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논문 막바지로 몇 달간 혼자서 삼형제와 집안일을 도맡느라 하루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간 몇달,
남편 논문이 끝나가니 그동안 미뤄 놨던 집안 곳곳의 일들을 해결 하느라 몇달,
이제 좀 생활이 안정 되어 가나 싶었더니 아이들 첫 방학이 왔다.
정신없이 지나간 저 시간들 속에서 나와 남편은 없던 살도 다 빠질 정도의 엄청난 고난의 시간이었는데
그나마 큰 탈 없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언제나 처럼 인자하신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사실 생각 해 보면 아이들 보다 내가 더 두분께 의지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오늘도 아이들은 점심을 먹고 (낮잠 자자는 엄마에게 도망쳐)아랫집 할아버지네로 뛰어간다.
아이들 방학이 시작 된지 열흘 쯤 되었는데,
오히려 방학하고 이래저래 일정이 많이 생겨 집에 잘 못 있다보니 어제 오늘 오랜만에 할머니네서 실컷 논다.
엊그제는 집에서 울림이랑 이음이가 "아~ 그러고보니 요즘 할아버지네를 못갔네. 빨리 가야겠다"며 마치 꼭 해야 할 일을 깜빡 한 사람들 처럼 말한다.
지난번 천안에 하루 자고 오는 일이 있어 나가는 날에도 출발 직전에 마당에 나오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발견한 이음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묻지도 않았는데 소리소리 지르며 누구네 가고 가서 뭐하고 얼마나 있다가 오는지를 열심히 전한다.
낯을 많이 가리던 막내 우리도 이제는 할머니 할아버지랑 친해져
마당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발견하면 먼저 "어---!!!" 하며 손을 뻗어 인사한다.
2.
2018.11.28
환자복만 걸친 채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는 아내가 추워 보였는지, 간호사가 담요 한 장을 가져다 덮어줍니다 무늬 없는 얇은 천을 보고 아내는 아이들 그림이 떠올랐나 봅니다 ‘여보, 아이들 그림 잘 남겨둬 아이들 그림을 수놓고 싶어’ 아내는 수술실로 들어가면서도, 얼굴에 낙서를 한 울림이와 이음이 모습이 떠올라 가만히 웃었다고 합니다 길고 어두운 굴을 지나듯 외롭고 아픈 시간을 아이들을 생각하며 혼자 견뎌냈겠지요 세 시간 남짓 수술을 받고 돌아와 병실에 누운 아내 눈가에 눈물이 맺혀 내 가슴으로 번집니다 지난 번 이마를 다쳐 응급실 침대에 덩그러니 남아,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던 울림이가 겹쳐 떠오릅니다 닷새만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서둘러 아이들이 계단을 내려옵니다 등 뒤에 감추었던 풀꽃 다발을 이음이가 아내에게 내밉니다 냉이풀꽃 개망초 민들레 방아꽃 개쑥부쟁이 들과 마른 꽃대궁, 쑥스러운 듯 조심스레 울림이도 꽃다발을 건넵니다 아내는 아이들을 꼭안아줍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다발입니다 아내를 생각하며 아이 엄마는 정성껏 저녁을 지어놓았습니다 아내는 ‘이렇게 마음 쓰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젊은사람이 참 예뻐요’ 라고 내게 말합니다 아이들이 저리 예쁜 까닭도 ‘우리를 처음 세상으로 이어주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 맑은 호숫가에 풀꽃 잔잔히 물결치는 엄마가 피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친구 순복이는 카톡에 올려놓은 이음이 사진을 보고는, ‘이 맑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세상을 보면 얼마나 경이로울까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음이는 우리를 처음의 세상으로 이어 주네요’ 라고 했습니다
11.26
주말이라 아이들과 만화영화 한 편을 봤습니다 ‘야수와 미녀’는 아이들에겐 너무 길고 지루한지 앞 부분 조금 지나자 그만 본다고 해서 껐습니다 뭉실뭉실 시커먼 구름이 피어나듯 야수가 나타나고 ‘너희들 무섭지’ 하고 지우가 묻자, 이음이는 ‘안 무서운데 눈물이 나’ 라고 말합니다 속으로는 무서웠다는 것을 저렇게 말하는구나 라고만 짐작했습니다 저녁에 엄마를 만나자마자 ‘아빠가 잡혀갔어’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여자주인공 벨의 아버지가 야수에게 잡혀 갇히는 장면을 보고 이음이는, 벨이 가엾고 슬퍼 눈물이 났던 것입니다
울림이가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고 누워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스무고개처럼 마음속에 생각한 것을 알아맞히는 다섯고개 놀이를 했는데, 이제 몸짓을 보고 무엇을 나타내는지 맞히라는 것입니다 너무 평화롭게 누워 있어서 ‘자는 무엇’ ‘죽은 무엇 무엇’이라고 해도 아니라고 합니다 하도 답답했는지 참지 못하고 울림이가 답을 가르쳐 줍니다 ‘너무 데친 브로커리’
문턱을 넘어서 저 쪽 대청마루는 ‘어른 세상’, 이 쪽 안방은 ‘아기 세상’ 울림이가 생각해 낸 놀이입니다 오늘 이음이는 킹콩입니다 문 밖에서는 두 주먹 불끈 어깨를 올려 가슴에 힘을 주고 울부짖는 어른 킹콩이었다가 문턱만 넘어서면 응애응애 마냥 귀여운 아기 킹콩으로 바뀝니다 얼굴이 빨개질 만큼 나무 침대 모서리에 세게 부딪혀도 킹콩이라서 괜찮다고 울음을 참습니다
아이들은 오롯이 그 순간에 머물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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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귀여운 옷을 입고 이음이가 방으로 들어옵니다 ‘너 그 옷’ 놀란 척 크게 눈을 뜨고 말하자 얼른 ‘엄마가 입혀 줬어’ 라고 합니다 ‘넌 안 입고 싶었는데’ 이음이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너무 귀여워 쓰러질 것 같다던 그 옷입니다 보드게임 젠가 놀이를 하는데 아이들 눈이 자꾸, 아내가 켜 놓은 텔레비전 쪽으로 갑니다 ‘너희들 주말도 아닌데’ 지우가 말하자 이음이는 얼굴을 숙이며 ‘안 볼라 했는데 눈이 자꾸 가’라고 합니다 울림이는 아예 등을 돌려 앉습니다 주말이 아니면 만화영화 같은 것을 보지 않기로 엄마와 약속한 까닭입니다 마당에서 콩타작을 합니다 도리깨질은 힘에 부치는지 아이들은 작대기로 두드리다가 콩대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서리콩을 집어던지고 놉니다 콩대를 뒤집고 달래망 밖으로 흩어진 콩을 줍고 있는데, 무슨 까닭인지 이음이가 ‘왜 밤이 안 오지’라고 묻습니다 ‘할아버지가 얼른 불러올까’라고 하는데 곁에서 아내가 거듭니다 ‘밤도너희들처럼 해찰 떠느라고 그래, 오다가 꽃도 보고 벌레도 보고 그러느라고’ 울림이가 밤이 오면 집에 가야한다니까 그제야 이음이는 조용해집니다 언제인가 울림이가 ‘할아버지, 이음이 꿈이 뭔지 알아요’ 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는 울림이 꿈은 ‘늙어도 떠나지 않고 이 세상에 있는 거’라고 합니다 울림이는 사랑하는 식구 곁을 떠나지 않고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습니다 해쓱해진 국화꽃 무리 곁을 지나며 오늘도 ‘할아버지 이 꽃이 날아왔어’라고 말하는 이음이 꿈은, 커서 어른이 되면 아빠와 술 한 잔 하는 겁니다
11.30
미세먼지를 뚫고 아이들이 뛰어옵니다 울림이는 손가락으로 코를 틀어쥔 채, 뒤따라온 이음이는 이렇게 왔다며 손등으로 코를 누르며 ‘돼지’라며 웃습니다 울림이 주머니 속에 이음이 등 뒤에 숨겨 온 자동차로 한참을 놀다가, 다락에서 꽃 이름 맞히기 놀이를 했습니다 ‘어린이 식물도감’을 보고 울림이가 꽃 생김새를 말로 그려내면 이름을 맞혀야 합니다 ‘털이 났어’ 하면 ‘개쉬땅나무’, ‘가시가 났어, 어디에, 머리에’ 하면 ‘절굿대’ 아무리 풀과 나무에 관심이 깊다지만 이건 너무 어렵습니다 괜히 ‘오이풀’을 보고는 이 풀은 오이 냄새가 난다고 얼버무립니다 이제는 그림을 그려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울림이는 어떤 것이라도 눈에 띄게 도드라진 곳을 잘 잡아 그려냅니다 울림이가 엎드려 왼손으로 연필을 잡고 열심히 그리고 있는데 이음이도 종이를 달라고 합니다 서랍을 뒤지다 보다 사진이 나옵니다 지리산에 살 때 식구 넷이서 함께 떠난 유럽 여행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이 사람은 누구’ ‘할머니’, ‘이 사람은 누구’ ‘할아버지’, ‘할아버지 뒤에 있는 이건 뭐지’ 체코 작은 마을 ‘체스키 크롬로프’ 장난감 가게 앞에 피노키오 인형이 서있습니다 잘 몰라 하는 이음이에게 코를 길게 늘어뜨리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생각난 듯 말하려고 하지만 입에서 맴돌 뿐 영 이름이 떠오르지 않은가 봅니다 귓속말로 ‘피노키오’라로 하자 울상을 지으며 대청마루로 나갑니다 이음이는 요즈음 무엇이든지 제 힘으로 하려고 합니다 과자를 싼 종이를 벗겨 달라고 할 때도 조금만 찢어 손에 쥐어 주어 나머지는 이음이가 스스로 찢어 먹게 해야 합니다 제가 맞혀야 했는데, ‘할아버지, 싫어’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 이음이에게 미안하다며 달래어 안고 들어옵니다 어느 날인가는 문득 ‘아빠가 회사에 간 것처럼 지내야 해’라고 말해 대견스러우면서도 가슴이 싸한 적이 있습니다 학위 논문으로 바쁜 아빠가 집에 있더라도 없는 것처럼 지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이음이는 아빠와 놀고 싶은데 또 참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쯤 나처럼 창 밖에 뜬 별을 보다가 아이들도 잠들었겠지요 아닙니다 아이들이 곧 별이고 꽃입니다
12.3
맑은 바람과 햇살을 데불고 아이들이 옵니다 며칠째 아이들이 집에 들르지 않아 마당을 쓸면서도 마늘밭에 볏짚을 덮어 주면서도 귀와 눈은 늘 아이들에게 쏠립니다 어제는 아장아장 숲길 내려가는, 두 살 난 ‘이랑’이란 아이를 만났습니다 엄마 친구들이 손님으로 왔나 봅니다 오늘 아침엔 다섯 살인 ‘담인’이를 할아버지에게 소개해 준다며 집에 데려왔습니다 날마다 뛰어 내려오던 돌계단을 담인이를 보살피며 조심스레 내려옵니다 방 안에 들어와서도 모든 게 낯선지 담인이는 주춤주춤합니다 등 뒤에 몰래 숨겨 온 장난감을 짠 하고 멋지게 보여 주고 싶었는데, 아이들이 궁금해 문을 열고 들어선 할머니에게 들키자 이음이는 속이 상해 뒤돌아서 벽 구석에 얼굴을 묻습니다 핑그르르 담인이 눈에도 눈물이 돕니다 나중에는 속초에서 ‘완벽한 날들’이란 동네책방을 가꾸시는, 담인이 엄빠 아빠도 오셨습니다 한참 동안 팽이를 가지고 놀다가, 방에 놓인 ‘어린이 식물도감’을 이리저리 펼쳐보더니 무슨 생각이 난 듯 울림이는 엎드려 그림을 그립니다 지붕 꼭대기에 십자가가 달려 있어 교회냐고 물으니 병원이라고 합니다 울림이는, 여기 이사 와서 얼마 되지 않아 온몸에 열꽃이 나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했던 이음이가 생각났나 봅니다 곰돌이가 새겨진 윗옷을 입고 주스를 먹고 있는 이음이, 오른쪽 별 모양 스티커가 붙어 있는 병실 서랍, 그 오른쪽에 ‘우리’를 안고 있는 엄마, 왼쪽으로는 아픈 아기와 양쪽 곁에 아기 엄마와 의사 선생님, 그 왼쪽으로 3층 엘리베이터... 울림이는 그 때 그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병실 서랍 안에 든 과자까지도 오른 쪽 지붕 위 생쥐는 상상해서 그려 넣었다고 하면서, 생쥐가 사는 집 지붕 양쪽에 커다란 토끼 귀를 그린 것은 생쥐가 고양이 오는 소리를 얼른 알아 듣고 빨리 달아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음이도 ‘구름아 놀자 구름아 놀자 해서 노는 거야’ 라며 왼손에 구름을 잡고 있는 아이 그림을 보여줍니다 늘 눈사람처럼 두 눈과 입, 작대기처럼 생긴 두 팔과 다리를 그리던 이음이가, 오늘 처음 이야기가 담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음이가 구름아 놀자고 말할 때 정말 하늘에서 구름이 내려와 손에 잡히는 듯했습니다 내가 전에 하늘나라에 가면 구름을 타고 놀거야 하며, 하늘나라엔 안 간다는 아음이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그 구름일까요
12.3
구름 속에서 햇살이 터져 나오듯, 이틀째 보이지 않던 울림이가 텃밭으로 올라옵니다 흙에 묻었던 *무우를 꺼낸다고 하니 같이하고 싶어 합니다 내가 마늘밭에 볏짚을 덮는 것도 창 밖으로 봤다고 아쉬워했습니다 삽과 호미를 가지러 가자고 하니 ‘고랑이, 고랑이’ 하며 고랑을 달려갑니다 오늘은 ‘이랑’이란 아이의 이름 뜻을 알려주었습니다 여기 움푹 팬 곳은 ‘고랑’이고, 이 길로 사람도 다니고 빗물도 다니지 이 고랑에서 밭두둑까지를 ‘한 이랑’이라고 한다며 발을 벌려 알려주었는데 자꾸 ‘고랑’을 ‘고랑이’이라고 부르는 울림이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울림이는 호미로 나는 삽으로 흙을 파내자 그 안에 무우를 넣었던 흰 쌀자루 끝자락이 보입니다 자루가 어느만큼 드러나자 손수레를 가지러 간 사이 울림이는 제법 깊은 구덩이에서 무우 한 자루를 꺼내놓았습니다 손에 묻은 흙을 털며 숨을 몰아쉬는 울림이는 안간힘을 썼나 봅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났냐고 묻자도깨비 힘이라고 어깨를 올리며 뿌듯해 합니다 누군가에 보여 주고 싶어 둘러보지만 저만치 떨어져 난로에 지필 땔나무를 나르느라 아빠는 겨를이 없습니다 울림이는 도깨비 힘을 몰래 감추어 두었다가 울림이를 화나게 하는 사람을 멀리 던질 때 쓴다고 합니다 문득 논산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우리 반 아이였던 태연이와 원영이가 생각납니다 우리 반 반장이고 3학년 선배들도 이길 수 없었던 씨름꾼 원영이는, 키 작은 우리 반 아이를 업고 과수원 언덕길을 올라 은진 관촉사로 봄소풍을 갔지요 아이들 말로는 주먹으로 한 대 치면 맞은 사람이 교실 이 쪽 창가에서 맞은편 벽으로 나가떨어져 마을 어른들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태연이가, 주먹을 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학교 앞 구름산으로 놀러갔을 때 풀꽃을 묶어 내게 건네주던 태연이는 새벽 호수처럼 눈빛이 잔잔한 아이였습니다 집에 놀러 왔다가 혼자 돌아가려는 담인이를 지우가 바래다 주려 하자, ‘삼촌, 나무다리 지나 처음 돌계단 있지 거길 내려올 때 담인이가 힘들어 해’ 라고 걱정하던 울림이도, 깊이 숨겨 둔 힘을 제대로 쓰겠지요
*맞춤법에서 ‘무우’를 ‘무’라고 고쳐쓰자고 했을 때 어느 한글학자는, 이제 ‘무•우’라고 소리내는 사람은 없지만 눈으로 보는 글자니까 ‘무우’를 그냥 두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없다’를 뜻하는 ‘무’와 같은 글자와 헷갈릴 수 있으니까 그 생각이 떠올라 ‘무우’라고 적어 봤어요
12.4
