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른이 되었다.

아주 아주 오랜만에 쓰는 첫 일기는 서른이 된 나의 이야기부터 시작 해 보려고 한다.




서른에 맞이한 나의 첫 겨울은 동굴 속의 나날이었다.


울림이가 학교에 가고, 이제 어딘가에 정착해서 살 생각을 하니 그동안 크게 신경 쓰지 않던 지역의 일들과 관계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자신있게 장착 해 두었던 뻔뻔함들이 한꺼풀씩 벗겨지고 나를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더 두려워 졌다.

이런 나의 우울함과는 무관하게 삼형제를 수반한 집안에 다양한 일들은 무심하고 야속하게 밀려왔다.

하지만 그 우울한 날들을 나도 그저 무심하게 지내다 보니, 다시 별거 아닌 일들이 되어간다.


그렇게 봄이 오고, 움츠렸던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한번 켠다.

다시 나의 자리를 찾아 관계를 맺을 용기가 생겨난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 하는 것, 내가 해야 하는 것들을 그저 무던히 해 나가야 겠다 생각 한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누군가의 삶에 내 삶을 빗대어 휘둘리지 말고 나는 그저 내 일을 해나가자 마음 먹는다.




우리를 낳고 이사를 와서 여러모로 많이 지쳐 있어 한참 정체 되어 있던 나의 관심사와 정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또 실천해 보려는 요즘이다. 


요즘 마음이 가는 -자급자족, 수작업, 어린이와 자연- 을 주제로 할 수 있는 만큼의 것들을 해보려 한다.

마당에 목화 심기, 작은 텃밭이지만 작물 키우기, 아이들과 아지트 만들기, 어린이 장터 등등-

올해는 좋은 인연으로 일주일에 한번 여러가지 수작업을 주제로 풀무학교에 수업도 나가게 되었다.

재밌는 일들과 좋은 인연이 생길거 같아 매주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간다.



날씨가 좋아지니 꼬물꼬물 동굴 밖으로 나올 힘이 생긴다.




2


오늘은 울림이가 장염에 걸려 처음 학교를 빠졌다.

주말 부터 우리가 내동 설사를 하더니 옮았는지 어쨌는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파해서 쉬기로 했다.

울림이가 학교에 안가니 이음이도 당연하다는 듯 어린이집에 가지 않고 

혼자 세 녀석들 데리고 의료 생협 갔다 치과 갔다(하필 오늘 예약ㅠ) 장까지 보고 들어 왔더니 오후 2시.

울림이는 고단했는지 방에 누워 있다 잠들고 우리랑 이음이랑 나는 날이 너무 따뜻해 밖으로 나갔다.

닭 풀어주고(지네좀 많이 잡아달라고 재촉하고) 마당 풀도 뽑고 아랫집에도 내려갔다 데크에 돗자리 펴고 놀다보니 하루가 다갔다. 

해질 무렵 울림이도 일어나 어기적 어기적 아픈 몸을 이끌고 데크로 나와 눕는다.

넷이서 뒹굴 뒹굴 놀다가 들어가 씻고 밥먹고 나니 하나 둘 쓰러져 잠들고 오늘은 비교적 일찍 육퇴.




생각보다 많아진 이 시간을 어떻게 쓸까 드라마를 볼까, 바느질을 할까, 집안일을 할까 하다 

시간이 많을 때만 하게 되는(혹은 할 수 있는) 블로그가 눈에 들어온다.

오랜만에 글을 쓰려니 맘처럼 술술 써지지가 않는다.

아직 글을 쓰다보면 몸이 베베 꼬이고 수십번 썼다 지웠다를 한다.

새해 첫 다짐이 짧게라도 1일 1글 이었는데. 3월이 다지나가고서야 올해 첫 글을 쓴다.

언제쯤이면 나는 글을 좀 편하게 쓸 수 있을까?


블로그에 글을 써서 올릴 때 마다 마지막엔 꼭 '가볍게라도 자주 쓰자'하고 다짐하고는 잘 지켜 지지 않는다.

난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사람인가 보다.

그럼에도 이번이 또 마지막 이라 가정하며 다짐한다.

앞으론 가볍게라도 자주 남기자고.





:

<아빠 바람 사진기록>



올해 역대급으로 사진 컷 수가 적다. 찍을 시간이 부족했는지, 의지가 부족했는지...


안타깝다. 속상하다. 그나마 있는 사진 올린다. (몇 장은 중복)
































































































































































































































































































































































































































:

 

1

 

더 밀리기 전에-

두번째로 옮기는 아랫집 할아버지의 일기: )

 

아이들과 아랫집 할아버지-할머니-삼촌은 점점 더 좋은 벗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우리 부부도)

이번 주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집을 오래 비우시는 일이 생겨서 한동안 못 뵙다 드디어 오늘 만났는데

그 기쁜 마음이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들 오늘 뜬 커다랗고 밝은 달 만큼이나 환했다.

 

언젠가 할아버지가 달아 두신 댓글에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갔다오거나 쉬는 날이면 거의 우리 집에서 지내거든요 아이들 엄마한테 알려주려고 글로 적었어요"

라고 쓰신 글을 보고 아, 어쩌면 이건 할아버지가 나에게 보낸 편지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더 따뜻해 졌다.

 

여름에서 가을, 이제 가을에서 겨울로,계절이 바뀔 때 마다 할아버지와 아이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어떤 마음들이 오갈지 기대 된다.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 해 주시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오롯이 담긴 이 글들을 보며

어떤 날은 반성하고, 어떤 날은 감사하고, 어떤 날은 찡- 해지는 그런 나날들.

 

이렇게 우리는 아름답게- 이웃 하며 지내고 있다: )

 

 

 

 

2

 

10.26

가운데 금을 그어 놓고, 저 쪽은 ‘만화영화 속 세상’ 이 쪽은 ‘만화영화 밖 세상’으로 나눠 우리는 ‘만화영화 놀이’를 합니다

나는 흙바닥에 퍼질러 앉아 만화영화 속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구경합니다
한참 놀다가는 저희들도 모르게 이 쪽으로 건너와 공룡자동차를 가져갑니다 
‘야, 울림이 너 투명인간이냐’
소리치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이 쪽 세상과 저 쪽 세상을 넘나들며 놉니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금을 넘어가, 싸우다 넘어진 이음이를 구출해 이 쪽 세상으로 건너옵니다
금은 굳어지고 높은 담이 되어 더는 두 세상을 넘나들지 못할 때 우리는 어른이 됩니다
어젯밤에는 울림이이음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서 오랫동안 놀다갔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할아버지 황금성 선생님 노랫소리는 대청마루에 가득 울려 퍼집니다 선생님은 이야기보다 더 많이 노래를 풀어 놓고 갔습니다
할머니 계순옥 선생님과 할아버지가 함께 부른 ‘옹달샘’ 맑은 물에서 마음껏 뛰놀며 울림이와 이음이 막내 ‘우리’는 곱디곱게 커가고 있습니다

 

10.27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습니다 어느덧 소리는 잦아들고 빗물을 머금은 구름은 몸을 풀고 가뿐히 초롱산 능선을 넘어갑니다 갓 헹구어 낸 햇살 사이로 아이들이 뛰어옵니다 눈부십니다 오늘은 따뜻한 구들방에서 놉니다 쪼르르 다람쥐처럼 목에 기어오르고 배에 올라타고 발목그네를 탑니다 우리는 작은 일로도 크게 웃습니다 오른쪽 팔베개에 누운 이음이 눈에는 잠이 그득합니다 내 귓불을 만지더니 귓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적 졸릴 때 하는 버릇입니다

 

10. 28

아이들은 돌계단을 타고 우리 집으로 옵니다 어른들도 단숨에 오르내리기 힘든 계단을 뛰어내려 오는 아이들을 보면 늘 조마조마합니다 울림이보다 키가 작은 이음이는 계단을 내려와선 잠깐 꽃무더기에 가려 사라졌다가 곧 마당에 나타납니다
‘이음아 여길 어떻게 내려와’ ‘이렇게 이렇게 내려오지’ 라며 무릎을 굽히고 조심스레 발을 옮기는 이음이 발자국을 따라 계단을 내려와 봅니다 
‘아, 그렇구나’ 아이들은 제 깜냥대로 힘껏 세상을 살아갑니다
내려올 땐 쉽게 내려오지만 돌계단을 올라갈 땐 날마다 실랑이를 벌입니다 더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이음이는 안고 울림이는 손에 잡고 집 앞뜰까지 바래다 줍니다
한 번은 울림이가 집으로 돌아가다가 ‘엄마, 벌들이 많아서 못 가겠어’ 라며 울상을 짓습니다 짐짓 모르는 채 엄마는 ‘날마다 다니는 길을 오늘 따라 왜 그러니’ 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합니다 하긴 구절초 쑥부쟁이 꽃에 수천 마리 벌과 나비, 꽃등에 들이 윙윙대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나는 알아듣지요 ‘엄마, 나 더 놀고 가고 싶어요’라고
아이들이 오가는 계단길에는, 양옆으로 아내가 심어 놓은 쑥부쟁이 무더기, 오른쪽으로 돌면 지우가 씨를 부어 키워낸 토끼풀꽃, 그 위에 우인이가 일본에서 사다준 태양광 꽃등이 길을 밝힙니다
그 길은 마치 아이들이 내려준 동아줄 같아 나는 그 줄을 타고 올라가 날마다 하늘나라에 삽니다

-

‘어, 아이들이 왔다’
아내는 얼른 뛰어가 문을 잠급니다 아이들은 서운하게 뒤돌아서고, 부엌에서 지켜보던 나와 아내는 문을 열고 뛰어나가 ‘너희들 누구니’ ‘너희들 어디서 왔니’ 라고 놀리며 아이들을 꼭 껴안고 엉덩이를 토닥거려줍니다
오래 전 읽은 책에 재미난 할아버지가 나옵니다 아이들은 밤이 되면 할아버지 과수원으로 ‘사과서리’를 하러 갑니다 할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아이들이 몰래 울타리를 넘어와 살금살금 나무에 올라가는 장면을 지켜보다가 아이들이 숨죽이며 사과를 따는 순간 뛰어나와 ‘네 이놈들’ 하고 소리칩니다 자지러질 만큼 깜짝 놀라 달아나는 아이들 뒷모습을 보며 할아버지는 혼자 껄껄 웃습니다
울림이 이음이와 밭일을 하다 보면 땅콩과 고구마를 거둬들인 빈 밭은 아이들 놀이터가 됩니다 두꺼비집을 짓고 놀다가 굴을 뚫어 상수리를 굴려 넣고 공벌레나 무당벌레 애벌레를 잡아가두고 가끔 콩줄기에 붙어 있는 사마귀를 나무 꼬챙이로 건드리고 놉니다
우리 어릴 적에도 고무신 한 켤레면 하루종일 놀았지요 ‘고무신 멀리던지기’ ‘고무신 따먹기’ ‘고무신 숨기기’ 가끔 고무신을 엿으로 바꿔 먹기도 했지만, 고무신은 배가 되고 자동차 기차가 되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되었지요
‘서머힐학교’를 세운 니일이란 선생님이 말했던가요 어릴 적 마음껏 놀지 못한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면 전쟁놀이를 한다고

