는 저도 모른다고 합니다
울림이는 집으로 되돌아가 곤충과 버섯, 나무도감을 가지고 왔습니다 힘에 겨운지 끙끙거리며 들고오다가 한 권은 도랑을 건너다 떨어뜨렸습니다
아무래도 나무나 버섯보다는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는 곤충에 더 관심이 가는지, 곤충도감을 펼치며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처음엔 개미, 다음엔 벌, 다음엔 바퀴벌레, 다음엔 집게벌레, 다음엔 지네 여기 이사 왔을 때 벌레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말벌이 나왔을 땐 119 아저씨들이 오고, 밖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2층 책상에 올라가 창 밖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봤다고 합니다
어제인가는 아빠가 무당벌레를 집어 변기 속에 넣었는데 울림이가 휴지로 건져 밖에 내보내 주었다고도 합니다
울림이는 버섯 이름도 많이 압니다 괴물버섯이라고 알고 있던 ‘마귀곰보버섯’, ‘노루궁뎅이버섯’ ‘번데기동충하초 ‘ ... 무엇 하나 내보일 게 없는 나는, 지리산 대나무숲에서 본 ‘망태버섯’을 자랑했습니다
곁에서 서리태를 고르고 있는 아내가, 아이들이 이리저리 콩을 섞어 놓자 이것 내다팔 거라고 하니, 울림이는 콩을 팔아 도감을 사달라고 합니다
그건 그런데 글씨를 모르는 울림이가 ‘벌실동충하초’라는 버섯 이름을 어떻게 외우고 있는지는 지금도 궁급합니다

 

12. 18

울림이가 와서 사고가 났다고 했을 때도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난 것을 보았구나 생각했습니다 손으로 가리키며 차를 바꿨다도 했을 때도 차가 또 고장이 났나 짐작했습니다
나중에 이음이와 같이 집에 와서 그림을 그려가며 해 준 이야기를 듣고서야 엄마 차가 사고가 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울림이 이야기 속 사건은 이렇습니다
‘왼쪽으로 감나무가 서 있는 야트막한 고갯길을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가는 마을길에서 일어났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차들이 지나다니는 큰길이 나옵니다 엄마는 아이들을 태우고 어린이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마을길은 겨우 차 한 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아, 앞에서 오는 흰 트럭을 보고 엄마는 자연스레 속도를 늦추었을 겁니다 브레이크를 밟자 미끄러지며 잠깐 비껴 선 트럭과 부딪쳐, 엄마 차는 왼쪽 도랑으로 빠지고 트럭은 아슬아슬 오른쪽 논둑에 걸쳤습니다 엄마는 처음엔 엔진이 고장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빙판길이었습니다 왼쪽 언덕이 높아 그늘이 지고 어젯밤 살짝 내린 눈비로 얼어 있었던 것이겠지요 흰 트럭을 몰고 온 사람은 마을 이장님인데, 마을사람 일곱이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울었습니다’
울림이는, 마치 차 안에 있지 않고 밖에서 사고를 보고 있는 듯 자세히 들려주었습니다 이음이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울림이가 쉬지 않고 이야기하자 엎드려 그림만 그립니다
너희들은 어땠냐고 묻자, 안전띠를 매어 아무 일도 없었다며, 할아버지들이 엄마 차로 다가와서, ‘우리’와 이음이를 안아 내리고 그 사이에 울림이는 혼자 빠져나왔는데 몇 번 넘어졌다고 합니다 아마 빙판길을 건너느라 그랬을 겁니다
아찔한 순간 엄마는 얼마나 놀랐을까요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며 들뜬 듯 이야기하면서 천천히 사고 속을 빠져나왔습니다

이음이 그림입니다 위에 오른쪽에 크게 그려 놓은 차가 엄마 차입니다 부딪친 곳은 까맣게 칠해 놓았습니다 가운데 아래 기차는 왜 그렸는지, 기차 오른쪽 아래 사람은 그리다 말고 왜 지웠는지는, 이음이 마음속으로 들어가 봐야 알겠지요

 