온종일 절름거리는 비에 갇혔던 아이들이 해질녘이 되어서야 집으로 건너옵니다 장화를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방에 들어온 아이들은 주머니와 옷 속에 감추어 온 풍선과 그림책을 하나하나 꺼내 놓습니다 ‘더 크게 더 크게’ 잇달아 이음이는 재촉하고 조금씩조금씩 부풀어오르던 풍선이 그만 터져버립니다 터진 풍선 주둥이 오목한 끝을 모아 붙잡고 힘껏 불자 풍선은 다시 봉긋 솟아오르고 순간 흐려졌던 이음이 얼굴이 환히 피어납니다 터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부풀리다 놓아 버린 울림이 풍선이 푸르르르 몸을 떨며 날아갑니다 어릴 적 지우와 놀던 놀이가 생각났습니다 ‘사람 풍선 놀이’ 먼저, 내가 숨을 들여마셔 한껏 배를 내밀었다가 숨을 내쉬어 배를 쑥 들이밀고는 쓰러지는 시늉을 해보입니다 아이들은 저만치 침대 위에 서있습니다 손나발을 하고 내가 후우 소리를 내며 숨을 불어넣으면 아이들 배는 자꾸자꾸 부풀어오르고, 입에서 손을 떼자마자 아이들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찌그러져 아무데나 날아가선 쓰러집니다 때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쭈그려앉았다가 일어서선 까르르 넘어지고, 지우가 저녁 먹으러 가자고 하지 않았으면 언제까지나 이렇게 놀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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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밥을 지어 울림이 식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습니다 운달아 먹어서인지 울림이는 밥 한 그릇을 거뜬히 비우고 더 달라고 합니다 밥을 먹은 아이들은, 대청마루에서 사과를 깎는 내 둘레를 빙빙 돕니다 천천히 빨리 아이들이 멈추면 함께 멈추고, 달리는 아이들 발 빠르기에 맞춰 사과 껍질을 깎습니다 다 깎은 사과를 통째로 건네니 이음이 가슴속 기쁨도 잔뜩 부풉니다 야금야금 사과를 갉아먹다가 꼭지가 드러나니 ‘도토리사과’라고 부릅니다 다시 아이들이 돕니다 어질어질합니다 저러다 넘어질라, 나는 부산 영도다리가 되고 기차 건널목 차단기가 됩니다 아이들은 ‘대문놀이’라고 부릅니다 통행새는 인사를 하는 겁니다 손을 가지런히 눈썹 위에 붙여 ‘허수아비, 안녕’ ‘수염 할아버지, 안녕’ 이라며 장난스레 인사를 건네고 더러는 병원차라고 그냥 지나가고 더러는 상어가 되어 헤엄쳐 가기도 합니다 만날 때마다 장난을 치니 아이들은 아무리 해도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신용을 잃은 셈입니다 아까만 해도 그렇습니다 ‘곤충들의 운동회’라는 그림책을 읽어 주는데, 이야기 마지막에 다달아 사마귀가 나와 춤추는 장면에서 곤충들이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배꼽이 빠진다는 그런 말이 책에도 나오느냐고 할아버지가 끼어 넣었다고 마구 우기다가, 쪼르르 달려가선 엄마한테 가서 보여주고는 잠잠해집니다 나는 그저 책 읽어주는 할아버지, 같이 노는 동무일 뿐입니다 오늘은 점심을 먹고 일찍 왔길래 너희들 어린이집에 안 가서 좋겠다고 하니, 이음이가 대뜸 ‘할아버지도 좋지, 우리와 놀아서’ 라고 말을 던집니다 그나마, 아직도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12.9
‘나는 웃을라는 건데’ ‘곤 친구나봐’ (곤’은 만화영화에 나오는 아기 용 이름입니다) ‘먹으지 그래’ 아이들이 도토리나 솔방울 조약돌을 모으듯, 나는 이음이 말을 모읍니다
울림이 곁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는 이음이게, ‘할아버지는 구름아 놀자 하고 구름과 노는 그림이 너무 좋아’ 라고 하자 조물조물 고 조그만 입술로 이음이는 ‘나는 잘 못 그리는데 손이 그렸어’ 하고 말합니다 이음이는 ‘인어공주(사진2)’와 ‘꽃 기린’(사진3)을 그렸습니다 아내는 이음이가 그린 눈(사진1)이 참 선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요즘 들어 이음이는 걸핏하면 잘 토라집니다 제 성에 차지 않으면 ‘할아버지 싫어’ ‘할머니 싫어’ ‘삼촌 싫어’ ‘형 싫어’ 하며 구석에 고개를 박고 마음이 풀릴 때까지 마냥 서 있습니다 무슨 까닭인지 헤아릴순 없지만 미안하다고 달래 보기도 하고 저만치 떨어져 지켜보기도 하지만 마음이 아픕니다 오늘 아침 이음이는, 살짝 눈이 내려앉은 계단을 걸어 곧바로 오지 않고 갈참나무 아래 밭둑길로 빙 돌아옵니다 창 밖으로 내다보던 울림이가, 뒤뚱뒤뚱 이음이 걷는 흉내를 냅니다 네 살배기 이음이는 지금 뒤뚱뒤뚱 혼자 속앓이를 하며 자라나고 있습니다
12.10
이음이가 말한 ‘나는 잘 못 그리는데 손이 그렸어’를 어른들이 쓰는 말로 옮기면, ‘나는 잘 못 그리는데 어쩌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은 금이 구름 모양이 되어 마치 아이가 구름을 손에 쥐고 노는 듯한 그림이 되었어’가 아닐까요 시인과 아이가 다른 점은, 아이들은 제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낱말로 제 생각을 그려내는 데 있겠지요 집에 텔레비전이 없는 아이들은 주말이면 가끔 우리 집에서 만화영화를 봅니다 오늘도 엄마와 약속한 만큼만 보고 텔레비젼을 껐습니다 무얼하고 놀지라고 해서 우리 구들방에 가서 책 읽자고 하니 이음이가 싫다고 합니다 만화영화를 보다가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에 가면 재미있는 장면이 지나갈까봐 끝내 방에 쓰레기통을 가져와 오줌을 눈 이음이, 만화영화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겠지요
나 : 너희들 눈 좀 쉬어야지 울림 : 쉬면서 보면 되지 나 : 어떻게 쉬면서 봐 울림 : (비스듬히 눕는 시늉을 합니다) 나 : 그게 쉬는 거니 이음 : (이불을 뒤집어쓰며) 이렇게 ‘얼굴을 없애고’ 눈 좀 쉬자니까 이음이는 이불로 ‘눈을 가리고’ 보자는 것입니다
비늘 그리가 어렵다고 하며 울림이가 그린 인어공주, 그 곁엔 어릴적 못을 가지고 기찻길에서 놀던 내 이야기를 듣고 그린 그림입니다 기찻길 위를 달리는 기차와 못, 지렁이와 두더지가 그려져 있습니다
어른들은 머릿속 숱한 낱말을 알면서도 ‘상상의 문’ 앞에서 멈춰 서 버리고, 몇 안 되는 낱말을 가슴에 품은 아이들은 ‘상상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햇살 쏟아지는 파란 하늘을 마음껏 헤엄쳐 다닙니다
12.11
내 친구 순복이가, 이음이와 울림이가 그린 그림을 보자마자 몸에서 터져나오는 기쁨을 그대로 쏟아 놓습니다 ‘와, 천상의 그림입니다. 바로 이것이지요. 내 생각을 없애면 하늘이 저절로 그려주는 그림, 시, 노래 들이 있지요. 그것이 우리를 감동케 하고 전율케 하고 우리의 기쁨이 되고 힘이 되고 ... 찬란한 오늘을 맞이하게 되리니 그것은 또한 영원하리라.’ 예순이 넘어서도 아이 마음과 눈을 지닌 친구입니다
요즘 울림이네 어린이집 열매반은 고무줄로 노는 놀이가 한창인가 봅니다 며칠전엔 고무줄총을 만들어 놀더니, 어제부터는 손가락에 고무줄을 끼워 사진기를 만드는 걸 배워 내게 가르쳐 줍니다 언제인가 ‘할아버지, 내가 가르쳐 주니까 내가 할아버지 선생님이지’ 하던 울림이 말이 생각납니다
12.12
‘할아버지, 팔씨름 할래’ 울림이가 내기를 걸어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울림이에게 져주는 일은 없습니다 반칙을 써서라도 꼭 이깁니다 간지럼을 잘 타는 줄 알기에, 울림이 손목을 잡고는 손가락으로 손등을 간지르거나, 울림이가 더 힘을 주면 다른 한 손으로 겨드랑이를 간지럽힙니다 울림이는, 할아버지 반칙이라고 두 손을 모아 누르다가 몸을 일으켜 세워 온몸으로 내리누릅니다 이제는 또 씨름을 하자고 합니다 내던질 수도 없고,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하듯 ‘지는 씨름’을 하자고 말합니다 먼저 지려고 방바닥에 넘어지려는 울림이를 끌어당겨 안고는 뒤로 넘어져, 내가 이겼다고 좋아합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지는 씨름을 가르쳤습니다 학교에서도 ‘자전거 천천히 달리기’ ‘연필 깎기’ ‘새소리 알아맞히기’ ‘체육대회에서 꼴찌한 반 상품 모아주기’ ‘맨발로 걸어 보고 글쓰기’ 들을 하면서 지는 싸움, 천천히 사는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세상 밖으로 나가 늘 깨지고 들어오는 우리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너댓 살 먹은 아이와 아빠가 달리기 내기를 합니다 아빠들은 빨리 달리는 척하거나 넘어지는 시늉을 하여 아이에게 져주는데, 만화 속 아빠는 나처럼 주책없이, 번개처럼 달려와 내가 이겼다고 두 손을 들고 촐싹댑니다 한겨레신문에 실린 ‘비빔툰’이란 만화 한 장면입니다 아이는 제 힘껏 달려와 뒤늦게 결승선에 다다릅니다 엄마는 우리 다운이 잘했다고 이등을 해도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달려서 참 잘했다고 꼬옥 안아줍니다
12.13
군불을 때는 구들방에도 아내와 내가 없자, 뒤돌아서 집으로 가는 울림이를 불러세웁니다 ‘할아버지, 좋은 소식 나쁜 소식 가운데 어느 것 먼저’ ‘좋은 소식’ 잠깐 생각하다가 ‘내가 온 것’이라고 대답하곤 울림이는 해죽이 웃습니다 나쁜 소식은 이음이가 독감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진화’라는 말을 자연스레 씁니다 무슨 뜻인지 물어보니 힘이 세어지는 거랍니다 동무인 산들이의 고무줄 사진기가 진화한다고 했을 때, ‘진화’는 성능이 좋다는 뜻이랍니다 오늘 울림이는 비가 어떻게 오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내가, 옛날 아이들은 비를 하느님이 눈 오줌이라 생각했다고 말했거든요 강물이 바다로 모이고 바다에서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이 조금씩조금씩 올라가 구름이 되어 비가 온다고 합니다 내가 ‘구름이 몸이 무거워 막 터는구나’ 라고 하자, 내 수준에 맞추어 ‘구름 속 괴물이 바닷물을 집어삼켜 내뿜는다’고 울림이는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줍니다 이음이 없이 혼자 있어서 그런지 울림이는 ‘할아버지의 아빠 엄마는 살아있는지, 동생은 몇 명인지’도 물어봅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쯤엔 무슨 생각이 났는지 혼잣말인 듯 ‘이 세상에는 하느님이 없을수도 있어’ 라고 합니다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울림이 말처럼 오늘 우리 집에 울림이가 온 것이 가장 좋은 소식이고, 아이들이 이 세상에 내려온 것이 하늘의 기쁜 소식입니다
12. 16
풀린 햇살과 함께 아이들이 건너왔습니다 두 눈이 때꼰한 게 몹시 앓았나 봅니다 아직 기침이 떨어지지 않아,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아내가 꼬옥 안아줍니다 아내 품에 안긴 이음이는 고개를 들어 아내를 올려다보더니 그 눈으로 다시 나를 쳐다보곤 싱긋이 웃습니다 한아름 색칠 공부책을 펼쳐놓습니다 그동안 밖에 나오지 못해 방안에서 울림이와 색칠 공부를 하며 놀았나 봅니다 무지개 빛깔로 칠해 놓은 거북이도 있고, 책 겉장 안쪽에는 아이와 자동차인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자동차냐고 조심스레 묻자, 그림 속 아이가 생각하는 것을 그렸다고 하면서 무엇인지는 저도 모른다고 합니다 울림이는 집으로 되돌아가 곤충과 버섯, 나무도감을 가지고 왔습니다 힘에 겨운지 끙끙거리며 들고오다가 한 권은 도랑을 건너다 떨어뜨렸습니다 아무래도 나무나 버섯보다는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는 곤충에 더 관심이 가는지, 곤충도감을 펼치며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처음엔 개미,다음엔 벌, 다음엔 바퀴벌레, 다음엔 집게벌레, 다음엔 지네 여기 이사 왔을 때 벌레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말벌이 나왔을 땐 119 아저씨들이 오고, 밖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2층 책상에 올라가 창 밖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봤다고 합니다 어제인가는 아빠가 무당벌레를 집어 변기 속에 넣었는데 울림이가 휴지로 건져 밖에 내보내 주었다고도 합니다 울림이는 버섯 이름도 많이 압니다 괴물버섯이라고 알고 있던 ‘마귀곰보버섯’, ‘노루궁뎅이버섯’ ‘번데기동충하초 ‘ ... 무엇 하나 내보일 게 없는 나는, 지리산 대나무숲에서 본 ‘망태버섯’을 자랑했습니다 곁에서 서리태를 고르고 있는 아내가, 아이들이 이리저리 콩을 섞어 놓자 이것 내다팔 거라고 하니, 울림이는 콩을 팔아 도감을 사달라고 합니다 그건 그런데 글씨를 모르는 울림이가 ‘벌실동충하초’라는 버섯 이름을 어떻게 외우고 있는지는 지금도 궁급합니다
12. 18
울림이가 와서 사고가 났다고 했을 때도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난 것을 보았구나 생각했습니다 손으로 가리키며 차를 바꿨다도 했을 때도 차가 또 고장이 났나 짐작했습니다 나중에 이음이와 같이 집에 와서 그림을 그려가며 해 준 이야기를 듣고서야 엄마 차가 사고가 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울림이 이야기 속 사건은 이렇습니다 ‘왼쪽으로 감나무가 서 있는 야트막한 고갯길을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가는 마을길에서 일어났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차들이 지나다니는 큰길이 나옵니다 엄마는 아이들을 태우고 어린이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마을길은 겨우 차 한 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아, 앞에서 오는 흰 트럭을 보고 엄마는 자연스레 속도를 늦추었을 겁니다 브레이크를 밟자 미끄러지며 잠깐 비껴 선 트럭과 부딪쳐, 엄마 차는 왼쪽 도랑으로 빠지고 트럭은 아슬아슬 오른쪽 논둑에 걸쳤습니다 엄마는 처음엔 엔진이 고장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빙판길이었습니다 왼쪽 언덕이 높아 그늘이 지고 어젯밤 살짝 내린 눈비로 얼어 있었던 것이겠지요 흰 트럭을 몰고 온 사람은 마을 이장님인데, 마을사람 일곱이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울었습니다’ 울림이는, 마치 차 안에 있지 않고 밖에서 사고를 보고 있는 듯 자세히 들려주었습니다 이음이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울림이가 쉬지 않고 이야기하자 엎드려 그림만 그립니다 너희들은 어땠냐고 묻자, 안전띠를 매어 아무 일도 없었다며, 할아버지들이 엄마 차로 다가와서, ‘우리’와 이음이를 안아 내리고 그 사이에 울림이는 혼자 빠져나왔는데 몇 번 넘어졌다고 합니다 아마 빙판길을 건너느라 그랬을 겁니다 아찔한 순간 엄마는 얼마나 놀랐을까요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며 들뜬 듯 이야기하면서 천천히 사고 속을 빠져나왔습니다
이음이 그림입니다 위에 오른쪽에 크게 그려 놓은 차가 엄마 차입니다 부딪친 곳은 까맣게 칠해 놓았습니다 가운데 아래 기차는 왜 그렸는지, 기차 오른쪽 아래 사람은 그리다 말고 왜 지웠는지는, 이음이 마음속으로 들어가 봐야 알겠지요
12.18
이음이가 종이를 돌돌 말아 유리테이프를 붙입니다 다시 종이 한 장을 말아 가로 세로로 붙여 십자 모양을 만듭니다 울림이가 방에 들어와 이음이가 만든 것을 보고 ‘나 따라 하지마’ 라며 십자 모양으로 만든 사이로 종이를 덧붙입니다 ‘울림이는 좋겠다, 따라 하는 동생이 있어서’ 라며 미리 울림이 마음을 다독입니다 이음이가 묻습니다 ‘할아버지도 동생이 있으면 좋겠지’ ‘응’ ‘아기 동생이 있으면 좋겠지’ ‘그러엄’ 어느새 울림이는 별 모양을 만들고, 이음이는 그걸 따라 합니다 울림이는 이음이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너 평생’이라고 하자, 마법에 걸린 듯 이음이는 따라 하던 것을 멈춥니다 ‘너 평생, 뭐하고 했어’ 라고 따져 묻자 울림이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너 평생 안 놀아 준다고 했지’ 라고 떠보지만 아니라고 우깁니다 ‘평생 간지럼 태운다고 했지’ ‘평생 웃긴다고 했지’ ... 온갖 말로 대답을 끌어내려고 해도 멋쩍게 웃으며 아니라고만합니다 무엇이 이음이를 얼어붙게 했을까요 아무래도 안 놀아준다고 한 것 같아 ‘나도 울림이가 안 놀아주면 슬픈 텐데, 엄마 아빠도 너희들과 안 놀아주면 슬프겠지’ 라고 말해 봅니다 그러자 뜬금없이 이음이가, 엄마는 우리와 안 놀아준다고 합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엄마가 얼마나 바쁜 줄 아느냐고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 젖 먹이고 회사 가는 아빠 아침 차려주고 ... 라며 엄마 편을 듭니다 나도 거듭니다 어린이집 안 가려는 너희들 붙잡아 차에 태워야지 너희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나무에 기어올라가고 땅을 파 들어가고 도랑을 헤엄쳐가고 ... 아이들은 소리 없이 웃으며 그림책 보듯 신나게 내 이야기를 다 듣고 있다가 그런 적 없다고 딱 잘라 말합니다 책상 다리에 기대어 풀죽어 앉아있는 이음이 마음을 딴 데로 돌리려고 ‘단이가 낳은 강아지가 눈을 떴어 까만 게 참 귀여워’ 라고 하니, 이음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장난말로 ‘할아버지 옆에서 없어져서 봤어’ 라고 합니다 이음이가 집에 갔다 온다고 하자 울림이도 따라 나섭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말은 ‘너 평생’이라고 해도 울림이와 이음이가 서로를 얼마나 아끼는지 부엌 창문으로 바라보니, 울림이가 뒤따라오는 이음이 손을 붙잡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습니다