 

*’무당벌레 애벌레’는 울림이가 이름을 가르쳐 주었어요

 

10.30

 

아이들이 다녀갔을 텐데...
현관문이 잠겨 있으면 아이들은 부엌문 고리도 흔들어 보고 살금살금 뒷계단을 올라 우리들만의 비밀통로인, 쪽마루로 난 안방 문도 열어 봤을 거예요
저녁 일곱 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을 때, 댓돌 앞 흐릿한 불빛 속 땅바닥에 새겨진 글씨와 마주치자 아이들이 막 뛰어나와 가슴에 안기는 듯했어요
‘울림 이음 우리 왔다가요 빨리 오세요’

‘우리’를 업은 채 썼을까 마당에 써 놓은 엄마 글씨에는 울림이 이음이의 햇빛 반짝이는 웃음과 호수 잔잔한 눈빛과 물결치는 설렘이 소롯이 담겨 있어요

-

 

며칠 못 봤는데 울림이 이음이가 훌쩍 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 손이 가닿으면 금방 엊그제 개구쟁이로 돌아갑니다
대청마루 벽에 방석과 베개를 둘러쌓고 낮은 식탁 밑으로 드나들며 오늘은 ‘아지트놀이’를 합니다 숨었다가 나타나고 또 몸을 숨기고 아이들은 무척 재미있어 합니다 아이들은 구석을 좋아합니다 우리 집에 처음 오는 아이들도 어김없이 2층 다락 구석진 곳으로 숨어듭니다
나도 군대생활을 하면서 주말이 되면 점심도 거른 채 막사 뒤언덕 참호에서 지냈습니다 펼쳐놓은 책장에 어른거리는 마른 풀꽃 그림자, 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힘든 나날을 버티어 냈습니다
교사가 되어서도 수업이 비면, 운동장 너머 논언덕 움푹 패인 아늑한 곳에 몸을 누이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눈을 감으면 서로 몸을 부딪쳐 서걱거리는 풀잎 소리 그렁그렁 속눈썹에 감기는 맑은 햇살 한 오라기 눈을 뜨면 하늘에 고인 파란 물이 마냥 깊어 보였습니다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도, 인디언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비밀장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너희들의 구석은 어디인지 적어 보라고 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빨랫대 아래, 어떤 아이는 학교 오는 길이라고 한 것이 생각납니다 나는 어린시절 아버지가 쓰시던 책상 밑에서 꿈을 꾸었습니다
나는 어디인가 비어 있는 듯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 좋습니다 나는 울림이와 이음이가 언제나 달려들어 숨을 수 있는 그윽한 구석이 되고 싶습니다

 

10.31

 

‘할아버지, 우리가 놀던 거 그대로 둬야 해요’
‘그러엄’
‘삼촌이 치우면요’
‘삼촌에게도 부탁하렴’
그제서야 아이들은 일어섭니다
늘 그렇듯 내게 안겨서 집을 돌아가는 이음이가, 발을 흔들며 장난스레 한 쪽 신발을 벗어 던집니다 나는 주워서 신깁니다 계단을 올라선 울림이도 장화를 벗어 던집니다 그러더니 겉옷마저 벗어 풀섶에 던집니다
‘너희들 나무늘보 같다’ 아이들 그림책에 나오는 나무늘보는 얼마나 느려터진지, 숲속 동무들을 만나 ‘아안~’ 하고 아침인사를 시작하여 ‘~녀어엉’ 하고 마치면 벌써 저녁이 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음이는 나무늘보 흉내를 냅니다 ‘아아아안...’
성큼성큼 걸어서 몇 걸음 되지 않는 길을 아이들은 온갖 부산을 떨며 한나절이나 걸려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시간은 아이들 걸음으로 천천히 흘러갑니다 하늘의 해도 느릿느릿 떠서 느릿느릿 집니다 그리고 세상은 아무 일도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대청마루엔 어제 아이들이 ‘아지트놀이’를 하던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10.31

울림이가 넘어져 떨어뜨린 귤을 찾아다니다가 길에 떨어진 상수리 깍정이 하나를 주었습니다
‘어, 도토리 깍정이구나’ 라고 하니, 이음이가 곧바로 ‘아니, 도토리 모자지’라고 마땅히 그러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아, 그렇구나 도토리 모자’ 어떻게 이런 말을 떠올렸는지 놀랍습니다
그러고는 풀섶에서 상수리 깍정이를 보자 이음이는 혼잣말로 ‘상수리 모자’라고 속삭입니다
상수리는 울림이에게만 알려주었는데, 어떻게 이음이가 알았는지 내일 만나면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풀약’(제초제) ‘잠자리비행기’(헬리콥터) ‘쌕쌕이’(제트기) 같이, 그 뜻이 쉽게 머릿속에 그려지는 말들도 이렇게 태어났을 테지요

아이들은 어른들 말을 그대로 흉내내어 배운다기보다는, 어른들이 쓰는 말을 들으며 저 나름대로 우리 말의 규칙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이음이가 자주 쓰는,
‘먹으는 것’(먹는 것), ‘잡으는 것’(잡는 것), ‘안 배 고파’(배 안 고파) 같은 말이 그러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하는 것을 금방 말로 나타내지 못해 한참 동안 오물오물거리는 이음이 입 모양이 눈에 선합니다
이음이는 찬찬하고 조심스러우며 사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11.1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가고 나 혼자 생강을 캡니다 아이들이 곁에 있다면 서로 먼저 캐겠다고 호미를 들고 달려들 거예요 아이들에게도 밭에 있는 생강을 보는 것은 처음일 거예요 가끔 어른들도 대나무 아니냐고 하거든요
나는 생강을 캐면서 생강 식구들을 소개할 거예요 늙고 쭈글쭈글한 엄마 생강(구강), 그 곁에 다닥다닥 붙은 얼굴 마알간 아기 생강 나는 가족보다는 식구라는 말이 참 좋아요 그 말에는 함께 밥을 먹는다는 뜻이 담겨 있거든요
‘할아버지, 사마귀 집이에요 지난 번 책에서 봤잖아요’ ‘ 그렇구나 그걸 아직 기억하고 있구나’ 울림이는 생강 잎줄기에 붙은 거품덩이 같은 것을 보고 소리칠 거예요
아이들은 생강 캐는 일도 시시해지면 잎줄기를 던지며 놀 거예요 나는 생강 잎줄기를 끈으로 엮어 머리에 쓰고 아이들과 함께 인디언 놀이를 하겠지요
아이들은 순간순간을 살지요 순간에 머무르다 아무 미련 없이 떠나지요 아이들은 어제에 머물지 않고 늘 오늘을 살지요
산길을 오르는 차 소리가 들려와요 눈을 감아요 아이들 발소리가 들려요 울림이와 이음이가 지금 달려오고 있어요

 

11.2

 

강아지 ‘단’이와 ‘보리’가 겨울에 살 집을 만듭니다 ‘단’이 집은 어느 새 고양이 두 마리 ‘밤’이와 ‘호미’가 차지했고, 한데 마른 풀 위에서 웅크리고 자는 ‘보리’가 안쓰러워 어제는 구운 벽돌로 두 칸 집을 지어 속에 볏짚을 두툼하게 깔아 주었습니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울림이와 이음이는 엄마가 갖다 준 색분필로 새로 지은 강아지 집에 그림을 그립니다 지붕 한 켠을 빈 틈 없이 가득 칠해 놓은 이음이는, ‘영화 보기(시작하기) 전 캄캄한 거’를 그렸다고 합니다 갑자기 영화관이 생각났는지 더는 묻지 않았습니다 울림이는 고운 빛깔로 강아지 드나드는 문턱에 체크무늬를 그려 놓았습니다
아이들이 귤을 달라고 해서 집 안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수도꼭지에 손이 닿지 않는 이음이는 아내가 세숫대 위로 번쩍 안아 올려 손을 씻깁니다 아이들이 귤을 먹습니다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그저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엄청 맛있나 보다’ 하고는 얼굴을 쳐다보니 ‘엉엉 울고 싶을 만큼 맛있어’ 라고, 어디에서 들었는지, 혼자 생각한 말인지 장난스레 이음이가 대답합니다

 

^^ 고양이 ‘밤’이는 울림이가 지어준 이름입니다 강아지 ‘단’이와 소리 짝이 맞는다고 지었는데, 아마 산밤을 주으러 가다가 떠올렸을 겁니다
내가 캄캄한 ‘밤’은 까만 고양이와도 잘 어울린다고 하니 그 생각은 못했다고 하면서도 좋아합니다

 

11.3

‘예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멈춰 서서 혼잣말을 하더니 나를 부릅니다
노란 꽃술에 주홍 꽃잎 국화꽃입니다
‘이 거 없는데(없었는데)’
늘 다니는 길에 피어 있었는데 이음이는 오늘 처음 보나 봅니다
‘그렇구나 오늘 처음 피어났구나’
‘할아버지, 밤에 몰래 날아와 여기 꽂혔나 봐’

아이들을 만나면 가끔 장난말로 ‘너희 누구니’ ‘너희들 어디서 왔니’ 처음 본 듯 얘기했는데, 오늘 그게 사실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아이들은 늘 첫날 첫아침입니다 지금 막 피어났습니다 아이들에겐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니’ 라고 묻지 않습니다

마당에 가랑잎이 떨어집니다 해가 건너와 수천 개 이파리에 등불을 켭니다 수런수런 한껏 물든 나뭇잎이 젖어 빛납니다 나는 가만히 속삭입니다

‘너희들 누구니’ ‘너희들 어디서 왔니, 눈부신 이 아침에’

 

11.4

 