12.18

이음이가 종이를 돌돌 말아 유리테이프를 붙입니다 다시 종이 한 장을 말아 가로 세로로 붙여 십자 모양을 만듭니다 울림이가 방에 들어와 이음이가 만든 것을 보고 ‘나 따라 하지마’ 라며 십자 모양으로 만든 사이로 종이를 덧붙입니다
‘울림이는 좋겠다, 따라 하는 동생이 있어서’ 라며 미리 울림이 마음을 다독입니다
이음이가 묻습니다 ‘할아버지도 동생이 있으면 좋겠지’ ‘응’ ‘아기 동생이 있으면 좋겠지’ ‘그러엄’
어느새 울림이는 별 모양을 만들고, 이음이는 그걸 따라 합니다 울림이는 이음이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너 평생’이라고 하자, 마법에 걸린 듯 이음이는 따라 하던 것을 멈춥니다
‘너 평생, 뭐하고 했어’ 라고 따져 묻자 울림이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너 평생 안 놀아 준다고 했지’ 라고 떠보지만 아니라고 우깁니다 ‘평생 간지럼 태운다고 했지’ ‘평생 웃긴다고 했지’ ... 온갖 말로 대답을 끌어내려고 해도 멋쩍게 웃으며 아니라고만 합니다
무엇이 이음이를 얼어붙게 했을까요 아무래도 안 놀아준다고 한 것 같아 ‘나도 울림이가 안 놀아주면 슬픈 텐데, 엄마 아빠도 너희들과 안 놀아주면 슬프겠지’ 라고 말해 봅니다 그러자 뜬금없이 이음이가, 엄마는 우리와 안 놀아준다고 합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엄마가 얼마나 바쁜 줄 아느냐고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 젖 먹이고 회사 가는 아빠 아침 차려주고 ... 라며 엄마 편을 듭니다 나도 거듭니다 어린이집 안 가려는 너희들 붙잡아 차에 태워야지 너희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나무에 기어올라가고 땅을 파 들어가고 도랑을 헤엄쳐가고 ... 아이들은 소리 없이 웃으며 그림책 보듯 신나게 내 이야기를 다 듣고 있다가 그런 적 없다고 딱 잘라 말합니다
책상 다리에 기대어 풀죽어 앉아있는 이음이 마음을 딴 데로 돌리려고 ‘단이가 낳은 강아지가 눈을 떴어 까만 게 참 귀여워’ 라고 하니, 이음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장난말로 ‘할아버지 옆에서 없어져서 봤어’ 라고 합니다
이음이가 집에 갔다 온다고 하자 울림이도 따라 나섭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말은 ‘너 평생’이라고 해도 울림이와 이음이가 서로를 얼마나 아끼는지
부엌 창문으로 바라보니, 울림이가 뒤따라오는 이음이 손을 붙잡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습니다

* ‘할아버지 옆에서 없어져서 봤어’는 ‘할아버지 옆에서 몰래 숨어서 봤어’ 라는 이음이 말입니다
* 사진은,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보고 있는 지우를 흉내내는 이음이
모습입니다

 

12.12

‘할머니, 할머니’ 울림이가 소리칩니다 부엌과 대청마루 사이에 난 창문으로 까치발을 딛기도 하고 폴짝폴짝 뛰면서, 저를 보아 달라고 할머니를 부릅니다 아마도 키를 자랑하고 싶은 듯합니다
아무리 해 봐도 이음이 키로는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할머니를 볼 수 없습니다 이음이는 대청에 놓인 방석을 가져다 쌓고 그 위에 올라가 힘껏 손을 뻗쳐 보지만 창턱에도 닿지 않습니다 
울림이도 방석을 들고 와 이음이가 쌓아놓은 곁에 쌓아올립니다 이웃에 살다가 이사를 가 이제는 손님으로 온, 다섯 살 난 우림이도 방석 하나를 짚더니 그냥 놓아두고는 부엌으로 들어갑니다 
울림이는 우림이가 두고 간 방석을 들어 덧쌓으려고 하는데, 우림이가 달려와 무턱대고 방석을 잡아당깁니다 울림이는 놓아주지 않고 금방이라도 싸움이 터질 듯합니다 ‘울림아, 그건 우림이가 집었던 건데’ 라며 울림이를 달래자, 마지못해 놓기는 했지만 마음이 언짢은지 울상을 짓습니다 
이럴 땐 나도 어찌할 바 몰라 굳은 듯 서있습니다 방석 위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울림이를 보며, 이음이 눈에는 슬픔이 물결칩니다 문득 무슨 생각이 스쳐갔는지 얼굴이 환해지더니 ‘이렇게 하면 다 볼 수 있는데’ 라고 소리치며 이음이는 부엌으로 달려갑니다 부엌에 할머니가 있으니까요
울림이는, 이음이가 쌓아 놓은 방석을 들어다 더 높이 쌓습니다 이음이 말 한 마디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문제가 쉽게 풀렸습니다 그 지혜는 머리에서 온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왔음을 이음이 눈빛이 말해줍니다

오늘도 이음이가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울림이는, 이제 장난말이 되어 버린 ‘너, 평 ... ‘ 이라고 말합니다 ‘할아버지 다 알아, 너 평생 안 놀아 준다고 했지 할아버지가 니 마음속에 들어가 봤거든’ 아무말도 않는 걸 보니 내 짐작이 맞나 봅니다
‘어떻게 들어가는지 알아’ 라고 묻자 울림이는 고개를 젓습니다 ‘코로 들어가는 거야’ 라고 하며 나는 어떻게 코로 들어가는지 보여 준다고,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가지런히 무릎에 두 손을 얹고 눈을 감습니다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려고 하는데,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눈 떠 눈 떠 봐’ 이음이가 소리칩니다 눈을 떠보니 글쎄, 울림이가 한 손으로 코를 쥔 채 큭큭대고 있습니다 덩달아 이음이도 코를 틀어쥡니다 저렇게 코를 막고 있으니 오늘 울림이 이음이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글렀습니다