* ‘할아버지 옆에서 없어져서 봤어’는 ‘할아버지 옆에서 몰래 숨어서 봤어’ 라는 이음이 말입니다 * 사진은,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보고 있는 지우를 흉내내는 이음이 모습입니다
12.12
‘할머니, 할머니’ 울림이가 소리칩니다 부엌과 대청마루 사이에 난 창문으로 까치발을 딛기도 하고 폴짝폴짝 뛰면서, 저를 보아 달라고 할머니를 부릅니다 아마도 키를 자랑하고 싶은 듯합니다 아무리 해 봐도 이음이 키로는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할머니를 볼 수 없습니다 이음이는 대청에 놓인 방석을 가져다 쌓고 그 위에 올라가 힘껏 손을 뻗쳐 보지만 창턱에도 닿지 않습니다 울림이도 방석을 들고 와 이음이가 쌓아놓은 곁에 쌓아올립니다 이웃에 살다가 이사를 가 이제는 손님으로 온, 다섯 살 난 우림이도 방석 하나를 짚더니 그냥 놓아두고는 부엌으로 들어갑니다 울림이는 우림이가 두고 간 방석을 들어 덧쌓으려고 하는데, 우림이가 달려와 무턱대고 방석을 잡아당깁니다 울림이는 놓아주지 않고 금방이라도 싸움이 터질 듯합니다 ‘울림아, 그건 우림이가 집었던 건데’ 라며 울림이를 달래자, 마지못해 놓기는 했지만 마음이 언짢은지 울상을 짓습니다 이럴 땐 나도 어찌할 바몰라 굳은 듯 서있습니다 방석 위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울림이를 보며, 이음이 눈에는 슬픔이 물결칩니다 문득 무슨 생각이 스쳐갔는지 얼굴이 환해지더니 ‘이렇게 하면 다 볼 수 있는데’ 라고 소리치며 이음이는 부엌으로 달려갑니다 부엌에 할머니가 있으니까요 울림이는, 이음이가 쌓아 놓은 방석을 들어다 더 높이 쌓습니다 이음이 말 한 마디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문제가 쉽게 풀렸습니다 그 지혜는 머리에서 온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왔음을 이음이 눈빛이 말해줍니다
오늘도 이음이가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울림이는, 이제 장난말이 되어 버린 ‘너, 평 ... ‘ 이라고 말합니다 ‘할아버지 다 알아, 너 평생 안 놀아 준다고 했지 할아버지가 니 마음속에 들어가 봤거든’ 아무말도 않는 걸 보니 내 짐작이 맞나 봅니다 ‘어떻게 들어가는지 알아’ 라고 묻자 울림이는 고개를 젓습니다 ‘코로 들어가는 거야’ 라고 하며 나는 어떻게 코로 들어가는지 보여 준다고,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가지런히 무릎에 두 손을 얹고 눈을 감습니다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려고 하는데,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눈 떠 눈 떠 봐’ 이음이가 소리칩니다 눈을 떠보니 글쎄, 울림이가 한 손으로 코를 쥔 채 큭큭대고 있습니다 덩달아 이음이도 코를 틀어쥡니다 저렇게 코를 막고 있으니 오늘 울림이 이음이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글렀습니다
12.22
‘할아버지, 정말 하늘나라가 있어’ 울림이가 묻습니다 오래 전 한 할머니 수녀님이 성당을 떠나시면서, 남아 있는 수녀님에게 ‘자매야, 우리 나중에 집에서 만나자’ 라며 헤어지는 인사를 나누는데, 나는 그 말이 슬펐습니다 어쩌면 그 말은 수도원에서 다시 만나자는 뜻이었을 텐데, 나는 이 세상에 나그네로 살다가 돌아갈 집을 떠올렸습니다 ‘울림아, 사람들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지’ 라고 하자 그건 안다고 합니다 돌아간다는 말은 온 곳으로 도로 간다는 뜻이니까, 사람이 죽으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데, 그곳을 ‘하늘나라’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 구름이 떠다니고 새가 날아다니는 하늘을 가리키는 것을 아닐꺼야 그러자 앉음새를 바로하며 공룡은 어떻게 생겨났느냐고 진지하게 묻습니다 늘 궁금했나 봅니다 ‘공룡은 먼 별에서 왔을까, 질흙으로 빚은 것일까’ 생명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다고 해 ‘우리’가 엄마 뱃속에서 헤엄치며 놀다가 세상에 나와서 두 발로 기어다니다고이제 뒤뚱뒤뚱 걸으려고 하는 것처럼, 공룡도 그렇게 생겨난 건 아닐까 그러자 ‘할아버지, 우주는’ 이라고 묻더니 어디에서 들었는지,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모으며 이렇게 작은 점이 폭발하여 우주가 되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잘 몰라 아빠한테 물어보면 쉽게 말해줄 거라고 하니 울림이는 아빠도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아빠가 하는 일을 말해 줍니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살고 건강하지 않고 시골에는 사람들이 적게 사니까 도시 사람들이 시골로 오면 도시와 시골이 다 좋아진다’며 아빠는 그런 일을 한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음이 자는 거 보고 온다고 늦었는데, 지금 깨어났을지 모른다며 울림이는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12.24
아, 울림이에게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하늘나라를 말해 주지 않았군요 풀과 나무,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와 하늘을 나는 새, 가시덤불 속 토끼와 언덕을 오르는 사슴, 이음이와 울림이가 서로 사이좋게 어울려 재미있게 노는 세상이 하늘나라라고 나도 잠깐 하늘나라를 맛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해 가을 개심사로 소풍을 갔습니다 학교에서 개심사는 걸어서 두세 시간 걸릴 만큼 꽤나 멉니다 소풍이 끝나고 아이들은 거의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걸어서 학교에 왔습니다 깻송이 싸아한 바람, 맑은 햇살에 여문 콩꼬투리 터지는 소리 한참을 걸어오는데 밀잠자리 한 마리 날아와 내 어깨에 날개를 접습니다 잠자리와 함께 숨을 고르며 학교 운동장 구령대에 앉았는데 처음 보는 동네아이들이 달려와 내 가슴에 안기고 목에 기어오릅니다 한 순간 꿈인 듯 그윽한 고요 속에 잠겼던 적이 있습니다
고요한 평화 속을 헤엄쳐 오늘, 성탄엽서를 입에 물고 아이들이 날아와 앉았습니다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는 내 나무 맨꼭대기에 가장 밝게 빛나는 별입니다
12.28
동짓날엔 아이들과 함께 마을회관에 들러 동네 할머니들이 쒀 준 팥죽을 먹었습니다 아이들 입맛에는 맞지 않는지 울림이만 몇 숟가락 뜨고 이음이는 손도 대지 않습니다 그런 줄 알고 엄마는 미리 김밥을 준비했습니다 점심을 먹고는 내포에 있는 도서관으로 갔습니다 읍내를 벗어나 덕산으로 빠지는 길목에서 차가 밀리는지 한참 머뭇거립니다 차가 빨리 안 간다고 이음이가 투정을 부립니다 ‘할아버지가 도서관을 당겨올까’ 하니 이음이는 무슨 말인가 눈이 동그래지고, 울림이는 믿지 않는 말투로 ‘그래 한 번 해 봐’ 라고 합니다 내가 힘껏 끌어당기는 척하니까 어느 새 차는 무리 속을 빠져나와 달립니다 ‘봐, 할아버지가 당기니까 차가 앞으로 나아가지’ 라고 하니까 울림이는 ‘그냥 차가 가니까 그렇지’ 라고 우깁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린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줄다리기 하듯, 길가에 서 있는 높은 집도 멀리 보이는 용봉산도 끌어당기며 눈 깜짝할 사이에 도서관에 닿았습니다 늘 와 보고 싶었는데, 도서관에 들어서니 산뜻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이 나들이 온 듯 편안합니다 넓고 바닥도 푹신하여 뛰어놀면 좋겠다고 하니 이음이는, 뛰어도 안 되고 큰소리를 내도 안 된다고 합니다 내가 크게 소리 지르는 척했으면 고 조그만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을 겁니다 왼쪽에 울림이 오른쪽에 이음이를 앉히고 가져다 쌓아놓은 그림책을 읽어주는데, ‘할아버지, 여기 아 아 아 써 있어’ 라고 작은 목소리로 울림이가 말합니다 ‘그렇구나 아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작게, 조금 크게, 아주 크게 차츰 커지면서 ‘아’가 써 있습니다 ‘우리 이렇게 소리 질러볼까’ 말이 떨어지자마자 손나발을 만들어 이음이가 낸 소리가 크고 맑게 도서관에 퍼집니다 다행히 아무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울림이는 ‘아’ 하고 입만 벌리고 있어 너는 왜 소리 지르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제가 낸 소리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책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아이들을 가까스로 떼어내어 집에 돌아왔습니다.
2019.1.5
온 식구가 처음 함께 기차를 탔습니다 강화에 사는 외할아버지 집에 다녀왔습니다 울림이는 생태박물관으로 기억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어린이박물관에서 겪은 일이 가장 많이 생각이 나나 봅니다 문밖에 서서 봇물 터지듯 거기서 보고들은 것을 쏟아냅니다 방에 들어와서도, 집으로 되돌아가 가져온 박물관 지도를 보이며 자세히 이야기해 줍니다 외할아버지와 바둑 둔 이야기, 아는 이모를 만난 이야기도 들려주고 머리가 하얀 이상한 할아버지가 준 단소와 소금도 꺼내 보여줍니다 이음이는 무엇을 줘도 통 입에 대지 않습니다 아내가, 따뜻한 아랫목에 뉘여 배도 만져주고 손도 주물러 줍니다 얼굴이 말가니 더욱 안쓰럽습니다 한참이 지나 괜찮아졌는지 찐 고구마를 달래서 먹습니다 박물관에서 가져온 책자를 펼쳐 색칠을 합니다 울림이는 무지개 빛깔로 섬세하게, 이음이는 산도 사람도 다 초록색으로 칠합니다 이음이는 초록색을 좋아하는구나 하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마음 속에들어가봤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라고 하며 ‘할아버지 콧구멍에 들어가 생각해봤어’ 라더니 말이 없습니다 이제 몸이 다 나았는지 뛰어다니며 장난을 칩니다 한참 울림이와 뛰다가, 울림이가 이음이보고 어서 쉬하고 놀자고 합니다 이음이는 오줌이 안 마렵다고 하고, 그래도 울림이 말이 맞겠지 하고 화장실에 가 오줌을 누입니다 오줌을 누면서도 이음이는 안 마려운데 라고만 합니다 오줌이 마려운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울림이한테 물어보니 비밀이라고 안 가르쳐 줍니다 겨우 이음이한테 물어봐서 알았습니다 이음이는 일어서서 두 다리를 붙이고 몸을 비트는 흉내를 냈습니다 초등학교 신입생 임시 소집이 있어 아이들은 돌아가고 아내가, 이음이가 ‘지우 삼촌 아직도 아파’ 라고 물었을 때 고맙고 가슴이 찌릿했다고 합니다 밤에 몰래 놀러온다던 이음이는 오지 않습니다.
1.6
시내버스를 타고 읍내 목욕탕에 갔습니다 장터에 있는 목욕탕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몹시 붑빕니다 하동 악양에 있는 목욕탕이 생각납니다 목욕비 삼천 원에 어른 서넛이 들어가면 꽉 차버리는 욕조, 수도꼭지 다섯인 작은 목욕탕이지만 지리산 형제봉 우리 집 곁을 흐르는 골짜기 물을 받아 참 깨끗했습니다 발을 닦다가 아이들 생각이 납니다 울림이는 갈라진 내 발뒤꿈치를 보며 할아버지 발에 지진이 났다고 하고, 엎드린 내 등에 올라타 널 뛰듯 뛰던 이음이는 벌집이라고 합니다 내 옆에 한 할아버지가 조심스레 손으로 발을 문지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실까 몇 번 망설이다가 제가 등을 밀어드릴까요 라고 했더니 선뜻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진 몰랐습니다 등을 밀다가 보니 할아버지는 오른팔이 없으셨습니다 왼쪽 어깨 둘레와 팔뚝 아래까지 찬찬히 밀어 드렸습니다 울림이와 이음이가 있었어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1.7
울림이가 놀다가 두고 간 장난감과 나에게 읽어 보라고 빌려준 책입니다 울림이는 오른쪽 두 번째 파란 공룡을 좋아합니다 그날도 이음이가 그 공룡을 가지고 싶다고 하자, 집에 도로 가서 전갈과 새 모양의 공룡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도 아음이는 형이 가진 것이 더 멋져 보이는지 그 파란 공룡을 달라고 떼를 씁니다 금방 울음이 터질 듯합니다 울림이는 선선히 내놓습니다 제 것을 꼭 챙기는 울림이에게는 좀처럼 없는 일입니다 웬 일이냐고 울림이를 꼭 끌어안아 줍니다 어떻게 그런 마음을 내었느냐고 자꾸 다그치자 ‘그냥 주면 되지’ 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합니다 어제 오늘 아이들이 오지 않아서 도서관에 갔나 어린이집에 갔나 궁금했는데 둘 다 배탈이 났다고 합니다 이럴 땐 내 손에 신비한 힘이 있어 닿기만 하면 요술처럼 아픈 배가 나았으면 좋겠습니다 늦깎이 목사님이 된, 내 친구 병진이가 생각납니다 신도들이 아플 때 나는 치유할 아무런 힘도 없고 다만 하느님 앞에서 눈물을 흘릴 뿐이라던
1.12
편을 갈라 놀 때는 이음이는 언제나 울림이 쪽으로 갑니다 콩을 고르는 내기를 할 때도 울림이가 가르쳐 준 놀이를 할 때도 울림이와 편을 먹습니다 너희들 어떻게 이렇게 사이가 좋으냐고, 떼어 놓고 싶은데 어떻게 하지 라고 물으니, 이음이는 마음을 바꾸면 된다고 합니다 이음이 마음을 바꾸기보다 내 마음을 바꾸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엉겨붙고 나뒹굴며 놀다가 느닷없이 울림이가 이렇게 아빠다리를 해 보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 하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며칠 전 울림이한테, 내가 잡아줄 테니까 꼿꼿이 서서 뒤로 넘어져 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땐 불안했던지 허리를 숙인 채 엉덩이로 내 무르팍에 주저앉거나, 주춤주춤 발뒤꿈치를 디디며 쉽게 넘어지지 못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오늘은 오롯이 몸을 맡기고 무릎과 허리를 곧게 편 채 몇 번이고 뒤로 넘어집니다 아내가 ‘우리 울림이가 마음이 참 넉넉해졌구나’ 라고 하니 아내에게 가서도 똑같이 해 보입니다 아내가 경상도 사람인 줄 아는 울림이는, 아내한테 ‘악어, 쌀’을 소리내 보라고도 합니다 아내가 ‘아그, 살’이라고 하자 우리 외할머니와 같다고 합니다 하루 하루가 다르게 울림이와 이음이 생각이 자라나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백 더하기 백 더하기 백은, 백삼이 아니고 삼백이라는 것도, 백이 열 번이면 천이라는 것도 울림이 혼자 생각해서 알아냈다고 합니다 울림이를 따라 이음이도 돌계단 길을 올라갑니다 ‘자고 일어나서 놀아’ 라는 이음이 말이 밀려오는 어둠을 잔잔히 흔들어 놓습니다
1.17
어디에서 들었는지 울림이가 ‘빛의 속도로 달리면 시간이 늦어진다’며 울림이 저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내가 빛의 속도로 달리게 밤새도록 연습할 거라고 하니, 듣고 있던 이음이가 ‘헤드렌턴을 몸에 넣고 달리면 되지’ 라고 말합니다. ‘옷 속에 말고 몸 속에 넣어야지’ 하는 울림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손전등을 옷 속에 넣고 아이들은 두터운 겉옷을 벗고 어둑어둑한 마당을 달립니다. 엄마가 말리는데도 그예 위 아래가 붙은 거추장스러운 북극곰 옷을 벗어던지고 내복만 입은 채, 울림이는 빛의 속도로 돌계단을 올라 사라졌습니다.