마을 거리축제가 열리는 날입니다 배추밭에 물을 주고 있는데 아이들이 뛰어옵니다 울림이가 건네주는 마을신문에는 간단한 행사 일정이 실려 있습니다 어린이집 아이들이 나오는 율동은, 이음이 반이 시작해서 울림이 반으로 끝난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율동 끝나면 우리가 쿠키를 팔아요’
‘그렇구나 할아버지가 다 사줘야지’
‘할아버지, 어디 있을 거야’
‘울림이가 잘 보이게 나무 위에 올라가 있지’
어느 새 이음이가 손을 들어 초롱산을 가리킵니다

등에 업힌 ‘우리’가 먼저 와 있습니다 이음이 반 아이들이 무대로 올라옵니다 아침에 곱게 물든 조팝나무 가지를 머리에 꽂고 흉내를 내더니, 그 인디언 율동을 하려나 봅니다 근데 이음이만 인디언 치마를 입지 않았습니다 이음이가 입기 싫어해서 입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 일 없는듯 아이들은 무대에서 뒹굴고 풍덩풍덩 빠지고 신나게 춤추고 뛰어놉니다
한 줄로 세우지 않고 한 틀에 가두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따듯한 눈길 속에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장구를 세워 놓고 마음껏 두들기는, 울림이 난타 놀이도 끝났습니다 오늘 나 대신 초롱산으로 올라간 사람은 ‘우리’입니다 아내가 들어올려 내 목에 걸터앉은 ‘우리’는 흥에 겨워 줄곧 몸을 들썩거립니다

 

11.5

 

‘할아버지’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만 들리고 아이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한참이나 지난 뒤 울림이가 언덕을 올라옵니다 금방 깎은 머리를 보여주려고 달려옵니다 산뜻하고 가지런한 머리칼 엄마가 깎아주었다고 합니다 ‘와, 훨씬 예쁘구나’ 흙손을 털고 꼬옥 안아줍니다 그러고 보니 이음이는 아직 마당에서 머리를 깎고 있습니다 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입니다
오늘은 고구마를 캔 빈 밭에 밀을 심습니다 골을 타고 그 위에 밀씨를 흩뿌립니다 휙 아이들이 던진 밀씨는 길바닥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울림이는 양파 모종을 옮겨 심은 밭에 밀씨 몇 톨을 묻어 두고 옵니다 우리는 노래를 지어 부르며 두둑의 흙으로 밀씨를 덮어줍니다
‘밀씨를 숨기자 밀씨를 숨기자 새들이 먹지 않게 꼭꼭 숨기자’ 어느덧 가락을 맞춰 후렴인 듯 ‘까치들이 먹지 않게, 부엉이가 먹지 않게, 고라니가 먹지 않게...’를 되풀이합니다 초롱산 절벽에서는 웍웍 부엉이가 울고 있거든요
혼자 떨어져 밀씨를 묻고 있던 이음이가 ‘돼지가 먹지 않게’ 라고 하기에 ‘멧돼지’로 바꿔 부르자 ‘그냥 돼지가 먹지 않게’로 되돌려 놓습니다
노래는 이야기로 흘러갑니다 ‘아무거나 주워먹는 단이가 먹지 않게’, ‘이음이가 밤에 와서 몰래 가져 가지 않게’라고 하자 이음이가 얼른 ‘이음이는 늦잠꾸러기다’ 라고 대꾸합니다 늦잠을 자기 때문에 이음이는 밀씨를 가지고 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은 노래이고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이 없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엔 졸졸 시냇물 흘러가는 이야기나 재잘재잘 나뭇잎에 반짝이는 노래가 다 사라지겠지요

 

11.6

 

엄마에게 들려주고 싶었나 봅니다
‘엄마, 잘 들어 봐 부엉이 소리가 들려’ 겉옷을 챙겨 뒤따라오는 엄마에게 말합니다
잠깐 끊겼던 부엉이가 다시 웁니다 해질녘 이맘때쯤이면 뒷산 절벽에서 우억우억 부엉이가 웁니다
울림이는 어느날 새벽 잠깐 혼자 깨어 고라니 우는 소리도 들었다고 합니다
볏짚을 나르던 아내가, 땅콩 캐낸 밭에서 흙을 파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는
‘농사 짓는 집에 와서 농사일만 배운다’며 무슨 말끝에 ‘여길 고랑이라고 한단다’ 하고 일러주니, 울림이는 재미있는 듯 ‘고랑이’ ‘고랑이’ 하며 밭길을 달려갑니다
울림이는 이제 제법 고랑 사이로 외발 달린 손수레를 몰아 밭 한 바퀴를 돌아다닙니다
구덩이를 한참 파고 있던 이음이가, 뜬금없이 ‘할아버지, 도깨비는 어느 발이 힘이 세지’라고 묻습니다 이음이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밤에 도깨비를 만나면 왼다리를 걸어 왼쪽으로 넘어뜨리면 이길 수 있다고 한, 오래 전 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조금 전 삽과 호미로 구덩이를 파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야, 두더지가 파 놓은 것 같다’고 했는데, 더 깊이 파고는 두더지보다 힘이 센, 아니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도깨비 오른발로 팠다고 으스대려고 물어본 말이었습니다 도깨비는 왼다리가 약하니까요
날은 어둑어둑해져 저만치 떨어진 아내는 보이지 않고, ‘할머니를 잡아먹은 캄캄한 밤에게 우리도 잡아먹히겠다’고 하니 겁을 먹은 듯 내 품에 안겨 집으로 돌아가던 이음이가 묻습니다
‘할아버지 딱지 만들 줄 알아 나도 갖고 싶어’

‘그러엄 내일 만들어 줄게 꼭 놀러와’ 아이들을 집까지 바래다 줍니다

 

11.7

 

우리는 까마득히 잊고 있지만 아이들은, 우리의 본디 고향이 하늘임을 곧바로 느껴 알고 있는 듯해요 아무렇지도 않는 이 땅에서의 삶이 아이들에게는 늘 낯설고 놀라움으로 가득차 있거든요
초인종이 울려 나가 보니 문 앞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서 있어요 엄마 등에 업힌 ‘우리’, 어제 집으로 돌아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늘 처음 만나는 듯한 울림이와 이음이
울림이는, 과일 낱개를 싸는, 그물처럼 생긴 스티로폼을 하나는 팔뚝에 감고 하나는 머리에 쓴 채 나타났어요 마치 로봇 같아 보였어요
속옷 윗도리에 새겨진 꼬마 요술장이인 듯한 그림, 이음이는 배를 내밀어 자랑하더니 한 쪽 눈을 찡그리며 그림 속 아이 표정을 지어 보였어요
딱지를 만들어 치고 종이비행기를 접어 다락에서 날리고 창 밖이 어두워질 때까지 놀았어요

아이들은, 어제에 묶여 있는 나를 풀어서 늘 지금 여기로 데리고 오지요

-

아침을 먹으며 아내와 내가 주고받은 말입니다
아내 : 아이들이 벌써 내려왔나봐
나 : 일찍 깨어났나 본데
아내 : 아니야 닭 우는 소리야 우리가 단단히 미쳤지
아내가 웃습니다

엊그제인가 나도 밭에서 일하다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는 아이들 소리인지 알고 두리번거렸던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우리 집에 처음 왔던 때가 생각납니다 이사 온 다음 날이었습니다 이사 온 날은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가 돌보고 있었으니까요 웬 아이가 문 앞에 서성이고 있어서 얼른 나가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조금 있다가 조금 작은 아이가 열린 부엌문 사이로 빼꼼히 들여다보고 있어 어서 오라고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이름도 물어 보고 나이도 물어 보고 울림이는 일곱 살, 이음이는 아내가 잘못 알아들어 ‘세 살’ 하고 되묻자 손가락까지 펼쳐 보이며 네 살이라고 야무지게 말했습니다 묻는 말에만 짧게 대답하고 주는 것만 오물오물 먹으며 하도 조용해서 퍽 수줍음을 타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비옷 속에 가방을 메고 놀러왔습니다 들어서자마자 안 보여 준다는 이음이 가방 속에도, 울림이 가방 속에도 그림책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림책도 읽고, 울림이 가방 겉주머니 속을 가득 채운 도꼬마리 열매를 던지며 놀았습니다

‘지하 백층짜리 집’이란 책을 읽다가, 박쥐가 사는 층을 지나 어느 층에 사는 무슨 동물 집에 버섯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그림을 보자 이음이가 말했습니다 ‘버섯 안에 박쥐가 생겼나봐’

 

11.8

‘지하 백층짜리 집’ 이야기 속 어느 층 천장에, 거꾸로 자라고 있는 버섯을 보고 ‘버섯이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다’고 한다면, ‘박쥐처럼’은 ‘거꾸로’라는 뜻에 갇혀 버린 메마른 말이 될 것입니다
도근도근 이제 막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은 ‘버섯 안에 박쥐가 생겼나봐’라는 이음이 말을, 날이 새면 훨훨 날아 달아날까 봐 얼른 적어 붙잡아 두었습니다
어제는 그림책을 보다가 울림이가 ‘할아버지, 그건 콩벌레가 아니고 공벌레야’ 라고 하자, 내가 못 알아들을까 봐 이음이는 벌떡 일어나 공을 차는 흉내를 내며 이런 공이라고 나를 가르칩니다
아이들에게 다시 배워야 할 나는, 아직도 아이들을 가르치려 드는 버릇이 남아있습니다
비가 내립니다 눈처럼 가랑잎이 떨어집니다 아이들 가슴 위에 소복소복 이야기가 쌓이고 있겠지요

 

11.10

세상은, 물이 맑은 만큼 맑습니다 내가 어릴 적엔 물이 참 맑았습니다 어릿어릿 눈부신 햇살, 무리지어 몰려다니다가는 작은 발소리 일렁이는 물그림자에도 휙 머리를 돌려 달아나는 송사리떼, 조붓한 논길 따라 흐르는 도랑물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몽골의 홉스골 호수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어릴 적 물을 만났습니다 솔체꽃 솜다리꽃 고운 머릿결 날리는 언덕에 닿아 할짝이던, 시리도록 맑은 물을 이제 이음이와 울림이 눈에서 봅니다

‘솔체꽃’

그이 
고운 눈매

호숫가 따라 
달빛 번지면

내 마음 풀언덕 
일렁이는 꽃안개

가만히 몸을 흔들어 
바람을 부르고

눈물 속에 떠오는 
슬픈 선 하나

먼길 헤매어 
찾아다녔지만

그대 피어 
내 안에 있네

 

11.11

 