 

12.22

‘할아버지, 정말 하늘나라가 있어’ 울림이가 묻습니다
오래 전 한 할머니 수녀님이 성당을 떠나시면서, 남아 있는 수녀님에게 ‘자매야, 우리 나중에 집에서 만나자’ 라며 헤어지는 인사를 나누는데, 나는 그 말이 슬펐습니다 어쩌면 그 말은 수도원에서 다시 만나자는 뜻이었을 텐데, 나는 이 세상에 나그네로 살다가 돌아갈 집을 떠올렸습니다
‘울림아, 사람들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지’ 라고 하자 그건 안다고 합니다 돌아간다는 말은 온 곳으로 도로 간다는 뜻이니까, 사람이 죽으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데, 그곳을 ‘하늘나라’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 구름이 떠다니고 새가 날아다니는 하늘을 가리키는 것을 아닐꺼야
그러자 앉음새를 바로하며 공룡은 어떻게 생겨났느냐고 진지하게 묻습니다 늘 궁금했나 봅니다
‘공룡은 먼 별에서 왔을까, 질흙으로 빚은 것일까’ 생명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다고 해 ‘우리’가 엄마 뱃속에서 헤엄치며 놀다가 세상에 나와서 두 발로 기어다니다고 이제 뒤뚱뒤뚱 걸으려고 하는 것처럼, 공룡도 그렇게 생겨난 건 아닐까
그러자 ‘할아버지, 우주는’ 이라고 묻더니 어디에서 들었는지,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모으며 이렇게 작은 점이 폭발하여 우주가 되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잘 몰라 아빠한테 물어보면 쉽게 말해줄 거라고 하니 울림이는 아빠도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아빠가 하는 일을 말해 줍니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살고 건강하지 않고 시골에는 사람들이 적게 사니까 도시 사람들이 시골로 오면 도시와 시골이 다 좋아진다’며 아빠는 그런 일을 한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음이 자는 거 보고 온다고 늦었는데, 지금 깨어났을지 모른다며 울림이는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12.24

아, 울림이에게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하늘나라를 말해 주지 않았군요
풀과 나무,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와 하늘을 나는 새, 가시덤불 속 토끼와 언덕을 오르는 사슴, 이음이와 울림이가 서로 사이좋게 어울려 재미있게 노는 세상이 하늘나라라고
나도 잠깐 하늘나라를 맛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해 가을 개심사로 소풍을 갔습니다 학교에서 개심사는 걸어서 두세 시간 걸릴 만큼 꽤나 멉니다 소풍이 끝나고 아이들은 거의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걸어서 학교에 왔습니다
깻송이 싸아한 바람, 맑은 햇살에 여문 콩꼬투리 터지는 소리 한참을 걸어오는데 밀잠자리 한 마리 날아와 내 어깨에 날개를 접습니다
잠자리와 함께 숨을 고르며 학교 운동장 구령대에 앉았는데 처음 보는 동네아이들이 달려와 내 가슴에 안기고 목에 기어오릅니다 한 순간 꿈인 듯 그윽한 고요 속에 잠겼던 적이 있습니다

고요한 평화 속을 헤엄쳐 오늘, 성탄엽서를 입에 물고 아이들이 날아와 앉았습니다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는 내 나무 맨꼭대기에 가장 밝게 빛나는 별입니다

 