1.18
누웠다가도 이음이 표정을 떠올리면 웃음이 터져나옵니다. 어제도 울림이와 이음이가 같은 편을 먹고 내게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울림이는 손전등을 켜 불칼이라며 대들고, 이음이는 대나무를 다듬어 만든 등긁이 칼로 나를 내려칩니다. 손가락 끝과 머리와 이마를 마구 때려 너무 아픕니다. 에라 모르겠다, 너도 한 번 맛봐라. 두루마리휴지로 이음이 이마를 때리는 순간, 이음이 표정이 너무 우습습니다. 멍하니 아프긴 한데 이게 장난인지 아닌지 울지도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입니다. 내가 먼저 울림이한테 엄살을 떨며 일러바칩니다. 이음이가 여기저기 때려 겁나게 아프다고. 이음이는 볼 낯이 없던지 내 등 뒤로 와선 손바닥으로 내 두 눈을 가리고는 할아버지가 없다고 합니다. 나중에 엄마가 왔을 때도 ‘엄마, 이음이가 할아버지를 때렸어’ 라고 울림이가 일러바칩니다. 참 쌤통입니다.
1.20
어느 글에서인가 ‘아옹다옹’이란 말이, 고양이와 개가 싸우는 소리를 흉내낸 말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한데 우리 집 개와 고양이는 사이가 좋습니다. 강아지들은 고양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등에도 올라탑니다. 강아지들은 어미인 ‘단’에게서 배우고, ‘단’은 이웃집에서 기르다 두고 간 ‘보리’를 따라 배웠겠지요. 울림이는 동무인 ‘산들’이를 따라 집으로 올라가고, 나는 혼자 남은 이음이를 외발 손수레에 태워 요리조리 흔들며 산길 한 바퀴를 돕니다. 가는 길에 산비탈에 앉아 조그만 돌도 줍고 가랑잎도 주워 만져봅니다. 고양이 ‘호미’와 ‘호미’를 따라온 강아지 한 마리와 나란히 앉아 나무 사이로 다랑논을 내려다봅니다. 나는 이 순간을 고이 담아 마음속 사진첩에 끼워 둡니다. 비탈 아래로 미끄럼 타듯 내려갔다가 이음이를 안고 올라옵니다. 가파른 비탈을 서둘러 오르다가 이음이를 안은 채 넘어졌습니다. 이음이는 뒤로 나는 앞으로 넘어졌는데, 이음이가 ‘할아버지, 괜찮아’ 라며 걱정스레 묻습니다. ‘이음이가 괜찮으면 할아버지는 다 괜찮아’ 나는 이음이를 다시 손수레에 태워 집으로 갑니다.
1.22
‘할아버지, 아파트에도 이름이 있어’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이음이가 스스로 생각해 낸 듯 하는 말입니다. ‘아, 그렇구나’ 나도 처음 들어본 것처럼 놀라듯 말하니, 아파트 이름이 ‘부영’이라고 합니다. ‘부영아파트’는 여기 이사 오기 앞서 이음이가 살 던 곳입니다. 할아버지 집 이름도 지어 달라고 하니, ‘따듯집’이라며 할아버지 집은 따듯하니까 따듯집이랍니다. 군불을 때는 바깥채 온돌방이 따듯하기 때문입니다. 가게에 가서 엄마가 장을 보는데도, 아이들을 가게 문 앞에서 놀고 있습니다. 이 나이 때 아이들은 졸졸 엄마 뒤를 따라 다니며 이것저것 사 달라고 조를 텐데. 울림이는 복잡한 기능을 가진, 종이로 만든 리모컨에 다시 종이를 돌돌 만 안테나를 끼워, 이음이와 무전기 놀이를 합니다. 엄마는 장을 보다가도 아이들이 먹을 것을 살 때에는, 아이들을 불러 어느 것이 좋은지 물어보고 고릅니다. 웃풍이 세고 바닥이 차가워 방 안에 텐트를 두 겹이나 치고 전기담요를 깔고 자야 하지만, 이음이와 울림이가 사는 집은 참으로 따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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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도 손을 씻어야지’ 먹을것을 조금 차려 놓고 아내가 말합니다. 이음이는 아직 키가 작아 수도꼭지에 손이 닿지 않습니다. 받침대를 갖다 주었는데도 그예 세면대 위에 올라간다고 안아 달라고 합니다. 거품비누를 짜서 손을 씻는데 꼼지락꼼지락 어느 시절에 끝낼지 모르겠습니다. 한동안 꾸물거리다가 쉬가 마렵다고 합니다. 손등엔 아직 거품이 남아 있습니다. ‘아이고, 이음이는 장난꾸러기구나’ 하니 이음이는 ‘내가 장난꾸러기가 아니고, 쉬가 장난꾸러기야’ 라고 합니다. ‘맞아, 이음이는 쉬를 안 하려고 하는데, 쉬가 마렵다고 하는구나’ 하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시원스레 오줌을 누고 다시 세면대로 달려갑니다.
1.24
밥을 먹다가 이번에는 이음이가 아내를 놀립니다. ‘할머니, 악어라고 해 봐’ 곁에서 엄마 웃음소리가 터져나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악어(아거)’를 ‘악오(아고)’ 라고 자꾸 틀리게 소리내며, ‘어’와 ‘으’를 잘 가려내지 못하는 아내가, ‘악으(아그)’라고 틀리게 소리내길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어릴적 지우가 생각납니다. 쌕쌕이 비행기가 낮게 날아 찢어질 듯 소리가 커, 우인이가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면 저도 누나를 따라한다며 귀 위쪽에 토끼귀처럼 두 손을 대곤 했지요. 아직도 왼쪽 신과 오른쪽 신을 가리지 못해 바꿔 신고 다니는 이음이. 어제도 오줌을 누이며, ‘쉬가 장난꾸러기구나’ 라고 하니까, ‘할아버지, 쉬를 혼내 준다고 했는데 왜 아직 안 혼내 줬냐’며 도로 나를 혼내는 이음이. 이음이가 있어 세상은 날마다 첫날이고 나는 나이를 거꾸로 먹습니다.
2.1
곁에서 엄마가 시켰는지 책 읽듯 ‘고맙습니다.’ 말하고는 울림이는 이음이에게 전화를 건네주었나 봅니다. 이음이는 다짜고짜로 그 과자가 어디에서 났냐고 묻습니다. 어제 아이들 외삼촌이 과자를 보내주어서, 울림이 이음이 몰래 엄마 혼자 두고 먹으라고 문 앞에 두고 온 과자입니다. 서랍 속과 장롱 안과 다락 위 우리 집 살림살이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음이는, 그 과자 상자가 갑자기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퍽 긍금했을 겁니다. 나 : 할머니 오빠가 보내줬어. 이음 : 할머니도 오빠가 있어. 나 : 그럼, 할머니한테도 오빠가 있지. 이음 : 왜 안 알려 줬어. 나 : 미안해, 안 알려 줘서. 이음 : 괜찮아. 지금 알려 줬으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서두는 듯한 울림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할아버지, 우리가 걸었어. 아무 것도 잡지 않고.’ 드디어 우리가 한 발 첫걸음을 뗐나 봅니다. 아지랑이 봄날 아장아장 걸어 상긋한 생강나무 꽃내 번지는 오솔길 따라 ‘우리’도 우리 집으로 날아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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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에 울림이와 이음이가 왔습니다. 너희들 이름도 다 잊어버렸다고, 장난스레 이름을 다시 물어 보기도 했습니다. ‘황이음이야’ 이음이는 나무 인형을 보이며, ‘걱정인형’이라며, 걱정이 있을 때 밤에 말하면 걱정인형이 대신 걱정해 준다고 합니다. 이음이는 걱정이 무어냐고 물으니,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너무 떠든다는 겁니다. 아내가, 할머니도 걱정이 있으니 지금 말할까 하니, 밤에 해야 된다고 해서, 하룻밤 걱정인형을 빌려주었습니다. 울림이는 졸업식이 곧 다가오나 봅니다. 울림이가 졸업식에서 할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듣고, 나도 외웠습니다. ‘산책 도깨비캠프 바깥놀이 논학교 지나간 일들이 모두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울림이 말이 아니고 어른들이 써 준 말이라, 자꾸 고쳐 줘도 ‘산책 도깨비 캠프...’라고, 도깨비와 캠프를 띄워서 문장을 책 읽듯 통째로 외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방에 활짝 봄을 피워 놓고, 내가 끌어주는 손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2.10
그 새 울림이는 레고를 가져온다고 집으로 되돌아가고, 뒤따라온 이음이가 방에 들어오며 기침을 합니다. 기침도 데리고 왔구나 하니, 이음이는 ‘나는 안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기침이 쫓아왔어’ 라고 합니다. 그렇구나 이음이는 안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라고 하자, 이음이는 ‘응’이라며 ‘기침이 내 달리기보다 더 빨라’ 라고 합니다. 엊저녁에는 군불을 때려고 하는데, 이웃에 사는 주강사님이 오셔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들을 온통 재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듯싶어 물어 보니 그렇다고 합니다. 내가 전에 재를 치우는 것을 본 울림이가 아궁이 밖에서 재를 끌어내다가 깊숙이 손이 닿지 않으니까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어떻게 들어갔냐고 하니, 이음이는 이렇게 들어갔다며 두 손을 몸에 딱 붙여 보입니다. 오늘은 아이들에게 준다며 아내는 난로를 피워 고구마를 굽고 땅콩을 볶으며, 나는 난로 곁에서 울림이가 가져온 책을읽어 줍니다. 존 버닝햄이 쓴 ‘호랑이가 책을 읽어 준다면’이란 그림책을 읽어 주며, 어떤 것이 더 좋고 싫은지 물어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를 놀리는 게 싫어’ ‘아니면 독수리가 네 옷을 몽땅 훔쳐가는 게 싫어’ 라고 하니, 울림이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놀리는 게 더 싫다고 합니다. 독수리가 훔쳐가도 옷은 다시 입으면 되지만, 사람들이 놀리는 것은 기억에 남기 때문이랍니다. 그렇게 똑똑한 녀석이 난로에 불을 조절하는 쇠를 덥썩 잡아 오른쪽 집게손가락을 데고는 울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 있습니다.
2.12
최대한 기침보다 더 빨리 갔다온다던 이음이가 뒤늦게 방으로 들어서며 무슨 까닭인지, ‘저절로 마음이 바뀌었다’며 엄마가 떠 준 예쁜 목도리를 두르고 집으로 돌아가고, 끙끙대며 자연 이야기책 여섯 권을 들고온 울림이도, 두 시간만 놀다오라고 했다며 짠 하고 손을 흔들며 계단을 올라갑니다. 참, 울림이가 지난번 난로에 덴 손은 왼쪽 엄지손가락이라고 합니다. 사진은, 요즘 울림이가 만들어서 하는 놀이 카드입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1, 감옥 2, 불도끼 3, 바위 4, 공간 이동 5, 방패 6, 손 레이저 7, 투명인간 보기를 들어, 1번 감옥 카드를 내놓으면, 공격을 받은 사람이 감옥에 갇히는 겁니다.
2.26
울림이와 이음이가 냉이를 캔다고 그릇을 들고 걸어옵니다. 아이들은 냉이 한두 뿌리를 뜯어놓고는, 하켄처럼 호미를 땅에 꽂아 힘을 주고 언덕을 오르내립니다. 온통 흙투성이입니다. 다랑논 이쪽 저쪽 오가며 원앙이가 웁니다. 우리 집 왼쪽 다랑논 맨 위쪽 못에는 원앙이 한 쌍이 삽니다. 아이들이 언덕에 앉아 원앙이 소리를 흉내냅니다. ‘오랑 오랑’ ‘오르랑오르랑’ 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는 명절이나 경삿날에는 부녀자들이 모두 꽃으로 머리를 장식하는 풍습이 있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의 아내가 남편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만일 우트팔라꽃을 얻어 내게 주면 나는 당신의 아내로 있겠지만 얻어 오지 못하면 나는 당신을 버리고 가겠습니다.” 그 남편은 이전부터 원앙새 우는소리 흉내를 잘 내었다. 그래서 곧 궁궐 연못에 들어가 원앙새 우는소리를 내면서 우트팔라꽃을 훔치고 있었다. 그때 연못을 지키는 사람이 물었다. “연못 가운데 그 누구냐?” 그는 그만 실수하여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원앙새입니다.” 연못지기는 그를 붙잡아 데리고 왕에게 갔다. 가는 길에 그는 다시 부드러운 소리로 원앙새 우는소리를 내었다. 연못지기는 말하였다. “너는 아까는 내지 않고 지금 원앙새 우는소리를 내어 무엇 하느냐.”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다짜고짜로 이음이를 바라보고, ‘연못 속 거기 누구냐’고 소리치자, 이음이는 고 귀여운 입으로 ‘오랑오랑’이라며 원앙이 소리를 냅니다. 다섯 살짜리 이음이는 내 이야기를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울림이를 돌아보며 똑같이 ‘너는 누구냐’고 묻자, ‘나는 황울림이다’ 라고 능청스레 말합니다. ‘에고, 그러니까 잡혀가지’라고 하니까, 울림이는 저한테 다시 물어보라고 합니다. ‘너는 누구냐’고 되묻자 울림이는 ‘개굴개굴 ‘ 소리를 내기도 하고, ‘쉭쉭’ 혀를 내밀며 뱀을 흉내내기도 하고, ‘너는 누구냐’를 따라하며 메아리라고도 합니다. 아내가 점심을 먹자고 부릅니다. 아이들과 같이 가락국수와 어묵을 먹다가 슬그머니 울림이에게 장난을 겁니다. ‘울림이 너 아까 잡혀갔잖아. 여기 있는 울림이는 가짜지’ 라고 말하니, 울림이는 진짜라고 우깁니다. 너 이야기 속에서 잡혀가지 않았느냐고 덩달아 나도 우깁니다. 곁에서 이음이도 ‘형 목소리가 달라졌어’라고 함께 거듭니다. 울림이는 진짜라고 하면서도 차츰 목소리가 움츠러듭니다. 나는 ‘울림이 너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잘 모르겠지’ 라며 자꾸 벼랑 끝으로 밀어붙입니다. 아내가 안돼 보였는지 ‘이마에 상처를 확인해 보면 되잖아’ 라고 합니다. 무릎에 눕히고 울림이 앞머리를 들춥니다. ‘아, 여기 상처가 있구나. 진짜 울림이구나’ 라고 하니 그제야 울림이 얼굴도 목소리도 환해집니다.
아이들과 아랫집 할아버지-할머니-삼촌은 점점 더 좋은 벗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우리 부부도)
이번 주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집을 오래 비우시는 일이 생겨서 한동안 못 뵙다 드디어 오늘 만났는데
그 기쁜 마음이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들 오늘 뜬 커다랗고 밝은 달 만큼이나 환했다.
언젠가 할아버지가 달아 두신 댓글에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갔다오거나 쉬는 날이면 거의 우리 집에서 지내거든요 아이들 엄마한테 알려주려고 글로 적었어요"
라고 쓰신 글을 보고 아, 어쩌면 이건 할아버지가 나에게 보낸 편지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더 따뜻해 졌다.
여름에서 가을, 이제 가을에서 겨울로,계절이 바뀔 때 마다 할아버지와 아이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어떤 마음들이 오갈지 기대 된다.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 해 주시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오롯이 담긴 이 글들을 보며
어떤 날은 반성하고, 어떤 날은 감사하고, 어떤 날은 찡- 해지는 그런 나날들.