오늘은 이렇게 하고 집에 왔어요 울림이는 나무난간 위에 새똥 구경하느라 내가 나가서야 들어오고, 이음이는 얼굴 안 보여 준다고 눈을 감았지만 벌써 들켰거든요

 

11.12

‘하느님의 눈물’ ‘짱구네 고추밭 소동’ 미야자와 겐지의 ‘비에도 지지 않고’ 울림이와 이음이에게 줄 책을 고르며 내가 읽을 책도 샀습니다

지난 번 아이들 할아버지가 준, ‘글과그림’에서 펴낸 ‘나와 노래’를 읽다가 이 사람을 처음 만났습니다 투박한 글이 마음에 확 들었습니다
탁동철 선생님이 쓰신 ‘하느님의 입김’ 이란 책의 날개에는 선생님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잘 놀고 잘 삐치고 아이들에게 야단도 자주 맞는다...’
잘 삐치고 아이들에게 자주 야단을 맞는 이 선생님을 만나면 꼭 안아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습니다

나는 학교에서 거의 2반 담임을 맡겼습니다 옆반 아이들은 우리 반을 ‘바보 2반’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하기사 어느 선생님도 ‘우리교육’이란 잡지에 나를 실으면서 ‘바보 선생’이라고 했으니까요 우리 반 아이들은 시험 보는 날 아침에도 좋아하는 책을 읽었고, 나는 아이들에게 늘, 밥 한 그릇 잘 모실 줄 알고 비질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무엇보다 값진 공부라고 가르쳤으니까요

하지만 탁동철 선생님은 보석처럼 빛나는 것을 아이들 속에서 끄집어내려고 했고, 나는 억지로 구겨 집어넣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다름’은 ‘기다림’에서 오는 것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책날개는 다시 이어서 선생님을 소개합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스스로 반짝거릴 수 있게 곁에서 보아주고 기다려 주는 걸 가장 잘한다’

 

11.13

 

울림이가 그림을 그립니다
바퀴로 굴러가는 그냥 자동차가 어느 새 ‘이오이오’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가는 경찰차로 바뀝니다
차 뒤에 감옥이 딸려 있고 사람이 갇혀 있습니다
‘무슨 나쁜 짓을 한 거야’ 
넌지시 말을 건넵니다
대답이 없습니다
‘밖에서 크게 울어 잡아간 거니’
장난스레 말을 던져 봅니다 아까 속상한 일이 있어 울림이가 크게 울고 갔거든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논에서 쉬하다 잡혀간 거니’
‘누가’
‘이음이가’ 
지난 번 이음이가 쉬하기 좋다며 다랑논에서 오줌을 눈 적이 있거든요
하늘을 까맣게 칠합니다
‘야, 산이구나’
‘아니, 밤’
‘삼촌처럼 뚱뚱해서 잡아 간 거니’
‘밤이니까 일찍 자지 않아서 잡아간 거구나’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왼쪽에 새가 실려가는 차 한 대 또 왼쪽으로 계단이 있는 경찰서가 그려진 그림, 아내가, 텅비어 있는 우리 집 벽에 걸어 두어야겠다고 해서 두고 간 울림이 그림

왜 대답을 하지 않았을까 엄마가 곁에 있어 그랬을까 크게 울었다고 한 말이 마음에 언친 걸까 그러다 잠이 들고 별빛 가물가물 새벽녘에야 떠오른 생각 ‘울림이가 사는 나라엔 아직 나쁜 사람이 없기 때문일 테지’ 아닌가 그냥 말하기 싫은 날도 있지

-

콩을 거두고 있는데 아이들이 올라옵니다 ‘야 너희들 어디서 왔니’ 이제는 늘 처음 만나는 듯 주고받는 인사말이 되었습니다 이깔나무 바늘잎처럼 뾰족이, 보일 듯 말 듯, 아이들과 심은 밀이 어느 새 싹을 틔웠습니다 가까이 가서 밀싹도 보고 마늘밭을 다녀간 고라니 발자국도 만져보고 다시 아이들은 미끄러지듯 언덕을 내려가 집으로 숨어듭니다
현관문을 들어서는데 아내가 나와 목소리를 죽여가며 ‘아이들 왔냐고’고 물어보라고 합니다 나는 크게 말합니다 ‘여보, 아이들 왔어’ 아내도 아이들이 듣게 큰소리로 아이들을 못 봤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미리 아내에게 부탁했겠지요
안방에 숨은 듯합니다 나는 일부러 어디 갔나 하며 지우 방문도 열어보고 다락도 올라가봅니다 한참을 꼼지락거리다 안방 문을 여니, 기다리다 답답했던지 ‘할아버지, 못 찾겠다 꾀꼬리 하면 되잖아’ 하는 울림이 소리가 장롱 속에서 새어나옵니다 ‘어, 목소리만 남겨 놓고 어디로 갔지’ 나는 침대 밑도 들여다보고 이불도 들춰 봅니다
‘못 찾겠다 꾀꼬리 라고 해야지’ 차츰 소리가 커집니다
‘아, 못 찾겠다 꼬꼬댁’ ‘못 찾겠다 호히호히호’ (내가 들은 꾀꼬리 소리) ‘못 찾겠다 꾀꼴꾀꼴’ ‘못 찾겠다 꾀꼬르르르’
‘아니, 못 찾겠다 꾀꼬리’ 이제 울상을 지은 듯한 울림이 목소리입니다
나는 붙박이장 옆 구석진 곳에 몸을 숨깁니다 내 소리가 안 들리자 아이들은 장롱에서 나와 쪼르르 대청마루로 달려갑니다 얼른 아이들이 숨었던 장롱 속에 들어갑니다 밖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아마 ‘백천’ 년이 지나도 내가 숨은 곳은 못 찾을 겁니다

*’백천’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을 때, 울림이가 쓰는 말입니다

 

11.14

 

훅 불어 케이크를 밝힌 촛불을 끕니다 ‘나도 끌 걸’ 이음이가 곧 울상을 짓습니다 다시 불을 붙입니다 장난스럽게 울림이가 다시 끄려고 입을 갖다댑니다 우리는 울림이 입을 틀어막습니다 오늘은 일곱 번째 울림이 생일입니다
‘아빠가 일찍 와서 너무 좋아’ 달려가 아빠 품에 안기던 이음이가 아빠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음이가 일곱 살이면 울림이는 열 살’ 아빠가 대답합니다
‘내가 열 살이면’
‘형은 열세 살’
‘내가 열세 살이면’
‘형은 열여섯 살’
‘내가 열여섯 살이면’
‘형은 열아홉 살’
‘내가 열아홉 살이면’
‘형은 스물두 살’
‘스물두 살이 내가이면’
‘형은 스물다섯 살’
‘스물다섯 살이 내가이면’
스물이 넘어가자 이음이는 숫자를 잃어버릴까 봐 어쩌면 낯선 말이 나오자 숫자를 먼저 댑니다 나는 ‘스물다섯 살이 내가 되면’이란 뜻으로 들었습니다 마치 생명을 불어넣어 꿈틀거리는, 스물다섯이란 숫자가 이음이 몸으로 태어나는 듯했습니다
이음이와 아빠, 엄마와 울림이가, 지우가 선물한 레고를 맞추며 놀고 있습니다 
‘음, 이음이가 아빠 등에 올라타 있구나’ 아빠가 말하자 ‘아빠가 너무 좋아서’ 라며 이음이는 잇달아 몸을 흔들어댑니다
엄마는 엎드려 울림이가 맞출 레고 조각을 찾아주고, 울림이는 아빠에게 자랑합니다 ‘아빠, 내가 혼자 맞추는 거고 엄마는 그냥 찾아주기만 하는 거야’
창 밖엔 초이렛달이 지긋이 눈을 감은 채 흐뭇이 웃고, 엄마 아빠 울림이 이음이 어느새 아내 등에 업혀 잠든 ‘우리’, 사랑스런 다섯 식구가 띄워 올린 별들이 조용히 하늘을 헤엄쳐 갑니다

 

11.15

 

‘너희들 맛있는 거 줄 거다’ 아이들에게 겁을 주는 척할 때 쓰는 말입니다 과자나 사탕을 무기로 꺼내드는 것은 아이들 집에서는 거의 자연 그대로 가꾼, 슴슴한 맛이 나는 것을 먹이는 까닭입니다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밀크카라멜이 있길래 ‘너희들 이 거 한 번 먹어볼래’ 하며 을러대는 척하니까 곧바로 ‘한 번 줘봐’ 라는 말이 아이들 입에서 튀어나옵니다
‘어떡하지 우수수 이가 쏟아질 텐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지만 들은척만척 아이들은 처음 보는듯 카라멜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손가락으로 눌러 보기도 합니다 ‘어 물렁물렁한데’ 유혹을 이기지 못한 이음이는, 겉을 싼 종이를 벗기고 입에 넣습니다 이음이가 다 먹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울림이는 입에 넣습니다 이음이 윗옷 앞자락에 단물이 떨어집니다 코를 갖다 대니 들크무레한 냄새가 납니다 ‘아무래도 엄마한테 들키겠다, 엄마는 아기가 똥을 쌌는지 안 쌌는지 바지를 입었는데도 엉덩이를 맡아보고 다 아는걸’이라고 하자 이음이는 얼른 엄마한테는 비밀이라고 합니다 비밀은 무슨 비밀 저희들이 먼저 다 일러바칩니다 엄마가 현관문을 두드립니다 이음이가 귓속말로 ‘우린 같은 편이잖아’라고 속삭입니다 마음이 간지럽습니다 
아이들이 보면볼수록 예쁩니다 아이들 친할아버지 말씀처럼 아이들과 끈끈한 사랑 놀이에 빠졌나 봅니다
‘너희들 왜 이렇게 날마다 더 예뻐지냐, 밤에 몰래 엄마 젖 훔쳐 먹는 것 아니야’
‘아니, 밥 잘 먹고 반찬 잘 먹고 잠 잘 자서 그런 거야’ 팽이 돌듯 핑그르르 한 바퀴 돌아 이음이가 내 품으로 달려듭니다

집으로 가는 길섶 마른 풀 위 오목하게 들어간 곳을 가리키며 ‘보리가 추워서 이렇게 꼬리를 흔들었어’ 라고 하더니 그 속에 들어가선 웅크리고 앉아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들어 보이던 이음이, 그제는 바람개비 접기 어제는 구슬치기 오늘은 종이공 던지기 날마다 무슨 무슨 놀이를 만들어 나와 놀아주는 울림이, 아이들이 또 보고싶습니다 아이들은 그 어디에서도 어제의 그늘이라곤 찾아볼 수 없습니다