12.28

동짓날엔 아이들과 함께 마을회관에 들러 동네 할머니들이 쒀 준 팥죽을 먹었습니다 아이들 입맛에는 맞지 않는지 울림이만 몇 숟가락 뜨고 이음이는 손도 대지 않습니다 그런 줄 알고 엄마는 미리 김밥을 준비했습니다
점심을 먹고는 내포에 있는 도서관으로 갔습니다 읍내를 벗어나 덕산으로 빠지는 길목에서 차가 밀리는지 한참 머뭇거립니다 차가 빨리 안 간다고 이음이가 투정을 부립니다
‘할아버지가 도서관을 당겨올까’ 하니 이음이는 무슨 말인가 눈이 동그래지고, 울림이는 믿지 않는 말투로 ‘그래 한 번 해 봐’ 라고 합니다
내가 힘껏 끌어당기는 척하니까 어느 새 차는 무리 속을 빠져나와 달립니다 ‘봐, 할아버지가 당기니까 차가 앞으로 나아가지’ 라고 하니까 울림이는 ‘그냥 차가 가니까 그렇지’ 라고 우깁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린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줄다리기 하듯, 길가에 서 있는 높은 집도 멀리 보이는 용봉산도 끌어당기며 눈 깜짝할 사이에 도서관에 닿았습니다
늘 와 보고 싶었는데, 도서관에 들어서니 산뜻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이 나들이 온 듯 편안합니다
넓고 바닥도 푹신하여 뛰어놀면 좋겠다고 하니 이음이는, 뛰어도 안 되고 큰소리를 내도 안 된다고 합니다 내가 크게 소리 지르는 척했으면 고 조그만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을 겁니다
왼쪽에 울림이 오른쪽에 이음이를 앉히고 가져다 쌓아놓은 그림책을 읽어주는데, ‘할아버지, 여기 아 아 아 써 있어’ 라고 작은 목소리로 울림이가 말합니다 ‘그렇구나 아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작게, 조금 크게, 아주 크게 차츰 커지면서 ‘아’가 써 있습니다 ‘우리 이렇게 소리 질러볼까’ 말이 떨어지자마자 손나발을 만들어 이음이가 낸 소리가 크고 맑게 도서관에 퍼집니다 다행히 아무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울림이는 ‘아’ 하고 입만 벌리고 있어 너는 왜 소리 지르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제가 낸 소리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책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아이들을 가까스로 떼어내어 집에 돌아왔습니다.

 

2019.1.5

온 식구가 처음 함께 기차를 탔습니다 강화에 사는 외할아버지 집에 다녀왔습니다 울림이는 생태박물관으로 기억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어린이박물관에서 겪은 일이 가장 많이 생각이 나나 봅니다 문밖에 서서 봇물 터지듯 거기서 보고들은 것을 쏟아냅니다
방에 들어와서도, 집으로 되돌아가 가져온 박물관 지도를 보이며 자세히 이야기해 줍니다 외할아버지와 바둑 둔 이야기, 아는 이모를 만난 이야기도 들려주고 머리가 하얀 이상한 할아버지가 준 단소와 소금도 꺼내 보여줍니다
이음이는 무엇을 줘도 통 입에 대지 않습니다 아내가, 따뜻한 아랫목에 뉘여 배도 만져주고 손도 주물러 줍니다 얼굴이 말가니 더욱 안쓰럽습니다 한참이 지나 괜찮아졌는지 찐 고구마를 달래서 먹습니다
박물관에서 가져온 책자를 펼쳐 색칠을 합니다 울림이는 무지개 빛깔로 섬세하게, 이음이는 산도 사람도 다 초록색으로 칠합니다
이음이는 초록색을 좋아하는구나 하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마음 속에 들어가봤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라고 하며 ‘할아버지 콧구멍에 들어가 생각해봤어’ 라더니 말이 없습니다
이제 몸이 다 나았는지 뛰어다니며 장난을 칩니다 한참 울림이와 뛰다가, 울림이가 이음이보고 어서 쉬하고 놀자고 합니다 이음이는 오줌이 안 마렵다고 하고, 그래도 울림이 말이 맞겠지 하고 화장실에 가 오줌을 누입니다 오줌을 누면서도 이음이는 안 마려운데 라고만 합니다
오줌이 마려운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울림이한테 물어보니 비밀이라고 안 가르쳐 줍니다 겨우 이음이한테 물어봐서 알았습니다 이음이는 일어서서 두 다리를 붙이고 몸을 비트는 흉내를 냈습니다
초등학교 신입생 임시 소집이 있어 아이들은 돌아가고 아내가, 이음이가 ‘지우 삼촌 아직도 아파’ 라고 물었을 때 고맙고 가슴이 찌릿했다고 합니다 밤에 몰래 놀러온다던 이음이는 오지 않습니다.

 

1.6

시내버스를 타고 읍내 목욕탕에 갔습니다 장터에 있는 목욕탕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몹시 붑빕니다 하동 악양에 있는 목욕탕이 생각납니다 
목욕비 삼천 원에 어른 서넛이 들어가면 꽉 차버리는 욕조, 수도꼭지 다섯인 작은 목욕탕이지만 지리산 형제봉 우리 집 곁을 흐르는 골짜기 물을 받아 참 깨끗했습니다
발을 닦다가 아이들 생각이 납니다 울림이는 갈라진 내 발뒤꿈치를 보며 할아버지 발에 지진이 났다고 하고, 엎드린 내 등에 올라타 널 뛰듯 뛰던 이음이는 벌집이라고 합니다
내 옆에 한 할아버지가 조심스레 손으로 발을 문지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실까 몇 번 망설이다가 제가 등을 밀어드릴까요 라고 했더니 선뜻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진 몰랐습니다 등을 밀다가 보니 할아버지는 오른팔이 없으셨습니다
왼쪽 어깨 둘레와 팔뚝 아래까지 찬찬히 밀어 드렸습니다 울림이와 이음이가 있었어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1.7