이렇게 우리는 아름답게- 이웃 하며 지내고 있다: )
2
10.26
가운데 금을 그어 놓고, 저 쪽은 ‘만화영화 속 세상’ 이 쪽은 ‘만화영화 밖 세상’으로 나눠 우리는 ‘만화영화 놀이’를 합니다
나는 흙바닥에 퍼질러 앉아 만화영화 속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구경합니다 한참 놀다가는 저희들도 모르게 이 쪽으로 건너와 공룡자동차를 가져갑니다 ‘야, 울림이 너 투명인간이냐’ 소리치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이 쪽 세상과 저 쪽 세상을 넘나들며 놉니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금을 넘어가, 싸우다 넘어진 이음이를 구출해 이 쪽 세상으로 건너옵니다 금은 굳어지고 높은 담이 되어 더는 두 세상을 넘나들지 못할 때 우리는 어른이 됩니다 어젯밤에는 울림이이음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서 오랫동안 놀다갔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할아버지 황금성 선생님 노랫소리는 대청마루에 가득 울려 퍼집니다 선생님은 이야기보다 더 많이 노래를 풀어 놓고 갔습니다 할머니 계순옥 선생님과 할아버지가 함께 부른 ‘옹달샘’ 맑은 물에서 마음껏 뛰놀며 울림이와 이음이 막내 ‘우리’는 곱디곱게 커가고 있습니다
10.27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습니다 어느덧 소리는 잦아들고 빗물을 머금은 구름은 몸을 풀고 가뿐히 초롱산 능선을 넘어갑니다 갓 헹구어 낸 햇살 사이로 아이들이 뛰어옵니다 눈부십니다 오늘은 따뜻한 구들방에서 놉니다 쪼르르 다람쥐처럼 목에 기어오르고 배에 올라타고 발목그네를 탑니다 우리는 작은 일로도 크게 웃습니다 오른쪽 팔베개에 누운 이음이 눈에는 잠이 그득합니다 내 귓불을 만지더니 귓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적 졸릴 때 하는 버릇입니다
10. 28
아이들은 돌계단을 타고 우리 집으로 옵니다 어른들도 단숨에 오르내리기 힘든 계단을 뛰어내려 오는 아이들을 보면 늘 조마조마합니다 울림이보다 키가 작은 이음이는 계단을 내려와선 잠깐 꽃무더기에 가려 사라졌다가 곧 마당에 나타납니다 ‘이음아 여길 어떻게 내려와’ ‘이렇게 이렇게 내려오지’ 라며 무릎을 굽히고 조심스레 발을 옮기는 이음이 발자국을 따라 계단을 내려와 봅니다 ‘아, 그렇구나’ 아이들은 제 깜냥대로 힘껏 세상을 살아갑니다 내려올 땐 쉽게 내려오지만 돌계단을 올라갈 땐 날마다 실랑이를 벌입니다 더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이음이는 안고 울림이는 손에 잡고 집 앞뜰까지 바래다 줍니다 한 번은 울림이가 집으로 돌아가다가 ‘엄마, 벌들이 많아서 못 가겠어’ 라며 울상을 짓습니다 짐짓 모르는 채 엄마는 ‘날마다 다니는 길을 오늘 따라 왜 그러니’ 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합니다 하긴 구절초 쑥부쟁이 꽃에 수천 마리 벌과 나비, 꽃등에 들이 윙윙대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나는 알아듣지요 ‘엄마, 나 더 놀고 가고 싶어요’라고 아이들이 오가는 계단길에는, 양옆으로 아내가 심어 놓은 쑥부쟁이 무더기, 오른쪽으로 돌면 지우가 씨를 부어 키워낸 토끼풀꽃, 그 위에 우인이가 일본에서 사다준 태양광 꽃등이 길을 밝힙니다 그 길은 마치 아이들이 내려준 동아줄 같아 나는 그 줄을 타고 올라가 날마다 하늘나라에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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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이들이 왔다’ 아내는 얼른 뛰어가 문을 잠급니다 아이들은 서운하게 뒤돌아서고, 부엌에서 지켜보던 나와 아내는 문을 열고 뛰어나가 ‘너희들 누구니’ ‘너희들 어디서 왔니’ 라고 놀리며 아이들을 꼭 껴안고 엉덩이를 토닥거려줍니다 오래 전 읽은 책에 재미난 할아버지가 나옵니다 아이들은 밤이 되면 할아버지 과수원으로 ‘사과서리’를 하러 갑니다 할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아이들이 몰래 울타리를 넘어와 살금살금 나무에 올라가는 장면을 지켜보다가 아이들이 숨죽이며 사과를 따는 순간 뛰어나와 ‘네 이놈들’ 하고 소리칩니다 자지러질 만큼 깜짝 놀라 달아나는 아이들 뒷모습을 보며 할아버지는 혼자 껄껄 웃습니다 울림이 이음이와 밭일을 하다 보면 땅콩과 고구마를 거둬들인 빈 밭은 아이들 놀이터가 됩니다 두꺼비집을 짓고 놀다가 굴을 뚫어 상수리를 굴려 넣고 공벌레나 무당벌레 애벌레를 잡아가두고 가끔 콩줄기에 붙어 있는 사마귀를 나무 꼬챙이로 건드리고 놉니다 우리 어릴 적에도 고무신 한 켤레면 하루종일 놀았지요 ‘고무신 멀리던지기’ ‘고무신 따먹기’ ‘고무신 숨기기’ 가끔 고무신을 엿으로 바꿔 먹기도 했지만, 고무신은 배가 되고 자동차 기차가 되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되었지요 ‘서머힐학교’를 세운 니일이란 선생님이 말했던가요 어릴 적 마음껏 놀지 못한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면 전쟁놀이를 한다고
*’무당벌레 애벌레’는 울림이가 이름을 가르쳐 주었어요
10.30
아이들이 다녀갔을 텐데... 현관문이 잠겨 있으면 아이들은 부엌문 고리도 흔들어 보고 살금살금 뒷계단을 올라 우리들만의 비밀통로인, 쪽마루로 난 안방 문도 열어 봤을 거예요 저녁 일곱 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을 때, 댓돌 앞 흐릿한 불빛 속 땅바닥에 새겨진 글씨와 마주치자 아이들이 막 뛰어나와 가슴에 안기는 듯했어요 ‘울림 이음 우리 왔다가요 빨리 오세요’
‘우리’를 업은 채 썼을까 마당에 써 놓은 엄마 글씨에는 울림이 이음이의 햇빛 반짝이는 웃음과 호수 잔잔한 눈빛과 물결치는 설렘이 소롯이 담겨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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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못 봤는데 울림이 이음이가 훌쩍 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 손이 가닿으면 금방 엊그제 개구쟁이로 돌아갑니다 대청마루 벽에 방석과 베개를 둘러쌓고 낮은 식탁 밑으로 드나들며 오늘은 ‘아지트놀이’를 합니다 숨었다가 나타나고 또 몸을 숨기고 아이들은 무척 재미있어 합니다 아이들은 구석을 좋아합니다 우리 집에 처음 오는 아이들도 어김없이 2층 다락 구석진 곳으로 숨어듭니다 나도 군대생활을 하면서 주말이 되면 점심도 거른 채 막사 뒤언덕 참호에서 지냈습니다 펼쳐놓은 책장에 어른거리는 마른 풀꽃 그림자, 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힘든 나날을 버티어 냈습니다 교사가 되어서도 수업이 비면, 운동장 너머 논언덕 움푹 패인 아늑한 곳에 몸을 누이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눈을 감으면 서로 몸을 부딪쳐 서걱거리는 풀잎 소리 그렁그렁 속눈썹에 감기는 맑은 햇살 한 오라기 눈을 뜨면 하늘에 고인 파란 물이 마냥 깊어 보였습니다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도, 인디언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비밀장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너희들의 구석은 어디인지 적어 보라고 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빨랫대 아래, 어떤 아이는 학교 오는 길이라고 한 것이 생각납니다 나는 어린시절 아버지가 쓰시던 책상 밑에서 꿈을 꾸었습니다 나는 어디인가 비어 있는 듯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 좋습니다 나는 울림이와 이음이가 언제나 달려들어 숨을 수 있는 그윽한 구석이 되고 싶습니다
10.31
‘할아버지, 우리가 놀던 거 그대로 둬야 해요’ ‘그러엄’ ‘삼촌이 치우면요’ ‘삼촌에게도 부탁하렴’ 그제서야 아이들은 일어섭니다 늘 그렇듯 내게 안겨서 집을 돌아가는 이음이가, 발을 흔들며 장난스레 한 쪽 신발을 벗어 던집니다 나는 주워서 신깁니다 계단을 올라선 울림이도 장화를 벗어 던집니다 그러더니 겉옷마저 벗어 풀섶에 던집니다 ‘너희들 나무늘보 같다’ 아이들 그림책에 나오는 나무늘보는 얼마나 느려터진지, 숲속 동무들을 만나 ‘아안~’ 하고 아침인사를 시작하여 ‘~녀어엉’ 하고 마치면 벌써 저녁이 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음이는 나무늘보 흉내를 냅니다 ‘아아아안...’ 성큼성큼 걸어서 몇 걸음 되지 않는 길을 아이들은 온갖 부산을 떨며 한나절이나 걸려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시간은 아이들 걸음으로 천천히 흘러갑니다 하늘의 해도 느릿느릿 떠서 느릿느릿 집니다 그리고 세상은 아무 일도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대청마루엔 어제 아이들이 ‘아지트놀이’를 하던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10.31
울림이가 넘어져 떨어뜨린 귤을 찾아다니다가 길에 떨어진 상수리 깍정이 하나를 주었습니다 ‘어, 도토리 깍정이구나’ 라고 하니, 이음이가 곧바로 ‘아니, 도토리 모자지’라고 마땅히 그러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아, 그렇구나 도토리 모자’ 어떻게 이런 말을 떠올렸는지 놀랍습니다 그러고는 풀섶에서 상수리 깍정이를 보자 이음이는 혼잣말로 ‘상수리 모자’라고 속삭입니다 상수리는 울림이에게만 알려주었는데, 어떻게 이음이가 알았는지 내일 만나면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풀약’(제초제) ‘잠자리비행기’(헬리콥터) ‘쌕쌕이’(제트기) 같이, 그 뜻이 쉽게 머릿속에 그려지는 말들도 이렇게 태어났을 테지요
아이들은 어른들 말을 그대로 흉내내어 배운다기보다는, 어른들이 쓰는 말을 들으며 저 나름대로 우리 말의 규칙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이음이가 자주 쓰는, ‘먹으는 것’(먹는 것), ‘잡으는 것’(잡는 것), ‘안 배 고파’(배 안 고파) 같은 말이 그러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하는 것을 금방 말로 나타내지 못해 한참 동안 오물오물거리는 이음이 입 모양이 눈에 선합니다 이음이는 찬찬하고 조심스러우며 사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11.1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가고 나 혼자 생강을 캡니다 아이들이 곁에 있다면 서로 먼저 캐겠다고 호미를 들고 달려들 거예요 아이들에게도 밭에 있는 생강을 보는 것은 처음일 거예요 가끔 어른들도 대나무 아니냐고 하거든요 나는 생강을 캐면서 생강 식구들을 소개할 거예요 늙고 쭈글쭈글한 엄마 생강(구강), 그 곁에 다닥다닥 붙은 얼굴 마알간 아기 생강 나는 가족보다는 식구라는 말이 참 좋아요 그 말에는 함께 밥을 먹는다는 뜻이 담겨 있거든요 ‘할아버지, 사마귀 집이에요 지난 번 책에서 봤잖아요’ ‘ 그렇구나 그걸 아직 기억하고 있구나’ 울림이는 생강 잎줄기에 붙은 거품덩이 같은 것을 보고 소리칠 거예요 아이들은 생강 캐는 일도 시시해지면 잎줄기를 던지며 놀 거예요 나는 생강 잎줄기를 끈으로 엮어 머리에 쓰고 아이들과 함께 인디언 놀이를 하겠지요 아이들은 순간순간을 살지요 순간에 머무르다 아무 미련 없이 떠나지요 아이들은 어제에 머물지 않고 늘 오늘을 살지요 산길을 오르는 차 소리가 들려와요 눈을 감아요 아이들 발소리가 들려요 울림이와 이음이가 지금 달려오고 있어요
11.2
강아지 ‘단’이와 ‘보리’가 겨울에 살 집을 만듭니다 ‘단’이 집은 어느 새 고양이 두 마리 ‘밤’이와 ‘호미’가 차지했고, 한데 마른 풀 위에서 웅크리고 자는 ‘보리’가 안쓰러워 어제는 구운 벽돌로 두 칸 집을 지어 속에 볏짚을 두툼하게 깔아 주었습니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울림이와 이음이는 엄마가 갖다 준 색분필로 새로 지은 강아지 집에 그림을 그립니다 지붕 한 켠을 빈 틈 없이 가득 칠해 놓은 이음이는, ‘영화 보기(시작하기) 전 캄캄한 거’를 그렸다고 합니다 갑자기 영화관이 생각났는지 더는 묻지 않았습니다 울림이는 고운 빛깔로 강아지 드나드는 문턱에 체크무늬를 그려 놓았습니다 아이들이 귤을 달라고 해서 집 안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수도꼭지에 손이 닿지 않는 이음이는 아내가 세숫대 위로 번쩍 안아 올려 손을 씻깁니다 아이들이 귤을 먹습니다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그저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엄청 맛있나 보다’ 하고는 얼굴을 쳐다보니 ‘엉엉 울고 싶을 만큼 맛있어’ 라고, 어디에서 들었는지, 혼자 생각한 말인지 장난스레 이음이가 대답합니다
^^ 고양이 ‘밤’이는 울림이가 지어준 이름입니다 강아지 ‘단’이와 소리 짝이 맞는다고 지었는데, 아마 산밤을 주으러 가다가 떠올렸을 겁니다 내가 캄캄한 ‘밤’은 까만 고양이와도 잘 어울린다고 하니 그 생각은 못했다고 하면서도 좋아합니다
11.3
‘예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멈춰 서서 혼잣말을 하더니 나를 부릅니다 노란 꽃술에 주홍 꽃잎 국화꽃입니다 ‘이 거 없는데(없었는데)’ 늘 다니는 길에 피어 있었는데 이음이는 오늘 처음 보나 봅니다 ‘그렇구나 오늘 처음 피어났구나’ ‘할아버지, 밤에 몰래 날아와 여기 꽂혔나 봐’
아이들을 만나면 가끔 장난말로 ‘너희 누구니’ ‘너희들 어디서 왔니’ 처음 본 듯 얘기했는데, 오늘 그게 사실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아이들은 늘 첫날 첫아침입니다 지금 막 피어났습니다 아이들에겐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니’ 라고 묻지 않습니다
마당에 가랑잎이 떨어집니다 해가 건너와 수천 개 이파리에 등불을 켭니다 수런수런 한껏 물든 나뭇잎이 젖어 빛납니다 나는 가만히 속삭입니다
‘너희들 누구니’ ‘너희들 어디서 왔니, 눈부신 이 아침에’
11.4
마을 거리축제가 열리는 날입니다 배추밭에 물을 주고 있는데 아이들이 뛰어옵니다 울림이가 건네주는 마을신문에는 간단한 행사 일정이 실려 있습니다 어린이집 아이들이 나오는 율동은, 이음이 반이 시작해서 울림이 반으로 끝난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율동 끝나면 우리가 쿠키를 팔아요’ ‘그렇구나 할아버지가 다 사줘야지’ ‘할아버지, 어디 있을 거야’ ‘울림이가 잘 보이게 나무 위에 올라가 있지’ 어느 새 이음이가 손을 들어 초롱산을 가리킵니다
등에 업힌 ‘우리’가 먼저 와 있습니다 이음이 반 아이들이 무대로 올라옵니다 아침에 곱게 물든 조팝나무 가지를 머리에 꽂고 흉내를 내더니, 그 인디언 율동을 하려나 봅니다 근데 이음이만 인디언 치마를 입지 않았습니다 이음이가 입기 싫어해서 입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 일 없는듯 아이들은 무대에서 뒹굴고 풍덩풍덩 빠지고 신나게 춤추고 뛰어놉니다 한 줄로 세우지 않고 한 틀에 가두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따듯한 눈길 속에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장구를 세워 놓고 마음껏 두들기는, 울림이 난타 놀이도 끝났습니다 오늘 나 대신 초롱산으로 올라간 사람은 ‘우리’입니다 아내가 들어올려 내 목에 걸터앉은 ‘우리’는 흥에 겨워 줄곧 몸을 들썩거립니다
11.5
‘할아버지’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만 들리고 아이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한참이나 지난 뒤 울림이가 언덕을 올라옵니다 금방 깎은 머리를 보여주려고 달려옵니다 산뜻하고 가지런한 머리칼 엄마가 깎아주었다고 합니다 ‘와, 훨씬 예쁘구나’ 흙손을 털고 꼬옥 안아줍니다 그러고 보니 이음이는 아직 마당에서 머리를 깎고 있습니다 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입니다 오늘은 고구마를 캔 빈 밭에 밀을 심습니다 골을 타고 그 위에 밀씨를 흩뿌립니다 휙 아이들이 던진 밀씨는 길바닥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울림이는 양파 모종을 옮겨 심은 밭에 밀씨 몇 톨을 묻어 두고 옵니다 우리는 노래를 지어 부르며 두둑의 흙으로 밀씨를 덮어줍니다 ‘밀씨를 숨기자 밀씨를 숨기자 새들이 먹지 않게 꼭꼭 숨기자’ 어느덧 가락을 맞춰 후렴인 듯 ‘까치들이 먹지 않게, 부엉이가 먹지 않게, 고라니가 먹지 않게...’를 되풀이합니다 초롱산 절벽에서는 웍웍 부엉이가 울고 있거든요 혼자 떨어져 밀씨를 묻고 있던 이음이가 ‘돼지가 먹지 않게’ 라고 하기에 ‘멧돼지’로 바꿔 부르자 ‘그냥 돼지가 먹지 않게’로 되돌려 놓습니다 노래는 이야기로 흘러갑니다 ‘아무거나 주워먹는 단이가 먹지 않게’, ‘이음이가 밤에 와서 몰래 가져 가지 않게’라고 하자 이음이가 얼른 ‘이음이는 늦잠꾸러기다’ 라고 대꾸합니다 늦잠을 자기 때문에 이음이는 밀씨를 가지고 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은 노래이고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이 없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엔 졸졸 시냇물 흘러가는 이야기나 재잘재잘 나뭇잎에 반짝이는 노래가 다 사라지겠지요
11.6