 

11.19

커다란 갈참나무 아래 밭 사잇길로 이음이가 옵니다 넘어질 듯 말 듯, 이음이가 연필로 그려놓은 금처럼 삐뚤빼뚤 달려옵니다
‘할아버지, 귀여운 거 보여줄까’
당근을 캐다 말고 엉거주춤 일어나 ‘그래애’ 하면서 반깁니다 순간 궁금해집니다
이음이는 웃옷을 활짝 열어젖히더니 속에 껴입은 옷을 보여줍니다 곱고 빨간 줄무늬를 두른 옷깃, 왼쪽 가슴주머니에 벙긋 웃는 표정을 지은 동그란 가죽 조각이 붙어 있는, 가는 털실로 짠 계옷(털옷)입니다
‘너무 귀여워서 할아버지 쓰러지겠다 이 옷 다시는 입고 오지마’
처음에는 안 된다고 우기더니 내가 넘어지는 흉내를 내며 아픈 척을 하자, 안돼 보였는지 이음이는 ‘안 입고 올게’하고 말끝을 흐립니다
다행입니다 하지만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다음날 다시 고 귀여운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놀이를 하면서 가장 멋진 역은 늘 울림이가 도맡아 합니다 ‘경찰놀이’를 할 때도, 울림이는 경찰, 이음이는 경찰강아지(경찰견), 나는 도둑이 됩니다 다행히도 이음이는 아기처럼 기어다니는 강아지 역이 마음에 드는가 봅니다 입으로 내 옷소매를 물어뜯고 앞발로 내 얼굴을 할큅니다 
한번은 이음이가 저는 경찰강아지를 할 테니 나보고는 경찰을 하라고 합니다 한참 놀다보니 어느 새 나도 이음이 곁을 네 발로 기어다니고 있습니다 내 꼴이 어찌 우스운지 크으윽 크으윽 숨이 넘어갈 듯 웃음소리도 나지 않고 눈물만 납니다 아이들은 무슨 일인가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경찰이 느닷없이 경찰강아지가 되는, 아이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혼자 미친 듯 웃고 있으니까요

 

11.21

아이들이 먼저 무엇이라고 물었는데 그 말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도 나이가 들면 하늘나라로 갈 거야 하늘에서 너희들이 오기를 기다리지 재미있게 놀려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이음이는 혼잣말인 듯 쳐다보지도 않고 ‘안 가’라고 딱 잘라 말합니다
순간 어찌할 줄 몰라 ‘할아버지는 구름 타고 놀러 다닐 텐데’라고 어물쩍 말을 돌리자, 부드러워진 표정에서 이음이 생각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울림이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하늘나라로 가는 거야’라고 이음이를 가르칩니다
지금 생각하면 ‘할아버지는 안 죽을 거야 너희들하고 오래오래 재미있게 놀 거야’ 라고 말할 걸 그랬습니다
이음이에게 죽음은 어떤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 곁을 떠나는 것이겠지 그 먼 나라를 잠깐 알게 된 나만 바라보고 따라갈 수 없었던 게지 ‘나의 라임오렌지’ 속 제제 말처럼 죽음은 마음속에서 지워지는 일일까
언제인가 아이들과 ‘심폐소생 놀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디에서 배워 왔는지 울림이는, 한 손으로는 내 코와 입을 틀어막고 배에 올라타 가슴을 짓누릅니다 이러다간 산 사람도 도로 죽을 것 같습니다 내가 눈을 꼭 감고 말도 안 하고 짐짓 죽은 척하자,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지 마’ 눈꺼풀을 뒤집으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던 이음이가 그 순간 죽음을 본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 ‘안 가’라고 했을까 내내 머리속을 떠다니던 그 답은, 나중에서야 울림이 말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없어지는 게 아니고 하늘나라로 가는 거야’ 아, 이음이는 없어지는 게 두려웠던 겁니다

새벽 첫잠을 깬 숲속 아기 새들,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가 재잘대는 소리가 집을 멀리 떠나온 이 곳에서도 들리는 듯합니다

 

 

 

 

 

:

1.

 

이곳에 이사와 가장 행복 한 일 중 하나는 좋은 이웃을 만난 일이다.

 

작년에 우리집 바로 아래 새로 집 짓고 살고 계신 분들인데,

알고 보니 우인이 언니(남편의 풀무학교 후배)의 부모님 이라고 하여서 만나 뵌 적은 없지만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었다. 

 

우리가 이사 오기 전 부터 집 청소, 마당에 엄청난 찹조 제거(전에 살던 분들도 보기 어려 웠던 곳에 흙이 보일 정도로) 등등

물심양면 도와 주셨는데, 요즘은 아이들과 소울메이트가 되어 주셔서 아이들도 나도 기분좋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

 

요즘 울림이 이음이는 우리집 마당보다 할머니 할아버지네 마당에 가서 노는걸 더 좋아하고 

창문 옆 계단에 앉아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오시기를 기다렸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발견하면 곧바로 뛰어 나간다.

최근에는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서먹해 하던 삼촌과 베프가 되어 웃음 소리가 우리 집 까지 들릴 만큼 신나게 놀고

할아버지랑 해가 다 넘어가 어둑어둑 해 질때 까지 산책하다 내가 "울림아 이음아 밥먹어~!!!" 부르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야 집으로 들어오곤 한다.

 

 

 

울림이 이마 찢어 진 날, 할머니 할아버지는 울림이 이음이를 저렇게 안고 업고 다니셨다ㅠㅠ

 

 

 

 

 

 

 

그러다 최근 아랫집 할아버지와 sns 친구가 됐는데 그곳에 할아버지의 글들,

특히 울림이 이음이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는 글들을 발견 하고는 마음이 너무너무 찡- 해져서 

그 후로 나와 남편은 아랫집 할아버지의 글을 매일 기다린다.

어느날 할아버지 한테 "글이 너무 좋아서 매일매일 기다린다"고 했더니 감사하게도 다음 날 부터 더 자주 올려 주시는데, 

이것을 나 혼자 보기에 아깝기도 하고(자랑하고 싶기도 하고ㅋ)

이 글들을 잘 모아 뒀다가 나중에 울림이 이음이가 볼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앞으로 블로그에도 차곡차곡 옮겨 보려 한다: )

 

 

2.

 

<아랫집 할아버지 일기>

 

9.24

 

 

 

 

비가 오지 않는데도 아이들은 늘 장화를 신고 우리 집으로 건너옵니다 판판한 오솔길을 두고 마치 모험하듯이 바위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와 도랑을 건넙니다 도랑이라고 하지만 비가 와야 바위 틈으로 물이 새어나와 며칠 동안 고여 있는, 가끔 소금쟁이가 뜨고 물맴이가 맴을 돌곤 하는 곳이지요

큰아이 ‘울림’이와 둘째 ‘이음’이와 늘 엄마 등에 업혀 있는 막내 ‘우리’, 아이들이 불편해 보여 제법 두꺼운 널빤지를 잘라 나무다리를 만들었어요 마침 바위 위를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아이들이 ‘아, 다리가 생겼구나!’ 좋아할 줄 알았는데 시큰둥한 표정으로 늘 그렇듯 질퍽거리는 흙을 밟고 도랑을 건넙니다

아이들은 내가 걱정하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놀라움으로 가득한 하늘나라에 살고 있어요 오늘은 짐을 싣는 외발 수레(밀차)에 울림이와 이음이를 태우고 숲길을 세 바퀴나 돌았어요

 

 

9.29

 

 

 

맏이 ‘울림’이와 말을 튼 때는 아마 그 일이 있은 뒤일 거예요 사근사근 말을 잘하는 둘째 ‘이음’이와는 달리 ‘울림’이는 뭘 물어봐도 금방 대답을 하지 않거나 짧게 한 마디 하지요 ‘아침엔 뭘 먹었니?’ ‘누룽지’ 어느 날은 ‘시리얼’ 그리곤 곧 말이 끊어지지요 
‘울림아, 이제 우리 집에 올 땐 혼자 와도 돼 맛있는 것 먹고 싶거나 만화영화 보고 싶을 땐 이음이한테 시켜 말하지 않아도 돼’ ‘할아버지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오늘은 길게 얘기했어요
그 일은 어제 아침에 일어났지요 울림이가 뛰어오다가 마당에 넘어졌어요 무척 아픈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어요
‘울어도 괜찮아, 울림아’ 내가 말하자 순간 깜짝 놀란 듯 보였어요 물론 울지는 않았지만요
만약 내가 ‘아이구 형이니까 잘 참는구나’ 라고 말했으면 오랫동안 말을 트지 못했을지도 모르지요
이제는 울림이도 이음이처럼 다리가 아프다며 내 등에 업혀 산길을 올라요

 

 

10.8

큰바람이 지나가고 아까시나무 이파리들이 비에 젖어 여기저기 떨어져 있습니다 대나무비로 길을 쓸고 있는데 아이들이 달려와 저희들도 하고 싶다고 조릅니다 아이들에겐 대나무비가 힘에 겨워 팽이 돌듯 동그라미를 그리며 비척거립니다
‘울림아, 우리 말타기 놀이 할까’ 가랑이 사이에 대나무비를 끼우고 울림이를 뒤에 태웁니다 금방 울림이가 앞에 타고 싶어해 자리를 바꾸어 달리다가 문득 장난이 치고 싶어 ‘이랴이랴’ 울림이 엉덩이께를 때립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말이잖아’ ‘아, 그렇구나’ 또 달리다가 잊어버린 척 엉덩이를 채찍질 합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다그닥 다그닥’ 죽마를 타고 오늘도 아이들과 숲길 한 바퀴를 돕니다

-

아이들이 이부자리에서 햄버거놀이를 합니다 나도 끼워달라고 조릅니다 맨 밑에 베개를 깔고 내가 엎드리면 그 위에 베개를 얹고 울림이가, 다시 울림이 위에 베개를 얹고 이음이가 엎드리면, 베개는 빵이 되고 나와 아이들은 고기가 됩니다
‘아이고, 할아버지 죽겠다’ 짐짓 힘든 척 몸을 뒤집으면 마구 웃으며 아이들은 바닥에 나뒹굽니다 나를 잡고 겨우 일어나 앉은 아이들은 아그작아그작 베개를 뜯어 먹는 시늉을 합니다
햄버거 빵 사이에 들어있던 고기가 빵을 뜯어먹는 셈이지요 눈물이 날 만큼 웃으며 순간 아이들과 함께 나는 동화 속으로 들어갑니다