울림이가 놀다가 두고 간 장난감과 나에게 읽어 보라고 빌려준 책입니다
울림이는 오른쪽 두 번째 파란 공룡을 좋아합니다 그날도 이음이가 그 공룡을 가지고 싶다고 하자, 집에 도로 가서 전갈과 새 모양의 공룡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도 아음이는 형이 가진 것이 더 멋져 보이는지 그 파란 공룡을 달라고 떼를 씁니다 금방 울음이 터질 듯합니다 울림이는 선선히 내놓습니다
제 것을 꼭 챙기는 울림이에게는 좀처럼 없는 일입니다 웬 일이냐고 울림이를 꼭 끌어안아 줍니다 어떻게 그런 마음을 내었느냐고 자꾸 다그치자 ‘그냥 주면 되지’ 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합니다
어제 오늘 아이들이 오지 않아서 도서관에 갔나 어린이집에 갔나 궁금했는데 둘 다 배탈이 났다고 합니다 이럴 땐 내 손에 신비한 힘이 있어 닿기만 하면 요술처럼 아픈 배가 나았으면 좋겠습니다
늦깎이 목사님이 된, 내 친구 병진이가 생각납니다 신도들이 아플 때 나는 치유할 아무런 힘도 없고 다만 하느님 앞에서 눈물을 흘릴 뿐이라던

 

1.12

편을 갈라 놀 때는 이음이는 언제나 울림이 쪽으로 갑니다 콩을 고르는 내기를 할 때도 울림이가 가르쳐 준 놀이를 할 때도 울림이와 편을 먹습니다 너희들 어떻게 이렇게 사이가 좋으냐고, 떼어 놓고 싶은데 어떻게 하지 라고 물으니, 이음이는 마음을 바꾸면 된다고 합니다 이음이 마음을 바꾸기보다 내 마음을 바꾸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엉겨붙고 나뒹굴며 놀다가 느닷없이 울림이가 이렇게 아빠다리를 해 보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 하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며칠 전 울림이한테, 내가 잡아줄 테니까 꼿꼿이 서서 뒤로 넘어져 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땐 불안했던지 허리를 숙인 채 엉덩이로 내 무르팍에 주저앉거나, 주춤주춤 발뒤꿈치를 디디며 쉽게 넘어지지 못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오늘은 오롯이 몸을 맡기고 무릎과 허리를 곧게 편 채 몇 번이고 뒤로 넘어집니다 아내가 ‘우리 울림이가 마음이 참 넉넉해졌구나’ 라고 하니 아내에게 가서도 똑같이 해 보입니다
아내가 경상도 사람인 줄 아는 울림이는, 아내한테 ‘악어, 쌀’을 소리내 보라고도 합니다 아내가 ‘아그, 살’이라고 하자 우리 외할머니와 같다고 합니다
하루 하루가 다르게 울림이와 이음이 생각이 자라나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백 더하기 백 더하기 백은, 백삼이 아니고 삼백이라는 것도, 백이 열 번이면 천이라는 것도 울림이 혼자 생각해서 알아냈다고 합니다
울림이를 따라 이음이도 돌계단 길을 올라갑니다 ‘자고 일어나서 놀아’ 라는 이음이 말이 밀려오는 어둠을 잔잔히 흔들어 놓습니다

 

1.17

어디에서 들었는지 울림이가 ‘빛의 속도로 달리면 시간이 늦어진다’며 울림이 저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내가 빛의 속도로 달리게 밤새도록 연습할 거라고 하니, 듣고 있던 이음이가 ‘헤드렌턴을 몸에 넣고 달리면 되지’ 라고 말합니다.
‘옷 속에 말고 몸 속에 넣어야지’ 하는 울림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손전등을 옷 속에 넣고 아이들은 두터운 겉옷을 벗고 어둑어둑한 마당을 달립니다. 엄마가 말리는데도 그예 위 아래가 붙은 거추장스러운 북극곰 옷을 벗어던지고 내복만 입은 채, 울림이는 빛의 속도로 돌계단을 올라 사라졌습니다.

 

1.18

누웠다가도 이음이 표정을 떠올리면 웃음이 터져나옵니다. 어제도 울림이와 이음이가 같은 편을 먹고 내게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울림이는 손전등을 켜 불칼이라며 대들고, 이음이는 대나무를 다듬어 만든 등긁이 칼로 나를 내려칩니다. 손가락 끝과 머리와 이마를 마구 때려 너무 아픕니다. 에라 모르겠다, 너도 한 번 맛봐라. 두루마리휴지로 이음이 이마를 때리는 순간, 이음이 표정이 너무 우습습니다. 멍하니 아프긴 한데 이게 장난인지 아닌지 울지도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입니다. 내가 먼저 울림이한테 엄살을 떨며 일러바칩니다. 이음이가 여기저기 때려 겁나게 아프다고. 이음이는 볼 낯이 없던지 내 등 뒤로 와선 손바닥으로 내 두 눈을 가리고는 할아버지가 없다고 합니다. 나중에 엄마가 왔을 때도 ‘엄마, 이음이가 할아버지를 때렸어’ 라고 울림이가 일러바칩니다. 참 쌤통입니다.