엄마에게 들려주고 싶었나 봅니다 ‘엄마, 잘 들어 봐 부엉이 소리가 들려’ 겉옷을 챙겨 뒤따라오는 엄마에게 말합니다 잠깐 끊겼던 부엉이가 다시 웁니다 해질녘 이맘때쯤이면 뒷산 절벽에서 우억우억 부엉이가 웁니다 울림이는 어느날 새벽 잠깐 혼자 깨어 고라니 우는 소리도 들었다고 합니다 볏짚을 나르던 아내가, 땅콩 캐낸 밭에서 흙을 파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는 ‘농사 짓는 집에 와서 농사일만 배운다’며 무슨 말끝에 ‘여길 고랑이라고 한단다’ 하고 일러주니, 울림이는 재미있는 듯 ‘고랑이’ ‘고랑이’ 하며 밭길을 달려갑니다 울림이는 이제 제법 고랑 사이로 외발 달린 손수레를 몰아 밭 한 바퀴를 돌아다닙니다 구덩이를 한참 파고 있던 이음이가, 뜬금없이 ‘할아버지, 도깨비는 어느 발이 힘이 세지’라고 묻습니다 이음이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밤에 도깨비를 만나면 왼다리를 걸어 왼쪽으로 넘어뜨리면 이길 수 있다고 한, 오래 전 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조금 전 삽과 호미로 구덩이를 파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야, 두더지가 파 놓은 것 같다’고 했는데, 더 깊이 파고는 두더지보다 힘이 센, 아니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도깨비 오른발로 팠다고 으스대려고 물어본 말이었습니다 도깨비는 왼다리가 약하니까요 날은 어둑어둑해져 저만치 떨어진 아내는 보이지 않고, ‘할머니를 잡아먹은 캄캄한 밤에게 우리도 잡아먹히겠다’고 하니 겁을 먹은 듯 내 품에 안겨 집으로 돌아가던 이음이가 묻습니다 ‘할아버지 딱지 만들 줄 알아 나도 갖고 싶어’
‘그러엄 내일 만들어 줄게 꼭 놀러와’ 아이들을 집까지 바래다 줍니다
11.7
우리는 까마득히 잊고 있지만 아이들은, 우리의 본디 고향이 하늘임을 곧바로 느껴 알고 있는 듯해요 아무렇지도 않는 이 땅에서의 삶이 아이들에게는 늘 낯설고 놀라움으로 가득차 있거든요 초인종이 울려 나가 보니 문 앞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서 있어요 엄마 등에 업힌 ‘우리’, 어제 집으로 돌아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늘 처음 만나는 듯한 울림이와 이음이 울림이는, 과일 낱개를 싸는, 그물처럼 생긴 스티로폼을 하나는 팔뚝에 감고 하나는 머리에 쓴 채 나타났어요 마치 로봇 같아 보였어요 속옷 윗도리에 새겨진 꼬마 요술장이인 듯한 그림, 이음이는 배를 내밀어 자랑하더니 한 쪽 눈을 찡그리며 그림 속 아이 표정을 지어 보였어요 딱지를 만들어 치고 종이비행기를 접어 다락에서 날리고 창 밖이 어두워질 때까지 놀았어요
아이들은, 어제에 묶여 있는 나를 풀어서 늘 지금 여기로 데리고 오지요
-
아침을 먹으며 아내와 내가 주고받은 말입니다 아내 : 아이들이 벌써 내려왔나봐 나 : 일찍 깨어났나 본데 아내 : 아니야 닭 우는 소리야 우리가 단단히 미쳤지 아내가 웃습니다
엊그제인가 나도 밭에서 일하다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는 아이들 소리인지 알고 두리번거렸던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우리 집에 처음 왔던 때가 생각납니다 이사 온 다음 날이었습니다 이사 온 날은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가 돌보고 있었으니까요 웬 아이가 문 앞에 서성이고 있어서 얼른 나가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조금 있다가 조금 작은 아이가 열린 부엌문 사이로 빼꼼히 들여다보고 있어 어서 오라고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이름도 물어 보고 나이도 물어 보고 울림이는 일곱 살, 이음이는 아내가 잘못 알아들어 ‘세 살’ 하고 되묻자 손가락까지 펼쳐 보이며 네 살이라고 야무지게 말했습니다 묻는 말에만 짧게 대답하고 주는 것만 오물오물 먹으며 하도 조용해서 퍽 수줍음을 타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비옷 속에 가방을 메고 놀러왔습니다 들어서자마자 안 보여 준다는 이음이 가방 속에도, 울림이 가방 속에도 그림책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림책도 읽고, 울림이 가방 겉주머니 속을 가득 채운 도꼬마리 열매를 던지며 놀았습니다
‘지하 백층짜리 집’이란 책을 읽다가, 박쥐가 사는 층을 지나 어느 층에 사는 무슨 동물 집에 버섯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그림을 보자 이음이가 말했습니다 ‘버섯 안에 박쥐가 생겼나봐’
11.8
‘지하 백층짜리 집’ 이야기 속 어느 층 천장에, 거꾸로 자라고 있는 버섯을 보고 ‘버섯이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다’고 한다면, ‘박쥐처럼’은 ‘거꾸로’라는 뜻에 갇혀 버린 메마른 말이 될 것입니다 도근도근 이제 막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은 ‘버섯 안에 박쥐가 생겼나봐’라는 이음이 말을, 날이 새면 훨훨 날아 달아날까 봐 얼른 적어 붙잡아 두었습니다 어제는 그림책을 보다가 울림이가 ‘할아버지, 그건 콩벌레가 아니고 공벌레야’ 라고 하자, 내가 못 알아들을까 봐 이음이는 벌떡 일어나 공을 차는 흉내를 내며 이런 공이라고 나를 가르칩니다 아이들에게 다시 배워야 할 나는, 아직도 아이들을 가르치려 드는 버릇이 남아있습니다 비가 내립니다 눈처럼 가랑잎이 떨어집니다 아이들 가슴 위에 소복소복 이야기가 쌓이고 있겠지요
11.10
세상은, 물이 맑은 만큼 맑습니다 내가 어릴 적엔 물이 참 맑았습니다 어릿어릿 눈부신 햇살, 무리지어 몰려다니다가는 작은 발소리 일렁이는 물그림자에도 휙 머리를 돌려 달아나는 송사리떼, 조붓한 논길 따라 흐르는 도랑물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몽골의 홉스골 호수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어릴 적 물을 만났습니다 솔체꽃 솜다리꽃 고운 머릿결 날리는 언덕에 닿아 할짝이던, 시리도록 맑은 물을 이제 이음이와 울림이 눈에서 봅니다
‘솔체꽃’
그이 고운 눈매
호숫가 따라 달빛 번지면
내 마음 풀언덕 일렁이는 꽃안개
가만히 몸을 흔들어 바람을 부르고
눈물 속에 떠오는 슬픈 선 하나
먼길 헤매어 찾아다녔지만
그대 피어 내 안에 있네
11.11
오늘은 이렇게 하고 집에 왔어요 울림이는 나무난간 위에 새똥 구경하느라 내가 나가서야 들어오고, 이음이는 얼굴 안 보여 준다고 눈을 감았지만 벌써 들켰거든요
11.12
‘하느님의 눈물’ ‘짱구네 고추밭 소동’ 미야자와 겐지의 ‘비에도 지지 않고’ 울림이와 이음이에게 줄 책을 고르며 내가 읽을 책도 샀습니다
지난 번 아이들 할아버지가 준, ‘글과그림’에서 펴낸 ‘나와 노래’를 읽다가 이 사람을 처음 만났습니다 투박한 글이 마음에 확 들었습니다 탁동철 선생님이 쓰신 ‘하느님의 입김’ 이란 책의 날개에는 선생님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잘 놀고 잘 삐치고 아이들에게 야단도 자주 맞는다...’ 잘 삐치고 아이들에게 자주 야단을 맞는 이 선생님을 만나면 꼭 안아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습니다
나는 학교에서 거의 2반 담임을 맡겼습니다 옆반 아이들은 우리 반을 ‘바보 2반’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하기사 어느 선생님도 ‘우리교육’이란 잡지에 나를 실으면서 ‘바보 선생’이라고 했으니까요 우리 반 아이들은 시험 보는 날 아침에도 좋아하는 책을 읽었고, 나는 아이들에게 늘, 밥 한 그릇 잘 모실 줄 알고 비질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무엇보다 값진 공부라고 가르쳤으니까요
하지만 탁동철 선생님은 보석처럼 빛나는 것을 아이들 속에서 끄집어내려고 했고, 나는 억지로 구겨 집어넣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다름’은 ‘기다림’에서 오는 것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책날개는 다시 이어서 선생님을 소개합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스스로 반짝거릴 수 있게 곁에서 보아주고 기다려 주는 걸 가장 잘한다’
11.13
울림이가 그림을 그립니다 바퀴로 굴러가는 그냥 자동차가 어느 새 ‘이오이오’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가는 경찰차로 바뀝니다 차 뒤에 감옥이 딸려 있고 사람이 갇혀 있습니다 ‘무슨 나쁜 짓을 한 거야’ 넌지시 말을 건넵니다 대답이 없습니다 ‘밖에서 크게 울어 잡아간 거니’ 장난스레 말을 던져 봅니다 아까 속상한 일이 있어 울림이가 크게 울고 갔거든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논에서 쉬하다 잡혀간 거니’ ‘누가’ ‘이음이가’ 지난 번 이음이가 쉬하기 좋다며 다랑논에서 오줌을 눈 적이 있거든요 하늘을 까맣게 칠합니다 ‘야, 산이구나’ ‘아니, 밤’ ‘삼촌처럼 뚱뚱해서 잡아 간 거니’ ‘밤이니까 일찍 자지 않아서 잡아간 거구나’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왼쪽에 새가 실려가는 차 한 대 또 왼쪽으로 계단이 있는 경찰서가 그려진 그림, 아내가, 텅비어 있는 우리 집 벽에 걸어 두어야겠다고 해서 두고 간 울림이 그림
왜 대답을 하지 않았을까 엄마가 곁에 있어 그랬을까 크게 울었다고 한 말이 마음에 언친 걸까 그러다 잠이 들고 별빛 가물가물 새벽녘에야 떠오른 생각 ‘울림이가 사는 나라엔 아직 나쁜 사람이 없기 때문일 테지’ 아닌가 그냥 말하기 싫은 날도 있지
-
콩을 거두고 있는데 아이들이 올라옵니다 ‘야 너희들 어디서 왔니’ 이제는 늘 처음 만나는 듯 주고받는 인사말이 되었습니다 이깔나무 바늘잎처럼 뾰족이, 보일 듯 말 듯, 아이들과 심은 밀이 어느 새 싹을 틔웠습니다 가까이 가서 밀싹도 보고 마늘밭을 다녀간 고라니 발자국도 만져보고 다시 아이들은 미끄러지듯 언덕을 내려가 집으로 숨어듭니다 현관문을 들어서는데 아내가 나와 목소리를 죽여가며 ‘아이들 왔냐고’고 물어보라고 합니다 나는 크게 말합니다 ‘여보, 아이들 왔어’ 아내도 아이들이 듣게 큰소리로 아이들을 못 봤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미리 아내에게 부탁했겠지요 안방에 숨은 듯합니다 나는 일부러 어디 갔나 하며 지우 방문도 열어보고 다락도 올라가봅니다 한참을 꼼지락거리다 안방 문을 여니, 기다리다 답답했던지 ‘할아버지, 못 찾겠다 꾀꼬리 하면 되잖아’ 하는 울림이 소리가 장롱 속에서 새어나옵니다 ‘어, 목소리만 남겨 놓고 어디로 갔지’ 나는 침대 밑도 들여다보고 이불도 들춰 봅니다 ‘못 찾겠다 꾀꼬리 라고 해야지’ 차츰 소리가 커집니다 ‘아, 못 찾겠다 꼬꼬댁’ ‘못 찾겠다 호히호히호’ (내가 들은 꾀꼬리 소리) ‘못 찾겠다 꾀꼴꾀꼴’ ‘못 찾겠다 꾀꼬르르르’ ‘아니, 못 찾겠다 꾀꼬리’ 이제 울상을 지은 듯한 울림이 목소리입니다 나는 붙박이장 옆 구석진 곳에 몸을 숨깁니다 내 소리가 안 들리자 아이들은 장롱에서 나와 쪼르르 대청마루로 달려갑니다 얼른 아이들이 숨었던 장롱 속에 들어갑니다 밖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아마 ‘백천’ 년이 지나도 내가 숨은 곳은 못 찾을 겁니다
*’백천’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을 때, 울림이가 쓰는 말입니다
11.14
훅 불어 케이크를 밝힌 촛불을 끕니다 ‘나도 끌 걸’ 이음이가 곧 울상을 짓습니다 다시 불을 붙입니다 장난스럽게 울림이가 다시 끄려고 입을 갖다댑니다 우리는 울림이 입을 틀어막습니다 오늘은 일곱 번째 울림이 생일입니다 ‘아빠가 일찍 와서 너무 좋아’ 달려가 아빠 품에 안기던 이음이가 아빠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음이가 일곱 살이면 울림이는 열 살’ 아빠가 대답합니다 ‘내가 열 살이면’ ‘형은 열세 살’ ‘내가 열세 살이면’ ‘형은 열여섯 살’ ‘내가 열여섯 살이면’ ‘형은 열아홉 살’ ‘내가 열아홉 살이면’ ‘형은 스물두 살’ ‘스물두 살이 내가이면’ ‘형은 스물다섯 살’ ‘스물다섯 살이 내가이면’ 스물이 넘어가자 이음이는 숫자를 잃어버릴까 봐 어쩌면 낯선 말이 나오자 숫자를 먼저 댑니다 나는 ‘스물다섯 살이 내가 되면’이란 뜻으로 들었습니다 마치 생명을 불어넣어 꿈틀거리는, 스물다섯이란 숫자가 이음이 몸으로 태어나는 듯했습니다 이음이와 아빠, 엄마와 울림이가, 지우가 선물한 레고를 맞추며 놀고 있습니다 ‘음, 이음이가 아빠 등에 올라타 있구나’ 아빠가 말하자 ‘아빠가 너무 좋아서’ 라며 이음이는 잇달아 몸을 흔들어댑니다 엄마는 엎드려 울림이가 맞출 레고 조각을 찾아주고, 울림이는 아빠에게 자랑합니다 ‘아빠, 내가 혼자 맞추는 거고 엄마는 그냥 찾아주기만 하는 거야’ 창 밖엔 초이렛달이 지긋이 눈을 감은 채 흐뭇이 웃고, 엄마 아빠 울림이 이음이 어느새 아내 등에 업혀 잠든 ‘우리’, 사랑스런 다섯 식구가 띄워 올린 별들이 조용히 하늘을 헤엄쳐 갑니다
11.15
‘너희들 맛있는 거 줄 거다’ 아이들에게 겁을 주는 척할 때 쓰는 말입니다 과자나 사탕을 무기로 꺼내드는 것은 아이들 집에서는 거의 자연 그대로 가꾼, 슴슴한 맛이 나는 것을 먹이는 까닭입니다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밀크카라멜이 있길래 ‘너희들 이 거 한 번 먹어볼래’ 하며 을러대는 척하니까 곧바로 ‘한 번 줘봐’ 라는 말이 아이들 입에서 튀어나옵니다 ‘어떡하지 우수수 이가 쏟아질 텐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지만 들은척만척 아이들은 처음 보는듯 카라멜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손가락으로 눌러 보기도 합니다 ‘어 물렁물렁한데’ 유혹을 이기지 못한 이음이는, 겉을 싼 종이를 벗기고 입에 넣습니다 이음이가 다 먹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울림이는 입에 넣습니다 이음이 윗옷 앞자락에 단물이 떨어집니다 코를 갖다 대니 들크무레한 냄새가 납니다 ‘아무래도 엄마한테 들키겠다, 엄마는 아기가 똥을 쌌는지 안 쌌는지 바지를 입었는데도 엉덩이를 맡아보고 다 아는걸’이라고 하자 이음이는 얼른 엄마한테는 비밀이라고 합니다 비밀은 무슨 비밀 저희들이 먼저 다 일러바칩니다 엄마가 현관문을 두드립니다 이음이가 귓속말로 ‘우린 같은 편이잖아’라고 속삭입니다 마음이 간지럽습니다 아이들이 보면볼수록 예쁩니다 아이들 친할아버지 말씀처럼 아이들과 끈끈한 사랑 놀이에 빠졌나 봅니다 ‘너희들 왜 이렇게 날마다 더 예뻐지냐, 밤에 몰래 엄마 젖 훔쳐 먹는 것 아니야’ ‘아니, 밥 잘 먹고 반찬 잘 먹고 잠 잘 자서 그런 거야’ 팽이 돌듯 핑그르르 한 바퀴 돌아 이음이가 내 품으로 달려듭니다
집으로 가는 길섶 마른 풀 위 오목하게 들어간 곳을 가리키며 ‘보리가 추워서 이렇게 꼬리를 흔들었어’ 라고 하더니 그 속에 들어가선 웅크리고 앉아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들어 보이던 이음이, 그제는 바람개비 접기 어제는 구슬치기 오늘은 종이공 던지기 날마다 무슨 무슨 놀이를 만들어 나와 놀아주는 울림이, 아이들이 또 보고싶습니다 아이들은 그 어디에서도 어제의 그늘이라곤 찾아볼 수 없습니다
11.19
커다란 갈참나무 아래 밭 사잇길로 이음이가 옵니다 넘어질 듯 말 듯, 이음이가 연필로 그려놓은 금처럼 삐뚤빼뚤 달려옵니다 ‘할아버지, 귀여운 거 보여줄까’ 당근을 캐다 말고 엉거주춤 일어나 ‘그래애’ 하면서 반깁니다 순간 궁금해집니다 이음이는 웃옷을 활짝 열어젖히더니 속에 껴입은 옷을 보여줍니다 곱고 빨간 줄무늬를 두른 옷깃, 왼쪽 가슴주머니에 벙긋 웃는 표정을 지은 동그란 가죽 조각이 붙어 있는, 가는 털실로 짠 계옷(털옷)입니다 ‘너무 귀여워서 할아버지 쓰러지겠다 이 옷 다시는 입고 오지마’ 처음에는 안 된다고 우기더니 내가 넘어지는 흉내를 내며 아픈 척을 하자, 안돼 보였는지 이음이는 ‘안 입고 올게’하고 말끝을 흐립니다 다행입니다 하지만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다음날 다시 고 귀여운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놀이를 하면서 가장 멋진 역은 늘 울림이가 도맡아 합니다 ‘경찰놀이’를 할 때도, 울림이는 경찰, 이음이는 경찰강아지(경찰견), 나는 도둑이 됩니다 다행히도 이음이는 아기처럼 기어다니는 강아지 역이 마음에 드는가 봅니다 입으로 내 옷소매를 물어뜯고 앞발로 내 얼굴을 할큅니다 한번은 이음이가 저는 경찰강아지를 할 테니 나보고는 경찰을 하라고 합니다 한참 놀다보니 어느 새 나도 이음이 곁을 네 발로 기어다니고 있습니다 내 꼴이 어찌 우스운지 크으윽 크으윽 숨이 넘어갈 듯 웃음소리도 나지 않고 눈물만 납니다 아이들은 무슨 일인가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경찰이 느닷없이 경찰강아지가 되는, 아이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혼자 미친 듯 웃고 있으니까요
11.21
아이들이 먼저 무엇이라고 물었는데 그 말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도 나이가 들면 하늘나라로 갈 거야 하늘에서 너희들이 오기를 기다리지 재미있게 놀려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이음이는 혼잣말인 듯 쳐다보지도 않고 ‘안 가’라고 딱 잘라 말합니다 순간 어찌할 줄 몰라 ‘할아버지는 구름 타고 놀러 다닐 텐데’라고 어물쩍 말을 돌리자, 부드러워진 표정에서 이음이 생각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울림이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하늘나라로 가는 거야’라고 이음이를 가르칩니다 지금 생각하면 ‘할아버지는 안 죽을 거야 너희들하고 오래오래 재미있게 놀 거야’ 라고 말할 걸 그랬습니다 이음이에게 죽음은 어떤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 곁을 떠나는 것이겠지 그 먼 나라를 잠깐 알게 된 나만 바라보고 따라갈 수 없었던 게지 ‘나의 라임오렌지’ 속 제제 말처럼 죽음은 마음속에서 지워지는 일일까 언제인가 아이들과 ‘심폐소생 놀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디에서 배워 왔는지 울림이는, 한 손으로는 내 코와 입을 틀어막고 배에 올라타 가슴을 짓누릅니다 이러다간 산 사람도 도로 죽을 것 같습니다 내가 눈을 꼭 감고 말도 안 하고 짐짓 죽은 척하자,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지 마’ 눈꺼풀을 뒤집으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던 이음이가 그 순간 죽음을 본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 ‘안 가’라고 했을까 내내 머리속을 떠다니던 그 답은, 나중에서야 울림이 말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없어지는 게 아니고 하늘나라로 가는 거야’ 아, 이음이는 없어지는 게 두려웠던 겁니다
새벽 첫잠을 깬 숲속 아기 새들, 울림이와 이음이와 우리가 재잘대는 소리가 집을 멀리 떠나온 이 곳에서도 들리는 듯합니다
알고 보니 우인이 언니(남편의 풀무학교 후배)의 부모님 이라고 하여서 만나 뵌 적은 없지만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었다.