 

 

10.14

 

응급실 침대에 덩그러니 남은 울림이는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칩니다 엄마는 두 손 꼭 움켜쥔 채 내내 창문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울림이는 혼자 그 무서운 시간을 잘 참아냈습니다
그제 아침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음이와 나는 아궁이 앞에 있었는데, 고양이 밥을 준다고 뛰어갔다오다가 나무 난간 모서리에 부딪쳐 넘어진 채 울고 있었습니다 왼쪽 이마에서 솟구치듯 흐르는 피가 부드러운 무명베를 다 적실 만큼 크게 다쳤습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내는 저녁까지도 가슴이 뛴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이 나보고 웃었어요 내가 보일 때까지 서있다가 내가 보이지 않자 뒤돌아갔어요’
깊게 팬 상처를 꿰매고 돌아오는 길 울림이가 내 품에 안겨 한 말입니다

 

 

10.15

‘어디 배꼽이 붙어 있나 보자’ 울림이와 이음이는 얼른 윗옷을 걷어붙이고 배꼽을 보여줍니다 아침에 만나자마자 나는 아이들 배꼽 검사를 합니다

‘옛날에는 산이 날아다녔어 몰래 날아다니다가 사람에게 들키면 그 자리에 멈춰 서지’ 엊저녁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할아버지가 재미있는 이야기 해줄까’ 하니까 아이들은 아주 신이 났습니다 빤히 얼굴을 쳐다보며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래도 안 되겠어 할아버지가 가르치던 아이들이 마구 졸라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줬는데 숨이 넘어갈 만큼 웃다가 배꼽이 빠져 큰일 날 뻔했어 그러곤 다신 재미있는 얘기를 해 달라고 하지 않았어’ ‘지금도 병원에 가면 배를 움켜쥐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너무 웃다가 배꼽이 빠진 사람들이야’
그러건 말건 아이들은 이야기를 해 달라고 보채지만 나는 끝내 해 주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걱정되어서요

오늘은 다락방에서 ‘캄펑의 개구쟁이’를 읽어 주다가 우리 아이들 키울 때 생각이 나서 아이들을 이불에 눕히고 ‘담요그네’를 태워줍니다 손자가 없는 우리에게 이웃아이들이 찾아와 우린 할머니 할아버지로 살아갑니다

 

10.16

뒤뜰에서 꽃밭을 만들고 있는데 울림이가 책을 들고 뛰어왔습니다 사람을 쉽게 사귀지 못하고 책을 동무 삼아 살아온 터라 책을 들고 있은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갑니다 교사로 살아가는 내내 학교에서 내게 맡긴 일도 도서관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울림이가 들고 온 책 두 권 가운데 ‘사마귀’라는 자연 이야기 책을 빌렸습니다 사마귀는 일곱 차례 허물을 벗어야 어른이 되고 첫 허물을 벗은 어린 사마귀들은 서로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뿔뿔이 흩어진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날개로 자라날 곳을 가리키는 ‘날개싹’이란 말도 처음 들었습니다
아이들과 사귀려면 아이들이 쓰는 말을 알아야 하겠지요 ‘무슨 사우루스’ 라고 부르는 공룡 이름도 익히고 만화영화에 나오는 로봇자동차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어린이집에 가야 한다고 울림이가 불려간 뒤 아침을 먹고 있는데 부엌 문이 살짝 열리고 이음이가 혼자 나타났습니다 웬 일일까 이음이는 오늘 어린이집에 가지 않나 했는데 형이 왔다갔으니까 저도 할아버지 집에 들렀다 가야 한다며 아주 잠깐 문 밖에 머물렀다 돌아갔습니다)

 

 

10. 17

환청이었을까요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간다고 갔는데 ‘할아버지’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밭 가장자리까지 달려갔어요 
아무도 없고 돌아와 혼자 땅콩을 캐며 이 행복한 순간도 스쳐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루종일 아이들이 없는 윗집은 텅빈 듯, 키 큰 야윈 거인처럼 쓸쓸히 서 있어요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가 떠올라요 제목도 줄거리도 잊었지만 어슴푸레 마지막 장면이 가슴에 남아 있어요
어느 날 손자와 동무처럼 지내던 할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돌아가셔요 엄숙한 장례식이 끝나고 아이 어머니는 조용히 아이를 불러 할아버지가 남긴 선물이 있다고 이야기해요 아이는 할아버지가 쓰던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상자를 찾아 조심스레 끈을 풀고 열어봐요 
상자 속은 텅비어 있고 종이 쪽지엔 ‘너 이 놈, 또 나에게 속았지롱!’ 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

 

‘할아버지, 어린이집 갔다 와서 놀아요’ 크게 소리치고 아이들이 차를 타고 떠난 뒤 집 안에 들어서자 ‘당신, 친구가 없어 쓸쓸하겠네’ 라며 아내가 놀립니다
요즘은 아이들 말을 배워, 갑자기 아이들이 나타날 때 ‘앗, 순간 이동’이라고 하면 아이들은 너무 좋아합니다 
가끔은 아이들을 놀리려고 ‘너희들 누구니’라며 짐짓 처음 본 듯 물으면 이내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라고 되받아칩니다 그러다가 우리끼리 ‘사라져랏’이란 놀이를 만들어 놉니다 ‘사라져랏’이라고 말하면 그 동안 기억이 다 사라지는 것이지요
어제 저녁에도 산길을 한 바퀴 돌다가 울림이에게 ‘너 어디서 왔니?’ 라며 ‘사라져랏’ 놀이를 했습니다 ‘부영아파트’ 잇달아 ‘사라져랏’이라고 말하자 울림이는 ‘완주’ ‘엄마 뱃속’ ‘아기씨’라고 이어서 말합니다 
다시 ‘사라져랏’이라고 말하자 울림이는 잠깐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하늘나라’라고 말하고는 곧 ‘할아버지,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와서 하늘나라로 가는 거잖아요’ 라며 자신있는 듯 크게 말합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 아이들을 키울 적에 큰아이 우인이에게 ‘우인아, 우린 이 세상에 잠깐 소풍 온 거’라고 했더니 ‘아빠, 소풍이 왜 이렇게 지루해’ 하던 우인이 말이 떠올라 혼자 배시시 웃습니다

 

 

10.18

‘당신이 뭐예요’ 아내와 이야기하다가 아내를 ‘당신’이라고 부르자 곁에 있던 이음이가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는 듯이 나무라는 말투입니다
‘그럼 뭐라고 부르지?’ 생각이 나지 않는지 이음이는 선뜻 대답을 않다가 한참 만에 ‘할머니라고 해야지’라고 말하는데 자신이 없어 보입니다
놀이에 빠져 있으면 아이들은 가끔 나를 ‘아빠’라고 부르거나, 올해 네 살인 이음이는 친구에게 하듯 거의 ‘너’라고 부릅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그랬습니다 둘러서서 얘기하다 보면 학생들은 나를 ‘삼촌’이라거나 ‘아저씨’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교사로서 위엄이라든지 근엄함이든지 하는 것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길 없어 그랬겠지만, 나는 ‘아저씨’라고 불리는 것이 참 편안했습니다
나는 ‘학교아저씨’로 사는 꿈을 꾼 적이 많습니다 아이들 책걸상을 고쳐주고 유리창이 깨지면 갈아끼워주고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이 다니는 길을 깨끗이 쓸고
차를 몰 줄 안다면 학교버스 운전기사 일을 했어도 좋았겠지요 이 가을날 아이들을 태우고 쑥부쟁이 끄덕이는 ‘모래재’ 고개 넘어 반짝이는 억새꽃 물결을 가르고 노을바다로 풍덩 뛰어드는 꿈을 그려보아요

 

 

10.19

 

아이들과 만든 뒤뜰 꽃밭입니다
‘할아버지 뭘 심을 거예요’
‘음, 물망초랑 꽃양귀비, 초롱꽃 그리고 수선화도 옮겨심으려고’ 
‘지금 같이 심어요’
‘할머니가 씨를 부어 놓았으니까 나중에 싹이 나면 우리 같이 심자’
꽃길도 내고 벽돌도 나르고 아이들과 일하다 보면 어느 새 일은 놀이가 됩니다
울림이는 윗주머니에 있던 유리구슬을 흙에 파묻습니다
‘야, 구슬이 열리겠구나’
‘할아버지, 구슬나무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네가 한 번 그려보렴’
‘아이구, 이음이는 호미나무를 심었구나’
이음이는 호미를 거꾸로 묻고 흙을 다지고 있습니다
꽃밭놀이도 싫증이 나면 우리는 언덕에 누워 있는 우산바랭이 풀줄기로 우산도 만들고 풀싸움도 하고 그러다 보면 날이 어둑어둑해집니다
울림이가 다짐하듯 묻습니다
‘할아버지, 우리 나중에 꼭 같이 심어요’
‘그럼’
‘우리가 어린이집 가면은요’
‘할아버지가 기다릴게’
고개를 숙이고 흙장난을 하던 이음이가 장난스레 또 묻습니다
‘우리가 자면은요’
‘그래도 기다려야지’
기다리다 보면 보드라운 아이들 ‘흙가슴’에도 눈부시게 빛나는 봄이 피어나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10. 20

 

가뭄 끝에 시원한 비바람 한 줄기가 몰고 오는 풍경이 그러할까요 아이들이 마당에 들어서면 꽃과 나무와 풀들이 수런수런 깨어나 일어서고 벌과 나비의 날개짓이 더욱 바빠져 공기의 흐름마저 바뀝니다
오늘 아침에도 울림이와 이음이가 한바탕 놀다 갔습니다 스스로 팽이가 되어 넘어질 때까지 빙그르르 돌고, 같은 그림을 맞추는 ‘메모리카드’ 놀이도 하고, ‘응애응애’ 기어다니며 ‘아기놀이’도 합니다
‘아기가 되면 뭐가 좋지’ 라고 묻자 맨먼저 나온 대답이 ‘이를 닦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어요 ‘엄마가 안아준다’ ‘엄마 젖을 먹을 수 있다’ ‘몸집이 작아 안 들키게 숨을 수 있다’ ... 이런 놀이를 하며, 오늘도 나는 살며시 샛문을 열고 아이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갑니다

 

 

10. 21

무척 신이 났는지 아이들이 지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옵니다 오늘은 지우가 아이들과 함께 ‘베이블레이드’라고 부르는 태엽팽이를 가지고 놀고, 나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들깨를 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울림이가 윗밭으로 뛰어올라 와 소리칩니다