 

1.20

어느 글에서인가 ‘아옹다옹’이란 말이, 고양이와 개가 싸우는 소리를 흉내낸 말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한데 우리 집 개와 고양이는 사이가 좋습니다. 강아지들은 고양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등에도 올라탑니다.
강아지들은 어미인 ‘단’에게서 배우고, ‘단’은 이웃집에서 기르다 두고 간 ‘보리’를 따라 배웠겠지요.
울림이는 동무인 ‘산들’이를 따라 집으로 올라가고, 나는 혼자 남은 이음이를 외발 손수레에 태워 요리조리 흔들며 산길 한 바퀴를 돕니다.
가는 길에 산비탈에 앉아 조그만 돌도 줍고 가랑잎도 주워 만져봅니다. 고양이 ‘호미’와 ‘호미’를 따라온 강아지 한 마리와 나란히 앉아 나무 사이로 다랑논을 내려다봅니다. 나는 이 순간을 고이 담아 마음속 사진첩에 끼워 둡니다.
비탈 아래로 미끄럼 타듯 내려갔다가 이음이를 안고 올라옵니다. 가파른 비탈을 서둘러 오르다가 이음이를 안은 채 넘어졌습니다. 
이음이는 뒤로 나는 앞으로 넘어졌는데, 이음이가 ‘할아버지, 괜찮아’ 라며 걱정스레 묻습니다. 
‘이음이가 괜찮으면 할아버지는 다 괜찮아’ 나는 이음이를 다시 손수레에 태워 집으로 갑니다.

 

1.22

‘할아버지, 아파트에도 이름이 있어’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이음이가 스스로 생각해 낸 듯 하는 말입니다. ‘아, 그렇구나’ 나도 처음 들어본 것처럼 놀라듯 말하니, 아파트 이름이 ‘부영’이라고 합니다. ‘부영아파트’는 여기 이사 오기 앞서 이음이가 살 던 곳입니다. 
할아버지 집 이름도 지어 달라고 하니, ‘따듯집’이라며 할아버지 집은 따듯하니까 따듯집이랍니다. 군불을 때는 바깥채 온돌방이 따듯하기 때문입니다.
가게에 가서 엄마가 장을 보는데도, 아이들을 가게 문 앞에서 놀고 있습니다. 이 나이 때 아이들은 졸졸 엄마 뒤를 따라 다니며 이것저것 사 달라고 조를 텐데. 울림이는 복잡한 기능을 가진, 종이로 만든 리모컨에 다시 종이를 돌돌 만 안테나를 끼워, 이음이와 무전기 놀이를 합니다.
엄마는 장을 보다가도 아이들이 먹을 것을 살 때에는, 아이들을 불러 어느 것이 좋은지 물어보고 고릅니다.
웃풍이 세고 바닥이 차가워 방 안에 텐트를 두 겹이나 치고 전기담요를 깔고 자야 하지만, 이음이와 울림이가 사는 집은 참으로 따듯합니다.

-

‘이음도 손을 씻어야지’ 먹을것을 조금 차려 놓고 아내가 말합니다. 이음이는 아직 키가 작아 수도꼭지에 손이 닿지 않습니다. 받침대를 갖다 주었는데도 그예 세면대 위에 올라간다고 안아 달라고 합니다. 거품비누를 짜서 손을 씻는데 꼼지락꼼지락 어느 시절에 끝낼지 모르겠습니다. 한동안 꾸물거리다가 쉬가 마렵다고 합니다. 손등엔 아직 거품이 남아 있습니다. ‘아이고, 이음이는 장난꾸러기구나’ 하니 이음이는 ‘내가 장난꾸러기가 아니고, 쉬가 장난꾸러기야’ 라고 합니다. ‘맞아, 이음이는 쉬를 안 하려고 하는데, 쉬가 마렵다고 하는구나’ 하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시원스레 오줌을 누고 다시 세면대로 달려갑니다.

 

1.24

밥을 먹다가 이번에는 이음이가 아내를 놀립니다. ‘할머니, 악어라고 해 봐’ 곁에서 엄마 웃음소리가 터져나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악어(아거)’를 ‘악오(아고)’ 라고 자꾸 틀리게 소리내며, ‘어’와 ‘으’를 잘 가려내지 못하는 아내가, ‘악으(아그)’라고 틀리게 소리내길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어릴적 지우가 생각납니다. 쌕쌕이 비행기가 낮게 날아 찢어질 듯 소리가 커, 우인이가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면 저도 누나를 따라한다며 귀 위쪽에 토끼귀처럼 두 손을 대곤 했지요.
아직도 왼쪽 신과 오른쪽 신을 가리지 못해 바꿔 신고 다니는 이음이. 어제도 오줌을 누이며, ‘쉬가 장난꾸러기구나’ 라고 하니까, ‘할아버지, 쉬를 혼내 준다고 했는데 왜 아직 안 혼내 줬냐’며 도로 나를 혼내는 이음이. 이음이가 있어 세상은 날마다 첫날이고 나는 나이를 거꾸로 먹습니다.