우리가 이사 오기 전 부터 집 청소, 마당에 엄청난 찹조 제거(전에 살던 분들도 보기 어려 웠던 곳에 흙이 보일 정도로) 등등
물심양면 도와 주셨는데, 요즘은 아이들과 소울메이트가 되어 주셔서 아이들도 나도 기분좋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
요즘 울림이 이음이는 우리집 마당보다 할머니 할아버지네 마당에 가서 노는걸 더 좋아하고
창문 옆 계단에 앉아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오시기를 기다렸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발견하면 곧바로 뛰어 나간다.
최근에는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서먹해 하던 삼촌과 베프가 되어 웃음 소리가 우리 집 까지 들릴 만큼 신나게 놀고
할아버지랑 해가 다 넘어가 어둑어둑 해 질때 까지 산책하다 내가 "울림아 이음아 밥먹어~!!!" 부르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야 집으로 들어오곤 한다.
울림이 이마 찢어 진 날, 할머니 할아버지는 울림이 이음이를 저렇게 안고 업고 다니셨다ㅠㅠ
그러다 최근 아랫집 할아버지와 sns 친구가 됐는데 그곳에 할아버지의 글들,
특히 울림이 이음이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는 글들을 발견 하고는 마음이 너무너무 찡- 해져서
그 후로 나와 남편은 아랫집 할아버지의 글을 매일 기다린다.
어느날 할아버지 한테 "글이 너무 좋아서 매일매일 기다린다"고 했더니 감사하게도 다음 날 부터 더 자주 올려 주시는데,
이것을 나 혼자 보기에 아깝기도 하고(자랑하고 싶기도 하고ㅋ)
이 글들을 잘 모아 뒀다가 나중에 울림이 이음이가 볼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앞으로 블로그에도 차곡차곡 옮겨 보려 한다: )
2.
<아랫집 할아버지 일기>
9.24
비가 오지 않는데도 아이들은 늘 장화를 신고 우리 집으로 건너옵니다 판판한 오솔길을 두고 마치 모험하듯이 바위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와 도랑을 건넙니다 도랑이라고 하지만 비가 와야 바위 틈으로 물이 새어나와 며칠 동안 고여 있는, 가끔 소금쟁이가 뜨고 물맴이가 맴을 돌곤 하는 곳이지요
큰아이 ‘울림’이와 둘째 ‘이음’이와 늘 엄마 등에 업혀 있는 막내 ‘우리’, 아이들이 불편해 보여 제법 두꺼운 널빤지를 잘라 나무다리를 만들었어요 마침 바위 위를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아이들이 ‘아, 다리가 생겼구나!’ 좋아할 줄 알았는데 시큰둥한 표정으로 늘 그렇듯 질퍽거리는 흙을 밟고 도랑을 건넙니다
아이들은 내가 걱정하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놀라움으로 가득한 하늘나라에 살고 있어요 오늘은 짐을 싣는 외발 수레(밀차)에 울림이와 이음이를 태우고 숲길을 세 바퀴나 돌았어요
9.29
맏이 ‘울림’이와 말을 튼 때는 아마 그 일이 있은 뒤일 거예요 사근사근 말을 잘하는 둘째 ‘이음’이와는 달리 ‘울림’이는 뭘 물어봐도 금방 대답을 하지 않거나 짧게 한 마디 하지요 ‘아침엔 뭘 먹었니?’ ‘누룽지’ 어느 날은 ‘시리얼’ 그리곤 곧 말이 끊어지지요 ‘울림아, 이제 우리 집에 올 땐 혼자 와도 돼 맛있는 것 먹고 싶거나 만화영화 보고 싶을 땐 이음이한테 시켜 말하지 않아도 돼’ ‘할아버지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오늘은 길게 얘기했어요 그 일은 어제 아침에 일어났지요 울림이가 뛰어오다가 마당에 넘어졌어요 무척 아픈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어요 ‘울어도 괜찮아, 울림아’ 내가 말하자 순간 깜짝 놀란 듯 보였어요 물론 울지는 않았지만요 만약 내가 ‘아이구 형이니까 잘 참는구나’ 라고 말했으면 오랫동안 말을 트지 못했을지도 모르지요 이제는 울림이도 이음이처럼 다리가 아프다며 내 등에 업혀 산길을 올라요
10.8
큰바람이 지나가고 아까시나무 이파리들이 비에 젖어 여기저기 떨어져 있습니다 대나무비로 길을 쓸고 있는데 아이들이 달려와 저희들도 하고 싶다고 조릅니다 아이들에겐 대나무비가 힘에 겨워 팽이 돌듯 동그라미를 그리며 비척거립니다 ‘울림아, 우리 말타기 놀이 할까’ 가랑이 사이에 대나무비를 끼우고 울림이를 뒤에 태웁니다 금방 울림이가 앞에 타고 싶어해 자리를 바꾸어 달리다가 문득 장난이 치고 싶어 ‘이랴이랴’ 울림이 엉덩이께를 때립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말이잖아’ ‘아, 그렇구나’ 또 달리다가 잊어버린 척 엉덩이를 채찍질 합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다그닥 다그닥’ 죽마를 타고 오늘도 아이들과 숲길 한 바퀴를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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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이부자리에서 햄버거놀이를 합니다 나도 끼워달라고 조릅니다 맨 밑에 베개를 깔고 내가 엎드리면 그 위에 베개를 얹고 울림이가, 다시 울림이 위에 베개를 얹고 이음이가 엎드리면, 베개는 빵이 되고 나와 아이들은 고기가 됩니다 ‘아이고, 할아버지 죽겠다’ 짐짓 힘든 척 몸을 뒤집으면 마구 웃으며 아이들은 바닥에 나뒹굽니다 나를 잡고 겨우 일어나 앉은 아이들은 아그작아그작 베개를 뜯어 먹는 시늉을 합니다 햄버거 빵 사이에 들어있던 고기가 빵을 뜯어먹는 셈이지요 눈물이 날 만큼 웃으며 순간 아이들과 함께 나는 동화 속으로 들어갑니다
10.14
응급실 침대에 덩그러니 남은 울림이는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칩니다 엄마는 두 손 꼭 움켜쥔 채 내내 창문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울림이는 혼자 그 무서운 시간을 잘 참아냈습니다 그제 아침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음이와 나는 아궁이 앞에 있었는데, 고양이 밥을 준다고 뛰어갔다오다가 나무 난간 모서리에 부딪쳐 넘어진 채 울고 있었습니다 왼쪽 이마에서 솟구치듯 흐르는 피가 부드러운 무명베를 다 적실 만큼 크게 다쳤습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내는 저녁까지도 가슴이 뛴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이 나보고 웃었어요 내가 보일 때까지 서있다가 내가 보이지 않자 뒤돌아갔어요’ 깊게 팬 상처를 꿰매고 돌아오는 길 울림이가 내 품에 안겨 한 말입니다
10.15
‘어디 배꼽이 붙어 있나 보자’ 울림이와 이음이는 얼른 윗옷을 걷어붙이고 배꼽을 보여줍니다 아침에 만나자마자 나는 아이들 배꼽 검사를 합니다
‘옛날에는 산이 날아다녔어 몰래 날아다니다가 사람에게 들키면 그 자리에 멈춰 서지’ 엊저녁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할아버지가 재미있는 이야기 해줄까’ 하니까 아이들은 아주 신이 났습니다 빤히 얼굴을 쳐다보며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래도 안 되겠어 할아버지가 가르치던 아이들이 마구 졸라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줬는데 숨이 넘어갈 만큼 웃다가 배꼽이 빠져 큰일 날 뻔했어 그러곤 다신 재미있는 얘기를 해 달라고 하지 않았어’ ‘지금도 병원에 가면 배를 움켜쥐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너무 웃다가 배꼽이 빠진 사람들이야’ 그러건 말건 아이들은 이야기를 해 달라고 보채지만 나는 끝내 해 주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걱정되어서요
오늘은 다락방에서 ‘캄펑의 개구쟁이’를 읽어 주다가 우리 아이들 키울 때 생각이 나서 아이들을 이불에 눕히고 ‘담요그네’를 태워줍니다 손자가 없는 우리에게 이웃아이들이 찾아와 우린 할머니 할아버지로 살아갑니다
10.16
뒤뜰에서 꽃밭을 만들고 있는데 울림이가 책을 들고 뛰어왔습니다 사람을 쉽게 사귀지 못하고 책을 동무 삼아 살아온 터라 책을 들고 있은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갑니다 교사로 살아가는 내내 학교에서 내게 맡긴 일도 도서관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울림이가 들고 온 책 두 권 가운데 ‘사마귀’라는 자연 이야기 책을 빌렸습니다 사마귀는 일곱 차례 허물을 벗어야 어른이 되고 첫 허물을 벗은 어린 사마귀들은 서로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뿔뿔이 흩어진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날개로 자라날 곳을 가리키는 ‘날개싹’이란 말도 처음 들었습니다 아이들과 사귀려면 아이들이 쓰는 말을 알아야 하겠지요 ‘무슨 사우루스’ 라고 부르는 공룡 이름도 익히고 만화영화에 나오는 로봇자동차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어린이집에 가야 한다고 울림이가 불려간 뒤 아침을 먹고 있는데 부엌 문이 살짝 열리고 이음이가 혼자 나타났습니다 웬 일일까 이음이는 오늘 어린이집에 가지 않나 했는데 형이 왔다갔으니까 저도 할아버지 집에 들렀다 가야 한다며 아주 잠깐 문 밖에 머물렀다 돌아갔습니다)
10. 17
환청이었을까요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간다고 갔는데 ‘할아버지’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밭 가장자리까지 달려갔어요 아무도 없고 돌아와 혼자 땅콩을 캐며 이 행복한 순간도 스쳐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루종일 아이들이 없는 윗집은 텅빈 듯, 키 큰 야윈 거인처럼 쓸쓸히 서 있어요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가 떠올라요 제목도 줄거리도 잊었지만 어슴푸레 마지막 장면이 가슴에 남아 있어요 어느 날 손자와 동무처럼 지내던 할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돌아가셔요 엄숙한 장례식이 끝나고 아이 어머니는 조용히 아이를 불러 할아버지가 남긴 선물이 있다고 이야기해요 아이는 할아버지가 쓰던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상자를 찾아 조심스레 끈을 풀고 열어봐요 상자 속은 텅비어 있고 종이 쪽지엔 ‘너 이 놈, 또 나에게 속았지롱!’ 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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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어린이집 갔다 와서 놀아요’ 크게 소리치고 아이들이 차를 타고 떠난 뒤 집 안에 들어서자 ‘당신, 친구가 없어 쓸쓸하겠네’ 라며 아내가 놀립니다 요즘은 아이들 말을 배워, 갑자기 아이들이 나타날 때 ‘앗, 순간 이동’이라고 하면 아이들은 너무 좋아합니다 가끔은 아이들을 놀리려고 ‘너희들 누구니’라며 짐짓 처음 본 듯 물으면 이내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라고 되받아칩니다 그러다가 우리끼리 ‘사라져랏’이란 놀이를 만들어 놉니다 ‘사라져랏’이라고 말하면 그 동안 기억이 다 사라지는 것이지요 어제 저녁에도 산길을 한 바퀴 돌다가 울림이에게 ‘너 어디서 왔니?’ 라며 ‘사라져랏’ 놀이를 했습니다 ‘부영아파트’ 잇달아 ‘사라져랏’이라고 말하자 울림이는 ‘완주’ ‘엄마 뱃속’ ‘아기씨’라고 이어서 말합니다 다시 ‘사라져랏’이라고 말하자 울림이는 잠깐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하늘나라’라고 말하고는 곧 ‘할아버지,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와서 하늘나라로 가는 거잖아요’ 라며 자신있는 듯 크게 말합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 아이들을 키울 적에 큰아이 우인이에게 ‘우인아, 우린 이 세상에 잠깐 소풍 온 거’라고 했더니 ‘아빠, 소풍이 왜 이렇게 지루해’ 하던 우인이 말이 떠올라 혼자 배시시 웃습니다
10.18
‘당신이 뭐예요’ 아내와 이야기하다가 아내를 ‘당신’이라고 부르자 곁에 있던 이음이가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는 듯이 나무라는 말투입니다 ‘그럼 뭐라고 부르지?’ 생각이 나지 않는지 이음이는 선뜻 대답을 않다가 한참 만에 ‘할머니라고 해야지’라고 말하는데 자신이 없어 보입니다 놀이에 빠져 있으면 아이들은 가끔 나를 ‘아빠’라고 부르거나, 올해 네 살인 이음이는 친구에게 하듯 거의 ‘너’라고 부릅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그랬습니다 둘러서서 얘기하다 보면 학생들은 나를 ‘삼촌’이라거나 ‘아저씨’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교사로서 위엄이라든지 근엄함이든지 하는 것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길 없어 그랬겠지만, 나는 ‘아저씨’라고 불리는 것이 참 편안했습니다 나는 ‘학교아저씨’로 사는 꿈을 꾼 적이 많습니다 아이들 책걸상을 고쳐주고 유리창이 깨지면 갈아끼워주고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이 다니는 길을 깨끗이 쓸고 차를 몰 줄 안다면 학교버스 운전기사 일을 했어도 좋았겠지요 이 가을날 아이들을 태우고 쑥부쟁이 끄덕이는 ‘모래재’ 고개 넘어 반짝이는 억새꽃 물결을 가르고 노을바다로 풍덩 뛰어드는 꿈을 그려보아요
10.19
아이들과 만든 뒤뜰 꽃밭입니다 ‘할아버지 뭘 심을 거예요’ ‘음, 물망초랑 꽃양귀비, 초롱꽃 그리고 수선화도 옮겨심으려고’ ‘지금 같이 심어요’ ‘할머니가 씨를 부어 놓았으니까 나중에 싹이 나면 우리 같이 심자’ 꽃길도 내고 벽돌도 나르고 아이들과 일하다 보면 어느 새 일은 놀이가 됩니다 울림이는 윗주머니에 있던 유리구슬을 흙에 파묻습니다 ‘야, 구슬이 열리겠구나’ ‘할아버지, 구슬나무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네가 한 번 그려보렴’ ‘아이구, 이음이는 호미나무를 심었구나’ 이음이는 호미를 거꾸로 묻고 흙을 다지고 있습니다 꽃밭놀이도 싫증이 나면 우리는 언덕에 누워 있는 우산바랭이 풀줄기로 우산도 만들고 풀싸움도 하고 그러다 보면 날이 어둑어둑해집니다 울림이가 다짐하듯 묻습니다 ‘할아버지, 우리 나중에 꼭 같이 심어요’ ‘그럼’ ‘우리가 어린이집 가면은요’ ‘할아버지가 기다릴게’ 고개를 숙이고 흙장난을 하던 이음이가 장난스레 또 묻습니다 ‘우리가 자면은요’ ‘그래도 기다려야지’ 기다리다 보면 보드라운 아이들 ‘흙가슴’에도 눈부시게 빛나는 봄이 피어나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10. 20