‘할아버지, 삼촌 수술해야 하겠어요 베이블레이드와 우리 옷을 다 먹어버렸어요’ 
이어서 이음이와 지우가 비닐하우스 속으로 뛰어들고, 알고보니 지우가 태엽팽이와 옷을 먹는 척하며 윗옷 속으로 집어넣어 배가 불룩하게 나온 겁니다
장난은 그치지 않고 ‘이음이도 잡아먹어야지’하고 지우가 달려드니 이음이는 내 뒤로 몸을 숨기며 ‘싫어’ ‘나는 맛이 없어’ 라고 자지러질 만큼 놀랍니다

사람에게 마음을 다쳤는지 오랫동안 안으로 꼭꼭 걸어잠가 좀처럼 저를 열어 보이지 않던 지우, 울림이와 이음이가 손을 내밀어 ‘저만 알던 거인’에 나오는 동네아이들처럼, 겹겹이 둘러쌓아 둔 지우의 담장을 허물었나 봅니다
그건 그렇고 어느 틈에 슬그머니 사라진 이음이가 걱정입니다 지우 말을 그대로 믿었나 봅니다

울림이가 집으로 돌아가며, 코뚜레 놀이에 쓰던 병뚜껑과 비닐 끈 그리고 손톱만한 조약돌을 내게 맡깁니다 아이들은 내일이 되면 또 잊어버리겠지만 나는 ‘오늘’을 소중히 간직합니다

 

10.22

아궁이에 불을 지핍니다 마당을 씁니다 여기저기 아이들이 그어놓은 금이 남아있습니다 
오늘은 지리산에서 질그릇을 빚으며 홀로 살아가는 ‘화개요 선생님’이 옵니다 천리포수목원에서 열리는 서정이 어머니 도예전을 함께 보러 가자며 이른 새벽 구례구역에서 기차를 타고 오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놀다 간 자리에는 늘, 장난감 그림책 새깃털 도토리 솔방울 조약돌 같은 것들이 남아있습니다 마당을 쓸며 문득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어떤 자국이 남아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갑니다
이 가을날엔 이슬 한 줌에 도토리 세 알 먹고 마시며 몸을 가볍게 하여 혼잣말처럼 ‘노을 지는 것이 예뻐요’ 라고 하던, 울림이와 함께 바라보던 서녘 하늘에 엷게 노을이 번질 때, 아이들이 마당에 그어놓은 금을 따라, 아이들이 뛰어오던 조붓한 도랑길을 걸어서 조용히 하늘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10.23

이음이가 울고 가는 바람에 미처 말하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내일은 먼 데서 손님이 와서 집에 없단다’고
우리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아이들이 다녀가지는 않았을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당에 남았을 아이들 발자국을 찾아봅니다
텅빈 길 위에는 가랑잎이 나뒹굴고 찬비가 흩뿌려 촉촉히 젖습니다 부옇게 흐린 하늘에 이음이가 신었던 노오란 고무신이 동동 떠있습니다

-

 

더 놀았으면 하는 아이들을 달래어 집에 바래다 줍니다 ‘울림아, 내일 꼭 우리 집에 놀러 와’ ‘안 오면요’ ‘그럼 할아버지가 엉엉 울거야’ 손을 잡은 채 장난스레 이야기하고 가는데, 아내 손을 잡고 뒤따라 오던 이음이가 달려와 내 손을 쥐더니 ‘할아버지 여기서 같이 살아요’ 라고 말합니다 나는 갑자기 마음이 슬퍼집니다
오늘은 마늘과 양파를 심을 밭에 거름을 내고 산길을 내려오면서, 이음이는 레몬 냄새가 난다고 했는데, 비목나무 잎을 손으로 비비어 냄새도 맡고, ‘땡꿀’이라 부르는 까마중 까맣게 익은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나는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지만 울림이와 이음이는 늘 나를 어린시절로 데려갑니다
맞선을 보고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혼인을 한 나와 아내는, 내 어릴 적 고향으로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내가 살던 집과 다니던 초등학교, 어머니와 개발(?조개)을 캐러 갔던 바닷가를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어린시절 생각이 나, 비탈길을 올라 학교 울타리에 난 개구멍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는데 아내도 괜찮다며 부드럽게 말리고 이제 그러기에는 너무 커 버려 그만두었던 기억이 납니다

 

 

10.24

‘쌔게(‘빨리’의 경상도 말) 와 봐요’ 아내가 불러서 마당을 쓸다가 성큼성큼 뛰어가니 
혼잣말로 ‘왜 이래 나를 깜짝깜짝 놀래키노(놀라게 하냐)’ 하며 바라보는 밭둑에는 용담 꽃이 피어있습니다 아내가 늘 보고싶어 하는 꽃입니다 갈퀴에 할퀴어지고 낫에 아무렇게나 베어진 풀더미 속에 보랏빛 고운 등을 밝혔습니다
‘당신이 부르니까 왔지 용담도 으아리도 저기 노오란 산국도’
지리산이 불러 나도 ‘매화 꽃내 그윽한 골짜기’(악양면 매계리)에 흘러들어가서 살았고, 누구인가 애타게 손짓하여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울림이와 이음이도 여기까지 왔겠지요

 

 

10.25

사람 사이가 서먹서먹한 나는, 늘 아이들 속에 있거나 풀과 나무를 동무 삼아 지내왔어요
수업이 비는 시간엔 학교 뜰을 거닐거나 울타리 너머 논길에 쭈그려앉아 봄흙 냄새를 맡거나 풀꽃들을 찬찬히 살펴보았어요
순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던, 내 발길을 붙잡은 타래란도 처음 만났고, 메꽃과 큰메꽃은 꽃의 크기뿐만 아니라 잎의 생김새도 다르고, 흰제비꽃이 보랏빛 제비꽃보다 꽃내가 짙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밭농사를 지으면서부터 풀꽃들과는 사이가 멀어졌어요 언덕에 흐드러진 쇠별꽃 무리는 뜯기고, 밭에 날아와앉은 꽃마리 괭이밥 주름잎 지칭개 봄까치꽃 광대풀 들은 뽑히고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어 오지 않았어요
어느 새 도랑에 여울지는 여뀌나 고마리와도 사이가 뜸해졌는데, 호기심으로 가득 찬 울림이 이음이와 놀면서 풀꽃들이 속삭이는 소리도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강아지풀로 콧수염을 만들어 붙이고 질경이풀로 제기도 차고 옷에 붙는 도꼬마리 도깨비풀 쇠무릎지기 풀씨 이름도 가르쳐 주고 봄이 오면 찔레 새 순도 꺾어먹고 냉이꽃 마른 줄기로 꽃종도 만들어 차락차락 흔들며 놀겠지요

 

 

10.26

‘오늘 아침엔 뭘 먹었어’
‘시리얼, 빵 그리고 으음 없어를 먹었어’ 울림이가 제법 장난말도 칩니다
‘어떤 빵인데’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지 조금 기다렸다가
‘어, 할아버지도 알잖아 구름빵, 구름빵처럼 푹신한’
‘그랬구나’ 나도 알고 있습니다 지난 번 울림이이음이 엄마가 빌려준 그림책 ‘구름빵’을 읽었거든요
‘구름빵’은 푸근히 안겨오는 빛그림(사진)을 곁들인, 아이의 마음과 엄마의 마음을 이어주는 하늘의 무지개 같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길 가운데 하나는 같은 책을 읽는 것입니다
울림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준다며 ‘도깨비를 빨아 버린 우리 엄마’ 라는 동화를 들려주는데 , 아무리 귀를 기울여 들어도 이야기 흐름이 자연스레 이어지지 않아 그저 고개만 끄덕인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울림이가 책을 빌려줘 읽고 나서는 동화 속 이야기 몇 마디만 던지더라도 서로 알아듣고는 신나게 떠들며 웃어댔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지만, 잠자리에서는 늘 팔베개를 하고는 동화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이 쓰신 ‘황소아저씨’는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여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들려 줬는데, 어느 날 슬그머니 이야기 속으로 우리 아이들을 등장시키자 두근거리는 가슴을 꼭 누르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던 지우 모습이 떠오릅니다

-

 

가운데 금을 그어 놓고, 저 쪽은 ‘만화영화 속 세상’ 이 쪽은 ‘만화영화 밖 세상’으로 나눠 우리는 ‘만화영화 놀이’를 합니다
나는 흙바닥에 퍼질러 앉아 만화영화 속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구경합니다
한참 놀다가는 저희들도 모르게 이 쪽으로 건너와 공룡자동차를 가져갑니다 
‘야, 울림이 너 투명인간이냐’
소리치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이 쪽 세상과 저 쪽 세상을 넘나들며 놉니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금을 넘어가, 싸우다 넘어진 이음이를 구출해 이 쪽 세상으로 건너옵니다
금은 굳어지고 높은 담이 되어 더는 두 세상을 넘나들지 못할 때 우리는 어른이 됩니다
어젯밤에는 울림이이음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서 오랫동안 놀다갔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할아버지 황금성 선생님 노랫소리는 대청마루에 가득 울려 퍼집니다 선생님은 이야기보다 더 많이 노래를 풀어 놓고 갔습니다
할머니 계순옥 선생님과 할아버지가 함께 부른 ‘옹달샘’ 맑은 물에서 마음껏 뛰놀며 울림이와 이음이 막내 ‘우리’는 곱디곱게 커가고 있습니다

 

 

 

3.

 

요즘 아이들을 보면서 작고 어리고 순수한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반짝반짝 빛나는지를 느낀다.

히루 하루가 전쟁 같고, 아이들에게 소리치고 뒤돌아 후회 하는 순간도 많이 있지만

아이들이 이렇게 빛나는 순간들을 함께 할 수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봐주는 분들과 이웃하며 지내는 요즘에 감사한다: )

 

 

 

 

 

 

 

 

 

:



1.


드디어 이사를 했다.

언젠가(아마도 일년 전) 예고 했던 그 마을 끝 통나무 집!





겉모습이 가장 멋진 우리집ㅋ


벌써 한달이 되어간다.

처음 2주 정도는 이사짐과 싸우고








그다음은 벌레와

(모기->개미->벌->지네순으로 정신을 쏙 빼놓음. 개미때는 익숙해 바로 개미약을 설치하여 해결되고, 모기는 처음에 미친듯이 잡다가 나중에 산책하며 7방 한번에 물리고 적응됨. 벌은 매일 하루 네 다섯 여섯 마리가 집으로 들어와 119아저씨들의 도움을 빌려 해결, 지네의 악명은 익히 듣고 있었지만 실물을 처음 보고 기절 초풍 하는 줄ㅠㅠ 지네를 본 후 다른 벌레들은 아무 것도 아닌게 되었고, 그날 이후 다시 나타나진 않았지만 해결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벌벌 떨고 있음.)