 

2.1

곁에서 엄마가 시켰는지 책 읽듯 ‘고맙습니다.’ 말하고는 울림이는 이음이에게 전화를 건네주었나 봅니다. 
이음이는 다짜고짜로 그 과자가 어디에서 났냐고 묻습니다. 어제 아이들 외삼촌이 과자를 보내주어서, 울림이 이음이 몰래 엄마 혼자 두고 먹으라고 문 앞에 두고 온 과자입니다.
서랍 속과 장롱 안과 다락 위 우리 집 살림살이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음이는, 그 과자 상자가 갑자기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퍽 긍금했을 겁니다.
나 : 할머니 오빠가 보내줬어.
이음 : 할머니도 오빠가 있어. 
나 : 그럼, 할머니한테도 오빠가 있지.
이음 : 왜 안 알려 줬어.
나 : 미안해, 안 알려 줘서.
이음 : 괜찮아. 지금 알려 줬으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서두는 듯한 울림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할아버지, 우리가 걸었어. 아무 것도 잡지 않고.’ 드디어 우리가 한 발 첫걸음을 뗐나 봅니다.
아지랑이 봄날 아장아장 걸어 상긋한 생강나무 꽃내 번지는 오솔길 따라 ‘우리’도 우리 집으로 날아오겠지요.

-

참 오랜만에 울림이와 이음이가 왔습니다. 너희들 이름도 다 잊어버렸다고, 장난스레 이름을 다시 물어 보기도 했습니다. ‘황이음이야’ 
이음이는 나무 인형을 보이며, ‘걱정인형’이라며, 걱정이 있을 때 밤에 말하면 걱정인형이 대신 걱정해 준다고 합니다. 이음이는 걱정이 무어냐고 물으니,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너무 떠든다는 겁니다.
아내가, 할머니도 걱정이 있으니 지금 말할까 하니, 밤에 해야 된다고 해서, 하룻밤 걱정인형을 빌려주었습니다.
울림이는 졸업식이 곧 다가오나 봅니다. 울림이가 졸업식에서 할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듣고, 나도 외웠습니다.
‘산책 도깨비캠프 바깥놀이 논학교 지나간 일들이 모두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울림이 말이 아니고 어른들이 써 준 말이라, 자꾸 고쳐 줘도 ‘산책 도깨비 캠프...’라고, 도깨비와 캠프를 띄워서 문장을 책 읽듯 통째로 외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방에 활짝 봄을 피워 놓고, 내가 끌어주는 손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2.10

그 새 울림이는 레고를 가져온다고 집으로 되돌아가고, 뒤따라온 이음이가 방에 들어오며 기침을 합니다. 기침도 데리고 왔구나 하니, 이음이는 ‘나는 안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기침이 쫓아왔어’ 라고 합니다. 그렇구나 이음이는 안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라고 하자, 이음이는 ‘응’이라며 ‘기침이 내 달리기보다 더 빨라’ 라고 합니다.
엊저녁에는 군불을 때려고 하는데, 이웃에 사는 주강사님이 오셔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들을 온통 재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듯싶어 물어 보니 그렇다고 합니다. 
내가 전에 재를 치우는 것을 본 울림이가 아궁이 밖에서 재를 끌어내다가 깊숙이 손이 닿지 않으니까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어떻게 들어갔냐고 하니, 이음이는 이렇게 들어갔다며 두 손을 몸에 딱 붙여 보입니다.
오늘은 아이들에게 준다며 아내는 난로를 피워 고구마를 굽고 땅콩을 볶으며, 나는 난로 곁에서 울림이가 가져온 책을 읽어 줍니다.
존 버닝햄이 쓴 ‘호랑이가 책을 읽어 준다면’이란 그림책을 읽어 주며, 어떤 것이 더 좋고 싫은지 물어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를 놀리는 게 싫어’ ‘아니면 독수리가 네 옷을 몽땅 훔쳐가는 게 싫어’ 라고 하니, 울림이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놀리는 게 더 싫다고 합니다. 독수리가 훔쳐가도 옷은 다시 입으면 되지만, 사람들이 놀리는 것은 기억에 남기 때문이랍니다.
그렇게 똑똑한 녀석이 난로에 불을 조절하는 쇠를 덥썩 잡아 오른쪽 집게손가락을 데고는 울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 있습니다.