가뭄 끝에 시원한 비바람 한 줄기가 몰고 오는 풍경이 그러할까요 아이들이 마당에 들어서면 꽃과 나무와 풀들이 수런수런 깨어나 일어서고 벌과 나비의 날개짓이 더욱 바빠져 공기의 흐름마저 바뀝니다 오늘 아침에도 울림이와 이음이가 한바탕 놀다 갔습니다 스스로 팽이가 되어 넘어질 때까지 빙그르르 돌고, 같은 그림을 맞추는 ‘메모리카드’ 놀이도 하고, ‘응애응애’ 기어다니며 ‘아기놀이’도 합니다 ‘아기가 되면 뭐가 좋지’ 라고 묻자 맨먼저 나온 대답이 ‘이를 닦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어요 ‘엄마가 안아준다’ ‘엄마 젖을 먹을 수 있다’ ‘몸집이 작아 안 들키게 숨을 수 있다’ ... 이런 놀이를 하며, 오늘도 나는 살며시 샛문을 열고 아이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갑니다
10. 21
무척 신이 났는지 아이들이 지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옵니다 오늘은 지우가 아이들과 함께 ‘베이블레이드’라고 부르는 태엽팽이를 가지고 놀고, 나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들깨를 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울림이가 윗밭으로 뛰어올라 와 소리칩니다
‘할아버지, 삼촌 수술해야 하겠어요 베이블레이드와 우리 옷을 다 먹어버렸어요’ 이어서 이음이와 지우가 비닐하우스 속으로 뛰어들고, 알고보니 지우가 태엽팽이와 옷을 먹는 척하며 윗옷 속으로 집어넣어 배가 불룩하게 나온 겁니다 장난은 그치지 않고 ‘이음이도 잡아먹어야지’하고 지우가 달려드니 이음이는 내 뒤로 몸을 숨기며 ‘싫어’ ‘나는 맛이 없어’ 라고 자지러질 만큼 놀랍니다
사람에게 마음을 다쳤는지 오랫동안 안으로 꼭꼭 걸어잠가 좀처럼 저를 열어 보이지 않던 지우, 울림이와 이음이가 손을 내밀어 ‘저만 알던 거인’에 나오는 동네아이들처럼, 겹겹이 둘러쌓아 둔 지우의 담장을 허물었나 봅니다 그건 그렇고 어느 틈에 슬그머니 사라진 이음이가 걱정입니다 지우 말을 그대로 믿었나 봅니다
울림이가 집으로 돌아가며, 코뚜레 놀이에 쓰던 병뚜껑과 비닐 끈 그리고 손톱만한 조약돌을 내게 맡깁니다 아이들은 내일이 되면 또 잊어버리겠지만 나는 ‘오늘’을 소중히 간직합니다
10.22
아궁이에 불을 지핍니다 마당을 씁니다 여기저기 아이들이 그어놓은 금이 남아있습니다 오늘은 지리산에서 질그릇을 빚으며 홀로 살아가는 ‘화개요 선생님’이 옵니다 천리포수목원에서 열리는 서정이 어머니 도예전을 함께 보러 가자며 이른 새벽 구례구역에서 기차를 타고 오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놀다 간 자리에는 늘, 장난감 그림책 새깃털 도토리 솔방울 조약돌 같은 것들이 남아있습니다 마당을 쓸며 문득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어떤 자국이 남아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갑니다 이 가을날엔 이슬 한 줌에 도토리 세 알 먹고 마시며 몸을 가볍게 하여 혼잣말처럼 ‘노을 지는 것이 예뻐요’ 라고 하던, 울림이와 함께 바라보던 서녘 하늘에 엷게 노을이 번질 때, 아이들이 마당에 그어놓은 금을 따라, 아이들이 뛰어오던 조붓한 도랑길을 걸어서 조용히 하늘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10.23
이음이가 울고 가는 바람에 미처 말하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내일은 먼 데서 손님이 와서 집에 없단다’고 우리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아이들이 다녀가지는 않았을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당에 남았을 아이들 발자국을 찾아봅니다 텅빈 길 위에는 가랑잎이 나뒹굴고 찬비가 흩뿌려 촉촉히 젖습니다 부옇게 흐린 하늘에 이음이가 신었던 노오란 고무신이 동동 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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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놀았으면 하는 아이들을 달래어 집에 바래다 줍니다 ‘울림아, 내일 꼭 우리 집에 놀러 와’ ‘안 오면요’ ‘그럼 할아버지가 엉엉 울거야’ 손을 잡은 채 장난스레 이야기하고 가는데, 아내 손을 잡고 뒤따라 오던 이음이가 달려와 내 손을 쥐더니 ‘할아버지 여기서 같이 살아요’ 라고 말합니다 나는 갑자기 마음이 슬퍼집니다 오늘은 마늘과 양파를 심을 밭에 거름을 내고 산길을 내려오면서, 이음이는 레몬 냄새가 난다고 했는데, 비목나무 잎을 손으로 비비어 냄새도 맡고, ‘땡꿀’이라 부르는 까마중 까맣게 익은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나는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지만 울림이와 이음이는 늘 나를 어린시절로 데려갑니다 맞선을 보고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혼인을 한 나와 아내는, 내 어릴 적 고향으로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내가 살던 집과 다니던 초등학교, 어머니와 개발(?조개)을 캐러 갔던 바닷가를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어린시절 생각이 나, 비탈길을 올라 학교 울타리에 난 개구멍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는데 아내도 괜찮다며 부드럽게 말리고 이제 그러기에는 너무 커 버려 그만두었던 기억이 납니다
10.24
‘쌔게(‘빨리’의 경상도 말) 와 봐요’ 아내가 불러서 마당을 쓸다가 성큼성큼 뛰어가니 혼잣말로 ‘왜 이래 나를 깜짝깜짝 놀래키노(놀라게 하냐)’ 하며 바라보는 밭둑에는 용담 꽃이 피어있습니다 아내가 늘 보고싶어 하는 꽃입니다 갈퀴에 할퀴어지고 낫에 아무렇게나 베어진 풀더미 속에 보랏빛 고운 등을 밝혔습니다 ‘당신이 부르니까 왔지 용담도 으아리도 저기 노오란 산국도’ 지리산이 불러 나도 ‘매화 꽃내 그윽한 골짜기’(악양면 매계리)에 흘러들어가서 살았고, 누구인가 애타게 손짓하여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울림이와 이음이도 여기까지 왔겠지요
10.25
사람 사이가 서먹서먹한 나는, 늘 아이들 속에 있거나 풀과 나무를 동무 삼아 지내왔어요 수업이 비는 시간엔 학교 뜰을 거닐거나 울타리 너머 논길에 쭈그려앉아 봄흙 냄새를 맡거나 풀꽃들을 찬찬히 살펴보았어요 순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던, 내 발길을 붙잡은 타래란도 처음 만났고, 메꽃과 큰메꽃은 꽃의 크기뿐만 아니라 잎의 생김새도 다르고, 흰제비꽃이 보랏빛 제비꽃보다 꽃내가 짙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밭농사를 지으면서부터 풀꽃들과는 사이가 멀어졌어요 언덕에 흐드러진 쇠별꽃 무리는 뜯기고, 밭에 날아와앉은 꽃마리 괭이밥 주름잎 지칭개 봄까치꽃 광대풀 들은 뽑히고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어 오지 않았어요 어느 새 도랑에 여울지는 여뀌나 고마리와도 사이가 뜸해졌는데, 호기심으로 가득 찬 울림이 이음이와 놀면서 풀꽃들이 속삭이는 소리도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강아지풀로 콧수염을 만들어 붙이고 질경이풀로 제기도 차고 옷에 붙는 도꼬마리 도깨비풀 쇠무릎지기 풀씨 이름도 가르쳐 주고 봄이 오면 찔레 새 순도 꺾어먹고 냉이꽃 마른 줄기로 꽃종도 만들어 차락차락 흔들며 놀겠지요
10.26
‘오늘 아침엔 뭘 먹었어’ ‘시리얼, 빵 그리고 으음 없어를 먹었어’ 울림이가 제법 장난말도 칩니다 ‘어떤 빵인데’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지 조금 기다렸다가 ‘어, 할아버지도 알잖아 구름빵, 구름빵처럼 푹신한’ ‘그랬구나’ 나도 알고 있습니다 지난 번 울림이이음이 엄마가 빌려준 그림책 ‘구름빵’을 읽었거든요 ‘구름빵’은 푸근히 안겨오는 빛그림(사진)을 곁들인, 아이의 마음과 엄마의 마음을 이어주는 하늘의 무지개 같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길 가운데 하나는 같은 책을 읽는 것입니다 울림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준다며 ‘도깨비를 빨아 버린 우리 엄마’ 라는 동화를 들려주는데 , 아무리 귀를 기울여 들어도 이야기 흐름이 자연스레 이어지지 않아 그저 고개만 끄덕인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울림이가 책을 빌려줘 읽고 나서는 동화 속 이야기 몇 마디만 던지더라도 서로 알아듣고는 신나게 떠들며 웃어댔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지만, 잠자리에서는 늘 팔베개를 하고는 동화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이 쓰신 ‘황소아저씨’는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여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들려 줬는데, 어느 날 슬그머니 이야기 속으로 우리 아이들을 등장시키자 두근거리는 가슴을 꼭 누르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던 지우 모습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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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금을 그어 놓고, 저 쪽은 ‘만화영화 속 세상’ 이 쪽은 ‘만화영화 밖 세상’으로 나눠 우리는 ‘만화영화 놀이’를 합니다 나는 흙바닥에 퍼질러 앉아 만화영화 속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구경합니다 한참 놀다가는 저희들도 모르게 이 쪽으로 건너와 공룡자동차를 가져갑니다 ‘야, 울림이 너 투명인간이냐’ 소리치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이 쪽 세상과 저 쪽 세상을 넘나들며 놉니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금을 넘어가, 싸우다 넘어진 이음이를 구출해 이 쪽 세상으로 건너옵니다 금은 굳어지고 높은 담이 되어 더는 두 세상을 넘나들지 못할 때 우리는 어른이 됩니다 어젯밤에는 울림이이음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서 오랫동안 놀다갔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할아버지 황금성 선생님 노랫소리는 대청마루에 가득 울려 퍼집니다 선생님은 이야기보다 더 많이 노래를 풀어 놓고 갔습니다 할머니 계순옥 선생님과 할아버지가 함께 부른 ‘옹달샘’ 맑은 물에서 마음껏 뛰놀며 울림이와 이음이 막내 ‘우리’는 곱디곱게 커가고 있습니다
3.
요즘 아이들을 보면서 작고 어리고 순수한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반짝반짝 빛나는지를 느낀다.
(모기->개미->벌->지네순으로 정신을 쏙 빼놓음. 개미때는 익숙해 바로 개미약을 설치하여 해결되고, 모기는 처음에 미친듯이 잡다가 나중에 산책하며 7방 한번에 물리고 적응됨. 벌은 매일 하루 네 다섯 여섯 마리가 집으로 들어와 119아저씨들의 도움을 빌려 해결, 지네의 악명은 익히 듣고 있었지만 실물을 처음 보고 기절 초풍 하는 줄ㅠㅠ 지네를 본 후 다른 벌레들은 아무 것도 아닌게 되었고, 그날 이후 다시 나타나진 않았지만 해결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벌벌 떨고 있음.)
이사 하루만에 친 거미줄 스케일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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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집 멍멍이 단이 하트 똥꾸몽
지금은 훌쩍 다가온 가을 날씨에 추위와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아침 저녘으로는 벌써 많이 추워져 긴팔 긴바지를 입고 자도 아침엔 춥다고 서로를 끓어 안는다.
2.
귀촌 6년차, 그렇게 고대하던 시골집 생활 인데 막상 진짜 이사를 하려고 하니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벌레, 추위, 쓰레기 처리, 아이들 등원 등등 안 그래도 애 셋 키우기 빠듯한 내 일상이 더 힘들어 지기만 하는건 아닐까 하는 걱정들.
아파트에서 불편하고 아쉬운 것들이 있었던 만큼 반대로 편하게 누려오던 것들이 막상 사라진다 생각하니 조금 두려웠다.
무엇보다 우리가 나오고 이제야 안정을 찾고 있는 나의 일상이 다시 요동칠 것을 생각하니 막막했다.
그런데 막상 이사를 와서 걱정하고 두려워 했던 것들을 하나씩 해결 해 나가 보니 거기서 오는 성취감과 자립심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성취감과 자립심이 내가 기대했던 자연이나 주택에서의 자유로움이 주는 행복 보다 나를 더 편안하게 해 준다.
아직은 좀 부족하지만 도시에서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지구를 살아가며 알아야 할 자연스러움에 대한 이치를 배워가는 중이다.
3.
이사와서 가장 신이난건 역시 우리 동그라미 삼형제: )
우리가 끝끝내 이곳으로의 이사를 성사 시킨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의 행복이었다.
이음이는 "이제 여기서는 뛰어다녀도 되고 소리 질러도 되지~"라는 말을 며칠 동안 입에 달고 다녔고,
울림이는 걱정하는 엄마아빠를 계속 옆에서 봐서 그런지 오기 전에는 자기도 덩달아 걱정 하더니
가장 빨리 적응하고(매일 아침 벌레 잡으러 감) 가장 신나 하는 것(와서 처음 일주일 정도 엄청나게 소리지르면서 다님) 같다.
우리도 마당으로 데리고 나가면 가만히 어딘가 보고있고, 특히 꼬꼬들 밥 줄때 업고 가서 구경 시켜주면 좋아라 한다.
오늘은 느닷없이 남편이 아이들 재우면서 개똥벌레 노래를 불렀는데
더 느닷없이 반딧불이 한 마리가 우리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놀랍고 신기한 경험.
(노래가 끝나고 어디론가 또 홀연히 떠났음. 이 말은 우리집 어딘가에 벌레들이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구멍이 있다는 말이기도 함)
남편은 이사를 오기 전에도 와서도 여전히 걱정 투성이 이지만, 내가 생각 했던 것 보다(어쩌면 나보다 더) 이곳에서의 만족도나 행복지수가 더 높아 보인다.