이사 하루만에 친 거미줄 스케일b


\







앞집 멍멍이 단이 하트 똥꾸몽






지금은 훌쩍 다가온 가을 날씨에 추위와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아침 저녘으로는 벌써 많이 추워져 긴팔 긴바지를 입고 자도 아침엔 춥다고 서로를 끓어 안는다. 




2.



귀촌 6년차, 그렇게 고대하던 시골집 생활 인데 막상 진짜 이사를 하려고 하니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벌레, 추위, 쓰레기 처리, 아이들 등원 등등 안 그래도 애 셋 키우기 빠듯한 내 일상이 더 힘들어 지기만 하는건 아닐까 하는 걱정들.

아파트에서 불편하고 아쉬운 것들이 있었던 만큼 반대로 편하게 누려오던 것들이 막상 사라진다 생각하니 조금 두려웠다.

무엇보다 우리가 나오고 이제야 안정을 찾고 있는 나의 일상이 다시 요동칠 것을 생각하니 막막했다.


그런데 막상 이사를 와서 걱정하고 두려워 했던 것들을 하나씩 해결 해 나가 보니 거기서 오는 성취감과 자립심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성취감과 자립심이 내가 기대했던 자연이나 주택에서의 자유로움이 주는 행복 보다 나를 더 편안하게 해 준다. 

아직은 좀 부족하지만 도시에서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지구를 살아가며 알아야 할 자연스러움에 대한 이치를 배워가는 중이다.















3.


이사와서 가장 신이난건 역시 우리 동그라미 삼형제: )

우리가 끝끝내 이곳으로의 이사를 성사 시킨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의 행복이었다.


이음이는 "이제 여기서는 뛰어다녀도 되고 소리 질러도 되지~"라는 말을 며칠 동안 입에 달고 다녔고,

울림이는 걱정하는 엄마아빠를 계속 옆에서 봐서 그런지 오기 전에는 자기도 덩달아 걱정 하더니

가장 빨리 적응하고(매일 아침 벌레 잡으러 감) 가장 신나 하는 것(와서 처음 일주일 정도 엄청나게 소리지르면서 다님) 같다.

우리도 마당으로 데리고 나가면 가만히 어딘가 보고있고, 특히 꼬꼬들 밥 줄때 업고 가서 구경 시켜주면 좋아라 한다.



























오늘은 느닷없이 남편이 아이들 재우면서 개똥벌레 노래를 불렀는데

더 느닷없이 반딧불이 한 마리가 우리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놀랍고 신기한 경험. 

(노래가 끝나고 어디론가 또 홀연히 떠났음. 이 말은 우리집 어딘가에 벌레들이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구멍이 있다는 말이기도 함)


남편은 이사를 오기 전에도 와서도 여전히 걱정 투성이 이지만, 내가 생각 했던 것 보다(어쩌면 나보다 더) 이곳에서의 만족도나 행복지수가 더 높아 보인다.

요즘은 (드디어!)심사가 얼마 남지 않아 집을 가꿀 시간이 없는 것에 아쉬워 한다.

내가 장화만 신고 나오면 리틀포레스트가 따로 없다며 사진을 찍는다ㅋㅋㅋ








이곳에서의 가을이 참 아름답다.

: )








<아빠 바람 사진기록>

+엄마사진

:


<아빠 
바람 사진기록>




꼬박일기 명맥을 이어간다!




꼬박이들은 이렇게 커가고 있습니다.



special thanks to  박은서(풀무56) 누나. (이모 아님)
























































































































































































































































많이 컸다.








:

<아빠 바람 사진기록>



무슨 일이 있거나, 재밌는 이야기를 함께 올리고 싶은데... 


사실 요즘은 별 게 없다. (아니, 매일이 특별한 건가?)


하루하루 평온하다. 


그래선가? 사진기가 잘 안잡힌다. (귀찮다ㅠ)


벅찬 일 없더라도 뭐 똑같더라. 우리 가족은 그저 일상을 차분히 살고 있다.


...


다만, 꼬박일기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네. 


나도 지나간 날들을 좀 더 남기고 싶은 마음은 쬐금 남는다.


그리하여... 오늘도 맥락 없이 사.진.투.척. 


:-)




























































































































































































































아! 카메라 사진만 올려서 그런가?


생각해보니, (아빠)아이폰 사진은 한 번도 올린 적이 없네?





:

<아빠 바람 사진기록>


셋째 이름이 '우리'인 탓에 굳이 이름을 쓸 때면 성(황)을 붙인다. "우리 우리가~"라는 말도 자주 한다. 앞으로 '우리' 존재감이 커지겠지? 아직 표정도 몸짓도 적어 사진이 많지 않다. (태어난지 한달 즈음 지난 후로 태열이 엄청 올라와 얼굴이 난리가 났었다ㅠ 요 며칠 사이 아주 좋아졌다. 그리고 셋째라서 좀 게을렀던 것 같기도... 미안해, 열심히 찍어줄께!)


아울러, 요즘 집에서 육아에 정신 없는 해원이 고생이 많다!!! 한없이 씩씩하고 넘치는 애정에 늘 감탄한다. 작년에 비해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게 어찌나 감사한지! 말로 다할 수 없을만큼 어려운 시기겠지만, 금방 지나갈꺼야~ 조만간 어디든 놀러가자!!





>^^


ㅋㅋㅋ




:

<아빠 바람 사진기록>



사진은 찰나의 기록이라지만, 순간이 모이면 금세 영겁이 되는가 보다. 거침 없는 시간이 야속하면서도 행복은 끝이 없다. 어떻게 남겨야 할까 고민스럽지만 쓸데 없는 걱정이다. 그냥 가까이서 함께하련다. 가족과 함께 2018년!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






:

황우리

2018. 3. 5. 12:07 일기/꼬박일기



1


셋째 꼬박이의 이름은 '우리'로 정했다. 황우리.

아직 가족들 사이에서는 우리 보다 꼬박이가 더 익숙 하지만, 자주 불러주다보면 울림이 이음이 처럼 익숙해 지겠지.


나는 사실 이름에 큰 뜻을 두지 않고 이쁜 우리말 이름이면 된다, 정도 였기 때문에 어떤 큰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막상 우리의 이름을 우리의 이름을 짓고 나니 '우리를 우리답게 살 수 있도록 용기를 준 아이'가 아닐가 하는, 혼자만의 의미를 두었다.


그런 나(얼렁뚱땅 부르기 좋은, 혹은 예쁜 이름을 선호하여 결정하는, 그러고 나서 의미를 부여하는ㅎ)와 달리

남편은 아이들 이름의 뜻이 서로 연결 되었으면 좋겠다며 한명 한명 고민을 많이 했다.

남편이 생각한 울림, 이음, 우리의 뜻은 이렇다고 한다. 


첫째 ’울림'은 혼자가 아닌, 더불어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떠올렸다. 좋은 생각과 삶으로 많은 이들과 공감을 이루길. 

둘째 ’이음'도 비슷한 의미이다. 말 그대로 연결이 주는 좋은 힘을 세상과 나누면서 더불어 살았으면 좋겠다. 

셋째 ’우리’는 형들 이름과 합을 맞추어 지었다. 소외 없이, 다름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하나가 되어 ‘우리’를 이루기 바란다. 

세 형제 모두 ㅇ으로 시작하는데, 뭔가 동그라미가 주는 묘한 예쁨과 의미가 느껴지기도. 

이름짓기는 생각만큼 어려웠지만 아주 즐겁고 뿌듯한 과정이었다. 매일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경건하게 꼬박이네 가족이 살아갈 미래를 다짐해 본다.


앞으로 잘 지내 보자 우리야!










우리가 태어난지 오늘로 13일째. 이제 거의 2주 남짓 되었는데, 벌써 훌쩍 큰 느낌이다.


그동안 우리는 태어나고 바로 다음날 밤, 어디가 안 좋았는지 몇 시간을 울었던 것과

며칠 전 코로 젖이 역류 하고 10분간 숨을 재대로 쉬지 못 하고 울었던 것(그 후로 숨 쉬는걸 자꾸 확인 하게 된다)

빼고는 잘먹고 잘자고 (많이)잘 싸고 순딩순딩 하게 잘 지내고 있다.

아직 아기라 밤에는 3-4시간씩 깨서 수유를 해야 하지만ㅠ 그래도 식구들이 자는 시간에 잠드는 것이 어디냐- 하고 감지덕지 하고 있다.

(어쩌면 자기가 잘 수 있는 시간이 이때 밖에 없다는 것을 벌써 깨달은 것 일지도...ㅋ)

그보다 나는 음식 먹는 것 부터 움직이는 것(집안일, 외출 등등...) 씻는 것 까지- 내 몸을 내 맘대로 하지 못 하니 좀 우울하다.

(아마 이제 몸이 좀 움직일만 하니 몸이 근질거려서 그런 것 같기도...)

더욱이 매일 건강한 밥과 반찬만 먹으며 8시만 되면 잠들어버리는 너무나 건강한 삶이 왠지 모를 허탈 하달까...

요즘 윤식당만 보면 맥주가 엄청 땡긴다ㅠ 맥주는 고사하고 시원한 사이다라도 한잔 먹고 싶다...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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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이 이음이는 각자의 심경 변화를 나름 잘 헤쳐 나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처음 태어나자 마자는 각자 서툰 표현들이 이리뛰고 저리뛰었는데 이제야 조금씩 자리 잡는 기분.

그래도 우리에게 (아직까지는)동생을 배려하고 귀여워 할 줄 아는 따뜻한 형아들이 있어서 다행: )




(엄마 처음 씻은 기념 사진ㅋ)








(요즘 낮잠 자는 풍경)



그래도 이음이 태어났을 때 울림이가 힘들어 하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울림이 이음이는 서로가 있어 큰 힘이 되고 있음을 느낀다.

여전히 하루에도 수십번 소리치고 울고 싸우는 녀석들이지만, 

울림이는 이음이에게 이음이는 울림이에게 외롭지 않게 해주는 좋은 벗이다.

그래서 한편 울림이에게 이음이가, 이음이에게 울림이가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앞으로 우리도 그 사이에 끼어 뛰노는 날이 오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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