 

2.12

최대한 기침보다 더 빨리 갔다온다던 이음이가 뒤늦게 방으로 들어서며 무슨 까닭인지, ‘저절로 마음이 바뀌었다’며 엄마가 떠 준 예쁜 목도리를 두르고 집으로 돌아가고, 끙끙대며 자연 이야기책 여섯 권을 들고온 울림이도, 두 시간만 놀다오라고 했다며 짠 하고 손을 흔들며 계단을 올라갑니다. 참, 울림이가 지난번 난로에 덴 손은 왼쪽 엄지손가락이라고 합니다.
사진은, 요즘 울림이가 만들어서 하는 놀이 카드입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1, 감옥 2, 불도끼 3, 바위 4, 공간 이동 5, 방패 6, 손 레이저 7, 투명인간
보기를 들어, 1번 감옥 카드를 내놓으면, 공격을 받은 사람이 감옥에 갇히는 겁니다.

 

2.26

울림이와 이음이가 냉이를 캔다고 그릇을 들고 걸어옵니다.
아이들은 냉이 한두 뿌리를 뜯어놓고는, 하켄처럼 호미를 땅에 꽂아 힘을 주고 언덕을 오르내립니다. 온통 흙투성이입니다.
다랑논 이쪽 저쪽 오가며 원앙이가 웁니다. 우리 집 왼쪽 다랑논 맨 위쪽 못에는 원앙이 한 쌍이 삽니다. 아이들이 언덕에 앉아 원앙이 소리를 흉내냅니다. ‘오랑 오랑’ ‘오르랑오르랑’
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는 명절이나 경삿날에는 부녀자들이 모두 꽃으로 머리를 장식하는 풍습이 있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의 아내가 남편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만일 우트팔라꽃을 얻어 내게 주면 나는 당신의 아내로 있겠지만 얻어 오지 못하면 나는 당신을 버리고 가겠습니다.”
그 남편은 이전부터 원앙새 우는소리 흉내를 잘 내었다.
그래서 곧 궁궐 연못에 들어가 원앙새 우는소리를 내면서 우트팔라꽃을 훔치고 있었다.
그때 연못을 지키는 사람이 물었다.
“연못 가운데 그 누구냐?”
그는 그만 실수하여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원앙새입니다.”
연못지기는 그를 붙잡아 데리고 왕에게 갔다. 가는 길에 그는 다시 부드러운 소리로 원앙새 우는소리를 내었다.
연못지기는 말하였다.
“너는 아까는 내지 않고 지금 원앙새 우는소리를 내어 무엇 하느냐.”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다짜고짜로 이음이를 바라보고, ‘연못 속 거기 누구냐’고 소리치자, 이음이는 고 귀여운 입으로 ‘오랑오랑’이라며 원앙이 소리를 냅니다. 다섯 살짜리 이음이는 내 이야기를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울림이를 돌아보며 똑같이 ‘너는 누구냐’고 묻자, ‘나는 황울림이다’ 라고 능청스레 말합니다.
‘에고, 그러니까 잡혀가지’라고 하니까, 울림이는 저한테 다시 물어보라고 합니다.
‘너는 누구냐’고 되묻자 울림이는 ‘개굴개굴 ‘ 소리를 내기도 하고, ‘쉭쉭’ 혀를 내밀며 뱀을 흉내내기도 하고, ‘너는 누구냐’를 따라하며 메아리라고도 합니다.
아내가 점심을 먹자고 부릅니다. 아이들과 같이 가락국수와 어묵을 먹다가 슬그머니 울림이에게 장난을 겁니다.
‘울림이 너 아까 잡혀갔잖아. 여기 있는 울림이는 가짜지’ 라고 말하니, 울림이는 진짜라고 우깁니다. 너 이야기 속에서 잡혀가지 않았느냐고 덩달아 나도 우깁니다.
곁에서 이음이도 ‘형 목소리가 달라졌어’라고 함께 거듭니다. 울림이는 진짜라고 하면서도 차츰 목소리가 움츠러듭니다. 나는 ‘울림이 너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잘 모르겠지’ 라며 자꾸 벼랑 끝으로 밀어붙입니다.
아내가 안돼 보였는지 ‘이마에 상처를 확인해 보면 되잖아’ 라고 합니다. 무릎에 눕히고 울림이 앞머리를 들춥니다.
‘아, 여기 상처가 있구나. 진짜 울림이구나’ 라고 하니 그제야 울림이 얼굴도 목소리도 환해집니다.

 

 

3.

아직 다 옮기지 못한 할아버지와 꼬박이들의 봄, 여름의 이야기는 (정말로)곧- 

더불어 나의 이야기도 앞으로 다시, 차근차근 시작해 보아야지: )

:

<아빠 바람 사진기록>

 

해원이 글에 자극 받아, 사진첩을 펼쳤다.

 

2018년 끝자락을 다시 보니

아이들은 마냥 행복하구나. 나도 참 행복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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